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2007-02-26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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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기 전에 뒤에서 기도를 하면서 복음 안에 있는 능력이 다시 한번 확인되어 지면서 그 어떤 자리들보다도 이 자리가 가장 축복된 자리가 아닌가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축복된 자리로 인도되셨습니다. 오늘 최고의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이 25절에 보면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로 준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이 복음으로 우리가 정말로 시작을 한다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분명하고 완전하게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된 응답과 열매가 나오게 되어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자신을 향해서 한번 질문을 해보길 바란다. 내가 정말로 복음을 아는가? 그냥 말하고 있는 복음,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정말로 올바른 복음을 알고 있는가?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던져보시고 내가 정말 영적인 문제를 알고 있는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 본다면 많은 응답들이 이미 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행복이 없는가? 그와 더불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고 살아가는가? 정말 내가 복음을 알고 있는가? 정말 영적인 문제를 알고 있는가? 이 사실을 안다면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답들이 내려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축복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 축복을 놓치고 살아갈 때도 있고 또한 이 복음을 계속 듣다 보니까 내가 복음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짜 복음의 비밀을 알면 알수록 여러분의 주위에서는 생명이 살아나고 생명이 심겨지게 되어있다. 진짜 이 복음의 참맛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여러분의 수준과 능력에 상관없이 여러분의 주위에는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거기에 힘이 나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정말 복음을 깨닫고 누리게 될 때 그 속에 참된 치유함이 일어나고 참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있다. 반대로 복음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면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영적인 고통 가운데 빠져나오지를 못하게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 영적인 고통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 견디지 못하니까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복음의 참맛을 보지 못하면 세상 앞에 서게 될 때, 현장 앞에 서게 될 때 불신자들이 멋있어 보이고 그래서 세상의 것이 좋아보이게 되어 있다. 사실은 알고 보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닌데, 세상의 것이 좋게 되어있고 교회에 다니는 것들이 별로 재미없어 보이게 되어진다. 교회에 대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실컷 다니면서도 교회에 대한 원망과 불평만이 늘어나고 결국엔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정말 참 올바른 복음을 알고 있는가? 지금 우리와 우리 주위에 영적인 문제로 고통하는 영적인 문제를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진정한 해답들을 이번 한주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가 복음 안에 다 설명되고 있다. 오늘 25절에 보면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간단한 짧은 구절이지만 이 안에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 안에 있는 축복과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그가 누구인가? 기생 라합이다. 이 기생 라합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 이 짧은 구절이지만 여기에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능력이 무엇이고 그 복음 안에 있는 축복과 그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라합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 무슨 말인가? 이스라엘 중에 함께 살았다는 말이다. 라합이 어떤 여자인가? 기생 여자이다. 이방 여인이다. 이방 여인이요, 기생 라합이었지만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축복. 이것이 사실은 우리들이 받은 축복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앉은 우리들이 받은 축복을 알라는 말이다. 엡2:12에 보면「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 우리가 어떤 자리였는가?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더라. 그러면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상관없는 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더니.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방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축복과 전혀 상관없는 자였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 안에 있는 자로, 그리스도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자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벧전2: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예수 믿는 자리에 있는 축복과 영광이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자리의 축복과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더니” 이 한 구절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에 이어서 수6장의 여리고성에 대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의 무너뜨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과 영광과 관련되어있다.
그래서 먼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수6장에 여리고성의 무너뜨림의 광경을 살펴보면 수6장에서 제일 중요한 중심 단어가 나온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13번이나 강조해서 나오는 것이 있는데 언약궤, 법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인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 언약궤, 법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고서도 침묵하면서 성을 돌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지도자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여리고성을 돌았다. 그것도 한바퀴가 아니다. 하루에 한바퀴씩 6일 동안 돌고 제7일에는 7바퀴를 돌라는 명령이었다. 물론 그것이 여호수아의 명령이기도 했다. 10절에 보면「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물론 여호수아가 일러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면서 침묵하고 돌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들이 침묵하고 돌았는가하면 바로 그 여리고 성을 돌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11절을 보라.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번 돌게 하니라」언약궤, 법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지난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신 증거가 언약궤, 법궤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요단을 건넜을 때도 법궤를 들고 요단을 건넜다. 오늘 여리고성을 돌때도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여리고 성을 돌았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분명한 일을 모르면서도 침묵하면서 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우리 인생의 모든 답들이 다 내려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왜 13번이나 침묵하면서 돌았겠는가? 13번의 숫자에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 13번이나 침묵하면서 돌았는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절대 이 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리고성을 13번 실제로 쳐다보고서 그리고 나서야 그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공격할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심령 속에 마음속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명령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것이다. ‘여리고성, 그것은 내 힘과 방법과 내 노력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사람의 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구나’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유일성만을 붙잡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칫 잘못이해하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 자신의 모은 것을 포기하고 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라하고 하는 것은 그 속에서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데 그리스도만 바라보는가? 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되어있다. 내 자신을 회복하게 되어있다. 명상과 요가, 기 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찾자고 많은 지식인들이 빠지고 있다. 그것이 현장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언제 진정 내 자신을 찾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회복하게 되어있고 나를 찾게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때 가장 강해지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내가 가장 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다윗이 알았기 때문에 시편에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속에서 가장 강해지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창조의 원리를 알고 있지 않는가?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하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고 새는 공중에 살아야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내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는 것이고 참된 축복,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세상의 축복 이전에 진정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승리는 내가 이루는 일에서 오지 않는다. 승리는 내가 이루는 일에서 오지 않는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승리가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문제, 여리고의 문제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길 원하신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여리고 같은 문제, 우리 안에 있는 문제가 있고 우리 밖에 있는 문제가 있고 우리 가정과 가문에 있는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동안, 특별히 우리가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죽으셨다가 살아나셔서 지금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고 그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승리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길 원하신다. 이 축복을 붙잡길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길 원하신다.
두 번째로 왜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가? 이 여리고를 무너뜨린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시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소원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왜 여리고성을 정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여리고성을 정탐하게 한 것은 여리고성을 멸망케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구원을 받을 백성이 있기 때문에 그 성을 정탐하게 하셨다. 여리고성은 어차피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너질 성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걸음 속에 홍해가 있었고 요단강이 있었다. 홍해도 갈라지고 요단강도 갈라졌다. 그 앞에 있는 여리고성도 당연히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가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 구원을 받은 것은 필연적이다. 왜 구원을 하셨냐하면 가나안땅,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구원하셨다. 그 세계복음화를 향해 나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가는 모든 걸음 앞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사건은 당연히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번거롭게 여리고성을 정탐케 하셨는가? 그 성 안에 라합, 그의 가족들이 구원받은 것이 22, 23절에 나온다. 23절에「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왜 번거롭게도 여리고성을 정탐케 하셨는가? 마땅히 무너질 성인데도 왜 정탐하게 하셨는가? 그 성 안에 구원받을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이 사실에 눈이 열려지게 될 때 세상, 현장을 누리게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소원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한 나라를 흥하게 하시고 패하게도 하신다.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한 사람을 세우시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는 것이, 한 나라와 한 왕과 한 사람을 세우고 망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딤후2:13에 보면「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그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하셨다. 아낌없이 다 하셨다.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하게 집착하게 되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구원을 이끌어 가시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우리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셔서 모든 피와 물을 다 쏟으신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미쁘신 뜻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쏟으셨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축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셨다. 심지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건지셨다. 지상 최고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이루신 역사가 있다면 구원의 역사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합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은 이 라합이 우리 자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성경에 보면 요4장의 사마리아 성의 수가성 여인도 마찬가지이고, 거지 바디메오도 마찬가지이고, 삭개오도 마찬가지이고, 막달라 마리아,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진짜 구원받을 수 없는 백성인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는 축복된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43:1에「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우리를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 엡1: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구원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멸망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시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당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에게는 가치있는 사람이다.
세 번째로 구원 이후에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25절에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라합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 서론 중에 말씀을 드렸지만 멸망 받을 여리고성의 이방 여인 라합, 기생 라합이다. 본문에 기생 라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요1:12에「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신분 자체가 변화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가? 요5:24에 보면「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여리고성의 이방 여인인 기생 라합,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더니. 완전히 신분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는 말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있는 라합의 생애에 영광과 자랑과 보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하면 구원받은 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신다. 무엇 때문인가? 제자 삼아서 세계복음화를 하기까지, 그래서 우리의 걸음 앞에 제자를 만나게 하실 것이고, 그 제자를 들어 세움으로 말미암아 기어코 이 땅에 세계복음화의 응답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애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 이유이다. 이 사실을 붙잡길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라합이 간직했던 구원의 영광과 축복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구절이 신약에 나오는데 마1:1에 나오는데「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세계라는 말은 족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족보에 누가 오르느냐? 라합이 오르고 있다. 마1:5에 보면「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다윗의 족보에 오른 것이 라합이다. 이 라합이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되어지는 엄청난 축복을 누린 것이다. 히11장에 보면 기생 라합이라고 나와 있고 오늘 본문에도 기생 라합이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기생이라는 말이 빠져있다. 왕의 족보에 올라와 있으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러면서 족보를 이야기하는데 기생이라는 말이 빠져있는 것은 기생이 아니라 왕의 족보에 올라있기 때문에 기생이라는 것을 빼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생 라합이 왕족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는 순간 우리에게 축복된 것을 선언 하셨는데. 벧전2:9에 보면「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모든 현장을 살리라고, 모든 세상을 살리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권을 주셨다. 기생 라합이 기생의 신분이 아니라 왕족의 족보에 오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약속 밖의 사람이었는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살리라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삼상2:8 한나가 한을 가지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고백을 한 내용이다.「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고 현장을 정복하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왕 같은 제사장의 축복이다. 절망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눈물 흘릴 필요도 없다. 어지러운 세상을 보면서 짜증을 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왕같은 제사자의 신분을 가진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살리고 정복하길 원하신다. 2007년 한해에 현장정복, 경제정복, 문화정복의 축복을 언약으로 주셨는데 이 축복을 어떻게 누리는가? 우리에게 주신 신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축복하셨다. 이것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 축복을 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 이 자리에 서기 전에 뒤에서 기도를 하면서 복음 안에 있는 능력이 다시 한번 확인되어 지면서 그 어떤 자리들보다도 이 자리가 가장 축복된 자리가 아닌가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축복된 자리로 인도되셨습니다. 오늘 최고의 하나님의 최고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이 25절에 보면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로 준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이 복음으로 우리가 정말로 시작을 한다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분명하고 완전하게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된 응답과 열매가 나오게 되어있다. 오늘 아침에도 새벽시간에 말씀을 드렸지만 자신을 향해서 한번 질문을 해보길 바란다. 내가 정말로 복음을 아는가? 그냥 말하고 있는 복음,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정말로 올바른 복음을 알고 있는가? 자신에게 먼저 질문을 던져보시고 내가 정말 영적인 문제를 알고 있는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던져 본다면 많은 응답들이 이미 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행복이 없는가? 그와 더불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고 살아가는가? 정말 내가 복음을 알고 있는가? 정말 영적인 문제를 알고 있는가? 이 사실을 안다면 여기에 대해서 분명한 답들이 내려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축복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 축복을 놓치고 살아갈 때도 있고 또한 이 복음을 계속 듣다 보니까 내가 복음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짜 복음의 비밀을 알면 알수록 여러분의 주위에서는 생명이 살아나고 생명이 심겨지게 되어있다. 진짜 이 복음의 참맛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여러분의 수준과 능력에 상관없이 여러분의 주위에는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되어있다. 거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니까 거기에 힘이 나오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정말 복음을 깨닫고 누리게 될 때 그 속에 참된 치유함이 일어나고 참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있다. 반대로 복음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면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영적인 고통 가운데 빠져나오지를 못하게 되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목숨을 끊기도 한다. 무엇 때문인가? 이 영적인 고통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 견디지 못하니까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복음의 참맛을 보지 못하면 세상 앞에 서게 될 때, 현장 앞에 서게 될 때 불신자들이 멋있어 보이고 그래서 세상의 것이 좋아보이게 되어 있다. 사실은 알고 보면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닌데, 세상의 것이 좋게 되어있고 교회에 다니는 것들이 별로 재미없어 보이게 되어진다. 교회에 대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실컷 다니면서도 교회에 대한 원망과 불평만이 늘어나고 결국엔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정말 참 올바른 복음을 알고 있는가? 지금 우리와 우리 주위에 영적인 문제로 고통하는 영적인 문제를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가? 여기에 대한 진정한 해답들을 이번 한주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가 복음 안에 다 설명되고 있다. 오늘 25절에 보면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간단한 짧은 구절이지만 이 안에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 안에 있는 축복과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그가 누구인가? 기생 라합이다. 이 기생 라합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 이 짧은 구절이지만 여기에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능력이 무엇이고 그 복음 안에 있는 축복과 그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라합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 무슨 말인가? 이스라엘 중에 함께 살았다는 말이다. 라합이 어떤 여자인가? 기생 여자이다. 이방 여인이다. 이방 여인이요, 기생 라합이었지만 멸시받고 천대받는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축복. 이것이 사실은 우리들이 받은 축복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앉은 우리들이 받은 축복을 알라는 말이다. 엡2:12에 보면「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 우리가 어떤 자리였는가?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더라. 그러면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는 외인이요, 상관없는 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에서는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더니.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방인이었는데 하나님의 축복과 전혀 상관없는 자였는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 안에 있는 자로, 그리스도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자로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벧전2: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예수 믿는 자리에 있는 축복과 영광이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된 자리의 축복과 영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더니” 이 한 구절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에 이어서 수6장의 여리고성에 대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있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의 무너뜨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붙잡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축복과 영광과 관련되어있다.
그래서 먼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수6장에 여리고성의 무너뜨림의 광경을 살펴보면 수6장에서 제일 중요한 중심 단어가 나온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13번이나 강조해서 나오는 것이 있는데 언약궤, 법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인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 언약궤, 법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록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고서도 침묵하면서 성을 돌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지도자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여리고성을 돌았다. 그것도 한바퀴가 아니다. 하루에 한바퀴씩 6일 동안 돌고 제7일에는 7바퀴를 돌라는 명령이었다. 물론 그것이 여호수아의 명령이기도 했다. 10절에 보면「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물론 여호수아가 일러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단순히 그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모르면서 침묵하고 돌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그들이 침묵하고 돌았는가하면 바로 그 여리고 성을 돌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는가? 11절을 보라.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번 돌게 하니라」언약궤, 법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지난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신 증거가 언약궤, 법궤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요단을 건넜을 때도 법궤를 들고 요단을 건넜다. 오늘 여리고성을 돌때도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서 여리고 성을 돌았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분명한 일을 모르면서도 침묵하면서 돌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우리 인생의 모든 답들이 다 내려지게 되어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왜 13번이나 침묵하면서 돌았겠는가? 13번의 숫자에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 13번이나 침묵하면서 돌았는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절대 이 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여리고성을 13번 실제로 쳐다보고서 그리고 나서야 그들의 힘으로는 절대로 공격할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심령 속에 마음속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정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명령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실 수 없는 것이다. ‘여리고성, 그것은 내 힘과 방법과 내 노력과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사람의 방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구나’ 이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여리고성을 돌게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유일성만을 붙잡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칫 잘못이해하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내 자신의 모은 것을 포기하고 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라하고 하는 것은 그 속에서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데 그리스도만 바라보는가? 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땅의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되어있다. 내 자신을 회복하게 되어있다. 명상과 요가, 기 운동을 통해서 자신을 찾자고 많은 지식인들이 빠지고 있다. 그것이 현장의 모습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언제 진정 내 자신을 찾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회복하게 되어있고 나를 찾게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때 가장 강해지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내가 가장 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다윗이 알았기 때문에 시편에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 속에서 가장 강해지고 자기 자신을 회복하고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 속에서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창조의 원리를 알고 있지 않는가?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하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고 새는 공중에 살아야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내 잃어버린 자신을 찾고 내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해지는 것이고 참된 축복,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세상의 축복 이전에 진정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승리는 내가 이루는 일에서 오지 않는다. 승리는 내가 이루는 일에서 오지 않는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승리가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문제, 여리고의 문제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길 원하신다. 우리가 갖고 있는 여리고 같은 문제, 우리 안에 있는 문제가 있고 우리 밖에 있는 문제가 있고 우리 가정과 가문에 있는 문제들이 있다. 그 문제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동안, 특별히 우리가 붙잡고 있는 동안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죽으셨다가 살아나셔서 지금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고 그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될 때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참된 승리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린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길 원하신다. 이 축복을 붙잡길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주길 원하신다.
두 번째로 왜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가? 이 여리고를 무너뜨린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기시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소원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왜 여리고성을 정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여리고성을 정탐하게 한 것은 여리고성을 멸망케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 구원을 받을 백성이 있기 때문에 그 성을 정탐하게 하셨다. 여리고성은 어차피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너질 성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걸음 속에 홍해가 있었고 요단강이 있었다. 홍해도 갈라지고 요단강도 갈라졌다. 그 앞에 있는 여리고성도 당연히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가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 구원을 받은 것은 필연적이다. 왜 구원을 하셨냐하면 가나안땅,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구원하셨다. 그 세계복음화를 향해 나가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가는 모든 걸음 앞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와 사건은 당연히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번거롭게 여리고성을 정탐케 하셨는가? 그 성 안에 라합, 그의 가족들이 구원받은 것이 22, 23절에 나온다. 23절에「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왜 번거롭게도 여리고성을 정탐케 하셨는가? 마땅히 무너질 성인데도 왜 정탐하게 하셨는가? 그 성 안에 구원받을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이 사실에 눈이 열려지게 될 때 세상, 현장을 누리게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소원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한 나라를 흥하게 하시고 패하게도 하신다.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한 사람을 세우시게 하시고 망하게 하시는 것이, 한 나라와 한 왕과 한 사람을 세우고 망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이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딤후2:13에 보면「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그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하셨다. 아낌없이 다 하셨다. 구원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강력하게 집착하게 되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구원을 이끌어 가시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다. 우리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셔서 모든 피와 물을 다 쏟으신 것이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미쁘신 뜻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쏟으셨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축복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셨다. 심지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를 건지셨다. 지상 최고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이루신 역사가 있다면 구원의 역사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합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은 이 라합이 우리 자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성경에 보면 요4장의 사마리아 성의 수가성 여인도 마찬가지이고, 거지 바디메오도 마찬가지이고, 삭개오도 마찬가지이고, 막달라 마리아,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진짜 구원받을 수 없는 백성인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하는 축복된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43:1에「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우리를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 엡1: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구원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멸망이 하나님의 소원이 아니라 구원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소원이시다. 그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당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에게는 가치있는 사람이다.
세 번째로 구원 이후에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25절에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라합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 서론 중에 말씀을 드렸지만 멸망 받을 여리고성의 이방 여인 라합, 기생 라합이다. 본문에 기생 라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요1:12에「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완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신분 자체가 변화되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이 무엇인가? 요5:24에 보면「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여리고성의 이방 여인인 기생 라합,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더니. 완전히 신분이 변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다는 말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있는 라합의 생애에 영광과 자랑과 보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하면 구원받은 자의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더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내주하신다.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신다. 무엇 때문인가? 제자 삼아서 세계복음화를 하기까지, 그래서 우리의 걸음 앞에 제자를 만나게 하실 것이고, 그 제자를 들어 세움으로 말미암아 기어코 이 땅에 세계복음화의 응답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애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 이유이다. 이 사실을 붙잡길 바란다.
그뿐만 아니라 라합이 간직했던 구원의 영광과 축복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구절이 신약에 나오는데 마1:1에 나오는데「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세계라는 말은 족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족보에 누가 오르느냐? 라합이 오르고 있다. 마1:5에 보면「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다윗의 족보에 오른 것이 라합이다. 이 라합이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되어지는 엄청난 축복을 누린 것이다. 히11장에 보면 기생 라합이라고 나와 있고 오늘 본문에도 기생 라합이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기생이라는 말이 빠져있다. 왕의 족보에 올라와 있으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러면서 족보를 이야기하는데 기생이라는 말이 빠져있는 것은 기생이 아니라 왕의 족보에 올라있기 때문에 기생이라는 것을 빼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생 라합이 왕족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는 순간 우리에게 축복된 것을 선언 하셨는데. 벧전2:9에 보면「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모든 현장을 살리라고, 모든 세상을 살리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왕권을 주셨다. 기생 라합이 기생의 신분이 아니라 왕족의 족보에 오른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약속 밖의 사람이었는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살리라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다. 삼상2:8 한나가 한을 가지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고백을 한 내용이다.「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고 현장을 정복하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왕 같은 제사장의 축복이다. 절망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고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눈물 흘릴 필요도 없다. 어지러운 세상을 보면서 짜증을 낼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왕같은 제사자의 신분을 가진 우리를 통해서 세상을 살리고 정복하길 원하신다. 2007년 한해에 현장정복, 경제정복, 문화정복의 축복을 언약으로 주셨는데 이 축복을 어떻게 누리는가? 우리에게 주신 신분,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 축복하셨다. 이것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 축복을 누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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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4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143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142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141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140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139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138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137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
1136 |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 단6:16-28 | 2025-01-12 | |
1135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단5:17-31 | 2025-01-05 | |
1134 | 땅의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 단4:28-37 | 2024-12-29 | |
1133 | 완전한 승리를 내 것으로 누리는 성탄 | 눅2:8-14 | 2024-12-22 | |
1132 | 언약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계시는 하나님 | 단 3:8-18 | 2024-12-15 | |
1131 | 손대지 아니한 돌 | 단2:25-35 | 2024-12-08 | |
1130 | 뜻을 정한 자 | 단1:1-9 | 2024-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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