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2007-04-01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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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어있습니다. 오늘도 이 한날 온전히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큰 위로하심이, 큰 축복하심이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길 축원합니다.
오늘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받길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것을 주셨다. 그 완전한 것이 바로 복음이다. 모자라지 않고 완벽한 것을 주셨는데 그게 바로 복음이다. 그래서 이 복음을 누리는 만큼 정복하게 되어있다. 그릇을 준비하는 만큼 응답받게 되어있다. 오늘 한날도 참된 복음 안에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모든 관계된 현장을 정복하는 축복이 있길 축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있다면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이다. 바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고 내가 사는 이 엄청난 축복된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의 싸움의 원리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싸움의 원리는 다른 것을 우리가 보게 된다. 세상의 싸움은 승리하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다.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다. 그러나 영적인 싸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싸움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기보다는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싸움은 이기고 나서 힘이 빠지고 싸우면 싸울수록 피곤하고 한계에 빠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싸움은 싸울수록 힘이 난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온 힘과 정성을 다 모으고 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패배자가 있어야 한다. 간단한 예로 직장 안에서 승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떨어뜨려야 내가 승진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의 원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이고 다른 사람 패배시키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응답을 주면서 내가 사는 싸움이 바로 영적인 싸움이요 성경에서 말하는 싸움이다. 그래서 벧전2:9에 보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위해서는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이 영적인 싸움은 세상에서 말하는 싸움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남부지역을 정복하게 되는 역사가 나와 있다. 특별히 25절에「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여기에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무슨 말인가? 이 승리를 각자가 누려야 된다는 사실이다. 개개인이 즐겨야함을 말씀하고 있다. 이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 한사람도 빠짐없이 관계된 모든 현장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개개인들이 그 영적인 싸움에서 그 참된 승리의 축복을, 정복의 축복을 누리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분문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영적인 축복의 비밀을 누릴 수 있는가를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어제 핵심에서 제목이 <바꾸어야 세상을 살릴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주셨다. 본론으로 세 가지 바꾸어야 할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신분부터 바꾸라. 두 번째로 생각을 바꾸라. 세 번째로 눈을 바꾸라 라는 내용으로 핵심이 전달되었다. 그 제목을 그대로 해서 말씀을 생각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신분부터 바꾸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신분이 바뀌었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세 번째로 눈을 바꾸어야 한다. 실제적인 정복의 축복을 우리 개개인들이 모든 한사람 한사람이 이 정복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첫 번째로 신분을 바꾸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가나안땅의 다섯 왕이 연맹을 맺어서 기브온 거민 때문에 이스라엘과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가나안땅 다섯 왕이 연합으로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살기위해서 이스라엘 안에 들어온 기브온 거민들을 욕하지 아니하시고 결국 그 기브온 거민들을 향해서 지난 시간에 보았던 것처럼 태양과 달을 멈추는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게 된다. 무엇 때문인가? 이 기브온 거민이 언약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신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아야 될 언약 안에 들어온 거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기브온 거민을 향해서 태양과 달을 멈추시는 엄청난 사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언약 앞에 꼼짝 못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언약 안에 신분부터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아무렇게나 일을 하지 않으신다. 분명히 말씀을 주시고, 다시 말해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성취시키셨고 앞으로 그 언약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절대 그냥 일을 해나가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언약부터 먼저 주시고 말씀부터 먼저 주시고 그 말씀대로 행하시고 앞으로 그 말씀을 성취시켜 나가신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언약부터 주셨다. 그것이 창1:27-28이다. 하나님의 형상따라 지어진 아담과 하와에게 28절에 축복을 주셨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언약이다. 이 엄청난 언약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것이 자유의지인데 그 자유의지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하나님을 떠났다. 그것을 가지고 죄라고 그 죄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의 언약을 잃어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은 바로 그 언약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답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창3:15, 성경 전체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이 정말 이 말을 알아듣는 순간에 여러분의 배후에 역사하는 모든 흑암의 세력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분명히 말씀했다.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무슨 말인가? 사람의 후손이 아닌, 아담의 후손이 아닌.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 다시 말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같은 말이다. 성령으로 잉태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다 같은 말이다.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단의 권세를, 사단의 머리를 깨뜨려버릴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을 놓쳐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은 바로 그 언약을 회복할 답을 주셨는데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언약을 붙잡은 아담이 성공했다.
그런데 창4장에 보면 이 언약을 가인이 놓쳐버렸다. 그래서 제사 드리는 부분에 있어서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에 화를 내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최초의 순교이면서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비참한 비극이 시작된 것을 보게 된다. 무슨 말인가? 언약을 놓쳐버리게 될 때 사단의 밥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언약을 또한 놓쳤을 때 하나님이 또 이 언약을 회복시키는 방주의 언약을 말씀하셨고, 이 언약을 놓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다. 여기에서 언제 빠져나왔는가? 출3:18에 희생제사, 언약이다. 희생제사 그 언약이 더 구체화 된 것이 출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이다. 언약이다. 이 언약을 붙잡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사단의 속에서, 노예 속에서 빠져나온 것을 보게 된다. 이 언약을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도 주셨다. 그 언약, 말씀을 담은 언약궤를 주셨고 광야를 가는 동안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게 된다. 출24자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를 하시고 그 언약궤 안에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넣으시고 그 언약궤가 움직여지는 곳마다 하나님이 기적으로 역사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언약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이 언약궤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고 서게 되면 같이 서게 되는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된다. 이 언약궤를 가지고 요단을 건너고 이 언약궤를 가지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이 언약궤를 가지고 가나안땅을 정복했고 이 언약궤를 가지고 가나안땅에 거하는 7족속 31왕을 멸하는 엄청난 역사들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인도해 나가신다는 사실. 하나님은 스스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씀을 주시고 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그 중심으로 해서 모든 역사를 움직여 나가신다. 이것을 훈련시키시고 가르친 것이 광야사건이었다. 이 언약을 따라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이 언약을 붙잡고 기도했다. 행1:1-12에 언약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가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란 증거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그 분이 세계복음화를 하기 위해 재림주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언약을 붙잡은 마가다락방 교회가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행1:12-14에 보면 언약을 붙잡고 전혀 기도에 힘썼다. 그때 행2장에 보면 불과 같은 바람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임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15개 나라가 와있게 되면서 그 15개 나라의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현장에 3000제자가 세워지고 그 힘을 가지고 초대교회는 날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기도하기 위해, 또 떡을 떼며 교제하면서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다고 했다. 언약을 붙잡고 기도한 초대교회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로 헬라 문화를 정복하게 되었고 그 언약을 붙잡고 기도하는 초대교회가 바리새의 사상을 꺾고 그 막강한 로마까지도 정복하는 축복을 누렸다. 무슨 말인가? 언약 안에 모든 것을 살리고 정복하는 비밀이 있다. 그 언약이 우리에게 까지 왔다.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기 직전에 약속하신 부분이 있다. 행1:4-5에 보면「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관심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 어떻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약속으로 주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령이다. 언약으로 주신 것이 있다. 그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 약속 하신 것이 무엇인가?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 언약이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언약을 붙잡게 될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되어있다. 이 언약을 붙잡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하나님은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게 되어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약 안에 들어와야 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분부터 바꾸어야 되는 것이다. 시1:1-6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거기에 의인과 악인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바르게 살고 열심히 살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 의인인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언약 안에 있느냐, 언약 밖에 있느냐이다. 아무리 바르게 살고 경견하게 살고 열심히 산다고 할지라도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은 악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비록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언약 안에 있는 자는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의인에 대한 축복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중요한 것은 언약 가진 백성을 하나님은 놓치시기 않으신다. 오늘 여기에 기브온 거민, 비록 이방인이었다.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왔다. 그 기브온 거민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기 위해서 태양과 달을 멈추시는 엄청난 기적을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가운데 들어갔다. 그 풀무불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어느 정도로? 머리카락 하나까지 그을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다니엘이 신상에 절하지 않는 것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갔다. 그 사자 굴에 들어갈 다니엘, 언약을 가진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자 굴에 하늘군대,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완벽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신 사실을 보게 된다. 신약시대 전도자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가이사 앞에 서야하리라. 언약을 가졌다. 이 언약 가진 바울에게 유라굴로 광풍이라는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원의 여망마저 완전히 끊어진 그러한 위기를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가진 바울을 찾아오셔서 풍랑 가운데 찾아오셔서 바울을 들으셔서 로마를 정복하는 역사를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언약가진 자를 찾아가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언약 안에서 신분부터 바꾸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와 더불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약 안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징벌하시는지 보여주고 계신다. 다섯 왕들이 연합을 해서 쳐들어왔을 때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이 다섯 왕들이 전쟁에서 지게 된다. 그래서 이 다섯 왕들이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굴에 들어가서 은신처를 삼고 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발각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로 입구를 막아서 비참하게 처형시키는 것이 본문에 나온다. 16-18절에「16그 다섯 왕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17혹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가로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의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18여호수아가 가로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나중에 다 무찌른 다음에 여호수아가 그 다섯 왕을 끌어낸다. 22절에 보면 “그 다섯 왕을 내게로 끌어내라” 24절에 보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그 다섯 왕의 목을 밟도록 하는 것이 나온다.「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그리고 나서 여호수아가 이 다섯 왕들을 결국은 그 다섯 나무 가지에 해가 지도록 매어달게 된다. 27절에 보면「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하매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리어 그들의 숨었던 굴에 들여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숨으러 들어갔던 자기의 은신처가 되어질 줄 알고 숨었던 그 굴이 자기들의 매장지가 되었다.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나무에 달아 죽이고 해가 지도록 나무에 달아두었다가 그 시체를 끄집어 내려서 자기 들이 숨었던 그 굴에 넣게 된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할 줄 알고, 성공할 줄 알고 무언가 열심히 노력을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실패시키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오히려 숨으려고 들어갔던 그 은신처가 매장지가 되어지는, 이것이 불신자들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모든 것 사력을 다해서 열심히 달려가지만 결국은 지식, 성공, 명예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의 삶이다. 거기에 우리가 부러워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얻을 수가 있다. 잠시잠깐 누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영원한 승리를 주지는 못한다. 욥1:20-22에 불신자 상태에 대해서 말하기를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간다고 했다. 벌거벗은 몸으로 왔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골2:8-9에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지식에 속지 말라고 했다. 지식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지식과 철학과 어떤 속임수로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지식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러나 언약 밖에 있는 지식은 그 지식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된다. 물론 조금은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평안과 행복을, 절대적인 행복을 줄 수 없다. 눅16:19-31에 보면 부자의 비유가 나온다. 부자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날마다 잔치를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고. 잠시잠깐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구원과 생명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그 영혼 속에는 참 행복이 없는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이고 내세가 없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불신자들의 삶이 그러한 것이다. 잠시잠깐 무언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여 지는 것에 빠질 수 있고 그 부분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행복과 평안을 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 안에 절대적인 행복이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먼저 신분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하다. 물질도 명예도 필요하다. 그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언약 밖에서의 물질, 지식, 명예는 결국 그것이 자신의 무덤이 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결국은 실패와 저주와 재앙 가운데 빠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절대적인 행복이 있고 환경과 문제와 상관없이 절대적인 행복이 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하나님이 여셨는데 그 길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계3:20에「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가장 중요한 신분부터 바꾸시는 축복이, 신분이 바뀌어졌다면 하나님의 소원과 계획에 방향 맞추게 될 때 거기에 참된 평안과 행복이 오게 된다. 이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두 번째로 생각을 바꾸라. 어떤 생각을 바꾸는가? 우리가 신분이 바꾸어졌다면 신분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하겠다는 것, 내가 내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 우리가 신분이 바뀌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신앙생활이 왜 어려운가? 신분이 바뀌어지기 전에 내 열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종교생활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 순간부터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붙잡고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시는 것이고 종교는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기준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요일5:11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그리고 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다. 요5:24에 보면「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래서 엡2:8에「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분명히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편에서 출발하셨고 하나님의 은혜가 기준이다.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내 열심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브온 거민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것을 보게 된다. 19절에 보면「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 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하나님이 싸우는 싸움을 보게 된다. 21절에 보면「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으나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이기 때문에. 어떤 분이 교회 안의 인간관계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변명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되는지. 가만히 두니까 자꾸 말을 만들어내서 자꾸 어렵도록 한다고 하면서 난감하고 갈등이 일어난다고 말을 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이 우리가 해결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서 해결해야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변명도 하지 말고 다른 이야기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이야기를 해드렸다. 악한 사단이 사단의 시험에 걸려들면 말을 가지고 계속 꼬리의 꼬리를 물게 하면서 내가 위해서 하는 말도 그 말을 사단이 이용을 하면 더 꼬이게 하고 더 갈등을 가지고 오고 더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완벽하게 해결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오늘도 찬양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능한 손을 들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해결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약속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편에서 노력하고 애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누림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누리는 것이다. 이 참된 우리의 생각들이 바뀌어지는 은혜를 입길 바란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이 생각이 바뀌어지길 바란다.
세 번째로 눈을 바꾸라. 진짜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은 현장에 있다. 정말로 멸망 받는 이 땅의 문화가 개혁되어지길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이다. 이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에 상관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현장의 황금어장이 다 사각지대로 바뀌어져있다. 지금 근래에 매스컴을 통해서 보게 되는 내용을 보라. 중학교, 고등학교 안에 일어나는 아이들의 사건을 보라. 이 일에 부모들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고 발 벗고 나서기도 하지만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제가 우리 아이를 보면서도 느낀다. 우리 아이가 그 문화 속에서 복음 가지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을 보게 된다. 말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보니까 깜짝 놀랄 만한 말을 쓴다. 한번은 막내아들이 누나 핸드폰 앞에 적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래서 와가지고 누나한테 상담을 해주라고 이야기를 했다. 심각하다고 했다. 왜그러냐고 하니까 그 앞에 아이가 써놓은 문구가 죽을래요라고 써놨다. 저한테 꾸지람을 듣고는 써놓은 것이다. 그 문구를 보면서 막내아들이 와서 심각하게 사단에게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누나에게 상담해주라고 하면서 구원의 길 다시 해줘야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보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황금어장이 악한 사단의 궤계로 사각자대로 바꿔졌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보호랄 수 없는 것이다. 이 문화를 개혁할 수 있는 길은 복음밖에 없다. 그리스도밖에 없다. 개인이 살고, 개인의 자녀들을, 현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탄식이 마9:35-38의 말씀처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탄식이 우리 가운에 있을 때 그때부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진정한 주님의 관심과 소원에 감각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현장은 완전 사단의 문화로, 타락의 문화로 우리 자녀들이 죽게 되어있다. 어떻게 살릴 것인가?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붙자고 기도하고 마음과 중심을 늘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주님의 탄식을 가지게 될 때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게 되어있다. 우리의 눈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눈을 현장을 향해서 돌려야 한다. 성경을 보면 현장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께서 바꾸어나가시는 것이 현장이다. 문화이다. 현장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눈만 바로 열면 된다. 생각을 바꾸고 현장을 향해서 우리의 눈만 뜨면 우리를 들어서 그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
말씀을 맺는다. 나의 기준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을 붙잡길 바란다. 그것이 언약을 붙잡는 것이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바란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길 바란다. 그 다음에 나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눈, 현장을 보는 눈, 이 눈을 가지게 될 때 참된 축복과 응답이 시작된다. 오늘 본문의 25절에「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승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구원의 역사를 누리는 것이 다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각 개개인이 구원의 역사를 가지고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길 바란다.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개개인들이 각 사람 각 사람이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길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구원 정도가 아니라 구원 안에 있는 정복의 역사, 이 사실을 붙잡고 이번 한 주간에 한사람 한사람이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현장을 정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오늘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받길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것을 주셨다. 그 완전한 것이 바로 복음이다. 모자라지 않고 완벽한 것을 주셨는데 그게 바로 복음이다. 그래서 이 복음을 누리는 만큼 정복하게 되어있다. 그릇을 준비하는 만큼 응답받게 되어있다. 오늘 한날도 참된 복음 안에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모든 관계된 현장을 정복하는 축복이 있길 축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있다면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이다. 바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고 내가 사는 이 엄청난 축복된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다. 세상의 싸움의 원리와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인 싸움의 원리는 다른 것을 우리가 보게 된다. 세상의 싸움은 승리하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다.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다. 그러나 영적인 싸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싸움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이기보다는 이미 이겨놓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싸움은 이기고 나서 힘이 빠지고 싸우면 싸울수록 피곤하고 한계에 빠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싸움은 싸울수록 힘이 난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온 힘과 정성을 다 모으고 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패배자가 있어야 한다. 간단한 예로 직장 안에서 승진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떨어뜨려야 내가 승진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의 원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의 원리는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이고 다른 사람 패배시키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응답을 주면서 내가 사는 싸움이 바로 영적인 싸움이요 성경에서 말하는 싸움이다. 그래서 벧전2:9에 보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위해서는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하는데 이 영적인 싸움은 세상에서 말하는 싸움과는 다르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남부지역을 정복하게 되는 역사가 나와 있다. 특별히 25절에「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여기에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무슨 말인가? 이 승리를 각자가 누려야 된다는 사실이다. 개개인이 즐겨야함을 말씀하고 있다. 이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 한사람도 빠짐없이 관계된 모든 현장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우리 개개인들이 그 영적인 싸움에서 그 참된 승리의 축복을, 정복의 축복을 누리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분문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이 영적인 축복의 비밀을 누릴 수 있는가를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어제 핵심에서 제목이 <바꾸어야 세상을 살릴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주셨다. 본론으로 세 가지 바꾸어야 할 부분을 말씀하셨는데 신분부터 바꾸라. 두 번째로 생각을 바꾸라. 세 번째로 눈을 바꾸라 라는 내용으로 핵심이 전달되었다. 그 제목을 그대로 해서 말씀을 생각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신분부터 바꾸어져야 한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신분이 바뀌었다면 생각을 바꾸어야 하고 그와 더불어 세 번째로 눈을 바꾸어야 한다. 실제적인 정복의 축복을 우리 개개인들이 모든 한사람 한사람이 이 정복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첫 번째로 신분을 바꾸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가나안땅의 다섯 왕이 연맹을 맺어서 기브온 거민 때문에 이스라엘과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가나안땅 다섯 왕이 연합으로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살기위해서 이스라엘 안에 들어온 기브온 거민들을 욕하지 아니하시고 결국 그 기브온 거민들을 향해서 지난 시간에 보았던 것처럼 태양과 달을 멈추는 엄청난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게 된다. 무엇 때문인가? 이 기브온 거민이 언약 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신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아야 될 언약 안에 들어온 거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기브온 거민을 향해서 태양과 달을 멈추시는 엄청난 사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언약 앞에 꼼짝 못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언약 안에 신분부터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실 때 아무렇게나 일을 하지 않으신다. 분명히 말씀을 주시고, 다시 말해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성취시키셨고 앞으로 그 언약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절대 그냥 일을 해나가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언약부터 먼저 주시고 말씀부터 먼저 주시고 그 말씀대로 행하시고 앞으로 그 말씀을 성취시켜 나가신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언약부터 주셨다. 그것이 창1:27-28이다. 하나님의 형상따라 지어진 아담과 하와에게 28절에 축복을 주셨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을 다스리라”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언약이다. 이 엄청난 언약을 주셨다.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교만한 마음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것이 자유의지인데 그 자유의지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하나님을 떠났다. 그것을 가지고 죄라고 그 죄로 말미암아 결국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가 깨어졌다. 하나님의 언약을 잃어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은 바로 그 언약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답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창3:15, 성경 전체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러분이 정말 이 말을 알아듣는 순간에 여러분의 배후에 역사하는 모든 흑암의 세력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분명히 말씀했다.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무슨 말인가? 사람의 후손이 아닌, 아담의 후손이 아닌. 아담의 후손은 모두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 아담의 후손이 아닌 여자의 후손. 다시 말해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같은 말이다. 성령으로 잉태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다 같은 말이다.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사단의 권세를, 사단의 머리를 깨뜨려버릴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을 놓쳐버린 아담에게 하나님은 바로 그 언약을 회복할 답을 주셨는데 “여자의 후손이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 언약을 붙잡은 아담이 성공했다.
그런데 창4장에 보면 이 언약을 가인이 놓쳐버렸다. 그래서 제사 드리는 부분에 있어서 아벨과 가인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고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에 화를 내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최초의 순교이면서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비참한 비극이 시작된 것을 보게 된다. 무슨 말인가? 언약을 놓쳐버리게 될 때 사단의 밥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언약을 또한 놓쳤을 때 하나님이 또 이 언약을 회복시키는 방주의 언약을 말씀하셨고, 이 언약을 놓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가 되었다. 여기에서 언제 빠져나왔는가? 출3:18에 희생제사, 언약이다. 희생제사 그 언약이 더 구체화 된 것이 출12장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이다. 언약이다. 이 언약을 붙잡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사단의 속에서, 노예 속에서 빠져나온 것을 보게 된다. 이 언약을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도 주셨다. 그 언약, 말씀을 담은 언약궤를 주셨고 광야를 가는 동안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을 보게 된다. 출24자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언약궤를 만들라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를 하시고 그 언약궤 안에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넣으시고 그 언약궤가 움직여지는 곳마다 하나님이 기적으로 역사하신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언약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이 언약궤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고 서게 되면 같이 서게 되는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된다. 이 언약궤를 가지고 요단을 건너고 이 언약궤를 가지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다. 이 언약궤를 가지고 가나안땅을 정복했고 이 언약궤를 가지고 가나안땅에 거하는 7족속 31왕을 멸하는 엄청난 역사들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고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인도해 나가신다는 사실. 하나님은 스스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말씀을 주시고 성취해야 하기 때문에 그 중심으로 해서 모든 역사를 움직여 나가신다. 이것을 훈련시키시고 가르친 것이 광야사건이었다. 이 언약을 따라 예수님께서 오셨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마가다락방에 모여서 이 언약을 붙잡고 기도했다. 행1:1-12에 언약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가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란 증거로 부활하셔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그 분이 세계복음화를 하기 위해 재림주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언약을 붙잡은 마가다락방 교회가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행1:12-14에 보면 언약을 붙잡고 전혀 기도에 힘썼다. 그때 행2장에 보면 불과 같은 바람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임하게 되었고 그 자리에 15개 나라가 와있게 되면서 그 15개 나라의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현장에 3000제자가 세워지고 그 힘을 가지고 초대교회는 날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기도하기 위해, 또 떡을 떼며 교제하면서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다고 했다. 언약을 붙잡고 기도한 초대교회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로 헬라 문화를 정복하게 되었고 그 언약을 붙잡고 기도하는 초대교회가 바리새의 사상을 꺾고 그 막강한 로마까지도 정복하는 축복을 누렸다. 무슨 말인가? 언약 안에 모든 것을 살리고 정복하는 비밀이 있다. 그 언약이 우리에게 까지 왔다. 바로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기 직전에 약속하신 부분이 있다. 행1:4-5에 보면「4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관심이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언제 어떻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나이까?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약속으로 주신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령이다. 언약으로 주신 것이 있다. 그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 약속 하신 것이 무엇인가?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 언약이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언약을 붙잡게 될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되어있다. 이 언약을 붙잡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하나님은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게 되어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약 안에 들어와야 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분부터 바꾸어야 되는 것이다. 시1:1-6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거기에 의인과 악인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가? 바르게 살고 열심히 살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 의인인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의인과 악인의 기준은 언약 안에 있느냐, 언약 밖에 있느냐이다. 아무리 바르게 살고 경견하게 살고 열심히 산다고 할지라도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은 악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비록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할지라도 언약 안에 있는 자는 의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의인에 대한 축복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중요한 것은 언약 가진 백성을 하나님은 놓치시기 않으신다. 오늘 여기에 기브온 거민, 비록 이방인이었다.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왔다. 그 기브온 거민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기 위해서 태양과 달을 멈추시는 엄청난 기적을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 가운데 들어갔다. 그 풀무불 가운데서 하나님은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어느 정도로? 머리카락 하나까지 그을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다니엘이 신상에 절하지 않는 것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갔다. 그 사자 굴에 들어갈 다니엘, 언약을 가진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자 굴에 하늘군대, 주의 사자를 보내셔서 완벽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신 사실을 보게 된다. 신약시대 전도자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가이사 앞에 서야하리라. 언약을 가졌다. 이 언약 가진 바울에게 유라굴로 광풍이라는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구원의 여망마저 완전히 끊어진 그러한 위기를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가진 바울을 찾아오셔서 풍랑 가운데 찾아오셔서 바울을 들으셔서 로마를 정복하는 역사를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언약가진 자를 찾아가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언약 안에서 신분부터 바꾸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와 더불어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언약 안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징벌하시는지 보여주고 계신다. 다섯 왕들이 연합을 해서 쳐들어왔을 때 여호수아로 말미암아 이 다섯 왕들이 전쟁에서 지게 된다. 그래서 이 다섯 왕들이 자기들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굴에 들어가서 은신처를 삼고 숨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발각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로 입구를 막아서 비참하게 처형시키는 것이 본문에 나온다. 16-18절에「16그 다섯 왕이 도망하여 막게다의 굴에 숨었더니 17혹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여 가로되 막게다의 굴에 그 다섯 왕의 숨은 것을 발견하였나이다 18여호수아가 가로되 굴 어귀에 큰 돌을 굴려 막고 사람을 그 곁에 두어 그들을 지키게 하고」나중에 다 무찌른 다음에 여호수아가 그 다섯 왕을 끌어낸다. 22절에 보면 “그 다섯 왕을 내게로 끌어내라” 24절에 보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말미암아 그 다섯 왕의 목을 밟도록 하는 것이 나온다.「그 왕들을 여호수아에게로 끌어내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부르고 자기와 함께 갔던 군장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와서 이 왕들의 목을 발로 밟으라 가까이 와서 그들의 목을 밟으매」그리고 나서 여호수아가 이 다섯 왕들을 결국은 그 다섯 나무 가지에 해가 지도록 매어달게 된다. 27절에 보면「해 질 때에 여호수아가 명하매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리어 그들의 숨었던 굴에 들여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숨으러 들어갔던 자기의 은신처가 되어질 줄 알고 숨었던 그 굴이 자기들의 매장지가 되었다.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나무에 달아 죽이고 해가 지도록 나무에 달아두었다가 그 시체를 끄집어 내려서 자기 들이 숨었던 그 굴에 넣게 된다.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행복할 줄 알고, 성공할 줄 알고 무언가 열심히 노력을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실패시키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오히려 숨으려고 들어갔던 그 은신처가 매장지가 되어지는, 이것이 불신자들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행복을 가져다 줄줄 알고 모든 것 사력을 다해서 열심히 달려가지만 결국은 지식, 성공, 명예 앞에 무릎을 꿇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의 삶이다. 거기에 우리가 부러워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얻을 수가 있다. 잠시잠깐 누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영원한 승리를 주지는 못한다. 욥1:20-22에 불신자 상태에 대해서 말하기를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간다고 했다. 벌거벗은 몸으로 왔다가 벌거벗은 몸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 뿐만 아니라 골2:8-9에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지식에 속지 말라고 했다. 지식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지식과 철학과 어떤 속임수로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지식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러나 언약 밖에 있는 지식은 그 지식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된다. 물론 조금은 우리에게 유익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평안과 행복을, 절대적인 행복을 줄 수 없다. 눅16:19-31에 보면 부자의 비유가 나온다. 부자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날마다 잔치를 하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고. 잠시잠깐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구원과 생명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기 때문에 그 영혼 속에는 참 행복이 없는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이고 내세가 없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불신자들의 삶이 그러한 것이다. 잠시잠깐 무언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여 지는 것에 빠질 수 있고 그 부분을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행복과 평안을 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 안에 절대적인 행복이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먼저 신분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하다. 물질도 명예도 필요하다. 그것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언약 밖에서의 물질, 지식, 명예는 결국 그것이 자신의 무덤이 된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결국은 실패와 저주와 재앙 가운데 빠지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절대적인 행복이 있고 환경과 문제와 상관없이 절대적인 행복이 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하나님이 여셨는데 그 길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계3:20에「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가장 중요한 신분부터 바꾸시는 축복이, 신분이 바뀌어졌다면 하나님의 소원과 계획에 방향 맞추게 될 때 거기에 참된 평안과 행복이 오게 된다. 이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두 번째로 생각을 바꾸라. 어떤 생각을 바꾸는가? 우리가 신분이 바꾸어졌다면 신분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하겠다는 것, 내가 내 기준에서 생각하는 것, 우리가 신분이 바뀌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생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신앙생활이 왜 어려운가? 신분이 바뀌어지기 전에 내 열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다. 그 것이 바로 종교생활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그 순간부터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을 붙잡고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시는 것이고 종교는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기준이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요일5:11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그리고 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중심이다. 요5:24에 보면「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어떻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래서 엡2:8에「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분명히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의 편에서 출발하셨고 하나님의 은혜가 기준이다.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이 되어야 한다. 내 열심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브온 거민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싸우시는 것을 보게 된다. 19절에 보면「너희는 지체 말고 너희 대적의 뒤를 따라가 그 후군을 쳐서 그들로 자기들의 성읍에 들어 가지 못하게 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셨느니라」하나님이 싸우는 싸움을 보게 된다. 21절에 보면「모든 백성이 평안히 막게다 진으로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이르렀으나 혀를 놀려 이스라엘 자손을 대적하는 자가 없었더라」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이기 때문에. 어떤 분이 교회 안의 인간관계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변명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되는지. 가만히 두니까 자꾸 말을 만들어내서 자꾸 어렵도록 한다고 하면서 난감하고 갈등이 일어난다고 말을 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이 우리가 해결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손을 들어서 해결해야 완벽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변명도 하지 말고 다른 이야기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이야기를 해드렸다. 악한 사단이 사단의 시험에 걸려들면 말을 가지고 계속 꼬리의 꼬리를 물게 하면서 내가 위해서 하는 말도 그 말을 사단이 이용을 하면 더 꼬이게 하고 더 갈등을 가지고 오고 더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정말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완벽하게 해결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오늘도 찬양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능한 손을 들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을 해결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약속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편에서 노력하고 애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시는 싸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바라보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누림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누리는 것이다. 이 참된 우리의 생각들이 바뀌어지는 은혜를 입길 바란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이 생각이 바뀌어지길 바란다.
세 번째로 눈을 바꾸라. 진짜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은 현장에 있다. 정말로 멸망 받는 이 땅의 문화가 개혁되어지길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이다. 이 하나님의 관심과 소원에 상관없이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현장의 황금어장이 다 사각지대로 바뀌어져있다. 지금 근래에 매스컴을 통해서 보게 되는 내용을 보라. 중학교, 고등학교 안에 일어나는 아이들의 사건을 보라. 이 일에 부모들이 불안해서 견딜 수 없다고 발 벗고 나서기도 하지만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제가 우리 아이를 보면서도 느낀다. 우리 아이가 그 문화 속에서 복음 가지고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든 것을 보게 된다. 말도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보니까 깜짝 놀랄 만한 말을 쓴다. 한번은 막내아들이 누나 핸드폰 앞에 적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래서 와가지고 누나한테 상담을 해주라고 이야기를 했다. 심각하다고 했다. 왜그러냐고 하니까 그 앞에 아이가 써놓은 문구가 죽을래요라고 써놨다. 저한테 꾸지람을 듣고는 써놓은 것이다. 그 문구를 보면서 막내아들이 와서 심각하게 사단에게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누나에게 상담해주라고 하면서 구원의 길 다시 해줘야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가 보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황금어장이 악한 사단의 궤계로 사각자대로 바꿔졌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아이들을 보호랄 수 없는 것이다. 이 문화를 개혁할 수 있는 길은 복음밖에 없다. 그리스도밖에 없다. 개인이 살고, 개인의 자녀들을, 현장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탄식이 마9:35-38의 말씀처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탄식이 우리 가운에 있을 때 그때부터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진정한 주님의 관심과 소원에 감각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현장은 완전 사단의 문화로, 타락의 문화로 우리 자녀들이 죽게 되어있다. 어떻게 살릴 것인가? 우리에게 주신 언약을 붙자고 기도하고 마음과 중심을 늘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주님의 탄식을 가지게 될 때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게 되어있다. 우리의 눈을 바꾸어야 하는데 그 눈을 현장을 향해서 돌려야 한다. 성경을 보면 현장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하나님께서 바꾸어나가시는 것이 현장이다. 문화이다. 현장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눈만 바로 열면 된다. 생각을 바꾸고 현장을 향해서 우리의 눈만 뜨면 우리를 들어서 그 축복을 누리게 하신다.
말씀을 맺는다. 나의 기준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의 기준을 붙잡길 바란다. 그것이 언약을 붙잡는 것이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바란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길 바란다. 그 다음에 나의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눈, 현장을 보는 눈, 이 눈을 가지게 될 때 참된 축복과 응답이 시작된다. 오늘 본문의 25절에「여호수아가 군장들에게 이르되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다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승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구원의 역사를 누리는 것이 다가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 각 개개인이 구원의 역사를 가지고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길 바란다. “너희가 더불어 싸우는 모든 대적에게” 개개인들이 각 사람 각 사람이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길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구원 정도가 아니라 구원 안에 있는 정복의 역사, 이 사실을 붙잡고 이번 한 주간에 한사람 한사람이 여러분과 관련된 모든 현장을 정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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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 |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고전 9:18-27 | 2025-04-27 | |
1150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149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148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147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146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145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144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143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142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141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140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139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138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137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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