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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7일 주일 1부 예배 정성웅 선교사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고전9:18-27)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아멘.
■ 반갑습니다. 오카야마 2만, 일본 120만, 세계 1천만 제자를 찾고, 양육하여 파송하는 오카야마 하나교회 정성웅 선교사입니다. 중국에서 내려오는 고사성어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굉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고사성어입니다. 중국에 있는 태백산 주변에 황하강이 시작 되어지는 시발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전염병이 돈 것입니다.
그래서 복희라고 하는 한 지도자가 그 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전염병이 너무 창궐하고 있으니 3일 동안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 가운데 태백산의 신이 나타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시발이라고 하는 이 마을에 많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건만, 이 마을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답하지 않고,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마을에 있는 모든 가정에 피를 보지 않고는 내가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복희라고 하는 지도자는 온 마을 사람들에게 집집마다 빨간색 깃발을 피죠, 빨간색 깃발을 꽂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한 노예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귀신은 내 생각에는 더러운 색깔, 더러운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빨간색 깃발 말고, 나는 색깔이 없는 깃발을 꽂아야겠다.’, 그래서 이 노예가 ‘내 생각에는’이라고 하는 것을 의존해서 자기 집에 색깔이 없는 깃발을 꽂은 것입니다.
그 후에 이 복희라고 하는 지도자가 이제 또 기도를 하는데 태백산 신이 나타났어요. 내가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의 정성을 보고 그냥 넘어가려고 하였는데, 한 노예가 지금 나를 놀리고 있다. 노예가 색깔이 없는 깃발을 꽂은 것이죠. 그래서 기분 나빠서 내가 이 마을을 다 재앙으로 심판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겠다. 그래서 그 마을에 전보다 전염병이 더 심하게 창궐하게 된 것입니다.
시발이라고 하는 그 마을에 있는 한 노예, 그리고 색깔이 없는 깃발. 그게 고사성어가 되는 건데 때 시, 발할 발, 노예 노, 없을 무, 색깔 색, 깃발의 기, 시발에 있는 노예 시발 노, 색깔이 없는 깃발 무 색기, 그러니까 시발 지방에 있는 한 노예 색깔이 없는 깃발, 시발 노예 무 새끼, 붙여서 말하면 ‘시발노무색기’, 중국의 고사성어를 여러분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룰을 지키지 않거나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경거망동하여서 단체나 가족에게 거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는 그 사람을 두고 ‘시발노무색기’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목을 이걸로 하면 어떨까?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왜 웃으시는지를 제가 모르겠네요. 저는 이제 고사성어를 말씀드린 거에요.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이라고 하면서 경거망동하다가 마을 전체에 피해를 준 거죠. 그런데 이 주보에 이제 그 말을 제목으로 쓰기가 선교하는 교회, 또 선교 대회를 하고, 준비된 선교의 전환점이라고 하는 큰 타이틀이 있는데 1부 예배 설교 제목이 이제 ‘시발노무색기’이렇게 써져 있으면 전 세계적으로 성경적이지 않을 것 같아서 바꿨습니다. 그리고 1부 예배 때 저는 어린 렘넌트들이 오리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전에 죄를 범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좀 듭니다. 렘넌트 여러분, 인사이트가 있는 키워드의 말씀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평상시에 쓰던 그런 말로 생각하지 마시고, 이 고사성어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아덴에서 바울이 전도를 어느 정도 실패한 후에 고린도로 이동을 합니다. 브리스가 부부와 함께 천막 동종업을 하면서 일을 하면서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에 있는 바울에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안식일마다 힘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가 본인의 동역자들이 팀으로 합류하게 되어지니까 말씀에 사로잡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당에 들어갔는데 회당의 주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 회당장의 집에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를 키우는 사역을 하게 돼요.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이나 계속해서 고린도에 있는 제자들을 키운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또 추방당합니다. 그곳에 회당장이라고 하는 제자가 중심이 되어 고린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메시지를 편지를 통하여서 보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또 구원을 얻고 변화된 이후에 바로 다 끝나거나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힘 있게 전도자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딱딱한 식물로 만든 음식을 먹이지 못할 정도로 너희는 내가 지금까지도 어린아이에게 어미의 모유를 제공하듯 말씀을 전했다 라고 이야기해요.
이 고린도 교회에는 파벌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파,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 파벌들이 싸움을 하였습니다. 내가 맞다, 니네가 틀렸다, 뭐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리고 소송들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싸우면서 이제는 그 판단을 세상에 있는 재판관에게 의존하는 것이죠. 재판을 걸려면 변호사가 있어야 되고, 돈이 있어야 되고, 사회적인 커넥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인 지위나 부를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내가 틀렸어도 사회에서는 재판에 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교회에서 그런 것이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음행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자기 아비의 부인, 그러니까 자신의 엄마는 아니지만 새엄마를 자신의 아내를 삼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 교회에 리더급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있는 분들이 그 사람을 판단하거나 내보내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못하는 것이죠. 우상숭배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상에 드려진 이 음식을 먹어야 되느냐, 안 먹어야 되느냐?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죠. 그러한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의 응답을 누리기 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의 이야기이고, 우리의 이야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나와 내 교회의 이야기라고, 우리가 받고 메시지를 누리면 됩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고, 또 복음의 말씀에 충격을 받고, 또 인생이 전환 되어져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예수의 제자의 길을 걷는데 여정을 가는 것이죠.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 베드로를 부르실 때 바로 땅 끝까지 증인 될 만한 그런 제자의 응답을 받을 상태는 아니었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 라고 물고기 잡는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3년간 합숙하면서 원색의 복음을 예수님을 통하여서 들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욕하면서 다시 물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은 여전히 필요한가 봅니다. 베드로도 그랬다 라고 한다 라면 저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1. 십자가 - 원래의 시작
바울이 떨어져 있지만 주의 종으로서 고린도 교회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세워 나가는 그 메시지를 본론의 메시지로 전달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 원래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난 자가 아니고, 하늘에서 난 자입니다. 예수님은 창조 받으신 분이 아니라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라는 한 존재의 시작을 두고, 이 땅에 오셔야만 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여러 가지 부분에 비교 되어져서 높낮이가 있는 것처럼 아름답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별것 없습니다. 세상에는 굉장히 많은 종류의 비교 관점들이 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인생은 원래 별것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우리인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잘했기 때문에 훌륭하여지거나, 내가 무언가를 못했기 때문에 슬퍼하거나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인생은 별것 없습니다. 별것 아니라니까요.
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이었느냐? 죄 없으신 창조주신 그분께서 그분의 몸을 십자가에 걸으시고, 비난을 당하시고, 매질과 채찍질을 당하시고, 피부가 찢어지시고, 뼈가 부러지시고, 그리고 창조 받은 사람들에게 저주받으시고, 모든 고난과 수난과 통증 등을 다 당하시고,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냥 본인의 죄에 관한 책임을 담당하신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창세기3:1-5절, 인간은 마귀에 속아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바로 마귀의 종이 되고, 영적인 죽음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상태로 인생의 모든 것들이, 행동하는 것들이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죠. 그 죄의 결과 사망입니다, 심판입니다, 그래서 마귀의 종입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 우상 신전을 만들어서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많은 신, 신들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그 우상 뒤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귀신이 있는 것이죠. 마귀의 종이니까 귀신을 사람이 있는 모든 곳에는 그 신전을 세워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즐거움과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을 쫓아서 스스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재앙을 만나게 됩니다. 나의 성공을 위하여서 필사적으로 내 생명을 다 걸어서라도 노력합니다. 몇몇 사람이 얻어서 그 이야기를 또 하지만 다 무너지는 바벨탑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세상에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둘째 치고, 개인이 너무 힘듭니다, 시달리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 힘들죠. 나를 지으신 분을 모르니 힘들죠. 우상을 섬기면서도 힘든 겁니다. 노력하면서도 막 시달리는 겁니다. 뭔가 내 뜻대로 되어야 되는데 안 되니까 미치겠는 거에요. 고린도 교회에 이 예수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금방 이야기하는 그 많은 문제들을 안 하면 안 되는 거에요. 하나님 떠난 사람이 그런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원래의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죠. 그래야 십자가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의 나는 마귀의 종, 진노의 자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태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세상에서 주는 메시지와 그 흐름이 각인되고, 뿌리 되고, 체질 되어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해도 안 되는 겁니다. 고린도 교회에 와도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셔야 할 만한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존재하면 안 되는 그 정도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서 죽음의 심판을 받으셔야 했던 나가 원래의 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모두가 다 미련한 세상의 흐름을 따라 스스로 그곳에 내 몸을 눕혀 흘러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달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나는 바울파야, 나는 그리스도파야, 나는 베드로파야, 나는 아볼로파야. 어머 그리스도 빼고, 그 십자가가 빠지니까 다른 것을 세워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조금 그리스도파 그것 가지고, 뭔가를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음행 해야 되는 것이죠.
왜 그 문제에서 문제라고 여겨지는 것을 본인은 알지 못할까요? 그걸 해야만 하는 상태니까요. 왜 우상을 섬겨야 될까요? 그걸 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내가 알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신령한 말씀을 전하기에 너희들은 너무 어린아이와 같다 라고 이야기해요. 우리는 모두가 다 별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별것 없는 인생,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 심판받아 없어져야만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예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고는 마귀의 일을 멸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의 죽음, 대속의 심판 제물이 되지 않고는 마귀의 머리를 박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음은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죽기 직전에 큰 목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그래서 우리의 시작은 십자가가 되어야 합니다.
2. 부활 - 새로운 시작
두 번째는 부활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사흘 이후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시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 성전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사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삼으신 것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죽었고,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완전 죽었는데 다시 새 몸과 썩지 않을 영원한 몸과 생명을 가지고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3년 동안 예수님을 착각하며 살았는데,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는 땅끝까지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은 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지금 우리의 머리가 되사 우리와 지금 이곳에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사 하늘에 승천하셨는데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까지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안 죽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인 것입니다. 훗날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의 썩지 않은 몸까지도 부활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부활이 새로운 시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썩지 아니할 몸을 가지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유업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새로운 시작은 부활입니다.
3. 세계복음화 하는 인생
세 번째로 우리 인생은 세계복음화 하는 인생입니다. 땅 끝까지 죽을 때까지 잘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메시지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전 세계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바울에게는 이방인의 그릇,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악기가 될 것이다. 베드로 개인에게 주신 부활 이후의 메시지, 네 양을 먹이라.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세계복음화 하는 인생, 그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의 힘과 상태인 것이죠.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의 응답은 세계복음화뿐입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세계복음화의 응답 외에는 예수의 제자에게는 응답이 없는 겁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교회에 있는 친구들과 그 선후배들과 함께 병원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친구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 고등학생이 어른 환자분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시간이 지나서 제가 고3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제 저를 따라서 이제 후배가 이 병원 전도를 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 알겠어요. 주보를 들고, 이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을 듣더라고요. 환자분과 병문안하러 온 가족들이 다 복음을 들었어요.
고3 학생 지금 생각하면 예뻤을 것 같아요. 그 복음을 들으신 그 어머니가 제 얼굴을 이렇게 만지면서 ‘아이고 예뻐라.’, 이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그 가족들이 전부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했어요. 그 눈부신 광경이었어요. 이상하더라고요. 함께 간 그 후배도 그 광경을 본 것이죠. 또 그다음에 갔는데 이제 더 어린 초등학생 후배와 함께 또 전도하러 간 거에요. 그래서 어느 어르신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누워 있다가 무릎을 잡고 일어나시더라고요. 그리고 막 우시는 거에요. 그리고 예수님을 제 이야기를 듣고 영접하는 거에요. 너무 눈부신 광경이었어요. 지금도 그 어린 초등학생 학생이 지금도 저를 만나면 지금은 30살 넘고, 40살이 되었는데 그때 그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대학교를 입학했습니다. 이제 신입생들이 자기소개를 하죠. 저의 순서가 되어서 저를 소개했습니다. 저는 일반 대학 나왔습니다. 여러분 신학교 안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이렇게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제가 외국어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한 90%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재수 없죠. 그 뒤로 이제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요. 점심시간에는 점심 먹기 전에 그 큰 학생 식당 앞에서 잔디밭에서 정오 찬양을 했어요. 그러니까 밥 먹으러 가는 친구들이 저를 보겠죠. 매일 이러고 있으니까 밥맛 떨어지는 거죠.
MT가 있었어요. 한 100명 이상, 200명 같이 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용달차로 술을 이렇게 박스로 끌고 옵니다. 그래서 실내에 들어가자마자부터 갈 때까지 술을 마십니다. 그 100명, 200명이 이 술을 마셔요. 그때 저는 한 모금도 안 마셨어요. 술맛 떨어지겠죠 여러분. 그렇게 하고 있는 다른 방에는 이제 술 깨는 방이 하나 있습니다. 취해가지고 이제 술 깨로 이제 그 방에 오는 거죠. 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술 취한 애들이 제 방에 오는 거죠. 혀가 꼬여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원래 인간은 물고기, 나무 이런 거 있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애는 ‘나도 교회 다니는데 너를 볼 때마다 내가 괴로워.’, 이런 애들도 있고,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18세의 한 학생이었습니다.
그 눈부신 그런 광경들은 이렇게 잘 설명을 드려야 되는데 좀 후회되는 면이 있어요. 일본 선교사로 가서 사역을 하는 데는 약간 좀 후회되는 게 있어요. 그 충격과 그 도파민이 분비 되어지는 그 체험이 다른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게 만든 것이죠. 지금 직접 선교 현장에서 여정을 걷고 있는 저에게는 그때 전하였던 복음과 전도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를 세우는 그 전도였을까? 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데 맞다 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정말 그 광경 외에는 다른 것은 재미있는 게 하나도 없는 거에요. 그 전도가 되어지는 그 광경 외에는 별로 즐거운 게 없는 것이죠. 밥 먹는 것도 그렇고, 공부하는 것도,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재밌지가 않아요. 그러니까 마약 환자가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그것 하는 것 외에는 그 즐거움을 대체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회사를 다녀도 일은 하고 있지만 그 생각만 하고요, 빨리 가서 해야지. 저도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전도라고 하는 그 도파민에 중독 되었나? 그것 외에는 아무 즐거움이 없이 즐거움이 없는 그런 상태, 그 뇌가 그렇게 되어 버렸나?
그래서 전도라고 하는 그 도파민을 체험한 저는 전도를 두고 일본 선교 현장에 갔습니다. 일본에서도 제가 이야기하는 이런 이야기들은 매일 있는 건 아니지만 없지는 않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그런 광경들을 본 거죠. 그런데 그게 늘 있는 게, 또 원하는 만큼 있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힘들죠. 약을 계속 먹어야 되는데 약 효과가 안 나잖아요. 일본에 갔는데 그런 전도의 그런 광경들을 많이 보지 못해요.
우리 하나교회 서밋스쿨의 렘넌트들이 일본 선교사인 저에게 편지를 써요. 일본에서, 우상의 나라에서 와보지도 않아놓고는 우상의 나라에서 힘 있게 잘 선교 활동을 하시는 선교사님께 이렇게 써요. 나 별로 힘없는데, 나 잘 못하겠는데? 요즘은 좀 하기도 싫고, 뭐 그래도 뭐 다시 보내면 아 고맙습니다. 우리 렘넌트 덕분에 더 힘을 내어서 선교에 정진하겠습니다 라고 답을 해요.
한 사람을 제자화 하는 것, 한 중직자를 세우는 것, 그리고 복음 없는 사람에게 복음이 들어가 제자화 하는 것, 저는 어렵더라고요. 그리고 전도자로, 전도 제자로 키워내는 그 길 못하겠더라고요. 여러분 대구 하나교회는 기억할 만한 우리 신학교 보냈던 자매들도 있었죠. 이동해서 훈련 받다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 많은 사역과 일들과 어떤 여정들을 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세워져 나가는 여정도 있지만 길도 있고, 그리고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고린도 교회 마찬가지였죠. 사도 아니라는데, 사도가 아니라는데 뭐 어떡하겠어요? 복음을 복음하고, 자신하고 안 맞는 겁니다 생활도 안 맞고요.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과 세계복음화 이걸 전한 겁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이야기해요. 내가 사람에게 심판받거나 판단 받는 것은 큰 게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에게 부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심판받고, 상을 받아도 하나님께 받은 것이지 인간들에게 상을 받거나 칭찬받거나 심판받는 데는 별로 큰 게 아니다.
그리고 결혼 이야기도 결혼을 하려고 하는 사람, 하지 않은 사람, 결혼했는데 가정에 문제 있는 사람 그걸 두고도 이야기해요. 웬만하면 나처럼 하지 마라. 결혼을 했다 라고 한다 라면 그 믿는 사람이라면 버리지 마라. 그런데도 너무 힘들다고 한다면 없다고 생각하고 같이 살아라. 모두가 다 너희가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 결혼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남편과 아내를 기쁘시게 하는 것 아니냐?
남편을 기쁘게 하면 남편에게 상을 받는 것이고, 아내를 기뻐하게 한 사람이라면 아내에게 상을 받는 것이고, 자녀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자녀에게 상을 받는 것이고, 사람을 위해서 운동장에서 칭찬을 받기 위해 달린다 라면 사람에게 상을 받는 것이고,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께 주시는 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 내가 모든 것에 자유롭지만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잡힌 바 된 종, 노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서, 내가 노력하여서 협력하겠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종으로 부르셨다.
그러니까 나는 이 일을 하는 게 내가 너희에게 상을 받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종으로 시키셨기 때문에 부득불 하는 것이다. 내가 이 복음을 전하면서 내가 농사를 지어 수확물을 기대하지 않겠느냐? 포도원에서 포도 농사를 하는데 포도 열매를 생각하면서 포도 농사를 하지 않겠느냐? 양을 치면서 양의 털과 그 가죽을 생각하면서 양치기를 하지 않겠느냐? 나의 사역에 열매, 고린도 교회 너희들 아니냐? 너희들을 통하여서 내가 신령한 영적인 사역을 한 후에 열매로 내 생활에 무언가를 획득하는 게 관리가 없겠느냐? 성경에도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일하고, 성전에 바쳐진 것을 제사장들이 먹고 살지 않느냐? 그런데 나는 이 복음을 전하면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고 이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나는 바나바와 함께 일하면서 이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유는 하나님께 상을 받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대표 선수가 뽑혀 가지고, 시합에 출전했는데 모두가 다 평생을 달려서 부름 받았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그 선수들이 그 한 경기를 두고 상을 받기 위하여서 날마다 상태를 준비한다. 나는 정말 희미하게 보여지는 그 결승점을 향하여서 지금 살아가는 게 아니라 명확한 결승점을 향하여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하여서 부름 받은 종이니까, 나는 자유자이지만 하나님의 노예이니까, 고린도에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본받기를 원한다. 너희가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그게 본인의 고백일까요? 그리고 고백만으로 끝날까요? 그게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입니다. 종이 무슨 생각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상 받기를 이용하여서 달려간 그 사람이 왜 다른 생각이 필요해요? 일본이니까 안 되는 게 아니야?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는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있으면 좋은 게 아니야?
등 돌리고, 삐쩍 말라서 우울증에 걸려 벽 보고 누워 있는 한 중학생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밖에 안 나가는 거죠. 밥도 안 먹고, 그냥 벽만 보고 방에서 있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요. 말도 걸기도 힘들고, 집에 돌아가면서는 막 시달리고, 집을 가나 교회를 가나 현장을 가나 굉장히 시달려요. 일본이니까, 하나님의 시간표니까 하나님 탓이야. 이렇게 여러 가지 힘든 여정 가운데 있는 나 자신은 하나님 탓이야. 시발노무색기, 내 생각, 노예가 무슨 자기 생각을 해요? 하나님의 상을 바라는 거죠.
바울은 하나님께서 죽일 작정을 한 듯이 세상에 구경거리를 삼으셨습니다. 매 맞고, 쫓겨 다니고, 비난받고, 감옥에 갇히고, 결국은 순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향하여서 그는 본인이 죽을 때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살리신 그 복음의 원리대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건축하는 건축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협력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바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상을 향하여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시발노무색기가 아니고, ‘시발노적 색기’, 그리스도 예수의 깃발을 드는 것이죠. 여러분 저도 언제나 어느 곳에서 그리스도의 깃발만 들겠습니다. 여러분 별것 없는 인생이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그 빨간 깃발을 들 수 있는 그 여정을 가게 하셨습니다.
내 생각이죠, 세계복음화는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하나님은 행하고 계시고, 하나님은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회가 세계복음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고, 말씀 주셔서 세계복음화할 수 있는 제자들로 지금 만들어가고 계신 것이죠. 일본에서 정말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두고 하였던 그 사역과 같이 생명 살리는 선교의 제자 사역, 정말 또 다른 사람에게 붉은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제자를 키울 수 있는 선교사.
하나님 탓이 아니죠, 내 탓이죠. 내 생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깃발을 드는 것이죠.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 때 모든 흑암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 때 교회는 전 세계를 향하여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내가 지금 언제나 들 때 그 세계복음화의 여정을 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그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우리는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면서요.
■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우신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승리, 세계복음화의 사명과 업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든 것의 자유가 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계복음화의 말씀에 붙잡힌 종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도 세계복음화를 위한 제자의 여정을 걷는 이 자리에 모인 한 분, 한 분에게 세계복음화의 응답으로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있는 모든 현장에서 증인으로 서서 종의 역할을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이 축복하시고, 사용하여 주옵소서. 주님 오시는 그날, 주님께 큰 상을 받는 개인과 교회와 현장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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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1 |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 고전 9:18-27 | 2025-04-27 | |
1150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149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148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147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146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145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144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143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142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141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140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139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138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137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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