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표적을 보여 주소서
2004-05-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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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마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1)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마 12:42)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마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마 12: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마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오늘 '표적을 주소서'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우리 12장 38절에 보면,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신 요구죠. 그때에 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뭐라고 말했느냐하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그랬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십자가의 구속의 표적 이외에는 이 세대를 건질 표적이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 악한 세대를 건질 표적이 없다! 여러분과 제가 속하여 있는 현실을 두고 말하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를 건질, 아무리 어렵다, 힘들다, 뭐 어떻다! 상관없어요. 오직 이 세대를 건질 표적은 복음뿐이다! 그런 메시지가 되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표적을 앞에 두고 있지만 이 사실을 못 깨달으니까,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표적은 예수를 안 믿는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이 표적은 뭔가 드러나는 어떤 그 신비한 인간적인 어떤 요구를 말합니다. 뭐 기적이 일어난다든가, 쉽게 말해서 '돈이여 하늘에서 떨어져 주소서!' 이런 표적들, 그 뭐 이상한 표적들, 쉽게 좀 건강치 못한 사람들은 '오늘 하나님이 막 깨끗하게 모든 병이 낫게 해 주옵소서!' 그것도 일종의 표적입니다.

지금현재 여러분들이 병이 들고, 고통을 당하고, 또 고난이 지금 내게 있다! 가정에 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확 해결해 버리고, 화닥닥 문제 해결해 버리고 이건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만약에 내 안에 참 생명의 신앙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인도해 가는 과정으로 보여지게 되면,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여지게 되면, 자연적으로 내게서 뭡니까?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런 표적인 나올 이유가 없죠. 나올 필요가 없죠. 그러니까 지금 여기 바리새인들의 표적은 불 신앙의 표적이요. 그들의 인간적인 어떤 그런 표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똑같이 뭘 느끼느냐하면, 참 복음을 떠나고, 참 복음을 떠난 자의 표적은 똑같이 뭐냐하면, 미신이요, 우상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 속에서 구하는 표적은 전부 이런 표적이거든요. 뭐 예를 들어서 이런 표적에서 미혹되는 것이 불 신앙자들이요. 이런 표적에서 사단에 속는 것이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흔히 천주교에서 '마리아 상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래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세계적으로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고, 안 그랬습니까! 전부 그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 우리 교회에서, 여러분이 다 보는 앞에서 박 목사님 머리에서, 막 머리 위에 십자가가 확 나타나고, 막 이렇게 나왔다! 그러면 깜박 넘어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막 오늘 은혜 받았다고 굉장할 겁니다. 그렇게 가지고 있는 마음 자체가 불 신앙의 표적입니다. 그 표적이 나타나면 뭐합니까? 아무런 상관없어요.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 우리의 약함에서 우리의 영원한 멸망에서 건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데 속고 있습니다. 그건 사단의 표적입니다. 사단이 그런 표적에 잘 넘어 가니까! 뭐냐? 우상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그에 의해서 이상한 기적들 만들어 놓고, 이상한 그런 사건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안되면, 모든 종교가 표적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이 안 되면 기도하면서도 허연 영감이 나타나서 기다리는 것이 그게 신비주의 배경이에요. 여러분들이 왜 신비주의에 빠져서 신비주의가 안 된다! 신비주의는 불 신앙이다! 그렇게 왜 이야기를 하느냐하면, 뭔가 신비주의는 기도하면서도 뭔가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등이 뜨끈해지기를 원하기도 하고, 이런 표적을 자꾸 구하는 것이 신비주의 배경이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점점 더 들어가 버리면 왜 위험하냐? 바로 사단의 통로가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복음이 바로 안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이 바리새인 적인 표적을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표적을 가지고 사단은 여러분들을 자꾸만 어디로 빠지게 하느냐? 종교로, 또 더 나아가서 신비적으로, 율법으로 빠지도록 함정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하면 사단의 속임수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이런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이 바로 되면, 이런 것들이 오늘부터 완전히 사라집니다. 여러분 눈앞에 아무것도 안 나타나도 됩니다. 다만 한가지 이 세대를, 그리고 여러분 처해있는 곤경과 문제와 그 다음에 가정과 사건과 자녀를 건질 수 있는 참 된 표적이, 선지나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이 세대의 표적이, 그게 지금 본문에 말씀하신 겁니다. 그 요나의 표적이 바로 뭡니까? 밤낮 사흘을 땅속에 죽음, 그 다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표적이 바로 이 요나의 표적으로, 요나의 죽음으로, 상징한 표적에 약속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 요나의 표적에서 뭘 우리가 보느냐 하면, 먼저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보여주는 약속입니다. 또 죽으실 것을 보여주는 이 약속이 가장 큰 축복과 은혜의 표적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처하여지고 이 땅이 처해있는 이 불행과 고통에서 구원받고, 건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먼저 뭐가 이루어 져야 되느냐? 사단의 요구가 이루어 져야 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범죄 한 아담에게 첫 번째로 말씀하신 그 말씀이 성취되어야 됩니다.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네가 정령 살리라? 죽으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하나님의 권위를 도전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또 하나님을 떠나는 그런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반드시 뭡니까? 죽었다! 그랬습니다. 영원한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을 오해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을 떠났다! 그럴 때에 이것을 가지고 죽음이라! 그럽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님께서 분리되는 것을 죽었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었다! 하는 것은, 육신에 있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 이것을 가지고 죽었다. 그랬는데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죽었다! 하는 것은 이 성경에 원래 개념은 하나님을 떠났다! 그런 개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죽은 개념이에요. 성경은 죽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아담 하와 때부터 이미 선언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즉시 죽었다! 그렇게 뭐 지금 육체를 가지고 돌아 다녀도 다 썩은 냄새나는,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화는 다 냄새납니다. 정치가도 냄새나도, 문화인도 냄새나고 다 그렇습니다. 왜? 죽었으니까, 냄새나는 거죠.

여러분들이 하루만 안 씻어보세요 냄새나는데, 그게 다 죽은 표적이에요. 정 냄새나는 것이 이상하고, 안 죽었다고 싶거든 아침에 간단합니다. 한번만 찍어 가지고 냄새맡아 보세요. 죽은 표적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생명의 삶입니다. 그래서 떠날 때에 죽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 그게 원죄 아닙니까! 그 삯이 뭡니까? 영원한 사망!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 그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걸어다니니까, 괜찮다는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의 마지막은 뭡니까? 영원한 멸망입니다. 바로 죽음이 이게 본 죽음이에요. 영원한 죽음입니다.

이 땅에 있을 동안에는 뭐 지옥이 있니, 천국이 있니, 큰 소리 치고 돌아다녀도 결국은 사단에 속해 있는 자들이 갈곳이 영원한 멸망이에요. 그게 죽음에 본질입니다. 죽음은 뭐 생명이 끊어졌다! 그게 죽음이다! 상관없어요. 사실은 어떤 면에서 죽음! 그러면 뭐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영혼이 없어진다! 그 다음에 뭐 아무것도 없어진다! 사고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만 정의를 한다면, 예수 믿을 이유가 별로 없어요. 별로 없는 게 아니라 예수 믿고 착하게 살고 진실하게 복음 들고 산다! 이렇게 할 이유가 별로 없어요.

만약에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고, 죽으면 영혼도 없어지고, 죽으면 아무것도 없이 없어진다! 그러면 나는 오늘부터 안 믿을래! 왜? 안 믿고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마음대로 방탕하고 그게 낫지! 뭐하려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거든요. 죽어버리면 끝인데, 그런데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참 복음 가지고, 이 땅에서 복음의 삶을 살아야 되느냐? 반드시 죽음 이후에는 영원한 멸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기 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겁니다. 그 나라를 지금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 복음의 생명을 갖고 살 때에, 이것을 우리가 복음 붙들고 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죽는다는 배경에서 참 죽음은 영원한 멸망! 그것이 참 죽음의 본래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을 보고서, 뭐 죽는다! 그러고, 죽음에 대해서 간단히 말할 때에 참 불쌍한 것이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전도하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당장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그러면, '하나님 저 사람을 5분만 지옥에 약간 들어갔다가 나오게 해 주옵소서!' 이러면 5분까지 갈 것 없어요. 뭐 '하나님 5분이 너무 길면 1분만 들어갔다가 나오도록 해 주옵소서!' 여러분 아마 그대로 1분만 지옥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당장 달라질 것입니다. 그때부터 완전...

그런데 여러분 기도가, 그리고 성령으로, 영적으로 기도가 응답된다! 복음을 증거 한다! 그럴 때에, 이 역사가 이루어지면 그들이 알지 못하지만 영적으로 그 사실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된다 그러면, 복음을 안 받고는 견딜 수 없죠.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에 불신자의 망한 표적부터 쭉 설명하잖아요. 그러면 누구든지 그럽니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죠!' 이러더라 구요. 그렇게 안 되려고 그러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때에는 뭡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로 구체적으로 설명하게 됩니다. 그러면 다 영접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참 죽음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불신자의 6가지 망하는 순서를 조금만 설명해도 돼요. 조금만 이해가 되어도 그렇게 복음을 바로 받을 수 있는 그런 이유가 되는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길은 반드시 먼저 뭐가 필요하냐? 죽음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죽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표적이 아닙니다. 오늘 요나의 표적! 죽음을 말합니다. 누구의 죽음이냐? 그것도 아무나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메시아의 죽음! 이 일이 이루어 져야 인생에, 인간에 참 구원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이것이 나오지 않으면 참 구원의 역사가 나올 수가 없죠. 그래서 이 사실을 쭉 설명한 것이 구약에 제사 제도입니다. 구약에 제사 제도가 어떻습니까? 양을 끌고 와서 제사장에게 자기의 죄를 말하고, 그 다음에 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제사장이 모든 죄가 양에게 갔다는 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그 자리에서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각을 다 뜹니다. 내장을 끄집어내어서 갔다가 버리고, 그 다음에 그 각을 떠서 번재 단 위에서 그대로 태웁니다. 이것을 구약은 제사라 그랬습니다.

먼저 양을 잡고 피를 흘려야, 쉽게 말해서 메시아가, 오실 메시아가 여러분과 저의 죄를, 원죄를 인간이 마땅히 죽어야 될 사단의 손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영원한 멸망에 본질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구원의 역사가 약속이 됩니다. 이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가 성육신 메시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신 약속을 성취하신 사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것을 계속해서 설명하는 것이 구약에 설명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러니까 매일매일!

그래서 말하자면 그 구약에 제사지낼 때에 마치 도랑에 물이 흘러가듯이 피가 성전에서부터 피가 그렇게 흘러갔다고 야서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매 순간 순간 계속해서 양의 죽음은 누구를 말합니까? 오실 메시아의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가 바로 이런 제사죠. 히브리서 9장 22절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받아합시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는, 양이 죽고 피 흘려서 대신 속죄함을 받는 이 원리 밖에... 그래서 이 원리를 구체적으로 성취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여러분과 제게 진실한 구원이 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린다! 그럴 때는 피 흘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피 흘릴 때에 사단의 요구에서부터 완전히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단의 세력을 꺾는 순간이 바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여러분들이 귀신 좇아내고, 그럴 때에 피에 대한 찬송을 많이 부르잖아요. 그게 다른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 원리를 바로 알면 피에 대해서 '예수 피, 예수 피!' 할 것도 없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 그건 뭘 말합니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그러면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꾸 이래가지고 피를 자꾸 말하다 보니까, '예수 피! 피, 피, 피, 피!' 이러다가 그만 생활 속에서도 '피!' 그러고 그러다가 뭐 이상한 버릇이 나오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이 다 속하는 겁니다. 그때에 흑암에 세력이 떠나고 사단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십자가에서 이 사실을 예수께서 다 완성하셨기 때문에,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셔서 피 흘릴 것을 완성하셨고 성취시켰기 때문에, 이 성취한 순간에 그렇게 인간을 붙들어 매고 있던 모든 속박에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음이니라!' 할렐루야!

이 사실이 여러분과 제게 성령은 언약이라 그랬습니다. 이걸 약속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축복의 약속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에게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주신 즉시 우리 약속을 잡고 있는 순간부터 내 인생을 다스려 나가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을 확인하고, 믿고, 내 인생을 다 맡기는 것이지! 언약에 뿌리를 내린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자기 중심에 있어서 사는 것은 언약을 믿는 게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안되기 때문에 오는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바로 할 수 있다면, 먼저 갈라디아 2장 20절에 되어야 된다! 그 말이 그것이거든요. 내 개인의 감정, 개인의 욕심, 개인의 느낌, 개인의 모든 것들을 전부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 이때부터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상한 것은, 걱정하지 마라! 네가 가지고 자꾸 서둘지 마라! 네가 가지고 애쓰지 마라! 나한테 다 맡겨라! 내가 다 해주마! 이렇게 좋게, 좋게 말씀하신 것을 못 믿고, 안 믿고, 언약을 안 믿는 것이 이상하거든요. 안 믿고 자꾸 자기가 들고 걱정하고, 자기가 들고 애를 쓰고, 자기가 들고 이빨 갈고, 자기가 들고 눈 부릅뜨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그렇게 하지 마라 그래도 좋은 일을 시키고 쉬운 일을 말해도 못 믿고, 못하고, 또 못 따라오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사단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게 안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언약을 믿고, 언약에 다 맡기고, 참 믿음으로 살아라! 너무 쉽고 너무 좋은데도 왜 이 안 되느냐? 사단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사단의 노예라 안 그럽니까! 그 사단의 손에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합니다. 내가 주인이 됩니다. 그 사단에 있기 때문에 사단이 주인이 되어야 되는데, 사단이 아주 교활해 가지고 뒤에 싹 숨고 이제부터 네가 주인이다! 속는 겁니다. 네가 주인이다! 뭐가 네가 주인이냐? 사단이 주인이지! 그래서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고, 자기 자신이 전부가 되어 있는 사람은 전부 사단에게 속는 겁니다.

말세가 될수록 이 감정이, 이 마음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왜 말세가 될수록 사단이 최고로 발악하는데, 그래서 이 시기에 이 땅에 참 우리가 참 구원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시는 요나의 표적밖에는 참 된 구원의 표적이 없다! 이것이 오늘 강조해 주신 말씀이 되겠죠.

그러면 또 한가지 말씀해 주신 것이 뭐냐하면, 반드시 생명의 역사를 위해서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거든요. 죽었다! 그러면, 죽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면, 복음이 안 되는 겁니다. 반드시 죽음 속에, 죽음이 있어야 살아난다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어야 살아나는 게 의미가 있는 것 아닙니까! 안 죽었는데 살아났다 그러면 이 건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살아있는데, 살아났다 그러면 말이 안 되잖아요. 반드시 죽음이 전제되어야 생명이란 말이 의미가 나옵니다. 살았다는 말의 의미가 나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부활이라는 말이 의미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은 부활의 종교라 그럽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초대교회에 이 구체적으로 복음을 설명할 때에 뭐냐하면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죽었다가 뭘 말합니까? 부활하신 예수! 초대교회에 모든 복음에 증거가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이 사실이 복음에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크리스마스보다도, 어떤 면에서 부활절이 훨씬 기념일로 성대히 지켜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되어 가지고 성탄절이 많이 이렇게 지켜지고 있는데, 이건 뭐 세상사람들이 지키는 일입니다 만은, 사실 우리는 훨씬 부활절이 여러분과 제게 참 생명의 중요한 요소인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로마서 8장 2절에 말씀했습니다 만은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어떻게 했어요? "해방하였음이라"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것을 가지고 성경은 뭐라고 말하느냐? 예배라! 그랬습니다. 예배라! 저는 그 시간이 갈수록 예배에 대한 개념이 참 중요하구나! 그래서 성도가 예배만 바로 드려도, 막 그냥 막말로 말한다면, '주일날 예배만 바로 드려도 성공한다!' 그건 보장된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생명을 강조하기보다도 율법 속에서도 주일날을 주일날이라는 어떤 의식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대인의 율법 아닙니까! 안식일에는 얼마 정도의 거리는 걷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뭐도 하지 마라! 심지어는 댕기도 옛날에는 머리를 묶고 이랬으니까, 그것도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뭔가 안식일이라고 그래서, 사실상 이 배경이 예배에 대한 개념을 강조하고 있는 배경인데도, 예배를 드리기 위한 나변의 문제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복음이 아닌 문제거든요.

그래서 예배라 그럴 때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될 것이 뭐냐하면, 복음이 안 된 자들은 예배가 시작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참 생명이 없는 자들은 예배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오늘 교회 나왔다! 그럴 때에, 교회 나온 것으로 의미 이전에 중요한 것은 교회 나왔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내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고, 이 생명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나올 수 있도록 은혜주신 이 축복이 여러분 지금 나와있다는 이 축복의 역사가 다릅니다. 여기에 나왔다! 생명 없이 나왔다! 그건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생명이 없는 사람, 복음이 없는 사람은 참 예배를 드릴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 자리에 나왔다! 내게 하나님이 생명 주셨구나!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여러분 예배라는 것이 구약에 번재라는 말씀을 안 드렸습니까! 양을 잡고, 양의 피를 완전히 흘리고, 각을 뜨고,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이 신약에 예배라 그랬습니다. 예배라는 것이 뭐냐하면, 죽음이 전제된 곳에, 그 다음에 살아나는 축복과 역사가 바로 이어진 것이 예배의 의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지금 구약에 양을 가지고 재물로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되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예배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신약에 한번 물어봅시다. 신약에는 제물을 가지고 나와야되는데, 어떤 재물을 가지고 나옵니까? 양을 가지고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여기 나왔을 때에 생명을 가지고 나온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를 위해서 내가 죽은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품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게 생명의 예배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에 내 모든 삶이,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것이 이게 연결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만 바로 해도 여러분 인생에 승리가 옵니다.

그래서 류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늘 해요. 미국에 재벌 록펠러가 자기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서 예배드리기 전에, 꼭 40분전에 먼저 왔습니다. 먼저 와 가지고 기도하고, 예배준비를 했습니다. 그에게 지금까지도 미국에, 세계에 그 재벌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돈 많이 벌기 위해서 예배에 승리하자! 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조금 예배에 대한 개념이 참 생명의 역사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이 개념이 조금만 바로 세워진다 그러면, 여러분 주일날 하는 일이, 뭐 주일날 '뭘 하면 어떻습니까? 뭘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물을 필요가 없다. 그 묻는다는 자체가 벌써 예배라는 개념이 첫 번부터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뭔가 여러분들이 그 예배를 따라 가지고, 예배 밖에서 막 성공하려고 발버둥칩니다. 그것은 세상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여러분과 제게는 하나님이 너무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불 신앙 때문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참 된 생명의 표적!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조금만 눈을 떴다!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여러분 공식 예배, 공식예배! 이러니까 다른 것은 뭐 못한다 그럴지라도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 이 예배를 위해서 정말 눈뜨고 말씀을 바로 붙잡을 수 있는, 귀중한 이 예배 위해서 조금만 준비하는 마음으로, 조금만 먼저 와도, 조금만 기도하면서 준비해도 여러분 인생은 달라져 버립니다. 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다 되는 것 아닙니까!

이번에 그 수련회 동안에 청년들한테, 우리 청소년들한테 쭉 메시지 속에서 나오는 내용이 뭐냐하면, 믿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과 경쟁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경쟁하면 경쟁 할 수가 없어요. 왜? 경쟁 상대가 안 되는 데, 여러분 거짓말쟁이하고 참 말하는 사람하고 누구를 더 잘 믿습니까? 거짓말을 훨씬 더 잘 믿어요. 왜? 그게 훨씬 아름답거든요. 참말 하는 사람은 안 아름다워요. 참 말하는 사람은 오히려 아파요. 그러나 거짓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듣기 좋은 말로 안 합니까! 그러니까 일단 여러분 대화할 때에 나한테 듣기 좋은 말만하거든 주의하세요.

어떤 면에서 나한테 듣기 좋은 말보다도 진실한 말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드려도 좋습니다. 일부러 뭔가 비난한다 그런 것과는 말이 다릅니다. 차원이... 이런 면에서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듣고 한 주간 동안 살아간다 그건 뭐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예배에 조금만 준비하면 이것은 아마 뭐 경쟁상대가 안되죠.

그러면 경쟁상대가 안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뭡니까? 요셉을 예를 많이 들더라 구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다른 형제와 경쟁이 안되잖아요. 그렇지만은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뭐합니까? 하나님이 요셉을 축복하시니까 다 되는 문제 아닙니까? 여러분 가정, 신앙, 생활 속에서 다른 모든 어떤 상대와 다른 형제들과 다르다는 것이 뭡니까? 하나님이 내게 축복하셨다! 다 끝나는 겁니다. 여기는 경쟁이라는 것은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참 예배에 승리하고, 성공하게되면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십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뭐 맨 날 안 되는 것 같고, 맨 날 양보하는 것 같고, 맨 날 이상한 것 같은데, 보면은 뭔가 축복이라! 늘 축복이 따라 옵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요셉을 보고 보디발이 고백한 것이 나오죠.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 저 사람 뭐가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구나! 이 사실이 바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기도 많이 해서 그렇다! 노력 많이 해서 한다! 착하게 해서 온다!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다른 것보다도 먼저 여러분 아실 것은, 예배에 성공하십시오. 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공식으로 나올 때에, 일주일에 한번 약속한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조용히 한번 예배드려 보세요. 그리고 이 거룩한 날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한번 예배드려 보세요. 주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로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 다음에 여기에 따라오는 것이 매일 순간 예배입니다. 그래서 계속 메시지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정시 기도를 할 때마다 뭘 얻는다 그랬습니까? 새 힘을 얻는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죽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얻을 때에 뭡니까? 새 힘을 얻으리라! 너희는 새 힘을 얻으리라! 독수리의 날개 침 같이 도저히 장정이라도, 소년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지만,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에게는 뭡니까? 새 힘을 얻으리니 중요한 겁니다. 바로 이 새 힘을 얻는 길이 뭐냐하면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배에 가장 순간, 순간 지속되는 축소적인 예배가 뭡니까? 기도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죽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죽음을 힘 얻고 그 이름으로 누구한테 나갑니까?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 뒤에는 반드시 뭐라 그럽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게 보증입니다. 그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여기에 나갈 때마다 뭘 받는다, 얻는다!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새 힘을 얻으리니' 새로운 치료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능력이 임할 때에 이것이 우리의 모든 삶에 승리하는 축복과 은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할 때마다, 새 힘을 얻는 적은 경험만 와도 여러분 생애는 축복이 약속된 정도가 아닙니다. 풍성해 집니다. 여기에 성령의 충만이 약속하고, 이것이 모든 우리 생활과 삶에, 부요함과 충만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여기는 아프다, 슬프다, 실패했다! 상관없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무엇으로? 믿음으로! 참 구원과 참 생명의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영원한 축복과 은혜의 사실이 날마다 체험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우리를 구원하는 참된 표적

☞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구속의 표적 이외에는 이 악한 세대를 건질 표적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비한 인간적인 불신앙의 표적을 구했지만, 진실로 이 세대를 구할 수 있는 표적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 나에게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신비적으로 후다닥 해결해 달라고 불신앙으로 표적을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 복음을 떠난 자들이 구하는 표적은 미신과 우상일 뿐입니다. 그러한 표적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건질 수 없습니다.

☞ 복음이 안되면, 모든 종교가 표적을 구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복음이 확립되지 않으면, 신비주의적인 표적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복음이 바르게 확립되지 않으면, 기독교인들조차도 바리새적인 표적을 구하며 신비주의 종교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러한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있습니다.

☞ 우리의 눈 앞에 신비한 것이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우리를 건질 수 있는 표적은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 동안 땅 속에 묻혀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표적으로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더 이상 다른 신비적인 표적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 요나의 표적 =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① 죽음 : 범죄한 아담에게 대한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 먼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의 삯은 영원한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메시야의 죽음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음을 구약의 제사장 제도로 보이셨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고 죽으심으로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 이러한 약속을 세우시고 이루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심으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맡기는만큼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선하게 이루어주십니다. 이것은 매우 쉬운 일인데도, 사단에게 속아서 너무나도 어려운 일로 여겨져서 자기의 마음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말세의 모습입니다.

② 부활 : 죽음으로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있기에 복음이 우리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새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새생명을 얻은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축복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새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감격이 넘치므로 우리의 예배는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 예배는 죽음이 전제된 곳에 다시 살아나는 축복과 역사가 이어지는 것이므로,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생명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내 모든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예배를 잘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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