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너는 복이 있도다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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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 13: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마 13: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제목에 사실은 그러나 "너는 복이 있도다" 그렇게 잡아야 됩니다 만은, "너는 복이 있도다" 그렇게 했습니다. 본문말씀 보면 13장 14절에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마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할렐루야! 여러분 반드시 똑같이 못 듣고 못 보는데도, 그러나 여러분들은 은혜를 입어서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들었다! 그걸 복이라 그럽니다. 우리가 창세기 6장에 보면, '그러나 노아를' 뭘 입었어요? '은혜를 입었더라!'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복이라는 개념이 참 그 다양합니다. 이것도 또 묘해요. 안 믿는 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다르고, 믿는 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다릅니다. 여기에 앉아 계시는 여러분들은 믿지만 여러분들도 신앙수준에 따라서 복의 개념이 달라요. 그래서 지난주간에 네 종류의 신자라는 그런 제목으로 말씀 드렸습니다. 보면 그 신자들 중에서, 뭐 쉽게 복에 개념을 분석을 해 본다 그러면, 아마 그 신자들 중에서 어떤 신자들은 전혀 뭔가 노력도 하지 않고, 소위 말해서 운이 좋았다! 그런 식으로, 돈 다발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복이라는 개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복이라 그러기도 하죠.

그래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어떤 사람들은 한번 예배 드렸다! 막 복이 쏟아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주술적인 것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고, 이것은 축복의 시작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렇게 빠져들 수 있죠. 그래서 저는 뭔가 기업이 시작될 때에, 가정 혹은 어떤 기업에 예배드릴 때마다 꼭 이점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뭐냐하면 한번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의 복이 쏟아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 축복과 은혜가 시작이 되는 것이고, 여러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손안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게 되느냐! 이것이 예배고, 구체적으로 이 예배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이런 사실적인 역사가 누려지는 과정 속에서 복이 오는 것이지, 그냥, 그리고 거기에 복이 온다는 말도, 돈을 받는다는 그런 개념보다도 다른 것에 더 비중이 드려져야 됩니다.

그리고 소위 말씀하는 데로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처럼, 재리와 염려! 소위말해서 어떤 욕심이 채워지는 것이 복이다!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복이다! 이런 식으로 복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돌짝 밭에 떨어졌다! 이것은 내 주관이, 자기의 욕심이, 자기의 계획이, 자기의 욕망이, 자기가 성취되면 복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성경이 말씀하는 복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수준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깨달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들어도 들을 수 없고, 보아도 느낌도 감각도 없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6장 9절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절에"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그랬습니다. 이 말이 성경에 한 5, 6번 정도 인용이 된 말씀입니다. 이사야 가장 복음을 깨달았던 이사야가 그 복음을 깨달아서 복음을 복음으로 귀하게 여기지 못할 때에 오는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이 말씀은 지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배경에서는,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곧 말씀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나 이스라엘들이 전부 못 깨닫는데, 그건 오히려 못 깨닫는 정도가 아니고, 막 의식적으로 깨닫지 않기 위해서 마음과 생각을 닫아 버리고 있는 이런 시대에, 열두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들려지는 이 순간에, 귀로들을 수 있는 이 축복된 자리에 앉은 제자들, 너희들이 얼마나 복이 있느냐! 이 배경입니다.

쉽게 금방 적용한다 그러면 이 세대에 교회도 많고, 말씀도 많고, 성경공부도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를 못 깨닫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간단한 이 말 한마디가 이해가 안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여러분들이 이 말을 깨닫고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다는 이 축복된 자리에 앉았다! 복중에 복이다! 이래도 감각이 없는 것 같아요. 멍청하게 있는걸 보니까! '복이다!' 그래도 별로 감각이 없어요. 믿습니까? 진짜 믿어요?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제가 늘 그런 말씀을 하죠. 이것은 깨닫고 싶어서 깨닫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말씀한 것처럼 이 깨닫는 것이 어떤 목사의 표현대로 벼락맞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아무나 벼락 맞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말만 그랬지, 진짜 이 복음 깨닫는다는 사실이 이게 얼마나 귀하고 복된 역사다! 그래서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복이 있도다!' 이 그리스도의 축복의 역사가 깨닫고 알게된 이 축복의 은혜! 지금 눈앞에 있는 그리스도, 눈앞에서 말씀하는 그리스도, 그저 얼른 보기에는 별 신통한 것이 아닐 수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왜? 보는 것보고, 듣는 것 들었는데, 그것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미쳐 모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이 이 축복과 은혜를 보고 들으면서도 별로 몰라요. 못 느끼고, 못 깨닫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참 확실한 가치가 새삼스럽게 인식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복음 시대에 심판은 영적인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복음 시대에 저주다, 재난이다! 이럴 때는 영적인 것입니다. 옛날에는 당장 물질적인 것, 보여지는 것으로 재난도 임하고, 징계도 임했지만, 복음시대는 거의 그게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로 임하고, 영적인 문제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시대에 영적인 심판과, 영적인 저주와, 영적인 재앙에 제일 첫 번째 어떤 표현들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처럼 '이 백성이 마음이' 뭐라 그랬습니까? '완악하여졌더라' 그랬습니다. 이때에 여러분들이 당장 뭐 저주를 받아 가지고 막 죽는다, 어떻다! 그것보다도 저주 중에 저주가 뭐냐? 말씀 앞에 마음이 완악하여졌습니다. 이것이 저주 중에 저주요, 심판 중에 심판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에, 여러분 저주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듣게 하는 그런 배경이 자기 중심이요, 재리와 염려요, 이것을 말씀해서 완악함이라 그랬습니다. 이 말은 유교성과 무감각이 한테 뭉쳐진 표현이라고 볼 수가 있죠. 시편 119편 70절에 보면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저희 마음이 살쪄서 지방 같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지팡이 아래에 있으면서도,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아래, 하나님의 인도 아래, 하나님의 역사 아래에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자기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완악하여 졌습니다. 여러분 지난 주일에 설교를 조금 기억하시고, 요즘 계속해서 설교 속에 흐리는 역사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축복과 은혜로 인도하신다는 데에 대해서 감각이 없어요. 무감각합니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뭘 하느냐? 그런 것을 억지로 거부합니다. 오히려... 그리고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결정을 안 따라옵니다. 내 결정, 내 생각, 내 마음이 앞섭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과 모든 일을 자기 결정을 따라서 행동합니다. 분쟁하고, 다투고, 싸우고, 그게 다른 게 아닙니다. 죽어 버리면 다인데, 그게 축복과 은혜인데, 왜? 내 결정, 내 것이 다는 아닙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잘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빠져 버리면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런 것일수록 그 마음이 완악하여 졌다!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것이 강할수록, 불 신앙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들이 확실하게 보여질 수가 있죠. 이렇게 될수록 귀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될수록 귀가 들리지 않는 다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역사 하신다는 이 말씀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신명이 32장 15절 보면 "여수 도다" 똑같은 배경입니다. 자기가 살찔수록, 이 말은 자기 중심이 강할수록, 자기 생각이 강할수록, 하나님이 축복과 역사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전혀 그런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들어가지 않아요.

여러분 잘 알다시피 불신 세계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들어갔을 때에, 깨닫게 하시는 것은, '그러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통하지,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에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건 안 되는 것이죠. 못 듣는다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조차도 없고, 영향조차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다! 그래도, 저주다, 심판이다! 그래도 영향조차 안 받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안에 있으면서도 느낌이 없으니까, 괴로워하지도 않고 고민도 안 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에, '이래가지고 되겠나?' 이런 마음이 조금만 들었다! 복 받은 중에 복입니다. 이 생각조차도 없어요. '너는 말해라!' 그러나 주일날 안가면 마음이 불안하니까! 그래도 찾아옵니다. 그것만해도 좋습니다. 이것도 없어요. 그러니 아예 안 오는 겁니다. 한 달에 한번씩 와 가지고, 이런 마음으로 와서, 한 달에 한번씩 와도 그것만해도 복입니다. 아예 그런 마음 없으면 들어오지도 않아요. 여러분 오늘 잘 들어야 됩니다. 정말 완악하다는 말이 어디서 나오느냐?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느냐는 만큼, 하나님의 인도와 지배가 사실적으로 역사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영향력이 전혀 없습니다. 들어도 감각조차 없어요. 무감각합니다.

시편 58편 4절에 보면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이런 때에 응답은 무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의 빛을 온통 막고 있으니까, 지식의 창을 온통 닫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강력한 영광의 빛을, 영광의 빛을 비추는 창문을 다 닫았으니까, 흑암 속에 있을 수밖에 없죠. 그에게 나오는 판단과, 그에게 나오는 모든 생각은, 불안과 염려와 공포 속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에 당연히 오는 것이 마태복음 13장 15절죠.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오히려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할 것 같이 보이는 정도로 거부합니다. 아예 안 받아들입니다. 마음 문을 꽉 닫고, 말씀을 문을 완전히 꽉 닫고, 들어도 맹탕 헛일입니다. 한 주간 말씀 듣고 묵상한다! 나올 수가 없는 거죠. 기도가 안 나온다! 똑같은 배경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말씀 듣고 기도가 안 나오거든, 이런 배경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정말 한 주간 말씀을 하나님께 약속된 장소에서 말씀을 듣고, 정말 그 말씀이 내게 영향을 준다 그러면 나오게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기도가 그게 안 된다! 여러분 이 배경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엄청난 두려운 배경이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가장 큰 저주를 묘사를 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처참한 상태는 메마르고, 어리석고,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가장 생명력 있는 규율아래 앉아 있는 것이다!' 말씀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복음 시대에 복음에 전혀 영향을 받지 못하도록, 마음과 생각을 다 닫아 버리고 앉아 있는 것이 저주 중에 저주다! 그랬습니다. 나는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도 영향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뭐 저주가 아니라 저주 플러스 저주입니다. 이건 곱빼기 저주예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 복음을 알고, 복음 속에 있는 교회에 있다는 사실이 큰 축복인가 하면, 이걸 깨닫지 못할 때에 오는 반사적인 두려움이 오늘 이 말씀 속에서 한번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너무나도 귀중하고 복된 역사죠. 깨닫는 마음을 주시는 것 하나님의 은혜죠. 이것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저는 그 우리 신학원에 여러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가끔 가끔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금 이 복음에 대한 사실을 너무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그 전도사역을 안 하는 일반교단에 있는 그 교인들이 훨씬더 많이 느낄 수 있다! 그래요. 왜냐하면 신학원에서 메시지들은 것을 조금만 정리해 가지고 줘도 역사가 나온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뭐 그 요즘은 메시지가 너무 많으니까, 자기 교회 안에서도 뭔가 기관을 맡았다! 아니면 구체적으로 어떤 파트를 맡은 사람들이 목사님 메시지를 조금만 정리해 가지고 가감도 안하고, 그것만 그대로 전해도 그 사람이 어찌되었든, 메시지만 조금만 전해 줘도 기관이 잘되고 부응된다는 겁니다.

전도하러 사실상 나갑니다. 나가지 만은 그냥 전도지 돌리고 마니까, 거기에 조금만 메시지 정리해 가지고, 이대로만 해라! 그래도 읽는 수준만 해도, 역사가 나온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시대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이길 밖에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너무 큰 축복이다! 이래 말해도 우리가 축복과 은혜에 대한 사실이 확인이 안되니까 늘 멍청해요. 받아합시다. "나는 너무 큰 축복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감각이 없다!" 그런 것 같아요. 너무 큰 축복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감각이 없다. 제가 설교 잘한다, 못한다! 이 말이 아닙니다. 제가 다른데서 말씀을 좀 전하고 그럴 때에, 너무 은혜를 받고 그런 사실을 봐요.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 메시지를 매일 듣는 송현 교회는 얼마나 복되겠느냐!' 이러더라 구요. 그런데 우리 송현 교회는 별로 아니거든요. 늘 들어도 그저 그렇습니다. 너무 큰 축복 속에 앉아있기 때문에, 우리 사실 감각이 없어요.

그리고 이 큰 축복과 은혜가 지금 너무 복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모르고 있습니다. 왜? 저주 속에, 고통 속에서, 괴로움 속에서 이 메시지로 조금만 치료받아도 '도대체 이런 축복이 왠 일이냐!' 이렇게 느끼는데, 그러니까 그것조차도 없으니까, 늘 괜찮으니까, 늘 좋으니까, 늘 평안하니까 별로 감사가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한번씩 돌아 오라 그럴 수도 없고, 한번씩 지옥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러니 어떤 면에서 좀 답답한 면이 있어요. 너무 큰 축복 속에 있는 사실을, 이 사실을 모두 모르니까...

그리고 우리가 지금 교회를 건축한다, 뭐 한다! 이럴 때에 이게 얼마나 큰 축복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이 모르고 있는 겁니다. '아, 건축하는가 보다! 그런가 보다!' 그러니까, 기도를 지금 계속하고 있는데, 기도를 해도 별로 그렇게 감각을 갖고 기도하는 게 아닙니다. 다윗한테도 건축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교회가 아직까지 쉽게 건축에 실제로 덤벼들지 못하게 된 배경이, 하나님 좀더 기도 더하라고, 왜? 기도로 우리 마음과 심령이 좀더 준비가 되어야 되겠다! 싶어요.

그래서 지금 곧 이렇게 시작이 될 것 같은 그런 일들을 지금 보고 있지만, 아마 하나님께서 더 기도하라고, 더 준비하라고 왜? 엄청난 축복과 은혜에 앉아있으면서 이 가치를 잘 모르니까, 늘 요즘 그 메시지 속에서 뭐냐하면요. '의미를 좀 깨달아라!' 그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의미가 뭐냐? 이 축복의 메시지를 듣게되고,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다! 이 의미가 뭐냐? 모르고 있거든요. 멍청하니까, 그러니까 그들에게 감사가 나올 수도 있고, 감격이 나올 수도 있고, 그 축복과 역사를 주었으나 축복과 역사가 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을 모르니까, 받았지만 모르니까, 오히려 다른 것에 빼앗겨 버립니다.

심지어는 지난주에 말씀한 것처럼 길가 밭에 메시지가 떨어졌습니다. 말씀이 떨어졌지만 씨앗이 떨어졌지만 모르니까, 가치를 모르니까, 얼른 나와서 사단이 주어 먹어버렸습니다. 꼭 그런 식입니다. 너무 큰 축복 속에 있으면서도 다 놓쳐버려요. 누림이 안되고 있다! 이겁니다. 조금만 여러분들이 우리가 눈을 열고,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사실적으로 이해만 되어도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인도를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시대에는 심판에 방법이, 들을 귀와, 보는 눈을 주신 것을 빼앗아 버립니다. 이 무의 시키는 겁니다. 거짓 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만큼 무서운 심판이 없어요.

지금 여러분 보다시피 복음 막는다고 당장 죽음이 오고, 당장 뭐 다리가 하나 부러지고, 그게 아니거든요. 우리는 기도할 때에 그런 식으로 기도할 때가 많아요. '하나님 복음잡고, 막고 있는데, 당장 죽여버리든지 이런 악한...'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큰 저주는 뭡니까? 듣고 깨닫는 복음의 귀를 막아 버립니다. 이게 가장 두려운 저주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82편 11절에 보면,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여러분 지 마음대로 하는 것, 복인 줄 알지만,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엄청난 저주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 마음대로 할 때에 두들겨 맞아야 복중에 복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럽니까?' 그게 복입니다. 그래도 못 깨닫습니까? '하나님 왜 이럽니까?'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한 대 더 맞아야 돼요. 복중에 복을 지금 갖고 있으면서 이걸 못 깨달은 겁니다. 지 마음대로 내버려두는 것! 이게 뭐냐하면 저주라 그랬습니다.

호세아 4장 11절에 보면,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로마서 1장 28절에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4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러나 너희는 똑같은 세대에,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살아갈 사람들이지만 "너희는 복이 있도다" 왜? 듣고, 들려지니까! 보고, 보여지니까! 이게 간단한 것 같으나 우리 배경에 엄청난 영적인 축복과 은혜가 이 배경이 되어야 하나님이 이 은총과 축복 속에 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말씀했습니다 만은, 창세기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9절에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가 완전치 못해요. 노아의 자녀 위해서 자기 마음에 좀 안 든다고 자식을 저주했던 노아입니다. 그런데 다만 한가지, '하나님과 동행했더라! 은혜를 입었더라!' 완전하다! 그랬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신분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 완전하더라! 여러분 우리 행하는 일 보면, 꼴들이 희한합니다. 한번 옆에 사람 얼굴 쳐다보세요. 왜 얼굴 안쳐다 봐요, 보기가 부끄러운 모양이죠. 우리 얼굴가지고, 우리 꼴을 보면 완전치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께서 말씀하신 것, 신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내가 너와 함께 하기에 완전하더라!' '그러나 노아는 이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더라!' 그것이 은혜 받은 자요. 오늘 여러분과 제게 축복 받은 역사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 속에 처한 것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이끌어 가는 말씀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말할 때에, 그 예수 그리스도음성이 들려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보여지더라!' 이같이 오늘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축복을 깨닫는데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늘 말씀 듣는 겁니다. 늘 듣는 것, 그 말이 그 말 같은데, 이게 들려져야 돼요. 이게 이해되어야 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당장 2절에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길이 없어요. 여러분 마귀 사탄이 뭔가 꼭 지금 이 시간에, 이 순간에, 그리고 또 뭔가 어떤 경우에 창세기 3장 그때부터인가 보다! 그랬는데, 그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만은, 벌써 시작부터 나왔습니다. 여러분 혼돈하고 공허는 사단의 역사이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아닙니다.

벌써 이 땅에 왜? 그전에 벌써 사단의 존재가 에스겔서에 보면 이 나와있죠. 언제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이때에 이 천지창조에 하나님의 방법은 다른 길이 없어요. 1장 27절에 보면 딱 하나뿐이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인격으로 사람을 세우셔서 이 땅을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창조에 중요한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 그 능력과 권세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면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조금 더 정리를 한다 그러면, 우리가 늘 들은 이야기입니다 만은, 이 사실이 우리 가슴속에 와져야 되죠. 창세기 3장 1절에서 20절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똑같이 저주와 죽음과 멸망에 빠졌습니다! '나는 아닐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게 있어요. 우리가 예수 믿었다는, 솔직히 말하자면 예수 믿었다는 이런 생각 때문에, 내가 교회 왔다는 것 때문에, 예수를 믿어도 그냥 그렇게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그런 어떤 배경 속에서, '나는 지금 사단의 배경에서 빠져나왔다!' 이렇게 늘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부터 딱 우리에게 생겨진 것이 뭡니까? 흑암 세력과 영적 싸움 속에 있습니다.

왜? 본질상 진노의 배경이었던 것이 우리 배경입니다. 본질상 창세기 3장에 배경이었던 것이 우리 배경입니다. 그 배경 속에서 내가 예수로 말미암아 벗어났다 할지라도 내가 있는 환경과, 내 형제와 자매들과, 내 모든 일들은 그 환경 속에, 그 배경 속에 늘 같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일을 위해서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실제적으로 영적인 싸움이 구체적으로 일어나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대로, 부유한 자는 부유한 자대로, 흔히 말하기를 가난하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가 왔다! 그게 아닙니다. 부유한 자는 부유한 자대로, 그러니 어떤 직장과 상관없이 다 이 배경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흔히 뭔가 이 메시지를 전할 때에, 또 메시지를 전하면서 봅니다. 막 '영적 문제 무섭더라!' 자기 문제입니다. 전부 자기도 똑같은 문제 속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이기고 승리하게 하시는 것은, 오직 유일한 분 한 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받는 역사! 이게 늘 실감이 되어야 됩니다. '나는 한번 예수 그리스도 영접했다!' 그걸로 뭐 끝나버리는 줄 압니다. '나는 완전 천사의 공의에 서서...' 우리도 모르게 자신들이 빠져있는 옛날 모습 속에, 체질들 속에 자꾸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하고 염려할건 없어요. 왜? 그때부터 누가? 여러분과 저에게 구체적으로 인도의 역사입니까? 성령께서, 그리고 이런 영적 싸움을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눈과 사실들을 볼 수 있는 것이죠. 가난한 자들, 그 다음에 병든 사람들만 빠져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메시지 속에 그런 것을 듣잖아요. 찰리 채플린이 어떤 상담 자를 찾아가 가지고, '내가 요즘 우울증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어떻게 하면 이걸 해결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그 상담자가 뭐라 그랬느냐하면, '늘 즐거운 것만 생각하고 웃어라!' 그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웃을 수가 있습니까? 웃으려고 그러면 입이, 근육이 실룩거리는데, 웃어지지를 않거든요. 그러니까 도저히 웃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희극배우들이 나와서, 이 TV에 나와서 그런 것을 보고 자주 보고 웃어라!' 그러더랍니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자면, 우스운 그런 역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웃어라! 그러죠. '어떤 희극을 봐야 되느냐?' 그러니까,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것을 주로 보면 된다!' 그러더랍니다. 그러니 이 찰리 채플린이 '내가 찰리 채플린인데요...' 그랬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누구한테나 옵니다. 제일 웃음을 많이 주고 있는 세계적인 희극 배우이지만 그 사람도 자기는, 얼굴은 웃으면서도 그런 말을 하면서도, 자기 본인은 우울증으로 죽었습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흑암의 세력에 무서운 것을 아셔야합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희극배우가 한 분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면서 죽었습니다. 제가 지나간 과거도 보고하면서 안 죽으려고 몹시 애를 쓰더라 구요. 그러면서도 죽었습니다. 여러분 그냥 다른 사람을 웃길지는 모르지만 영적 배경은 웃긴다고 웃어지는 게 아닙니다. 웃는다고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럴 것 같으면 맨 날 웃고 돌아다니지, 암만 웃고 웃어도 떠나지 않는 배경이 영적 배경입니다.

여러분 혹시 교회 오실 때에 겉으로 싹 웃고 옵니까? 속으로는 죽으면서도... 그걸 우리 잘 알아야합니다. 내가 웃음을 보인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착한 것을 보인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 흑암에 배경은 전혀 여러분과 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찾아 왔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망하게 만들었죠. 그래서 잘 아는 데로 우리가 노아의 가정, 그 가정에 회복될 수 있는 길은 방주로! 오직 한길, 다른 길이 없다! 그 다음에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바벨탑! 사회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마음속에 딱 붙들어야 될 것이 절대적으로 이 길 이외에, 이일 외에, 이 사건 이 외에, 다른 길로 해방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을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건 신분이라는 배경을 말했습니다. 존재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길이 예수다!' 이렇게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왜, 예수께서 이 땅에 육으로 오셨는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 욥이 말한 것처럼, 앞을 봐도 없고, 옆을 봐도 없고, 뒤를 봐도 없고, 아무리 빙빙 돌아다녀도, 아무리 봐도 하나님 없어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안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영이신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예수! 육을 가지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아니 육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절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봄으로 성경에 뭡니까? 너희가 나를 보았느냐! 누구를 봤다 그랬습니까? 하나님을 봤다! 그랬습니다. 나를 만졌느냐? 나를 깨달았느냐? 나를 들었느냐? 하나님을 듣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과 제게 육으로 이 땅에 오셔서, 육을 가진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여셨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천국가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이걸 구체적으로 개인 개인에게 성취되기 위해서 누구를 보냈습니까? 성령으로! 성령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볼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로 볼 수 있고,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더라! 하나님이 계획이다! 이 축복과 역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이루어질 수 있도다! 이런 사람을 성경은 말하기를 복이 있도다! 할렐루야! 복이라 그러니까, 오늘 한 다발 쥐어주면 복인 줄 알지만, 그 한 다발 들고 가면서 이 축복의 역사를 놓치면 저주 중에 저주다! 성경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되죠.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 그분이,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 분이 오셨고, 그 분이 오셔서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루신 것이, 여러분과 저의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구약에 약속하신 것처럼 메시아! 피 흘려주셨고, 이 사실을 해결하셨고,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로 말미암아 다 해결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또 죄를 지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 해결되지 못할 죄가 없고, 바로 죄가 해결되는 동시에, 그 죄로 말미암아 온 저주와 재난들이, 재앙들이 빠져나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재앙이 해결되었다! 그럴 때는 여러분 구체적으로 좀 따라 붙여야 될게 있습니다. 뭐냐하면 회개가 와야 여러분 재난이 해결됩니다. 죄를 그대로 짓고 있는데도 재앙이 해결되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부르니까, 다 해결되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여기 삼직을 잘 이해 하셔야 돼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 죽었던 죄인을 해결하셨구나!'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지은 죄악들이 이해가 되고,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께 고백되어지고 그럴 때에, 비로소 십자가에서 이 일을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가 해결되는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뭐냐? 그로 통해서 죄 때문에 재앙과 저주가 왔거든요. 그게 따라서 해결되는 겁니다. 사는 것은 지 마음대로 살면서, 예수그리스도 이름 부르니 다 해결되었다! 그것은 속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라는 것은 성경에 많이 강조하게 될 때에 율법으로 치우칠까 싶어서 이 말을 자주 안 할 뿐이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반드시 뭐냐하면, 회개라는 것은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것을 무시해 버리고, 죄를 짓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이래가지고는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이거든요. 이것이 강조되니까 또 뭐냐하면, 십자가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주가, 또 뭔가 하면 내 마음에 신분자체가 흐려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 강조보다도 앞에 부분을 먼저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실 것은 저주와 재앙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뭐냐하면 누림이라는 뜻과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이 들어오게 되면 뭡니까? 죄악이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죄악이 떠난다는 것은 옛날 못된 습관과 버릇들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로 통해서 왔던 뭡니까? 저주와 재앙들이, 가문과 가정이 해결됩니다. 이게 안 되면서도 자꾸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잘 붙드셔야 됩니다.

이때에 여러분 이런 구체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도록 만드는 그런 배경이 뭐냐하면,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말하자면 내가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무슨 세력이? 사단의 세력이 나를 구체적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는 곳마다 뭡니까? '저주와 재앙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완전히 꺾이게 하옵소서!' 흑암 세력을 물리치고 있는 배경입니다. 반드시 기도할 때에 여러분 가정과 가문, 장소 있는 곳에서 앉을 때마다, 설 때마다, 여러분 갈 때에 뭡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로 '이 장소와 이곳에 역사 하던 흑암에 세력들을 꺾어주시옵소서! 이 사회에 역사 하는 흑암의 세력을 꺾어 주옵소서!' 영적인 배경을 봐야죠.

남편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닙니다. 그를 붙잡고 있는 세력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 세력들 앞에서 어떤 인간도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입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서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세력이 꺾여지게 될 때에, 남편의 마음이 돌아섭니다. 자식의 마음이 돌아섭니다. 그 땅에 흑암에 세력이 꺾여지게 될 때에 복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지역 지역마다 복음을 증거 할 때에, 그 지역을 분석하면서 먼저 전체를 보면서 뭘 하느냐? 흑암의 세력을 꺾어야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냥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요한1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이 한다는 게 아닙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아마 요즘 캠프 하는 사람들마다 느낄 겁니다. 캠프하면 캠프하러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시면 절대로 영접이 안됩니다. 영접이 안 되는 배경마다 완악합니다. 이제 이 말씀 배경가지고 말씀을 전혀 못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실 때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생각을 엽니다.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예비 되고 준비된 백성들만 영접합니다. 내 힘으로, 내 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은 계획을 가지시고 구체적으로 역사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시간표 따라서 흑암이 세력이 깨뜨려 질 것입니다. 꺾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여러분이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이 들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 라면, 한 주간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것입니다. 응답 받을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분노가 사라질 것입니다. 마음에 갈등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시간을 따라서 여러분과 저를 인도하심이 확인될 것입니다.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들이 한 주간도 계속해서 이 축복된 역사 속에서, 오늘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모든 문제 해결자시구나!' 깨닫고 감사하는,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가 얼마나 큰 은혜요, 감격이라는 사실이 오늘 이 자리에서 확인하며 돌아가시는 축복과 은혜가 계속되어지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진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 복은 재물이나 욕망이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진리를 보고 들을 수 있는 복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완악한 마음을 깨뜨립시다.

☞ 영적 재앙의 첫 번째 현상은, 말씀 앞에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주 중의 저주요, 심판 중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면서도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잃고 사는 것만큼 안타까운 것이 없으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려고까지 하니 이것은 오로지 저주와 심판일 뿐입니다.

☞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참으로 나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귀중하고 복된 일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복음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축복이 넘치는 속에 있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감사와 기쁨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건축의 축복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잘 몰라서 담담하고 냉랭한 상태에 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의 가치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이 옵니다.

☞ 축복의 가치를 깨닫기 위해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격으로 사람을 세우셔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단의 배경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가 필요합니다.

☞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저주와 죽음과 멸망에 빠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 영원한 사망에서 빠져나온 우리도 여전히 사단이 역사하고 있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영적 싸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모든 형편대로 사단이 활동하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 전투를 하며 이겨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단의 배경을 이겨나갈 수 있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 이제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진실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이름으로 새 힘을 얻어 사단의 배경을 꺾을 수 있는 눈이 열려지는 은혜를 입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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