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대로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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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제목을 "만나는 대로"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지난주간에 어린이 주일이고, 오늘 또 어버이 주일! 저희 어릴 때는 '어머니 주일'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마 아버지들이 섭섭하다 그랬는지 어머니, 아버지 합쳐서 어버이라 그렇게 삼았습니다. 이런 주일이 있다는 것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우리 류 목사님 메시지 속에서 고아원이 있다는 것이 뭐가 있다는 겁니까? 고아가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어버이 주일이 생겼다는 것이 이 어버이에 대한 어떤 바른 개념이 안 되어있다! 그런 이야기이고, 어린이 주일이 있다는 것이 어린이들에 대한, 후대들에 대한 바른 개념이 안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워낙 어린이들을, 유교사상에서 어린이를 마치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늘 어른 중심이고, 어린이를 무시하는 이런 일이 있으니까! 어린이 날! '하루라도 어린이들에게 잘 하자!' 그런 이야기인데, 우리는 '하루라도 어린이들에게 잘하자!' 그런 배경이 아니거든요. 어린이다! 그럴 때에, 정말로 우리와 우리 후대들이 이 땅에 소망과 희망이 후대를 살리는 일이다. 여기에 진정한 어린이 주일에 대한 사명이 있죠.
그리고 '5월 달은 가정의 달이다!' 그랬는데, 사실은 언제나 가정을 중심으로 해서 가정의 행복과 축복을 중심해서 사는 것이다! 5월 달만 하자는 것이 아니거든요. 워낙 자꾸 요즘 가정이 소홀해지고, 가정이 파괴되어지고, 가정이 어려워지니까 가정의 달을 만들어서 가지고 '가정의 달!'이라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안 되는 배경이 몸부림입니다. '여러분,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별로 대답이 없어요. 70%가 억지로 산다나요... 여러분과 저는 정말 100%로 감사함으로 살아야 되죠. 한번 받아합시다. "내 아내가 제일이다! 내 남편이 제일이다!" 어디에서? 주안에서입니다. 가정의 달!
오늘 계속해서 말씀을 강해하는 도중에 이 가정에 달에, 또 어버이 주일에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혼인 잔치에 비유입니다. 혼인잔치에 비유인데, 혼인 잔치를 열어 놓으신 분은 임금입니다. 거지가 혼인 잔치를 열어놓은 게 아니고, 어떤 지나가는 과객이 열어놓은 것이 아니고, 그 나라와 그 땅을 완전 지배하고 있는 임금이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예비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를 열어놓고, 혼인에 청한 손님들은 핑계를 대고, '나는 밭에 나가야 되겠다! 나는 상업 차 가야 되겠다!' 하나도 안 오고, 오히려 보낸 일꾼들을 그 핑계 대고 나간 사람말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보낸 그런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노를 발해가지고 그 고을과 그들을 진멸시키고, 그리고서는 다시 종들을 보내어서 아무데나 나가서 선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닥치는 대로, 만나는 데로라는 말이, 닥치는 대로 아닙니까! '닥치는 대로 내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권고해서 참여시켜라!' 그래서 가득 참여가 되었는데, 임금이 가보니까 가득 찬 면에서 너무 흡족한데, 또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혼인에 들어오면 예복을 입어야 되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또 묶어 가지고 밖에다가 내어 던졌다! 그것이 오늘 배경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뭘 말하느냐 하면, 혼인을 연 임금 중에 임금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그 다음에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 그 다음에 그 혼인 잔치에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유하면서 그 다음에 그 혼인 잔치에 초대한 그들을 죽이고, 멸망시킨 것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렇게 비유를 또 들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주었으나 복음을 막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오는 저주와 재앙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여기서 더 말해주는 것은, '복음을 방해할 때 오는 엄청난 저주와 재앙들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과 제게 뭘 말씀하느냐 하면, 혼인하는 당사자가 예수 그리스도! 말하자면 신랑을 예수 그리스도로, 신부를 여러분과 저로, 성도들로 그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여기에 참여한 자들, 다 말씀을 해서 복음으로 그렇게 묶어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는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고, 복음의 축복을 받았으나 받은 자리에서 복음은 누리지 못할 때에 반사적으로 지난 주일에도 조금 강조했습니다 만은, 이런 저주가 돌아온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면 더 큰 저주 속에 빠집니다.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교회 나와 있습니다 만은, 교회 나와있는 자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약속을 말씀대로 받지 못하면, 그 축복을 받지 못하면, 반대로 뭐가 온다 그랬습니까? 저주가 따라온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듣고, 말씀 듣는 중에 말씀 속에서 주신 하나님의 축복과 메시지를 잡지 못하면, 반사적인 작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그런 문제들을 오늘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말씀하고 싶은 것은, '혼인에 초청한 분이 누구냐?' 이겁니다. 혼인에 초청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초청에 여러분과 저는 초청 받은 자들이요, 또 그 초청 속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복음 속에 들어온 자들이죠.
그러면 이 관계를 조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혼인 잔치 때에는 풍성합니다. 거지가 잔치를 열어도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굶주리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풍부하고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잔치라는 속성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기에 초청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임금입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니까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혼인 자리를 배설하고, 잔치를 열고 초청을 했습니다. 그 초청에 들어가지 못해서 문제이지, 들어간 자들의 충만함을,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에 여러분과 제가 초청이 될 뿐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하실 것은, 먼저 참여했다가 그 초청을 받은 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다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참여하지 못했는데, 여러분과 저는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여한 주제들이 파악이 되어야 돼요. 뭐냐하면 초청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 정식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아니고, 워낙 초청을 받은 자들이 혼인자리를 거절하니까, 그 초청하신 주인이 뭐라 그랬습니까? '종들을 보내 가지고 닥치는 대로 불러오너라!' 그래가지고 온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악한 사람들이나, 선한 사람들이나, 그저 닥치는 대로 불러오너라!' 그 이야기입니다. 받아합시다. "만나는 대로 불러오너라!" 자격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축복과 은혜가 너무 엄청난 자리인데도 닥치는 데로 불러왔어요. 그것도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마구잡이로 불러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구잡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여기 있어요. '교회 오면 착한 사람이 되고, 교회 오면 선한 사람들이 온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교회는 마구잡이가 왔습니다. 여기에는 착하다 선하다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보면서, 이런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맞다. 어쩌면 이렇게, 이것을 몰랐을 때에 교회 와서 시험 들게 되거든요. 그래서 뭐 흔히 보면 교회 다니다가 안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뭐, '누구 때문에, 뭐 때문에...' 당연합니다. 왜? 마구잡이로 불러왔는데, 그게 부닥쳐 가지고 그런 어떤 교회를, 사람을 보고, 인간을 보고, 어떤 인간적인 모임을 봤을 때는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왜? 절대로 실망을 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모일수도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시험 들고, 교회 안에서 삐치고, 교회 안에서 이상하게 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다만 바로 알아야 될 것이, 여러분이 이 초청을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온 자리가 어떤 자리냐? 임금이 초청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제대로만 눈뜨고 우리가 누리게 되면 풍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혼인 잔치에 와서 배고프게 됩니까? 혼인 잔치에 와서 불만합니까? 아니죠. 혹시 와서 배고픈 자라도 지나가는 종들에게 그저 손만 들면 가져옵니다. '여기에 떡 한 접시, 여기에 돼지고기 한 접시...' 그러면 자꾸 가져옵니다.
그런데 보니까 달라고 그러는 사람들을 대게 보면 잔치 상에 수북히 놔두고, 자꾸 달라고 하더라 구요. 그래도 갔다가줍니다. 잔치 상에 풍성입니다. 더군다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당신의 독생자이신 아들 한 분뿐인 아들의 잔치입니다. 풍성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믿음이 없어 잔치를 누리지 못해서,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렇지 입만 열면 갔다가줍니다. '보아라, 두드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런데 이게 믿어지지 않아, 못 믿어, 이 축복된 자리에 왔으나 이 사실이 눈이 열리지 않으니까, 입다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입 다물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리지 못하니까 뭐가 나옵니까? 이 풍성함 속에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배고프고, 굶주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속에서 교회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못 누리는 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마치 늘 우리는 그런 말을 하죠. '창고 속에서 굶주려 죽은 쥐새끼'와 똑같습니다. 제가 이 쥐새끼라는 말을 좀 써서 미안합니다 만은, 교회 와서 이 축복과 풍성을 못 누리면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느냐? 그건 말로 할 수 없죠. '모르고, 안 보고, 못 보니까!' 이건 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조금만 사실을 보고, 조금만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면 너무 축복과 풍성을...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알고 있는 우리 선진들의 고백을 보게 되거든요. '너희가 입을 넓게 열라! 세우리라!' 약속하신 겁니다. 그분이 거지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 있으면서 말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풍성과 충만을 구체적으로 느끼며 말했던 부분임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 오셨다! 마구잡이로, 닥치는 데로 왔거든요. 와보니 엄청난 자리다! 바로 이것이 먼저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그런 기도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니, 하나님의 자녀로 통해서 오신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잔치 속에 초청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들어갔다! 그 이야기는 잔치 속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왜? 그 분속에서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문제 해결 받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이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한번 받아합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오, 깊도다!' 원래 원문은 '오, 깊도다!' 여기에 감탄사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함이여...' 이렇게 나와야 되거든요. 한번 받아합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함이여!" 이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오, 깊도다!' 이게 정말 이 축복과 은혜를 조금만 누려도 바울에게는 너무 너무 위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가히 측량할 것이냐!' 바울이 축복된 역사를 보고서 고백한 것이 있잖아요.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것이로다!' 그랬습니다.
늘 그런 고백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 만은, 가끔가다가 기도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그 영광이 조금만 내게 성령으로 체험되게 될 때에, 마치 뭐 공중에 뜬다는 생각으로도 안 되는 것이죠. 표현이 되지 못할 정도로, 그 기쁨이 밀려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변화가 따라 옵니다. 여러분의 변화는 초청 받은 자의 부유함 속에서 배경이 되어야 변화가 옵니다. 이것이 배경이 안되면 진짜 변화가, 기독교인의 변화가 나올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아침에 돈 한푼 없이 나오는 사람의 표정과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여러분 그 남편들이 아내에게 용돈 좀 달라고 그래가지고 용돈을 받아 나오는 표정과 그 걸음걸이하고, 용돈 달라고 그랬다가 거절당한 표정과 걸음걸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 내가 1원을 가지고 있는 자의 걸음걸이와, 1억을 가지고 있는 자의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표정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폼도 다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하면요, 진짜 변화는 하나님의 부요가 내게 체험되고, 하나님의 부요가 내게 있어야 여러분 얼굴이 바꾸어집니다. 걸음걸이가 바꾸어집니다. 생각이 바꾸어집니다.
제가 가끔 건강이 좋지 못하니까, 이 감정에 기복이 좀 있더라 구요. 제가 이 감정이 뭔가 건강이 약간 좀 좋아지고, 회복이 되고, 뭔가 이 좀 기분이 좋아졌을 때는 집에서 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 다 수용이 됩니다. 그 다음에 뭐 심지어 돈을 좀 달라고 그러면, '그것가지고 되겠냐?' 그러는데, 내가 좀 기분이 나쁘고, 뭐 이럴 때는 돈 달라고 하는 것도 짜증스럽고, 옆에서 일하는 것도 짜증스러워요. 그래서 내 표정도 얼굴도 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가 그리스도로 영접이 되고, 하나님의 풍요한 이 축복의 자리에 초청이 되었다! 그 다음에 내가 지금 현재 하나님의 부요를 먹고 마시고 누리고 있는 중이다! 여러분 얼굴이 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와서, 하나님의 기쁨이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격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궁색한 얼굴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부족한 얼굴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수용하고 용서하는 얼굴로 풍성함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판단과,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실제적인 배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여러분과 저를 풍성한 자리에 불러서,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왔습니다 만은, 이 사실을 실제로 누려야 합니다. 실제로 누려야 됩니다. 여기에 사실적인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말로만 아니라, 얼마나 부요 하고 충만한 것을 깨닫고 알 때마다 내 행동과 내 모습과 내 표정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우거지상을 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예수 믿고 부부간에 맨 날 이상하게 싸운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복음에 본질이 안되어 있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었는데, 가정에 부모자식간에 이상한 문제가 왔다! 가정이 이상하다! 그것은 근본 본질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달이다! 그 다음에 어버이 날이다! 뭐 어린이 날이다! 할 것 없어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 받은 자가 됐습니다. 어떤 면에서 초청 받은 자가 아니라, 자격이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불러 들여서 이 축복과 역사 속에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족할 때마다, 아니 연약할 때마다 손만 대면되는 겁니다. '여기도 한잔, 저기도 한잔!' 이 한잔은 술 한잔이 아니고, 감주한잔! 이 기쁨과 즐거움이 대화 속에서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고, 여기에 무슨 불평이 있고, 불만이 나올 수 있으며, 여기에 무슨 허물이 나오고, 무슨 것이 나옵니까! 이것이 안되었을 때에 나오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성경대로 못 누리면, 반대로 성경대로 뭐가 나옵니까? 저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에 우리 눈이 열려야 됩니다. 정말 우리가 이 사실을 오늘 좀 붙잡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서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 1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여러분 정말 예수 믿는 기쁨이 있습니까? 정말 예수 믿는 감격이 있습니까? '어쩌다가 내가 이런 자리에 있느냐?' 이것이 와져야 합니다. 이것을 말로만 아니라 사실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보면, 여기에 거절하는 이유가 무슨 이유냐 하면, 22장 4절에,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여기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주인이 임금이 살찐 소를 잡고,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이것은 뭐 일부가 아니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그랬는데, 이 축복과 이 은혜의 가치를 전혀 몰라요.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랬습니다. 이건 뭐 전혀 이해 못했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와 있습니다 만은, 이 축복된 은혜를 돌아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말씀들을 때에, '말씀! 참, 정말 감사하구나!' 이것이 돌아보지도, 깨달아 지지도 않아요. 이 느낌조차도 없어요. 그러니 항상 뭐가 앞섭니까? 내 육신의 일이 앞섭니다. 육신의 생각이 앞섭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사는, '밭으로, 상업 차로 갔더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닥칠 때마다, 문제를 당할 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어요. '창세기 3장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이라 그럴 때에, 누가 가정에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가정에 자녀들이 실패되기를 원합니까! 누가 부부간에 실패되기를 원합니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지금 어려운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가정에, 가문에 저주와 재앙들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 찾아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고, 그리고 열심히 뭔가 복을 받고 싶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부분을 몰랐어요.
진짜 오늘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실패하고 저주와 재앙 속에 빠지게 하는 뭐가 있습니까? 창세기 3장에 사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가 바로 봐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이, 우리 가정이 정말 평화롭고 아름답고 뭐 가정의 달을 만들 필요 없이 영원토록, 아니 이 땅에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이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합니다. 가족과 가정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잔치 속으로 들어가면 다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느냐? '사단의 손에 빠졌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지만, 그래서 자꾸 저주를 받게 되고, 재난을 받게되고,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죄를 짖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살인하고 자기가 감옥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자녀들이 잘못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누가 병들기 원하고 누가 가난하기를 원합니까!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단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단 혹은 마귀라 안 그럽니까!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도 원치 않는데도, 우리 자신들이 빠져있는 본래의 모습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나면서부터 이 저주와 재앙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바로 여기에서, 여러분 길거리에서 사악하게 돌아다니는 우리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 가지고 혼인자리에 출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기에서 전혀 깨어나지를 못해서, 이게 이해가 안되고, 이 초청의 가치를 몰라서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역시 여전히 저주와 죽음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나를 인도하는 흑암에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이해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바로 기억하실 것은, 우리를 죄악으로, 우리를 죽음으로, 우리를 멸망으로, 가정과 가족을 끌고 가는 배경이 사단이라면, 여러분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열심히 애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돈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땅이 과학 문명이 발달되었습니다.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자동차 탄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저주와 재앙의 세력을 완전히 꺾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분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초청하고, 내가 그분의 역사 속에 들어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혼인자리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왕권 속에 들어가는 그 속에,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부요와 축복이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이해가 될 때에,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이 축복과 역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실적으로 될 때에,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들이 너무 참여해 보니까! 흡족하니까! 너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에 충만하게 되니까! 나도 모르게 내게 이루어진 사실을, 너무 풍성한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때부터 뭐입니까? 만나는 대로 뭐가 이루어지느냐? 전도가 이루어지고, 만나는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나도 모르게 문제가 닥칠 때마다 내 밭으로 내 상업으로 아니고 문제가 닥칠 때마다 어디로? 하나님의 잔치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여기에 모든 해결이 이루어지죠. 바울은 그랬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뭘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생각이 그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지금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무엇이 생각되는 데로 뭔가 일이 터지면 뭡니까? 상업 차로, 육신의 것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참 축복의 배경인, 나를 아시고, 내게 축복하신, 내 모든 장례를 아시는 그 하나님의 초청의 자리로 가는 게 아닙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느냐? '자기 상업 차로, 자기 욕심으로, 육신의 돌아갔더라!' 그랬습니다. 교회 나와서 집에 돌아갔습니다. 흔히 그렇잖아요. 처음 예수 믿고 교회 와서 집에 돌아가면 도적이 들어왔거든요. 그러면 당장 돌아가는 것이, '교회 갔더니만 이렇게 되었네!' 이런 식으로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초청 장소로 들어가게 될 때에, 거기에 풍성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게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마음이 들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면 뭐라 그랬습니까? '모든 것을 풍성의 자리로 인도 해주신다!'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이 축복된 역사를 흔히 우리가 '기도하라!' 뭐 이렇게 말씀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여러분과 제가 생각기도라 그랬는데, 생각기도도 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 구체적으로 내가 누리는 사실이 있어야 생각기도가 나오지, 맹탕 우리 생각이 내 상업 차로, 맹탕 내 밭으로 여기에 항상 있는데, 그리고 지배하는 지배자가 그게 다른 게 지배하고 있는데, 생각으로 갈 수 없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아마 신앙생활 속에서 이 일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게 조용하게 얼마간만 이루어져도 아마 여러분 달라질 것입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예를 들어서 제가 옷을 한번 입었습니다. 맞추어 입었습니다. 그러면 옷을 입고 나가게 될 때에, 나도 모르게 옷을 입는 순간에, '이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어디에 가느냐? '이 옷을 입고 내가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는 안 가야 되겠다!' 나도 모르게 이게 와 지잖아요. 그러면서 제일 처음 이 옷을 입고 나갈 때에, 뭐 하는데? '예배할 때에 이 옷을 입고 나가야 되겠다!' 저는 옷을 맞추면 거의 대게 예배할 때에 제일 먼저 입고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 만 연필을 하나 사왔어요. 샀는데, 이게 어디에서 사 왔느냐 하면, 벌써 조금 되었어요. 미국 가서 샀거든요. 딱 사고난 후에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나님, 이 만 연필로 하나님이 영광 되는 일에 쓸 수 있는 만 연필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돌아갑니다. '잘한다, 못한다!' 이전에, 제가 막 '많이 누린다, 잘한다, 못한다!' 이전에 최소한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축복의 초청에 참여했다! 그러면 모든 일, 닥치는 일마다 어디로 갑니까?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게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생각기도'라 그랬는데, 생각 기도의 배경이 이게 안되면 생각 기도가 안 나와요.
여러분 당장 문제가 생기면, 그래서 흔히 그렇잖아요. 사단에 빠진 사람들도 자동차 사면 돼지 대가리 끊어놓고 절하더라 구요. 이 자동차로 돼지를 기쁘게 해 달라고 절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절하더라 구요. 여러분 자동차를 사도 교역자를 초청해서 예배를 안 드려도 좋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것을 허락하신 주님, 자동차를 탈 때마다 하나님 내게 이 축복된 은혜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뭐 '사고나지 말게 해달라!'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동차 탈 때마다, 핸들 잡을 때마다, '하나님, 사고나지 말게 해 주옵소서!' 그것은 사고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사고 날 이유가 뭐 있습니까! '하나님, 이 자동차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그 뜻을 따라 살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게 안 돌아갔다! 그러면 여러분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돌아보지도 않고 상업 차로 갔습니다.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사단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흑암의 세력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잘 된다!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저주와 고통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현재 오늘 잠깐 말씀한 것처럼, 무슨 일이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역사!' 여기다가 초점을 맞추고, 내가 모든 일에 이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위대한 축복이라는 말의 배경이 뭐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나를 초청해서 내가 이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요를 누리고 있는 자리다! 이겁니다.
여기에 조금만 체험이 되면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기도가 쏟아져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워낙 안되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어디로 갑니까? 나의 밭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내 개인의 욕심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다른 짓으로 나갑니다. 잘못 되었다, 안 되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배경 때문에 문제라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생각과 마음이 정말 여기에 뭐 기도응답이 '뭘 해서 응답 받았다!' 그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 마음과 생각이 지금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 하나님의 초청된 풍성함 속에 있다! 아마 이렇게 살아갈 때에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확실히 믿는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주안에서...' 이 사실이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모든 마음과 생각 속에서, 지금 뭐 때문에 잘되었다는 배경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축복된 사실이 구체적으로 체험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귀한 약속을 주시고 그리고 마지막 말씀을 맺으면서, '만나는 대로'라는 것에는 이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벌써 다 예배해 놓았습니다. 만나는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여기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계획이 있고, '만나는 대로'라는 약속이 있죠. 그리고 그 만나는 대로 그들은 비로소 뭡니까? 악한 자로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하나님의 초청의 자리에 초대할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이 축복과 역사가 여러분과 저의 교회의 역사요,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제게 향한 역사입니다.
오늘 '예수 믿어라!' 말한다고 전도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런 배경에 서 있는 여러분 나의 풍성을,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충만히 증거하되, 만나는 대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상관없습니다. 이 복음 들고 나갈 때에 주님께서 이미 나와 여러분에게 계획이 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은 그 배경을 계획 속에서 성취하여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서론
가정의 달 뿐만 아니라 언제나 주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본문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혼인 잔치를 연 임금은 하나님이고, 처음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길로 갔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초청하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여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나중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큰 축복이 있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따라옵니다.
● 본론
1. 혼인 잔치를 열고 초청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 우리는 나중에 닥치는 대로 불러오라고 해서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2) 우리가 초청받아서 온 자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한 잔치입니다.
(3) 이 잔치 자리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입만 열면, 풍성한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4) 그러나 불신앙으로 입을 열지 못하면, 불만으로 가득 차서 불평합니다.
(5)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려야 합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실제적으로 누릴 때, 마음과 표정이 밝아지는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이 혼인 잔치의 초청에 거절하는 이유
(1) 임금이 베풀어 놓은 혼인 잔치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보다 육신의 것에 마음과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3) 가정에 저주와 재앙이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은, 창세기 3장의 문제를 일으킨 사단의 손에 빠져서 하나님의 혼인 잔치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4) 우리를 죄악과 죽음과 멸망으로 끌고가는 배경이 사단이기 때문에, 가정의 문제는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5)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왕권 속으로 들어가야 문제가 해결되어짐을 사실적으로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 결론
문제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왕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입든지,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각 기도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만나는 대로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초청할 수 있습니다.
● 기도제목
◎ 하나님의 혼인 잔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도록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마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마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마 22: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마 22: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마 22: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마 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마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마 22: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마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마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제목을 "만나는 대로"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지난주간에 어린이 주일이고, 오늘 또 어버이 주일! 저희 어릴 때는 '어머니 주일'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마 아버지들이 섭섭하다 그랬는지 어머니, 아버지 합쳐서 어버이라 그렇게 삼았습니다. 이런 주일이 있다는 것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우리 류 목사님 메시지 속에서 고아원이 있다는 것이 뭐가 있다는 겁니까? 고아가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어버이 주일이 생겼다는 것이 이 어버이에 대한 어떤 바른 개념이 안 되어있다! 그런 이야기이고, 어린이 주일이 있다는 것이 어린이들에 대한, 후대들에 대한 바른 개념이 안되어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워낙 어린이들을, 유교사상에서 어린이를 마치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늘 어른 중심이고, 어린이를 무시하는 이런 일이 있으니까! 어린이 날! '하루라도 어린이들에게 잘 하자!' 그런 이야기인데, 우리는 '하루라도 어린이들에게 잘하자!' 그런 배경이 아니거든요. 어린이다! 그럴 때에, 정말로 우리와 우리 후대들이 이 땅에 소망과 희망이 후대를 살리는 일이다. 여기에 진정한 어린이 주일에 대한 사명이 있죠.
그리고 '5월 달은 가정의 달이다!' 그랬는데, 사실은 언제나 가정을 중심으로 해서 가정의 행복과 축복을 중심해서 사는 것이다! 5월 달만 하자는 것이 아니거든요. 워낙 자꾸 요즘 가정이 소홀해지고, 가정이 파괴되어지고, 가정이 어려워지니까 가정의 달을 만들어서 가지고 '가정의 달!'이라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안 되는 배경이 몸부림입니다. '여러분,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별로 대답이 없어요. 70%가 억지로 산다나요... 여러분과 저는 정말 100%로 감사함으로 살아야 되죠. 한번 받아합시다. "내 아내가 제일이다! 내 남편이 제일이다!" 어디에서? 주안에서입니다. 가정의 달!
오늘 계속해서 말씀을 강해하는 도중에 이 가정에 달에, 또 어버이 주일에 이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혼인 잔치에 비유입니다. 혼인잔치에 비유인데, 혼인 잔치를 열어 놓으신 분은 임금입니다. 거지가 혼인 잔치를 열어놓은 게 아니고, 어떤 지나가는 과객이 열어놓은 것이 아니고, 그 나라와 그 땅을 완전 지배하고 있는 임금이 아들을 위해서 혼인 잔치를 예비했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혼인 잔치를 열어놓고, 혼인에 청한 손님들은 핑계를 대고, '나는 밭에 나가야 되겠다! 나는 상업 차 가야 되겠다!' 하나도 안 오고, 오히려 보낸 일꾼들을 그 핑계 대고 나간 사람말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보낸 그런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그 소문을 듣고 노를 발해가지고 그 고을과 그들을 진멸시키고, 그리고서는 다시 종들을 보내어서 아무데나 나가서 선한 사람이나 착한 사람이나 닥치는 대로, 만나는 데로라는 말이, 닥치는 대로 아닙니까! '닥치는 대로 내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권고해서 참여시켜라!' 그래서 가득 참여가 되었는데, 임금이 가보니까 가득 찬 면에서 너무 흡족한데, 또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혼인에 들어오면 예복을 입어야 되는데,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또 묶어 가지고 밖에다가 내어 던졌다! 그것이 오늘 배경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뭘 말하느냐 하면, 혼인을 연 임금 중에 임금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그 다음에 혼인 잔치에 초대된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 그 다음에 그 혼인 잔치에 초대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유하면서 그 다음에 그 혼인 잔치에 초대한 그들을 죽이고, 멸망시킨 것은 전체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렇게 비유를 또 들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주었으나 복음을 막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오는 저주와 재앙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여기서 더 말해주는 것은, '복음을 방해할 때 오는 엄청난 저주와 재앙들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과 제게 뭘 말씀하느냐 하면, 혼인하는 당사자가 예수 그리스도! 말하자면 신랑을 예수 그리스도로, 신부를 여러분과 저로, 성도들로 그렇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여기에 참여한 자들, 다 말씀을 해서 복음으로 그렇게 묶어놓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과 저는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복음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큰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고, 복음의 축복을 받았으나 받은 자리에서 복음은 누리지 못할 때에 반사적으로 지난 주일에도 조금 강조했습니다 만은, 이런 저주가 돌아온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면 더 큰 저주 속에 빠집니다.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교회 나와 있습니다 만은, 교회 나와있는 자들이, 교회에 나오게 된 약속을 말씀대로 받지 못하면, 그 축복을 받지 못하면, 반대로 뭐가 온다 그랬습니까? 저주가 따라온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듣고, 말씀 듣는 중에 말씀 속에서 주신 하나님의 축복과 메시지를 잡지 못하면, 반사적인 작용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그런 문제들을 오늘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말씀하고 싶은 것은, '혼인에 초청한 분이 누구냐?' 이겁니다. 혼인에 초청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분입니다. 그러면 초청에 여러분과 저는 초청 받은 자들이요, 또 그 초청 속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복음 속에 들어온 자들이죠.
그러면 이 관계를 조금 생각해 보면,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어려워도 혼인 잔치 때에는 풍성합니다. 거지가 잔치를 열어도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굶주리지 않습니다. 배고프지 않습니다. 풍부하고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잔치라는 속성 자체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기에 초청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임금입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니까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혼인 자리를 배설하고, 잔치를 열고 초청을 했습니다. 그 초청에 들어가지 못해서 문제이지, 들어간 자들의 충만함을,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에 여러분과 제가 초청이 될 뿐 아니라 여러분과 제가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하실 것은, 먼저 참여했다가 그 초청을 받은 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다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참여하지 못했는데, 여러분과 저는 참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여한 주제들이 파악이 되어야 돼요. 뭐냐하면 초청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 정식 초청을 받은 자들이 아니고, 워낙 초청을 받은 자들이 혼인자리를 거절하니까, 그 초청하신 주인이 뭐라 그랬습니까? '종들을 보내 가지고 닥치는 대로 불러오너라!' 그래가지고 온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악한 사람들이나, 선한 사람들이나, 그저 닥치는 대로 불러오너라!' 그 이야기입니다. 받아합시다. "만나는 대로 불러오너라!" 자격이 있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왜? 이 축복과 은혜가 너무 엄청난 자리인데도 닥치는 데로 불러왔어요. 그것도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마구잡이로 불러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마구잡이'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여기 있어요. '교회 오면 착한 사람이 되고, 교회 오면 선한 사람들이 온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교회는 마구잡이가 왔습니다. 여기에는 착하다 선하다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보면서, 이런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참 맞다. 어쩌면 이렇게, 이것을 몰랐을 때에 교회 와서 시험 들게 되거든요. 그래서 뭐 흔히 보면 교회 다니다가 안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뭐, '누구 때문에, 뭐 때문에...' 당연합니다. 왜? 마구잡이로 불러왔는데, 그게 부닥쳐 가지고 그런 어떤 교회를, 사람을 보고, 인간을 보고, 어떤 인간적인 모임을 봤을 때는 실망하기 마련입니다. 왜? 절대로 실망을 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모일수도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시험 들고, 교회 안에서 삐치고, 교회 안에서 이상하게 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다만 바로 알아야 될 것이, 여러분이 이 초청을 받아 가지고 왔습니다. 온 자리가 어떤 자리냐? 임금이 초청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제대로만 눈뜨고 우리가 누리게 되면 풍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혼인 잔치에 와서 배고프게 됩니까? 혼인 잔치에 와서 불만합니까? 아니죠. 혹시 와서 배고픈 자라도 지나가는 종들에게 그저 손만 들면 가져옵니다. '여기에 떡 한 접시, 여기에 돼지고기 한 접시...' 그러면 자꾸 가져옵니다.
그런데 보니까 달라고 그러는 사람들을 대게 보면 잔치 상에 수북히 놔두고, 자꾸 달라고 하더라 구요. 그래도 갔다가줍니다. 잔치 상에 풍성입니다. 더군다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잔치입니다. 당신의 독생자이신 아들 한 분뿐인 아들의 잔치입니다. 풍성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믿음이 없어 잔치를 누리지 못해서, 입을 다물고 있어서 그렇지 입만 열면 갔다가줍니다. '보아라, 두드리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런데 이게 믿어지지 않아, 못 믿어, 이 축복된 자리에 왔으나 이 사실이 눈이 열리지 않으니까, 입다물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입 다물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리지 못하니까 뭐가 나옵니까? 이 풍성함 속에서 불평하고, 불만하고, 배고프고, 굶주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속에서 교회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을 못 누리는 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어요. 마치 늘 우리는 그런 말을 하죠. '창고 속에서 굶주려 죽은 쥐새끼'와 똑같습니다. 제가 이 쥐새끼라는 말을 좀 써서 미안합니다 만은, 교회 와서 이 축복과 풍성을 못 누리면 똑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느냐? 그건 말로 할 수 없죠. '모르고, 안 보고, 못 보니까!' 이건 뭐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안에서 조금만 사실을 보고, 조금만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면 너무 축복과 풍성을... 그래서 우리는 이 약속을 알고 있는 우리 선진들의 고백을 보게 되거든요. '너희가 입을 넓게 열라! 세우리라!' 약속하신 겁니다. 그분이 거지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왕으로 있으면서 말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풍성과 충만을 구체적으로 느끼며 말했던 부분임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에 오셨다! 마구잡이로, 닥치는 데로 왔거든요. 와보니 엄청난 자리다! 바로 이것이 먼저 우리가 구원의 감격을 누리는 그런 기도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니, 하나님의 자녀로 통해서 오신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잔치 속에 초청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속에 들어갔다! 그 이야기는 잔치 속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왜? 그 분속에서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모든 문제 해결 받았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이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한번 받아합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오, 깊도다!' 원래 원문은 '오, 깊도다!' 여기에 감탄사가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함이여...' 이렇게 나와야 되거든요. 한번 받아합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부유함이여!" 이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오, 깊도다!' 이게 정말 이 축복과 은혜를 조금만 누려도 바울에게는 너무 너무 위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떻게 가히 측량할 것이냐!' 바울이 축복된 역사를 보고서 고백한 것이 있잖아요.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것이로다!' 그랬습니다.
늘 그런 고백을 더러 하고 있습니다 만은, 가끔가다가 기도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그 영광이 조금만 내게 성령으로 체험되게 될 때에, 마치 뭐 공중에 뜬다는 생각으로도 안 되는 것이죠. 표현이 되지 못할 정도로, 그 기쁨이 밀려오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변화가 따라 옵니다. 여러분의 변화는 초청 받은 자의 부유함 속에서 배경이 되어야 변화가 옵니다. 이것이 배경이 안되면 진짜 변화가, 기독교인의 변화가 나올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아침에 돈 한푼 없이 나오는 사람의 표정과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여러분 그 남편들이 아내에게 용돈 좀 달라고 그래가지고 용돈을 받아 나오는 표정과 그 걸음걸이하고, 용돈 달라고 그랬다가 거절당한 표정과 걸음걸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 내가 1원을 가지고 있는 자의 걸음걸이와, 1억을 가지고 있는 자의 걸음걸이는 다릅니다. 표정도 다르고, 얼굴도 다르고, 폼도 다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하면요, 진짜 변화는 하나님의 부요가 내게 체험되고, 하나님의 부요가 내게 있어야 여러분 얼굴이 바꾸어집니다. 걸음걸이가 바꾸어집니다. 생각이 바꾸어집니다.
제가 가끔 건강이 좋지 못하니까, 이 감정에 기복이 좀 있더라 구요. 제가 이 감정이 뭔가 건강이 약간 좀 좋아지고, 회복이 되고, 뭔가 이 좀 기분이 좋아졌을 때는 집에서 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 다 수용이 됩니다. 그 다음에 뭐 심지어 돈을 좀 달라고 그러면, '그것가지고 되겠냐?' 그러는데, 내가 좀 기분이 나쁘고, 뭐 이럴 때는 돈 달라고 하는 것도 짜증스럽고, 옆에서 일하는 것도 짜증스러워요. 그래서 내 표정도 얼굴도 달라져 버립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가 그리스도로 영접이 되고, 하나님의 풍요한 이 축복의 자리에 초청이 되었다! 그 다음에 내가 지금 현재 하나님의 부요를 먹고 마시고 누리고 있는 중이다! 여러분 얼굴이 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와서, 하나님의 기쁨이 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격이 여기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궁색한 얼굴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부족한 얼굴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수용하고 용서하는 얼굴로 풍성함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판단과,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실제적인 배려가 나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여러분과 저를 풍성한 자리에 불러서,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왔습니다 만은, 이 사실을 실제로 누려야 합니다. 실제로 누려야 됩니다. 여기에 사실적인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말로만 아니라, 얼마나 부요 하고 충만한 것을 깨닫고 알 때마다 내 행동과 내 모습과 내 표정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우거지상을 해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예수 믿고 부부간에 맨 날 이상하게 싸운다! 그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복음에 본질이 안되어 있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믿었는데, 가정에 부모자식간에 이상한 문제가 왔다! 가정이 이상하다! 그것은 근본 본질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달이다! 그 다음에 어버이 날이다! 뭐 어린이 날이다! 할 것 없어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 받은 자가 됐습니다. 어떤 면에서 초청 받은 자가 아니라, 자격이 없는데도 막무가내로 불러 들여서 이 축복과 역사 속에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족할 때마다, 아니 연약할 때마다 손만 대면되는 겁니다. '여기도 한잔, 저기도 한잔!' 이 한잔은 술 한잔이 아니고, 감주한잔! 이 기쁨과 즐거움이 대화 속에서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하고, 여기에 무슨 불평이 있고, 불만이 나올 수 있으며, 여기에 무슨 허물이 나오고, 무슨 것이 나옵니까! 이것이 안되었을 때에 나오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가 성경대로 못 누리면, 반대로 성경대로 뭐가 나옵니까? 저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에 우리 눈이 열려야 됩니다. 정말 우리가 이 사실을 오늘 좀 붙잡고 구체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서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시편 2편 1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여러분 정말 예수 믿는 기쁨이 있습니까? 정말 예수 믿는 감격이 있습니까? '어쩌다가 내가 이런 자리에 있느냐?' 이것이 와져야 합니다. 이것을 말로만 아니라 사실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보면, 여기에 거절하는 이유가 무슨 이유냐 하면, 22장 4절에,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마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여기에 뭐라 그랬느냐 하면, 주인이 임금이 살찐 소를 잡고, 살찐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이것은 뭐 일부가 아니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그랬는데, 이 축복과 이 은혜의 가치를 전혀 몰라요.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랬습니다. 이건 뭐 전혀 이해 못했습니다. 전혀 몰랐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와 있습니다 만은, 이 축복된 은혜를 돌아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말씀들을 때에, '말씀! 참, 정말 감사하구나!' 이것이 돌아보지도, 깨달아 지지도 않아요. 이 느낌조차도 없어요. 그러니 항상 뭐가 앞섭니까? 내 육신의 일이 앞섭니다. 육신의 생각이 앞섭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사는, '밭으로, 상업 차로 갔더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닥칠 때마다, 문제를 당할 때마다 깨닫는 것이 있어요. '창세기 3장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이라 그럴 때에, 누가 가정에 실패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가정에 자녀들이 실패되기를 원합니까! 누가 부부간에 실패되기를 원합니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이게 지금 어려운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 가정에, 가문에 저주와 재앙들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자꾸 찾아오는데 어떻게 합니까! 노력을 안 해서가 아니고, 그리고 열심히 뭔가 복을 받고 싶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부분을 몰랐어요.
진짜 오늘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실패하고 저주와 재앙 속에 빠지게 하는 뭐가 있습니까? 창세기 3장에 사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가 바로 봐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이, 우리 가정이 정말 평화롭고 아름답고 뭐 가정의 달을 만들 필요 없이 영원토록, 아니 이 땅에 있는 동안만이 아니라 영원토록, 이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씀합니다. 가족과 가정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잔치 속으로 들어가면 다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느냐? '사단의 손에 빠졌기 때문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지만, 그래서 자꾸 저주를 받게 되고, 재난을 받게되고, 재앙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죄를 짖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살인하고 자기가 감옥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자녀들이 잘못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이,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누가 병들기 원하고 누가 가난하기를 원합니까! 그렇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단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단 혹은 마귀라 안 그럽니까!
중요한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도 원치 않는데도, 우리 자신들이 빠져있는 본래의 모습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태어나면서부터 이 저주와 재앙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요. 바로 여기에서, 여러분 길거리에서 사악하게 돌아다니는 우리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 가지고 혼인자리에 출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기에서 전혀 깨어나지를 못해서, 이게 이해가 안되고, 이 초청의 가치를 몰라서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역시 여전히 저주와 죽음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나를 인도하는 흑암에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이해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바로 기억하실 것은, 우리를 죄악으로, 우리를 죽음으로, 우리를 멸망으로, 가정과 가족을 끌고 가는 배경이 사단이라면, 여러분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열심히 애를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돈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땅이 과학 문명이 발달되었습니다. 과학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좋은 자동차 탄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저주와 재앙의 세력을 완전히 꺾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분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초청하고, 내가 그분의 역사 속에 들어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혼인자리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왕권 속에 들어가는 그 속에, 비로소 우리에게 참된 부요와 축복이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바로 이해가 될 때에, 여러분들에게 구체적으로 이 축복과 역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사실적으로 될 때에, 생각과 마음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들이 너무 참여해 보니까! 흡족하니까! 너무 그 나라에 들어가는 축복에 충만하게 되니까! 나도 모르게 내게 이루어진 사실을, 너무 풍성한 사실을 말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때부터 뭐입니까? 만나는 대로 뭐가 이루어지느냐? 전도가 이루어지고, 만나는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나도 모르게 문제가 닥칠 때마다 내 밭으로 내 상업으로 아니고 문제가 닥칠 때마다 어디로? 하나님의 잔치 속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여기에 모든 해결이 이루어지죠. 바울은 그랬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뭘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생각이 그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지금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우리는 무엇이 생각되는 데로 뭔가 일이 터지면 뭡니까? 상업 차로, 육신의 것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참 축복의 배경인, 나를 아시고, 내게 축복하신, 내 모든 장례를 아시는 그 하나님의 초청의 자리로 가는 게 아닙니다. 돌아보지도 않고 어디로 가느냐? '자기 상업 차로, 자기 욕심으로, 육신의 돌아갔더라!' 그랬습니다. 교회 나와서 집에 돌아갔습니다. 흔히 그렇잖아요. 처음 예수 믿고 교회 와서 집에 돌아가면 도적이 들어왔거든요. 그러면 당장 돌아가는 것이, '교회 갔더니만 이렇게 되었네!' 이런 식으로 돌아가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초청 장소로 들어가게 될 때에, 거기에 풍성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게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마음이 들어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랬거든요. 그렇게 하면 뭐라 그랬습니까? '모든 것을 풍성의 자리로 인도 해주신다!'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이 축복된 역사를 흔히 우리가 '기도하라!' 뭐 이렇게 말씀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여러분과 제가 생각기도라 그랬는데, 생각기도도 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 구체적으로 내가 누리는 사실이 있어야 생각기도가 나오지, 맹탕 우리 생각이 내 상업 차로, 맹탕 내 밭으로 여기에 항상 있는데, 그리고 지배하는 지배자가 그게 다른 게 지배하고 있는데, 생각으로 갈 수 없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아마 신앙생활 속에서 이 일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이게 조용하게 얼마간만 이루어져도 아마 여러분 달라질 것입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예를 들어서 제가 옷을 한번 입었습니다. 맞추어 입었습니다. 그러면 옷을 입고 나가게 될 때에, 나도 모르게 옷을 입는 순간에, '이 옷을 입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적으로 어디에 가느냐? '이 옷을 입고 내가 육신적인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는 안 가야 되겠다!' 나도 모르게 이게 와 지잖아요. 그러면서 제일 처음 이 옷을 입고 나갈 때에, 뭐 하는데? '예배할 때에 이 옷을 입고 나가야 되겠다!' 저는 옷을 맞추면 거의 대게 예배할 때에 제일 먼저 입고 나옵니다.
그 다음에 이 만 연필을 하나 사왔어요. 샀는데, 이게 어디에서 사 왔느냐 하면, 벌써 조금 되었어요. 미국 가서 샀거든요. 딱 사고난 후에 어떻게 기도하느냐? '하나님, 이 만 연필로 하나님이 영광 되는 일에 쓸 수 있는 만 연필로 사용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돌아갑니다. '잘한다, 못한다!' 이전에, 제가 막 '많이 누린다, 잘한다, 못한다!' 이전에 최소한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축복의 초청에 참여했다! 그러면 모든 일, 닥치는 일마다 어디로 갑니까?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게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생각기도'라 그랬는데, 생각 기도의 배경이 이게 안되면 생각 기도가 안 나와요.
여러분 당장 문제가 생기면, 그래서 흔히 그렇잖아요. 사단에 빠진 사람들도 자동차 사면 돼지 대가리 끊어놓고 절하더라 구요. 이 자동차로 돼지를 기쁘게 해 달라고 절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절하더라 구요. 여러분 자동차를 사도 교역자를 초청해서 예배를 안 드려도 좋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것을 허락하신 주님, 자동차를 탈 때마다 하나님 내게 이 축복된 은혜를 주신 것 감사합니다!' 뭐 '사고나지 말게 해달라!' 이런 배경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동차 탈 때마다, 핸들 잡을 때마다, '하나님, 사고나지 말게 해 주옵소서!' 그것은 사고나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사고 날 이유가 뭐 있습니까! '하나님, 이 자동차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그 뜻을 따라 살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게 안 돌아갔다! 그러면 여러분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돌아보지도 않고 상업 차로 갔습니다. 누가 지배하고 있습니까? 사단이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예요. 여러분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의 주인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흑암의 세력이다! 그러면 내가 지금 잘 된다! 문제가 아닙니다.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저주와 고통으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현재 오늘 잠깐 말씀한 것처럼, 무슨 일이나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영광, 우리 주님의 거룩하신 역사!' 여기다가 초점을 맞추고, 내가 모든 일에 이렇게 생각한다는 자체가 위대한 축복이라는 말의 배경이 뭐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나를 초청해서 내가 이 자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요를 누리고 있는 자리다! 이겁니다.
여기에 조금만 체험이 되면 그로 말미암아 엄청난 기도가 쏟아져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워낙 안되니까, 돌아보지도 않고 어디로 갑니까? 나의 밭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내 개인의 욕심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다른 짓으로 나갑니다. 잘못 되었다, 안 되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배경 때문에 문제라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 생각과 마음이 정말 여기에 뭐 기도응답이 '뭘 해서 응답 받았다!' 그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 그 마음과 생각이 지금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 하나님의 초청된 풍성함 속에 있다! 아마 이렇게 살아갈 때에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확실히 믿는 것은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주안에서...' 이 사실이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모든 마음과 생각 속에서, 지금 뭐 때문에 잘되었다는 배경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축복된 사실이 구체적으로 체험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귀한 약속을 주시고 그리고 마지막 말씀을 맺으면서, '만나는 대로'라는 것에는 이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벌써 다 예배해 놓았습니다. 만나는 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여기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계획이 있고, '만나는 대로'라는 약속이 있죠. 그리고 그 만나는 대로 그들은 비로소 뭡니까? 악한 자로 사는 사람들이 어디에? 하나님의 초청의 자리에 초대할 수가 있습니다. 비로소 이 축복과 역사가 여러분과 저의 교회의 역사요, 이것이 바로 오늘 여러분과 제게 향한 역사입니다.
오늘 '예수 믿어라!' 말한다고 전도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런 배경에 서 있는 여러분 나의 풍성을,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충만히 증거하되, 만나는 대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상관없습니다. 이 복음 들고 나갈 때에 주님께서 이미 나와 여러분에게 계획이 있기에,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은 그 배경을 계획 속에서 성취하여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서론
가정의 달 뿐만 아니라 언제나 주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본문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혼인 잔치를 연 임금은 하나님이고, 처음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길로 갔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들을 초청하러 온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여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우리는 나중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큰 축복이 있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저주가 따라옵니다.
● 본론
1. 혼인 잔치를 열고 초청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1) 우리는 나중에 닥치는 대로 불러오라고 해서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2) 우리가 초청받아서 온 자리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한 잔치입니다.
(3) 이 잔치 자리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입만 열면, 풍성한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4) 그러나 불신앙으로 입을 열지 못하면, 불만으로 가득 차서 불평합니다.
(5)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인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려야 합니다.
(6)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실제적으로 누릴 때, 마음과 표정이 밝아지는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이 혼인 잔치의 초청에 거절하는 이유
(1) 임금이 베풀어 놓은 혼인 잔치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보다 육신의 것에 마음과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3) 가정에 저주와 재앙이 계속해서 찾아오는 것은, 창세기 3장의 문제를 일으킨 사단의 손에 빠져서 하나님의 혼인 잔치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육신의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4) 우리를 죄악과 죽음과 멸망으로 끌고가는 배경이 사단이기 때문에, 가정의 문제는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5)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왕권 속으로 들어가야 문제가 해결되어짐을 사실적으로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누릴 수 있습니다.
● 결론
문제가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왕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입든지,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생각 기도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지 만나는 대로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혼인 잔치에 초청할 수 있습니다.
● 기도제목
◎ 하나님의 혼인 잔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도록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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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
1469 |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 단6:16-28 | 2025-01-12 | |
1468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단5:17-31 | 2025-01-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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