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시험(1)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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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오늘 우리 말씀의 제목을 '예수님의 시험'이라 그랬습니다. 흔히 이 예수님이 당하신 마태복음 4장에 이 시험에 대해서 첫번부터 인간이 당하는 시험에 결부시키려고 하는 이런 시도들이 주변 사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제가 예수님의 시험이라는 것은, 여기 당하는 예수님의 시험은 여러분과 제가 당하는, 배고파서 당한다! 뭐, 명예로 당한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험!' 그래서 예수님의 시험에 이기고, 승리하고, 실패한다는 데에 따라서 여러분이 영원한 실패가 오고, 여러분이 영원한 승리가 오게 되는 중요한 그런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지금 이루어 가는 그런 역사죠.
그래서 지난번 시간에 '하나님의 의' 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할 때에, 그 신학적인 배경이 상당히 많은 말을 해야 되는 그런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메시지 속에서 저는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또 여러분에게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참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되어져야 되는데, 그 것이 인도하심이다! 누가 와서 인도한다? 그 이전에 여러분과 저의 인도하실 수밖에 없는 실존이 되어야 됩니다. 사실이 되어야 되고 자체가 되어야 되니까! 이것이 참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죠.
그래서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그럴 때에 여기에는 먼저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오늘 이 조금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돼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구원이라는 배경이 공의와 정죄가 아니면 사랑과 사유가 나올 수 없어요. 이것이 같이 가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이제 이것을 일방적으로 너무 그저 사랑만 강조한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올 수 없어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 사단이 가장한 그런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배경이 뭐냐하면요. 율법이냐 은혜냐? 이렇게 해 가지고 율법은 전부가 아니다. 온전히 은혜다. 그렇게 이제 우리 배경에서, 어떤 그런 개념 가지고 이제 생각할 때에, 무 율법주의라는 배경으로는 아닙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나 우리에게 뭘 말씀하느냐 하면, 공적인 문제도 반드시 시비를 바로 갖고 은혜가 이루어 져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잘못된 은혜라 그러면 뭐냐하면, 공적인 문제가, 공평하지 못한 은혜는 그것은 편협 된 겁니다. 편협 된 사랑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하면, 공의가 이루어 져야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게 되는 배경은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고 죄를 짓는 인생은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대로 로마서 6장 23절에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랬습니다. 죄의 삯은 반드시 뭐라 그랬습니까? 죽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언한 것이 있어요. 뭐라 그랬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이게 벌써 창세기 2장 17절에 말씀이 나온 배경 아닙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뭐가 없다고 그랬습니까? 사유가 없어요. 죄 사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라는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예수님께서 죽어서 피 흘린다!' 그럴 때에 뭐 표현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그런 어떤 배경이 되죠. 그러니까 이런 공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구약에 인류에 대표자로 세운 이스라엘에서 뭘 말해주느냐 하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순간 죽어야 되는데, 그 죽음에 대해서 자기가 죽지 아니하고 누구를 대신해서, 자기의 모든 죄를 짐승에게 이완시켜서, 짐승이 대신해서, 그 양이 대신해서 피를 흘리는 대속의 모델을 보여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부터 계속해서 뭐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계속 이루어 가는데 뭐냐? 계속 인간이 죽어야 돼요. 피를 반드시 흘려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공적인 약속이에요. 분명히 죄를 짓고 하나님 떠났을 때에 죽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한 계속적인 대속의 역사가 바로 구약에 양에 피를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과정이 계속 되어집니다. 그러다가 신약에 단번에 늘 양의 피로 나가서 대속을 받던 그런 어떤 배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의 대표로 오셔서 말하자면, 인간에 대표자가 되셔서, 참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죽어야 될, 인간이 죽는다는 것으로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죽어서 어떻게?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으셔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이런, 이게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만족하게 이루어 놓는 것이죠. 이래가지고 다시 살아서 그 다음 우리에게 성령으로 오신 역사는, 그 다음에 이것을 가지고 은혜라 그럽니다. 왜? 죽음이 전제되어야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어야 사랑과 사유가 바로 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뭔가 이 삐뚤고 공평하지 못한 역사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배경에서 뭐 사단 배상설 이런 것이 나올 때에 사단 배상설이라는 것은 사단의 어떤 불평에 의한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뭔가 교리를 형성할 때에 사단 배상이 나오는 것이죠.
뭐냐하면 반드시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을 내어 줬어요. 사망에 내어 줘버렸습니다. 그 사망의 주인이 누구냐? 사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내어 준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이 뭔가 이 사단이 '하나님 왜 인간을 죽이려고 그래놓고 나한테서 사망을 내어 줘 놓고 왜 안 줍니까?' 이런 불평이 공의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어서 피 흘렸다! 그럴 때에 자칭 뭐라 그러냐 하면, 사단의 불평에 대한 초점을 모을 때에 사단에게 값을 지불했다는 이런 뜻으로 해석이 될 때에 사단 배상설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라는 배경 속에서 사단의 요구를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공의에 있어서 반드시 죄를 지었을 때에 사단의 요구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죽어야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에 대표로 이 땅에 예수께서 오셔서 당신이 친히 누가 되어야 됩니까? 죄 인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이 되신 겁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지난주에 뭘 했다 그랬습니까? 세례를 받았다! 그랬습니다.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이렇게 하여야 하리라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당신을 어떻게 내가 세례를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례를 받아야 된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성육신 하는 것이 이제 우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잖아요. 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공적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는, 공적으로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세례의 역사입니다.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를 뒤집어 써야 돼요. 그래서 죽으셔야 되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본인이, 죄인이 받는 죄인으로 고백하는 뭡니까? 세례를 받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세례 받는 문제, 그 세례 받는 것으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죠. 그러니 이 세례를 받고 죄인으로, 이제 여러분과 저를 대신해서 완전히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다. 그 죽으셔야 하는 그런 과정 속에서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될 부분이 또 남아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지금 4장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통해서 창세기 3장에 첫 번째 아담이 인간에 대표로서 첫 번째 사단의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해 버렸습니다. 실패함으로 인해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예로 난 인간은 나면서부터 뭡니까? 죄인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원죄라 그럽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담으로 인간의 대표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 가지고 두 번째로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에, 이 창세기 3장에 걸려든 사단의 시험을 해결해야됩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해결하신 그 순간이 창세기 3장에 시험의 해결이 바로 마태복음 4장에 사람이 받을 수 없는 예수님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여기 보실 때에 예수님이 막 40일 동안 굶주려 가지고 배고픈 틈을 딱 타고 사단이 들어왔다! 그런 배경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이끌고 어디 가셨습니까? 광야로 가셔 가지고 광야에서 성령으로 40일 동안 굶주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누가 합니까? 성령이 지금 이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받고, 인간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로 오셔서 인간이 약하고, 인간이 주리고 인간이 배고픈 문제를 친히 담당하시고 인간이 죄인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육체적인 제한을 친히 담당하시고 지금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인간으로서 지금 광야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시험을 받으면서 여기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인간으로 받는다 그럴 때에 인간의 대표성을 지금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시험받는 중요한 주제가 뭐냐하면, 이런 배경에서 마태복음 4장에 있어서 제일 먼저 사단이 시험하는 내용이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4장 2절 말씀에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뭐라 그랬습니까? 왜 주렸습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주리신 겁니다. 하나님은 40일 금식해서 주립니까? 안 주립니까? 주릴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완전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는 이런 순간입니다. "주리신지라" 이때에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랬습니다.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여기에 강조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이 멍텅구리야 왜, 인간이 느껴야 되고, 인간이 받아야 할 이 고통에 괴로움을 왜 네가 받느냐! 네가 하나님이신데 뭐하려고 인간이 받는 것, 뭐하려고 받느냐?' 쉽게 말해서 '인간이기를 거부하라!' 그런 내용입니다.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마땅히 인간으로 짊어지고 겪어야 할 사건을 사단이 뭐라고 그러느냐? 막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이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어째서 네가 배고프고 굶주리고 그럴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지금도 당장, 말하자면 굶주린 문제도 한 마디만 하면 해결될 것 아니냐! 돌들이 천지에 많은데...'
여러분 광야에 보면 제가 그 광야를 지나오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요. 여러분 그 사막지대, 광야 중에 그 유대 그 광야는 특징이 뭐냐하면, 돌이 많아요. 바위가, 돌이 많습니다. 여러분 시내산은 완전 돌산입니다. 신비스러울 정도로 전부 돌산이에요. 완전히 그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시내 산입니다. 그래서 그 광야길이 원래 그 광야 그러면 모래 사막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사막지대라 그러는데 사막이 아니고 이것은 돌로 완전히 사막지대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대광야에서는 돌이 천지에 많습니다. 적고 큰돌이 많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이제 시험하기를, 인간이기를 거절하라는 내용 속에서 뭐냐? '이 돌이 많잖아! 하나님 아니냐!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인데...' 바로 이 시험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속아 가지고 배고프다! 인간의 이 시험을, 인간이 겪는 한계를 못 넘겨 가지고 여기에 속아넘어갔다! 그러면 뭐가 됩니까? 메시아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인간의 대표로 여러분과 저의 승리를 위해서, 이 땅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의 생명의 역사가 살아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단 중에 이단이 뭐냐하면요. 예수를 사람으로, 하나님으로 오시지 않는 것! 하나님으로만 오신 것! 영 기주의에서 이것을 많이 강조했거든요. 초대에 이단 중에 이런 이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고통도 안 느꼈다!' 라든가! 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의 고통을 고통으로 안 느꼈다! 뭐 이런 식으로 뭐 이상하게 하는 그런 학설들이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내가 목마르다!' 모든 고통을 다 지고 가셨습니다. 바로 완벽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받아야 될, 인간이 고통 받아야 될, 그래서 인간의 대표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공의를, 죽어야 된다는 하나님의 공적인 의를 완벽하게 이루시고,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해서... 이것을 대속이라 그럽니다. 대신해서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시고, 지옥 고를 맛보시고, 그 다음에 다시 부활하셨다! 여러분 지옥 고를 맛보고, 지옥 고에 들어가서 무덤 속에 들어가셨을 때에, 무덤 속에 들어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뭐, 신학적인 배경 있습니다 만은, 그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엄청난 인간의 저주에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사단이 기쁘다고 축배를 마시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뒤통수를 치신 겁니다. 당신의 영으로 그를 살리셨습니다. 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다음에 보좌 우편에 올리시고 바로 오순절에 여러분과 저에게 약속하신 뭡니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성령을 부어주신 역사가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 속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 인간을 이끌고 영원한 축복과 역사로 이끌어 가시는 모든 역사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루어졌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여러분과 저와 함께 하시면서 십자가에 고통 못지 않은 괴로움이 사실은 여러분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는 그 문제가 '거기서 해결되었다! 거기서 끝났다! 예수님은 편안하게 계신다!'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 구요. 그래서 어떻게 표현해 주셨느냐 하면,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로마서 8장 26절 한번 찾아봅시다. 다같이 읽어 봐야 되겠습니다. 8장 26절 다같이 시작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할렐루야!
나는 그 지난주에 말씀했던 것처럼 성령이 내 안에, 내 인격, 판단, 생각, 내 조직 안에, 내 모든 곳에 실제로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그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실존이 된다는 것! 여기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바로 전도요 찬송이요 기도요 모든 것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안되고 나오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이 지속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지금도 성령께서 여러분과 저를 이끌어 가시도록, 이끌어 가시는데, 내 안에 오셔서 워낙 안 되어 있잖아요. 체질들이 그러니까 성령께서 기가 막힐 것 같아요.
내가 갖고 있는 이 메시지를 마음에 담으면서, 오늘 말씀 준비하면서 참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왜? 워낙 안 되니까! 그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어떻게 합니까? 한없는 탄식과 한없는 고통이 따른다고 그랬습니다. 구체적으로 여러분 속에, 여러분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러니 지금 현재 뭘 이해하셔야 되느냐 하면, 성령이 임했다? 하나님이 변하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임했다? 세계를 바꾸는 겁니다!
한번 옆에 사람 얼굴을 한번 보세요. 받아합시다. "세계를 바꿀 얼굴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세계를 바꿀 얼굴이 아니에요. 그러기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 성령이 여러분과 저를 변화시키고, 바꾸시고, 세계까지 바꾸시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셨다! 여기에 엄청난 배경이 나오거든요. 이런 구체적인 역사를 위해서 오늘 예수께서 이 시험을 당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처음에 예수님이 임하실 때에 성육신 할 때에 왕권을 가지고 덤벼들었습니다. 발악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두 살 아래에 얼마나 큰 고통이 임하잖아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남하에 큰 슬픔' 이 벌써 예언된 말씀이잖아요. 여러분 두 살 아래에, 그 지역 베들레헴 지역에 다 죽여 놓았으니까요. 어머니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울음이 진동했습니다. 그 지역이요.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발악했던 사단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똑같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승리를 이루시기 직전에 먼저 이 시험 창세기 3장을 꺾는 놀라운 이 시험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받으실 때에 사단이 발악을 안 하겠습니까! 지금 사단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과 저의 힘으로는 도저히 꺾을 수 없고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을 지금 현재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이루십니다. 이 일을 이루시면서, 이 일에 여러분과 저의 승리의 결과를 그냥 나 홀로 붕 떨어져 놓고 승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사실적인 실존이 되게 만들어서 이끌어 가시는 그 역사가 무슨 역사라 그랬습니까? 성령이라 그랬습니다. 성령이라!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성령의 사실적인 역사를 믿어야 됩니다. 믿어져야 됩니다. 이걸 뭐 복잡하게 생각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믿으면 돼요. 누구로 말미암아? 이 십자가의 역사를 믿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누가 역사 합니까? 성령이! 이 성령의 역사는 먼저 실존을 만들어 놓았다! 그랬습니다. 제가 어려운 말을 쓸려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말로 표현이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되었는데 뭐가 되느냐? 그 해결된 사람으로 있습니다. 내게 해결된 실존으로 있습니다. 해결된 실체로서 내게 벌써 와 있습니다. 그러면 의지하고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이걸 안 믿어요. 받아합시다. "믿으면 된다!" 너무 쉬운 말이거든, 오늘 이 말을 아무도 못 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 하는데 믿으면 된다는 그 말도 성령이 임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을 이끌어 나가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 성령이 임하시는 역사를 몇 가지를 좀 말씀을 해드려야 되겠어요. 일단 이 사실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이 어디로 서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공의와 정죄가 오고, 사랑과 사유가 옵니다. 여기서 이제 구원이 이루어지죠. 이게 신학적으로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공의와 정죄가 오고, 예수님이 죽으심이 마지막 공의가 완전한 하나님의 만족이죠. 그 다음에 이것이 배경이 되어져야 뭐가 오느냐?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하심과 그 다음에 사유하심이 따라옵니다. 사유라는 것은 죄를 용서해 주셔야,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사유입니다. 그 다음에 사랑! 이 사실에서 이게 사랑 아닙니까! 그것이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 그럽니다. '구원!' 그랬을 때에 그 구원이 그렇게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 말씀한 것처럼 그 구원이 되어졌을 때에 여러분과 제가 구원의 실존 자들로 만들어 줍니다. 구원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이라 그랬어요. 그 에베소서 1장 13절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뭐라 그러냐 하면, 구원을 인 치시고 구원을 보증해 주신 역사로 뭡니까? 성령을 통해서...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 인 쳤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도장 찍었다!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 토지 부지를 사는 과정에서 내 도장이 몇 번 찍혔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장로님 도장이 몇 번 찍혔는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우리 거다! 도장을 찍습니다. 도장을 찍으면... 법적으로 도장을 찍어야 돼요. 그 다음에 보증이다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천국과 그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보증이라는 것은 담보물이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그런 배경이에요. 그러니 예를 들어서 또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가 돈을 이제 빌렸습니다. 그때에 이 돈을 반드시 빌렸지 만은, 갚는다는 어떤 보증으로 뭘 주어요? 담보물을 제공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담보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하신 그 영광의 축복으로 나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담보물이 뭐냐? 담보하신 것이 뭐냐?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에 대한 사실적인 역사가 이게 와져야 돼요. 이게 안 되니까 자꾸 다른 생각이, 여러 가지 이런 생각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사실적인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배경으로 담보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 치신다! 성령의 보증이 되신다! 성령이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구원에, 영육간에 하나님께서 축복의 보증이 되시는 이런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여기 보면 고린도 후서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을 어디에 주어요? 마음에, 생각에! 그래서 이 성령은 우리 마음에, 생각에서 뿐 아니고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까? 우리 속에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면서 실제로 역사 하시는 모든 것에... 그래서 성령이 임하셨다. 여러분 전체가, 전 인격이 완전히 변화됩니다. 새로워져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는 실체를 만들어 놓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가 이해가 되어야 참 신앙이 되고, 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새로 태어난다! 이 변화가 된다는 사건이,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시기까지 하시면서 여러분과 제가 이런 참 된 실체를 만들어 놓으시는데, 이 거듭나게 하시는 새 창조의 놀라운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았다! 그럴 때에 보통 구원받았다! 천당 간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엄청난 변화가 와야 됩니다. 불신자가 되어 있다가 그러니 지옥으로 가다가 이 사람이 그 지옥 가는 길을 돌이켜서 완전히 천국으로 간다는 이 엄청난 것이요. 이 골로 말한다면 도저히 여기서, 여기에 올 수 없는 골입니다. 지옥 가던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천국으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백성 된 마음! 이것은 우리 힘으로 아닙니다. 여러분 힘으로 되어지지를 않아요. 도저히 이것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사실이 이루어집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엄청난 이 변화가 간단하게 우리 느끼는데 구원받았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이러니까 너무 쉬우니까! 우리 힘으로 안하고 성령으로 하니까! 너무 쉽잖아요. 그러니까 뭐 간단하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천국 시민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래가지고는 얼굴에 별 변화가 없는데, 이 엄청난 사건을 우리가 이해한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하는 사건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데, 여기에 뭔가, 이것이 이해되는 때에 감사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뭐 다른 것 뭐 백 번, 천 번 상관없어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도 이스라엘이 강둑에서 홍해 강둑에서 얼마나 막 뛰고 야단했는데 홍해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의 요단강을, 영원한 저주의 요단강을 건너고 난 후에 그 강둑에서 가만히 멍청하게 앉았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진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 성령의 사실적인 역사가 이해가 될 때에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여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성령으로 인 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았다 그럴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의 사실이라는 것이 성령으로 인쳐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에 보면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랬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나오죠.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내 아들 세광이는 나한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통으로 알아요. 그냥 '아버지! 아빠!' 그럽니다. 그런데 아버지라 부를 때, 이 사건이 얼마나... 자기가 나한테 아버지라고 감히 부른다는 것이요,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몰라요. 혹시 여러분 자녀들이나 여러분 아무라도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도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왜? 나는 그러면 왜? 내가 낳았어요. 내 생명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라 그럽니다. 아닌 사람은 백 번, 천 번 원하고, 요구하고, 애를 쓰고, 힘쓰고, 노력해도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어쩌다가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까! 혹시 오늘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저씨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은 안 해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납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저씨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 왜 그러느냐? 자연스럽게 성령으로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무엇으로? 성령으로! 성령으로 아니고는 안 온다고 그랬습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실제로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이 사실이 이루어지고, 역사 되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뭐가 되느냐? 내가 하나님의 아버지라 부르는 그 순간에, 성령으로 내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되는 겁니다. 이끌리고, 인도 받고,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부르고, 성령의 인도 받게 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실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뭐 '내게 주시옵소서. 내가 이 만큼 했으니 하나님 주시옵소서.' 그 말이 아니다! 안 그랬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했습니다. 목사님은 많이 일했고, 목사는 뭔가 기도도 많이 해 놓았으니까! 뭐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내 아들이 나한테 많이 해줬기 때문에, 뭐 들어 주는 줄 압니까! 전부 나한테 해준 게 없어요. 지금까지 계속 돈 가져 가 가지고 뭐 계속 받아갔고, 계속 그랬지. 내가 해준 것이 없어요. 나한테 그런데도 조금만 해주면 고맙다고 한번은 선물이 왔던가 언제한번 만 연필을 보냈어요. 이걸 내 버리고 싶어도 벌써 몇 년 되었습니다. 왜? 그 조그마하게 하나 해준 것, 지금도 가지고 다닙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실체를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인도를 받게 되는 것이죠.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 자녀의 문제를 말하면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성령을 말합니다. "영을 우리 마음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영이라 그럴 때에 누가? 실제로 예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도록 만든 실체를... 그래서 예수께서 내 안에, 너희 안에, 여러분 안에, 내 안에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 하셨느냐? 그래가지고 내가 하는 일도 너희도 하고, 내가 하는 일 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왜? 그렇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렇게 하도록 성령을 부어주셔서 구체적으로 이것을 이루어 주셨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 하나님의 세계복음화가 내게 세계복음화 그러면 누가? 성령으로! 조금 전에 말씀했습니다. 암만 봐도 세계복음화 할 얼굴이 아니거든, 여러분 저를 볼 때 암만해도 박 목사 뭘 암만 봐도, 하나님 보다 예수님 보다 더 많이 할 것 같지도 않는데 했어요. 벌써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떠나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계복음화, 복음 전파 위해서 어디까지 갔다 왔어요? 미국 갔다 왔지, 러시아 같다 왔지, 저 뭐 유럽 갔다 왔지, 호주 같다 왔지! 안 가본데 없어요. 이것만해도 예수님 보다 더 많이 했어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많이 한다, 안 한다! 이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뭐가? 실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점이 지금 이해가 되어야 돼요. 그러니 내가 뭘 하겠다! 그 말이 아닙니다. 하도록... 그래서 그 할 수 있도록 내 안에 누구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삶에서 여러분 생애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변화시켜 가시고 역사 해 가시는 겁니다.
이때부터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기도하면 된다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이게 안 믿어지니까 기도도 안 되지만, 무시기도도 안 되지만, 기도해도 안 믿으니까! 받아합시다. '믿으면 된다!' 말은 너무 잘 하는데, 이 말 못하는 사람 없는데, 이 믿음도 성령으로 너희가 은혜로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오늘 조금만 여러분 성령의 실체를 내가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 때에 이 한 주간 하나님이 하십니다. 엄청난 역사! 제자세울 하나님의 때가 왔습니다. 세계복음화 하는 하나님의 때가 왔습니다.
보다시피 여러분 정말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세상 살아갈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지금 각 국에서 터집니다. 세계적인 불황이 지금 오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이때에 조금만 믿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에, 여러분 곳곳에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한 주간 여러분 이것을 붙잡고 조금만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여러분과 제가 뭐냐하면, 진짜 치료라는 것이 나올 수 있고요. 진짜 위로라는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뭐라 그럽니까?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사실! 이미 벌써 그때 당시에는 성령께서 왔다 갔다 하시지 만은, 지금 신약시대에는 한번 오셨다! 영원히 안 떠나십니다.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라는 그 말 자체가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곁에 서서 너와 함께 있으면서 위로한다! 도와준다! 이 배경이 바로 성령의 말이라는 단어에 바로 직설적인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보혜사라는 말이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이것이 제일 그 성령이라는 말에 대한 구체적인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바로 그 말은 이때부터 여러분과 제게 어떤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보면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랬는데 믿는 순간부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라!' 이 말로 들었는지? 근심은 태산같이 합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오늘 마태복음서에 계속 말씀한 것처럼 이 구원에 엄청난 역사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이루어 가시는 사건에 그 엄청난 줄기를 몰라요. 믿음의 배경을 우리는 몰라요.
그래서 뭐든지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하려고 그럽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는 성령의 인도를 절대로 못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문제도 내가 하려고 그러니까 근심이 나오고 걱정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 못 받는다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이것을 가지고 불신앙이라 그럽니다. 여러분 생활과 사건에 요만한 불안과 근심이 있다! 불신앙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단의 통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간단합니다. 이 한 주간도 어떤 문제나 사건이다. 완전히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겁니다. 받아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다!" 끝났어요. "망하면 망하리다!" 받아합시다. "망해도 주안에서 망하자! 죽어도" 누구한테서? "주안에서 망하자!" 다윗의 믿음이었어요. 내가 하나님의 손에 죽겠나이다! 인구조사를 잘못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선택하라 그럴 때에, 다윗이 내가 하나님의 손에 죽겠나이다! 하루동안 인구의 몇 만이 죽었잖아요. 하나님이 손으로 직접 치시니까, 다윗이 무릎꿇고 '하나님 죽이려면 나를 죽이지, 왜 내 백성을 죽입니까!'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대어드니까! 하나님께서 금방 마음을 바꾸어서 축복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 참 의뢰할 때에 죽는 곳에도 은혜가 나옵니다. 죽는 사건 속에도 축복이 임하게 되어있습니다. 위로와 평안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 주간도 여러분 우리현장에서 준비된 제자들, 이렇게 준비되어져서 세상을 바꿀 이런 제자들, 여러분과 제게 허락하시고 오늘도 약속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런 사건을 체험한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을 찾아내어서 세계를 살리라! 여러분과 제게 주신 사명과 명예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의 시험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 구원은 공의와 사랑이 모두 포함되어있는데, 공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즉, 먼저 죄를 지은 인생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법을 공의롭게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서야 성령께서 인간에게 임하시는 사랑의 은혜가 완성되었습니다.
☞ 창세기 3장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참 인간으로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던 것은, 예수께서 바로 참으로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사단은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면서 인간으로서 겪는 굶주림의 문제를 능히 해결하라고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이심을 거부하지 않음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2]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십니다.
☞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하나
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받는다는 사실을 보증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실적인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켜 새롭게 만들어가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생각과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도우십니다.
[3]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 성령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축복을 받게되었습니다. 즉, 오직 성령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실존(신분)'이 된 것입니다.
☞ 이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우리들은 성령의 충만하신 인도를 받을 때, 모든 삶이 구체적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특별히 지금은 성령으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때, 작은 믿음으로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기도하면, 치유의 축복 속에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성령은 우리의 보혜사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우리는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겠다는 전적인 의지함 속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언약 잡은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내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를 더욱 잘 받으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오늘 우리 말씀의 제목을 '예수님의 시험'이라 그랬습니다. 흔히 이 예수님이 당하신 마태복음 4장에 이 시험에 대해서 첫번부터 인간이 당하는 시험에 결부시키려고 하는 이런 시도들이 주변 사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제가 예수님의 시험이라는 것은, 여기 당하는 예수님의 시험은 여러분과 제가 당하는, 배고파서 당한다! 뭐, 명예로 당한다! 그런 것과는 차원이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험!' 그래서 예수님의 시험에 이기고, 승리하고, 실패한다는 데에 따라서 여러분이 영원한 실패가 오고, 여러분이 영원한 승리가 오게 되는 중요한 그런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지금 이루어 가는 그런 역사죠.
그래서 지난번 시간에 '하나님의 의' 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말씀을 할 때에, 그 신학적인 배경이 상당히 많은 말을 해야 되는 그런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메시지 속에서 저는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또 여러분에게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참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이 되어져야 되는데, 그 것이 인도하심이다! 누가 와서 인도한다? 그 이전에 여러분과 저의 인도하실 수밖에 없는 실존이 되어야 됩니다. 사실이 되어야 되고 자체가 되어야 되니까! 이것이 참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되죠.
그래서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그럴 때에 여기에는 먼저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오늘 이 조금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돼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진다! 그런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구원이라는 배경이 공의와 정죄가 아니면 사랑과 사유가 나올 수 없어요. 이것이 같이 가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이제 이것을 일방적으로 너무 그저 사랑만 강조한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나올 수 없어요. 그것은 어떤 면에서 사단이 가장한 그런 문제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배경이 뭐냐하면요. 율법이냐 은혜냐? 이렇게 해 가지고 율법은 전부가 아니다. 온전히 은혜다. 그렇게 이제 우리 배경에서, 어떤 그런 개념 가지고 이제 생각할 때에, 무 율법주의라는 배경으로는 아닙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나 우리에게 뭘 말씀하느냐 하면, 공적인 문제도 반드시 시비를 바로 갖고 은혜가 이루어 져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잘못된 은혜라 그러면 뭐냐하면, 공적인 문제가, 공평하지 못한 은혜는 그것은 편협 된 겁니다. 편협 된 사랑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하면, 공의가 이루어 져야 은혜가 은혜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게 되는 배경은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고 죄를 짓는 인생은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경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대로 로마서 6장 23절에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랬습니다. 죄의 삯은 반드시 뭐라 그랬습니까? 죽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선언한 것이 있어요. 뭐라 그랬습니까? '정녕 죽으리라!' 이게 벌써 창세기 2장 17절에 말씀이 나온 배경 아닙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뭐가 없다고 그랬습니까? 사유가 없어요. 죄 사함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라는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예수님께서 죽어서 피 흘린다!' 그럴 때에 뭐 표현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그런 어떤 배경이 되죠. 그러니까 이런 공의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구약에 인류에 대표자로 세운 이스라엘에서 뭘 말해주느냐 하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순간 죽어야 되는데, 그 죽음에 대해서 자기가 죽지 아니하고 누구를 대신해서, 자기의 모든 죄를 짐승에게 이완시켜서, 짐승이 대신해서, 그 양이 대신해서 피를 흘리는 대속의 모델을 보여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부터 계속해서 뭐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계속 이루어 가는데 뭐냐? 계속 인간이 죽어야 돼요. 피를 반드시 흘려야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공적인 약속이에요. 분명히 죄를 짓고 하나님 떠났을 때에 죽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죽음에 대한 계속적인 대속의 역사가 바로 구약에 양에 피를 인간을 대신해서 죽는 그런 과정이 계속 되어집니다. 그러다가 신약에 단번에 늘 양의 피로 나가서 대속을 받던 그런 어떤 배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의 대표로 오셔서 말하자면, 인간에 대표자가 되셔서, 참 인간이 되셔서 인간이 죽어야 될, 인간이 죽는다는 것으로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죽어서 어떻게? 영원한 멸망에 들어가야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죽으셔서 십자가에서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이런, 이게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만족하게 이루어 놓는 것이죠. 이래가지고 다시 살아서 그 다음 우리에게 성령으로 오신 역사는, 그 다음에 이것을 가지고 은혜라 그럽니다. 왜? 죽음이 전제되어야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어야 사랑과 사유가 바로 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는 뭔가 이 삐뚤고 공평하지 못한 역사가 결코 아닙니다.
이런 배경에서 뭐 사단 배상설 이런 것이 나올 때에 사단 배상설이라는 것은 사단의 어떤 불평에 의한 부분에서 중점적으로 뭔가 교리를 형성할 때에 사단 배상이 나오는 것이죠.
뭐냐하면 반드시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망을 내어 줬어요. 사망에 내어 줘버렸습니다. 그 사망의 주인이 누구냐? 사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내어 준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이 뭔가 이 사단이 '하나님 왜 인간을 죽이려고 그래놓고 나한테서 사망을 내어 줘 놓고 왜 안 줍니까?' 이런 불평이 공의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어서 피 흘렸다! 그럴 때에 자칭 뭐라 그러냐 하면, 사단의 불평에 대한 초점을 모을 때에 사단에게 값을 지불했다는 이런 뜻으로 해석이 될 때에 사단 배상설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라는 배경 속에서 사단의 요구를 무시했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공의에 있어서 반드시 죄를 지었을 때에 사단의 요구와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 앞에서는 죽어야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에 대표로 이 땅에 예수께서 오셔서 당신이 친히 누가 되어야 됩니까? 죄 인이라고 고백하셨습니다.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인이 되신 겁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지난주에 뭘 했다 그랬습니까? 세례를 받았다! 그랬습니다. 세례를 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이렇게 하여야 하리라 예수께서 세례요한에게 '당신을 어떻게 내가 세례를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세례를 받아야 된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성육신 하는 것이 이제 우리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잖아요. 그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공적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 하시기 위해서는, 공적으로 인간이라는 구체적인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세례의 역사입니다. 죄인이 아니면서도 죄를 뒤집어 써야 돼요. 그래서 죽으셔야 되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본인이, 죄인이 받는 죄인으로 고백하는 뭡니까? 세례를 받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세례 받는 문제, 그 세례 받는 것으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죠. 그러니 이 세례를 받고 죄인으로, 이제 여러분과 저를 대신해서 완전히 십자가에 죽으셔야 합니다. 그 죽으셔야 하는 그런 과정 속에서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될 부분이 또 남아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지금 4장입니다. 바로 이 부분을 통해서 창세기 3장에 첫 번째 아담이 인간에 대표로서 첫 번째 사단의 시험에서 아담이 실패해 버렸습니다. 실패함으로 인해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예로 난 인간은 나면서부터 뭡니까? 죄인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원죄라 그럽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이 되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담으로 인간의 대표로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성육신 하셔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 가지고 두 번째로 사단의 시험을 받을 때에, 이 창세기 3장에 걸려든 사단의 시험을 해결해야됩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해결하신 그 순간이 창세기 3장에 시험의 해결이 바로 마태복음 4장에 사람이 받을 수 없는 예수님에게 주신 시험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여기 보실 때에 예수님이 막 40일 동안 굶주려 가지고 배고픈 틈을 딱 타고 사단이 들어왔다! 그런 배경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성령으로 이끌고 어디 가셨습니까? 광야로 가셔 가지고 광야에서 성령으로 40일 동안 굶주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누가 합니까? 성령이 지금 이렇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받고, 인간의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로 오셔서 인간이 약하고, 인간이 주리고 인간이 배고픈 문제를 친히 담당하시고 인간이 죄인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는 육체적인 제한을 친히 담당하시고 지금 완전한 인간이 되셔서, 인간으로서 지금 광야에서 시험을 받습니다. 시험을 받으면서 여기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인간으로 받는다 그럴 때에 인간의 대표성을 지금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시험받는 중요한 주제가 뭐냐하면, 이런 배경에서 마태복음 4장에 있어서 제일 먼저 사단이 시험하는 내용이 바로 그런 문제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4장 2절 말씀에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뭐라 그랬습니까? 왜 주렸습니까? 인간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주리신 겁니다. 하나님은 40일 금식해서 주립니까? 안 주립니까? 주릴 이유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완전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는 이런 순간입니다. "주리신지라" 이때에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랬습니다.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여기에 강조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이 멍텅구리야 왜, 인간이 느껴야 되고, 인간이 받아야 할 이 고통에 괴로움을 왜 네가 받느냐! 네가 하나님이신데 뭐하려고 인간이 받는 것, 뭐하려고 받느냐?' 쉽게 말해서 '인간이기를 거부하라!' 그런 내용입니다.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인간으로 오셔서 마땅히 인간으로 짊어지고 겪어야 할 사건을 사단이 뭐라고 그러느냐? 막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이 아니냐!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어째서 네가 배고프고 굶주리고 그럴 수 있느냐!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지금도 당장, 말하자면 굶주린 문제도 한 마디만 하면 해결될 것 아니냐! 돌들이 천지에 많은데...'
여러분 광야에 보면 제가 그 광야를 지나오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요. 여러분 그 사막지대, 광야 중에 그 유대 그 광야는 특징이 뭐냐하면, 돌이 많아요. 바위가, 돌이 많습니다. 여러분 시내산은 완전 돌산입니다. 신비스러울 정도로 전부 돌산이에요. 완전히 그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 시내 산입니다. 그래서 그 광야길이 원래 그 광야 그러면 모래 사막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사막지대라 그러는데 사막이 아니고 이것은 돌로 완전히 사막지대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유대광야에서는 돌이 천지에 많습니다. 적고 큰돌이 많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 이제 시험하기를, 인간이기를 거절하라는 내용 속에서 뭐냐? '이 돌이 많잖아! 하나님 아니냐!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인데...' 바로 이 시험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속아 가지고 배고프다! 인간의 이 시험을, 인간이 겪는 한계를 못 넘겨 가지고 여기에 속아넘어갔다! 그러면 뭐가 됩니까? 메시아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인간의 대표로 여러분과 저의 승리를 위해서, 이 땅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의 생명의 역사가 살아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단 중에 이단이 뭐냐하면요. 예수를 사람으로, 하나님으로 오시지 않는 것! 하나님으로만 오신 것! 영 기주의에서 이것을 많이 강조했거든요. 초대에 이단 중에 이런 이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고통도 안 느꼈다!' 라든가! 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의 고통을 고통으로 안 느꼈다! 뭐 이런 식으로 뭐 이상하게 하는 그런 학설들이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내가 목마르다!' 모든 고통을 다 지고 가셨습니다. 바로 완벽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받아야 될, 인간이 고통 받아야 될, 그래서 인간의 대표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공의를, 죽어야 된다는 하나님의 공적인 의를 완벽하게 이루시고, 인간으로서 십자가에서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해서... 이것을 대속이라 그럽니다. 대신해서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내려가시고, 지옥 고를 맛보시고, 그 다음에 다시 부활하셨다! 여러분 지옥 고를 맛보고, 지옥 고에 들어가서 무덤 속에 들어가셨을 때에, 무덤 속에 들어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뭐, 신학적인 배경 있습니다 만은, 그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엄청난 인간의 저주에 빠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사단이 기쁘다고 축배를 마시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뒤통수를 치신 겁니다. 당신의 영으로 그를 살리셨습니다. 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다음에 보좌 우편에 올리시고 바로 오순절에 여러분과 저에게 약속하신 뭡니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성령을 부어주신 역사가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 속에 오셔서, 인간과 함께 인간을 이끌고 영원한 축복과 역사로 이끌어 가시는 모든 역사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루어졌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여러분과 저와 함께 하시면서 십자가에 고통 못지 않은 괴로움이 사실은 여러분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다는 그 문제가 '거기서 해결되었다! 거기서 끝났다! 예수님은 편안하게 계신다!'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 구요. 그래서 어떻게 표현해 주셨느냐 하면,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로마서 8장 26절 한번 찾아봅시다. 다같이 읽어 봐야 되겠습니다. 8장 26절 다같이 시작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할렐루야!
나는 그 지난주에 말씀했던 것처럼 성령이 내 안에, 내 인격, 판단, 생각, 내 조직 안에, 내 모든 곳에 실제로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시고, 그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실존이 된다는 것! 여기에 모든 해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여기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바로 전도요 찬송이요 기도요 모든 것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안되고 나오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이 지속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지금도 성령께서 여러분과 저를 이끌어 가시도록, 이끌어 가시는데, 내 안에 오셔서 워낙 안 되어 있잖아요. 체질들이 그러니까 성령께서 기가 막힐 것 같아요.
내가 갖고 있는 이 메시지를 마음에 담으면서, 오늘 말씀 준비하면서 참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오시느라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왜? 워낙 안 되니까! 그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어떻게 합니까? 한없는 탄식과 한없는 고통이 따른다고 그랬습니다. 구체적으로 여러분 속에, 여러분 고통과 괴로움을 함께 나누시면서, 그러니 지금 현재 뭘 이해하셔야 되느냐 하면, 성령이 임했다? 하나님이 변하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이 임했다? 세계를 바꾸는 겁니다!
한번 옆에 사람 얼굴을 한번 보세요. 받아합시다. "세계를 바꿀 얼굴이 아니다!" 아무리 봐도 세계를 바꿀 얼굴이 아니에요. 그러기에 성령께서 오셔서 그 성령이 여러분과 저를 변화시키고, 바꾸시고, 세계까지 바꾸시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셨다! 여기에 엄청난 배경이 나오거든요. 이런 구체적인 역사를 위해서 오늘 예수께서 이 시험을 당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단은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처음에 예수님이 임하실 때에 성육신 할 때에 왕권을 가지고 덤벼들었습니다. 발악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에서 두 살 아래에 얼마나 큰 고통이 임하잖아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남하에 큰 슬픔' 이 벌써 예언된 말씀이잖아요. 여러분 두 살 아래에, 그 지역 베들레헴 지역에 다 죽여 놓았으니까요. 어머니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울음이 진동했습니다. 그 지역이요.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발악했던 사단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똑같이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승리를 이루시기 직전에 먼저 이 시험 창세기 3장을 꺾는 놀라운 이 시험을 앞에 두고 예수님이 받으실 때에 사단이 발악을 안 하겠습니까! 지금 사단이 발악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과 저의 힘으로는 도저히 꺾을 수 없고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을 지금 현재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이루십니다. 이 일을 이루시면서, 이 일에 여러분과 저의 승리의 결과를 그냥 나 홀로 붕 떨어져 놓고 승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승리의 사실적인 실존이 되게 만들어서 이끌어 가시는 그 역사가 무슨 역사라 그랬습니까? 성령이라 그랬습니다. 성령이라!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성령의 사실적인 역사를 믿어야 됩니다. 믿어져야 됩니다. 이걸 뭐 복잡하게 생각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믿으면 돼요. 누구로 말미암아? 이 십자가의 역사를 믿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누가 역사 합니까? 성령이! 이 성령의 역사는 먼저 실존을 만들어 놓았다! 그랬습니다. 제가 어려운 말을 쓸려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말로 표현이 안 돼요.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되었는데 뭐가 되느냐? 그 해결된 사람으로 있습니다. 내게 해결된 실존으로 있습니다. 해결된 실체로서 내게 벌써 와 있습니다. 그러면 의지하고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이걸 안 믿어요. 받아합시다. "믿으면 된다!" 너무 쉬운 말이거든, 오늘 이 말을 아무도 못 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 하는데 믿으면 된다는 그 말도 성령이 임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들을 이끌어 나가시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 성령이 임하시는 역사를 몇 가지를 좀 말씀을 해드려야 되겠어요. 일단 이 사실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이 어디로 서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고, 공의와 정죄가 오고, 사랑과 사유가 옵니다. 여기서 이제 구원이 이루어지죠. 이게 신학적으로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공의와 정죄가 오고, 예수님이 죽으심이 마지막 공의가 완전한 하나님의 만족이죠. 그 다음에 이것이 배경이 되어져야 뭐가 오느냐? 하나님께서 무조건 용서하심과 그 다음에 사유하심이 따라옵니다. 사유라는 것은 죄를 용서해 주셔야,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사유입니다. 그 다음에 사랑! 이 사실에서 이게 사랑 아닙니까! 그것이 완성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가지고 구원이라 그럽니다. '구원!' 그랬을 때에 그 구원이 그렇게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 말씀한 것처럼 그 구원이 되어졌을 때에 여러분과 제가 구원의 실존 자들로 만들어 줍니다. 구원의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이라 그랬어요. 그 에베소서 1장 13절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4)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뭐라 그러냐 하면, 구원을 인 치시고 구원을 보증해 주신 역사로 뭡니까? 성령을 통해서...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 인 쳤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도장 찍었다!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 토지 부지를 사는 과정에서 내 도장이 몇 번 찍혔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장로님 도장이 몇 번 찍혔는지 모르겠어요. 이것은 우리 거다! 도장을 찍습니다. 도장을 찍으면... 법적으로 도장을 찍어야 돼요. 그 다음에 보증이다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한 천국과 그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보증이라는 것은 담보물이라는 말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그런 배경이에요. 그러니 예를 들어서 또 우리가 현실적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우리가 돈을 이제 빌렸습니다. 그때에 이 돈을 반드시 빌렸지 만은, 갚는다는 어떤 보증으로 뭘 주어요? 담보물을 제공합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가 담보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원하신 그 영광의 축복으로 나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담보물이 뭐냐? 담보하신 것이 뭐냐?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에 대한 사실적인 역사가 이게 와져야 돼요. 이게 안 되니까 자꾸 다른 생각이, 여러 가지 이런 생각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사실적인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배경으로 담보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인 치신다! 성령의 보증이 되신다! 성령이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시고 구원에, 영육간에 하나님께서 축복의 보증이 되시는 이런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여기 보면 고린도 후서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을 어디에 주어요? 마음에, 생각에! 그래서 이 성령은 우리 마음에, 생각에서 뿐 아니고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까? 우리 속에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면서 실제로 역사 하시는 모든 것에... 그래서 성령이 임하셨다. 여러분 전체가, 전 인격이 완전히 변화됩니다. 새로워져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로 만드시는 실체를 만들어 놓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가 이해가 되어야 참 신앙이 되고, 참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새로 태어난다! 이 변화가 된다는 사건이, 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시기까지 하시면서 여러분과 제가 이런 참 된 실체를 만들어 놓으시는데, 이 거듭나게 하시는 새 창조의 놀라운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았다! 그럴 때에 보통 구원받았다! 천당 간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엄청난 변화가 와야 됩니다. 불신자가 되어 있다가 그러니 지옥으로 가다가 이 사람이 그 지옥 가는 길을 돌이켜서 완전히 천국으로 간다는 이 엄청난 것이요. 이 골로 말한다면 도저히 여기서, 여기에 올 수 없는 골입니다. 지옥 가던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천국으로 돌이켜서 하나님의 백성 된 마음! 이것은 우리 힘으로 아닙니다. 여러분 힘으로 되어지지를 않아요. 도저히 이것이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사실이 이루어집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3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엄청난 이 변화가 간단하게 우리 느끼는데 구원받았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이러니까 너무 쉬우니까! 우리 힘으로 안하고 성령으로 하니까! 너무 쉽잖아요. 그러니까 뭐 간단하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천국 시민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래가지고는 얼굴에 별 변화가 없는데, 이 엄청난 사건을 우리가 이해한다.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하는 사건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데, 여기에 뭔가, 이것이 이해되는 때에 감사 찬송이 터져 나옵니다. 뭐 다른 것 뭐 백 번, 천 번 상관없어요.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고도 이스라엘이 강둑에서 홍해 강둑에서 얼마나 막 뛰고 야단했는데 홍해 정도가 아닙니다. 죽음의 요단강을, 영원한 저주의 요단강을 건너고 난 후에 그 강둑에서 가만히 멍청하게 앉았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진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 성령의 사실적인 역사가 이해가 될 때에 진정한 감사와 찬송이 여기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성령으로 인 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았다 그럴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의 사실이라는 것이 성령으로 인쳐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에 보면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랬습니다.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가 나오죠. 그 다음에 갈라디아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내 아들 세광이는 나한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통으로 알아요. 그냥 '아버지! 아빠!' 그럽니다. 그런데 아버지라 부를 때, 이 사건이 얼마나... 자기가 나한테 아버지라고 감히 부른다는 것이요,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몰라요. 혹시 여러분 자녀들이나 여러분 아무라도 나를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도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왜? 나는 그러면 왜? 내가 낳았어요. 내 생명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버지라 그럽니다. 아닌 사람은 백 번, 천 번 원하고, 요구하고, 애를 쓰고, 힘쓰고, 노력해도 안 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아니고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가 없다!' 그랬습니다. 어쩌다가 여러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까! 혹시 오늘도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저씨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은 안 해도...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이 실감이 안 납니까! 그것은 하나님 아저씨지! 하나님 아버지가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 왜 그러느냐? 자연스럽게 성령으로 내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무엇으로? 성령으로! 성령으로 아니고는 안 온다고 그랬습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실제로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이 사실이 이루어지고, 역사 되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때부터 뭐가 되느냐? 내가 하나님의 아버지라 부르는 그 순간에, 성령으로 내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되는 겁니다. 이끌리고, 인도 받고,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부르고, 성령의 인도 받게 되는 그 순간에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그런 실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뭐 '내게 주시옵소서. 내가 이 만큼 했으니 하나님 주시옵소서.' 그 말이 아니다! 안 그랬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했습니다. 목사님은 많이 일했고, 목사는 뭔가 기도도 많이 해 놓았으니까! 뭐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그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내 아들이 나한테 많이 해줬기 때문에, 뭐 들어 주는 줄 압니까! 전부 나한테 해준 게 없어요. 지금까지 계속 돈 가져 가 가지고 뭐 계속 받아갔고, 계속 그랬지. 내가 해준 것이 없어요. 나한테 그런데도 조금만 해주면 고맙다고 한번은 선물이 왔던가 언제한번 만 연필을 보냈어요. 이걸 내 버리고 싶어도 벌써 몇 년 되었습니다. 왜? 그 조그마하게 하나 해준 것, 지금도 가지고 다닙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실체를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인도를 받게 되는 것이죠.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에 자녀의 문제를 말하면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성령을 말합니다. "영을 우리 마음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영이라 그럴 때에 누가? 실제로 예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인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도록 만든 실체를... 그래서 예수께서 내 안에, 너희 안에, 여러분 안에, 내 안에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 하셨느냐? 그래가지고 내가 하는 일도 너희도 하고, 내가 하는 일 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왜? 그렇게 만들어 주었어요. 그렇게 하도록 성령을 부어주셔서 구체적으로 이것을 이루어 주셨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 하나님의 세계복음화가 내게 세계복음화 그러면 누가? 성령으로! 조금 전에 말씀했습니다. 암만 봐도 세계복음화 할 얼굴이 아니거든, 여러분 저를 볼 때 암만해도 박 목사 뭘 암만 봐도, 하나님 보다 예수님 보다 더 많이 할 것 같지도 않는데 했어요. 벌써 예수님은 유대 나라를 떠나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계복음화, 복음 전파 위해서 어디까지 갔다 왔어요? 미국 갔다 왔지, 러시아 같다 왔지, 저 뭐 유럽 갔다 왔지, 호주 같다 왔지! 안 가본데 없어요. 이것만해도 예수님 보다 더 많이 했어요.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 많이 한다, 안 한다! 이전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뭐가? 실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점이 지금 이해가 되어야 돼요. 그러니 내가 뭘 하겠다! 그 말이 아닙니다. 하도록... 그래서 그 할 수 있도록 내 안에 누구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지금 이 순간 여러분 삶에서 여러분 생애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변화시켜 가시고 역사 해 가시는 겁니다.
이때부터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기도하면 된다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이게 안 믿어지니까 기도도 안 되지만, 무시기도도 안 되지만, 기도해도 안 믿으니까! 받아합시다. '믿으면 된다!' 말은 너무 잘 하는데, 이 말 못하는 사람 없는데, 이 믿음도 성령으로 너희가 은혜로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오늘 조금만 여러분 성령의 실체를 내가 믿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 때에 이 한 주간 하나님이 하십니다. 엄청난 역사! 제자세울 하나님의 때가 왔습니다. 세계복음화 하는 하나님의 때가 왔습니다.
보다시피 여러분 정말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세상 살아갈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지금 각 국에서 터집니다. 세계적인 불황이 지금 오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고는 살아갈 수 없는 때가 왔습니다. 이때에 조금만 믿고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에, 여러분 곳곳에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응답의 역사들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한 주간 여러분 이것을 붙잡고 조금만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여러분과 제가 뭐냐하면, 진짜 치료라는 것이 나올 수 있고요. 진짜 위로라는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에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뭐라 그럽니까?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사실! 이미 벌써 그때 당시에는 성령께서 왔다 갔다 하시지 만은, 지금 신약시대에는 한번 오셨다! 영원히 안 떠나십니다.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라는 그 말 자체가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곁에 서서 너와 함께 있으면서 위로한다! 도와준다! 이 배경이 바로 성령의 말이라는 단어에 바로 직설적인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보혜사라는 말이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이것이 제일 그 성령이라는 말에 대한 구체적인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바로 그 말은 이때부터 여러분과 제게 어떤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에 보면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그랬는데 믿는 순간부터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라!' 이 말로 들었는지? 근심은 태산같이 합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오늘 마태복음서에 계속 말씀한 것처럼 이 구원에 엄청난 역사조차도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이루어 가시는 사건에 그 엄청난 줄기를 몰라요. 믿음의 배경을 우리는 몰라요.
그래서 뭐든지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하려고 그럽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는 성령의 인도를 절대로 못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문제도 내가 하려고 그러니까 근심이 나오고 걱정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성령의 인도 못 받는다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이것을 가지고 불신앙이라 그럽니다. 여러분 생활과 사건에 요만한 불안과 근심이 있다! 불신앙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단의 통로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간단합니다. 이 한 주간도 어떤 문제나 사건이다. 완전히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겁니다. 받아합시다. "죽으면 죽으리다!" 끝났어요. "망하면 망하리다!" 받아합시다. "망해도 주안에서 망하자! 죽어도" 누구한테서? "주안에서 망하자!" 다윗의 믿음이었어요. 내가 하나님의 손에 죽겠나이다! 인구조사를 잘못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선택하라 그럴 때에, 다윗이 내가 하나님의 손에 죽겠나이다! 하루동안 인구의 몇 만이 죽었잖아요. 하나님이 손으로 직접 치시니까, 다윗이 무릎꿇고 '하나님 죽이려면 나를 죽이지, 왜 내 백성을 죽입니까!'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대어드니까! 하나님께서 금방 마음을 바꾸어서 축복하셨습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 참 의뢰할 때에 죽는 곳에도 은혜가 나옵니다. 죽는 사건 속에도 축복이 임하게 되어있습니다. 위로와 평안입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 주간도 여러분 우리현장에서 준비된 제자들, 이렇게 준비되어져서 세상을 바꿀 이런 제자들, 여러분과 제게 허락하시고 오늘도 약속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런 사건을 체험한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을 찾아내어서 세계를 살리라! 여러분과 제게 주신 사명과 명예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예수의 시험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 구원은 공의와 사랑이 모두 포함되어있는데, 공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즉, 먼저 죄를 지은 인생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법을 공의롭게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나서야 성령께서 인간에게 임하시는 사랑의 은혜가 완성되었습니다.
☞ 창세기 3장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께서 참 인간으로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던 것은, 예수께서 바로 참으로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사단은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면서 인간으로서 겪는 굶주림의 문제를 능히 해결하라고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이심을 거부하지 않음으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2] 성령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십니다.
☞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하나
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성령이 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받는다는 사실을 보증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사실적인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구원의 보증으로 우리 안에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켜 새롭게 만들어가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생각과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도우십니다.
[3] 성령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 성령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축복을 받게되었습니다. 즉, 오직 성령의 인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실존(신분)'이 된 것입니다.
☞ 이제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우리들은 성령의 충만하신 인도를 받을 때, 모든 삶이 구체적으로 변화되어집니다. 특별히 지금은 성령으로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때, 작은 믿음으로라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기도하면, 치유의 축복 속에 새 힘을 얻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성령은 우리의 보혜사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과 사건 속에서도 우리는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겠다는 전적인 의지함 속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언약 잡은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내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를 더욱 잘 받으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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