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복 받을 자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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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그랬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그래서 '복 받을 자!' 라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제목을... 그런데 우리는 이 8복을 쭉 설명을 하면서 많은 경우 인위적이고 또 인간적인 어떤 그 설명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율법적인 것과 또 신비적인 배경을 깔고 설명을 할 때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좀 될 수 있으면 이 8복에 대해서 그 오해할 수 있는 그런 어떤 문제가 또 다시 거론될까 싶어서 지난번에 그 '주리고 목마른 자!' 6절을 중심해서 좀 설명을 하고 당분간 넘어 갈려고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좀 언급해야 될 부분이, 그냥 넘어갈 수 없다싶은 마음이 들어서 오늘 1절, 2절, 3절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가지고 우리가 산상수훈! 산상보훈!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셨다고... 제가 그 성지 순례 때 가보니까, 그때 당시에는 그 마이크 장치도 없었고 산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육성이 되겠느냐? 물론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시면 마이크보다도 더 확실하게 개개인에게 들릴 수 있지만 자연스럽게 했을 때에 얼마나 들려질 수 있겠느냐? 그래서 그런 의문을 갖고 조금 산상수훈한 장소를 가 보았습니다. 그 장소를 보니까, 딱 사람들이 이렇게 들을 수 있도록, 뭔가 사람 말도 이렇게 모아 질 수 있도록, 지형이 참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많이 느끼고,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이스라엘 땅에 새삼스러운 역사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산상보훈이나 산상수훈이라고 말씀한 것은 '산에서 말씀하셨다!' 그런 배경에서 산상수훈! 그 다음에 '산에서 너무 주옥같은 보배로운 말씀을 하셨다!' 산상보훈! 그렇게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제일 첫 번째 보면 8복중에 복중에 복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뭐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 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8복을 설명을 하면서 어떻게 대략 설명을 하고 있느냐 하면, 뭘 하니까 복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심령이 가난하기 때문에 복 받는다!' 어떤 그 복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 8복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잘 하든 못하든 복 받을 팔자다!" 여러분 지금 이상한 짓을 해도 복 받을 팔자입니다. 또 이상한 짓을 한다고 일부러 할 필 요는 없지만, 로마서 6장에 말씀한 것도... 그래서 우리가 죄를 또 지으려고, 어떻게 죄 가운데 있으려고 말씀하겠습니까 만은,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복 받을 자입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그래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이 말이 뭔지 눈치를 채야 돼요. 그래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흔히 많은 경우 내가 잘 한다 못한다. 상당히 영향을 받거든요. 그래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구애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어떻게요? '나갈지니라!' 무엇 때문에? 신분이 그렇게 되었어요. 이걸 가지고 은혜라 그럽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 시작되지 아니하면 엉뚱한 결과가 나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어떤 상태로 심령이 가난하냐? 이것이 참 중요한 그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 8복음! 어떤 조건으로 말하자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복음 받는다라는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복 받을 자는 이렇다. 복을 받고있는 사람은 이런 상태다! 그런 표현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하셔야 됩니다. 여러분 진짜 배고프다 진짜 가난하다! 그렇게 겪어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진짜 배고플 때는 빵 한 조각에 그렇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물 한 모금이 그렇게 좋을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뭐 가난하다! 그렇게 못 느껴봤습니다 만은, 금식하면서 느껴 본 것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한 3일쯤 굶고 나면요. 종일 생각하는 것이 뭡니까?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 그냥 누웠다, 꿈꾸는 것도 먹는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난이라는 것이 지속적인 이런 배경이라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합니다. 내가 가난하다. 뭐 잠깐 가난하다! 그런 게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뭔가 계속해서 갈망이 되어집니다. 그런데 그 갈망하는 대상이 배고프고 굶주리면 다르죠. 그런 경우입니다. 정말 그 조금만 적응을 해도 만족할 수 있고 만족하게 됩니다.

제가 금식하면서 마침 그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하는데, 그 기도원에서 사과를 한 보자기를 같다가 놓았더라 구요. 원래 과수원인데, 그런데 한 3일쯤 굶고 나니까 그 3일쯤 굶는 동안에 그게 얼마나 유혹이 되는 줄 몰라요. 그래서 심지어는 뭐 일어나 가지고 만져보기다 하고 그랬습니다 만은, 그래도 이제 3일쯤 참고 그 다음에 3일 만에 제가 그 사과 반쪽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사과반쪽이 그렇게 만족을 주는 겁니다. 그렇게 힘이 됩니다. 보통 때는 사과 반쪽이 그렇게 힘이 되는 줄 몰랐는데, 그렇게 힘없고 한 3일 굶으면 여러분 뭐 3일 굶어봐야 어떨까? 그럴지 모르지만 3일 굶으면 힘없습니다. 그런데 힘이 새로운 힘이 나버리더라 구요.

그런 것을 제가 느끼면서 참 진짜 굶주린 사람에게는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이 그렇게 귀할 수 없고, 그렇게 고마울 수 없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영적으로 가난해 가지고 영적인 물 한 모금, 빵 한 조각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이 땅에 필요한 요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다는 것을, 우리와 우리 교인들과 교회가 그리고 교역자들이 잘 모른다는데 대해서 이 땅에 비극이다!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아마 우리 교회가 먼저 불림을 받고 이 사역을 말한다고 말하지 만은 정말 이 눈이 열려야 우리가 기도가 바로 나갈 수 있다는 걸,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부분이 뭐냐하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서 진짜 굶주릴 수 있는, 진짜 가난할 수 있는 배경이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너무 배불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못 박아서 죽였던 것이 바리새인들의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거만하고, 얼마나 교만하고 얼마나 배부르다라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게 되죠.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정말 이 한국교회가 그리고 또 우리 교회가 또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게 영적인 가난이냐! 그리고 그 영적인 가난 속에서 뭘 생각하고 누구를 계속해서 그리워하며 사모하며 굶주려 하는가? 이것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결과를 낳게되는 배경인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오는 것은 갈증입니다. 우리 신앙에 갈증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처음 초기에 우리가 갈급 한 자다! 그렇게 말씀한 것은 갈급 한자라고 그래서 갈급 하면, 뭐 무조건 일꾼으로 알았는데, 갈급 한 배경에서는 도저히 치료될 수 없는 영적 문제 때문에 갈급 한 자들이 있습니다. 또 신비배경 때문에 갈급 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뭐 사정없죠. 그래서 저는 그 신비배경에서 좀 느낀 것은, 기도는 하면 할수록 갈급 해집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이것을 잘 이해를 하셔야 돼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될 때는 갈급 함보다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을 얻고, 먼저 만족을 얻고 그러면서 뭐냐? 내가 갈급 해도 뭘 생각하면, 어떤 것을 생각하면, 갈급 해 하는 그런 그 가난함에 대한 어떤 그 배경과 부분이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갈증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 있어요. 갈증을 가지고 갈 때에 어떤 문제가 오느냐 하면, 자꾸 사람을 찾게 되고 또 다른 어떤 사건을 찾게되고, 어떤 일거리를 찾게 되고, 그렇게 해서 자꾸 갈급 하게됩니다.

저는 그 바다에서, 한 1년 반 바다 위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중에서 나는 그 시골에 살면서 바다에 한 조각배가 떠 있을 때에 그 오는 갈증, 물에 대한 갈증을 별로 이해를 못했거든요. 왜? 물 많은데, 물 천지 속에서 무슨 갈증이 나오느냐?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만은, 그러나 이 햇빛은 쪼이고 조각배가 이렇게 바다에 표류하게 될 때에, 그때에 그렇게 많은 물 속에 있지만, 이 바닷물 아닙니까! 바닷물은 먹으면 먹을수록 갈증이 나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준비되어야 돼요. 그것은 물을, 배에서 물을 준비해 가지고 그 물을, 생수를 먹어야 일이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리 많은 바닷물, 많은 바닷물을 떠먹어도 갈증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짜 여러분 갈증이 해결되려고 그러면 제일 중요한 출발이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배경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만족하는데서 평안한데서부터 기도응답이 내게, 여러분에게, 개개인에게 체험되면서부터 진짜로 우리 신앙생활이 출발이 됩니다. 여기 뭐 갈급 하다! 이것은 다른 차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심령이 가난하다! 그럴 때에 그런 갈증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증 가지고 이야기 할 때는 영 달라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생겨요. 뭐 얼마나 우리가 갈증날 때는 조급해지고 그런 문제가 나오죠.

그래서 이 갈증이 오는 그런 배경들을 아마 성경에서 이렇게 하면, 우리 신앙 생활하는 모델로서 이렇게 한번 삼아 볼 수 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 그러면 옛날에 욥입니다. 아주 동방에 의인! 그 다음에 그 때 당시에 의인 축에도 못 들었지 만은, 우상 속에 있었던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같은 시기에 하나님이 동방에 의인을 불러서 믿음의 조상으로 안 삼고 저 우상 구더기 속에 있는 누구를 불렀어요? 아브라함을 불러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여기에 이 말을 가지고 상당히 이의를 제기하고, 의미를 여러 가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다락방에서도 동방에 의인 욥을 안 부르고 저 우상 속에 있는 아브라함을 불렀다! 그건 우리가 잘 듣고 있는 배경입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왔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상태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동방의 의인 욥은 항상 갈증입니다. 늘 뭔가 늘 두려워하고 늘 염려해하고 늘 조급해하고 조바심가지고 그래서 뭔 일이 있다 그러면 전부 불러모아 가지고 아이들 그 열 명 아닙니까! 아이들 수대로 제사지내고 죄 지었다면 사해주옵소서. 늘 그렇게 염려했던 것이 욥이 초반기에 나오는 그런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그 염려하던 것이 전부 다 그대로 욥에게 이루어졌잖아요. 그런데 욥은 일생에 살면서 동방에 의인이라 그랬던 의인의 배경이 그렇게 늘 조바심을 갖고 염려해 하고 초조해 하고 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뭐 하나님께 대해서 혹시라도 잘 못한 것 있으면 어쩔까 싶어서 그렇게 살았던 배경이 동방의 의인 욥의 배경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배경은 뭡니까? 뭐 아무것도 모르고 지 마음대로 살았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택한 것이지. 잘살았기 때문에 의인 욥을 불렀다! 동방에 의인을 불렀다! 그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혹시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막 이렇게 해야 되지! 하나님이 나를 때리지 않을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지 않을까! 이것은 어떤 면에서 잘 하는 것 같은데도 갈증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이 거의 뭔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건 심령이 가난한 부분이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성경에 나타난 것은 욥이 얼마나 갈증 가지고 하나님을 오해했느냐 하는 부분을 보는 것이요. 한번 욥기 7장 12절 말씀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그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씀이죠. 욥이 참 고난을 당하는 속에서 하나님께 대해서 이제 대들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럽니까? '나를 죽이시렵니까! 살리시렵니까!' 하는 이와 비슷한 그런 문제죠.

그 다음에 또 보면 15절 말씀에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아마 신앙 생활하면서 '아버지 차라리 이럴진대 나를 죽여주옵소서' 이럴 때가 참 많거든요.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참 뭘 해 놓았다고 죽으려고 덤비고... 그 다음에 또 보면 17절 말씀에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시작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그 다음 18절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이만하면 여러분 이해가 되죠. '하나님 내가 뭡니까! 내가 뭐 그렇게 큰 것이 되어 가지고 자꾸 나를 갈구십니까! 그리고 나를 자꾸 뭐 대적합니까!' 이런 식입니다. 그리고 '나를 자꾸 권징 하면 어쩔 겁니까! 나와봐야, 눌러봐야, 나올 것은 그것밖에 뿐인데...' 욥이 막 말로 하기야 어려움 당하면 자연적으로 그렇게 나옵니다.

그 다음에 19절 말씀 보면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뭐하려고 나를 계속 쳐다보고 조금만 잘못하면 한 대 때리고, 조금만 하면 왜 그럽니까!' 이해가 갑니까! 욥이 너무 고달프고 너무 괴로우니까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뭡니까? 하나님이 자꾸 자기를 살피고 자기를 괴롭히고 자기를 고통 하게 하는 이 하나님으로... 그래서 하나님 나를 긍휼이 여기소서 하는 과정에서 이 배경으로 지금 갑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하면서 조금만 잘못하고 조금만 이상하면, '하나님 왜, 이럽니까!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이렇게 되어 가지고 신앙생활이 항상 뭡니까? 원망 내지는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 내지는 이런 것들로서 늘 갈급 해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우리 율법적인 배경 속에서는 뭔가 조금만 잘못하면, '아이고 내가 이걸 잘못해서 그렇구나!' 그것 때문에 뭐 일을 찾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뭘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가지고 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일하고 주의 일을 감당할 때에 만족하게 '주여 어찌해서 나를 이렇게 사랑했습니까! 죽음과 멸망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이 축복 속에 나를 세우셔서...' 그 다음에 문제가 왔을 때 '옳소이다! 당연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내가 안 되니까!

그래서 항상 이런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주인이 누구냐 하면, 자기입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여러분 특별히 신비에서 갈급 해지는 사람들 중에는 늘 주인이 자기가 됩니다. 나한테 만족하고 나한테 뭐 잘되고 나한테 뭐 답이 나오고 이것으로 전부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 신앙생활에 평안이 없이 갈급해 진다는 것은 그것만큼 불쌍한 것이 없어요. 신상 생활에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고요.

먼저 우리 노 목사님이 그런 예화를 들었었는데, 내가 그대로 옮길지 모르겠습니다. 새벽기도 때인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느냐! 임금이 딸을 결혼을 시킨다고 광고를 하고서는 이 세상에서 제일 평안한 사람에게 딸을 주겠다! 그래서 이제 모집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구름 때처럼 몰려왔죠. 그런데 그 면접을 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어떻게 해서 평안하냐? 또 내 딸을 평안하게 해 줄 수 있느냐?' 이러니까! '나는 지식이 많아서, 혹은 나는 돈이 많아서' 막 이래가지고 말합니다.

그런데 면접결과 전부 불합격이에요. 하나도 합격된 사람이 없어요. 왜? 진짜 평안한 사람 같으면 왕궁에 들어오려고 생각도 할 것 없고 왕궁에 들어와 가지고 딸을 가지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진짜 평안하고 만족하는 사람 같으면 뭐하려고 딸 가지려고 애쓰고, 뭐하려고 왕궁에 들어오려고 애쓰느냐! 그렇게 애쓴다는 사실 자체가 뭔가 부족하다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의미가 부여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 그리스도 만족합니까! 뭐 그렇게 야단입니까! 예수로 진짜 만족합니까! 가슴이 가득해 집니까! 참 우리가 신앙생활에 어떤 사건과 일을 만날 때마다 '감사합니다!' 가 먼저 나와야 됩니다. '참, 주여 어찌해서 이렇게 풍성합니까!' 이게 나와 야죠.

여러분 욥은 전혀 이런 게 안 보이잖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나를 간섭하신 다는걸 아는데, 그 배경이 전혀 다른 배경입니다. '하나님 왜 이럽니까! 왜 이렇게 자꾸 흔들립니까! 왜 자꾸 나를 칩니까! 그래서 왜 자꾸 나를 살핍니까!' 그러면서 더 재미있는 말이 아주 재미있는 말이 있어요. 20절 말씀에 한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하셨나이까" 여기에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자꾸 쥐어박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뭐, 그렇게 큰 하나님 앞에 문제가 있다고, 여러분 죄 범했다고, 하나님이 뭐 그렇게 해가 된다고, 조금만 죄를 범하면 들고치고, 조금만 죄를 범하면 한 발길차고, 조금만 죄를 범하면... 그렇게 하실 이유가 뭐 있습니까, 하나님! 그런 배경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없는 죄를 범했다 할 지라도 주님과 상관없어요. 어떤 면에서 주님이 여러분 죄를 범하는데 대해서 영향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욥이 바로 이걸 오해를 한 겁니다. 뭔가 여러분이 뭐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까! 다만 그 배경을 아셔야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그 하나님이 나와 어떤 관계냐! 심령이 가난한자 어떤 의미로 나를 불렀고 어떤 의미로 나를 이렇게 하시느냐! 그게 바로 이해가 안 되면 여러분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져도 이게 문제가 됩니다. 조급증이 나오고 다른 것이 되는 것이죠. 이런 배경에서 항상 하나님 앞에 바라보면서 또 때립니까! 하나님 또 왜 이럽니까! 이러면요. 이 병드는 정도가 아닙니다. 죽는 거죠. 바로 여기에 우리가 바로 아셔야합니다. 생각 한번 바로 하는데 대해서 얼마나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생각한번 잘못한데 대해서 얼마나 무서운 악의 역사가, 악령의 역사가 역사 한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하루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그 나단 선지자에게 임하기 전에 다윗이라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마음에 '나는 10여 년 동안 지었던 백향목 궁, 좋은 궁에서 있는데...' 하나님은 그때는 장막에 거했거든요. '초막 속에, 법궤가 하나님은 저 장막 속에 거하는데 내가 참 미안합니다. 하나님을 멋진 성전을, 궁을 만들어 가지고 그 속에 하나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는 순간에 여러분 다윗에게는 일평생 아니고 대대손손 엄청난 축복을 주었습니다. 이 다윗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배경이 그 다음에 '다윗의 호흡이 떠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다윗의 가문에서부터 임금이 떠나가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데로 대대로 임금의 가문으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셔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이렇게 축복하십니까!' 또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 올렸던 것이 바로 다윗입니다.

나는 오늘 욥기에 여기서 기록한 것과 전혀 배경을 달리 해서, 다윗과의 어떤 대화 생각 너무나 차이가 나잖아요. 그런데 똑같은 왕으로서 사울 왕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 는 말에 시기가 들어가면서 '저걸 죽여야 되겠다!' 하는 순간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악령이 들어갔어요. 악령이! 하는 순간에 악령이 들어갔어요. 여러분 생각 잘못하면 악령이 들어갑니다. 악령이 들어가서 사울의 후손 망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울도 착찹하게 죽었던 말로를 우리가 잘 압니다.

여러분 나는 교회를 건축한다는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요. 여러분 자의든지 타의든지 엄청난 은혜다! 이것이 좋든, 그르든 이 문제 가지고 지속해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는 이 생각, 말하자면 심령이 가난한 마음으로 교회건축이라는 이런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참 축복이다! 너무 너무 귀한 것이다! 그래서 요즘도 제가 뭘 이렇게 기도를 하게 되면, 또 그 다음에 길을 간다든가 뭐 이렇게 특별히 기도하면 다른 게 아니거든요. 꼭 들어가는 것이 '교회 건축! 세계복음화! 주의 종들이 감당할 수 있는 가정교회와 사업 직장교회가 건축되게 하옵소서. 이 일로 통해서 개개인이 참여하고 기도하는 자들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여 주옵소서!' 계속해서 또 한번하고 또 한번하고...

그래서 제가 가끔가다가 저녁을 먹고 어디 다른데 등산하고 안 되니까, 저녁 먹고 좀 기도하기 전에 돌아다니면서, 빙글빙글 이제 옥상에서 돕니다. 옥상 돌아봐야 손바닥만한데, 얼마나 돌겠어요. 보통 20바퀴를 도는데, 손을 이렇게 꼽아가면서 다 펴면 이제 10번 아닙니까! 다 펴면 끝냅니다. 펴면 돌아갈 때마다 한바퀴 도는데, 조금 전에 기도했던 것 이걸 한번씩 걸려요. 한 바퀴 돌면 한번 밖에 딱 안돼요. 한번하면 한 바뀌 다돼요. 그 다음에 이제 '300명, 3000제자!' 그 다음에 이를 위해서 '사단이 결박되게 하시고 이를 막는 흑암의 세력 꺾어주시고 이를 위해서 주의 종에게 전무한 건강주시고...' 두 가지 가지고 주로 이제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돕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어떤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배고픈 자들이 계속해서 먹을 것을 사모하듯이 어떤 심령으로 하나님께 계속해서 나가느냐! 내게 주신 이 현장과 이 일과 이 사건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의미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느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심령이 가난한자! 여기에 놀라운 축복과 역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시기도, 정시기도! 그걸 입으로 꼭 굳이 말하기 전에 여러분 발걸음 옮길 때마다, 여러분 움직일 때마다, 사건을 당할 때마다, 일을 할 때마다 일단여러분 입에서 뭐가 나와야 합니까? '정말 하나님으로 그리고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한다!' 이것이 바탕에 안 놓여지면 갈급 함에 떨어져 버립니다.

그 다음에 문제가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 기도가, 기도가 아니고 기도가 조급증으로 바꾸어집니다. 기도가 '왜, 이럽니까!' 이런 식으로 바꾸어집니다. 이것이 되어지면, '하나님, 어찌해서 나 같은 죄인을 이렇게 큰 축복을 주십니까!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사건과 이 일과 이 문제가 내게 무슨 의미를 주시고있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무슨 뜻을 내게 주시고 있습니까!' 믿음이 옵니다. 기대가 되는 것 아닙니까! 이 시기에 너무 우리가 믿음이 없어요. 이런 기대라는 것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 배경이 거의 신비배경이고, 거의 인본주의 배경이 많기 때문에, 거의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 이런 구체적인 이런 배경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로 통한 평안과 안식을 놓쳐 버리고, 거의 하나님 앞에 조급증으로 나갈 때가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너무 다른 결과를 지금 갖고 있습니다. 기도하는데도 다른 결과를 갖고 있고, 뭔가 일을 하는데도 다른 결과를 갖고 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어떻게 하느냐? 정상적으로 참 평안 가지고, 교회를 통해서 축복 받는 것이 아니고 막 이 사람들이 또 뛰어다니는 사람들! 이 결국 다른 경우, 그래서 나는 이상한데 뛰어다니는 경우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게 영적 문제가 있느냐? 그 사람들이 주로 심각하게 뛰어다닙니다. 그게 왜? 이렇게 조급증 때문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시작하는 배경 속에서 바로 이 일이 이루어지죠. 그리고 그때부터 믿음의 바탕이 되어지게 됩니다. 나는 오늘날 우리 백성들이 또 하나님의 사람들이 너무 과학이라든가 지식 때문에, 너무 분석을 잘 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믿는 다는 사실이 잘 안 되는 것을 느껴요. 여러분 참 복음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신다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만들고 또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좀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이 좀 들어요.

저는 그 개인적으로 이런 문제가 좀 오면서, 내 건강에 문제가 오면서 나는 나를 위로하는 마음에서 그럽니다. 그게 옳은 말이든지 아닌 말이든지, 또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하나님이 일일이 여러분들을 들고 쳐 가지고 사람을 만들려고 그러면 여러분 반 죽여야 되니까! 언제 여러분들이 일하고 언제 그럽니까! 그래서 나는 '우리 송현교회를 대표해서 그런 것을 지금 모델로 간다!' 나는 그렇게 자부를 좀 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저를 보고 뭔가 하나님 앞에 믿음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나 혼자 위로를 합니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있든지 말든지, 막상 참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이 어렵고 힘들 때에 하나님 앞에...

그때에 이제 물론 '정시기도!' 그러고 '무시기도!' 그러고 무시기도라는 말이 필요 없어요. 그때 되니까요. 한 걸음, 한 걸음 지가 죽을 지경인데, 그리스도! 임마누엘 그리스도!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하시면요. 한번만 딱 건드려 버리면 밤새도록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잠 안 온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해야될 것 아닙니까! 영적 문제가 왔다! 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게 되어있어요. 그 하나님이 하시는 건 너무 간단합니다.

그런데 그런 게 오는 과정 속에서, '심장이 수술할 시간도 늦었고, 또 기회도 그렇고 그렇다!' 그러면서 '이게 저절로 실핏줄이 생겨 가지고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뭔가 작은 구름이라도 나타났을 때에, 엘리야는 큰 구름을 봤는데! '하나님 조만한 핏줄이 생겼다. 저절로 그랬다. 주여 나는 믿습니다!' 그러면서 이 핏줄이 뭐 하나 둘 생길 수 있나! 만들 수 있는 하나님 같으면 뭐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다 생길 수 있지 않습니까! 다 회복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믿음으로, 믿음보다도 그런 오기로 왜? '하나님이 안 살려 주시면 누가 일을 합니까!' 그것보다도 주께서 할 일 놔두고, 이렇게 할 일 놔두고 꼭 이렇게 하셔야 됩니까! 암만해도 하나님 생각에 흔들릴 것 같거든요. 안 그럴 것 같기 때문에 내가 큰 소리 치는 겁니다. 하나님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지나면서 오늘도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뭐 어쨌든 간에 너무너무 안 믿으려고 그래요. 나도 안 믿으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그 한 분 잡고 평화가 시작되며, 평화가 바탕이 된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게 엄청난 결과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왜, 이럽니까! 날 왜 이렇게 괴롭힙니까! 고통스럽게 합니까!' 이 배경과 달리 '하나님 어찌해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도 하나님 사랑에 눈을 뜨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 한 분이 뭔가 이야기를 하다가 역시 동산 병원에 입원해 가지고 죽을 뻔했던 그런 과정입니다. 이 죽을 뻔했던 그런 과정인데, 그래서 열이 39도, 40도! 39도, 40도 말이 그렇죠. 이렇게 되면 혼수상태에 빠지면 사람이 간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몇 일간 계속해서... 그냥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겨우 참 생사의 이런 갈림길에서 살았습니다. 살았는데, 딱 이 병이 이제 치료가 되고 나니까! 더 심각한 문제가 와 버렸어요. 무슨 문제가 왔느냐 하면, 음성이, 목에 이제 음성을 나게 하는 그 신경이 9개가 있는데 8개는 죽어버렸고 1개만 겨우 붙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음성이 가 버렸어요. 말을 못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얼마나 대들었는지! '하나님 차라리 목사를 살려 주시면 음성까지 주셔야지 음성을 없애 버리면...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 목회뿐인데, 채소 장사를 할 겁니까! 뭘 할 겁니까!' 막 대어 들었다 그래요. 그러니 의사가 하신 말씀이 '한 3일 간은 치료해 보자! 가능성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지만, 지금 1개만 살아 있는데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한 3일 정도치료하면 좀 뭔가 진단이 나오겠다!' 그러더라 구요. 그래서 한 3일 동안 약을 먹고 있는데, 그런데 그 동안에 이제 말을 못하고 계속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이왕에 살려 주신다면 음성도 돌아와서 내가 목사를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말씀을 전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도중에 3일째 되는 날, 한번 그 주치의사가 들어오시면서 '목사님!' 부르더랍니다. 자기도 모르게 뒤로 돌아서면서 '예!' 깜짝 놀란 겁니다. 3일째에 '예' 가 터져 나왔습니다. 얼마나 같이 놀라 가지고 막 감사하고, 기뻐하고 그러면서 다 치료가 된 것이죠. 다 치료가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39도, 40도 이렇게 된 과정에서, 몇 일 동안 그렇게 된 과정에서 퇴원하고 난 후에 전혀 다른 병이 없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떻게 의학적으로 이야기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생각에 39도, 40도 되면서 다른 병균이 다 죽어 버린 것 같아요.

더 건강한데, 그런데 의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퇴원할 때에, '당신 절대로 음성을 최대로 아껴라! 조금만 더 쓰면 안 된다!' 아끼라는 겁니다. '예!' 그래놓고는 속으로 '음성을 열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하시면 뭘 못하겠느냐!' 이런 생각도 또 들더랍니다. 그런데 또 공교롭게도 퇴원하자 말자 부흥회 초청이 왔네! 갈등이 오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여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그러면 뭐가 두렵습니까!' 가서 얼마나 고함을 질렀던지 마음대로 고함을 질러 버렸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때에 음성이 탁 정착이 되면서 더 이상 어느 집회에 가든지 그 이후에 음성이 가지도 않고 변동이 없이 딱 고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연세가 많아요. 아래께 같이 만나가지고 지금도 말만 잘해요.

왜 제가 이 말씀하느냐? 너무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안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안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안 믿기 때문에 오는 것이 전부 뭐냐? 조급증입니다. 전부 이런... 여러분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 믿음가지고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 참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 생겼기 때문에 박 목사도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찬송합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주신 사건과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가 바로 깨달아 지는 순간, 순간 엄청난 결과로 응답하시는 겁니다. 역사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 은혜 주시려고, 역사 하시려고 여러 가지 사건 속에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보이지만은 우리가 이게 안 되면 조급증으로 나갑니다. '하나님 왜, 이럽니까!' 막 대들며 나갑니다. '왜 이럽니까!' 그래서 이미 여러분에게... 받아합시다. "나에게 모든 기도응답은 다 주셨다. 누리면 된다. 여기서 출발이다!" 할렐루야!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팔복에 대한 올바른 이해

☞ 팔복에 관해서 인본주의적인 해석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무엇을 하니까 복을 받는다'라고 팔복의 교훈에 대해서 복을 받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팔복은 복을 받을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받는 사람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복을 받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진짜 배가 고플 때는 빵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이 너무나도 귀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들의 주림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진짜 영적으로 굶주린 자에게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 갈급해 하는 것은 더욱 큰 갈증을 낳게 될 뿐입니다.

☞ 바다에서 갈증을 느낄 때, 그 흔한 바닷물을 아무리 마셔도 갈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때 생수 한 그릇이 그의 갈증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즉, 생수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굶주림을 온전히 해결받아야 하는데, 신비나 율법 등으로 갈증을 해소하려고 발버둥을 치면 오히려 갈증이 더할 뿐입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신앙 생활에서 느끼는 갈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이 이와 같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부족과 잘못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으로 갈급했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다면, 우리의 삶에서 전혀 조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게 되면, '어찌하여 나같은 죄인에게 은혜를 주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까? 어찌하여 나같이 부족한 자에게 이러한 사건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려고 하십니까?'라는 감사의 고백과 함께 찬송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입니다.

☞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아갈 때에 모든 사건과 일들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면 됩니다.


▣ 언약 잡은 기도 ▣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시고, 나같이 부족한 자를 인도하여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에게 닥친 문제와 나의 부족이나 잘못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이심과 예수께서 나의 그리스도이심으로 만족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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