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가라!
2004-05-14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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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8: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 28:11)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마 28: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마 28: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마 28: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마 28: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 28: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마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목을 "갈릴리로 가라!" 그렇게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갈릴리로 가라 하시고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 거기서 누구를 본다 구요? '나를 보리라!'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갈릴리에서 보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쭉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만은, 지난주에는 6절 말씀을 중심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어떻게 했다 구요? '살아나셨다!'그랬습니다. 결국은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그랬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라는 그런 말씀의 방향을 우리가 붙잡아야 되겠다는 것을 특별히 말씀드렸고, '하나님의 계획대로'라는 것은 여러분과 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메시아가 되시는 이 사건 자체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이 내 생각이나 감정과 기분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형편과 어떤 사건에 처하든지 이걸 발견하게 되면 벌써 우리는 해답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성취에 감사와 기쁨을 발견하고 볼 수가 있죠. 그리고 이 사실이 이해되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우리가 불평하고,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하는 이런 의심과 불 신앙의 역사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조금 더 나가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말씀하시던 대로, 또 이스라엘이 바라던 어떤 그런 민족적인 구원이라든가 이런 어떤 것들로, 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그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그러면서 견디기 힘든 그런 고백들이 지지난 주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나 마음이나 감정이나 느낌과 상관없이 가장 최고의 축복과 역사로 하나님은 이루어 가십니다.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얼른 볼 때에는, '도저히 이것은 견디기 힘들다! 어렵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어떤 모습도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부활하시면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나시면서, 그러면서 그 제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것이 뭐냐하면, '갈릴리로 가라! 만약에 내가 살아난다! 죽었다! 이런 어려움이 온다! 사건이 생긴다!' 이런 여러 가지 모든 것이 일어나거든 너희는 뭐라 그랬느냐 하면, '갈릴리로 가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예수님이 어려움 당하게 되고, 인간의 생각과 뜻과 전혀 상관없이, 뭔가 감정과 기분과 상관없이, 이런 사건들이 생기거든, 염려하지말고, 의심말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니까! 그것을 붙잡고 갈등하지말고 갈릴리로 가라! 그렇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자들은 이 사건을 당하면서 시체조차도 근처에 가기 힘드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렇게 있다가, 간절히 사모하는 여자들로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제자들에게 말해라!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갈릴리로 가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갈릴리에 가야 나를 만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만은, 제자들이 어디서 불림을 받았습니까? 갈릴리에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처음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역사 속에, 그 축복 속에 들어오게 된 배경이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로 가라고 한 것은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은, 그저 간단히 우리가 쉽게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그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죽음과 멸망에 처해 있던 현장! 그들이 사단과 또 저주 속에 매여있던 그 현장! 예수님께서 이런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그 완전히 해결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구세주가 되시는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실 때에 완전하게 그 사명을 이루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예수님을 어디에서 확인해야 되느냐? 제자들에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있는 현장, 너희들이 서있는 그런 현장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이 말씀 속에서 뭘 우리가 깨달아야 되느냐 하면,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옛날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만나고 그분과 함께 임마누엘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의 역사는, 그건 멀리 어떤 그 꿈속에서 산다던가, 어떤 뭐 하나의 새로운 어떤 세계 속에서 산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직장과 내 삶의 현장과 내 삶의 그런 본래의 모습 속으로, 그 속에서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해주시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 신앙생활은 잘못 들어가게 되면 하나의 도피적인 그런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변화 산에 가셔서 변화된 모습을 봤을 때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을 했느냐 하면, 모세와 예수님과 또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내가 여기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또 엘리야 위해서, 모세를 위해서 초막 셋을 짖고 여기서 항상 계속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눈을 떠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세도 엘리야도 없고 예수님만 있더라!' 그것이 마태복음 17장에 이야기죠.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뭔가 은혜를 받는다! 또 성령의 어떤 체험을 하게 된다! 또 어떤 그 상황을 갖게 되면 현실을 잃어버리고, 실제의 삶을 잃어버리고 뭔가 신앙을 막연하게 현실적인 도피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어떤 그런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현실 도피가 아니고, 신앙생활은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현실과 사건에서 저주와 고통과 문제해결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현실 속에서 이겨나가고, 현실 속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이 사실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것이 잘못되어져서 역사 속에서 많은 잘못된, 그릇된 그런 길을 갔던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해가 잘못 되어서 중세 수도사적인 기독교 신앙생활! 그래서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실을 도피해서 산에 올라간다던가, 은둔 생활을 한다던가, 도피생활을 한다거나 이렇게 하고, 심지어는 지상에 와서 사는 생활 속에서도 30자나 높이 뭔가 이렇게 시설물을 만들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서 묵상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밑에서 꿰어서 주는 빵을 받아먹고 하는 이런 사건들까지 생겼던 그런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운동을 수도원 운동이라 그러고, 뭐 기도원 운동이라고 그럽니다 만은, 요즘도 어떤 면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그런 장소를 준비하는 기도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어떤 그 기독교 역사에 참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이런 문제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바로 붙잡지 않으면, 그러니까 바로 시정하지 않고 바로 방향을 붙잡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현실과 자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신앙이 이루어지고, 현실 속에서 신앙생활이 되어야 되는데, 이것이 안될 때는 자꾸 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장 현실적이고, 기도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그리고 전도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데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도와 또 복음이라는 것, 전도라는 사실이 내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지는 그런 문제들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부활 이후에 참 복음의 성격이 뭐냐? 현실에서, 삶에서,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내 삶과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자체가 내 삶으로 이어져와야 된다!'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요즘 우리가 계속해서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기록한다거나, 그 다음에 복음에 말씀을 내가 기억해서 기도제목을 삼고, 그걸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걸 말하자면, 말씀이라 그러면 옛날에는 도저히 내가 생활도 안되고, 말씀 그 자체가 내 삶에 잘 안 되는 너무 높은 지경에 있는 그런 수준의 말씀이 아니고, 말씀이 나의 삶으로 끌어들이고, 내 생활과 내 사건 속에 말씀이 함께 하는 것!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적고, 말씀을 기록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제목을 잡고, 성취되고 안 되고를 체크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이런 어떤 자세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 말씀에서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누구를 본다 구요? 복음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 수도원이나 기도원이나 어떤 망상이나 환상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저의 삶이요, 생활이요, 사건입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사실이 아니면 늘 우리신앙은 붕 떠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지금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자꾸 교인들이 힘을 잃어가고, 힘이 없어지는 것은 뭐냐하면, 우리 삶에 사실적인 역사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 생활은 사실적으로 그들이 그 종교생활을 누리고 즐길 수 있는데도 기독교인들은 사실적으로 안됩니다. 뭔가 구체적으로 내 생활과 삶이 복음이 안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온다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먼저 뭐라 그랬느냐?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너희들의 삶에 현장에서, 옛날에 너희가 있던 저주와 죽음의 현장에서 또 그 속에서 불리워졌고, 제자로 택함을 받았고, 제자로 세움을 받았던 그 장소로 가라! 거기서 누구를 만나느냐?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삶의 밖에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게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이걸 먼저 우리가 구체적으로 조금 이해하려면 복음이라고 그럴 때에, '복음에 뿌리를 내린다!'그러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막연하게 뭔가 예수 그리스도 말하고, 복음을 말할 때에 이 복음자체가 사실은 내 생활과 삶으로 연결되어지지를 못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냥 어떤 면에서 내 생활과 삶에 도움을 주는, 그리고 나는 그 복음을 이용해서 내 어떤 육신생활에 유익을 보는 이런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해결자라는 그런 사건자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 자체가 여러분과 저의 생명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본질이요, 근본입니다. 그 분은 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게 아니고 복음 없이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삶의 존재 자체가 거부되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 모든 사건 속에서 먼저 뭘 생각해야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또 그분과 함께 있는 임마누엘의 사실적인 역사가 아니면 우리의 삶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과 어떤 문제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든지 먼저 우리가 확인해야 될 것, 그 복음을 통한 삶이, 그 역사가 내 안에 있느냐? 이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내가 뭔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용한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복음자체가, 생명자체가 바로 내 존재가치가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내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복음에 뿌리가 내린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성령으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내 생각으로, 내 기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많은 설명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에 생략하고 지나갑니다 만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 사람을 보는 것이나, 사람을 느끼는 것이나,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또 사건과 일을 느끼고 보고 대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할 때에, 그 방향을 뭘 통해서 보느냐? 전부 예수 그리스도! 그걸로 통해서 본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보지 않는 것은 내 삶의 가치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나 무슨 사건이 생길 때에 오직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이 일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로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보는 그때에 뭐냐? 그때에 모든 일이나 사건이나 삶에 가치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체질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그 지혜를 가지고 뭔가 그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는, 도움을 받고, 그 다음에 그 도움을 가지고 내가 뭔가 성공하기 위한 어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삶 자체가 나의 삶의 가치로 완전히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뿌리가 되어야 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뭔가 신앙생활하면서 아프다, 슬프다, 기쁘다, 좋다, 나쁘다! 뭐 어떤 모든 것도 전부 뭐로 봐야 되느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그리스도로 통해서 이것이 가치에 기준이 결정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자체는 이 사실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누림이라는 말이 늘 우리 마음속에 말은 많이 하지만 가장 안 되는 부분이 이것이거든요. 그리스도를 누린다! 복음을 누린다! 신앙생활을 누린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누린다는 사건이 뭐로 연결되느냐 하면, 기도라는 것으로 여러분과 연결되는 거죠. 모든 문제가 그저 기도로!
그래서 기도라고 그럴 때에, '어떤 안타까운 마음으로 안되어 가지고 기도한다!' 그런 것이 아니고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랬습니다. 바로 이 복음과 연결되면서 모든 문제나 사건이 닥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기도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라는 말 자체가 사건과 문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고, 그 기도라는 사실자체가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 축복 된 삶을 현장에서 누린다는 것이 기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가 이 건강 문제를 계속해서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1년, 2년 그저 잠깐 지나가는 어떤 아프다는 것보다도, 오랫동안 지속해서 오는 건강문제 때문에 내게 오는 것이 뭐냐하면, 상당히 어려울 때가 많아요. 참기도 어렵다, 참기도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뭘 나는 느끼느냐 하면, '아, 하나님 앞에 내가 신앙생활이라는 자체가...' 이것이 뭘 어떤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어떤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 다음에 안 좋은 일들을 좋아지게 만들고, 아프던 것을 안 아프게 만들고, 이런 것이 거의 기도로 연결되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 깊이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아픈 자체도 평안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뭘 말로서 형용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 구요. 그것이 지난번에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내가 지금 하나님에 현실적인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것이 복음에 바탕이 아니고, 복음에 뿌리가 깊이 내려지지 않으면, 내가 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결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다스리고, 지금 나를 인도하시고, 지금 이 사건과 이 문제, 안 된다고 하는 이 문제 속에서도 임마누엘 하신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진다는 것이 복음에 뿌리거든요. 이것은 내 힘으로,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더라 구요. 성령으로 이 사실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얼른 생각할 때에 내 생각에는 좋은 것 같은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닌데,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 아셔야 될 것이 내 뜻이 아니다 싶을 때는 내게는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일 때에는 어느 것이 성취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좋고 안 좋고 와는 상관없이 거기에 축복과 역사가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내 뜻이 이루어졌다!'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닐 때는 잠시는 좋은 것 같은데, 엄청난 피해와 괴로움과 고통의 열매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를 깨닫고 볼 수 있는 길이 뭐냐? 이 어려운 현실과 어려운 삶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이해가 될 수도 없는 그런 삶에서 나를 보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지금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볼 수 있다! 여러분 지금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뭐로?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이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언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현장에서 비로소 내가 깨닫고 볼 수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현장이라는 말이 상당히 참 묘한 말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이것도 현장이요, 저것도 현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현장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의 실질적인 삶에서, 그러니까 괴로움과 고통과 저주와 아픔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도피하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서, 내 이상추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것은 현장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그런 어떤 방향으로 나갈 때는, 말하자면 우리도 똑같이 어디로 빠지느냐? 종교로 빠지고, 우리도 옛날 중세의 가장 암흑기에, 기독교의 암흑기에 빠졌던 바로 그런 수도원 운동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현장! 갈릴리로 가라!' 그곳에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 그곳에서 뭘 하느냐? 진짜 사명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제자들에게 육으로 있는 동안에 갈릴리로 가라 말씀하시면서, 갈릴리로 가서 뭘 했느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16절에서 20절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그곳에서 사명을 주시는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뭘 깨달아야 되느냐하면, 여러분들이 사명, 사명! 그럴 때에 교회 안에서 막연하게 충성하겠나이다! 그 다음에 기도할 때에 충성하겠나이다! 찬송 부를 때에 막 뜨거운 감정으로 충성하겠나이다! 중요한 겁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복음 위해서 충성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직장과 생활과 삶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지금 놓쳐버리고 있는 부분이 뭐냐하면, 많은 경우 이것이 안되면 종교로 떨어진다고 그랬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충성하는데, 내 삶에서는 충성이 안돼요. 직장 생활 속에서는 충성이 안 되요. 내 기분과 내 생각, 심지어는 이것이 연결이 안되면 교회 안에서까지 내 느낌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어떤 면에서 우리는 감정에 많이 속을 때가 있습니다. 내 느낌에 많이 속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막 충성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충성한다는 내 느낌이 교회 안에서조차 안 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내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참 사명에 눈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여러분의 생활터전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우리 주님이 여러분과 제게 명령하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우리가 흔히 전도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만은, 전도라는 말은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저의 현장에서, 삶으로 주님 앞에 충성하는 길이 전도라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교회가 새로이 건축되어 집니다. 새로 건축이 되어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사명이, '건축되어졌다! 교회가 커졌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 오늘 16절로부터 20절까지 주어지는 이 현장에서의 사명이 확인되는 기회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그냥 막연하게 뭔가 내 유익, 내 생각으로 끝나지 말고, 세계 복음화와 그리고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직장현장에서, 그리고 나를 보내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현장에서 삶이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① 10절 : 무서워 말라. 네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②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거기서 예수님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십시오.
①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는 일에 예수님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나 느낌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③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④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살아나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⑤ 어렵고 힘든 사건이 생길 때 갈등하지 말고,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⑥ 갈릴리로 가야 예수님을 만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⑦ 처음에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⑧ 제자들이 축복 속으로 들어가게 된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⑨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은 죽음과 멸망에 처해있던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⑩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은 사단과 저주 속에 매여 있던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⑪ 현장으로 돌아가서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구세주로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⑫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임마누엘의 축복으로 살아가는 역사는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⑬ 내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임마누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2. 현장에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① 신앙생활을 도피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②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③ 그러나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모두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아 계신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④ 신앙생활은 실제의 삶을 잃어버리고,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⑤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이겨나가며, 승리하는 것입니다.
⑥ 신앙생활을 중세의 수도사들의 도피적인 신앙생활로 오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⑦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⑧ 기도와 전도가 가장 현실적인데도, 기도와 전도가 나의 현실과 동떨어지게 이루어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⑨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앙생활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⑩ 말씀이 현장의 삶 속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⑪ 기도수첩은 말씀을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⑫ 내 생활과 내 사건 속에 말씀이 함께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⑬ 갈릴리로 가야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⑭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사실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⑮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밖에서 예수를 만나고 이해하려고 하면서 잘못되는 것입니다.
3. 현장의 모든 사건과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십시오.
① 많은 경우 복음이 삶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② 우리는 복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의 해결자다’라는 것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자체가 우리의 생명 자체요, 본질입니다.
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삶의 존재 자체가 가치 없습니다.
⑥ 임마누엘의 사실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⑦ 복음을 통한 삶이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⑧ 복음에 뿌리가 내리는 것은 성령으로 되어집니다.
⑨ 모든 것을 보는 방향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⑩ 모든 일과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 것이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⑪ 이렇게 그리스도를 누리는 사건이 기도로 연결됩니다.
⑫ 모든 사건과 일들에 대해서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⑬ 복음과 연결되어야, 문제나 사건을 만날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⑭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평안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⑮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으로라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괴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절대적 축복과 역사로 연결됩니다.
어려운 현실과 삶에서 예수님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현장이라는 말은 괴로움과 고통과 슬픔이 있는 우리의 실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4.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 충성하는 참된 사명을 회복하십시오.
① 현장인 갈릴리로 가십시오.
② 그 곳에서 진짜 사명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③ 예수님께서 육으로 있는 동안에,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셨습니다.
④ 사명은 교회 안에서 충성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⑤ 사명은 기도할 때, 찬송할 때 뜨거운 감정으로 충성하겠다고 고백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⑥ 사명은 우리의 가정과 직장의 생활 속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⑦ 삶의 현장에서 참된 사명에 대한 눈이 열리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⑧ 현장에서 삶으로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⑨ 주님께서 원하시는 현장에서 사명이 회복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마 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마 28:9)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 28: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 28:11)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마 28:12)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마 28:13)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마 28:14)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마 28:15)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 28:16)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마 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목을 "갈릴리로 가라!" 그렇게 했습니다. 10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갈릴리로 가라 하시고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 거기서 누구를 본다 구요? '나를 보리라!'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갈릴리에서 보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쭉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만은, 지난주에는 6절 말씀을 중심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어떻게 했다 구요? '살아나셨다!'그랬습니다. 결국은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그랬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라는 그런 말씀의 방향을 우리가 붙잡아야 되겠다는 것을 특별히 말씀드렸고, '하나님의 계획대로'라는 것은 여러분과 저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메시아가 되시는 이 사건 자체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이 내 생각이나 감정과 기분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실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형편과 어떤 사건에 처하든지 이걸 발견하게 되면 벌써 우리는 해답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성취에 감사와 기쁨을 발견하고 볼 수가 있죠. 그리고 이 사실이 이해되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우리가 불평하고,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하는 이런 의심과 불 신앙의 역사는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조금 더 나가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말씀하시던 대로, 또 이스라엘이 바라던 어떤 그런 민족적인 구원이라든가 이런 어떤 것들로, 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그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그러면서 견디기 힘든 그런 고백들이 지지난 주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실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나 마음이나 감정이나 느낌과 상관없이 가장 최고의 축복과 역사로 하나님은 이루어 가십니다.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얼른 볼 때에는, '도저히 이것은 견디기 힘들다! 어렵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런 없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어떤 모습도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제 다시 부활하시면서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나시면서, 그러면서 그 제자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신 것이 뭐냐하면, '갈릴리로 가라! 만약에 내가 살아난다! 죽었다! 이런 어려움이 온다! 사건이 생긴다!' 이런 여러 가지 모든 것이 일어나거든 너희는 뭐라 그랬느냐 하면, '갈릴리로 가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예수님이 어려움 당하게 되고, 인간의 생각과 뜻과 전혀 상관없이, 뭔가 감정과 기분과 상관없이, 이런 사건들이 생기거든, 염려하지말고, 의심말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니까! 그것을 붙잡고 갈등하지말고 갈릴리로 가라! 그렇게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제자들은 이 사건을 당하면서 시체조차도 근처에 가기 힘드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렇게 있다가, 간절히 사모하는 여자들로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 '제자들에게 말해라!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갈릴리로 가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갈릴리에 가야 나를 만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만은, 제자들이 어디서 불림을 받았습니까? 갈릴리에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처음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역사 속에, 그 축복 속에 들어오게 된 배경이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이 갈릴리로 가라고 한 것은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은, 그저 간단히 우리가 쉽게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하면,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그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죽음과 멸망에 처해 있던 현장! 그들이 사단과 또 저주 속에 매여있던 그 현장! 예수님께서 이런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그 완전히 해결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구세주가 되시는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실 때에 완전하게 그 사명을 이루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 예수님을 어디에서 확인해야 되느냐? 제자들에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이 있는 현장, 너희들이 서있는 그런 현장으로 돌아가라!'
그런데 이 말씀 속에서 뭘 우리가 깨달아야 되느냐 하면,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옛날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고,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만나고 그분과 함께 임마누엘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삶의 역사는, 그건 멀리 어떤 그 꿈속에서 산다던가, 어떤 뭐 하나의 새로운 어떤 세계 속에서 산다던가,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직장과 내 삶의 현장과 내 삶의 그런 본래의 모습 속으로, 그 속에서 확인해야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해주시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 신앙생활은 잘못 들어가게 되면 하나의 도피적인 그런 신앙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함께 변화 산에 가셔서 변화된 모습을 봤을 때에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을 했느냐 하면, 모세와 예수님과 또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감격스러워서, '내가 여기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또 엘리야 위해서, 모세를 위해서 초막 셋을 짖고 여기서 항상 계속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눈을 떠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모세도 엘리야도 없고 예수님만 있더라!' 그것이 마태복음 17장에 이야기죠.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뭔가 은혜를 받는다! 또 성령의 어떤 체험을 하게 된다! 또 어떤 그 상황을 갖게 되면 현실을 잃어버리고, 실제의 삶을 잃어버리고 뭔가 신앙을 막연하게 현실적인 도피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어떤 그런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현실 도피가 아니고, 신앙생활은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현실과 사건에서 저주와 고통과 문제해결이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고,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현실 속에서 이겨나가고, 현실 속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이 사실을 붙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것이 잘못되어져서 역사 속에서 많은 잘못된, 그릇된 그런 길을 갔던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해가 잘못 되어서 중세 수도사적인 기독교 신앙생활! 그래서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 한다는 사실 자체가 현실을 도피해서 산에 올라간다던가, 은둔 생활을 한다던가, 도피생활을 한다거나 이렇게 하고, 심지어는 지상에 와서 사는 생활 속에서도 30자나 높이 뭔가 이렇게 시설물을 만들어서 그 위에 올라앉아서 묵상하고, 그렇게 기도하고 밑에서 꿰어서 주는 빵을 받아먹고 하는 이런 사건들까지 생겼던 그런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운동을 수도원 운동이라 그러고, 뭐 기도원 운동이라고 그럽니다 만은, 요즘도 어떤 면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그런 장소를 준비하는 기도원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어떤 그 기독교 역사에 참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이런 문제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바로 붙잡지 않으면, 그러니까 바로 시정하지 않고 바로 방향을 붙잡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현실과 자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 속에서 신앙이 이루어지고, 현실 속에서 신앙생활이 되어야 되는데, 이것이 안될 때는 자꾸 멀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장 현실적이고, 기도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그리고 전도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데도,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도와 또 복음이라는 것, 전도라는 사실이 내 현실과는 전혀 동떨어지는 그런 문제들로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부활 이후에 참 복음의 성격이 뭐냐? 현실에서, 삶에서, 신앙생활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내 삶과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자체가 내 삶으로 이어져와야 된다!'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요즘 우리가 계속해서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기록한다거나, 그 다음에 복음에 말씀을 내가 기억해서 기도제목을 삼고, 그걸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 이걸 말하자면, 말씀이라 그러면 옛날에는 도저히 내가 생활도 안되고, 말씀 그 자체가 내 삶에 잘 안 되는 너무 높은 지경에 있는 그런 수준의 말씀이 아니고, 말씀이 나의 삶으로 끌어들이고, 내 생활과 내 사건 속에 말씀이 함께 하는 것!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적고, 말씀을 기록하고,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제목을 잡고, 성취되고 안 되고를 체크해 나가면서 살아가는 이런 어떤 자세 자체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래서 여기 본문 말씀에서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누구를 본다 구요? 복음을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 수도원이나 기도원이나 어떤 망상이나 환상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과 저의 삶이요, 생활이요, 사건입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사실이 아니면 늘 우리신앙은 붕 떠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지금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자꾸 교인들이 힘을 잃어가고, 힘이 없어지는 것은 뭐냐하면, 우리 삶에 사실적인 역사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종교 생활은 사실적으로 그들이 그 종교생활을 누리고 즐길 수 있는데도 기독교인들은 사실적으로 안됩니다. 뭔가 구체적으로 내 생활과 삶이 복음이 안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온다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먼저 뭐라 그랬느냐?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너희들의 삶에 현장에서, 옛날에 너희가 있던 저주와 죽음의 현장에서 또 그 속에서 불리워졌고, 제자로 택함을 받았고, 제자로 세움을 받았던 그 장소로 가라! 거기서 누구를 만나느냐? 나를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삶의 밖에서 예수를 만나고, 예수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게 잘못된 겁니다.
그래서 이걸 먼저 우리가 구체적으로 조금 이해하려면 복음이라고 그럴 때에, '복음에 뿌리를 내린다!'그러는데, 지금까지는 그냥 막연하게 뭔가 예수 그리스도 말하고, 복음을 말할 때에 이 복음자체가 사실은 내 생활과 삶으로 연결되어지지를 못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냥 어떤 면에서 내 생활과 삶에 도움을 주는, 그리고 나는 그 복음을 이용해서 내 어떤 육신생활에 유익을 보는 이런 것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해결자라는 그런 사건자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 자체가 여러분과 저의 생명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본질이요, 근본입니다. 그 분은 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그게 아니고 복음 없이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삶의 존재 자체가 거부되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 모든 사건 속에서 먼저 뭘 생각해야 되느냐?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또 그분과 함께 있는 임마누엘의 사실적인 역사가 아니면 우리의 삶은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건과 어떤 문제나 어떤 어려움 속에서든지 먼저 우리가 확인해야 될 것, 그 복음을 통한 삶이, 그 역사가 내 안에 있느냐? 이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데로, '내가 뭔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이용한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복음자체가, 생명자체가 바로 내 존재가치가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내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복음에 뿌리가 내린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뭐가 이루어져야 되느냐? 성령으로 이루어져야 됩니다. 내 생각으로, 내 기분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많은 설명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에 생략하고 지나갑니다 만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 사람을 보는 것이나, 사람을 느끼는 것이나,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또 사건과 일을 느끼고 보고 대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내가 어떤 방향을 향할 때에, 그 방향을 뭘 통해서 보느냐? 전부 예수 그리스도! 그걸로 통해서 본다! 그럴 때에 예수 그리스도로 통해서 보지 않는 것은 내 삶의 가치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나 무슨 사건이 생길 때에 오직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이 일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볼 때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바로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보는 그때에 뭐냐? 그때에 모든 일이나 사건이나 삶에 가치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체질이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가 어떤 그 지혜를 가지고 뭔가 그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는, 도움을 받고, 그 다음에 그 도움을 가지고 내가 뭔가 성공하기 위한 어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삶 자체가 나의 삶의 가치로 완전히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뿌리가 되어야 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뭔가 신앙생활하면서 아프다, 슬프다, 기쁘다, 좋다, 나쁘다! 뭐 어떤 모든 것도 전부 뭐로 봐야 되느냐?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그리스도로 통해서 이것이 가치에 기준이 결정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자체는 이 사실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누림이라는 말이 늘 우리 마음속에 말은 많이 하지만 가장 안 되는 부분이 이것이거든요. 그리스도를 누린다! 복음을 누린다! 신앙생활을 누린다! 그렇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누린다는 사건이 뭐로 연결되느냐 하면, 기도라는 것으로 여러분과 연결되는 거죠. 모든 문제가 그저 기도로!
그래서 기도라고 그럴 때에, '어떤 안타까운 마음으로 안되어 가지고 기도한다!' 그런 것이 아니고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랬습니다. 바로 이 복음과 연결되면서 모든 문제나 사건이 닥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뭐가 나옵니까? 기도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라는 말 자체가 사건과 문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구하는 기도가 아니고, 그 기도라는 사실자체가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이 축복 된 삶을 현장에서 누린다는 것이 기도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제가 이 건강 문제를 계속해서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1년, 2년 그저 잠깐 지나가는 어떤 아프다는 것보다도, 오랫동안 지속해서 오는 건강문제 때문에 내게 오는 것이 뭐냐하면, 상당히 어려울 때가 많아요. 참기도 어렵다, 참기도 힘들다... 그런데 여기서 뭘 나는 느끼느냐 하면, '아, 하나님 앞에 내가 신앙생활이라는 자체가...' 이것이 뭘 어떤 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어떤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 다음에 안 좋은 일들을 좋아지게 만들고, 아프던 것을 안 아프게 만들고, 이런 것이 거의 기도로 연결되거든요. 그런데 뭔가 이 깊이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아픈 자체도 평안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뭘 말로서 형용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 구요. 그것이 지난번에 조금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은, 내가 지금 하나님에 현실적인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것이 복음에 바탕이 아니고, 복음에 뿌리가 깊이 내려지지 않으면, 내가 구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연결이 안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다스리고, 지금 나를 인도하시고, 지금 이 사건과 이 문제, 안 된다고 하는 이 문제 속에서도 임마누엘 하신다는 사실이 확실히 믿어진다는 것이 복음에 뿌리거든요. 이것은 내 힘으로,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더라 구요. 성령으로 이 사실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면 얼른 생각할 때에 내 생각에는 좋은 것 같은데,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닌데, 그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성취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 아셔야 될 것이 내 뜻이 아니다 싶을 때는 내게는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일 때에는 어느 것이 성취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좋고 안 좋고 와는 상관없이 거기에 축복과 역사가 연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내 뜻이 이루어졌다!' 참 좋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닐 때는 잠시는 좋은 것 같은데, 엄청난 피해와 괴로움과 고통의 열매가 따라온다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나를 깨닫고 볼 수 있는 길이 뭐냐? 이 어려운 현실과 어려운 삶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되고, 이해가 될 수도 없는 그런 삶에서 나를 보고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지금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볼 수 있다! 여러분 지금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뭐로?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이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언하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현장에서 비로소 내가 깨닫고 볼 수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현장이라는 말이 상당히 참 묘한 말입니다. 얼른 생각하면 이것도 현장이요, 저것도 현장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현장이라고 말할 때에 여러분의 실질적인 삶에서, 그러니까 괴로움과 고통과 저주와 아픔이 실제로 존재하는 그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도피하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해서, 내 이상추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그것은 현장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그런 어떤 방향으로 나갈 때는, 말하자면 우리도 똑같이 어디로 빠지느냐? 종교로 빠지고, 우리도 옛날 중세의 가장 암흑기에, 기독교의 암흑기에 빠졌던 바로 그런 수도원 운동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현장! 갈릴리로 가라!' 그곳에서 뭘 하려고 그러느냐? 그곳에서 뭘 하느냐? 진짜 사명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제자들에게 육으로 있는 동안에 갈릴리로 가라 말씀하시면서, 갈릴리로 가서 뭘 했느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16절에서 20절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그곳에서 사명을 주시는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뭘 깨달아야 되느냐하면, 여러분들이 사명, 사명! 그럴 때에 교회 안에서 막연하게 충성하겠나이다! 그 다음에 기도할 때에 충성하겠나이다! 찬송 부를 때에 막 뜨거운 감정으로 충성하겠나이다! 중요한 겁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복음 위해서 충성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입니까? 직장과 생활과 삶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지금 놓쳐버리고 있는 부분이 뭐냐하면, 많은 경우 이것이 안되면 종교로 떨어진다고 그랬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충성하는데, 내 삶에서는 충성이 안돼요. 직장 생활 속에서는 충성이 안 되요. 내 기분과 내 생각, 심지어는 이것이 연결이 안되면 교회 안에서까지 내 느낌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어떤 면에서 우리는 감정에 많이 속을 때가 있습니다. 내 느낌에 많이 속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막 충성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 충성한다는 내 느낌이 교회 안에서조차 안 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내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참 사명에 눈이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여러분의 생활터전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비로소 우리 주님이 여러분과 제게 명령하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우리가 흔히 전도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만은, 전도라는 말은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저의 현장에서, 삶으로 주님 앞에 충성하는 길이 전도라는 현장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교회가 새로이 건축되어 집니다. 새로 건축이 되어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사명이, '건축되어졌다! 교회가 커졌다!'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사건을 통해서, 정말 오늘 16절로부터 20절까지 주어지는 이 현장에서의 사명이 확인되는 기회가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엄청난 축복과 역사로, 그냥 막연하게 뭔가 내 유익, 내 생각으로 끝나지 말고, 세계 복음화와 그리고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직장현장에서, 그리고 나를 보내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현장에서 삶이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① 10절 : 무서워 말라. 네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②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시고, 거기서 예수님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십시오.
①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시는 일에 예수님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나 느낌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③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④ 하나님의 뜻대로 다시 살아나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갈릴리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⑤ 어렵고 힘든 사건이 생길 때 갈등하지 말고,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⑥ 갈릴리로 가야 예수님을 만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⑦ 처음에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불림을 받았습니다.
⑧ 제자들이 축복 속으로 들어가게 된 곳이 갈릴리였습니다.
⑨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은 죽음과 멸망에 처해있던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⑩ 갈릴리로 가라는 말씀은 사단과 저주 속에 매여 있던 현장으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⑪ 현장으로 돌아가서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시고 구세주로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⑫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임마누엘의 축복으로 살아가는 역사는 꿈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⑬ 내 삶의 현장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임마누엘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2. 현장에서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① 신앙생활을 도피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② 변화산에서 베드로는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고 살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③ 그러나 베드로는 모세와 엘리야가 모두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아 계신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④ 신앙생활은 실제의 삶을 잃어버리고,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⑤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체험하고, 이겨나가며, 승리하는 것입니다.
⑥ 신앙생활을 중세의 수도사들의 도피적인 신앙생활로 오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⑦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⑧ 기도와 전도가 가장 현실적인데도, 기도와 전도가 나의 현실과 동떨어지게 이루어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⑨ 부활하신 예수님은 신앙생활이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⑩ 말씀이 현장의 삶 속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⑪ 기도수첩은 말씀을 내 삶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⑫ 내 생활과 내 사건 속에 말씀이 함께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⑬ 갈릴리로 가야 예수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⑭ 축복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사실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⑮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삶의 현장인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밖에서 예수를 만나고 이해하려고 하면서 잘못되는 것입니다.
3. 현장의 모든 사건과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십시오.
① 많은 경우 복음이 삶에 구체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② 우리는 복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문제의 해결자다’라는 것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자체가 우리의 생명 자체요, 본질입니다.
⑤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삶의 존재 자체가 가치 없습니다.
⑥ 임마누엘의 사실이 없으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⑦ 복음을 통한 삶이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⑧ 복음에 뿌리가 내리는 것은 성령으로 되어집니다.
⑨ 모든 것을 보는 방향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 것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⑩ 모든 일과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는 것이 체질이 되어야 합니다.
⑪ 이렇게 그리스도를 누리는 사건이 기도로 연결됩니다.
⑫ 모든 사건과 일들에 대해서 기도와 간구로 감사하며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⑬ 복음과 연결되어야, 문제나 사건을 만날 때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⑭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 속에서 평안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⑮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성령으로라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고 생각될 때 괴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 절대적 축복과 역사로 연결됩니다.
어려운 현실과 삶에서 예수님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이루어집니다.
현장이라는 말은 괴로움과 고통과 슬픔이 있는 우리의 실질적인 삶을 말합니다.
4. 삶의 현장에서 주님께 충성하는 참된 사명을 회복하십시오.
① 현장인 갈릴리로 가십시오.
② 그 곳에서 진짜 사명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③ 예수님께서 육으로 있는 동안에, 갈릴리로 가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사명을 주셨습니다.
④ 사명은 교회 안에서 충성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⑤ 사명은 기도할 때, 찬송할 때 뜨거운 감정으로 충성하겠다고 고백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⑥ 사명은 우리의 가정과 직장의 생활 속에서 충성하는 것입니다.
⑦ 삶의 현장에서 참된 사명에 대한 눈이 열리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⑧ 현장에서 삶으로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⑨ 주님께서 원하시는 현장에서 사명이 회복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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