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자가 전도자로
2005-05-08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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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9장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나가는 중에 오늘 16절에서 22절의 말씀을 가지고고 ‘핍박자가 전도자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잡았습니다. 말씀을 듣는 가운데 어버이된 이 자리의 저와 여러분에게 교회의 방향에 맞추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확한 방향으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필요한 메시지를 주시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가운데 정말로 참된 부모로서 자식에게 무엇을 전달해 줄 것인가. 또 언약안에서 참된 효도가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자리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즉시로 전도하는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절을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무언가 모르게 마음에 쌓는 벽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23절을 보면 여러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죽이기를 공모하니, 결국 사울을 죽이기 위해서 위협을 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현장에 나가면 하나님께서 만남과 사건과 일을 완벽하게 준비하신 부분을 보게 됩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문제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게 준비하시고 진행하심을 보게 됩니다. 전도현장에서 말씀을 전하다 보면 불신자가 복음받을 준비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현장을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교회를 통해 복음 운동하기를 원하시기에 교회가 복음운동을 하지 못하는 벽에 막히면 전도운동이 되지 못합니다. 사단은 이 벽을 우리가 허물지 못하도록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어떤분이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자기가 다니는 직장에서 전혀 믿지 않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보게 되는데, 자기 남편의 직장에는 전부 믿는 배경인데 이상하게 말은 안하지만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이 그 현장에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합니다. 현장에는 문제가 없지만 교회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해서 준비된 축복의 응답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가 초창기에 사역이 잘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 벽을 넘지못해서 교회가 현장에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 10장을 보면 베드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의 임함속에서 세례를 주고 함께 식사를 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예루살렘 교회에게 보고하자 예루살렘 교회는 어찌 할레자가 무할레자의 집에서 함께 먹느냐. 무언가 모를 벽에 막혀 있어서 응답을 놓치게 됩니다. 그들이 들고 나온 것이 전통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음의 역사로 보면 축복이고 기적적인 역사인데 자기의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뛰어넘지 못하고 축복을 놓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습이고 개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개인의 생각의 벽들 마음의 벽들 우리의 체질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교회가 이런 부분에 똘똘 뭉쳐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고 싸움을 싸워도 영적인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게되 만나게 되는 현장은 하나님이 완벽하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복음을 꺠닫고 복음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확인해야 할 것이 내가 정말로 복음의 기초에 서있는가. 나의 영혼과 사상이 복음의 기초에 있는가. 이것이 되지 못하면 다른 것이 벽으로 작용해 축복의 벽을 놓치게 됩니다. 지난 주 새벽기도 시간에도 말했듯이 새가족 사역자 훈련에 참여하면서 놓친 부분을 발견하면서, 나도 모르게 다른 것으로 내 마음속에 잡힌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병들어 있었구나. 늘 듣던 메시지였지만 내가 너무 다른 것으로 내안에 자리잡혀 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생각난 것이 마 13:25-26의 말씀입니다. 잘때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뿌릴때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날 깨달아보면 너무 다른 것으로 자리잡고 불신앙하고 이미 준비된 축복의 역사를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것이 자리잡히고 다른 것으로 삶의 현장에서 고통당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확인해야 할 것은 다른 메시지가 아닙니다. 다른 메시지를 듣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3장의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이것이 너희에게는 안전하고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느니라.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안전할 길이 무엇인가. 우리가 안전하고 참된 행복을 할 길은 복음을 계속듣고 복음안에서 복음의 깊은 뿌리를 내리는 길만이 모든 원수의 길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길인 것입니다. 정말로 복음 받는 사람은 복음만으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복음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우리가 모르는 순간에 복음이 심겨지고 뿌리는 내리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지고 응답받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의 기도제목이 잡아야 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인 그리스도로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누리고 최고로 누리기를 기도하길 바랍니다. 어제 핵심에서 류목사님의 왕상12 의 말씀을 받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실패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였습니다. 집에 가서 왕상 12장의 배경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나라가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북 이스라엘과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남 유다로 나누어게 됩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의 아버지가 솔로몬이고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왕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 것이 다윗왕이다. 시 139편이다. 역대상 29장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언약안에서 확실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편에 다윗의 숱한 여러움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중심에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시대에 다윗만큼 정확하게 언약을 안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생전에 결국 왕이 된 이유를 알았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원하는 구나. 일평생의 소원이 자기 백향목의 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짓기를 원하였고,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낫나는 것입니다. 그말은 그만큼 언약의 비밀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성전 짓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언약의 깊은 비밀을 체험하고 당대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그 어느 누구도 허락받지 못한 성전 건축의 축복을 물려받고 성전을 건축하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 동방의 왕들이 모여들 정도의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의 말로가 우상숭배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르호보암으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 다윗왕과 솔로몬 왕의 부귀영화는 간데 없이, 완벽히 말하게 됩니다. 다윗 너희 집은 돌아가라고 할 정도로 완전히 실패하였습니다. 참된 언약의 비밀과 복음의 비밀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악한 사단은 언약이 희미할 때 끝까지 공격을 합니다. 축복이 3대가 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우리가 언약을 붙잡는 것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대를 말하기 전에 우리 한 사람이 언약안에서 행복함을 느끼고 기도응답을 받고 복음안에서 승리한다면 우리의 후대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에 결단을 하길 바랍니다. 정말 우리의 후대에게 이 언약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체험을 해야 하는데, 지금의 어려움속에서 문제가 있지만 복음안에서 행복하고 있다면, 복음안의 응답을 보고 복음안의 말씀의 성취를 보고 복음안에 승리를 안다면 우리의 후대가 승리를 하게 되고, 솔로몬과 르호보암왕의 실패를 밟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붙잡을 때 후대를 보는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후대를 말하고 렘넌트를 말합니다. 그 후대의 귀중한 부분들이 언약을 알기 때문에, 그 언약이 나 뿐 아니라 후대의 축복에 있기에 후대의 귀중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안에서 후대를 말할 때 그 후대는 분명히 성공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존재입니다. 그 자녀들을 바라볼때 언약 안 에서 후대를 보면 후대가 성공한다. 성공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의 37:11절에 야곱이 요셉이 하는 말을 야곱이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형제들은 시기하고 질투하였지만, 그의 마음에 담고 요셉을 야곱이 사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시기를 하고 요셉을 죽이기로 한 것은 특별히 야곱이 요셉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고 언약안에서 요셉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요셉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받고 한 나라가 변화되어지는 축복이 일어났습니다. 출 2:1-10을 보면 모세를 키운 요게벳이 나옵니다. 사실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시기에 아들을 상자에 담아서 공주의 목욕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모로 들어가 젖을 먹이면서 키웠습니다. 아마 요게벳이 모세를 키우면서 모세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이야기하지 않았더라고 끌어안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중요한 부분이 나오고 모세로 말미암아 한 나라가 구원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게벳은 미래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모세가 그러한 인물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보면 그렇게 되겠냐고 생각이 듭니다. 자식이 나의 싫은 모습만 닮았다고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유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안에서 맡기신 자녀입니다. 언약안에서 후대를 바라볼때 후대가 살아나고 세계를 정복하는 일꾼으로 쓰임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사무엘을 키우는 한나도 마찬가지이고 다윗을 키운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과 사무엘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시대적인 인물이 나왔습니다.
언약안에서 후대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어버이 주일입니다. 언약안에서 후대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위해서 복음안에 있는 참된 행복, 기도응답, 말씀의 성취, 복음안의 참 승리와 성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될 때 참 행복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 1:1-13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붙잡을 때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창1장에 참 인간의 행복과 세계문화권의 회복과 정복의 비밀이 나오고 창세기 2장에 행복을 주신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축복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 2장에 그 인간에게 모든 축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한한 축복된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창3장의 사건입니다. 창 2:17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모든 과실을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사단의 말을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사단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원치않게 사단의 종이 되었고 따라갔습니다. 요8:44에 진단한 것처럼 너희 아비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단으로 말미암아 이땅의 모든 문제 저주와 재앙과 실패의 역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신자조차도 사단의 존재를 믿지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단으로 사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사단이 엄습하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강단에서 히키코모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일본의 동경중심으로 일본의 장자들이 거의 히키코 모리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완전히 짐승처럼 살면서 오락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 달 몇 년이 가는데 인구가 백만이 넘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신문을 보면서 신목사님이 수요예배때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그 문제가 심각하게 온다고 합니다. 20대 30대를 중심으로 20만 30만이 헤아려지고 있습니다. 실재로 그것을 가지고 방콕족이라고 합니다. 대인기피증 우울증이 다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무엇때문인지도 모르고 방안에 틀어박혀서 부모들이 찾아오면 화를 내면서 욕을 퍼붓고 앉아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악한 사단이 우리의 현장을 자리잡고 현장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보면서 놀란 적이 있는데, 학교앞에 가보면 코만 따로 있고 귀만 따로 있고 눈만 따로 있는 것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놉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 5월 5일에 선물을 사달라고 해서 이마트에 가서 고르라고 했는데, 사 온 것이 티끌에 밥을 주면 새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도 모르게 생명경시 사상이 아들들을 잡는 것입니다. 사람 죽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자라나는 문화가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의 존중을 놓치게 합니다. 이것이 악한 사단이 문화를 잡고 우리의 후대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파괴시키고 우상으로 말미암아 타락의 문화로 우리의 후대들. 경제가 발전하여도 저주가 계속되고 노력하여도 실패의 역사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쌓아놓고도 망하는 것이 인간세계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동물과 다른 하나님의 형상인 존재이고 하나님을 만날 때 창세기 1장의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창 1:27-28에 있는 인간을 회복하는 축복이 오게 됩니다. 창 2장에 에덴동산의 축복이 하나님을 만날 때 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남으로 이 땅에 영적인 문제가 오고 인간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해결이 안되니까 다른 영적인 것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길을 몰라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정신이 죽고 있습니다. 결국 육신적인 적으로 실패를 하고 행 3장의 앉은뱅이가 생기고 행8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 후대도 멸망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깨달아진 것이 복음입니다. 창3장의 원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복음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참왕 참선지자 참제사장으로 우리의 모든 원죄 문제를 끝내버렸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될 때 후대까지 복을 받고 모든 한계와 벽을 뛰어넘습니다. 내 안의 체질과 생각이 복음을 뿌리내리는 만큼 되어집니다. 현장보다 우리의 교회안에 있는 무언가의 벽 이 있다면 복음안에 있는 만큼 복음을 뛰어넘는 복을 주십니다. 오늘 21절을 다시 읽습니다.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벽을 뛰어넘고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데 생각의 벽이 뛰어넘는 비밀이 복음속에 깊히 뿌리내리고 복음을 체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깨닫고 이해하고 누리고 체험하는 만큼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공하게 되어집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솔로몬으로 말미암아 르호보암이 실패한 것처럼 여러분은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아야 합니다. 분명히 실패의 역사를 증거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최고의 복음의 비밀을 붙잡음으로 성공하는 비밀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즉시로 전도하는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20절을 보면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절을 보면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무언가 모르게 마음에 쌓는 벽이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23절을 보면 여러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죽이기를 공모하니, 결국 사울을 죽이기 위해서 위협을 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현장에 나가면 하나님께서 만남과 사건과 일을 완벽하게 준비하신 부분을 보게 됩니다. 사람도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문제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게 준비하시고 진행하심을 보게 됩니다. 전도현장에서 말씀을 전하다 보면 불신자가 복음받을 준비를 한 것을 보게 됩니다. 현장을 하나님이 준비하십니다. 교회를 통해 복음 운동하기를 원하시기에 교회가 복음운동을 하지 못하는 벽에 막히면 전도운동이 되지 못합니다. 사단은 이 벽을 우리가 허물지 못하도록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어떤분이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자기가 다니는 직장에서 전혀 믿지 않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보게 되는데, 자기 남편의 직장에는 전부 믿는 배경인데 이상하게 말은 안하지만 어렵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이 그 현장에 있는 것이 축복이라고 합니다. 현장에는 문제가 없지만 교회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벽을 넘지 못해서 준비된 축복의 응답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가 초창기에 사역이 잘되는 것으로 보였지만 이 벽을 넘지못해서 교회가 현장에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 10장을 보면 베드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의 임함속에서 세례를 주고 함께 식사를 한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을 예루살렘 교회에게 보고하자 예루살렘 교회는 어찌 할레자가 무할레자의 집에서 함께 먹느냐. 무언가 모를 벽에 막혀 있어서 응답을 놓치게 됩니다. 그들이 들고 나온 것이 전통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통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복음의 역사로 보면 축복이고 기적적인 역사인데 자기의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뛰어넘지 못하고 축복을 놓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모습이고 개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개인의 생각의 벽들 마음의 벽들 우리의 체질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교회가 이런 부분에 똘똘 뭉쳐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고 싸움을 싸워도 영적인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게되 만나게 되는 현장은 하나님이 완벽하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이 벽을 뛰어넘기 위해서 복음을 꺠닫고 복음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확인해야 할 것이 내가 정말로 복음의 기초에 서있는가. 나의 영혼과 사상이 복음의 기초에 있는가. 이것이 되지 못하면 다른 것이 벽으로 작용해 축복의 벽을 놓치게 됩니다. 지난 주 새벽기도 시간에도 말했듯이 새가족 사역자 훈련에 참여하면서 놓친 부분을 발견하면서, 나도 모르게 다른 것으로 내 마음속에 잡힌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병들어 있었구나. 늘 듣던 메시지였지만 내가 너무 다른 것으로 내안에 자리잡혀 있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생각난 것이 마 13:25-26의 말씀입니다. 잘때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를 뿌릴때는 모른다. 그러나 어느날 깨달아보면 너무 다른 것으로 자리잡고 불신앙하고 이미 준비된 축복의 역사를 놓치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반드시 다른 것이 자리잡히고 다른 것으로 삶의 현장에서 고통당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확인해야 할 것은 다른 메시지가 아닙니다. 다른 메시지를 듣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3장의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이것이 너희에게는 안전하고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느니라. 여러분 정말로 우리가 안전할 길이 무엇인가. 우리가 안전하고 참된 행복을 할 길은 복음을 계속듣고 복음안에서 복음의 깊은 뿌리를 내리는 길만이 모든 원수의 길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길인 것입니다. 정말로 복음 받는 사람은 복음만으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복음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중에 우리가 모르는 순간에 복음이 심겨지고 뿌리는 내리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지고 응답받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의 기도제목이 잡아야 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인 그리스도로 행복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누리고 최고로 누리기를 기도하길 바랍니다. 어제 핵심에서 류목사님의 왕상12 의 말씀을 받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실패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였습니다. 집에 가서 왕상 12장의 배경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나라가 르호보암이 다스리는 북 이스라엘과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남 유다로 나누어게 됩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의 아버지가 솔로몬이고 솔로몬의 아버지가 다윗왕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 것이 다윗왕이다. 시 139편이다. 역대상 29장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했다는 것은 그만큼 언약안에서 확실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시편에 다윗의 숱한 여러움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중심에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시대에 다윗만큼 정확하게 언약을 안 사람이 없습니다. 그의 생전에 결국 왕이 된 이유를 알았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원하는 구나. 일평생의 소원이 자기 백향목의 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짓기를 원하였고,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낫나는 것입니다. 그말은 그만큼 언약의 비밀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성전 짓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언약의 깊은 비밀을 체험하고 당대 최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그 어느 누구도 허락받지 못한 성전 건축의 축복을 물려받고 성전을 건축하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 동방의 왕들이 모여들 정도의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의 말로가 우상숭배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르호보암으로 넘어가면서 완전히 망하게 되었다. 다윗왕과 솔로몬 왕의 부귀영화는 간데 없이, 완벽히 말하게 됩니다. 다윗 너희 집은 돌아가라고 할 정도로 완전히 실패하였습니다. 참된 언약의 비밀과 복음의 비밀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악한 사단은 언약이 희미할 때 끝까지 공격을 합니다. 축복이 3대가 되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우리가 언약을 붙잡는 것이 전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대를 말하기 전에 우리 한 사람이 언약안에서 행복함을 느끼고 기도응답을 받고 복음안에서 승리한다면 우리의 후대가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어버이 주일에 결단을 하길 바랍니다. 정말 우리의 후대에게 이 언약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체험을 해야 하는데, 지금의 어려움속에서 문제가 있지만 복음안에서 행복하고 있다면, 복음안의 응답을 보고 복음안의 말씀의 성취를 보고 복음안에 승리를 안다면 우리의 후대가 승리를 하게 되고, 솔로몬과 르호보암왕의 실패를 밟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을 붙잡을 때 후대를 보는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우리가 후대를 말하고 렘넌트를 말합니다. 그 후대의 귀중한 부분들이 언약을 알기 때문에, 그 언약이 나 뿐 아니라 후대의 축복에 있기에 후대의 귀중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안에서 후대를 말할 때 그 후대는 분명히 성공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존재입니다. 그 자녀들을 바라볼때 언약 안 에서 후대를 보면 후대가 성공한다. 성공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의 37:11절에 야곱이 요셉이 하는 말을 야곱이 마음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형제들은 시기하고 질투하였지만, 그의 마음에 담고 요셉을 야곱이 사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시기를 하고 요셉을 죽이기로 한 것은 특별히 야곱이 요셉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고 언약안에서 요셉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요셉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이 축복받고 한 나라가 변화되어지는 축복이 일어났습니다. 출 2:1-10을 보면 모세를 키운 요게벳이 나옵니다. 사실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시기에 아들을 상자에 담아서 공주의 목욕하는 곳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모로 들어가 젖을 먹이면서 키웠습니다. 아마 요게벳이 모세를 키우면서 모세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을 것입니다. 이야기하지 않았더라고 끌어안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중요한 부분이 나오고 모세로 말미암아 한 나라가 구원을 받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게벳은 미래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모세가 그러한 인물로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자녀를 보면 그렇게 되겠냐고 생각이 듭니다. 자식이 나의 싫은 모습만 닮았다고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유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안에서 맡기신 자녀입니다. 언약안에서 후대를 바라볼때 후대가 살아나고 세계를 정복하는 일꾼으로 쓰임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사무엘을 키우는 한나도 마찬가지이고 다윗을 키운 사무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과 사무엘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시대적인 인물이 나왔습니다.
언약안에서 후대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어버이 주일입니다. 언약안에서 후대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 위해서 복음안에 있는 참된 행복, 기도응답, 말씀의 성취, 복음안의 참 승리와 성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될 때 참 행복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창 1:1-13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붙잡을 때 창조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창1장에 참 인간의 행복과 세계문화권의 회복과 정복의 비밀이 나오고 창세기 2장에 행복을 주신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축복된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 2장에 그 인간에게 모든 축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한한 축복된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창3장의 사건입니다. 창 2:17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모든 과실을 따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사단의 말을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사단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원치않게 사단의 종이 되었고 따라갔습니다. 요8:44에 진단한 것처럼 너희 아비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단으로 말미암아 이땅의 모든 문제 저주와 재앙과 실패의 역사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신자조차도 사단의 존재를 믿지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단으로 사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사단이 엄습하고 파괴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강단에서 히키코모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일본의 동경중심으로 일본의 장자들이 거의 히키코 모리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완전히 짐승처럼 살면서 오락을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몇 달 몇 년이 가는데 인구가 백만이 넘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신문을 보면서 신목사님이 수요예배때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우리나라도 그 문제가 심각하게 온다고 합니다. 20대 30대를 중심으로 20만 30만이 헤아려지고 있습니다. 실재로 그것을 가지고 방콕족이라고 합니다. 대인기피증 우울증이 다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입니다. 무엇때문인지도 모르고 방안에 틀어박혀서 부모들이 찾아오면 화를 내면서 욕을 퍼붓고 앉아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악한 사단이 우리의 현장을 자리잡고 현장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을 보면서 놀란 적이 있는데, 학교앞에 가보면 코만 따로 있고 귀만 따로 있고 눈만 따로 있는 것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놉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 5월 5일에 선물을 사달라고 해서 이마트에 가서 고르라고 했는데, 사 온 것이 티끌에 밥을 주면 새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도 모르게 생명경시 사상이 아들들을 잡는 것입니다. 사람 죽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자라나는 문화가 동물을 의인화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람의 존중을 놓치게 합니다. 이것이 악한 사단이 문화를 잡고 우리의 후대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을 파괴시키고 우상으로 말미암아 타락의 문화로 우리의 후대들. 경제가 발전하여도 저주가 계속되고 노력하여도 실패의 역사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쌓아놓고도 망하는 것이 인간세계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에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참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동물과 다른 하나님의 형상인 존재이고 하나님을 만날 때 창세기 1장의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창 1:27-28에 있는 인간을 회복하는 축복이 오게 됩니다. 창 2장에 에덴동산의 축복이 하나님을 만날 때 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남으로 이 땅에 영적인 문제가 오고 인간들이 자기의 노력으로 해결이 안되니까 다른 영적인 것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길을 몰라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정신이 죽고 있습니다. 결국 육신적인 적으로 실패를 하고 행 3장의 앉은뱅이가 생기고 행8장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온갖 질병에 시달리면서 후대도 멸망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깨달아진 것이 복음입니다. 창3장의 원죄로 말미암아 영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복음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참왕 참선지자 참제사장으로 우리의 모든 원죄 문제를 끝내버렸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될 때 후대까지 복을 받고 모든 한계와 벽을 뛰어넘습니다. 내 안의 체질과 생각이 복음을 뿌리내리는 만큼 되어집니다. 현장보다 우리의 교회안에 있는 무언가의 벽 이 있다면 복음안에 있는 만큼 복음을 뛰어넘는 복을 주십니다. 오늘 21절을 다시 읽습니다. 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벽을 뛰어넘고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데 생각의 벽이 뛰어넘는 비밀이 복음속에 깊히 뿌리내리고 복음을 체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을 깨닫고 이해하고 누리고 체험하는 만큼 여러분의 자녀들이 성공하게 되어집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솔로몬으로 말미암아 르호보암이 실패한 것처럼 여러분은 그런 절차를 밟지 않아야 합니다. 분명히 실패의 역사를 증거로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최고의 복음의 비밀을 붙잡음으로 성공하는 비밀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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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
1469 |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 단6:16-28 | 2025-01-12 | |
1468 |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 단5:17-31 | 2025-01-05 | |
1467 | [2025 송구영신예배]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 | 갈4:4-7 | 2024-12-31 | |
1466 | 땅의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 단4:28-37 | 2024-12-29 | |
1465 | 완전한 승리를 내 것으로 누리는 성탄 | 눅2:8-14 | 2024-12-22 | |
1464 | 언약의 역사를 계속 이어가고 계시는 하나님 | 단3:8-18 | 2024-12-15 | |
1463 | 손대지 아니한 돌 | 단2:25-35 | 2024-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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