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하여
2005-08-28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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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살릴 선교사입니다. 아멘.
요즘 계속 류목사님께서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렘넌트에 대한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우리가 누구냐? 우리 교회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에 눈이 열려야 세계복음화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일 어려운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내가 누구냐? 이 부분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누구냐? 세계복음화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거의 희미합니다. 이것만 바로되면 영원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땅의 계획과 뜻을 이루는 일에 여러분과 제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정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인가 이것이 이해되고 확인될 때에 세계복음화의 일꾼으로 쓰임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 마음과 생각을 열어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옵시고 말씀을 깨닫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확인하고 있으나 우리의 동기와 욕심이 너무 강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주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옵시고, 주의 말씀이 이해되는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동기와 욕심들을 이 시간에 다 주님 앞에 의지하며 버리고 맡기고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주의 귀를 열어주시옵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장과 군문으로, 멀리 해외에 가 있는 주의 종들이 있사오니, 오늘도 저들에게 같은 은혜 주시옵시고, 주의 풍성한 역사가 오늘로 통해서 한 주간도 계속될 수 있는 축복으로 인도해주시옵소서. 연약한 것 세우셨사오니 주님이 말씀해주시고 주님이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누구를 위하여” 제목을 삼았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냐가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하나님이 예비하셨느냐? 이런 뜻입니다.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다 된 것입니다. 제자들도 꼭 중요한 말씀을 할 때는 못 깨닫고 딴 짓하고 딴 소리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내용입니다. 이것이 멀리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해결이 안됩니다. 왜 그러냐? 말씀을 통해 보면 교회나올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모르기도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정점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만백성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적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30년 살았다는 것이 적은 것이 아니지만, 공생애 3년을 그치고 마지막 정점,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정점이 되는 십자가 지는 일을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10장 33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절에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중요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계속 훈련해오고 있었습니다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수제자들이 전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저들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0장 37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한번 대조를 해 보십시오. 주님이 심각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정점인 십자가에 대한 진지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혀 못알아 듣고 주님이 왕이 될 때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제자들의 요구입니다. 이것은 그때의 일만 아니라 오늘도 똑같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절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이것도 사실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이렇게 요구하며 생애를 다 드리겠다고 약속한 제자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도망쳐버렸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좌편에 요구한 그들도 다 도망쳤습니다. 너희가 정말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 잔을, 내 세례를 받을 때에 함께 받겠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교인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교회 나올 때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지한 그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내 욕심과 생각! 여러분들 오늘 기도할 때에 거의 내 계획을 붙잡고 기도했지 주님 앞에 다 맡기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 안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이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문 밖에 나가면 다 잊어버립니다. 다행히 요즘 기도수첩, 포럼을 통해 가지고 나갈 수 있어서 정말 축복의 기회요. 은혜입니다. 이것이 안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앉으면 이상한 소리, 딴소리를 했지, 말씀이 어땠는지를 생각 안합니다. 그것을 묵상하고 이루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 40절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던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거듭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똑같은 상황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가느냐? 이것이 안 되어있습니다. 거의 내 욕심, 동기! 이것 때문에 일평생 믿는다는 것이 종교생활하게 되고, 신비적인 곳으로 빠지고 내 노력과 내 의에 의지하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가 아니라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내가 누구냐? 어떻게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말씀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느냐? 이것이 안되었다고 하면 다 헛일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허무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류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복음의 언약이 확실치 않는 사람은 늙어갈 수록 감상에 빠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언가 이상하게 복음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메이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치매증상으로 빠진다고 하더라고요. 복음 붙잡지 않으면 늙으면 치매가 옵니다. 언약 속에 있으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무엇을 느끼느냐하면, 죽다 살아나서 서울에 올라가는 시간에 산천을 보면서 공동묘지만 보면 내가 며칠 전에 저기 들어갈 뻔했는데 감상에 빠지더라고요. 그리고 산천초목에 대해서 조금만 낙엽이 지거나 변화가 오게 되면 이상하게 그 변화에 민감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전에는 그런 것을 못 느꼈는데, 나도 모르게 처량해진다던가 합니다. 그래서 나이 많으면 절대로 강가에 가지 말고 바닷가에 가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감상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언약을 다 놓치게 되면 멸망으로 빠지게되는 근거가 된다. 무엇인가하면, 언약을 놓치면 자신도 모르게 감상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 말은 언약을 놓치면 자기 중심적으로 빠집니다. 제가 아플 때에 제일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저희 집에서 나를 보고 어린아이 같다고 합니다. 아플 때는 내 몸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배려를 못합니다. 어린아이같이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니까, 우리 집에서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니까 우리 집에서 애같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당신을 어디 보내놓고 나면 물가에 세운 것 같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나 외에는 전부다 생각할 대상이 아닙니다. 내 중심이 되니까, 전부 내 동기 속에서 언약빠지면 이렇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사람이 늙게되면 자기 중심이 됩니다. 늙게 되면 언약놓치면 어린아이같이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으면 주책을 떤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 되어있어서 그렇습니다. 복음을 놓칠 때에 주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늙어도 멋있게 늙는다. 늙었다고 하는 것은 익는다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실이 익는다와 늙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다릅니다. 점점 나이가 든다. 늙어간다. 익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무르익어서 복음의 역사 속에 정점이 되는 것이 나이가 많은 일에 차츰차츰 준비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안되는 이유는 복음에 확실히 자리잡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중심이 되고, 감상에 빠지게 되고 치매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없이 4-50대 넘어가면 반드시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그냥 넘겨듣지 마시고 여러분 정말 복음으로, 언약으로 확실히 뿌리내릴 수록 이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고 정말 문제가 오면 응답입니다. 정말 문제가 오는 것은 응답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문제가 온다는 것은 속아서 그런거지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되는 정말 문제는 모든 것이 응답으로 역사하신다. 여러분이 지금 당하는 어려움과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언약속에서는 해답으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제자들이 전혀 이것이 이해가 안되고 있고 자기 욕심과 동기 속에 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할 때는 다 잊어버립니다. 전혀 그것이 해당이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엄숙한 말과 주님의 엄숙한 말씀 앞에서 저들이 무엇을 요구하느냐? 자기들의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뜻을 모르니까 유대인이 늘 갖고 있는 그러한 관념입니다. 반드시 메시야가 와서 이 땅을 정복하고 통일하고 영광의 왕으로 세워질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사상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번에 세계여행을 한번 할때에 디베랴 바다에서 어부들에게 “예수님을 아느냐?”, “예수님이 구주신데도 모르냐?”고 물었는데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도 놀라운 왕, 메시야가 와서 이 세계를 통일하고 통일정부를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똑같은 관념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혀 못듣고 똑같은 관념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되니까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제자들은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다시 말하면 좌의정, 우의정을 하도록 해 달라고 예수님께 엉터리 같은 요구를 하였습니다. 가만히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면 엉터리같은 요구를 합니다. 주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못 깨달으니 깨닫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깨닫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못 깨달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래저래 고통을 주시는가보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눈을 열어주시는 기회가 되는가보다. 그리고 주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을 지금까지 붙잡고 누려왔습니다. 말하자면 병도 누리라는 것은 저의 경우입니다. 어떻게 병을 누립니까? 저는 하지만 그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눈이 열린다는 심정으로 늘 아무리 어려워도 계획이 있겠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다 이것이 제가 지탱해온 가장 메시지의 바탕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계신다 어려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을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견딜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차라리 병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주옵서서 이렇게 병을 지탱해온 것이 6, 7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어떤 의미에서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면 하늘의 뜻이 있겠지 하고 6,7년을 같이 기다렸습니다. 그런 중에 오늘 이 강단에 서게 된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느 교인이 6, 7년동안 병을 앓고 있는 목사를 그냥 두면서 기도하면서 기다리겠습니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무엇이 되어야하냐면 우리들은 동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뭐든지 동기를 가지고 그 동기가 확실한 만큼 노력하고 애를 쓰고 살아갈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갈 때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나아가는냐. 그것은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일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로서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통일왕국의 왕으로 그렇게 인식하며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어떤 면에서 거의 이런 의미를 가지고 핍박 속에서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기만 해봐라 우리는 왕권의 가지고 오신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 앉아서 대신이 되어서 그때 한번 봐라 그것이 바로 동기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것이 성취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아무리 봐도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따라다닌 것도 억울한데 그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면 모든 것이 헛일이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정말 바른 동기가 안되어있고 우리가 세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심과 육신의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상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점이 되는 그 사역 속에서 우리가 이해가 안되고 엉뚱한 소리를 하게됩니다. 그래서 복음이 안되면 기존교인들이 더 문제가 되고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안되면 예수를 믿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교회가 고쳐야하고 전환해 나가야할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대구에 이런 교회를 세우실 때에 내가 누구냐 우리가 누구냐가 이해가 되어져야합니다. 잠깐의 어려움, 문제때문에 흑암의 역사속에 사단의 유혹속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진지하게 정말 내가 누구냐 세계복음화할 사람이다 우리가 누구냐 세계복음화할 사람이다 우리교회가 어떠한 교회냐 세계복음화할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축복하시고 은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도들이나 제직자들이나 똑같이 저는 이번 제직수련회에서 중요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뭐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교회를 중심으로한 동기가 세워지지 않은면 여러분의 기도는 다 헛된 것으로 갑니다. 기도제목도 다른 것으로 잡혀집니다. 늘 기도제목 기도제목을 이야기하는데 다른 것이 동기가 되어지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중심한 기도제목. 산업인들도 모든 직분자들도 모든 성도들도 교회중심한 기도제목. 교회 역사속에서 이것이 된 자들은 전부 복을 받았습니다. 복을 받아도 보통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여러분 중심이 무엇이냐 교회중심이 아닙니다. 전부 자기중심이 아니면 가정중심이고 내 생각중심이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교회 중심의 기도제목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류목사님도 그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어느새 교회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주 찔렸습니다. 어느 때부터 내 중심이 되어있었습니다. 무언가 병고 때문에 뭔가 교회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내 중심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 어느순간 이렇게 전에 교회를 위해 죽고 산다는 그러한 생각이 없어져버리고 거의, 내 개인 중심의 개인중심이라고 하면 항상 병이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싶어도 이런 동기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축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적인 축복을 받을 자리에 있고 이것은 역사적인 축복을 가질 자격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누려지지 않는 것이 이러한 배경입니다. 여러분 기도제목을 정말 살펴보아야합니다. 정말 내가 교회 중심으로 기도제목을 삼고 있는가. 모세는 성막중심으로 모든 성막을 향해서 모세가 명령을 하고 그렇게 모세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이 날마다 열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언약궤 중심입니다. 교회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삶과 평생의 한이 언약궤를 남길 성전이었습니다. 그 소원으로 마지막 모든 물질과 성전을 지을 재물을 모아놓고 솔로몬에게 넘겼습니다. 다윗의 소원이 이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중심이 교회중심이었습니다. 어릴때부터 교회에서 자고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그때의 성전이 교회였습니다. 이런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그때그때마다 내린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데 교회 중심이 아닙니다. 기도제목을 잡았지만 교회중심이 아닙니다. 거의 내 중심과 다른 동기가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중심이 되어질 때 기도제목이 바로 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잡게 되고 그뜻을 붙잡은 기도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잡을 때 전능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늘 하나님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데 그 하나님이 교회중심으로 기도제목이 잡힐 때 전능자로 기적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십니다. 늘 함께 계십니다. 지금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 제목이 잡히기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잡히는 순간부터 전능자로 기적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십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잠깐 앉았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교회 중심으로 여러분이 붙잡을 한주간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전능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이 가슴에 너무 와닿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늘 합니다. 그러나 정말 기도제목을 붙잡고 하나님께 참 소원을 가지고 나갈때 하나님은 전능자로 역사하십니다. 그 기적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무엇이 나옵니까? 장로님도 말씀하셨지만, 제직수련회에서 말씀하시길 교회중심으로 기도할때 어떻게 되느냐. 처음의 기도제목은 보완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교회중심으로 한다고 하지만, 무언가 나의 욕심이 들어가고 인간의 것이 들어가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보완해주십니다. 또 보충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쓸데없는 것은 삭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래서 그 기도제목을 붙잡고 나갈때 완성된 기도로 변치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모든 말씀이 내 기도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전에는 기도따로 말씀따로입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의 응답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삶이 말씀과 연결되게 됩니다.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저렇게 이루어지는구나. 그래서 한주간의 삶이 말씀과 연결되는 기도의 기적이 계속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요. 성도의 놀라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붙잡고 정시기도라는 것이 저절로 되게 됩니다. 말씀이 내안에 계실 때에 우리도 모르게 말씀붙잡고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오지 기도와 말씀이 따로 될때는 정시기도가 잘 안됩니다. 말씀붙잡고 기도할때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의 내용이 말씀으로 응답이 와집니다. 말씀말씀이 그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약속하신 말씀이 우리의 동기 다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욕심 다 주님께 털어놓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붙잡고 기도제목으로 삼았을 때 우리의 모든 삶이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모든 해답이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경험해본 사람들은 저절로 되게 됩니다. 복음의 이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해될때 복음이 이해되는 것이지. 그래야 복음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않은 언약의 말씀이 잡히게 됩니다. 복음은 잡혀지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손을 다른 사람이 붙잡으면 인간의 손이지만, 하나님이 잡았다면 인간과는 달리 절대로 놓치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한번 복음을 받은 성도는 주의 품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정시기도로 변치않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갈때 개인적으로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일곱가지 축복을 말합니다. 이때부터 누림이 이해됩니다. 내가 누구냐? 어떤 복을 받았느냐? 그래서 간단히 이해를 시킨다면 복음을 정말 누리시는 길이 성령이 내게 내주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마다 전능자의 역사가 성령으로 역사하실 때 기적이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성도의 역사가 이것입니다. 간단한 일곱가지 축복이 이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내안에 계신다. 성령의 내주입니다. 오늘 주님이 나를 인도해가신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주님이 인도해가시는 중에서 사건과 일마다 기적이 나오는구나. 기도속에서 저절로 세가지가 되어지면 누림이 되어지는것입니다.
오늘 성도여러분에게 정말 붙잡기를 원합니다. 내가 교회중심으로 정말 기도제목을 붙잡고 있으면 역사하십니다. 바로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역사는 인도하시는 시간속에서 능력과 전능자의 역사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적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고 주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지만 거의 동기가 다른 동기입니다. 살던지 죽던지 교회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주의 일에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내 소원이요. 여러분의 소원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가끔 정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역사와 축복속에 사용되는 자리에 역사하소서. 소원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하고 바둥거려도 하나님이 은혜주시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주의 종들에게 말씀붙잡고 한주간 은혜받는 시간이 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것이 여러분과 제 소원입니다. 축복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붙잡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이 오늘도 축복하셔서 주의 종들에게 말씀주시고 말씀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소원인 교회를 중심한 소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원들이 우리에게 성취되게 하시고 이루어지는 감격있게 하시고 말씀통해서 확실히 붙잡히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주님이 저들 통해서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에 세워주시고 이루어질 기적속에 주의 종들을 세워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요즘 계속 류목사님께서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렘넌트에 대한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우리가 누구냐? 우리 교회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에 눈이 열려야 세계복음화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제일 어려운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내가 누구냐? 이 부분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우리가 누구냐? 세계복음화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잘 안되고 있습니다. 거의 희미합니다. 이것만 바로되면 영원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땅의 계획과 뜻을 이루는 일에 여러분과 제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정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며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서,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인가 이것이 이해되고 확인될 때에 세계복음화의 일꾼으로 쓰임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 마음과 생각을 열어주셔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옵시고 말씀을 깨닫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확인하고 있으나 우리의 동기와 욕심이 너무 강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주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시옵시고, 주의 말씀이 이해되는 지혜를 주시고 총명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동기와 욕심들을 이 시간에 다 주님 앞에 의지하며 버리고 맡기고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주의 귀를 열어주시옵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장과 군문으로, 멀리 해외에 가 있는 주의 종들이 있사오니, 오늘도 저들에게 같은 은혜 주시옵시고, 주의 풍성한 역사가 오늘로 통해서 한 주간도 계속될 수 있는 축복으로 인도해주시옵소서. 연약한 것 세우셨사오니 주님이 말씀해주시고 주님이 축복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누구를 위하여” 제목을 삼았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리냐가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하나님이 예비하셨느냐? 이런 뜻입니다.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역사입니다. 그러면 다 된 것입니다. 제자들도 꼭 중요한 말씀을 할 때는 못 깨닫고 딴 짓하고 딴 소리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 내용입니다. 이것이 멀리 제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해결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해결이 안됩니다. 왜 그러냐? 말씀을 통해 보면 교회나올 때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모르기도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정점입니다. 이를 위해서 이땅에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만백성을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적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30년 살았다는 것이 적은 것이 아니지만, 공생애 3년을 그치고 마지막 정점, 주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정점이 되는 십자가 지는 일을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10장 33절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절에 그들은 능욕하며 침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랬습니다. 중요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계속 훈련해오고 있었습니다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수제자들이 전혀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저들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0장 37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한번 대조를 해 보십시오. 주님이 심각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정점인 십자가에 대한 진지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전혀 못알아 듣고 주님이 왕이 될 때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제자들의 요구입니다. 이것은 그때의 일만 아니라 오늘도 똑같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합니다. 3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절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이것도 사실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이렇게 요구하며 생애를 다 드리겠다고 약속한 제자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도망쳐버렸습니다. 하나는 우편에, 좌편에 요구한 그들도 다 도망쳤습니다. 너희가 정말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 잔을, 내 세례를 받을 때에 함께 받겠느냐? 예,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교인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교회 나올 때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지한 그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내 욕심과 생각! 여러분들 오늘 기도할 때에 거의 내 계획을 붙잡고 기도했지 주님 앞에 다 맡기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는 일이 안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었지만 말씀이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문 밖에 나가면 다 잊어버립니다. 다행히 요즘 기도수첩, 포럼을 통해 가지고 나갈 수 있어서 정말 축복의 기회요. 은혜입니다. 이것이 안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앉으면 이상한 소리, 딴소리를 했지, 말씀이 어땠는지를 생각 안합니다. 그것을 묵상하고 이루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장 40절에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던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거듭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똑같은 상황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가느냐? 이것이 안 되어있습니다. 거의 내 욕심, 동기! 이것 때문에 일평생 믿는다는 것이 종교생활하게 되고, 신비적인 곳으로 빠지고 내 노력과 내 의에 의지하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가 아니라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내가 누구냐? 어떻게 우리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말씀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느냐? 이것이 안되었다고 하면 다 헛일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허무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류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복음의 언약이 확실치 않는 사람은 늙어갈 수록 감상에 빠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언가 이상하게 복음에 메이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메이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치매증상으로 빠진다고 하더라고요. 복음 붙잡지 않으면 늙으면 치매가 옵니다. 언약 속에 있으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무엇을 느끼느냐하면, 죽다 살아나서 서울에 올라가는 시간에 산천을 보면서 공동묘지만 보면 내가 며칠 전에 저기 들어갈 뻔했는데 감상에 빠지더라고요. 그리고 산천초목에 대해서 조금만 낙엽이 지거나 변화가 오게 되면 이상하게 그 변화에 민감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전에는 그런 것을 못 느꼈는데, 나도 모르게 처량해진다던가 합니다. 그래서 나이 많으면 절대로 강가에 가지 말고 바닷가에 가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감상에 빠지게 되고 그것은 언약을 다 놓치게 되면 멸망으로 빠지게되는 근거가 된다. 무엇인가하면, 언약을 놓치면 자신도 모르게 감상으로 빠지게 됩니다. 이 말은 언약을 놓치면 자기 중심적으로 빠집니다. 제가 아플 때에 제일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저희 집에서 나를 보고 어린아이 같다고 합니다. 아플 때는 내 몸만 생각하고 상대방을 배려를 못합니다. 어린아이같이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니까, 우리 집에서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니까 우리 집에서 애같이 보였던 모양입니다. 당신을 어디 보내놓고 나면 물가에 세운 것 같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나 외에는 전부다 생각할 대상이 아닙니다. 내 중심이 되니까, 전부 내 동기 속에서 언약빠지면 이렇게 됩니다. 자연적으로 사람이 늙게되면 자기 중심이 됩니다. 늙게 되면 언약놓치면 어린아이같이 변해버립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으면 주책을 떤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 되어있어서 그렇습니다. 복음을 놓칠 때에 주책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늙어도 멋있게 늙는다. 늙었다고 하는 것은 익는다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실이 익는다와 늙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다릅니다. 점점 나이가 든다. 늙어간다. 익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무르익어서 복음의 역사 속에 정점이 되는 것이 나이가 많은 일에 차츰차츰 준비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안되는 이유는 복음에 확실히 자리잡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 중심이 되고, 감상에 빠지게 되고 치매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없이 4-50대 넘어가면 반드시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온다고 하더라고요. 오늘 그냥 넘겨듣지 마시고 여러분 정말 복음으로, 언약으로 확실히 뿌리내릴 수록 이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고 정말 문제가 오면 응답입니다. 정말 문제가 오는 것은 응답입니다. 그러나 그 외의 문제가 온다는 것은 속아서 그런거지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되는 정말 문제는 모든 것이 응답으로 역사하신다. 여러분이 지금 당하는 어려움과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문제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언약속에서는 해답으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제자들이 전혀 이것이 이해가 안되고 있고 자기 욕심과 동기 속에 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할 때는 다 잊어버립니다. 전혀 그것이 해당이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엄숙한 말과 주님의 엄숙한 말씀 앞에서 저들이 무엇을 요구하느냐? 자기들의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뜻을 모르니까 유대인이 늘 갖고 있는 그러한 관념입니다. 반드시 메시야가 와서 이 땅을 정복하고 통일하고 영광의 왕으로 세워질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사상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번에 세계여행을 한번 할때에 디베랴 바다에서 어부들에게 “예수님을 아느냐?”, “예수님이 구주신데도 모르냐?”고 물었는데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도 놀라운 왕, 메시야가 와서 이 세계를 통일하고 통일정부를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똑같은 관념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혀 못듣고 똑같은 관념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되니까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데, 제자들은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다시 말하면 좌의정, 우의정을 하도록 해 달라고 예수님께 엉터리 같은 요구를 하였습니다. 가만히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면 엉터리같은 요구를 합니다. 주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못 깨달으니 깨닫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깨닫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에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못 깨달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래저래 고통을 주시는가보다...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깨닫게 하시는 눈을 열어주시는 기회가 되는가보다. 그리고 주님의 계획을 하나님의 계획을 지금까지 붙잡고 누려왔습니다. 말하자면 병도 누리라는 것은 저의 경우입니다. 어떻게 병을 누립니까? 저는 하지만 그 병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눈이 열린다는 심정으로 늘 아무리 어려워도 계획이 있겠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다 이것이 제가 지탱해온 가장 메시지의 바탕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계신다 어려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참을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견딜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차라리 병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주옵서서 이렇게 병을 지탱해온 것이 6, 7년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어떤 의미에서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이면 하늘의 뜻이 있겠지 하고 6,7년을 같이 기다렸습니다. 그런 중에 오늘 이 강단에 서게 된 것을 생각하면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어느 교인이 6, 7년동안 병을 앓고 있는 목사를 그냥 두면서 기도하면서 기다리겠습니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무엇이 되어야하냐면 우리들은 동기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은 뭐든지 동기를 가지고 그 동기가 확실한 만큼 노력하고 애를 쓰고 살아갈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갈 때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나아가는냐. 그것은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일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로서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통일왕국의 왕으로 그렇게 인식하며 가지고 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어떤 면에서 거의 이런 의미를 가지고 핍박 속에서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기만 해봐라 우리는 왕권의 가지고 오신 예수님 우편과 좌편에 앉아서 대신이 되어서 그때 한번 봐라 그것이 바로 동기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것이 성취되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아무리 봐도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생각하는 원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따라다닌 것도 억울한데 그 메시야가 아니라고 하면 모든 것이 헛일이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정말 바른 동기가 안되어있고 우리가 세상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심과 육신의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상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점이 되는 그 사역 속에서 우리가 이해가 안되고 엉뚱한 소리를 하게됩니다. 그래서 복음이 안되면 기존교인들이 더 문제가 되고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안되면 예수를 믿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교회가 고쳐야하고 전환해 나가야할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대구에 이런 교회를 세우실 때에 내가 누구냐 우리가 누구냐가 이해가 되어져야합니다. 잠깐의 어려움, 문제때문에 흑암의 역사속에 사단의 유혹속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진지하게 정말 내가 누구냐 세계복음화할 사람이다 우리가 누구냐 세계복음화할 사람이다 우리교회가 어떠한 교회냐 세계복음화할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축복하시고 은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도들이나 제직자들이나 똑같이 저는 이번 제직수련회에서 중요한 것을 붙잡았습니다. 뭐가 이루어져야 하는가. 중요한 것은 교회를 중심으로한 동기가 세워지지 않은면 여러분의 기도는 다 헛된 것으로 갑니다. 기도제목도 다른 것으로 잡혀집니다. 늘 기도제목 기도제목을 이야기하는데 다른 것이 동기가 되어지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중심한 기도제목. 산업인들도 모든 직분자들도 모든 성도들도 교회중심한 기도제목. 교회 역사속에서 이것이 된 자들은 전부 복을 받았습니다. 복을 받아도 보통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여러분 중심이 무엇이냐 교회중심이 아닙니다. 전부 자기중심이 아니면 가정중심이고 내 생각중심이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교회 중심의 기도제목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류목사님도 그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가 어느새 교회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주 찔렸습니다. 어느 때부터 내 중심이 되어있었습니다. 무언가 병고 때문에 뭔가 교회중심의 기도가 아니라 내 중심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 어느순간 이렇게 전에 교회를 위해 죽고 산다는 그러한 생각이 없어져버리고 거의, 내 개인 중심의 개인중심이라고 하면 항상 병이 중심이었습니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싶어도 이런 동기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축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대적인 축복을 받을 자리에 있고 이것은 역사적인 축복을 가질 자격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누려지지 않는 것이 이러한 배경입니다. 여러분 기도제목을 정말 살펴보아야합니다. 정말 내가 교회 중심으로 기도제목을 삼고 있는가. 모세는 성막중심으로 모든 성막을 향해서 모세가 명령을 하고 그렇게 모세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이 날마다 열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언약궤 중심입니다. 교회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삶과 평생의 한이 언약궤를 남길 성전이었습니다. 그 소원으로 마지막 모든 물질과 성전을 지을 재물을 모아놓고 솔로몬에게 넘겼습니다. 다윗의 소원이 이것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중심이 교회중심이었습니다. 어릴때부터 교회에서 자고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그때의 성전이 교회였습니다. 이런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그때그때마다 내린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반드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데 교회 중심이 아닙니다. 기도제목을 잡았지만 교회중심이 아닙니다. 거의 내 중심과 다른 동기가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중심이 되어질 때 기도제목이 바로 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잡게 되고 그뜻을 붙잡은 기도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속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잡을 때 전능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늘 하나님은 함께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데 그 하나님이 교회중심으로 기도제목이 잡힐 때 전능자로 기적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십니다. 늘 함께 계십니다. 지금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 제목이 잡히기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잡히는 순간부터 전능자로 기적의 하나님으로 역사하십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잠깐 앉았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교회 중심으로 여러분이 붙잡을 한주간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전능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이 말씀이 가슴에 너무 와닿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늘 합니다. 그러나 정말 기도제목을 붙잡고 하나님께 참 소원을 가지고 나갈때 하나님은 전능자로 역사하십니다. 그 기적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무엇이 나옵니까? 장로님도 말씀하셨지만, 제직수련회에서 말씀하시길 교회중심으로 기도할때 어떻게 되느냐. 처음의 기도제목은 보완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교회중심으로 한다고 하지만, 무언가 나의 욕심이 들어가고 인간의 것이 들어가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보완해주십니다. 또 보충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고 쓸데없는 것은 삭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래서 그 기도제목을 붙잡고 나갈때 완성된 기도로 변치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모든 말씀이 내 기도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전에는 기도따로 말씀따로입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모든 기도의 응답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삶이 말씀과 연결되게 됩니다.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저렇게 이루어지는구나. 그래서 한주간의 삶이 말씀과 연결되는 기도의 기적이 계속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삶이요. 성도의 놀라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붙잡고 정시기도라는 것이 저절로 되게 됩니다. 말씀이 내안에 계실 때에 우리도 모르게 말씀붙잡고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오지 기도와 말씀이 따로 될때는 정시기도가 잘 안됩니다. 말씀붙잡고 기도할때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의 내용이 말씀으로 응답이 와집니다. 말씀말씀이 그냥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약속하신 말씀이 우리의 동기 다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욕심 다 주님께 털어놓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을 붙잡고 기도제목으로 삼았을 때 우리의 모든 삶이 말씀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모든 해답이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경험해본 사람들은 저절로 되게 됩니다. 복음의 이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해될때 복음이 이해되는 것이지. 그래야 복음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않은 언약의 말씀이 잡히게 됩니다. 복음은 잡혀지는 것입니다. 내가 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손을 다른 사람이 붙잡으면 인간의 손이지만, 하나님이 잡았다면 인간과는 달리 절대로 놓치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한번 복음을 받은 성도는 주의 품을 떠날 수 없습니다. 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정시기도로 변치않는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갈때 개인적으로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일곱가지 축복을 말합니다. 이때부터 누림이 이해됩니다. 내가 누구냐? 어떤 복을 받았느냐? 그래서 간단히 이해를 시킨다면 복음을 정말 누리시는 길이 성령이 내게 내주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마다 전능자의 역사가 성령으로 역사하실 때 기적이 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됩니다. 성도의 역사가 이것입니다. 간단한 일곱가지 축복이 이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내안에 계신다. 성령의 내주입니다. 오늘 주님이 나를 인도해가신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주님이 인도해가시는 중에서 사건과 일마다 기적이 나오는구나. 기도속에서 저절로 세가지가 되어지면 누림이 되어지는것입니다.
오늘 성도여러분에게 정말 붙잡기를 원합니다. 내가 교회중심으로 정말 기도제목을 붙잡고 있으면 역사하십니다. 바로 성령이 내주하시지만, 역사는 인도하시는 시간속에서 능력과 전능자의 역사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적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싶고 주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지만 거의 동기가 다른 동기입니다. 살던지 죽던지 교회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주의 일에 사용되기를 원합니다. 내 소원이요. 여러분의 소원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가끔 정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역사와 축복속에 사용되는 자리에 역사하소서. 소원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노력하고 바둥거려도 하나님이 은혜주시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늘도 주의 종들에게 말씀붙잡고 한주간 은혜받는 시간이 되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이것이 여러분과 제 소원입니다. 축복하시는 주님의 손길에 붙잡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이 오늘도 축복하셔서 주의 종들에게 말씀주시고 말씀 안에서 정말 하나님의 소원인 교회를 중심한 소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원들이 우리에게 성취되게 하시고 이루어지는 감격있게 하시고 말씀통해서 확실히 붙잡히는 축복을 주시옵소서. 주님이 저들 통해서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에 세워주시고 이루어질 기적속에 주의 종들을 세워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나이다. 아멘.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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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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