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모든 제자도
2006-01-08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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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모든 제자도’ 라고 제목을 삼았습니다. 상당히 오늘 제목은 부정적인 제목입니다. 모든 제자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 나섰다기 보다도 베드로가 예수그리스도를 부정한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모든 제자도 똑같이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재미있는 대화를 보게 됩니다.
성찬을 마치시고 예수님이 베드로와 열두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 말씀은 즉흥적인 예언이 아니고 구약에 내려온 성경의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게 될 때에 다 버리겠다는 그 약속대로 성취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7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29절에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찌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그렇게 용감하게 대답합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께 절대로 안 버린다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밤에 닭이 울기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때에 또 베드로가 확실하게 대답했습니다. 31절에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그 다음에 따라서 오늘 제목을 삼았듯이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여러분도 똑같이 이와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지금 절대로 예수님을 안버린다 죽을지언정 안버린다는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그 순간에는 감정을 담은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모든 제자도 똑같이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 진실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감정을 가진 아무리 진실한 고백일지라도 내 생각과 내 뜻을 가지고 고백하는 것은 절대 성취안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지, 제자들의 진실한 고백은 성취되지 않고 이루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중요하게 담고 싶은 내용이 이 내용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런 고백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모든 쓸데없는 지식이나, 지난 핵심에도 표현했지만 여기서 얻어듣고 저기서 얻어듣고, 이 교회에서 얻어듣고 저 교회에서 얻어듣고 그래서 하나교회 왔을때에 하나교회에서 직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내가 들은 것을 가지고 내 생각가지고 내 마음을 가지고 아무리 진실해도 하나님의 하나교회를 봉사하기에는 합당치 않게 된다. 왜냐하면 말씀을 붙잡고 잘 박힌 못처럼 말씀이 박혀져서 말씀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보는 눈이 안 열리면 다 실패로 돌아간다. 우리의 고백이 아무리 진실한 고백이라도 헛된 고백이 됩니다.

2006년의 각 개인과 가정에 희망과 기도제목을 적어내라고 하니까 거의 후손을 위해서 렘넌트에 대해서 기도제목을 썼습니다. 어떤 분들은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아들 누구누구를 위해서 기도제목을 썼습니다. 본부와 함께 간다는 의미에서는 좋은 의미입니다. 좋은 일이고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으로 고백하고 감정으로 다스리고 자녀를 인도하면 안됩니다. 자녀들을 말씀에 의지해서 해야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잘 박힌 못처럼 거기에 자녀들의 영광을 걸어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렘넌트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말씀위에 걸어두어야 합니다.
어제 결혼예비학교에 청년들에게 메시지를 하면서 지나온 과거를 잠깐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결혼전에 소망하고 기대했던 여자들은 하나도 결혼까지 이끌어가지 못했습니다. 일생을 걸으면서 내 생활속에서 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가까운 사람들이 다 있지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전부 성취가 안되었습니다. 왜 안되었는가하면 나도 모르게 어머님이 내게 걸었던 소망이 목사였습니다. 위의 형님 두 분을 목사시킬려다가 실패하고 나를 목사로 세우기를 원했는데 아버지가 농사꾼이 되라고 해서, 어머니가 기어코 목사시킬려고 이웃집에 돈을 빌려서 아버지 몰래 형님집으로 갔습니다. 나는 그때에 처음으로 집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학교를 하고 어머니의 소원대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같은 연배의 친구들, 여학생들이 생겨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교제도 했지만 그런데 중요한 순간에 이 사람이 나의 반려가 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인가? 여기에 부딪히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하는데 어떡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아슬아슬한 순간들 위기들이 있었습니다. 곁길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복음을 가졌다기 보다도 어머니의 염원이 너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중요한 결단을 내리게 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냐? 아닙니다. 그러면 실컷 사켜놓고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앞에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단속에서 뭘 느끼는가하면 요즘 우리 청년남녀들이 결단을 했다거나 마지막 통보를 받을때에 감정과 생각을 정리할 결심이 확실하게 있어야 합니다. 이거 없이는 성공을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TV를 보면서 사랑 때문에 울고짜고 하는건 인간이 아니라고 봅니다. 결단해보고 맞다싶으면 가면 되는 것이고 그러면 되는데 안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다 이게 안되면 계속해서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남녀관계를 상당히 중요시하라. 결혼을 앞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짝지어가신다는 것이 안되면 결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게 되면 하나님이 성공하게 하신다. 이삭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짝을 만나게 될때에 그때 당시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도 첩을 여럿 두었다. 그때 사회풍습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유난히 이삭은 리브가 한명으로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한해에 백배의 축복을 받았고, 그 다음에 그 가정에 자녀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도 자녀문제 때문에 어려웠지만 이삭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공할려면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렘넌트를 위해서 바르게 교육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어른들도 이런 시각에서 자녀들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반드시 감정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꼭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녀에 대한 포부가 있어도 내 욕심을 성취할려고 할려고 하지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향해 계획하신 뜻이 성취된다는 것을 부모님들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그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렘넌트를 위해서 많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2006년도에 본부와 다락방전체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자신이 복음이 무엇인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올바르게 이해가 안되면 성경보기에 상당히 오해가 많습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모든 이스라엘의 사건과 일들은 거의 이스라엘의 멸망된 역사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인간이 불행해 지는 역사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았지만 어찌 그렇게 망하느냐? 어쩌면 그렇게 지질이 못나고 어렵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느냐? 이게 구약에 기록된 전부 다입니다. 그래서 구약을 보다보면 예수믿으면 이렇게 되라고 예수믿으라고 했나? 이렇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멸망해 가는 곳이 반드시 하나님은 복음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3장을 보면 완전히 멸망이 아닙니다.
나는 창세기 3장을 옛날에 복음을 모를때에는 창세기 3장을 뜯어내면 좋겠다싶을 정도로 어떻게 이렇게 저주스러운 이런 역사가 있느냐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반드시 하나님은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으로 그래서 흑암과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꺽고 짖밝고 일어설 수 있는 축복의 메시지, 원복음입니다. 신학적으로 원시복음이라고 하는데 원시복음보다도 원복음입니다. 복음이 이 말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출애굽기 3장 18절에 출애굽한 그들에게 정말 이스라엘이 복을 받을 길이 애굽을 탈출해서 하나님앞에 바른 제사를 드릴 때입니다. 피제사입니다. 이 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애굽을 나와야겠습니다. 이게 하나님앞에 응답받는 놀라운 역사로 기록됨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의 멸망만 보게 되면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현재 예수믿고 난 뒤에 축복받았다 말하고 자랑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약에서도 똑같이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망해가냐할 정도로 성경에보면 성공보다도 멸망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호와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그 눈이 성경을 볼에 그 눈이 안 열려진다면 성경에서 축복의 복음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망하는 사건만 보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신약을 시작하는 첫 말씀에 마태복음 1장 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여러분 마태복음서에 첫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왜? 이때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입니다. 너무 어렵게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복음을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일어날 힘을 주었습니다. 그게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복음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당하고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복음을 가진다하면서도 가문과 가정을 통해서 나도 모르게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아마 지금도 내가 왜 예수 믿는데 왜 어려움이 오느냐? 해답이 안나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4절에 보면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지니라 4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아래 물속에 있는 것이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즌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데 아비로부터 아들에게 3~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여러분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우상숭배에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믿는다고 하면서, 왜 어려움 당하고 고통당하느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보이는 형상이든 보이지 않는 형상이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이조500년동안 조상이 섬겨온 오랫동안 섬겨온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도 모르게 안믿는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남자들이 양반들이 걸어가는데 여자들이 절대로 가로질러 못갑니다. 부정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날까지 이런 생각들로 인해서 믿든지 믿지 않던지 잘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 안되는 모양입니다. 남녀동등이라면서, 여성우위라고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집 아이가 컴퓨터로 찍으면서 딸이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힘이 빠지더랍니다. 집사람이 뭐라 하는 겁니다. 네가 이조사람이냐? 딸이든 아들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감사함으로 받아야지 그럴 수 있느냐? 너도 아직 멀었다.
왜 이 말입니까? 우리도 똑같습니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아직까지도 엄청나게 보이든 보여지지 않든 하나님보다 다른 방향으로 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엄숙하게 말씀합니다. 뭐라고 말씀하느냐? 여기에서 빠져나오는 길이 오직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 예수그리스도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예수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다. 나의 인생과 나의 운명에서 그리스도이외에는 따라갈 이유가 없구나 이것이 확실하게 되는때에 모든 운명과 더러운 저주와 재앙속에서 완전 해방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약속입니다.
그래서 롬8:2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확실히 붙잡아야 합니다. 늘 알고 있는 것이고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도 모르게 그렇게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녀들에게 가문으로 통해서 오는 저주에서 빨리 복음으로 해방받도록 이 눈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왜 우리 가문이 왜 우리 가정이 왜 내가 이런 고통속에 헤매고 있느냐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면 경험할 필요없습니다. 멸망과 재앙을 경험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 자신도 모르게 종교와 복음으로 빠집니다.
니고데모가 얼마나 잘 믿었습니까? 또 공회의 회원이기도 하고 바리새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와서 밤에 와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때에 예수님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면 거듭납니까? 다시 어머니의 배속에서 나와야 하는 겁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전부 잘믿는다고 애를 쓰면서도 근본 생명의 역사를 붙잡지 못하고 열심과 노력으로 종교로 빠집니다.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게 우리의 체질과 정서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신자에게 중요하게 가르칠 것은 교회와서 일부터 할려고 하지말고 정말 생명의 복음안에 설 수 있도록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와 복음에 대해서 눈이 열리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 중요한 것이 이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이 눈이 열리면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할 것 없이 삶과 복음에 대해서 연결되고 눈이 열리게 됩니다.
제가 다락방에서 젊은 사람들이 비판하면 대구율법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복음안에서 율법은 규모입니다. 복음안에서 규모가 없으면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면 복음과 율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타락이 오게 됩니다. 그게 안되면 결국에는 무너지게 됩니다.
무엇이 증명되는가하면 술 때문에 강력하게 막았는데 그 사람들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느냐? 술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지옥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믿는 사람은 규모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술먹고 담배피지 말라고 한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교회와서 담배피지 않고 술안먹고 얼마나 깨끗해진지 모릅니다. 담배피고 술먹는 사람들 얼마나 더러운지 모릅니다. 교회안에서 일찍이 막아놓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것이 건강을 준다면 먹어도 됩니다. 일찍 죽을려면 작정하면 피우십시오. 또, 술을 먹지말라 먹으면 지옥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술은 패가망신을 시킵니다. 한국 사람은 절제가 안됩니다. 그래서 술먹기 시작하면 삶이 안됩니다. 그래서 옛말에 한말 두말 술을 매고 가라면 못매고 가지만 먹고가라면 먹고 갑니다. 고향에 가보면 이런 사람들이 술중독이 되어 있고 패가망신했음을 보게 됩니다.
제가 약으로 포도주를 먹어보니까 뭔 생각이 드는가하면 술중독이 이런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날에 전도사시절에 한주전자 가지고 먹는데 달짝지근하게 맛이 있으니까 조금있다가 또 먹고 그러다보니 금방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다가 큰일나겠다싶어서 금방 끊었습니다.
우리 삶이 복음과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은 말씀이 가슴에 다가와야 합니다. 강단말씀을 기도수첩으로 만들어 내고 포럼하고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강단의 말씀이 마치 잘 박힌 못처럼 이사야 22장 22절에 보면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3절에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가 그 아비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못처럼 말씀이 박혀지게 될 때에 그때에 이스라엘의 영광이 걸리고 후손들의 영광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무서운 말인줄 압니다.
부모가 말씀으로 확실하게 붙잡고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을 못 가지게 되면 후손들의 영광이 걸리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렘넌트라고 하지만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후손의 영광이 걸려지지 않습니다.
오늘 간단한 말씀같지만 내 삶과 말씀, 그래서 정말 내 삶이 말씀의 못으로 확실하게 단단하게 박혀져서 그 위에 내 삶이 걸려지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지고, 더 중요한 것은 내 후손의 영광이 걸려져야 하겠습니다. 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아이들이 이 정도로 눈이 열리게 될 때에 세상과 복음이 보이게 됩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7장에 있는 것처럼 도저히 세상은 복음을 용납못합니다. 스데반이 복음전할때에 바리새인이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지만 후손들이 복음을 들고 나갈때에 세상은 복음에 대해서 반대하고 악한 감정이 있습니다.
저는 당회할때나 오래믿은 사람들을 보면 뭘 느끼는가하면 우리가 바로하고 잘하면 세상이 우리를 이해할 줄로 압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렇게 안됩니다.
우리가 기존교단으로 들어갈려고 하니까 더 큰 반대세력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겁니다. 당신이 지금 풀어주면 지금까지 막아놓았는데 뭘로 막느냐는 겁니다. 다 막아놓았는데 막아도 따라가는데 다 따라갑니다.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아니구나! 맞다! 절대로 복음을 세상이 용납못하는 겁니다.

기성세대와 복음입니다. 기성세대를 친구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때에 나쁜 세상을 향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캐톨릭이 완전히 성경밖으로 나가니까 거기서부터 개혁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지고 나갈때에 기성세대가 옳소이다 환영할 것 같으면 그건 착각입니다. 그때에 들어갔다면 이 복음 전하는 일은 지속이 안됩니다. 왜그렇습니까? 오늘날 기성교회가 여러분을 환영하고 어서오십시오라고 그렇게 할 것으로 알면 착각입니다. 복음들고 나가면 누구든지 거부하는 것이 세상이요 기성세대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담이 쳐져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옮기니까 기성교인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기성교인들이 복음의 눈이 안열리니까 기성교인 친구들이 이단이라고 해서 벌벌 떨면서 다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어떤 부인이 이 일 때문에 문의했을때에 당신에게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목사님에게 전화를 해봐라. 솔직히 목사님 양심적으로 대답해봐라. 다락방이 이단이냐? 아무도 이단이라는 소리를 안했습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단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이단입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왜? 복음회복이라고 할때에 칼빈주의 5대교리는 확실합니다. 과연 오늘날 그 사람들이 5대교리에 분명히 서서 이것을 통해서 내 인생이 하나님앞에 세계복음화의 일꾼으로 세워져서 나가느냐? 맞다고 합니다. 교리는 맞지만 실제로 선교와 전도가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스데반이 기성교회에 선교와 전도에 대해서 메시지할때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기성교회에 복음을 환영한다 잘 안될 것입니다 이것을 일찍이 후대에게 알려주지 않으면 갈등하게 됩니다. 믿는 사람이 왜 그러냐? 참 복음을 붙잡고 나가면 이런 엉뚱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따라옴을 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기성세대들이 후손들에게 이런 것만 알려줘서 안됩니다.
이들에게 복음의 맛을 참 복음을 체험하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요셉같은 경우에도 복음의 맛을 체험하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를 체험하지 않고도 나올 수 없습니다.
이사야같은 경우에도 이사야서를 쓰면서 그렇게 훌륭한 선지자가 된 배경속에서 웃시야왕이 죽던때에 고민이 많았는데 기도하다가 천군천사의 그룹을 보며 더럽고 추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성전의 숯불을 가지고 와서 치료하고, 그때에 이 백성을 위해 누가 갈꼬하니 나를 보내소서 그때에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들을 두고 멀리 광야로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젊은 패기에 해 보겠다고 나섰지만 도저히 안되겠다고 도망했던 사람입니다. 거기서 나이 80세에 호렙산의 떨기나무 불타는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한 후에 모세가 자기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애굽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우리 렘넌트가 올라오면서 우리가 완전 복음을 이해한 것처럼 그들에게 복음의 맛을 체험하도록 하기위해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이걸 하기 위해서 만들고 있는 것이 렘넌트 공동체훈련장인데 이를 통해서 젊은 후대들이 먹고 자면서 복음을 체험하도록 만들어줘야 합니다. 여기에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다윗같은 경우에도 사무엘서에 보면 다윗이 목동으로 나가있다가 다시 와서 사무엘이 기름부을때에 동시에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고 그때부터 보통사람이 아니였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보통사람은 아니였지만 그때부터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도 세례요한에 세례받을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재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전체의 말씀이 성취되는 사건이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일을 마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때에 약속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이 임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에 말씀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말씀이 성취되고 있습니다. 이 성령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뜻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말씀이 성령으로 개인과 직장과 가정에 성취되어질 것입니다. 감정과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잡을 때에 하나님이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정시기도와 무시기도가 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우리의 삶과 생활속에 구체적으로 이루게 하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사실을 누리시고 승리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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