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이루려하심
2006-01-22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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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를 살릴 선교사입니다.
오늘 새삼스럽게 조명이 어둡나 싶어서 천장을 쳐다보다가 여러분을 보니 거의 검은 옷을 입어서 어두워보였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기분과 느낌이 주변이 조금만 변해도 영향을 받습니다. 케냐에 가서 삼천명이 모였었는데 전부 새까만 사람을 모아 놓으니까 주변이 어둡게 느껴지는게 처음이였습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의 반열에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이 참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들이 춤을 추고 몸을 흔들고 찬양을 잘 부르지만 어두움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조금만 얼굴이 화사해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런 모습이 한주간 동안 말씀들고 나갈때에 말씀이 현장에서 성취되는 능력이 되는가를 확인하는 기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이루려하심이라. 오늘 메시지를 생각하며 붙잡아야 합니다. 늘 중요하지만 오늘은 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거기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오심 자체가 십자가요, 십자가에서 인류의 저주와 재앙을 한 몸에 지시고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저주와 재앙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사단의 진노, 심판, 역사를 우리주님이 한 몸에 지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가지고 사단배상설이라는데 사단배상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단에게 다 갚았다고 해서 그런 뜻으로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류목사님이 초기에 조금 이 문제를 강조했을때에 사단배상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단이다 삼단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오늘날 내가 잠깐 생각해 보기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사단입니다. 그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양심있는 목회자는 그런 말 안합니다. 왜? 지금 사단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설교의 개혁입니다. 종교개혁입니다. 그런 영향을 어디서 받았느냐? 다락방메시지를 듣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조용히 듣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변하는데 그러면서도 이단,삼 단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의 양심이 아닙니다.
설교를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구정이 되어서 집으로 갈 것인데, 고향교회나 가시는 교회에 가서 들어보면 많은 경우 사단이야기, 귀신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다락방메시지라고 할 정도로 설교를 합니다. 메시지를 듣고 옳다라고 생각하기에 말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지를 그렇게 하면서 이단, 삼단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의 양심이 아닙니다. 총회에서 교단연합이라고 할때에 젊은 교역자들이 막았습니다. 교인빼앗긴 것이 문제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막았지, 다른 것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지금 이것을 열어놓고 이단이 아니라고 하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면서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좀 나쁜말로 해서 심보가 약간 다릅니다.
문제는 여러분과 제가 기도해야 할 것이 구체적으로 교회가 앞으로 복음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어려운 세대가 이미 도달했고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앞서서 참 복음의 증인으로 서야 하는 것이 금년도의 중요한 사명이요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때가 왔습니다. 시대가 왔습니다. 대표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축복의 역사가, 복음들고 나가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이 보여져야 이웃사람이 다른 사람이 인정할 것이니까 붙잡고 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를 크게 짓고나니 빨리 개방해서 사회사람들이 들어와서 뭘 하도록 하고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백번 천번 들어와도 여러분들이 복받는 모습을 못보면 안믿습니다. 와서 자기들 원하는 것만 하고 나가지 안믿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들어와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복받는 모습을 실제적으로, 우리가 공동체렘넌트에 참여하고 십일조하고 복받을 자리에 서서 축복을 누리게 되면 저 사람 진짜 복받는다고 아무말도 안해도 들어옵니다.
그래서 금년도에는 복받을때가 왔습니다. 십일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전체에 경제의 축복의 회복은 여기서 나옵니다. 지난주에 때가 왔도다. 무슨 때냐? 영과 육으로 경제적으로도 축복받을 때가 왔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실제로 인도받는 사실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로 듣지 마시고 정말로 거기에 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야 하기에 성경을 구체적으로 이루시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메시야가 오셔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때가 왔도다. 죽으실 때 왔습니다. 성경을 이룰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삼년을 마치는 순간 십자가를 지시는 때가 왔고, 성경을 구체적으로 이루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속에서 유다를 통해서 가증스럽게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고 군인들이 잡으러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이스라엘이 축복받고 왕성할때는 예루살렘성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피와 물이 개울물처럼 흘러내렸다고 학자들이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그리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피를 계속 흘리니까 예루살렘뿐 아니고 이스라엘백성들이 왕성할때에 모든 성도들이 끈임없이 모든 백성들이 끈임없이 양과 소와 비둘기까지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기에 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피와 물이 개울물처럼 흘러내렸다고 했습니다. 계속 제사를 지내고 이때는 이스라엘이 부흥하고 왕성할 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도 교회마다, 제단마다, 강단마다 피가 넘치게 흘러나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교회에 올때에 소를 몰고 오고 양을 몰고 와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게 아니라 육체적으로 제사드리는 일을 예수님께서 친히 몸으로 다 완성을 하셨습니다.
양의 피로, 소의 피로 가지고 제사드릴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예수그리스도의 그 이름으로 예배드림으로 모든 재앙과 죄악과 두려움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를 잡고 양을 잡는 이유는, 양을 가지고 와서 죄를 고백하고 제사장이 가지고 오면 제사장이 양과 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고백한 죄와 그 죄로 말미암아 오게 되는 모든 저주와 재앙이 가정과 가문의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루어질 저주와 재앙을 양과 소가 대신 짊어지고 죽습니다. 피를 흘립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그 모든 제사를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심으로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만 가지고 예배를 드릴때에 예배드리는 순간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만 가지고 예배를 드릴때에 예배드리는 순간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약속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양과 소를 안가지고 와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오늘도 대신해서 이루시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될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재난과 노예로 속국으로 계속 팔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백성들이 이 제사가 끊어진때가 십일조를 안내고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 중단될때에 모두 재앙에 부딪혔습니다. 십일조가 참 중요하다는 일을 시간내서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이스라엘백성의 레위족속에서 제사장이 나오니까 레위족속을 위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육체적인 레위지파의 분깃을 열한지파에게 다 나누어주고 이스라엘백성의 레위지파는 어떻게 사느냐? 십일조를 내어서 성전에 드림으로 인해서 그걸 가지고 레위족속들이 육신으로 먹고 계속해서 성전일을 계속 맡아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백성의 성전과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십일조를 안낼때에 레위족속들이 먹을게 없고 성전에서 일할 수 없기에 결국 먹고 살려고 레위족속, 제사장들이 다 떠나니까 성전에서 불을 켜고 제사하고 피흘리는 일이 중단될때에 이스라엘에 무서운 재난이 역사적으로 계속 일어났습니다.
출3:18에 그들이 내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뭔 말이냐? 이스라엘백성과 바로의 싸움이 제사드리는 싸움입니다. 말하자면 피흘리는 역사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피흘리는 모든 것이 빼앗길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백성을 모세가 떠나오게 할때에 첫 번째 싸움이 지금까지 지내지 못했던 제사를 지내게 해 달라는 것이 바로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각 가정에서 양을 잡고 피를 흘리고 유월절 절기를 지킬때에 바로 그날밤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다 쳤습니다. 짐승부터 왕의 장자까지 다 쳐서 왕이 이스라엘백성을 내어보냈습니다. 내보내는 구실이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이것이 요구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두려운 문제가 생긴다면 각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말랐습니다. 오직 복음이 말랐습니다. 많은 경우 다른 이야기합니다. 이게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축복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안으로 복음안으로 생명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교회는 오직 복음만, 오직 십자가만 피의 복음만 전하는 교회가 된다면 모든 재앙과 재난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성전에서 제사장이 떠나고 제사가 사라질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재난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로마에 속국될때도 이스라엘에 제사가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로마군사가 점령을 하고 그 후에 이슬람군대가 점령을 하고 지금까지도 제사가 구체적으로 회복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이스라엘백성들이 이해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안지내나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제사가 회복되지 못하니까 지금도 재난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통곡의 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순례를 하면서 울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땅과 교회에 모든 축복과 은혜가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림을 붙들고 예배드릴 때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구체화되는 예배가 진짜 제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브라함이 축복받을때에도 그렇고 누구든 축복받은 자는 가는 곳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피흘린다는 것입니다. 단을 쌓는다는 말은 양과 소를 잡고 피흘리는 것입니다. 단을 쌓는 다는 것은 지금도 소와 양을 잡아서 하는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그 이름으로 구체적으로 속죄를 받고 죄사함을 받고 모든 재앙과 재난을 이기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피흘림의 축복을 누림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피흘린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림을 구체적으로 붙잡고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고 믿고 나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가하면 제사와 피흘림이 사라지면 직장과 생활에서 다락방화하자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은혜인데 제사를 회복하자는 것 입니다.
히4:14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했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디를 가든지 제사지내고 단을 쌓고 예배드릴때에 구속이 이루어지고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흑암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재앙과 재난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고함을 지를게 아니라 가는곳마다 말씀붙잡고 그리스도 언약속에 설때에 이루어집니다. 구체적인 행위는 다락방하기도 하고 예배드리기도 하고 가정예배드리기도 하고 가는곳마다 그리스도의 피, 구속의 피, 십자가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약속,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약속이 우리가 가는 곳마다 거기에 머물때에 모든 재앙과 재난이 사라집니다. 재앙과 재난만 사라질뿐 아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예루살렘의 왕성한 때가 예루살렘성전에 불이 꺼지지 않았고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제단에 불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그 불위에 계속해서 양을 잡고 소를 잡아서 피를 흘리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백성은 큰 축복과 은혜로 넘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막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은 오래전 구약때부터 메시야,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예언한 십자가에서 완성하시는 메시야의 역사가 성경을 이루려하심이라. 예언된 말씀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루어짐으로 소와 양을 잡던 것을 이제는 예수그리스도 피로 성전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처음다락방에 왔을때에 사실 회개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산기도에 가서 예배드리면 계속해서 울고 불고 하는 것이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산 기도가서 3시간 4시간 죽을지경으로 손들고 못내리게 하고 찬양하고 울었던 것도 회개중심입니다. 그런데 일단 회개를 하고 나면 후련하고 속이 시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락방와서 그런게 없으니까 속이 답답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할 것은 회개가 어디있느냐? 행2:37에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가 회개를 강조했는데 그 회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고 그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 약속을 붙잡는 것이 회개입니다.
행2:36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붙잡는 것이 회개이고 이 약속을 붙잡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일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어디있느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길로 사단이 좋아하던 길로 가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가던 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붙잡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감사해서 눈물이 나오기도 하고 너무 억울해서 통곡도 나고 어떤 사람들은 몸에 질병이 떠나가기도 하고, 모슬렘권의 사람들은 두통이 많은데 예수그리스도 영접하고 난 후에 우리말로 기도하고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데 머리가 다 낳았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기도할때에 진노가 떠나가는 겁니다. 재난이 떠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나갈때에 성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속에 현장속에 성취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라. 약속붙잡고 약속위에 설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성취됩니다.
산업선교 메시지속에서는 이 말씀이 가슴속에 임할때에 이 말씀이 임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붙잡게 될 때에 그 말씀이 성취됩니다. 십일조 붙잡아라. 때가 되었다. 그 말씀붙잡고 구체적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히9:11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염소와 양의 피로도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서 머리에 손을 얹고 잡고 피를 뿌려서 죄를 정하게 했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 양과 염소를 대신해서 죽이시면서 단번에 모든 속죄를 이루시고 재난과 재앙의 역사를 막으시고, 개인의 심령속에 평안을 막고 있던 죄악의 역사를 깨끗하게 못하시겠느냐? 누구의 피로? 예수의 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언약을 잡고 나갈때에 고백하고 나갈때에 양심속에 평안을 없애고 불안하게 만들고 죽음과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사단의 손에 있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너무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교회에 찾아와서 예배드릴때에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루십니다. 주일날은 숨돌릴 여가 없이 하는데, 계속해서 말씀하는 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그 언약을 우리가 붙잡고 내가 고백합니다. 이 약속위에 섰습니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 계속 훈련을 합니다. 이 정서가 안되고 훈련이 안되니 자꾸 다른짓을 하니까 이걸 계속해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오늘 광고할때에 이것을 계속하고 나면 한주간 삶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메시지 듣고 집에 가면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가득해야 합니다. 한주간 내가 갈때마다 언약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제사하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가기에 한주간의 모든 삶에 저주와 재난이 없어집니다. 그게 제사의 역사요 예배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다락방하자는 것이 직장과 생활에서 사건과 삶에서 이것을 구체화 하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약속을 붙잡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때에 진노가 없어졌습니다. 진노가 사라졌습니다. 그걸 붙잡은 우리에게 임할 진노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대신해서 예수님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강조할때에 자꾸 사단의 역사를 없앤다. 그래서 진노가 사라졌다고 할때에 사단배상설을 자꾸 주장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히9:15에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택한 백성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이 약속이 안되면 우리는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죽음과 멸망의 영원한 것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 사단의 영원한 심판과 재난을 꺾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3:25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전에 지은죄를 간과했다, 우리가 지었다는 그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창3장의 아담, 하와의 지은 죄로부터 죄를 짓고 난 후에 아담, 하와에서 선언한 것이 정녕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죄악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조상적부터 진노받아 죽어야 할 것을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고 뭔가 거기에 벌을 주는게 마땅한데 공의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그를 믿는 우리도 의롭다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이라. 진노받아 다 죽어야 하지만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의롭게 되시고 우리도 의롭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에서 우리의 진노가 사라졌습니다.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롬3:26에 보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의로워진 배경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재난과 재앙이 간과되어 다 지나갔습니다. 아담하와때부터 일어난 모든 창3장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우리도 의로워졌습니다. 26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언약속에 들어올때에 모든 진노까지 다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일 힘드는 부분이 율법적인 복음입니다. 체질이 아직까지 바뀌지 않아서 문제만 생기면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거듭말씀을 드립니다. 이번에 목회대학원에 가니까 류목사님이 중직자신학교,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대구 산업선교에서 계획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은혜잘 받던 집사로 있다가 장로가 되면 말씀을 못 받습니다. 왜 그런지 이상합니다. 그래서 제일 각 교회마다 사각지대가 장로님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청년, 노인들 계속해서 메시지가 나가는데 중직자와 장로를 위한 메시지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덜하지만 일반교회에서는 중직자를 위한 훈련기회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축복받을 자리가 장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속이 들어가야 하고 언약이 들어가야 하고 말씀이 들어가야 합니다. 장로님들이 말씀이 들어가면 부흥정도가 아니라 터져나갑니다. 그래서 장로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중직자를 위한 신학교와 훈련 합숙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각지대를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고 때가 되었습니다. 다락방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벌써 장로님쯤 되면 중직자 되면 완전 체질이 율법적인 체질입니다. 정서가 거의 율법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거의 율법으로 돌아가고 판단부터 먼저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이 오늘 교인들의 것들을 꼬집어내야 하느냐? 비판적인 입장에서 끄집어 내는 체질, 율법의 체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언약을 가지고 언약적인 체질로 인도받기 보다는 율법적인 체질로 나갑니다.
율법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율법은 저주입니다. 갈3: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실 것을 예언한 것이 메시야 예언입니다. 구약의 이런 예언을 예표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으심은 율법적인 저주를 완성하시고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계속 양의 피를 흘리고 했습니다.
그 메시야적인 죽으심을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있는 것은 율법이 뭐냐? 예식법이 율법입니다. 구약을 보시면 전부 율법입니다.
속죄제, 화목제를 어떻게 드리느냐?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체질이 되어있는게 아닙니다. 체질이 될래야 될 수 없습니다. 예식법에 체질이 되어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벌써 다 지나가고 완성되었습니다.
모든 예식법,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가지 예식제도도 전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한꺼번에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이 언약을 잡고 예배드릴때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율법은 행위율법을 말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율법체질 이라는 것은 앞의 두개는 다 성취되었고, 행위를 가르켜 말합니다. 뭘 잘했다 못했다 가지고 말씀하는 겁니다.
행위율법이라는 것은 성경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으로 통해서 행위율법도 예수님이 완성했습니다. 롬8:3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피언약을 붙잡을때에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조차도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마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패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패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에서 끝낸 것을 성령께서 여러분 개개인에게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행위조차도 성령으로 내가 행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피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갈때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겁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나도 못해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의롭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 일을 신학적인 배경에서 상당한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믿을때에 주관적으로 믿을때에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얼른 들으면 맞는 것 같이 넘어갈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을 말하기전에 놓치지 말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객관적인 역사를 믿을때에 믿는 그들에게 성령으로 주관적인 체험이 되어야 흔들림이 없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죽으심과 부활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참 신으로 오시고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안 믿습니다. 심지어는 동정녀를 부인하고 객관적인 사실이 없이 주관적인 사실만을 붙잡으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체험이 안되니 결국은 흔들립니다. 그래서 느낌과 감정에 흔들립니다.
예수님이 재앙과 저주와 죽음에서 사셨습니다. 그 사실을 붙잡았습니다. 이 언약을 잡고 나가는 곳마다 약속이 성취됩니다. 제사드립니다. 예배드립니다. 성령으로 그 약속을 붙잡았기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붙잡고 성령의 역사를 알게 될 때에 사건과 때와 시간을 따라서 성령께서 택한자를 부르시고 약속한 그 자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그 언약을 붙잡고 나갈때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주시고 어느장소든지 놓치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붙잡고 절대로 축복의 때가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역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 약속을 잡은 자에게 성령이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와함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새삼스럽게 조명이 어둡나 싶어서 천장을 쳐다보다가 여러분을 보니 거의 검은 옷을 입어서 어두워보였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기분과 느낌이 주변이 조금만 변해도 영향을 받습니다. 케냐에 가서 삼천명이 모였었는데 전부 새까만 사람을 모아 놓으니까 주변이 어둡게 느껴지는게 처음이였습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의 반열에 어디에 서 있느냐는 것이 참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들이 춤을 추고 몸을 흔들고 찬양을 잘 부르지만 어두움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조금만 얼굴이 화사해도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런 모습이 한주간 동안 말씀들고 나갈때에 말씀이 현장에서 성취되는 능력이 되는가를 확인하는 기쁨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이루려하심이라. 오늘 메시지를 생각하며 붙잡아야 합니다. 늘 중요하지만 오늘은 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거기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오심 자체가 십자가요, 십자가에서 인류의 저주와 재앙을 한 몸에 지시고 다 이루었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저주와 재앙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사단의 진노, 심판, 역사를 우리주님이 한 몸에 지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것을 가지고 사단배상설이라는데 사단배상설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단에게 다 갚았다고 해서 그런 뜻으로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류목사님이 초기에 조금 이 문제를 강조했을때에 사단배상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단이다 삼단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오늘날 내가 잠깐 생각해 보기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사단입니다. 그건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양심있는 목회자는 그런 말 안합니다. 왜? 지금 사단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설교의 개혁입니다. 종교개혁입니다. 그런 영향을 어디서 받았느냐? 다락방메시지를 듣고 있다는 이야기이고 조용히 듣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변하는데 그러면서도 이단,삼 단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의 양심이 아닙니다.
설교를 한 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구정이 되어서 집으로 갈 것인데, 고향교회나 가시는 교회에 가서 들어보면 많은 경우 사단이야기, 귀신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다락방메시지라고 할 정도로 설교를 합니다. 메시지를 듣고 옳다라고 생각하기에 말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지를 그렇게 하면서 이단, 삼단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의 양심이 아닙니다. 총회에서 교단연합이라고 할때에 젊은 교역자들이 막았습니다. 교인빼앗긴 것이 문제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막았지, 다른 것 아니지 않느냐? 그런데 지금 이것을 열어놓고 이단이 아니라고 하면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질 것이냐면서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좀 나쁜말로 해서 심보가 약간 다릅니다.
문제는 여러분과 제가 기도해야 할 것이 구체적으로 교회가 앞으로 복음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면 어려운 세대가 이미 도달했고 우리가 이 일을 위해서 앞서서 참 복음의 증인으로 서야 하는 것이 금년도의 중요한 사명이요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때가 왔습니다. 시대가 왔습니다. 대표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축복의 역사가, 복음들고 나가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이 보여져야 이웃사람이 다른 사람이 인정할 것이니까 붙잡고 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교회를 크게 짓고나니 빨리 개방해서 사회사람들이 들어와서 뭘 하도록 하고 그게 중요한게 아닙니다. 백번 천번 들어와도 여러분들이 복받는 모습을 못보면 안믿습니다. 와서 자기들 원하는 것만 하고 나가지 안믿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안들어와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이 복받는 모습을 실제적으로, 우리가 공동체렘넌트에 참여하고 십일조하고 복받을 자리에 서서 축복을 누리게 되면 저 사람 진짜 복받는다고 아무말도 안해도 들어옵니다.
그래서 금년도에는 복받을때가 왔습니다. 십일조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전체에 경제의 축복의 회복은 여기서 나옵니다. 지난주에 때가 왔도다. 무슨 때냐? 영과 육으로 경제적으로도 축복받을 때가 왔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실제로 인도받는 사실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로 듣지 마시고 정말로 거기에 서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정말로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야 하기에 성경을 구체적으로 이루시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메시야가 오셔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때가 왔도다. 죽으실 때 왔습니다. 성경을 이룰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삼년을 마치는 순간 십자가를 지시는 때가 왔고, 성경을 구체적으로 이루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과정속에서 유다를 통해서 가증스럽게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고 군인들이 잡으러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이스라엘이 축복받고 왕성할때는 예루살렘성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에 피와 물이 개울물처럼 흘러내렸다고 학자들이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소를 잡고 양을 잡고 그리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그 피를 계속 흘리니까 예루살렘뿐 아니고 이스라엘백성들이 왕성할때에 모든 성도들이 끈임없이 모든 백성들이 끈임없이 양과 소와 비둘기까지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기에 학자들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이 피와 물이 개울물처럼 흘러내렸다고 했습니다. 계속 제사를 지내고 이때는 이스라엘이 부흥하고 왕성할 때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도 교회마다, 제단마다, 강단마다 피가 넘치게 흘러나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교회에 올때에 소를 몰고 오고 양을 몰고 와서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게 아니라 육체적으로 제사드리는 일을 예수님께서 친히 몸으로 다 완성을 하셨습니다.
양의 피로, 소의 피로 가지고 제사드릴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예수그리스도의 그 이름으로 예배드림으로 모든 재앙과 죄악과 두려움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소를 잡고 양을 잡는 이유는, 양을 가지고 와서 죄를 고백하고 제사장이 가지고 오면 제사장이 양과 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고백한 죄와 그 죄로 말미암아 오게 되는 모든 저주와 재앙이 가정과 가문의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이루어질 저주와 재앙을 양과 소가 대신 짊어지고 죽습니다. 피를 흘립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그 모든 제사를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심으로 담당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만 가지고 예배를 드릴때에 예배드리는 순간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만 가지고 예배를 드릴때에 예배드리는 순간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약속이 그 안에 이루어지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양과 소를 안가지고 와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오늘도 대신해서 이루시는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될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은 재난과 노예로 속국으로 계속 팔렸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백성들이 이 제사가 끊어진때가 십일조를 안내고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일이 중단될때에 모두 재앙에 부딪혔습니다. 십일조가 참 중요하다는 일을 시간내서 말씀을 드려야겠지만 이스라엘백성의 레위족속에서 제사장이 나오니까 레위족속을 위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육체적인 레위지파의 분깃을 열한지파에게 다 나누어주고 이스라엘백성의 레위지파는 어떻게 사느냐? 십일조를 내어서 성전에 드림으로 인해서 그걸 가지고 레위족속들이 육신으로 먹고 계속해서 성전일을 계속 맡아했습니다. 이게 이스라엘백성의 성전과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십일조를 안낼때에 레위족속들이 먹을게 없고 성전에서 일할 수 없기에 결국 먹고 살려고 레위족속, 제사장들이 다 떠나니까 성전에서 불을 켜고 제사하고 피흘리는 일이 중단될때에 이스라엘에 무서운 재난이 역사적으로 계속 일어났습니다.
출3:18에 그들이 내 말을 들으리니 너는 그들의 장로들과 함께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뭔 말이냐? 이스라엘백성과 바로의 싸움이 제사드리는 싸움입니다. 말하자면 피흘리는 역사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피흘리는 모든 것이 빼앗길때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백성을 모세가 떠나오게 할때에 첫 번째 싸움이 지금까지 지내지 못했던 제사를 지내게 해 달라는 것이 바로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각 가정에서 양을 잡고 피를 흘리고 유월절 절기를 지킬때에 바로 그날밤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다 쳤습니다. 짐승부터 왕의 장자까지 다 쳐서 왕이 이스라엘백성을 내어보냈습니다. 내보내는 구실이 애굽 왕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임하셨은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사흘길쯤 광야로 가기를 허락하소서 하라 이것이 요구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두려운 문제가 생긴다면 각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피가 말랐습니다. 오직 복음이 말랐습니다. 많은 경우 다른 이야기합니다. 이게 가장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축복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안으로 복음안으로 생명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교회는 오직 복음만, 오직 십자가만 피의 복음만 전하는 교회가 된다면 모든 재앙과 재난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성전에서 제사장이 떠나고 제사가 사라질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재난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로마에 속국될때도 이스라엘에 제사가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로마군사가 점령을 하고 그 후에 이슬람군대가 점령을 하고 지금까지도 제사가 구체적으로 회복이 안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이스라엘백성들이 이해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사를 안지내나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진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제사가 회복되지 못하니까 지금도 재난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통곡의 벽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순례를 하면서 울고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이 땅과 교회에 모든 축복과 은혜가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림을 붙들고 예배드릴 때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구체화되는 예배가 진짜 제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브라함이 축복받을때에도 그렇고 누구든 축복받은 자는 가는 곳곳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피흘린다는 것입니다. 단을 쌓는다는 말은 양과 소를 잡고 피흘리는 것입니다. 단을 쌓는 다는 것은 지금도 소와 양을 잡아서 하는게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그 이름으로 구체적으로 속죄를 받고 죄사함을 받고 모든 재앙과 재난을 이기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피흘림의 축복을 누림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드린다는 것은 피흘린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림을 구체적으로 붙잡고 구속의 은혜를 체험하고 믿고 나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가하면 제사와 피흘림이 사라지면 직장과 생활에서 다락방화하자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은혜인데 제사를 회복하자는 것 입니다.
히4:14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했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 약속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디를 가든지 제사지내고 단을 쌓고 예배드릴때에 구속이 이루어지고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흑암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재앙과 재난의 세력이 물러갑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고함을 지를게 아니라 가는곳마다 말씀붙잡고 그리스도 언약속에 설때에 이루어집니다. 구체적인 행위는 다락방하기도 하고 예배드리기도 하고 가정예배드리기도 하고 가는곳마다 그리스도의 피, 구속의 피, 십자가의 피가 있어야 합니다. 약속,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의 약속이 우리가 가는 곳마다 거기에 머물때에 모든 재앙과 재난이 사라집니다. 재앙과 재난만 사라질뿐 아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예루살렘의 왕성한 때가 예루살렘성전에 불이 꺼지지 않았고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것은 제단에 불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그 불위에 계속해서 양을 잡고 소를 잡아서 피를 흘리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때에 이스라엘백성은 큰 축복과 은혜로 넘치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막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오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은 오래전 구약때부터 메시야, 죽었다가 살아날 것을 예언한 십자가에서 완성하시는 메시야의 역사가 성경을 이루려하심이라. 예언된 말씀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루어짐으로 소와 양을 잡던 것을 이제는 예수그리스도 피로 성전에 나오기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처음다락방에 왔을때에 사실 회개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산기도에 가서 예배드리면 계속해서 울고 불고 하는 것이 예배의 전부였습니다. 산 기도가서 3시간 4시간 죽을지경으로 손들고 못내리게 하고 찬양하고 울었던 것도 회개중심입니다. 그런데 일단 회개를 하고 나면 후련하고 속이 시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락방와서 그런게 없으니까 속이 답답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할 것은 회개가 어디있느냐? 행2:37에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베드로가 회개를 강조했는데 그 회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리고 그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 약속을 붙잡는 것이 회개입니다.
행2:36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붙잡는 것이 회개이고 이 약속을 붙잡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신 일입니다. 우리의 회개가 어디있느냐?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지금까지 다른 길로 사단이 좋아하던 길로 가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가던 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붙잡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감사해서 눈물이 나오기도 하고 너무 억울해서 통곡도 나고 어떤 사람들은 몸에 질병이 떠나가기도 하고, 모슬렘권의 사람들은 두통이 많은데 예수그리스도 영접하고 난 후에 우리말로 기도하고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데 머리가 다 낳았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기도할때에 진노가 떠나가는 겁니다. 재난이 떠나가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나갈때에 성취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속에 현장속에 성취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라. 약속붙잡고 약속위에 설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성취됩니다.
산업선교 메시지속에서는 이 말씀이 가슴속에 임할때에 이 말씀이 임하여 진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붙잡게 될 때에 그 말씀이 성취됩니다. 십일조 붙잡아라. 때가 되었다. 그 말씀붙잡고 구체적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히9:11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염소와 양의 피로도 사람이 제사장이 되어서 머리에 손을 얹고 잡고 피를 뿌려서 죄를 정하게 했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하나님이 그 양과 염소를 대신해서 죽이시면서 단번에 모든 속죄를 이루시고 재난과 재앙의 역사를 막으시고, 개인의 심령속에 평안을 막고 있던 죄악의 역사를 깨끗하게 못하시겠느냐? 누구의 피로? 예수의 피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언약을 잡고 나갈때에 고백하고 나갈때에 양심속에 평안을 없애고 불안하게 만들고 죽음과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사단의 손에 있던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 너무 귀중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교회에 찾아와서 예배드릴때에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이루십니다. 주일날은 숨돌릴 여가 없이 하는데, 계속해서 말씀하는 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그 언약을 우리가 붙잡고 내가 고백합니다. 이 약속위에 섰습니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 계속 훈련을 합니다. 이 정서가 안되고 훈련이 안되니 자꾸 다른짓을 하니까 이걸 계속해서 훈련하는 것입니다.
오늘 광고할때에 이것을 계속하고 나면 한주간 삶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메시지 듣고 집에 가면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가득해야 합니다. 한주간 내가 갈때마다 언약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제사하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가기에 한주간의 모든 삶에 저주와 재난이 없어집니다. 그게 제사의 역사요 예배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다락방하자는 것이 직장과 생활에서 사건과 삶에서 이것을 구체화 하자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약속을 붙잡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때에 진노가 없어졌습니다. 진노가 사라졌습니다. 그걸 붙잡은 우리에게 임할 진노가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대신해서 예수님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강조할때에 자꾸 사단의 역사를 없앤다. 그래서 진노가 사라졌다고 할때에 사단배상설을 자꾸 주장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히9:15에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부르심을 입은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택한 백성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이 약속이 안되면 우리는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죽음과 멸망의 영원한 것으로 갑니다. 그런데 이 사단의 영원한 심판과 재난을 꺾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3:25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전에 지은죄를 간과했다, 우리가 지었다는 그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라 창3장의 아담, 하와의 지은 죄로부터 죄를 짓고 난 후에 아담, 하와에서 선언한 것이 정녕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죄악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조상적부터 진노받아 죽어야 할 것을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고 뭔가 거기에 벌을 주는게 마땅한데 공의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그를 믿는 우리도 의롭다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이라. 진노받아 다 죽어야 하지만 십자가에서 다 해결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의롭게 되시고 우리도 의롭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십자가에서 우리의 진노가 사라졌습니다.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롬3:26에 보면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의로워진 배경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재난과 재앙이 간과되어 다 지나갔습니다. 아담하와때부터 일어난 모든 창3장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우리도 의로워졌습니다. 26절에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에 언약속에 들어올때에 모든 진노까지 다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일 힘드는 부분이 율법적인 복음입니다. 체질이 아직까지 바뀌지 않아서 문제만 생기면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거듭말씀을 드립니다. 이번에 목회대학원에 가니까 류목사님이 중직자신학교,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대구 산업선교에서 계획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은혜잘 받던 집사로 있다가 장로가 되면 말씀을 못 받습니다. 왜 그런지 이상합니다. 그래서 제일 각 교회마다 사각지대가 장로님입니다. 어린아이로부터 청년, 노인들 계속해서 메시지가 나가는데 중직자와 장로를 위한 메시지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덜하지만 일반교회에서는 중직자를 위한 훈련기회가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축복받을 자리가 장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속이 들어가야 하고 언약이 들어가야 하고 말씀이 들어가야 합니다. 장로님들이 말씀이 들어가면 부흥정도가 아니라 터져나갑니다. 그래서 장로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중직자를 위한 신학교와 훈련 합숙을 계획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각지대를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고 때가 되었습니다. 다락방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때가 되었습니다. 벌써 장로님쯤 되면 중직자 되면 완전 체질이 율법적인 체질입니다. 정서가 거의 율법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거의 율법으로 돌아가고 판단부터 먼저 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느끼는 것이 오늘 교인들의 것들을 꼬집어내야 하느냐? 비판적인 입장에서 끄집어 내는 체질, 율법의 체질입니다. 그리스도의 언약을 가지고 언약적인 체질로 인도받기 보다는 율법적인 체질로 나갑니다.
율법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율법은 저주입니다. 갈3:1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실 것을 예언한 것이 메시야 예언입니다. 구약의 이런 예언을 예표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죽으심은 율법적인 저주를 완성하시고 완전히 해결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계속 양의 피를 흘리고 했습니다.
그 메시야적인 죽으심을 말씀하십니다.
또 하나 있는 것은 율법이 뭐냐? 예식법이 율법입니다. 구약을 보시면 전부 율법입니다.
속죄제, 화목제를 어떻게 드리느냐? 이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자체에 대해서 우리가 체질이 되어있는게 아닙니다. 체질이 될래야 될 수 없습니다. 예식법에 체질이 되어있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벌써 다 지나가고 완성되었습니다.
모든 예식법,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가지 예식제도도 전부 예수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한꺼번에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이 언약을 잡고 예배드릴때에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율법은 행위율법을 말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율법체질 이라는 것은 앞의 두개는 다 성취되었고, 행위를 가르켜 말합니다. 뭘 잘했다 못했다 가지고 말씀하는 겁니다.
행위율법이라는 것은 성경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으로 통해서 행위율법도 예수님이 완성했습니다. 롬8:3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신 피언약을 붙잡을때에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율법의 행위조차도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마5:17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패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패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십자가에서 끝낸 것을 성령께서 여러분 개개인에게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하지 못한 모든 행위조차도 성령으로 내가 행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피의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갈때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겁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나도 못해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의롭습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 일을 신학적인 배경에서 상당한 이론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믿을때에 주관적으로 믿을때에 이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했습니다.
얼른 들으면 맞는 것 같이 넘어갈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을 말하기전에 놓치지 말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객관적인 역사를 믿을때에 믿는 그들에게 성령으로 주관적인 체험이 되어야 흔들림이 없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죽으심과 부활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이 참 신으로 오시고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안 믿습니다. 심지어는 동정녀를 부인하고 객관적인 사실이 없이 주관적인 사실만을 붙잡으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체험이 안되니 결국은 흔들립니다. 그래서 느낌과 감정에 흔들립니다.
예수님이 재앙과 저주와 죽음에서 사셨습니다. 그 사실을 붙잡았습니다. 이 언약을 잡고 나가는 곳마다 약속이 성취됩니다. 제사드립니다. 예배드립니다. 성령으로 그 약속을 붙잡았기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 사실을 확실히 붙잡고 성령의 역사를 알게 될 때에 사건과 때와 시간을 따라서 성령께서 택한자를 부르시고 약속한 그 자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그 언약을 붙잡고 나갈때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주시고 어느장소든지 놓치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붙잡고 절대로 축복의 때가 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역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기 때문에 그 약속을 잡은 자에게 성령이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와함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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