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참 제자와 섞인 제자
2007-08-05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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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할렐루야!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3주 연속해서 제목이 같은데 같은 제목으로 안 하려 했습니다. 형수님이 돌아가셔서 하관까지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문상해주신 분들과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3주 연속해서 제목이 같습니다. 오늘 참 제자와 섞인 제자, 교리에서 중요한 복음 설명과 섞인 복음을 말해야겠다 싶어서 시리즈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서울에 오가느라 너무 바빠서 사실 그동안 교회에 설교제목을 줄 시간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기도의 배경으로 건강하게 강단에 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주에도 선교대회로 서울에 올라가야 합니다. 다락방에 큰 대회가 있다면 렘넌트대회 하고 선교대회가 있습니다. 타 교단에서 할 수 없는 큰 대회를 치루고 있습니다. 교인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특히 선교대회는 세계에 흩어진 선교사들을 초청해서 대회를 합니다. 그냥 대회로 끝나는 게 아니고 지금도 합숙훈련을 하고 전도캠프도 합니다. 대구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여기까지 선교사님이 배당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를 봐야 기도도 하지 않겠냐며 조금 불평도 해놓고 왔습니다. 이런 큰 대회를 대구나 지방에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솔직히 선교대회 때는 가정, 가정이 한 사람씩 선교사를 파송하고 돕는 일에 헌금도 많이 내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교회적으로만 하고 각 가정에서 선교사들이 파송이 될 수 없으니까 잘 모릅니다. 서울 전역에 흩어져서 선교사님들이 구체적으로 캠프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작년 같은 경우에는 많은 서울 사람들이 영접하는 기적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참 제자가 어떤 제자냐? 참 제자가 아니면 섞인 제자입니다. 지난 2주 말씀을 바탕에 두고 들어야 하겠습니다. 마5:1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예수님이 참 제자를 골라내시고 섞인 제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따라와도 무리로 끝나는 사람을 갈라놓으셨다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참 제자고 어떤 사람이 제자 같아도 섞인 제자입니까? 어떤 면에서 여러분도 복음 안에서 ‘내가 참 제자로 서 있느냐? 아니면 비슷한 사람으로 서 있느냐?’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참 제자는 수가 적었습니다. 참 제자가 아니면 섞인 제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나 가짜일 수 있고, 열심일 수 있으나 복음과 자기 욕심을 섞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진짜가 아니면 다 섞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으며, 어느 시기에 가면 가짜를 다 걸러낸다고 합니다. 정말 하나교회에 오신 여러분은 하나님이 선택할 때에 가짜로 판명되지 말고 진짜로 서야하겠습니다. 이것이 복음에 선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무리로 전락하고 어떤 사람들이 진짜인 것 같으나 가짜로 떨어지느냐?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일에 봉사를 하되 생명 걸고 하는지의 여부입니다. 자기 유익에 맞으면 하고 아니면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주일학교 기관들이) 여름 수양회를 시원한 교회에서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교회 밖으로 나가서 땡볕에서 식사 준비를 하곤 했습니다. 학생들을 위해서 봉사하고 준비하는 일이 너무도 수월합니다. 참으로 복입니다. 이런 봉사를 할 때도 참 생명을 걸고 하십시오. 봉사도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컷 하면서도 비슷한 제자, 비슷한 봉사로 끝나고 맙니다. 교회 생활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봉사를 하면서 다른 말을 하게 됩니다. 참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이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가짜로 살면서 참 제자처럼 보이고 있는 경우 어떻게 판단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생각과 마음의 말이 육신을 따르는 자로 서게 됩니다. 아무리 비슷하게 보여도 그 속에서도 육신을 따릅니다. 참으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이의령씨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손자가 불치병인 다리가 나았습니다. 그 영향도 많겠습니다만 그 사람이 ‘깊이 문학을 하면서 외로워질수록 다른 것으로는 해결방법이 없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외로움 속에 설 때에 전능자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우리 손자, 손녀의 불치병인 다리를 낫게 하였으니 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은 게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모릅니다. 육신의 기적을 보고 온 것이 아니고 진정 자기의 사상 속에 너무도 고독해져서 다른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시점까지 왔을 때에 전능자 하나님을 만났기에 그것이 진짜입니다.
교회 안에 기적을 체험했으니까 예수를 믿었다는 이가 많습니다. 어떤 것을 체험했느냐에 따라 거기에 기준해서 신앙생활 하게 됩니다. 특히 지금 계속해서 듣고 있는 것이 교회에 와서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체험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평생 나의 신앙생활의 판단기준이 됩니다. 성경이 물론 신비입니다만 그런 기적부터 체험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무엇인지 먼저 체험할 때에 참 복음의 맛을 깨닫고 힘을 얻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경우 불치병이 나은 것으로 신앙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일꾼으로 세우지 않고 항상 무리로 구분해서 내어보냈습니다.
그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서 따라다닌 사람이 많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죽은 자를 살렸던 기적 등을 보고 감동을 받아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그저 복음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비슷한 것을 보고 그저 비슷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무리로 구분해서 항상 중요한 시간에는 다 내어보냈습니다. 수준이 그 정도 이상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마8:3에도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등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도 있습니다. 기적을 많이 행하시며 복음으로 끌어들이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체험한 자들과 그냥 본 자들이 또 다릅니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예수께서 직접 선택하셔서 제자로 삼으신 자들이 또 다릅니다. 그런데 아무리 제자로 세워졌다 하지만 이 제자로서 그냥 세워진 자들로는 결국 교회 생활에 실패했음을 성경이 증거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참복음의 맛을 보지 못하고 참 복음의 사실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복음 있다고 했으나 교회 속에서 교회를 실패하게 만들었던 것도 잘 압니다. 우리가 겪은 것처럼 율법주의, 신비주의, 섞인 복음 속으로 빠집니다.
지난번에 율법주의는 설명을 했습니다. 잘 아셔야 합니다. 제일 많이 빠집니다. 우리가 율법주의를 해서 한다면 덜 억울한데, 우리가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유교의 율법, 가문의 율법 등에 빠져 그것으로 신앙의 잣대를 삼는 것이 참 많습니다. 진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 복음을 깨닫는 배경이 되곤 합니다. 진짜 율법은 예수님을 알게 하는, 예수님을 예언하는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입니다. 그러니까 양과 소를 잡아서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교회에서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그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 해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5:17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전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고백하는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 모시는 순간에 율법을 다 지킨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원래 성전에 올 때 양을 몰고 와야 합니다. 양을 죽여 피를 흘리고 그 피를 내게 뿌리거나 찍는 것으로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 오셔서 피 흘리심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양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영접함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율법을 배경으로 율법 지키는 자의 수준을 말씀합니다. 도덕적 수준을 말씀했습니다. 제사 드릴 때 물두멍을 통해 손과 발을 씻고 들어갑니다. 어떤 종교냐에 따라 깨끗한지의 여부가 결정됩니다.
힌두교 같은 경우는 지금도 수저가 없습니다. 카레를 내어놓으면 손으로 먹습니다. 유대인들은 물이 귀하기도 해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을 참 많이 씁니다. 물이 참 풍족합니다. 지옥에서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통해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을 찍어 혀에 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옥이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곳이면 천국입니다.
이렇게 율법주의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진짜 복음이 없으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백성 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리를 말한 것이 도덕적 율법입니다. 성경에서는 결혼, 친구, 주일 성수 등에 관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의 도덕수준입니다.
그 다음에 복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복음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 된 사람에게도 하나님 자녀 된 사람의 도덕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한 마디로 그것이 사랑이라 하였습니다. 그 사랑은 전도와 선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도, 선교 안하면 아무리 사랑해도 가짜입니다. 아무리 원수로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전도해야 되겠다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만날 때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어려우면 자기도 모르게 도와줍니다. 이런 데서 구제가 진짜로 나오는 것이지 가진 자가 교만하게 베푸는 것이 구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습니다. 그 말씀의 배경이 이런 것입니다. 진짜 전도하고 선교하려 할 때는 구제도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사랑이라 말씀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 계명이 사랑입니다. 이웃에게 친절히 하고 웃고 깜짝 놀라게 희색을 발한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그를 향해 전도와 선교의 마음을 가져야 사랑입니다. 새 신자들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를 향해 복음 전해야 하겠다는 데서 사랑이 나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복음 받은 자들의 도덕적 기준이 사랑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육신적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참 복음이 이해가 안 되는 동안에는 육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헌신과 봉사도 여기에 다 떨어집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저절로 내 중심에서부터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오히려 피곤해지면 더 불평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은 못하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저께 형수님 마지막 하관예배를 마치고 흙을 덮는 순서가 있는데 다른 교인들도 있고 해서 제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말을 못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가 한참 방황할 때 제가 성질이 못돼서 그런지 형님과 형수님에게 당신이 내가 해준 게 뭐냐며 바락바락 악을 쓰며 덤볐습니다. 형님이 참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밖에 나가시더니 우셨습니다. 형수님도 마루에 앉으셔서 통곡하시며 제 손을 잡고 "제가 어머니로서의 사랑은 못 주었으나 형수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내 가슴에 강하게 부딪쳤습니다. 맞다 싶었습니다. 조카들은 사랑하면서 왜 나한테는 어머니의 사랑을 못 주냐 하는 마음이 제게 있었던 겁니다. 그 이후에 제가 신학교를 가고 형님 부부를 부모처럼 모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동생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미신적인 부분도 있고 해서 우리 교회도 영구차가 들렀다가 갔으면 하는 말을 하지는 못했으나 솔직한 제심정은 그리 했으면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형님이 공장을 지으실 때에 제게 의논한 것이 조카들에게 교회를 설계해서 지어 달라 하시며 거기를 담당해서 평생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 고했습니다. 지을 때에 교회를 설계해 지었는데 형님이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좋아하셨습니다. 훈련은 안 따라다니셨지만 제가 주는 메시지를 받아서 계속 다락방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오늘에서야 뒤돌아보면, 그 동안 한 번도 공장에 어려움이 없이 지금까지 계속 성장해왔는데, 전도를 잘 하든지 못하든지 복음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공장 시작했는데 계속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형님은 복음적이기 보다 오히려 율법적인 것을 알고 훈련을 잘 받지 않은 것도 아는데 그 분이 살아계신 동안 공장에 어려움이 하나도 없었고, 자녀들이 거의 중직자, 장로의 자리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증손자까지 다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가문에 더러 예수 안 믿는 놈들이 있어서 애를 먹이는 경우가 있는데 어찌 된 것이 이 집은 증손자까지 다 교회를 잘 다닙니다. 후손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외국의 명문 대학에도 입학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생각만 해도 그 가문과 가정에 하나님은 절대적인 축복을 주시는구나! 실제로 현장에 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게는 마음만 먹어도 얼마든지 축복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공장에 계신 분들은 사장의 역할로 끝나지 말고 그 공장에 있는 분들에게 정말 복음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이런 놀라운 역사를 가정을 통해 너무 확실히 봅니다.
저희 가정 이야기를 좀 더 하려 합니다. 어머니에게서 전도를 받고 돌아가실 때까지 저희 가정부터 기도하셨던 어느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 자녀들이 권사님이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얼마 후에 가정, 가정이 어려워지는 겁니다. 정말 살아가기 힘들 정도로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적인 병으로 하나님이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은 한 두 가정은 처음에는 버린바 된 것 같았으나 그 가정들만 전부 형통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가문을 보면서 복음 갖고 사는 게 이렇게 축복이구나 느낍니다. 복음이 없으면 한 대가 안 넘어갑니다. 전부 멸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받고 전도․선교에 설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합니다. 하나교회가 복음 갖고 있고 전도․선교에 눈 뜰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복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형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우리 권사님이 가셔서 복음을 구체적으로 전했다 합니다. 제가 돌아가실 때는 집에 있지를 못해서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다락방에 오가는 질녀가 밤마다 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극성스럽게 전했다 합니다. 결국 돌아가실 때에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시고 내가 지금 천국 가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확신 가지고 가셨습니다. 산 자의 행복이 어디서 위로 받습니까? 만약 복음 확실히 고백하지 못하고 가셨다면 우리에게 슬픔이 있습니다. 같은 형제들이라도 그 복음을 계속 말하고 했던 딸들은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고 간 것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찬송하고 울며 감격했습니다. 부모자식간의 행복한 관계는 확실하게 복음 가지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냥 죽음이 아닙니다. 가문의 흑암이 무너지는 축복 이상의 축복이 없더라고요. 하관예배까지 드리면서 조금씩 울었지만 별로 울음소리가 안 났습니다. 참 은혜로운 시간이었다고 고백이 됩니다. 정말 행복은 영혼 구원 받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정말 불행은 영혼 구원 못 받은 조상을 보내는 것이며, 두고두고 살아가며 후회요 불행입니다.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동안에 내 가까운 사람일수록 복음 전하고 확신 갖고 세워놓는 일보다 중요한 게 없음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옛날의 고마움이 복음 가지고 갔기에 더욱 새롭지, 만약 복음이 없이 그랬다면 다 소용없습니다. 막판에 가서 완전히 허물어지는데, 복음 가지고 복음으로 통해 하나님께 기쁘게 가실 때에 내게 향한 과거의 모든 일에 다시 감사가 나왔습니다.
참 제자, 다른 것 아닙니다. 참 구원이 되고 참 해방이 되고 참 능력을 소유한 자여야 참 제자입니다. 그래야 참 전도와 선교의 제자로 설 수 있습니다. 다른 것 하려고 애 쓰지 마십시오. 여기에 구원과 해방과 능력이 소유된다면 누리면 됩니다. 기도로 축복을 누리면 됩니다. 누리면 저절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 다른 것 아닙니다. 누리면 됩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여! 하나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복음 없이 시작한 모든 것은 다 허무요 실패일 뿐이나 복음 통해 시작한 모든 일이나 사건은 승리에 승리를 더할 수밖에 없는 축복의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사오니 확실하게 누리고, 감사함으로 선전하고 승리하는 축복의 제자들로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1. 참 제자는?
1) 예수님은 참 제자와 무리를 구분하셨습니다(마5:1).
① 참 제자는 수가 적습니다.
② 참 제자는 봉사를 하되 생명을 겁니다.
2) 참 제자가 아니면 가짜입니다.
① 참 제자가 아니면 (동기, 욕심이) 섞인 제자입니다.
② 가짜는 생각과 마음의 말이 육신을 따릅니다.
③ 예수님을 따르나 가짜이거나 열심히 하나 자기 동기를 섞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3) 참 복음을 체험하는 자입니다.
①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따라 다닌 자들을 일꾼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② 참 복음의 사실을 체험하지 못한 교인들은 교회를 실패케 합니다.


2. 참 제자와 전도․선교
1) 전도․선교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해도 가짜입니다.
① 하나님 자녀 된 사람의 도덕을 바울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② 전도와 선교의 마음 가져야 사랑입니다.
2) 복음 전하려는 마음만 먹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3) 복음 가진 자로서 전도와 선교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4) 가까운 사람일수록 살아있는 동안 복음 전하십시오.



결론: 참 제자는 참 구원, 참 해방, 참 능력을 소유한 자로서, 참 전도․선교하는 자입니다.
전도와 선교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냥 누리면 됩니다. 기도로 축복을 누리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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