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하늘에는 평화요
2008-06-01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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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계획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느냐? 우리 삶이 승리이냐? 패배냐 결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 속에 서 있느냐? 어렵다 그렇지 않다 상관없이 그 곳에 성취가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겉으로 보기에 일반적으로 보기에 쉽게 세워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실무진들에게 물어보시면 쉬운 것이 아니라 죽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안 되었느냐? 확실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제가 병상에 있을 때, 장로님, 집사님들이 그리고 온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 계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무조건 이 일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하나님의 계획 위에 선 교인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그곳에서 당신의 뜻을 계획하셨고 만족하게 이루신다” 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담당자는 좀 힘들었다 하더라고요. 하나교회를 건축하면서, 외부에서 볼 때는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교인들은 달달 볶아서 헌금해야 하는 그런 시간에도 지금까지 마지막에 헌금한다고 여전히 안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느냐? 교회가 어렵다 할 때, 가장 문제되는 것이 돈 문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돈 문제로 신경 안 쓰다 하는 그런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뤄졌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핵심집회 때 보면, 우리 교인들이 잘 안 나와요. 이런 큰 교회를 지어놓았는데도 잘 안 옵니다. 서울 같은 경우에는 장소가 없어서 2시간 전부터 자리싸움하는데, 우리 대구에는 시작하고도 보통 한 시간 까지는 늦게 옵니다. 사람 들어오는 것을 앞에서 보면, 30분 넘어서 오는 사람이 아주 많다하면 지나친 표현일 테고, 조금 많습니다. 그러나 서울 경우는 두 시간 전에 다 찹니다. 류 목사님께서 이것이 불만인가 봐요. 대구는 두 시간이나 지나도 자리가 얼마든지 있으니 일찍 올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느적느적 옵니다. 강사단 메시지 마치면, 메시지 들으러 당장 본당으로 올라와야 하는데 그때까지도 먹고 마시는 “쉼터” 에서 와글와글 하더라고요. 서울의 경우와 다르게 “저 사람들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싶지 않겠습니까? 대구 목사님들과 핵심 위원들에게 “대구 사람들 뭐하는 사람들이냐?” 라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제 시간에 본당으로 올라오도록 만들어 봐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쉼터를 폐쇄했습니다. 류 목사님 눈에는 늦게 올라오는 사람들이 말씀 들으려는 의지가 안 보이는 듯해서 특단적 조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 시간에 말씀을 다 듣는 자리에 있게 되면 그 특단 조치를 해지 하겠지만, 지금 봐서는 조금 있어야 되겠다 싶습니다.
오늘 말씀 받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 중에, 지금도 들어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30분까지는 제법 많이 들어와요. 제 시간에 온다는 것은 하나님과 약속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여러분 스스로가 어겼다 했을 때는, 말씀(약속)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응답 안 하셔도 하나님은 책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이 참 중요합니다. “축복 받는다” 보다도 응당히 시간 지키는 것은 축복 받는데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제 시간에 예배드리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닙니다.
제 시간에 맞추어 교회 와서 예배 전에 말씀 보고 예배 준비해야 언약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께 나왔다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을 11시에 약속 해놓고 30분쯤 뒤에 온다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도 30분 늦으면 화가 납니다. 연인관계 있는 사람들에게는 30분이 뭡니까? 10분만 지나도 늦었다며 미안하다고 온갖 아양을 다 떠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떤 사람은 미안한 마음이 있는 거 같은데, 어떤 사람은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어요. 제가 누가 누구 늦게 오고하는 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최소한 제가 아는 사람은 다 알아 맞힐 수 있습니다. 11시에 지키고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다 압니다.
여러분, 1주일에 한 번입니다. 그것도 축복 주시고자 하고 축복받는 그 시간이 11시입니다. 옛날에 복음 아니었을 때도, 그 11시를 얼마나 엄격히 여겼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복음 복음 하면서 하나님과의 약속시간인 11시가 아무것도 아니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잔소리로 듣지 마시고, 우리가 살고 죽느냐는 이 시간에 달려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을 어기고 30분 늦게 들어온다면 벌써 예배는 첫 시간부터 실패입니다.
록펠러가 예배시간에 헌금 많이 하는데서 복을 많이 받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40분 전에는 교회에 도착했었습니다. 그에게 기도한 대로 응답하셨습니다. 전 세계를 살리는 축복과 경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교회에 헌금에 축복하시고 선교 사업에 축복 받고 기도한다면 우리 태도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가장 축복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과 약속이귀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다음 주에도 11시 20분 되어서 오는 사람은 교역자들은 명심하세요. 앞자리에는 절대 못 오고 뒤에도 자리 없으면 문밖에 내보내십시오. 그렇게 해도 되느냐? 괜찮습니다. 축복 받게 하려고 교역자들 세우고 말씀 주시고 세웠습니다. 괜히 축복도 못 받으면서 교회 안에서 어슬렁어슬렁하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돌팔이 됩니다. 돌팔이 신앙으로는 축복 받을 수 없습니다. 조금만 마음 바꾸면 됩니다. 저번에 한번 말씀을 드렸는데, 이번에 또 했습니다. 다음 세 번째 하고 난 이후에는 정말 잠글 것입니다. 예배 왔지만 늦게 왔다는 것을 참석 못했다면 자기 책임입니다. 거기에 화가 나서 교회 안 나온다 해도 자기책임입니다. 진짜 생각한번 더 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붙잡는 자, 말씀 위에 서 있는 자가 응답 받는다 했습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그런 배경에서 제목을 잡았습니다.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이 이뤄 가신 내용은, 거의 말씀위에서 행하셨고 그 말씀이 성취되어서 예수님의 길은 모두 성취된 길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19:45에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곳에 하나님의 응답이 따라왔고 그 응답이 왔을 때에 그 응답 위에 세워진 사람이나 사건은 절대 인간이 망하게 할 수 없고 실패시킬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절대적으로 성취되지 말씀이 성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안 이뤄지면, 하나님과의 약속부터 어기고 있는데, 어떻게 말씀의 성취를 볼 수 있습니까? 조금만 우리 태도와 자세가 달라져도 신앙생활 하는 삶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응답받기 때문이고 말씀의 성취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성취의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고 약속된 대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우리 삶에 있어서 말씀 성취가 있게 되면 감탄이 나오게 됩니다. 감탄이 나오게 되면, 그 다음은 말씀 성취의 맛을 알기 때문에 절대 늦게 오라 해도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꼭 부탁입니다. 어떤 면에서 목회자가 드리는 큰 부탁입니다. 목회자가 언약을 분명히 잡기는 잡았는데, 말씀과 상관없이 성취된 말씀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잡았다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가장 실제적인 응답을 못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시간을 보내시면서 가장 긴박한 순간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도록 말씀 위에 서셨습니다. 마지막 말씀을 하나도 남김없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사정없이 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마지막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성정을 사정없이 청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성전을 청소하시는 예수님을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싫어했지만, 아무도 예수님께 전혀 손을 대지 못했었습니다. 성전 청소가 마칠 때까지 보고만 있었습니다. 왜?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에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그 사실을 보는 다른 유대인들이 볼 때, 예수님이 말씀 성취 중앙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는 대로 다른 사람이 볼 때에 권위와 능력이 다 나타나고 아무도 예수님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했습니다.
여러분, 류 목사님을 통해 늘 듣는 이야기입니다.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놀아줄 때는, “그 사람 좋다” 라고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저 인간 예수 믿는다는 인간이 저렇게 밖에 못하냐?” 하면서 속으로 욕하고 판단한다 했습니다.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응답 속에, 말씀 성취 속에 서 있으면 아무도 무시 못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말은 성취가 되고 그의 기도는 응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없는 교인이 되지 마시고, 하나교회 교인이라 하면 “정말 교인이다” 라고 불신자들이 생각할 정도로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집사라 해도 인간 취급을 안 한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말씀 성취에 중앙에 서 있다면, 하나님이 여러분 삶과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두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마26:53에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제자들이 큰 소리를 치고 하더니, 예수님이 잡히니 다 도망갔습니다. 그것조차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나중에 보면, 베드로가 세 번 저주를 하면서 예수를 모른다 해놓고 닭 울 때 회개한 것도 선지자의 글에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계획된 일을 하시는 예수님은 절대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 모든 순간순간이 하나님의 계획된 역사였습니다. 실패하는 것 같이 인간에게는 보여 졌을지도 모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영원한 메시야요, 그리스도의 일을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기독교인이 잘살고 못 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이 칭찬 받는다 안 받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말이 권위가 있고, 여러분의 말이 예수 믿는 자의 말처럼 권위가 있기 위해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말씀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성취시켜졌던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의 우연한 한 마디였지만, 그 말씀은 다 성취될 것이고 응답될 것이며 모든 믿는 자의 권위는 저절로 나옵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권위가 어디에 나옵니까? 사무엘의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교회 교인들이 그들과 교회가 한 말이 헛되지 않고 성취된다면 달라집니다. 여러분 개인 스스로가 달라집니다.
하나교회 성도들이 하도 늦게 교회 와서 문까지 잠갔더라는 이상한 소문이 안 나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이 복 받게 하기 위해 어떤 면에서 기를 쓰고 못된 말도 할 것입니다. 태도만 달라지면 된다 안 된다 문제가 아니라 권위는 저절로 생깁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편에 서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왜 거창하게 메시지 서론을 길게 했느냐?
중요한 것은, 렘넌트들이 굉장한 요구를 했어요. 쟤들이 어떻게 이런 요구를 했는가 싶을 정도로 굉장한 요구를 했습니다. 정신치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집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른들은 창피해서라도 질문하지 않는 내용입니다. 엉뚱한 질문이나 한 번씩 할까 자기중심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렘넌트들은 자기중심에 있는 질문을 합니다. 여기에 성실히 대답하는 과정에서 류 목사님이 렘넌트의 정신치유문제에 대해 답변하셨는데, 렘넌트보다 어린들이 더 많습니다. 렘넌트는 속에 집어놓고 아무 말 안하는 어른들과 다릅니다. 솔직하게 표현합니다. 그 표현이 뭐냐 하면, 치유를 한다 했을 때, 뭔가 어른들은 치유를 받는 사람에게 능력이 나와서 내가 치유 받는 동안에 정상적인 치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정신치유는 능력이 나와서 치유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락방에서의 정상적인 치유는 치유하는 사람에게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치유 받을 자가 정상적으로 말씀을 받아서 말씀이 이해되고 그 말씀 안에 나를 세워둘 때에, 비로소 치유라는 것이 그 개인에게 성취됩니다. 안 그러면 아무리 힘 있는 다락방 하는 사람이라도, 모두 헛일입니다. 혹시, 잠깐 될지는 몰라도 그런 치유는 다락방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저절로 정상적으로 메시지가 내 마음과 심령에 자리 잡을 때 조용히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심에 자리 잡게 될 수 있는 배경이 뭐냐? 말씀이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아무리 정신적인 어떤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내 삶과 내 주변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고 치유된다 해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정신치유는 정상적인 말씀치유요, 그 말씀이 계속해서 내 안에 자리 잡을 때에 에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정신치유는 렘넌트와 일반 직분자들 까지 문제입니다. 뭐냐 하면, 예상 밖의 어떤 믿음으로 말씀이 자리를 잡아 버리면 괜찮은데, 어린 렘넌트들에게는 쉽지 않습니다. 부모도 자리를 못 잡았고 저희들도 자리를 못 잡았고 하니 메시지에 대한 자리를 못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어려운 과정에 있습니다. 유·초등부 교사들과 인도자들 그리고 어린 사랑부 같은 경우를 보면, 환상이 보이고 이상한 것이 보이고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보라 해보면 손을 제법 많이 든다 안 든다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교회는 거의 대부분입니다. 애들만 그렇냐? 예수 믿는 부모들도 말씀이 정상이 되지 않으면 그 마음속에 정상적인 바탕과 자리를 잡지 않으면 어른들은 오히려 더 합니다. 무속이 심한 사람들은 더 합니다.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정신문제에 있어서 초기 메시지와 핵심 메시지로 옛날에 강의했던 기억이 있는데, 예수를 믿고 영접은 했는데도 이상한 환상과 환청이 들리는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말씀위에 서지 않으면 의심이 들어옵니다. 영접했고 구원받았다고 고백도 하지만, 많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지기수로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특별히, 무속에 있다가 돌아 온 사람들이 어렵습니다. 무속에 30~40년 무속체질이 되어 있다가 체질을 고치기 전에 그리스도로 영접하면서 흑암세력이 떠났습니다. 그러나 잘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흑암세력이 떠났다고 해서 절대 안 들어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 체질이 30~40년간 무속의 흑암세력 즉 복잡한 영적세계가 내 체질 상 마음대로 들어왔다가 나갔다 합니다. 또, 지금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예수를 믿어도 어른 되었을 때, 영접하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체질상 사단이 놀기 좋아하는 체질입니다. 옛 체질은 곧 사단이 좋아하는 운동장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나 자신의 체질이라는 운동장에서 마음대로 놀다가 필요하면 내 맘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등, 흑암의 역사가 우리 체질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지배하고 있는 순간에는 마음대로 운동장에 뛰어 놀다가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사단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절대 안들어 온다고 들었는데, 체질이 아직 안 바뀌어서 흑암의 세력이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갔다 마음대로 합니다. 환청이 보이고 환상이 보이고 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라 영접했다고 하나 정말 구원받은 자 맞는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헷갈립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도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막3:13~14에 보면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부분을 초기 메시지에서는 상당히 강조했습니다. 요즘은 알아들은 것 같아서 강조를 안했는데, 저의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은 강조를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성취될 말씀을 놓쳤다면 다 놓친 것입니다. 교인들이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성공이란 것은 말씀 붙잡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붙잡는데 성공해야합니다. 말씀 사모하지 않고 다른 짓한다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먼저 중요히 여기는 것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원하셔서 부르셨습니다.
두 번째 이유로는, 부르셨다는 말 속에 부르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함께 있게 하시고 불러놓고 내동댕이치지 않으시고 함께 있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이며 임마누엘이라 합니다. 불러놓고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함께 있기 원하시는 이것이 곧 임마누엘입니다. 이 사실을 구원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왔다면 여기에는 엄청난 배경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예수님이 절대로 멀리 떠나있지 않으시고 함께 있겠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교리 중에 교리요, 더군다나 말씀 중에 말씀입니다. 임마누엘이 여기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과 확증은 가지고 있으나, 함께 있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여러분과 저와 함께 있습니다. 함께 있다면 다 해결 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이 모든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임마누엘 하면서도 함께 있는지 모르고 안 믿어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함께 있게 하시고”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나와 임마누엘 하시고” 아멘이 저절로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권세가 따라 옵니다. 그래서 권세가 따로 오는 내용 중에 14절 보면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하셨습니다. 귀신을 권능을 주신다 했습니다. 다 외워야 합니다. 막3:14-15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음 주까지는 외워서 이 구절만 합독을 해야 하겠습니다. 너무 중요한 말씀인데도 실제로 안 믿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여기에 “귀신을 내어 쫓는 권능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가 옛날 개역한글 번역인데, 새로 번역한 개역개정 성경은 잘 번역한다고 했는데, 이것 보다도 “권능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 는 옛날 번역이 더 잘된 번역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임마누엘 이 성취되면 따라서 오는 것이 바로 권능입니다. “권능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저절로 따라 오는 것이 권능도 내게 있게 하신다 했습니다. 기본입니다. “권능을 가지게 하려 함이라” 는 번역은 권능을 가질 수도 있고 못 가질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지만 “권능을 있게 하려 함이라” 는 것이 기본입니다.
여러분의 환상과 환청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믿어 졌습니까? 할렐루야! 그렇다면 따라서 권능도 있습니다.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임마누엘의 축복으로 섰다면 반드시 권능도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여기에 중요하게 더 짚어볼 것은, 환청이 들려도 권능은 있습니다. 만약, 임마누엘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여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도의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될까 싶어서 환청보다 더 강한 역사 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환청이 들려도, 이상한 환상이 보여도 다 괜찮습니다. 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말씀 성취 속에 서면됩니다.
말씀성취는 간단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개 권능을 주셔서 어떤 상황에 앉아 있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에 하룻밤 자면 권능이 빼앗기는 줄 생각하는데, 절에 이틀 잠을 자도 괜찮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이미 약속한대로, “네게 권능을 있게 해 주셨다” 하신 말씀처럼 권능을 이미 주셨기 때문입니다. 진짜입니까? 그러니까 어떤 상황도 상관없습니다. “권능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 가진다 안 가진다 상관없습니다. 벌써, 임마누엘 역사가 나에게 일어났다면, 나와 여러분에게 이미 악령을 물리치는 악령의 역사 속에 아무런 상관없이 그 중요한 권능을 내게 예수님께서 이미 있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다 끝난 것 아닙니까? 쓸데없이 의심하지 말고 오늘, 이 말씀에 확실히 서십시오. 마음이 흔들린다, 두렵다 의심이 된다 한 것을 다 버리십시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권능도 있게 하려 하십니다. 배경이 이런 배경입니다. 쓸데없는 의심·염려·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의심이 들려하면 그때는 믿음으로 “흑암세력 물러갈 지어다!” 기도 한번 하면 됩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면에서 렘넌트들이 문제가 아니라, 부모가 이 부분이 안 되니 렘넌트가 부모 때문에 교회에는 와 있지만, 진짜 자기 나름대로 말씀 성취의 감격에 대해서 감격보다는 부모의 강제와 눈 부라리는 것이 무서와 교회에 어쩔수 없이 나올 수 있습니다. 먼저, 성도들이 부모로서 말씀 성취의 자리에 서십시오. 그러면 자녀들도 따라옵니다. 자녀들은, 억지로 끌려오는 자녀들이 되지 마시고 확실히 말씀성취 하는 이 자리에 든든하게 서십시오. 이러면 저절로 이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여러분에게는 예수님이 약속하신대로 여러분과 저 그리고 어떤 렘넌트들도 근본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 능력을 나와 함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본적 배경입니다. 여러분이 없다, 안 된다가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원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세워집니다. 그때부터 말씀 성취 속에 있게 됩니다. 그 배경이 뭐냐? 말씀 속에서 세워져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흔들어 무너트리려 하는 것을 흑암의 세력을 구체적으로 그 능력과 역사를 나와 함께 있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환청 들려도 괜찮고 의심이 나서 몸이 떨려도 괜찮습니다. 중이 옆에 잠을 자도 괜찮습니다. 내일 죽음이 온다 해도 베드로는 얼마나 편안히 잠을 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축복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왜? 말씀 성취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여, 승리의 역사가 함께 있고 또, 하나님이 그 말씀 속에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역사가 오늘도 나와 우리 자녀들에게 성취되어 이루실줄 믿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말씀의 응답이 구체적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승리와 패배가 결정됩니다.

1. 말씀 위에 서 있는 자가 응답받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곳에 응답이 따라옵니다(45-48절).
① 그 응답 위에 세워진 사람이나 사건은 절대로 인간이 망하게 하거나 실패시킬 수 없음
② 말씀은 절대적으로 성취됨
③ 말씀 성취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언약 성취임
2) 말씀 성취의 중앙에 서 있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말을 권위 있게 만드십니다(마26:53-55).
① 제자들이 도망한 것과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도 말씀성취임
②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말씀성취임
③ 여러분의 말이 권위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씀위에 서야 함

2. 정신 치유의 중요한 핵심: 말씀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1) 정신문제는 정상적인 말씀에 의해 치유됩니다.
① 치유하는 사람에게서 능력이 나오는 게 아님
② 정상적인 치유는 치유 받을 자에게 말씀이 자리 잡아야 함
2) 말씀이 자리 잡아야 체질도 바뀝니다.
① 옛날 체질(특히 무속체질)이 바뀌기 전에는 체질이 흑암 역사의 지배를 받음
② 그렇게 되면 예수를 그리스도라 영접하고서도 구원의 확신이 흔들림

3.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막3:13-15).
1) 예수님께서 원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막3:13).
2)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냥 두지 않고 함께 있으십니다(막3:14. 임마누엘이 곧 구원).
3) 귀신을 내쫓는 권능이 있게 하십니다(막3:15).
① 구원 받은 사람에게 따라오는 권세임
② 귀신, 환상이 보이고 환청이 들려도 상관없이 권능이 주어졌음
4) 부모가 말씀 성취의 자리에 서시면 자녀들도 저절로 따라옵니다.

결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원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세워집니다. 말씀 성취 속에 있게 됩니다. 환청이 들려도 괜찮고 의심이 나서 몸이 떨려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말씀 성취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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