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2013-06-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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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9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마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마28:18~20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약속을 붙잡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한 날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 약속 붙잡고 주님과 동행하는 최고의 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한 번 더 하십시다.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이십니다. 할렐루야! 예, 감사합니다.

오늘 제목을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최고의 약속이 있다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원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말씀하시면서, 왜 부르셨느냐,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말씀하셨고요, 또 마가복음 16장, 마지막 장이죠, 15절~20절에 보면, 특히 2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에도, 마지막에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분들은 ‘함께 하시겠다’라는 것입니다. 이게 제자들을 부르셔서 말씀하신 부분들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단순한 격려의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리로, 지식적으로, 형식적으로 끝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모르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응답받는 그런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 그게 바로 우리 성도들의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능력 있는 성도들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주시사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박음으로 말미암아 다 담당하신 것이죠.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망의 권세, 죽음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하신 말씀처럼, 마지막 20절에 하신 말씀처럼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비밀을 누리는 그런 신앙 생활의 삶이 되어져야 참된 성도의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사도행전 1장 4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죠. 말세에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 주시되 남녀 종들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연약했던 제자들은 이 하나님의, 예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붙잡고 전혀 기도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행전 1장 14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성령의 역사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 되었는데 그 전까지는 연약하고 무능한 존재였던 제자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맛보고 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함께 하시는 역사를 체험하고 나서, 그때부터 모든 제자들의 생애가 완전히 달라진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날 연약하고 무능했던 인생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그런 제자들로, 능력 있는 제자들로 바뀐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응답을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응답을 우리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하면 누릴 수 있는가? 저와 여러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복음을 알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짜 이름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실제로 삶의 현장 속에서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이, 응답받는 성도의 삶이 되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응답 있는,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이 되어질 것인가?

1. 각인된 것을 바꾸라.
먼저 첫 번째입니다. 우리의 각인된 것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각인된 것들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이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창세기 3장 문제, 하나님을 떠남과 죄와, 또 사단의 운명 가운데서 빠져 나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당연히 응답받게 되어 있고 당연히 축복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응답받게 되어 있고 축복받게 되어 있는데, 우리가 응답받지 못하고 축복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살펴 보면 우리도 모르게 오래 된 실패들, 또 뭔가 말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문제들, 또 우리에게 있는 질병들, 그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 각인된 것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뭔가 모르는,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고 오래된 질병과, 또 오래된 여러 가지 실패들, 그것은 우리 안에 각인된 것으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말씀을 붙잡아야 하고 복음을 누리는 기도를 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겠다 하셨기 때문에 복음 안에 있는 말씀, 복음 안에 있는 복음 누리는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고, 또 우리 안에 우리도 모르게 각인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함께 있겠다 하는 이 축복의 역사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각인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항상 복음 안에 있는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고 복음을 누리는 기도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있는 영적인 문제, 그 영적인 문제가 있는 한은 육신적으로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는 내 육신적인 노력과 수고와 인격과 상관없이 망하게 하고 안 되게 하는 것이 영적인 문제입니다. 열심히 하고 몸부림치는 데도 불구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문제, 이상한 문제들이 계속 오고, 또 실패의 역사들이 계속해서 오는데 그게 어떻게 해서 오게 되는가? 그게 바로 창세기 3장의 문제이고 원죄의 저주이고 그게 바로 흑암의 세력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가운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상처와 한계들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1분 뒤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 모르는, 어떤 일들이 우리 앞에 부딪힐지 모르는 그런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이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인 문제, 또 우리 자신의 한계를 해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순간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는 순간에 우리의 재앙의 문제가 없어지고, 사단의 운명 가운데서 해방되는, 그 축복된 응답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세기 3장의 원죄의 저주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이상은 그 누구도,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 결과는 실패하는 인생이 됩니다. 왜냐?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이 보기에는, 바른 판단과 바른 생각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판단과 생각과 모든 것들은 결국은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은 재앙과 상관없는, 사단의 운명과 상관없는,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응답 받아야 되고 축복 받아야 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됩니다. 왜 그런데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역사들을 누리지 못하느냐? 그것은 우리가 지난날 복음 없이 살아온 생애가 얼마였습니까? 우리 나름대로 뭔가 경험을 하고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 지식을 갖고 복음 없는 습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습관이 참 무섭습니다. 습관은 운명을 결정짓는, 운명과 같은 것인데, 복음과 상관없이 이런 부분이 우리 속에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우리 자신도 늘 성령충만한 가운데 복음을 누리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못해서 사탄이 살아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복음과 상관없는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 영혼 속에 각인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최고의 약속과 축복의 역사들을 지금 오늘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각인되어 있는 부분들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40일 집중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집중훈련 하면서 체크리스트 가지고 체크하면서 우리 자신들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발견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디에서 온 것인가, 우리 가정과 가문에서 흐르는 부분들인가, 그리고 이것을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어떻게 치유 받을 것인가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이 축복의 역사를 놓치게 만드는 고질적인 문제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치유 받아야 되고 이것이 뿌리 뽑혀져야 합니다. 이게 뿌리 뽑혀져서 바뀌어지지 않는 한 가장 최고의 약속이요 최고의 축복인, 하나님이 항상 함께 있겠다는, 실제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그래서 성도라는 이름은 모양은 가졌지만 진짜 능력은 부인하는 그런 성도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을 받았는데도 못 누리는 부분들, 우리가 응답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 속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는 걸 알고 뽑아내면 거기에 갈2:20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각인된 것들이 뿌리 뽑혀지는 그 순간에 이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게 각인된 것들이 뿌리 뽑혀지느냐?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귀하게 쓰실 전도자들에게 산으로 인도하시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을 마므레 상수리 수풀 가운데 부르셨고, 모세도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부르셨고,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마다 산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이건 등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감람산에서 예수님이 다시 부르셨잖아요. 산에 올라가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그 장소와 그 시간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그 장소와 시간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누리는 그 시간이 내게 없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안에 있는 각인된 부분들을 치유 받을 수 없는 부분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은혜의 시간이 내게 있게 되면 내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던 각인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치유되어지고 바뀌어질 것인데 이 산의 역사가 내게 없다는 겁니다.
오늘 이 시간에 이 메시지 들은 이후로 여러분 개개인에게 진짜 ‘산’을 회복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혹이나 이 자리에 처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 있습니까? 진짜 처음 신앙생활 할 때부터 공적인 예배에 성공하시고 개인 기도에 성공하게 되면 뭔가 모르게 능력이 생깁니다. 영적인 힘이 생기고 그 속에서 오력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작부터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예배에 성공하고 시간시간 예배 때 주신 말씀 붙잡고 내가 기도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나와의 시간들을 가져야 되겠다, 내가 산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능력 주시는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것에 더불어 다섯 가지 힘이 회복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이 비밀을 가졌습니다. 이 비밀 통해서 하나님은 그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각인 되어있는 부분들을 바꾸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셨던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 아브라함은 사실 갈대아 우르 우상동네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을 가지고 불러내셨습니다. 창12:1-4에 보면 아브라함을 불러내시면서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사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도 물론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빠져나와서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언제까지 계속되었느냐? 창13장에 마므레 상수리 수풀 아래 재단 쌓기까지 어려움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 안에 각인된 것들을 뽑아버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각인된 것들이 바뀌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나왔지만, 그 마음속에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각인된 것이 있었습니다. 가만히 자기 집을 보니까 사실 아내 사래가 가망이 없거든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 조카 롯밖에 없어서 조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미 그 마음에 각인된 것이 있어서 사실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믿지 않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단순히 조카 롯을 데리고 와서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사실들은 아브라함 마음 속에 각인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느냐? 창13:14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냥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마음 중심을 다 읽고 계시다가 결단 내리는 그 순간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14-17절에 보면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하고 본격적인 축복을 약속하셨고, 그리고 그 약속 가지고 아브람은 마무레 상수리 수풀 가운데 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언제 아브람에게 참된 축복의 역사가 시작되었느냐? 말은 안하지만 자기가 깊이 내면에 가지고 있던 그 각인된 것들이 바뀌어졌을 때 하나님의 축복된 응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온 거를 그대로 가지고 있잖아요. 우리가 체험한 것 경험한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잖아요. 그것가지고 한번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산의 시간이 없었잖아요. 그리고 내 안에 각인된 그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문제는 하나님이 최고로 약속하신 항상 함께하리라는 축복의 역사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고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이 안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 후대들에게 여러가지 세상의 음악이나 영화나 지식으로 많은 것들이 마구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 이전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 사실들이 안 되어지는 그 결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 영혼들이 황폐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들이 누려지지 않는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일찍 어릴 때부터 각인이 바뀐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때 바른 것이 각인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삭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창세기 22장에 보면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대신 수양을 준비해놓고 수양을 통해서 번제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삭은 수양 바라 볼 때마다 ‘내가 저 수양 때문에 살았구나.’ 마음속에 각인되었습니다. 수양은 그리스도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의 생애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생명을 담보로 해서 심령 속에 언약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모든 삶은 성경 속에서 고통과 고난 없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이삭입니다. 어릴 때 바른 언약이 심령 속에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녀들 위해서 기도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언약을 심어주는 이 일에 생을 거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해아 하는 가장 최선의 것이고 가장 최고의 축복입니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줄 것입니까? 여러분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없어지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문제가 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언약을 전달한다면 평생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는 후대들로 세워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사단이 후대들에게 자녀들에게 자꾸 하나님 없는 다른 것들을 각인시키는 시대입니다. 각인전쟁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약가지고 기도하면서 진짜 우리 후대들에게 지금과 올 미래를 바라보면서 정말 심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언약만이 이 시대에 가장 세상을 정복하고 이길 수 있는 비밀이기 때문에 이것을 심는 일을 결단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 일을 감당하도록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모세도 어릴 때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가 나이 80세가 되기 까지 많은 상처가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엄마 품에서 젖을 먹다가 키울 수 없어서 갈대상자에 담아서 강에 띄웁니다. 엄마의 품을 떠나 그냥 갈대상자에 담아서 강가에 띄워진다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는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태영아 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아이를 가졌을 때 부모가 어떤 생각하느냐 하는 것 까지도 다 영향이 간다고 합니다. 젖을 떼고 어쩔 수 없이 내버리는 상황에 모세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리고 애굽 왕궁에 들어갔지만 이미 어머니를 통해서 히브리 민족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애굽 왕궁에 있지만 뭔가 모르는 혼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민족을 위해서 해보겠다고 나왔는데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자기 민족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미디안 광야에 40년 동안 도망가서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쳤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애굽의 왕자리 까지 갔다가 떨어졌다는 자괴감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냥 거지로 살다가 버림받으면 덜하지만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서 떨어지는 것은 참지 못하고 자살을 합니다. 그런 온갖 상처, 실패, 자괴감이 모세에게 가득 찼습니다. 어느 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모세를 불렀습니다. 그 때 모세가 자기 마음에 각인된 것들을 내뱉었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나는 못합니다.” 상처와 여러 가지 실패 때문에 각인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4:24에 모세를 불려 가시려고 하는 그 때에 모세의 각인된 것이 완전히 바뀌었다. 여러분 생명을 가져가겠다고 하면 안 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세에게 죽이겠다고 하니까 완전히 각인된 것이 바뀌었습니다. 각인이 바뀐 모세의 걸음속에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일어났던 역사보다 더 큰 역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모세의 발걸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속에 깊이 각인된 것이 바뀌어지고 뽑아져야 그 때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안에 각인된 것 대로 살고 가게 됩니다. 지금은 숨겨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때에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나이 들면 결국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실패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인된 것들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진짜 산의 비밀을 회복하고 말씀 붙잡고 기도해야 할 이유를 깨닫는 시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을 행했습니다. 바알과 앗세라 우상을 섬기는 850명 거짓선지자와의 싸움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이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불을 끌어내리고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이 단을 태우기 위해서는 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단 주위에 물을 둘러서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불로 태워버렸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는데 바로 이어서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고백했습니다. “나를 죽여주옵소서. 다 바알에게 무릎 꿇었나이다.” 엘리야 속에 각인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나를 죽여 주옵소서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아니다. 너만 남은 것이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을 내가 남겨놓았다. 너를 대신하여 엘리사 선지자를 세워라.” 하나님의 중요한 계획을 바람과 불 가운데가 아니라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엘리야에게 역사 하셨습니다. 엘리야의 각인된 부분을 완전히 바꾸시는 역사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의 역사들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고도 하나도 안 바뀌었습니다. 변화산에 데리고 가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거기에서 베드로가 한마디로 뿅 가서 돈도 없는 사람이 모세, 엘리야, 예수님을 위해서 집을 3채 짓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남는 역사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일어난 엄청난 역사인데 그것을 보고도 제자들의 각인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언제 바뀌어졌는가? 행1장에 보면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감람산으로 부르셔서 40일 동안 집중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붙잡고 1:14에 보면 전혀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42에 보면 이 말을 깨달은 제자들이 또 메시지를 붙잡고 오로지 기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때 모든 제자들의 각인이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어느 정도로 바뀌었는가. 그 전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도 각기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40일 집중훈련을 통하여 전혀 기도 속에서 각인이 바뀐 후 부터는 제자들이 순교로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들을 감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각인된 것들이 바뀌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참된 응답과 축복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붙잡아야 하고 왜 기도해야 하는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 산을 회복해야 하는가? 산을 회복한다는 말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각인된 것들이 그 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가 그 때 무너지기 때문에 산을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말슴을 붙잡아야 하고 기도의 비밀 속에 들어가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내 속에 있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나 버리는 불쌍한 인생이 됩니다. 내 안에 각인된 것, 내 자신의 한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실을 누리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 속에 들어가는 산을 회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각인된 그 것 따라서 우리가 흔들립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결국은 그것이 사단이 틈타는 통로가 됩니다. 에베소서 4:27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베드로 전서 5:7-8 너희 염려를 주께 맡겨라. 염려하는 자들에게 깨어라 근신하라 말씀하시면서 우는 사자처럼 두루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각인된 것 때문에 흔들리는데 흔들리는 그 것 때문에 많은 축복들을 다 놓쳐버립니다. 그것이 사단이 틈타는 통로가 됩니다. 분명히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성령충만함 속으로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충만 받으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전부 다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각인된 부분이 바뀌도록 성령충만함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참된 축복된 역사들이 모든 발걸음 속에 나타나게 됩니다 .정말 각인된 것이 바뀌면 어떤 큰 실패가 와도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큰 시대의 문을 여는 승리하는 증거거리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렘넌트 7명, 히브리서 11장 인물, 초대교회가 누렸던 비밀들입니다. 함께하시는 비밀을 누리게 될 때 어떤 실패도 실패가 안되고 큰 시대의 문을 여는 축복의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 말씀과 기도 속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각인된 것들이 이 시간 이후로 완전히 바뀌어지는 축복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3가지가 보인다.
각인된 것들이 바뀌면 세가지가 보입니다. 먼저 18절이 보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나’ 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나’ 이것이 보여집니다. 나에 대한 정체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있구나.’ 복음 안에서 이 사실에 대한 내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배경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승리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 가진 나입니다. 믿습니까. 여기에 흔들림 없게 됩니다. 이 사실 붙잡으면 시간 가면 갈수록 개인 가정 산업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게 됩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체성입니다. 나는 흔들릴 수 없습니다. 흔들리면 속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나, 우리는 하늘과 땅의 권세가진 사람인 것이 보여집니다. 지난 날 이 사실이 보여지지 않았을 때는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는데 미안합니다만 하늘과 땅의 권세가진 나인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살아온 만큼 사단에게 사기당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세상 임금 공중 권세가진 자가 사단이기 때문에 우리를 속이므로 이끌어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하늘과 땅의 권세가진 나로 축복하셨습니다. 이 사실들이 내안에 각인된 것들이 바뀔 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모든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축복이 이미 내게 주어졌구나.’ 이 사실에 눈이 열려지게 됩니다.

각인된 것들이 바뀌어 질 때 두 번째로 19절이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가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장이 제대로 보여지고 사람들이 제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지난 날을 껍데기로 겉만 봤는데 진짜 이 땅의 문제가 무엇이고 사람들이 내면에 어려움 당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산을 회복함으로 나의 각인된 것들이 바뀌어질 때 이 사실 보는 눈이 열려집니다. 마치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늘 성전에 오고가면서 평상시 보지 못했던 부분이 어느 날 베드로와 요한이 보면서 이 사람에게는 동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구나. 내면을 봤습니다. 진짜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지금 동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운명에서 해방되는 그리스도 이름이 핊요한 내면을 제대로 본 것 입니다. 각인된 것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도 현장도 껍데기만 보게 되고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사람과 현장만 영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들, 제자들, 전도와 선교의 문을 하나님이 여시는 사실들이 보여지게 됩니다. 각인된 것들이 바뀌어질 때 ‘아, 하나님이 전도 선교 다 준비하셨구나. 이 일을 위해서 제자도 다 준비하셨구나.’ 이것이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언약잡고 각인이 바뀌어지니 제자들의 걸음 속에 전부 하나님이 전도 선교 준비해놓고 문을 여시는 것이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삼으라는 비밀이 보여집니다.

각인된 것들이 바뀌어질 때 세번째로 20절이 보입니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개개인의 마지막까지, 내 인생의 마지막까지 항상 24시간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분 좋으면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하면서 나아가지만 기분 나쁘면 대듭니다. 항상 함께하시는 사실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정시기도 하는 것이고, 항상 함께하시는 사실을 생각속에서 누리기 위해 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만, 하나님께 감사할 때 만이 아니라 항상 함께하리라. 내 개인, 가정, 산업, 우리 자녀, 미래에 함께하리라. 끝난 것입니다. 내안에 각인된 것들이 산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바뀌어질 때에 이 사실에 대한 눈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목사님 내 안에 각인된 것들이 잘못된 것입니까? 크고 작게 각인된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실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제목이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항상 함께의 비밀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최고의 약속입니다. 이 비밀 가지면 우리의 실패가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사인이구나. 병이 들었다면 병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위해서 성령충만 하라는 사인이구나. 모세가 미디안으로 쫓겨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노예로, 감옥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실을 진행시키는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우리 안에 각인된 것들이 말씀과 기도로 치유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최고의 축복된 응답을 누림으로 전도자로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6월 9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마28:18-20)



서론: 하나님의 최고의 약속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제자를 부르실 때도 함께 있기 위해 부르셨고(막3장), 부활 승천 후에도 제자들과에게 함께 역사하셨습니다(막16:20).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격려나 교리, 형식이나 지식적 차원이 아닌 실제적인 체험과 응답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약속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행1:14). 제자들은 오로지 기도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난 뒤, 모든 생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연약하고 무능한 인생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응답을 누릴 수 있을까요?

1. 각인된 것을 바꾸라
(1) 영적문제가 성도에게 각인되어 있으면 당연히 받을 축복을 놓치고 살아가게 됩니다.
1) 우리의 영적인 문제는 육신적인 노력, 수고, 인격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음 (창3장 문제)
2)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
3) 하나님 자녀가 되었으나 잘못된 각인을 고치지 않으면 결국 무능과 한계로 무너질 수밖에 없음
(2) 어떻게 내게 각인된 것들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까?
1) 각인된 것들이 뿌리 뽑히는 순간에 비로소 임마누엘 축복을 누리게 됨(갈2:20)
2) 산으로 올라가라!!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그 시간과 그 장소가 만들어라)
① 아브라함 - 마므레 상수리 수풀 ② 모세 - 호렙산
③ 엘리야 - 갈멜산 ④ 예수님의 제자들 - 감람산
3) 공적 예배(말씀)와 개인 기도를 회복하라!! (5力 회복 : 영력, 지력, 체력, 경제력, 인력)
(3) 각인된 것이 바뀌면 어떤 큰 실패도 큰 시대를 문을 여는 승리의 증거거리가 됩니다.

2. 각인된 것이 바뀌면 보이는 것 3가지
(1) 하늘과 땅의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18절)
1) 복음 안에서 나에 대한 정체성을 기억하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 나)
2) 우리는 아무리 연약해도 세상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음
(2)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19절)
1) 현장과 사람이 제대로 보이게 됨 (영적현장과 모든 사람의 내면을 보게 됨)
2)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자를 만나게 됨 (전도와 선교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됨)
(3)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20절)
1) 우리의 수준과 상관없이 항상(24시간) 함께하는 증거를 보게 됨
2)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 인생과 자녀, 업과 미래가 세상 끝날까지 보장 됨

결론: 우리는 항상, 함께의 비밀을 회복해야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최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 가지면 실패는 더 이상 실패가 아닙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함께 하라는 사인(sign)이자, 계획이 이루어지는 과정일 뿐입니다(미디안 광야의 모세, 감옥안의 요셉). 이 사실을 누리며 전도자로서 승리하는 한 주간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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