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누린 사람
2013-11-10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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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누린 사람”
(행7:54~60)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54~60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이 땅에 지금 이 시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오늘 예배를 통해 최고로 누리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번 더 인사합시다.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린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기도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예배의 축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특히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예들을 볼 때 자기 신념이 너무 강해서, 자기가 나름대로 갖고 있는 사상들이 너무 강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불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많은 불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실제로 현장에는 전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자기의 사상과 자기의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둘 다 똑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면 일단은 예배가 안 됩니다. 또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다른 시간들은 힘이 넘쳐나고 싱싱한데 예배 시간이 되면 힘이 다 빠지고 피곤에 지쳐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별스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일에도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고 실패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매일 맛보고 체험하고 기도의 비밀을 누리는 그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를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고 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 그 힘들이 전달되게 될 때 그 사람에게 그것이 가장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 사람을 만났더니 예배를 드리고 싶고 기도가 하고 싶고 또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뭔가 힘을 얻는다, 그렇게 되면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이 깨달아지고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들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살아나도록 그렇게 작정하시고 오늘도 그 축복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축복된 은혜를 누린 사람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입니다. 오늘 제목을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누린 사람’이라고 했는데 스데반을 본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 뭔가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나중에 결론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만 우리를 그런 자리에 세우셨다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가 살펴 보았습니다만 사실 이스라엘의 복음 역사 속에, 선교 역사 속에 새로운 큰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 그런 시작이 된 것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스데반은 복음과 전도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꾼 전도자였고, 또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율법과 종교의 큰 산맥을 넘게 된 일에 인도받게 되었고, 초대교회가 그 전까지는 유대 종교의 배경 속에서 유대 종교와 대치하는 가운데서 복음 운동들을 진행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세계 복음을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완전히 분리시켜 놓는 작업들을 이루어 가셨는데 그 일에 쓰임받은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로 말미암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다시 말해서, 전세계로 복음이 확산되는 이 일에 인도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사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많은 열방의 문들이 열리고 전도, 선교의 문들이 열려진 사실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오늘 읽은 6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잔다’는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깬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계속 자는 것은 사실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니라’ 이 말은 지금 일시적으로 돌에 맞아 눈을 감았지만 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는 계속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큰 역사가 사실 스데반을 통해서 일어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들보다, 살아서 움직이지만 죽은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스데반의 죽음의 비밀은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오늘 말씀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들입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생명을 걸 만한 일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되는 것인가? 우리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부름 받게 됩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어떤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 오늘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우리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부분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1. 스데반의 삶
그래서 먼저 첫 번째로 스데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주셔야 하는데 그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택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결국 자기만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결국은 역사 속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일단 이 땅에 복음을 주셔야 하는데 그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한 나라를 선택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나라를 선택하셨는데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그 일에 쓰임 받았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성취시키시는 그 일에 인도받게 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이 일을 위해서 그 때 제자들을 세우고 또 사도들을 세우고 집사들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이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 쓰임 받게 되었다, 그것이 최고의 축복 중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복음의 역사를 이 땅에 나타내어야 하는데 그 복음의 역사를 나타내는 이 일에 우리가 쓰임 받았다, 우리가 선택함을 받았다, 최고의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최고의 역사를 지금 진행해 나가시고 있는데 그 자리에 내가 과연 서 있는가? 그 부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최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데 그 최고의 역사는 영적인 사실 중심으로 해서 움직여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시대에 하나님이 최고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시는데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내가 그 일에 지금 쓰임 받고 있는가? 그 사실 속에 내가 지금 서 있는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그 축복된 역사 속에 내가 지금 서 있는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하나님이 그 시대 속에 복음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 일에 하나님이 원하는 시간표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장소에 가장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설교 한 번 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 스데반은 복음의 가치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특히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가치를 알고 나가야 제대로 응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엄청난 복음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 많은 응답들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국의 모택동은 세계를 공산화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는 것조차도 세계가 공산화되는 그 꿈을 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요즘 커피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스타벅스 커피점 있잖아요? 스타벅스 커피점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라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갈 것이다.” 우리 커피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됩니다. 커피 안 마신다고 죽습니까? 그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한 잔 팔기 위해서 내가 지구 끝까지도 달려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일에도 생을 거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축복된 가치인 이 복음의 역사를 가지고 이 사실을 말하는, 이 일을 증거하는 이 일의 가치를 우리가 모른다면 많은 응답과 축복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시간이 어떤 시간인가를 알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현장이 어떤 현장인가를 알았습니다. 거기에 이 스데반은 생을 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셨고 축복하신 이 자리에 우리를 앉히셨는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저와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주에도 우리가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주된 사역과 방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복음 운동이요, 생명 운동이요, 다른 말로 한 마디로 대답하면 전도인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사람을 모으는 전도가 아니라, 지역에서 현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전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생명 운동, 전도인 것입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운동이요, 전도인 것입니다. 이 축복의 역사를 놓쳐 버린다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교계 신문을 보니 믿는 자들 중심으로 해서 설문서를 조사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서를 조사했는데 물론 아마 그 목적하는 의도가 사회 복지 차원에서 설문서를 조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거기에 92%가 어떻게 이야기했느냐 하면 교회의 사명은 구제와 봉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92%가. 물론 묻는 목적에 따라서 답이 다르게 나올수 있습니다만, 어떻든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 교회가 해야될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92%가 구제와 봉사라고 답했습니다. 정말로 구제와 봉사가 교회가 생명 걸고 할 일입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구제와 봉사는 교회가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고 따라오는 것입니다만, 설령 그것을 못한다 할지라도 세상은 구제와 봉사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부 문화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에서도 구제와 봉사 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할 것은 구제와 봉사가 주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전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교회가 훗날에 기억 될 교회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 한 가지 속에 다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가 뭐냐? 현장에서 생명운동하는 전도에 방향 맞추게 될 때에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전도도'가 아니라 '전도만'을 위한 교회가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정말로 훗날에 기억될 교회로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계속 쓰임 받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 교회들마다 다 전도합니다. 전도 안하는 교회가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전도 말고 실제로 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전도. 그래서 전도만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붙잡게 될 때 하나님은 여기에 모든 것 더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 한 가지 붙잡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중심 속에 사라지지 말아야 될, 늘 붙잡고 인도받아야 될 부분이 있다면 진짜 이 교회를 통해서 생명운동이 일어나는, 전도에 방향 맞추는 이 일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속에 여러분의 사업이 나와야 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일과 직업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한 가지 붙잡았는데 분명히 축복하셨다라는 사람들이 성경에 응답 받은 자들의 증거입니다. 혹시나 하나교회 오셔서 다른 좋은 일을 기대한다면 다른 교회 가셔도 좋습니다. 하나교회는 전도만을 위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모든 축복을 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자칫 빠질 수 있는 것이 일과 프로그램 등입니다. 교회는 전도 때문에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전도 때문에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생명 운동이 일어나느 ㄴ이 일 때문에 교회는 바빠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것 때문에 바쁘면 안 됩니다. 나중에 가서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운동, 전도, 이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전도의 축복을 누립니까? 그냥 사람을 데려오는 게 아닙니다. 먼저 전도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한 사람이 먼저 정화한 복음을 알고 누려야 됩니다. 이 스데반은 정확한 복음을 알고 그것을 말하는 전도 한 마디를 해서 죽게 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전도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들이 정확한 복음을 알고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혹여나 수십 년 신앙생활 해오면서도 복음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갖고 있는 모든 지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 모든 것을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깨닫고 보니까 자기가 붙잡고 있었던 지식과 지난날의 배경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그리스도 알지 못하도록 했구나. 그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배설물로 여긴 그것이 그냥 없어졌느냐? 아닙니다. 진짜 복음이 정리되고 깨닫고 나니까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이 복음 증거하는 이 일에 유익하게 쓰임 받은 사실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전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많은 일들 때문에 복음을 놓쳐버린다면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많은 프로그램들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죄 중의 죄입니다. 진짜 죄 중의 죄는 뭐냐? 교회 안의 일들 때문에 프로그램에 빠져서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죄 중의 죄입니다. 가장 중요한 참된복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인생의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속에서 해방되는 것을 가지고 복음이라 이야기합니다. 특히 교회 다니는 성도들 조차도 이 문제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에 보면 12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12가지가 무엇입니까?
모든 인생은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5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게 지금도 이 세상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해도 하나님처럼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안에 살도록 지음 받은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되는 것이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야 되는 것이고 우리 인생의 인생은 하나니 안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데 모든 인생의 문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보면 이 땅의 모든 문제의 시작이 발전하는 것 같고 번성하는 것 같지만 이 두 가지와 더불어 지금 타락도 더욱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자꾸 무너집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처럼. 그래서 창세기 3장, 6장, 11장, 이것이 이 땅의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아니 우리 인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문화화 되어서 귀신의 문화로 점술의 문화로 우상의 문화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1-12에, 사도행전 16:16-18에, 사도행전 19:8-20에 보면 그 시대에 귀신 문화, 미신 문화, 또 점술과 우상의 문화로 모든 인생을 멸망길로 끌고 갑니다. 문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엄청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문화를 바꾸는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들이 미신 점술 우상에 점점 빠져들면서 그 문제들이 우리 개인에게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타나느냐? 행복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8:44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합니다. 행복하고 싶은데 우리 아비가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우리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됩니다. 몸부림치는데 자꾸 엉뚱한 것을 붙잡게 됩니다. 그게 바로 출애굽기 20장에 말씀하는 우상숭배를 가져오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여기에 몸부림을 치는데 점점 다른 것에 빠집니다. 그것이 계속 가중되는데 거기서 영적문제 정신문제 마음의 문제 등 온갖 문제가 나옵니다. 육신의 문제까지 나옵니다. 희망을 가지고 노력합니다만 결국 우리 인생의 지옥의 배경 가지고 살다가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느냐?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더 큰 영적인 유산들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 12가지 인생의 문제 속에서 해방되어지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1-2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 복음은 해방입니다. 인생에 절대 해결할 수 없는 12가지 문제 속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바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이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유대인들 핍박자들이 스데반을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예수가 정말 부활했느냐, 예수가 정말 메시야 맞느냐,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 그 때 스데반이 그렇다해도 그럴 것인데,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구약의 성경들, 유대인들이 지도자로 믿고 있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죽인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요, 메시야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열 받아서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둘러싼 현장 속에서 다른 말을 해도 되는데 스데반이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분명히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을 몰랐겠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회피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이 죽인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시다. 그분이 바로 메시야다." 라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스데반이 용기를 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그 현장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축복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버릴 수 있었다는 것.
여러분,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밀이, 죽을 수 있었던 중요한 비밀이, 웃으면서도 순교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밀이 있다며 스데반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현장에, 그 장소 속에, 그 문제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실을 누리는 축복을 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속으로 들어가는 우리 하나교회 식구들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 충만
그러면 그 성령의 충만함의 비밀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어떻게 그 성령의 충만함을 누릴 것인가? 오늘 본문에 스데반을 보면 순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돌에 맞아 순교할 것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자리에 있다면 순교할 자신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24-25장,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앞으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평안히 예수 믿는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당시에 순교로 복음의 역사 가운데 섰던 사람들처럼 말세에 엄청난 어려움과 핍박들이 심지어 죽는데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어진바 되는 그런 자리가 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이르렀다면 과연 여러분이 순교할 수 있겠는가? 저는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나는 이 상황 속에서 과연 순교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제가 답으로 가진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그렇다. 나는 할 수 없지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순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 사형장 현장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누가 힘을 주시는가? 하나님이 순교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안 되지만,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우리 또한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그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시면 내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적합하게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여러분 산업을 위해서 '성령 충만 주옵소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체질을 아시고 여러분의 체질에 맞도록 하나님이 가장 정확하게, 가장 선하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이 방법을 요구했는데, 나는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데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대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도해나가시게 되어있다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 당하면 그 어려움 당하는 현장 속에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것.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세요. 성령 충만하게 기도만 해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산업현장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데…….' 그 계획 잡지 마시고, 일단 '하나님이 산업현장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 산업현장에 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고 가장 필요한 은혜를 주시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스데반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길이 열렸고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성령께서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데 55-56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리스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힘을 주셨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지금 어떤 현장입니까? 돌로 맞는 현장입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맞는 아픔 그것만 해도 엄청난 것인데 할 말 다 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돌질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60절에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성령 충만하니까 그 현장에 가장 필요한 은혜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방법대로 방식대로 기도하지 말고요. 어디에서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 현장에, 그 장소에, 그 조건에 가장 필요한 은혜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승리토록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기도하면서 본 것이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현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중요한 현장들마다 하나님이 친히 당신을 나타내셨어요.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도 보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시대에 다니엘에게도 하나님의 보좌의 축복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니엘 7장을 봅시다. 얼마나 중요한 현장들마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영광스러운 부분들을 보여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분들을 오늘 스데반도 보고 누렸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7:9-10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13-14절 같이 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 현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하나님이 그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의 축복을 보여주셨다라는 사실. 오늘 스데반이 있는 이 현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이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여기에 스데반이 인자가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섰다 앉았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섰다라는 부분은 이 한 곳에만 표시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주님의 관심이 집중되어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주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느냐? 최고로 관심 갖는 그 현장에 정말로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복음전하는 사람이 있을 때, 복음 전하는 사역자들이 있을 때 그 현장에 주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 성령충만함 가운데 복음 증거하는 그 현장에 주의 관심이 집중되어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기도하고 나면 그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계속해서 응답이 나오는데 그 응답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응답들로 찾아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당할 때 그 때만을 생각합니다. 문제당하면 그 문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명히 성령 충만함 다음에 그 역사는 계속해서 그 다음 다음 응답으로 와진다는 사실이에요. 특별히 그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고,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은혜 받는 이 시간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뒤에 두고두고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치도 못할 엄청난 역사들이 계속해서 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시간에 성령 충만함만 기도하면 됩니다.
세상에 육신적인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연극 무대의 뒤편을 아십니까? 연극이 이뤄지면 그 두매 뒤편에서는 옷 갈아입고 쫓아나가고, 또 옷 갈아입고 쫓아나갑니다. 그래서 연극 무대 뒤편은 엉망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화려해보이지만, 그러나 그 뒷면은 연극무대 뒤편과 같이 엉망입니다.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것들은 그때뿐이지만 우리가 정말 성령 충만함을 구하고 나아갈 때 두고두고 하나님의 응답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 복음 한번 전하고 죽었는데 그 이후에 일어나는 역사들을 보세요. 당장 8장에 보면 인종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8장에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마리아성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민족입니다. 혼혈족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민족인 사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에 이후에 바로 이어서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증거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성에 큰 기쁨이 충만한 인종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8:26에 보면 저주받은 땅 에디오피아. 기근과 가난으로 세계가운데 가장 어려움 당하는 아프리카입니다. 처음 복음 받은 에디오피아가 아프리카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울이 회심했는데 그 당시에 사울이 회심했던 사건은 유대사에 큰 충격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을 앞서서 핍박하는 사울이 돌아왔다? 그것도 율법학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로서 율법에 뛰어난 이 지식인이 예수를 믿었다? 그것은 유대사에 엄청난 충격입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사울의 고백 중에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중의 괴수 죄인이라는 고백은 제 생각에는 아마 말은 안하고 있지만 스데반의 그 죽음을 바울이 머릿속에 기억하면서 한 말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든지 이 사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로마 이달리아대 백부장 고넬료가 돌아오게 되고 결국 환란을 통해서 흩어졌는데 그 흩어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안디옥교회를 세우고 그 안디옥 교회로 말미암아 세계 선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지금 성령 충만함을 구했는데 복음 붙잡고 기도했는데 그 나머지 결과는 하나님께서 작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누리세요.
여러분, 그래서 가정을 위해서 성령 충만 기도하세요. 자녀를 위해서 성령 충만 기도하세요.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그 시간에 가장 필요한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생명 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지 마시고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생명 걸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입니까? "복음, 생명운동" 여기에 생명 걸 수 있는 축복된 가치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어디에 생명 걸 것인가? 찾지 말고, 이미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하셨다는 그 사실을 확인하시고 그와 더불어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사람은 관심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 관심. 주님 앞에 서는 날 까지 우리 하나교회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증거는 이 관심 가운데서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 현장에, 그 장소에, 그 시간에 가장 필요한 은혜로 채우시는 역사 이 사실을 붙잡고 승리하는 전도자의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11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린 사람
(행7:54-60)
서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기도의 힘과 예배의 축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강한 신념과 사상 혹은 많은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가 안되고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기에 작은 일에도 넘어지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의 비밀을 누리는 자는 만나는 자들마다 그것이 전달되어, 영적인 힘이 생겨나고 다른 것들도 저절로 깨달아지고 보여집니다. 이 축복을 누린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이 확산되어지는 축복을 계속(이 말을 하고 자니라)해서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생명을 걸 만한 일인지’,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은지’ 점검하고, “어떤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스데반처럼 쓰임 받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스데반의 삶
(1)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최고의 역사를 진행하시는데, 이 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받은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말씀을 성취하심
2)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도 복음 전할 자를 선택하고 계심 (그 현장에 내가 서 있는지 확인하라!)
(2) 스데반은 가장 중요한 시간과 내용과 현장을 알고, 여기에 자기의 생을 걸었습니다.
1) 우리는 엄청난 복음을 받고도 그것의 가치를 모르면, 많은 응답을 놓치게 됨
2) 정말 복음을 위해 사는 가운데, 여기에 우리의 생을 걸만한 가치를 깨달아라!!
(3) 교회의 존재 목적이자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운동, 생명운동입니다. (오직 전도!!)
1) 전도는 단순히 교회에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임
2) 하나교회는 훗날에 기억될 교회로써, 전도‘도’가 아닌 전도‘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함
a. 정확한 복음을 알고 누려라 (죄 중의 죄는 교회안의 다른 일이나 프로그램으로 복음을 못누리도록 하는 것)
b. 복음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12가지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임
(12가지 문제 = 창3,6,11장 문제의 시작 / 행13,16,19장의 문화(미신,점술,우상)로 파고듦 / 불신자 6가지 상태)
c.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것임 (행7:55절, 스데반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담대히 이 고백을 하고 순교함)
2. 성령충만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충만 할 때, 가장 필요하고 적합하게 역사하십니다.
1) 우리의 가장 정확하고 선한 기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기도임
2) 스데반의 기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59절) /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2)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현장마다 최고로 관심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1) 스데반은 최고로 중요한 현장에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봄(55-56절)
2) 성경에는 중요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타나심(마3:16-17 / 단7:9-10,13-14)
(3) 성령의 충만한 이후에는, 두고 두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 인종문제가 해결 되고(행8:4-8), 아프리카에 처음 복음이 선포되며(행8:26-40) 사울이 회심함(행9장)
2)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돌아오고,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졌던 자들이 모여 안디옥 교회를 세움
결론: 우리는 생명 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앉게 하신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복음운동이자 생명운동입니다. 이 축복된 가치를 깨닫고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결국 관심대로 살다가 죽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리스도를 누리고 증거함으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게 될 때 그 시간, 장소에 가장 필요한 것을 채우는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한주간 이 사실을 붙잡고 승리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누린 사람”
(행7:54~60)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행7:54~60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이 땅에 지금 이 시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오늘 예배를 통해 최고로 누리는 축복의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번 더 인사합시다.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린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같이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기도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예배의 축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특히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예들을 볼 때 자기 신념이 너무 강해서, 자기가 나름대로 갖고 있는 사상들이 너무 강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불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많은 불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또 실제로 현장에는 전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자기의 사상과 자기의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둘 다 똑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면 일단은 예배가 안 됩니다. 또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고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다른 시간들은 힘이 넘쳐나고 싱싱한데 예배 시간이 되면 힘이 다 빠지고 피곤에 지쳐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별스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조그마한 일에도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고 실패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매일 맛보고 체험하고 기도의 비밀을 누리는 그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를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힘을 얻게 되고 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 그 힘들이 전달되게 될 때 그 사람에게 그것이 가장 최고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 사람을 만났더니 예배를 드리고 싶고 기도가 하고 싶고 또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를 나눔에도 불구하고 뭔가 힘을 얻는다, 그렇게 되면 그 속에서 많은 것들이 깨달아지고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응답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들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우리 때문에 살아나도록 그렇게 작정하시고 오늘도 그 축복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축복된 은혜를 누린 사람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입니다. 오늘 제목을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누린 사람’이라고 했는데 스데반을 본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고 뭔가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나중에 결론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만 우리를 그런 자리에 세우셨다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가 살펴 보았습니다만 사실 이스라엘의 복음 역사 속에, 선교 역사 속에 새로운 큰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 그런 시작이 된 것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스데반은 복음과 전도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바꾼 전도자였고, 또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디옥 교회로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율법과 종교의 큰 산맥을 넘게 된 일에 인도받게 되었고, 초대교회가 그 전까지는 유대 종교의 배경 속에서 유대 종교와 대치하는 가운데서 복음 운동들을 진행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세계 복음을 위해서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완전히 분리시켜 놓는 작업들을 이루어 가셨는데 그 일에 쓰임받은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순교로 말미암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다시 말해서, 전세계로 복음이 확산되는 이 일에 인도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사실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많은 열방의 문들이 열리고 전도, 선교의 문들이 열려진 사실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오늘 읽은 60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잔다’는 말은 무엇을 말합니까? ‘깬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계속 자는 것은 사실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자니라’ 이 말은 지금 일시적으로 돌에 맞아 눈을 감았지만 이 사람을 통해서 역사는 계속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보다 더 큰 역사가 사실 스데반을 통해서 일어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들보다, 살아서 움직이지만 죽은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있고, 그리고 죽었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스데반의 죽음의 비밀은 우리의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이고, 오늘 말씀을 통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들입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생명을 걸 만한 일인가? 이것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고,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되는 것인가? 우리가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부름 받게 됩니다. 그 날과 그 시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어떤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 오늘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우리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할 부분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1. 스데반의 삶
그래서 먼저 첫 번째로 스데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주셔야 하는데 그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택한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결국 자기만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결국은 역사 속에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일단 이 땅에 복음을 주셔야 하는데 그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한 나라를 선택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나라를 선택하셨는데 그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그 일에 쓰임 받았지만, 그러나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받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성취시키시는 그 일에 인도받게 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시는 이 일을 위해서 그 때 제자들을 세우고 또 사도들을 세우고 집사들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고의 역사,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이 일을 위해서 택함을 받았다, 쓰임 받게 되었다, 그것이 최고의 축복 중의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복음의 역사를 이 땅에 나타내어야 하는데 그 복음의 역사를 나타내는 이 일에 우리가 쓰임 받았다, 우리가 선택함을 받았다, 최고의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최고의 역사를 지금 진행해 나가시고 있는데 그 자리에 내가 과연 서 있는가? 그 부분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대마다 최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데 그 최고의 역사는 영적인 사실 중심으로 해서 움직여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시대에 하나님이 최고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시는데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내가 그 일에 지금 쓰임 받고 있는가? 그 사실 속에 내가 지금 서 있는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그 축복된 역사 속에 내가 지금 서 있는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하나님이 그 시대 속에 복음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 일에 하나님이 원하는 시간표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장소에 가장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스데반은 설교 한 번 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이 스데반은 복음의 가치를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 특히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가치를 알고 나가야 제대로 응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엄청난 복음의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면 많은 응답들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국의 모택동은 세계를 공산화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는 것조차도 세계가 공산화되는 그 꿈을 꾸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요즘 커피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스타벅스 커피점 있잖아요? 스타벅스 커피점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라는 사람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 필요한 곳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지구 끝까지라도 달려갈 것이다.” 우리 커피 마셔도 되고 안 마셔도 됩니다. 커피 안 마신다고 죽습니까? 그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한 잔 팔기 위해서 내가 지구 끝까지도 달려갈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일에도 생을 거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축복된 가치인 이 복음의 역사를 가지고 이 사실을 말하는, 이 일을 증거하는 이 일의 가치를 우리가 모른다면 많은 응답과 축복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사실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시간이 어떤 시간인가를 알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현장이 어떤 현장인가를 알았습니다. 거기에 이 스데반은 생을 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축복하셨고 축복하신 이 자리에 우리를 앉히셨는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저와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난 주에도 우리가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주된 사역과 방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바로 복음 운동이요, 생명 운동이요, 다른 말로 한 마디로 대답하면 전도인 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사람을 모으는 전도가 아니라, 지역에서 현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전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생명 운동, 전도인 것입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운동이요, 전도인 것입니다. 이 축복의 역사를 놓쳐 버린다면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상관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교계 신문을 보니 믿는 자들 중심으로 해서 설문서를 조사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서를 조사했는데 물론 아마 그 목적하는 의도가 사회 복지 차원에서 설문서를 조사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거기에 92%가 어떻게 이야기했느냐 하면 교회의 사명은 구제와 봉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92%가. 물론 묻는 목적에 따라서 답이 다르게 나올수 있습니다만, 어떻든지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 교회가 해야될 일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92%가 구제와 봉사라고 답했습니다. 정말로 구제와 봉사가 교회가 생명 걸고 할 일입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구제와 봉사는 교회가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고 따라오는 것입니다만, 설령 그것을 못한다 할지라도 세상은 구제와 봉사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부 문화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에서도 구제와 봉사 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할 것은 구제와 봉사가 주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전도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교회가 훗날에 기억 될 교회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 한 가지 속에 다 주셨습니다. 그 한 가지가 뭐냐? 현장에서 생명운동하는 전도에 방향 맞추게 될 때에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 책임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전도도'가 아니라 '전도만'을 위한 교회가 이 시대에 필요합니다. 정말로 훗날에 기억될 교회로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계속 쓰임 받는 교회는 어떤 교회냐? 교회들마다 다 전도합니다. 전도 안하는 교회가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전도 말고 실제로 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전도. 그래서 전도만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붙잡게 될 때 하나님은 여기에 모든 것 더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이 한 가지 붙잡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 중심 속에 사라지지 말아야 될, 늘 붙잡고 인도받아야 될 부분이 있다면 진짜 이 교회를 통해서 생명운동이 일어나는, 전도에 방향 맞추는 이 일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속에 여러분의 사업이 나와야 되는 것이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일과 직업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한 가지 붙잡았는데 분명히 축복하셨다라는 사람들이 성경에 응답 받은 자들의 증거입니다. 혹시나 하나교회 오셔서 다른 좋은 일을 기대한다면 다른 교회 가셔도 좋습니다. 하나교회는 전도만을 위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모든 축복을 다 약속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자칫 빠질 수 있는 것이 일과 프로그램 등입니다. 교회는 전도 때문에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전도 때문에 프로그램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제대로 생명 운동이 일어나느 ㄴ이 일 때문에 교회는 바빠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것 때문에 바쁘면 안 됩니다. 나중에 가서 아니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운동, 전도, 이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전도의 축복을 누립니까? 그냥 사람을 데려오는 게 아닙니다. 먼저 전도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한 사람한 사람이 먼저 정화한 복음을 알고 누려야 됩니다. 이 스데반은 정확한 복음을 알고 그것을 말하는 전도 한 마디를 해서 죽게 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전도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들이 정확한 복음을 알고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혹여나 수십 년 신앙생활 해오면서도 복음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갖고 있는 모든 지식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 모든 것을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알고 깨닫고 보니까 자기가 붙잡고 있었던 지식과 지난날의 배경이 그리스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도록 그리스도 알지 못하도록 했구나. 그래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배설물로 여긴 그것이 그냥 없어졌느냐? 아닙니다. 진짜 복음이 정리되고 깨닫고 나니까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그 모든 것들이 복음 증거하는 이 일에 유익하게 쓰임 받은 사실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전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많은 일들 때문에 복음을 놓쳐버린다면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많은 프로그램들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죄 중의 죄입니다. 진짜 죄 중의 죄는 뭐냐? 교회 안의 일들 때문에 프로그램에 빠져서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게 죄 중의 죄입니다. 가장 중요한 참된복음을 이해해야 하는데 이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인생의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속에서 해방되는 것을 가지고 복음이라 이야기합니다. 특히 교회 다니는 성도들 조차도 이 문제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에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에 보면 12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12가지가 무엇입니까?
모든 인생은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5에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게 지금도 이 세상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해도 하나님처럼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안에 살도록 지음 받은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 속에 있어야 되는 것이고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야 되는 것이고 우리 인생의 인생은 하나니 안에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데 모든 인생의 문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6장에 보면 이 땅의 모든 문제의 시작이 발전하는 것 같고 번성하는 것 같지만 이 두 가지와 더불어 지금 타락도 더욱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세상처럼 보이지만 자꾸 무너집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처럼. 그래서 창세기 3장, 6장, 11장, 이것이 이 땅의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아니 우리 인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문화화 되어서 귀신의 문화로 점술의 문화로 우상의 문화로 우리를 속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1-12에, 사도행전 16:16-18에, 사도행전 19:8-20에 보면 그 시대에 귀신 문화, 미신 문화, 또 점술과 우상의 문화로 모든 인생을 멸망길로 끌고 갑니다. 문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엄청난 힘이 있는 것입니다. 문화를 바꾸는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들이 미신 점술 우상에 점점 빠져들면서 그 문제들이 우리 개인에게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타나느냐? 행복하고 싶고 성공하고 싶지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요한복음 8:44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합니다. 행복하고 싶은데 우리 아비가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우리도 모르게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됩니다. 몸부림치는데 자꾸 엉뚱한 것을 붙잡게 됩니다. 그게 바로 출애굽기 20장에 말씀하는 우상숭배를 가져오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여기에 몸부림을 치는데 점점 다른 것에 빠집니다. 그것이 계속 가중되는데 거기서 영적문제 정신문제 마음의 문제 등 온갖 문제가 나옵니다. 육신의 문제까지 나옵니다. 희망을 가지고 노력합니다만 결국 우리 인생의 지옥의 배경 가지고 살다가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느냐? 아닙니다. 자녀들에게 더 큰 영적인 유산들을 물려줄 수밖에 없는 이 인생의 문제를 누가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은 그 어떤 것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 12가지 인생의 문제 속에서 해방되어지는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1-2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러분, 복음은 해방입니다. 인생에 절대 해결할 수 없는 12가지 문제 속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바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 오늘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이 그리스도를 설명했습니다. 유대인들 핍박자들이 스데반을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예수가 정말 부활했느냐, 예수가 정말 메시야 맞느냐,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 그 때 스데반이 그렇다해도 그럴 것인데,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구약의 성경들, 유대인들이 지도자로 믿고 있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죽인 그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요, 메시야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열 받아서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둘러싼 현장 속에서 다른 말을 해도 되는데 스데반이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분명히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을 몰랐겠습니까?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회피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이 죽인 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시다. 그분이 바로 메시야다." 라고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스데반이 용기를 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그 현장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축복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을 버릴 수 있었다는 것.
여러분,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밀이, 죽을 수 있었던 중요한 비밀이, 웃으면서도 순교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밀이 있다며 스데반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현장에, 그 장소 속에, 그 문제 속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실을 누리는 축복을 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속으로 들어가는 우리 하나교회 식구들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 충만
그러면 그 성령의 충만함의 비밀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어떻게 그 성령의 충만함을 누릴 것인가? 오늘 본문에 스데반을 보면 순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돌에 맞아 순교할 것인가?' 생각해봤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 자리에 있다면 순교할 자신이 있습니까? 마태복음 24-25장,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앞으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더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평안히 예수 믿는 시대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 당시에 순교로 복음의 역사 가운데 섰던 사람들처럼 말세에 엄청난 어려움과 핍박들이 심지어 죽는데까지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어진바 되는 그런 자리가 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이르렀다면 과연 여러분이 순교할 수 있겠는가? 저는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나는 이 상황 속에서 과연 순교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제가 답으로 가진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그렇다. 나는 할 수 없지만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순교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 사형장 현장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까 누가 힘을 주시는가? 하나님이 순교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안 되지만,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두려워 떨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우리 또한 순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그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하시면 내 모든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적합하게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여러분 산업을 위해서 '성령 충만 주옵소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체질을 아시고 여러분의 체질에 맞도록 하나님이 가장 정확하게, 가장 선하게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이 방법을 요구했는데, 나는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원하는데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대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인도해나가시게 되어있다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어려움 당하면 그 어려움 당하는 현장 속에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신다라는 것. 그래서 자녀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세요. 성령 충만하게 기도만 해놓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산업현장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나는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데…….' 그 계획 잡지 마시고, 일단 '하나님이 산업현장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그 산업현장에 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고 가장 필요한 은혜를 주시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스데반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길이 열렸고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성령께서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데 55-56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리스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이 스데반에게 힘을 주셨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지금 어떤 현장입니까? 돌로 맞는 현장입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여러분, 맞는 아픔 그것만 해도 엄청난 것인데 할 말 다 했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에게 돌질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60절에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러분, 성령 충만하니까 그 현장에 가장 필요한 은혜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방법대로 방식대로 기도하지 말고요. 어디에서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그 현장에, 그 장소에, 그 조건에 가장 필요한 은혜를 주시면서 하나님이 승리토록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기도하면서 본 것이 있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현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중요한 현장들마다 하나님이 친히 당신을 나타내셨어요. 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도 보면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다니엘 시대에 다니엘에게도 하나님의 보좌의 축복을 보여주셨습니다. 다니엘 7장을 봅시다. 얼마나 중요한 현장들마다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영광스러운 부분들을 보여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분들을 오늘 스데반도 보고 누렸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 7:9-10 "내가 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타오르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13-14절 같이 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 현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하나님이 그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의 축복을 보여주셨다라는 사실. 오늘 스데반이 있는 이 현장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하늘 문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스데반이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여기에 스데반이 인자가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섰다 앉았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섰다라는 부분은 이 한 곳에만 표시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주님의 관심이 집중되어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주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느냐? 최고로 관심 갖는 그 현장에 정말로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복음전하는 사람이 있을 때, 복음 전하는 사역자들이 있을 때 그 현장에 주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 성령충만함 가운데 복음 증거하는 그 현장에 주의 관심이 집중되어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기도하고 나면 그때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계속해서 응답이 나오는데 그 응답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응답들로 찾아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움당할 때 그 때만을 생각합니다. 문제당하면 그 문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명히 성령 충만함 다음에 그 역사는 계속해서 그 다음 다음 응답으로 와진다는 사실이에요. 특별히 그때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고, 우리가 예배드리면서 은혜 받는 이 시간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뒤에 두고두고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치도 못할 엄청난 역사들이 계속해서 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시간에 성령 충만함만 기도하면 됩니다.
세상에 육신적인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연극 무대의 뒤편을 아십니까? 연극이 이뤄지면 그 두매 뒤편에서는 옷 갈아입고 쫓아나가고, 또 옷 갈아입고 쫓아나갑니다. 그래서 연극 무대 뒤편은 엉망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화려해보이지만, 그러나 그 뒷면은 연극무대 뒤편과 같이 엉망입니다.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것들은 그때뿐이지만 우리가 정말 성령 충만함을 구하고 나아갈 때 두고두고 하나님의 응답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오늘 스데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 복음 한번 전하고 죽었는데 그 이후에 일어나는 역사들을 보세요. 당장 8장에 보면 인종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8장에 빌립이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사마리아성은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는 민족입니다. 혼혈족이라고 해서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민족인 사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에 이후에 바로 이어서 사마리아 성에 복음이 증거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 성에 큰 기쁨이 충만한 인종문제가 해결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8:26에 보면 저주받은 땅 에디오피아. 기근과 가난으로 세계가운데 가장 어려움 당하는 아프리카입니다. 처음 복음 받은 에디오피아가 아프리카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울이 회심했는데 그 당시에 사울이 회심했던 사건은 유대사에 큰 충격이 될 수밖에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을 앞서서 핍박하는 사울이 돌아왔다? 그것도 율법학자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로서 율법에 뛰어난 이 지식인이 예수를 믿었다? 그것은 유대사에 엄청난 충격입니다. 그런데 그 사울이 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사울의 고백 중에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중의 괴수 죄인이라는 고백은 제 생각에는 아마 말은 안하고 있지만 스데반의 그 죽음을 바울이 머릿속에 기억하면서 한 말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든지 이 사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로마 이달리아대 백부장 고넬료가 돌아오게 되고 결국 환란을 통해서 흩어졌는데 그 흩어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안디옥교회를 세우고 그 안디옥 교회로 말미암아 세계 선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지금 성령 충만함을 구했는데 복음 붙잡고 기도했는데 그 나머지 결과는 하나님께서 작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누리세요.
여러분, 그래서 가정을 위해서 성령 충만 기도하세요. 자녀를 위해서 성령 충만 기도하세요.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그 시간에 가장 필요한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생명 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지 마시고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생명 걸 수밖에 없는 자리에 앉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입니까? "복음, 생명운동" 여기에 생명 걸 수 있는 축복된 가치를 우리에게 깨닫게 하셨습니다. 내가 어디에 생명 걸 것인가? 찾지 말고, 이미 우리에게 그 자리에 앉게하셨다는 그 사실을 확인하시고 그와 더불어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결국 사람은 관심대로 살다가 죽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 관심. 주님 앞에 서는 날 까지 우리 하나교회는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증거는 이 관심 가운데서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 현장에, 그 장소에, 그 시간에 가장 필요한 은혜로 채우시는 역사 이 사실을 붙잡고 승리하는 전도자의 삶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11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누린 사람
(행7:54-60)
서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기도의 힘과 예배의 축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강한 신념과 사상 혹은 많은 불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가 안되고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기에 작은 일에도 넘어지고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의 비밀을 누리는 자는 만나는 자들마다 그것이 전달되어, 영적인 힘이 생겨나고 다른 것들도 저절로 깨달아지고 보여집니다. 이 축복을 누린 사람이 바로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통해 전 세계로 복음이 확산되어지는 축복을 계속(이 말을 하고 자니라)해서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생명을 걸 만한 일인지’,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은지’ 점검하고, “어떤 임종을 맞이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스데반처럼 쓰임 받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스데반의 삶
(1)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최고의 역사를 진행하시는데, 이 일에 쓰임 받고 있는가?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받은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말씀을 성취하심
2)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도 복음 전할 자를 선택하고 계심 (그 현장에 내가 서 있는지 확인하라!)
(2) 스데반은 가장 중요한 시간과 내용과 현장을 알고, 여기에 자기의 생을 걸었습니다.
1) 우리는 엄청난 복음을 받고도 그것의 가치를 모르면, 많은 응답을 놓치게 됨
2) 정말 복음을 위해 사는 가운데, 여기에 우리의 생을 걸만한 가치를 깨달아라!!
(3) 교회의 존재 목적이자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운동, 생명운동입니다. (오직 전도!!)
1) 전도는 단순히 교회에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임
2) 하나교회는 훗날에 기억될 교회로써, 전도‘도’가 아닌 전도‘만’을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함
a. 정확한 복음을 알고 누려라 (죄 중의 죄는 교회안의 다른 일이나 프로그램으로 복음을 못누리도록 하는 것)
b. 복음은 절대 해결할 수 없는 12가지 문제에서 해방되는 것임
(12가지 문제 = 창3,6,11장 문제의 시작 / 행13,16,19장의 문화(미신,점술,우상)로 파고듦 / 불신자 6가지 상태)
c.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것임 (행7:55절, 스데반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담대히 이 고백을 하고 순교함)
2. 성령충만
(1)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충만 할 때, 가장 필요하고 적합하게 역사하십니다.
1) 우리의 가장 정확하고 선한 기도는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는 기도임
2) 스데반의 기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옵소서(59절) /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2)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현장마다 최고로 관심을 집중하고 계십니다.
1) 스데반은 최고로 중요한 현장에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봄(55-56절)
2) 성경에는 중요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항상 나타나심(마3:16-17 / 단7:9-10,13-14)
(3) 성령의 충만한 이후에는, 두고 두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1) 인종문제가 해결 되고(행8:4-8), 아프리카에 처음 복음이 선포되며(행8:26-40) 사울이 회심함(행9장)
2)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돌아오고,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졌던 자들이 모여 안디옥 교회를 세움
결론: 우리는 생명 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앉게 하신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복음운동이자 생명운동입니다. 이 축복된 가치를 깨닫고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결국 관심대로 살다가 죽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그리스도를 누리고 증거함으로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게 될 때 그 시간, 장소에 가장 필요한 것을 채우는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한주간 이 사실을 붙잡고 승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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