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2014-09-28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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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8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21:1-14)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그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 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게 하룰르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일곱 집사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구너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21:1-14
■ 할렐루야, 모든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성곽 없는 성읍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오늘 이 한날 온종일토록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최고의 시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고, 또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아도 놔둬도 되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선순위가 참 중요합니다. 먼저 해야 될 것이 있고요.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붙잡을 수 있어야 중요한 응답을 우리가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결국 이 땅의 우리의 삶을 보이는 육신적인 삶이 있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적인 것은 잠시 잠깐이고 허상이다, 라고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 영원히 남는 것이고, 그게 실상이다. 그렇게 말씀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세상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을 가지고는 우리의 근본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죠. 신자라면 어떤 사람이 신자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보이는 모든 것들을 투자하는 사람이 성도요 신자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안 믿으니까 보이는 것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그게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육신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장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 가운데서도 우리의 모든 삶의 원인, 배경을 보면 두 가지 입니다. 사단이냐? 그리스도냐? 그리스도 배경 가운데 있느냐? 사단 배경 가운데 있느냐?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경은 이 두 가지 속에서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냐, 악령의 역사냐?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 하는 것만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 분명히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 두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배경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복음을 알아야 되는 것이고, 복음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복음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 사람 편으로 이해하면 외적인 것이 있고, 내적인 것이 있습니다. 내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외적인 것은 보이는 것을 말하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외적인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적인 것을 중요시 여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무엘상16장 7절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시편 34편 18절에도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도다”했습니다. 로마서 2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기껏 본다는 것이 외모를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에 얼마만큼 힘이 있느냐? 이것이 바로 동적인 것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힘, 그 힘이 어디서 오게 된 것인가를 우리가 살펴봄으로 우리가 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전도자로써 참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21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겪어야 될 환란과 핍박에 대한 부분들을 말씀하시는 것의 시작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의 사역을 보면 1차 전도여행이 있었고, 2차 전도여행이 있었고, 3차 전도여행이 있었습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나서 21장부터 새로운 바울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지는데, 21장에서 28장까지는 예루살렘에 바울이 올라가서 겪어야 될 환란과 핍박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런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면서도 참 자유로울 수 있었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걸 오늘 우리가 찾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감으로 엄청난 핍박과 환란이 있었습니다만 그 환란과 핍박을 이길 수 있었던 내적인 힘의 비밀, 바울이 그 힘의 비밀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오늘 살아가는 세상 속에 문제와 사건 속에서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모든 답들이 오늘 본문 속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들은 오늘 우리가 찾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1.
사실은 마지막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 앞으로 영적인 엄청난 혼란들이 일어나게 되어있고, 엄청난 핍박과 환란들이 우리의 걸음 속에도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현장 속에서 우리가 끝까지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일까? 그 부분들에 대한 답들을 오늘 찾아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 13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힘입니다. 참된 바울의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죄수로 끌려가는 신분이었지만 죄수가 죄수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 힘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말씀하고 있는데 13절을 같이 읽어보십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의 내적인 중심이 여기에 나옵니다. 바울이 가졌던 그 삶의 내적인 중심에 무엇이 중심에 담겨져 있었느냐? 바울의 내적인 중심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13절에 나오죠. 한 마디로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게 바울의 내적인 중심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생애를 잘 아시잖아요. 바울은 좋은 가문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냐민 지파로 왕손인 좋은 가문 속에서 태어났고요.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바로 가말리엘 문화에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 당시 최고가는 학자 밑에서 공부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성공자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성공자의 삶을 살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여러분,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으로 다른 사람은 그 당시에 최고 시민권인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주고 사는 시대인데,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청난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바울이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른 길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원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가지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른 삶이고, 바른 길이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원수의 삶을 산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듯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할 때에 거기에 앞장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죠. 또 복음을 전하는 마가다락방, 초대교회가 없어져야 한다고 핍박 가했던 사람이 누구냐? 바로 바울입니다.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 사람, 흩어버렸던 사람이 누구냐? 바울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어느 지역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동일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도장을 받아가지고 다메섹 도상에 올라가다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자기의 생애가 180도 완전히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가지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서 있었구나!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그 한 가지 비밀을 몰라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교회들을 핍박하는 자리에 내가 서 있었구나! 이 사실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만나는 순간에 자기의 삶이 멸망의 자리에 있었던 사실을 깨달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나쁜 사람이 아닌데 예수 그리스도 한 가지 그 비밀을 몰라가지고 멸망의 삶을 살아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주심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지 않도록 생명으로 인도하시도록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냐? 우리가 예수님 모르고 멸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멸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그 자체가 멸망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의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여러분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문을 닫고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망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않습니다. 망했다 할지라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을 많이 봅니다. 진짜 멸망은 예수 모르는 것이 멸망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멸망 받는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알던 모르던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바울이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은 것인데, 정말로 이 땅에 모든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사단의 손에 붙잡혀가지고 결국 재앙 가운데, 지옥 배경 가운데 살아가는구나. 하나님이 없는 삶이 저주의 삶이구나. 이 사실을 바울이 바르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울은 거기에 자기의 모든 생을 걸기로 작정했어요. 그래서 자기는 이 복음 전하다가 죽는다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되겠다. 다른 것은 내세우지 않았어요. 오직 그리스도! 바울의 중심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바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13절에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게 바울의 중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들, 어떤 동기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자녀의 문제들 때문에, 사업의 문제들 때문에, 또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을겁니다. 또, 병들 때문에 병 고침 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신앙 생활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우리의 중심에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중심이, 우리의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느냐? 오직 그리스도여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모든 답을 다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핍박도 상관없다, 죽음도 상관없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중심이 있었던 사실을 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이 예술적인 안목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예술적인 안목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그 당시에 최고의 헬라의 철학과 문화와 예술의 도시 아덴, 고린도, 에베소의 사역이 주를 이루었지 않습니까? 바울의 사역의 근거지가 아덴과 고린도와 에베소 지역입니다. 아덴, 고린도, 에베소 지역은 그 당시 헬라 철학의 중심지이고 모든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편지를 보면 한 번도 거기에 대한 상황들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고작 한 것이 있다면 여러분 아시듯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만, 아덴에서 아덴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희들을 보니까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렇게 말한 것밖에 없지, 거의 문화나 어떤 그런 부분에 관해 전혀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일컬어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이 바울은 어떤 예술적인 안목들, 감각들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성경을 보면, 성경 열세 권, 또 히브리서까지 넣으면 열네 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예리한 지성들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지식을 가진, 배경도 있고 지식을 가진 사람 아닙니까, 그 당시에?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사실 어느 지역을 돌아보면서 그 지역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안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다녀오면 거기가 어떻고 늘 말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고 또 어떤 만남이 있으면, 그런 것과 연결되는 어떤 일들이 있으면, 또 지난날 다녀왔던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늘 자랑도 하고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어디에 가면 그 현장을 놓고 반드시 지난날의 다녀온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디 갔다 오면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자랑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을 보면 전혀 자랑하는 것이 없고 자기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또 그 지역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부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전혀 바울이 그런 부분을 몰라서 그러냐? 그건 아닙니다. 바울의 중심에는 오직 그리스도, 그 외의 다른 것에 빼앗길 시간이 없다는 걸 바울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만 보고 그리스도로 보고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만 선포하고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만 만나는 그 삶이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왜냐? 중심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날 살펴보았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무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이게 바울의 중심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죄수로 가는 걸음 속에서 바울이 베스도 각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 각하가 바울을 보고 뭐라 하느냐? 네가 미쳤구나, 이야기했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그 때 26장 29절에 보면 바울이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원합니다 했습니다. 완전히 예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모든 것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바울의 중심입니다. 만나는 사람도 성경에 보면 전부 그리스도와 관계된 제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오늘 짧게 읽은 21장의 본문에 봐도 1절에서 4절에 보면 지역이 나오고 그곳의 형제들이 나오고 전부 제자들 중심으로 한 만남입니다. 8절에 보면 이십 년 만에 빌립도 만나게 되고, 또 오늘 읽진 않았습니다만 16절에 보면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모든 만남도 제자를 중심으로 한 만남이 전부 다였습니다. 왜냐? 그의 중심에는, 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백했지 않습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것,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까 빌립보 3장 8절에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것에서도 자기 배경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21장부터 28장까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있어서 자기가 겪은 간증에 대한 부분들을 하는데, 그 간증을 보면 자기의 배경을 자랑하는 것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난 것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 만난 것, 그 간증을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 있느냐? 우리의 중심에, 내적인 중심에 오직 그리스도될 때에 여기에 모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빌립보 3장 12절에 무어라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혀 있다 했습니다. 그것을 잡으려 쫓아간다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왜 너희들이 울어 내 마음을 흔드느냐? 이 말의 이면에는 나는, 그러면서 바로 이어서 말하지 않습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 이것이 바울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자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문제와 사건들, 앞으로 영적인 엄청난 혼란과 함께 문제들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을 가져야 하는데 내적인 중심에 오직 그리스도, 바울이 가졌던 이 중심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결단입니다. 13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여기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 전도자가 가졌던 내적인 결단,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죽음을 각오했단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복음 그 속에 있는 가치를 제대로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영원한 복음, 그 복음의 영원한 가치를 제대로 발견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걸 만큼 가치가 복음 속에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 복음 때문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했습니다. 그 복음 때문에 나는 죽어도 괜찮다고, 이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의 결단을 보게 됩니다. 내적인 결단입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바울이나 또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제자들을 보면 예수 믿는 이유들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당했지 않습니까? 어떻게 참고 견뎠을까? 그런 생각들을 한 번 해 봤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어려움들. 여러분, 로마의 여러 황제가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많이 핍박했습니까, 교회사 속에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 핍박과 어려움들을 견뎠을까, 참았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니다! 그들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습니다. 핍박 받는 그것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견디고 또 참은 것이 아니라 핍박 받고 어려움 당하고 죽는 그 자리가 그들은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들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왜 가장 행복한 시간이냐?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그 복음 때문에 내 생을 바치는 것이 가장 귀중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참된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증거하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는 그 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 그것을 기뻐했다 했습니다. 여러분, 이 행복을 가져야 합니다.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느냐? 진짜 복음의 가치를 알고 결단 내리게 될 때, 또 진짜 복음의 가치를 알고 나아갈 때 이 결단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속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참된 힘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응답 받으면 기뻐하고 뭔가 좀 잘 되면 기뻐하고 기도했더니만 응답 받았다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의 기쁨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쩌다 보니, 내가 어떻게 이렇게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 그것 때문에 기뻐했다 했습니다. 우리와 기쁨이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수준이 달랐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은 자리에 이르는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바울도 사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핍박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핍박 속에서도 그 핍박 받는 자리에 넉넉히 죽을 것도 각오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있는 참된 기쁨을, 참된 복음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참된, 거기에 대한 결단이 있었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에 죽 보면, 지난주에 이어서 성경을 죽 보면 이미 바울에게 여러 번 환난에 대한 예고들이 있었습니다. 예언들이 있었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20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면서 23절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사실에 대한 예언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넘어가서도 4절에 보면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성령께서 이미 감동을 주셔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이미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10절, 11절에도 보면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빌립의 집에 들어가니 빌립의 딸 네 명이 있는데 시집을 가지 않고 처녀로 있으면서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그 집에 들어가서 이 바울에 대해 예언하는데,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묶어 가지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바로 이 띠 임자가 유대인의 손에 붙잡혀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넘겨지리라, 예루살렘에 가면. 예언했습니다. 자,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두 번, 세 번, 그것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핍박이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 그래서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한 번도 아닌데, 두 번, 세 번, 확실한 성령의 음성이다, 그렇게 하고 안 올라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 바울은 이미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확실한 언약을 붙잡고 있었고 그 언약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 이 확실한 결론을 자기의 결론으로 붙잡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이 사도행전 1장 8절을 자기의 결론으로 붙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15절에 무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라 말씀하면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의 약속, 동일한 약속 아닙니까? 사도행전 1장 8절과 동일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과 함께 사도행전 20장,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24절에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24:20)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나는 로마까지 간다. 그 속에 핍박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결국 가이사 황제 앞에 내가 서서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이 결론을 바울은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본문을 자세히 주의해서 살펴보면,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그 부분들이 있었지만 돌아가라는 말은 없어요.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서 돌아가라는 말은 없어요. 또 성경을 자세히 보면 왜 거듭거듭 반복해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 부분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을까? 결국 환란과 핍박을 준비하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고 바울에 중심의 결론은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가는 길이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될 것인가? 중요한 사실에 결론을 가지고 결단내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결론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이미 영원의 문제가 해결된 결론을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의 문제가 해결된 결론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많은 사람이 영혼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 지금 방황하고 살아요. 우리의 삶이 결론 내려지는 삶을 살지 않으니까 방황하는 삶을 살아요. 내세, 천국에 대해서 모르니까 이 땅의삶 자체가 히브리서 2장1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평생 마귀에게 매여 종 노릇 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믿는다는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줄 아십니까? 영원이 해결된 축복이에요. 요한복음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했어요. 그와 더불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믿는 순간에 이미 천국의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내세 문제는 해결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원한 문제, 내세문제, 자기가 가야될 인생의 길에 대한 분명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으니까 많은 것들을 가지고 많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삶 자체가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봅시다. 많은 것을 가졌죠. 많은 것을 배웠죠. 또 여러분 주위에 많은 상황들이 있죠. 행복합니까? 평안합니까? 내 인생에 가야될 길을 알지 못하면 우리 인생의 결론, 우리 인생의 가야될 길을 알지 못하면 결국은 방황할 수밖에 없고 염려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가 가야 될 길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가야 될 길을 말씀하시는데 그 길이 무엇이냐? 전도자의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셨어요. 여기에 대한 결단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자의 길을 갈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교회를 부르셨어요. 그 증거가 뭐냐?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을 알게 하신 것. 그 어느때 보다도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복음을 누리게 하신 것. 전도자의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그 증거가 뭐냐? 우리 하나교회를 만난 만남의 축복. 또 복음 전하는 주의 종들과의 만남의 축복. 특별히 산업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들이 있지만 복음전하는 이 이유 때문에 생명걸고 결단한 우리 중직자들과의 만남의 축복. 분명히 이런 증거들을 보면 저와 여러분을 이 한 시대에 전도자로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가야될 우리의 결론, 우리의 결단내려야 될 길이 뭐냐? 전도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
어제 우리교회에서 렘넌트 데이를 했습니다. 메시지 이전에 상임위원회 모임이 당회실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류광수 목사님과 많은 상임위원 목사님들, 우리 개혁 총회의 총회장님과 대구의 많은 목사님들이 참여하시고 여러 가지 보고가 되어지는 가운데 우리교회의 렘넌트 2명이 자기의 기도제목과 비전을 이야기 했어요. 둘 다 자기 기도제목을 이야기 했는데 중학교 3학년 여자 아이는 외교관이 자기의 비전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제목을 이야기 하고 비전을 이야기 하는데 전혀 원고를 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해요. 너무나 확신있고 당당하게 자신있게 해요.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비전과 기도제목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 아이가 자기 비전을 어디에서 찾아냈느냐? 전부 말씀 속에서 찾아냈어요. 그 아이의 비전을 들으면서 아이가 매주 마다 강단에서 나오는 말씀을 놓치지 않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알았어요. 지난 주에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오는 나의 생명 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부분들을 가지고 자기의 마지막 간증, 비전에 대한 마무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에 진짜 나는 복 받은 목회자구나!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인데 그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전혀 떨지도 않고 확신 가운데 말씀 속에서 나온 기도제목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중에 결론으로 잡았어요. 이 아이가 자기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참 내가 행복한 전도자의 길을 가는 것이 맞구나! 여러분 우리하나교회 성도들, 연세 드신 어른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입만 열면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 복음만 말합니다.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이 한 시대에 전도자의 길을 가도록 부르신 증거 중에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바로 전도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그 증거입니다. 여러분 이 결론을 여러분 가지시고 이 결론 가운데 결단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세상에서 알수 없는 참된 힘을 얻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중심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그런데 중심을 바로 세우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됩니다. 그 중심 하나 때문에 다 회복되는데 그 비밀이 뭐냐?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중심 오직그리스도. 이것이 우리의 중심에 딱 있게 될 때 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 회복되어지는 그 증거들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그리스도 내적 중심에 딱 가지시고 이를 위해서 나는 죽어도 좋다는 이 결단 속에 나는 그 어떤 사람이 뭐라고 한다 할지라도 나는 전도자의 길을 간다. 이 결론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 가운데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중심인 오직그리스도, 이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 깨닫고 여기에 죽음조차 각오하고 결단했던 바울의 내적인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마지막 시대에 현장을 살리는 전도자로 승리하는 우리 모든 하나교회 성도들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4년 9월 28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21:1-14)
서론: 생활 속에서 중요한 것이나 우선순위가 있듯이,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보고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허상)은 잠시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실상)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히1:1). 실제로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두 배경(그리스도냐, 사탄이냐)이 있기 때문에 최선, 열심,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닌 더욱더 복음을 알고 복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중요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삼상16:7, 시34:18, 롬2:11). 우리에게 내적인 힘이 있다면 동적인 것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처럼 핍박과 환란 중에 자유로울 수 있는 힘(비밀)을 누리며 끝까지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1. 내적 중심 - 오직 그리스도
(1) 왜 오직 그리스도 할 수 밖에 없는가?
1) 예수 그리스도 한가지 모르면 - 바른 삶, 좋은 길을 가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원수의 삶, 멸망의 삶을 살아감
2) 우리의 신앙생활(중심, 동기)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로 되어지는 것임
(2) 바울의 생을 통한 중심 - 오직 그리스도
1) 오직 그리스도만 보고 듣고 말하고, 만남 역시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만 만남(빌3:7-8 나머지는 모두 배설물)
2) 철학, 문학, 예술의 중심지(아덴, 고린도, 에베소)에서도 바울의 관심과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뿐!!(행26:29, 빌3:12)
2. 내적 결단 - 죽을 것도 각오
(1) 복음 속에 있는 가치를 발견하면 생명을 걸 수 있습니다.
1) 억지로 견디고 참은 것이 아니라,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는 그 자리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됨
2) 그리스도 때문에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음(행5:42)
(2) 바울은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의 결론을 붙잡은 사람이었습니다.
1) 바울은 거듭되는 성령의 증언과 예언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환란과 핍박을 이미 알고 있었음(행20:23, 행21:4,11)
2) 그 과정 속의 핍박 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로마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을 결론으로 붙잡았음
(3) 결론을 가지고 가는 길이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1) 결론이 없으면 삶 자체가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평생 사탄의 종노릇함(히2장)
2) 전도자의 길을 가도록 부르신 것에 대해 결단하라!! (복음과 하나교회, 전도자와 중직자를 만난 것 자체가 그 증거)
결론: 우리의 중심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반대로 중심을 바로 세우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됩니다. 내적인 중심의 비밀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중심에 있게 될 때, 이것 하나 때문에 모든 것 회복될 그 증거를 주실 것입니다. 한주간 이를 위해서 죽어도 좋다는 그 결단 속에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전도자의 길을 가시며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과 그리스도의 배경 속에 내적인 힘이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내적 중심이 오직 그리스도가 되게 하셔서, 우리의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는 큰 결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한주간 복음 속에 있는 참 가치를 발견하며 세계복음화의 결론속에서
큰 기쁨과 행복함으로 전도자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21:1-14)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그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 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게 하룰르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일곱 집사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구너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21:1-14
■ 할렐루야, 모든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성곽 없는 성읍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오늘 이 한날 온종일토록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최고의 시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고, 또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아도 놔둬도 되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우선순위가 참 중요합니다. 먼저 해야 될 것이 있고요.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볼 수 있고 붙잡을 수 있어야 중요한 응답을 우리가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결국 이 땅의 우리의 삶을 보이는 육신적인 삶이 있고,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삶이 있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육신적인 것은 잠시 잠깐이고 허상이다, 라고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 영원히 남는 것이고, 그게 실상이다. 그렇게 말씀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세상을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것을 가지고는 우리의 근본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죠. 신자라면 어떤 사람이 신자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보이는 모든 것들을 투자하는 사람이 성도요 신자입니다. 그러면 불신자는 믿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안 믿으니까 보이는 것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 그게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육신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장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 가운데서도 우리의 모든 삶의 원인, 배경을 보면 두 가지 입니다. 사단이냐? 그리스도냐? 그리스도 배경 가운데 있느냐? 사단 배경 가운데 있느냐?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경은 이 두 가지 속에서 일어납니다. 성령의 역사냐, 악령의 역사냐?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 하는 것만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 분명히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 두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배경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복음을 알아야 되는 것이고, 복음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복음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것들 가운데 특별히 우리 사람 편으로 이해하면 외적인 것이 있고, 내적인 것이 있습니다. 내적인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외적인 것은 보이는 것을 말하고요. 그런데 사람들은 외적인 것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적인 것을 중요시 여기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적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사무엘상16장 7절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시편 34편 18절에도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도다”했습니다. 로마서 2장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기껏 본다는 것이 외모를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에 얼마만큼 힘이 있느냐? 이것이 바로 동적인 것을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힘, 그 힘이 어디서 오게 된 것인가를 우리가 살펴봄으로 우리가 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전도자로써 참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21장부터 28장까지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겪어야 될 환란과 핍박에 대한 부분들을 말씀하시는 것의 시작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의 사역을 보면 1차 전도여행이 있었고, 2차 전도여행이 있었고, 3차 전도여행이 있었습니다.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나서 21장부터 새로운 바울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지는데, 21장에서 28장까지는 예루살렘에 바울이 올라가서 겪어야 될 환란과 핍박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런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면서도 참 자유로울 수 있었던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걸 오늘 우리가 찾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감으로 엄청난 핍박과 환란이 있었습니다만 그 환란과 핍박을 이길 수 있었던 내적인 힘의 비밀, 바울이 그 힘의 비밀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오늘 살아가는 세상 속에 문제와 사건 속에서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모든 답들이 오늘 본문 속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 부분들은 오늘 우리가 찾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1.
사실은 마지막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 앞으로 영적인 엄청난 혼란들이 일어나게 되어있고, 엄청난 핍박과 환란들이 우리의 걸음 속에도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현장 속에서 우리가 끝까지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일까? 그 부분들에 대한 답들을 오늘 찾아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 13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힘입니다. 참된 바울의 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죄수로 끌려가는 신분이었지만 죄수가 죄수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 힘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말씀하고 있는데 13절을 같이 읽어보십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의 내적인 중심이 여기에 나옵니다. 바울이 가졌던 그 삶의 내적인 중심에 무엇이 중심에 담겨져 있었느냐? 바울의 내적인 중심은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13절에 나오죠. 한 마디로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이게 바울의 내적인 중심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생애를 잘 아시잖아요. 바울은 좋은 가문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냐민 지파로 왕손인 좋은 가문 속에서 태어났고요.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바로 가말리엘 문화에서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 당시 최고가는 학자 밑에서 공부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와 더불어 이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말로 하면 성공자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성공자의 삶을 살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여러분,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으로 다른 사람은 그 당시에 최고 시민권인 로마시민권을 돈으로 주고 사는 시대인데,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청난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바울이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가지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른 길인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원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가지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른 삶이고, 바른 길이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인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원수의 삶을 산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듯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할 때에 거기에 앞장섰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었죠. 또 복음을 전하는 마가다락방, 초대교회가 없어져야 한다고 핍박 가했던 사람이 누구냐? 바로 바울입니다.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는 사람, 흩어버렸던 사람이 누구냐? 바울이었어요. 그런 가운데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어느 지역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동일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도장을 받아가지고 다메섹 도상에 올라가다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자기의 생애가 180도 완전히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가지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서 있었구나! 바울이 깨달은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그 한 가지 비밀을 몰라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교회들을 핍박하는 자리에 내가 서 있었구나! 이 사실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만나는 순간에 자기의 삶이 멸망의 자리에 있었던 사실을 깨달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나쁜 사람이 아닌데 예수 그리스도 한 가지 그 비밀을 몰라가지고 멸망의 삶을 살아가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주심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지 않도록 생명으로 인도하시도록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왜냐? 우리가 예수님 모르고 멸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멸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그 자체가 멸망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의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여러분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문을 닫고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망했다고 이야기 하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않습니다. 망했다 할지라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축복을 많이 봅니다. 진짜 멸망은 예수 모르는 것이 멸망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멸망 받는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알던 모르던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바울이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달은 것인데, 정말로 이 땅에 모든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사단의 손에 붙잡혀가지고 결국 재앙 가운데, 지옥 배경 가운데 살아가는구나. 하나님이 없는 삶이 저주의 삶이구나. 이 사실을 바울이 바르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울은 거기에 자기의 모든 생을 걸기로 작정했어요. 그래서 자기는 이 복음 전하다가 죽는다 할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되겠다. 다른 것은 내세우지 않았어요. 오직 그리스도! 바울의 중심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바울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13절에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게 바울의 중심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유들, 어떤 동기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자녀의 문제들 때문에, 사업의 문제들 때문에, 또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셨을겁니다. 또, 병들 때문에 병 고침 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신앙 생활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계속 우리의 중심에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중심이, 우리의 동기가 무엇이어야 하느냐? 오직 그리스도여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모든 답을 다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서 핍박도 상관없다, 죽음도 상관없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중심이 있었던 사실을 바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혹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바울이 예술적인 안목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예술적인 안목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그 당시에 최고의 헬라의 철학과 문화와 예술의 도시 아덴, 고린도, 에베소의 사역이 주를 이루었지 않습니까? 바울의 사역의 근거지가 아덴과 고린도와 에베소 지역입니다. 아덴, 고린도, 에베소 지역은 그 당시 헬라 철학의 중심지이고 모든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편지를 보면 한 번도 거기에 대한 상황들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고작 한 것이 있다면 여러분 아시듯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만, 아덴에서 아덴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너희들을 보니까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그렇게 말한 것밖에 없지, 거의 문화나 어떤 그런 부분에 관해 전혀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일컬어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이 바울은 어떤 예술적인 안목들, 감각들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 하면 성경을 보면, 성경 열세 권, 또 히브리서까지 넣으면 열네 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바울의 서신서입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예리한 지성들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문학에 대한 엄청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지식을 가진, 배경도 있고 지식을 가진 사람 아닙니까, 그 당시에?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사실 어느 지역을 돌아보면서 그 지역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히 안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에 다녀오면 거기가 어떻고 늘 말하지 않습니까? 시간이 지나고 또 어떤 만남이 있으면, 그런 것과 연결되는 어떤 일들이 있으면, 또 지난날 다녀왔던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늘 자랑도 하고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어디에 가면 그 현장을 놓고 반드시 지난날의 다녀온 모든 것을 다 끄집어내어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디 갔다 오면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자랑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을 보면 전혀 자랑하는 것이 없고 자기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또 그 지역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부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 전혀 바울이 그런 부분을 몰라서 그러냐? 그건 아닙니다. 바울의 중심에는 오직 그리스도, 그 외의 다른 것에 빼앗길 시간이 없다는 걸 바울이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만 보고 그리스도로 보고 그리스도만 말하고 그리스도만 선포하고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만 만나는 그 삶이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왜냐? 중심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만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난 날 살펴보았지 않습니까?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무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이게 바울의 중심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알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죄수로 가는 걸음 속에서 바울이 베스도 각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베스도 각하가 바울을 보고 뭐라 하느냐? 네가 미쳤구나, 이야기했습니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 그 때 26장 29절에 보면 바울이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원합니다 했습니다. 완전히 예수께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모든 것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습니다. 이게 바울의 중심입니다. 만나는 사람도 성경에 보면 전부 그리스도와 관계된 제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오늘 짧게 읽은 21장의 본문에 봐도 1절에서 4절에 보면 지역이 나오고 그곳의 형제들이 나오고 전부 제자들 중심으로 한 만남입니다. 8절에 보면 이십 년 만에 빌립도 만나게 되고, 또 오늘 읽진 않았습니다만 16절에 보면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머물려 함이라.” 모든 만남도 제자를 중심으로 한 만남이 전부 다였습니다. 왜냐? 그의 중심에는, 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백했지 않습니까? 자기가 가진 모든 것,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까 빌립보 3장 8절에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것에서도 자기 배경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21장부터 28장까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 있어서 자기가 겪은 간증에 대한 부분들을 하는데, 그 간증을 보면 자기의 배경을 자랑하는 것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난 것만,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 만난 것, 그 간증을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 있느냐? 우리의 중심에, 내적인 중심에 오직 그리스도될 때에 여기에 모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빌립보 3장 12절에 무어라 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혀 있다 했습니다. 그것을 잡으려 쫓아간다 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왜 너희들이 울어 내 마음을 흔드느냐? 이 말의 이면에는 나는, 그러면서 바로 이어서 말하지 않습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 이것이 바울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자로서 이 땅에 살아가는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문제와 사건들, 앞으로 영적인 엄청난 혼란과 함께 문제들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밀을 가져야 하는데 내적인 중심에 오직 그리스도, 바울이 가졌던 이 중심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 번째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결단입니다. 13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여기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 전도자가 가졌던 내적인 결단,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죽음을 각오했단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복음 그 속에 있는 가치를 제대로 발견했다는 말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영원한 복음, 그 복음의 영원한 가치를 제대로 발견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걸 만큼 가치가 복음 속에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 복음 때문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했습니다. 그 복음 때문에 나는 죽어도 괜찮다고, 이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의 결단을 보게 됩니다. 내적인 결단입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바울이나 또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제자들을 보면 예수 믿는 이유들 때문에 많은 어려움과 핍박을 당했지 않습니까? 어떻게 참고 견뎠을까? 그런 생각들을 한 번 해 봤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어려움들. 여러분, 로마의 여러 황제가 일어나서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많이 핍박했습니까, 교회사 속에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그 핍박과 어려움들을 견뎠을까, 참았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아니다! 그들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렇습니다. 핍박 받는 그것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견디고 또 참은 것이 아니라 핍박 받고 어려움 당하고 죽는 그 자리가 그들은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들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왜 가장 행복한 시간이냐?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에, 그 복음 때문에 내 생을 바치는 것이 가장 귀중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복음의 가치를 깨닫고 참된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사도들이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증거하는 일 때문에 핍박을 받는 그 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 그것을 기뻐했다 했습니다. 여러분, 이 행복을 가져야 합니다.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오느냐? 진짜 복음의 가치를 알고 결단 내리게 될 때, 또 진짜 복음의 가치를 알고 나아갈 때 이 결단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속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참된 힘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응답 받으면 기뻐하고 뭔가 좀 잘 되면 기뻐하고 기도했더니만 응답 받았다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도들의 기쁨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내가 어쩌다 보니, 내가 어떻게 이렇게 예수 이름 때문에 핍박 받는 자리에 서게 되었는가, 그것 때문에 기뻐했다 했습니다. 우리와 기쁨이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수준이 달랐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은 자리에 이르는 그것을 기뻐했습니다. 바울도 사실은 여러 가지 어려움과 핍박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핍박 속에서도 그 핍박 받는 자리에 넉넉히 죽을 것도 각오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속에 있는 참된 기쁨을, 참된 복음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참된, 거기에 대한 결단이 있었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에 죽 보면, 지난주에 이어서 성경을 죽 보면 이미 바울에게 여러 번 환난에 대한 예고들이 있었습니다. 예언들이 있었습니다. 지난주에도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20장 2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러면서 23절에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아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사실에 대한 예언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넘어가서도 4절에 보면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성령께서 이미 감동을 주셔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이미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10절, 11절에도 보면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빌립의 집에 들어가니 빌립의 딸 네 명이 있는데 시집을 가지 않고 처녀로 있으면서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그 집에 들어가서 이 바울에 대해 예언하는데,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묶어 가지고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바로 이 띠 임자가 유대인의 손에 붙잡혀서 이방인들에게 이렇게 넘겨지리라, 예루살렘에 가면. 예언했습니다. 자,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두 번, 세 번, 그것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핍박이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 그래서 제자들이 말렸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한 번도 아닌데, 두 번, 세 번, 확실한 성령의 음성이다, 그렇게 하고 안 올라갈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 바울은 이미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확실한 언약을 붙잡고 있었고 그 언약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 이 확실한 결론을 자기의 결론으로 붙잡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이 사도행전 1장 8절을 자기의 결론으로 붙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15절에 무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라 말씀하면서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하나님의 약속, 동일한 약속 아닙니까? 사도행전 1장 8절과 동일한 약속입니다. 이 약속과 함께 사도행전 20장,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24절에 보면 “내가 달려갈 길과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24:20)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나는 로마까지 간다. 그 속에 핍박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결국 가이사 황제 앞에 내가 서서 이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이 결론을 바울은 가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본문을 자세히 주의해서 살펴보면, 제자들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그 부분들이 있었지만 돌아가라는 말은 없어요. 예수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서 돌아가라는 말은 없어요. 또 성경을 자세히 보면 왜 거듭거듭 반복해서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 부분을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을까? 결국 환란과 핍박을 준비하라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고 바울에 중심의 결론은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 때문에 나는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가는 길이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될 것인가? 중요한 사실에 결론을 가지고 결단내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결론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잖아요.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이미 영원의 문제가 해결된 결론을 가진 사람입니다. 천국의 문제가 해결된 결론을 가진 사람입니다. 믿습니까? 많은 사람이 영혼에 대해서 알지 못하니까 지금 방황하고 살아요. 우리의 삶이 결론 내려지는 삶을 살지 않으니까 방황하는 삶을 살아요. 내세, 천국에 대해서 모르니까 이 땅의삶 자체가 히브리서 2장1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평생 마귀에게 매여 종 노릇 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믿는다는 축복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줄 아십니까? 영원이 해결된 축복이에요. 요한복음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했어요. 그와 더불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믿는 순간에 이미 천국의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다. 내세 문제는 해결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원한 문제, 내세문제, 자기가 가야될 인생의 길에 대한 분명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으니까 많은 것들을 가지고 많이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삶 자체가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봅시다. 많은 것을 가졌죠. 많은 것을 배웠죠. 또 여러분 주위에 많은 상황들이 있죠. 행복합니까? 평안합니까? 내 인생에 가야될 길을 알지 못하면 우리 인생의 결론, 우리 인생의 가야될 길을 알지 못하면 결국은 방황할 수밖에 없고 염려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가 가야 될 길을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가야 될 길을 말씀하시는데 그 길이 무엇이냐? 전도자의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셨어요. 여기에 대한 결단들이 여러분들에게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자의 길을 갈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교회를 부르셨어요. 그 증거가 뭐냐?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을 알게 하신 것. 그 어느때 보다도 복음을 정확하게 알고 복음을 누리게 하신 것. 전도자의 길을 가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그 증거가 뭐냐? 우리 하나교회를 만난 만남의 축복. 또 복음 전하는 주의 종들과의 만남의 축복. 특별히 산업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어려움들이 있지만 복음전하는 이 이유 때문에 생명걸고 결단한 우리 중직자들과의 만남의 축복. 분명히 이런 증거들을 보면 저와 여러분을 이 한 시대에 전도자로 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가야될 우리의 결론, 우리의 결단내려야 될 길이 뭐냐? 전도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
어제 우리교회에서 렘넌트 데이를 했습니다. 메시지 이전에 상임위원회 모임이 당회실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에 류광수 목사님과 많은 상임위원 목사님들, 우리 개혁 총회의 총회장님과 대구의 많은 목사님들이 참여하시고 여러 가지 보고가 되어지는 가운데 우리교회의 렘넌트 2명이 자기의 기도제목과 비전을 이야기 했어요. 둘 다 자기 기도제목을 이야기 했는데 중학교 3학년 여자 아이는 외교관이 자기의 비전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기도제목을 이야기 하고 비전을 이야기 하는데 전혀 원고를 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해요. 너무나 확신있고 당당하게 자신있게 해요.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비전과 기도제목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이 아이가 자기 비전을 어디에서 찾아냈느냐? 전부 말씀 속에서 찾아냈어요. 그 아이의 비전을 들으면서 아이가 매주 마다 강단에서 나오는 말씀을 놓치지 않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제가 알았어요. 지난 주에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오는 나의 생명 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부분들을 가지고 자기의 마지막 간증, 비전에 대한 마무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에 진짜 나는 복 받은 목회자구나!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인데 그 많은 목사님들 앞에서 전혀 떨지도 않고 확신 가운데 말씀 속에서 나온 기도제목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중에 결론으로 잡았어요. 이 아이가 자기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참 내가 행복한 전도자의 길을 가는 것이 맞구나! 여러분 우리하나교회 성도들, 연세 드신 어른에서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입만 열면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 복음만 말합니다.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을 이 한 시대에 전도자의 길을 가도록 부르신 증거 중에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길을 갈 수 있도록, 바로 전도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 그 증거입니다. 여러분 이 결론을 여러분 가지시고 이 결론 가운데 결단 내리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세상에서 알수 없는 참된 힘을 얻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중심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그런데 중심을 바로 세우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됩니다. 그 중심 하나 때문에 다 회복되는데 그 비밀이 뭐냐?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중심 오직그리스도. 이것이 우리의 중심에 딱 있게 될 때 이 하나 때문에 모든 것 회복되어지는 그 증거들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오직그리스도 내적 중심에 딱 가지시고 이를 위해서 나는 죽어도 좋다는 이 결단 속에 나는 그 어떤 사람이 뭐라고 한다 할지라도 나는 전도자의 길을 간다. 이 결론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 가운데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바울이 가졌던 내적인 중심인 오직그리스도, 이것이 우리의 중심이 되게 하시고 오직 그리스도 깨닫고 여기에 죽음조차 각오하고 결단했던 바울의 내적인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마지막 시대에 현장을 살리는 전도자로 승리하는 우리 모든 하나교회 성도들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4년 9월 28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행21:1-14)
서론: 생활 속에서 중요한 것이나 우선순위가 있듯이,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보고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허상)은 잠시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실상)은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히1:1). 실제로 세상은 보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두 배경(그리스도냐, 사탄이냐)이 있기 때문에 최선, 열심,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닌 더욱더 복음을 알고 복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을 중요시 여기시기 때문입니다(삼상16:7, 시34:18, 롬2:11). 우리에게 내적인 힘이 있다면 동적인 것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처럼 핍박과 환란 중에 자유로울 수 있는 힘(비밀)을 누리며 끝까지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1. 내적 중심 - 오직 그리스도
(1) 왜 오직 그리스도 할 수 밖에 없는가?
1) 예수 그리스도 한가지 모르면 - 바른 삶, 좋은 길을 가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원수의 삶, 멸망의 삶을 살아감
2) 우리의 신앙생활(중심, 동기)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로 되어지는 것임
(2) 바울의 생을 통한 중심 - 오직 그리스도
1) 오직 그리스도만 보고 듣고 말하고, 만남 역시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만 만남(빌3:7-8 나머지는 모두 배설물)
2) 철학, 문학, 예술의 중심지(아덴, 고린도, 에베소)에서도 바울의 관심과 중심은 오직 그리스도뿐!!(행26:29, 빌3:12)
2. 내적 결단 - 죽을 것도 각오
(1) 복음 속에 있는 가치를 발견하면 생명을 걸 수 있습니다.
1) 억지로 견디고 참은 것이 아니라,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는 그 자리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됨
2) 그리스도 때문에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음(행5:42)
(2) 바울은 그리스도와 세계복음화의 결론을 붙잡은 사람이었습니다.
1) 바울은 거듭되는 성령의 증언과 예언을 통해, 앞으로 일어날 환란과 핍박을 이미 알고 있었음(행20:23, 행21:4,11)
2) 그 과정 속의 핍박 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고, 로마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을 결론으로 붙잡았음
(3) 결론을 가지고 가는 길이 결정되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1) 결론이 없으면 삶 자체가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평생 사탄의 종노릇함(히2장)
2) 전도자의 길을 가도록 부르신 것에 대해 결단하라!! (복음과 하나교회, 전도자와 중직자를 만난 것 자체가 그 증거)
결론: 우리의 중심이 흔들리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반대로 중심을 바로 세우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됩니다. 내적인 중심의 비밀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중심에 있게 될 때, 이것 하나 때문에 모든 것 회복될 그 증거를 주실 것입니다. 한주간 이를 위해서 죽어도 좋다는 그 결단 속에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전도자의 길을 가시며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을 붙잡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과 그리스도의 배경 속에 내적인 힘이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내적 중심이 오직 그리스도가 되게 하셔서, 우리의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는 큰 결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한주간 복음 속에 있는 참 가치를 발견하며 세계복음화의 결론속에서
큰 기쁨과 행복함으로 전도자의 길을 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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