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2014-11-23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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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행27:9~26)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27:9~26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성곽 없는 성읍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오늘 예배하는 가운데 오직 복음만이 필요한 이유를 발견함으로 현장 살리는 전도자들로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원치 않는 많은 일들을 당합니다. 많은 어려움들을 당하기도 하고, 저주와 재앙의 문제들이 겹쳐서 오게 되는 부분들을 보게 되고 삶에도 많은 위기를 당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 땅에 저주와 재앙과 위기가 계속 오게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1장 24절~26절에 보면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어떻게 이 땅에 위기가 오고 저주와 재앙이 오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될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게 될 때에 재앙이 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그 재앙 앞에 하나님이 비웃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놓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거나 무관심하게 되면 이런 뜻하지 않은 재앙을 만나게 되고 삶 가운데 위기를 당하게 되고 저주가 밀려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특히 백부장 율리오의 감독 하에 바울과 죄수 몇 명이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아드라믓데노라는 배를 타고 이백 칠십 육 명이 함께 로마로 가고 있는 그 사이에, 사실 이달리야로 가고자 알렉산드리아로 배를 다시 갈아타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데 원치 않게 풍랑을 만나게 되어서 거기에서 다 죽게 된 부분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때에 배를 타고 있던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배 안에 타고 있던 이백 칠십 육 명이 다 살아나는 역사들을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이 고백한 내용이 있는데 그게 바로 25절입니다. 그 위기 가운데서, 그 풍랑 가운데서 바울이 고백한 내용입니다. 이번 한 주간 이 말씀가지고 깊은 묵상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큰 힘을 얻고 이 말씀을 주제 말씀으로 붙잡고 한 주간 힘을 회복하는 축복 있기를 바랍니다. 25절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27장 25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기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똑똑하냐, 훌륭하냐, 이 말이 아니라 바울도 똑같이 풍랑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위기 가운데, 풍랑 가운데 그 풍랑을 해결할 수 있도록 똑같은 풍랑이라는 위기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바울이 붙잡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한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풍랑 만난 현장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승리하는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 가진 한 사람 때문에, 복음 가진 한 사람 바울 때문에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 복음의 말씀을 붙잡게 될 때 복음 가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현장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후대들이 살아나는 귀한 축복된 응답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 붙잡는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 모든 무너졌던 현장들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에 저와 여러분을 주역으로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가 계속해서 사십일 집중 훈련 중에 있습니다만, 금요일 우리가 모였습니다. 모여서 함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렘넌트 사역에 대한 부분을 보고를 받았습니다. 해당 문화 지교회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서, 한 팀이 들어가서 학교 현장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 한 팀을 통해서 학교에 자퇴율이 70%나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이제는 주변의 학교들에 전달되어 주변의 학교들도 요청하게 되는 그런 상황까지 오게 된 사실을 보고, 또 교육청에도 이 사실이 보고된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 가진 한 사람 통해서, 한 팀을 통해서 현장들을, 무너지는 우리 후대 현장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들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은 한 사람 통해서 모든 현장과 가정과 교회와 후대들을 살리는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주역으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말씀을 놓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을 놓치지 않고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놓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만 붙잡으면 말씀 붙잡은 그 한 사람 통해서 모든 현장이 살아나게 될 것인데,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이유들이 있는데 그 이유들을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제대로 깨닫는다면 말씀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는 축복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말씀이 얼마나 능력 있는 것인가를 몰라서 말씀을 놓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냥 만들면 되는데 성경에 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매번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당신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붙잡게 될 때 우리의 수준과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우리 안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 듣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는 우리 안에 있는 질병들이 치유되기도 하고 우리의 고질적인 영적인 문제들이 치유되기도 하고, 그래서 증인으로 세워지는 그 축복된 역사가, 창조의 역사가 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 주시는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말씀 받을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모든 것들을 아시는 주님, 이 시간에 우리 안에 창조의 역사로 임하여 주셔서 나의 모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나의 모든 육신의 질고를 치유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는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분들이 육신의 질고 가운데 어려움을 당합니다.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 그런 부분에 대한 보고를 우리 교역자들을 통해서 들을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 듣는 가운데 하나님 말씀이 저들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현장도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치유되게 되어 있고 우리 개인도 말씀이 들어가면 치유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말씀 자체가 창조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얼마만큼 축복이냐?
여러분,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만납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붙잡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고 말씀 하나 붙잡게 되면 다 회복되는 축복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가면 갈수록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재앙이 임합니다. 노아 시대에 시집가고 장가가고 모든 사람이 육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홍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었고, 소돔 고모라 시대에 롯을 통해서 멸망을 선포했습니다만 그의 사위들은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더라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소돔, 고모라가 불바다가 되는 그런 저주가 임한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은 창조의 말씀이고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신데 이 말씀을 놓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많은 하나님 주신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 인도 받으면 흑암이 꺾이고 모든 문들이 열리는데 성령 인도 받는 방법 중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는 방법 중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말씀을 따라가고 말씀을 붙잡는 것이 성령의 인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축복을 놓쳐 버리니까 실제로 성도들이 힘이 없습니다. 현장에서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 응답 받기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응답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 흐름 놓치지 않고 말씀 붙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안 믿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치유하신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말씀의 능력을 안 믿고 안 붙잡습니다. 응답 이전에 말씀의 흐름, 말씀의 축복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흐름을 붙잡고 있던 사무엘은 다윗에게 그 말씀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역사는 어떤 역사입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으로 다윗이 쓰임 받게 되었고, 다윗 생전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었고 그토록 원했던 언약궤를 회복하는 이 엄청난 축복을 누구에게 허락하였느냐? 다윗에게 허락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의 흐름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 후대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후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좋은 것 물려주려고 몸부림칩니다. 지난주에 여러분, 신문 보셨지 않습니까? 일간지에 신문 나온 부분을 보니 심지어 자녀들 좋은 대학 가기 위해 부모들이 스펙을 대신 쌓고 가짜로 서류를 꾸며서 제출하고 그래서 자녀를 좋은 대학 보내고 숙제도 자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다 하고, 모든 것, 사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 모든 희생을 다 합니다. 그런데 막상 키워 놓으니 자녀들이 빗나가게 되는, 그런 부분에 대한, 탈선하게 되는 것에 대한 부분들을 신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만 여러분, 아무리 세상에 좋은 것들을 물려준다 할지라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여러분 통해서 말씀이 제대로 자녀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되면 그 자녀들은 성공하는 자녀들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진짜 우리 후대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말씀 붙잡고 내가 붙잡은 그 말씀을 우리 후대들에게 전달하게 될 때 거기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어마어마한 축복인데 이 말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놓쳐 버립니다.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말씀을 우습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왜 말씀의 귀중한 축복을 놓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바울과 몇 명의 죄수들, 그리고 많은 사람 이백 칠십 육 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이달리야로 가고자 알렉산드리아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들이 금식하면서 배가 나아갈 수 없으니까 바울이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우리의 생명에도, 우리의 모든 재산은 물론이고 우리의 모든 생명에도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들, 그리스도 알기 전에 먼저 가졌던 체험들, 이런 부분이 앞서 있기 때문에 말씀을 놓칩니다. 오늘 배에 탔던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이것은 백부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 바다에 대해서, 기후에 대해서 전문가가 선장과 선주입니다. 저 같아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말씀 보다 앞서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많은 전문인들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지식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오늘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기서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실수를 우리가 행하게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많은 분들이 교역자를 청해서 예배를 요청합니다. 이사하고, 결혼할 때에도 와서 인사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교역자들이 훌륭했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원해서 그것을 찾고자 주의 종을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하고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찾는 그런 부분들이지 않습니까?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그 부분의 전문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마지막에 주의 종들에게 와서 그 부분을 의논하고 상의합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선장과 선주의 말보다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기에 우리 자신이 속해 있지 않는가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들 좋습니다. 내가 남이 가지지 않은 체험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다면 결국 실패하는 인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데, 12절 중반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지금 배가 가면 안 되는데 배가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았다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 여론을 따라가게 되면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다수주의를 따라가게 되면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 입니다. 물론 우리가 때에 따라서 회의를 하고 다수결 결정을 선택하고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전에 진짜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다 찬성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면 맞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기준되어야 합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에 당회를 하면서 중요한 결정들을 하게 될 때에 장로님께 다수결로 합시다, 라고 했더니 옆에 있던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 다수결로 하면 안 되고,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당회원들이 다 하나님의 일인줄 알고 찬성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아, 제가 모르는 부분이었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많은 중직자 분들이 서 있습니다. 이 분들이 나름대로 사회적인 지식, 경험, 경륜도 있고 신앙적인 경륜들도 저보다 훨씬 많은 분들입니다. 저는 사실 교회는 잘 모르고 행정도 잘 모릅니다. 제가 교회라고 해 봐야 태어나서 어릴 때 다녔던 시골 교회가 있었고, 대구에 나오면서 하나교회(구 송현교회)를 섬겨서 교회는 두 군데 밖에 다녀본 적이 없기에 교회를 잘 모릅니다. 원래 신학을 할 때 전도사님들을 보면 교회를 이 교회 다니고, 저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를 많이 보게됩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나름대로 교회에 대한 부분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라고 해봐야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고, 대구에 와서 하나교회에서 자랐기에 교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님들 가운데 교회에 대한 많은 부분들, 행정이나 모든 부분들을 아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마지막 결정할 때에 되면 저에게 와서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그렇게 묻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 분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영적인 분별력,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를 찾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많은 장로님들이 다 의논을 해도 마지막에 저에게 와서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그 길을 가고, 눈치를 보면서 길을 간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선택하고, 말씀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많은 사람이, 다수가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풍랑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다수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입니다. 민주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 12절 초반에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무슨 말입니까? 마지막 시대에 말세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좋은 것이 좋다, 편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게 망하는 줄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하면 더 편할 것인가? 더 행복할 것인가? 그걸 기준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편하고 행복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말씀 보다 우선 되어지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현장에서 때에 다라서 말씀을 붙잡게 될 때에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때에 따라 늦은 것 같기도 합니다. 빨리 인본주의를 써서 해 치우면 될 것인데, 왜 저렇게 늦게 나가느냐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게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속게 되어집니다. 편리한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비록 힘들다고 할지라도 말씀 따라서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편리주의가 아닙니다. 말세의 때에가면 갈 수록 그렇게 합니다. 교회도 모이기 힘드니까 그냥 주일 낮 예배만 드리고 끝내자고 합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의 어른들은 거의 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오후예배가 아닙니다. 저녁예배를 드렸어요. 농사를 다 짓고 들어와서피곤하지만 하나님께 에배 드리는 것이 기쁘고 감사해서 주일 저녁 7시, 8시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뭔가 모르게 가면 갈 수록 우리 성도들이 힘들어 하니까 주일 저녁 예배도 오후예배로 넘기고 이제는 오후예배도 굳이 피곤하고 힘든데 편히 쉬고 월요일부터 나가서 현장에 가야 하니 오전예배만 드리면 안 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망하는 길입니다. 가면 갈 수록 사람이 편한 것이 좋다고 하면서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렵더라도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좀 늦은 것 같고 불편한 것 같더라도 말씀 앞에 양보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속아버립니다.
그 다음에 13절에 말씀을 붙잡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가 있는데, “남풍이 순하게 불매” 다시 말해서 순풍으로 바람이 잘 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습니다. 아마 백부장 외에 많은 사람들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기를 잘 선택했다고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있습니까? 13절에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전문가들의 말을 듣기를 잘 했구나. 확신을 가졌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풍이 순풍이 아니에요. 사실은.. 여기에 우리가 속아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바른 예배생활, 기도생활 안 해도 잘 되죠. 그런데 그게 잘 되는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대충해도 뭔가 사고도 안 나고 어려움도 없으니까 이래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시는 분이 없으리라고 믿습니다만, 하나님이 당장 신앙생활 제대로 안 하고 헌금 안하고 기도생활 안 할 때 다리 부러뜨리고 사고 나게 하면 정신이 번쩍 들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속아요. 뭔가 내가 신앙생활이 안 되면서도 순풍에 속는다니까요. 잘 되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니까요. 그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우리에게 얼마 안가서 14절에 보면, 얼마 안 되어.. 그렇습니다. 우리의 5분 후에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붙잡아야 될 것이 뭐냐?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렇게 말씀하죠. 이 말씀을 놓친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14절에 나오는데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말씀을 놓치게 되니까 결국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 안 되어.. 혹여나 여러분에게 “얼마 안 되는” 이 시간표 속에 우리 자신이 있지는 않나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놓치고 있다면 말씀을 흐름을 붙잡지 않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 또한 “얼마 안 되어” 여기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어떻게 됩니까?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어요. 그 광풍이 불게 되니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2. 말씀을 놓친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7장 17절에 보니까 연장을 다 내렸습니다. 18절에 보면 바다에 모든 짐을 풀어 버렸습니다. 19절에 보면 배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들인데 그 기구들을 자기의 손으로 다 내어 버렸습니다. 20절에 보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흑암가운데 들어가면서 20절 마지막에 구원의 여망이 없었더라고 했어요. 21절에 보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 있는 것만 해도 고달픈데 오랫동안 먹지 못하는 가운데 빠졌어요. 이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우리 인생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놓쳐 버리니까 마지막에 결국 인생 앞에 다가오는 시련에 대한 부분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리 지식을 동원해도, 과학을 동원해도 우리의 모든 것 동원해도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을 놓칠 때 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귀한 축복된 역사의 비밀들을 놓쳐버리니까 여기에 육신도 상하게 되고 재산도 상실 되고 사람도 잃게 되고 다 놓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미련하리만큼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붙잡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미련하리만큼... 하나님 말씀을 붙잡는 그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안 믿고 있어요.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뭡니까?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뭐냐? 구약 성경은 오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가 오시겠다는 것이고, 신약성경은 그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속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3. 어떻게?
미련하리만큼 이 약속을 붙잡게 될 때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 붙잡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어떻게 축복하시느냐? 25절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풍랑 맞는 세상 속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으로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세우시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정말로 이 땅에 흑암과 저주와 재앙가운데 풍랑 만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풍랑을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고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이 들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앉아 있지만 말씀 안 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씀 다 빼버리고 웃기는 말씀만, 예화만 듣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서 저는 미안합니다만, 웃기는 설교를 잘 못하고 제일 못하는게 웃기는 설교입니다. 예화 드는 것도 제일 못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말씀은 다 놓쳐 버리고 돌아가면 예화만 생각나고 웃은 것만 생각나고 그래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면 시간 가면 갈수록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신앙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결국은 답답하고 뭔가 모르게 신경질 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겁니다. 이 사실이 안 되어 지면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답답하고 신경질이 나요. 여러분 예배드리면서 신경질이 나는 것을 체험해 보셨나요? 저는 체험해 봤어요. 말씀이 안 들려지니까 신경질이 나더라구요.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맞구나!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이 들려져야 기쁘고 그 말씀을 통해 힘을 얻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아야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잡고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들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 힘들이 생기면 문제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아! 이 힘을 가지고 문제 앞에 도전해야 되겠다. 문제 보는 눈이 달라져요. 그래서 말씀 들을 때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가고 그게 쌓이면 쌓일수록 내게 영적인 힘이 되어 지고 그러면 문제 앞에 도전하게 되고 삶에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들을 조금만 내가 실천해야 될 부분들이 무엇인가? 그 부분을 찾아내면 됩니다. 그냥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번 한 주간에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나는 믿노라. 이 말씀을 내가 붙잡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말씀 속에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조금만 실천할 부분을 찾아서 인도받아 가면 하나님이 그 말씀 속에서 귀중한 축복된 응답, 모든 문들을 열어 가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떤 현장이든지 간에 주인공으로 세우시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성경에 보십시오. 요셉은 노예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노예가 아니에요. 거기서 언약 붙잡고 기도하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디발이 자기의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맡겼습니까? 요셉에게 맡겼어요. 이름은 주인이 보디발이지만 실제적인 모든 것들은 요셉의 손에 움직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도 신앙생활 처음에 할 때는 어렵고 힘든 가운데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모이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교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언약 붙잡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면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해, 두해 해를 거듭해 갈수록 저에게 와서 하시는 고백이에요. 뭐냐? 목사님 이제는 가정과 가문이 전부 저 중심으로 다 바뀌어 졌어요. 예배도 처음에는 이단교회에 다닌다고 알아주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네가 예배 인도해라. 이렇게 나올 정도로 하나님께서 다 분위기를 바꾸어 가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 붙잡고 기도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어떤 현장이든지 간에 주인공으로 쓰시게 되어 있어요. 다니엘 외에 총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을 총리장으로 세웠어요. 사실은.. 그게 뭡니까? 주인이 바뀌어 진겁니다. 사도행전 12장 1-25절에 보면 초대교회가 위기를 당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죠. 그때 초대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가 나오게 되면서 헤롯이 충(벌레)이 먹어 죽게 되었어요. 무슨 말입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기도하게 될 때 모든 현장의 분위기를 하나님께서는 언약 중심으로 바꾸어 간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시라도 말씀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이 없다,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어서 등이 없고 빛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캄캄한 가운데 살아가게 되죠. 그렇습니다. 말씀이 내게 없다, 그 자체가 재앙이에요. 예레미야 4장 4-5절에 보면 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줄 자가 없다고 했어요. 이게 재앙이에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이 한 시대에 말씀을 언약으로 붙잡고 기도 속에 들어간다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기어코 저와 여러분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여러분의 현장에 주역으로 세울 것입니다. 왜냐? 여러분 통해서 현장에 재앙의 역사들을 해결하는 귀중한 답을 여러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가면 갈수록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리저리 갈급한 가운데 흔들리고 있어요. 그래서 갈급하니까 온갖 이단과 우상과 모든 종교들이 다 일어났어요. 이단과 우상과 종교들이 일어나면 거기에 따라 나오는 것이 저주와 재앙이 막 밀려오게 됩니다. 여기에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후대들이 지금 다 멸망 받고 있어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말씀 언약을 주시고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을 이 한 시대에 재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으로 저와 여러분을 세우셨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느냐?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나는 믿노라. 이 부분들을 가지고 현장 속에서 현장을 살리는 귀한 전도자들로, 증인들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4년 11월 23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행27:9-26)
서론: 살아가다보면 원하지 않는 많은 일들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 저주와 재앙도 겹쳐 옵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책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잠1:24-26). 오늘 본문은 배를 타고 있던 바울 한사람 때문에 배안의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나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위기 가운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행27:25). 똑같은 풍랑이라는 위기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주셨고 바울은 말씀을 붙잡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잡을 때 현장, 교회, 후대들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시며, 그 일에 우리를 주역으로 부르셨습니다.
1. 말씀을 놓치는 이유
(1) 말씀이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 - 말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함
말씀은 천지를 창조할만큼 능력이 있고(하나님이 이르시되), 말씀은 곧 하나님(성부,성자,성령)이심(요1:1),
(2) 나의 지식과 체험이 말씀보다 앞서 있기 때문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1절)
전문적인 지식이 말씀보다 앞서면 안됨 (전문적인 지식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함)
(3) 여론이나 다수주의를 따라가기 때문 -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자가 더 많으니 (12절)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임 - 다수결의 원칙이 아닌 말씀이 기준
(4) 편리주의를 따라가기 때문 -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12절)
조금 늦고 불편할 지라도 말씀 앞에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마라
(5) 지금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 -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13절)
신앙생활을 대충해도 별다른 어려움과 갈등이 없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기에 여기에 속기 쉬움
2. 말씀을 놓친 결과
(1) 말씀을 놓치면, 얼마 안 되어 광풍을 만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연장을 버리고(17절) 짐도 버리고(18절) 기구도 버리며(19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20절) 오랫동안 먹지도 못함(21절)
(2) 인생의 광풍의 재앙이 임하면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식, 과학, 방법으로 해결 못 함)
3. 어떻게?
(1) 흑암, 저주, 재앙을 해결할 길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아라!!)
(2) 말씀을 깊이 묵상 → 뿌리 내려짐 → 영적인 힘이 생김 → 문제보는 눈이 달라짐 → 도전할 수 있음
(3)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한사람이 되라!! (어떤 현장이든 주인공으로 세우심)
결론: 말씀이 없다는 것 자체가 재앙(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줄 자가 없다. 애4:4-5)입니다. 빛이 없으면 캄캄한 가운데 살아가야 하기 때문(시119:105)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인 말씀을 언약으로 잡고 기도 속에 들어가면 현장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현장의 재앙 문제를 해결할 답을 우리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급해진 가운데 온갖 이단, 우상종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저주와 재앙이 밀려오고 기성세대와 후대들이 멸망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재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으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한주간 현장을 살리는 전도자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말씀을 붙잡음으로 현장과 교회, 후대들이 살아나는 일에 우리를 주역으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말씀의 참된 능력과 가치를 알기 원하오니, 이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음으로 이 시대와 현장의 흑암과 저주, 재앙을 막게 하옵소서. 한주간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뿌리내리는 가운데, 영적인 힘이 회복되어 문제를 보는 눈이 달라짐으로 도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행27:9~26)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행27:9~26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성곽 없는 성읍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오늘 예배하는 가운데 오직 복음만이 필요한 이유를 발견함으로 현장 살리는 전도자들로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원치 않는 많은 일들을 당합니다. 많은 어려움들을 당하기도 하고, 저주와 재앙의 문제들이 겹쳐서 오게 되는 부분들을 보게 되고 삶에도 많은 위기를 당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이 땅에 저주와 재앙과 위기가 계속 오게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1장 24절~26절에 보면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어떻게 이 땅에 위기가 오고 저주와 재앙이 오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될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받지 않게 될 때에 재앙이 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그 재앙 앞에 하나님이 비웃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놓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거나 무관심하게 되면 이런 뜻하지 않은 재앙을 만나게 되고 삶 가운데 위기를 당하게 되고 저주가 밀려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특히 백부장 율리오의 감독 하에 바울과 죄수 몇 명이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아드라믓데노라는 배를 타고 이백 칠십 육 명이 함께 로마로 가고 있는 그 사이에, 사실 이달리야로 가고자 알렉산드리아로 배를 다시 갈아타고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데 원치 않게 풍랑을 만나게 되어서 거기에서 다 죽게 된 부분이 오늘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때에 배를 타고 있던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배 안에 타고 있던 이백 칠십 육 명이 다 살아나는 역사들을 오늘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바울이 고백한 내용이 있는데 그게 바로 25절입니다. 그 위기 가운데서, 그 풍랑 가운데서 바울이 고백한 내용입니다. 이번 한 주간 이 말씀가지고 깊은 묵상 속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큰 힘을 얻고 이 말씀을 주제 말씀으로 붙잡고 한 주간 힘을 회복하는 축복 있기를 바랍니다. 25절을 같이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27장 25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기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똑똑하냐, 훌륭하냐, 이 말이 아니라 바울도 똑같이 풍랑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위기 가운데, 풍랑 가운데 그 풍랑을 해결할 수 있도록 똑같은 풍랑이라는 위기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바울이 붙잡았고 그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한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풍랑 만난 현장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고 승리하는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 가진 한 사람 때문에, 복음 가진 한 사람 바울 때문에 배에 탄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 복음의 말씀을 붙잡게 될 때 복음 가진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현장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후대들이 살아나는 귀한 축복된 응답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 붙잡는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 모든 무너졌던 현장들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에 저와 여러분을 주역으로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가 계속해서 사십일 집중 훈련 중에 있습니다만, 금요일 우리가 모였습니다. 모여서 함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렘넌트 사역에 대한 부분을 보고를 받았습니다. 해당 문화 지교회에 대한 보고를 받으면서, 한 팀이 들어가서 학교 현장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 한 팀을 통해서 학교에 자퇴율이 70%나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이제는 주변의 학교들에 전달되어 주변의 학교들도 요청하게 되는 그런 상황까지 오게 된 사실을 보고, 또 교육청에도 이 사실이 보고된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복음 가진 한 사람 통해서, 한 팀을 통해서 현장들을, 무너지는 우리 후대 현장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들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은 한 사람 통해서 모든 현장과 가정과 교회와 후대들을 살리는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일에 주역으로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말씀을 놓치는 이유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을 놓치지 않고 말씀을 붙잡아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놓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말씀만 붙잡으면 말씀 붙잡은 그 한 사람 통해서 모든 현장이 살아나게 될 것인데,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이유들이 있는데 그 이유들을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제대로 깨닫는다면 말씀을 제대로 붙잡을 수 있는 축복 가운데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먼저,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말씀이 얼마나 능력 있는 것인가를 몰라서 말씀을 놓칩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냥 만들면 되는데 성경에 보면 재미있는 부분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매번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당신께서 친히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을 붙잡게 될 때 우리의 수준과 우리의 능력과 상관없이 우리 안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 듣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는 우리 안에 있는 질병들이 치유되기도 하고 우리의 고질적인 영적인 문제들이 치유되기도 하고, 그래서 증인으로 세워지는 그 축복된 역사가, 창조의 역사가 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 주시는 증거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가 예배드릴 때마다, 말씀 받을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나의 모든 것들을 아시는 주님, 이 시간에 우리 안에 창조의 역사로 임하여 주셔서 나의 모든 연약한 부분들을 치유하여 주시고 나의 모든 육신의 질고를 치유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는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분들이 육신의 질고 가운데 어려움을 당합니다.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 그런 부분에 대한 보고를 우리 교역자들을 통해서 들을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씀 듣는 가운데 하나님 말씀이 저들을 치유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모든 현장도 말씀이 들어가게 되면 치유되게 되어 있고 우리 개인도 말씀이 들어가면 치유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말씀 자체가 창조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얼마만큼 축복이냐?
여러분,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만납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 붙잡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과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놓치면 다 놓치는 것이고 말씀 하나 붙잡게 되면 다 회복되는 축복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무엇보다도 가면 갈수록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재앙이 임합니다. 노아 시대에 시집가고 장가가고 모든 사람이 육신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홍수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었고, 소돔 고모라 시대에 롯을 통해서 멸망을 선포했습니다만 그의 사위들은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더라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소돔, 고모라가 불바다가 되는 그런 저주가 임한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은 창조의 말씀이고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신데 이 말씀을 놓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많은 하나님 주신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 인도 받으면 흑암이 꺾이고 모든 문들이 열리는데 성령 인도 받는 방법 중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는 방법 중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말씀을 따라가고 말씀을 붙잡는 것이 성령의 인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축복을 놓쳐 버리니까 실제로 성도들이 힘이 없습니다. 현장에서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 응답 받기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응답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를 축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 흐름 놓치지 않고 말씀 붙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생활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안 믿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들을 치유하신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지고 있지만 말씀의 능력을 안 믿고 안 붙잡습니다. 응답 이전에 말씀의 흐름, 말씀의 축복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의 흐름을 붙잡고 있던 사무엘은 다윗에게 그 말씀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역사는 어떤 역사입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으로 다윗이 쓰임 받게 되었고, 다윗 생전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게 되었고 그토록 원했던 언약궤를 회복하는 이 엄청난 축복을 누구에게 허락하였느냐? 다윗에게 허락하였습니다. 다윗이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의 흐름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 후대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후대에게 무엇을 물려줄 것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좋은 것 물려주려고 몸부림칩니다. 지난주에 여러분, 신문 보셨지 않습니까? 일간지에 신문 나온 부분을 보니 심지어 자녀들 좋은 대학 가기 위해 부모들이 스펙을 대신 쌓고 가짜로 서류를 꾸며서 제출하고 그래서 자녀를 좋은 대학 보내고 숙제도 자녀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다 하고, 모든 것, 사실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 모든 희생을 다 합니다. 그런데 막상 키워 놓으니 자녀들이 빗나가게 되는, 그런 부분에 대한, 탈선하게 되는 것에 대한 부분들을 신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만 여러분, 아무리 세상에 좋은 것들을 물려준다 할지라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직 여러분 통해서 말씀이 제대로 자녀들에게 흘러 들어가게 되면 그 자녀들은 성공하는 자녀들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게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진짜 우리 후대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가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말씀 붙잡고 내가 붙잡은 그 말씀을 우리 후대들에게 전달하게 될 때 거기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어마어마한 축복인데 이 말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을 놓쳐 버립니다.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말씀을 우습게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왜 말씀의 귀중한 축복을 놓치느냐? 오늘 본문에 보면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바울과 몇 명의 죄수들, 그리고 많은 사람 이백 칠십 육 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이달리야로 가고자 알렉산드리아 배에 탔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세니까 이들이 금식하면서 배가 나아갈 수 없으니까 바울이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우리의 생명에도, 우리의 모든 재산은 물론이고 우리의 모든 생명에도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한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내가 가진 지식들, 그리스도 알기 전에 먼저 가졌던 체험들, 이런 부분이 앞서 있기 때문에 말씀을 놓칩니다. 오늘 배에 탔던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이것은 백부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 바다에 대해서, 기후에 대해서 전문가가 선장과 선주입니다. 저 같아도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부분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전문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말씀 보다 앞서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많은 전문인들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전문적인 지식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오늘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기서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실수를 우리가 행하게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많은 분들이 교역자를 청해서 예배를 요청합니다. 이사하고, 결혼할 때에도 와서 인사하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교역자들이 훌륭했습니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원해서 그것을 찾고자 주의 종을 찾아와서 기도를 부탁하고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찾는 그런 부분들이지 않습니까?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그 부분의 전문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마지막에 주의 종들에게 와서 그 부분을 의논하고 상의합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선장과 선주의 말보다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여기에 우리 자신이 속해 있지 않는가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지식들 좋습니다. 내가 남이 가지지 않은 체험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다면 결국 실패하는 인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 말씀을 놓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데, 12절 중반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지금 배가 가면 안 되는데 배가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았다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 여론을 따라가게 되면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다수주의를 따라가게 되면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 입니다. 물론 우리가 때에 따라서 회의를 하고 다수결 결정을 선택하고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이전에 진짜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다 찬성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맞다면 맞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기준되어야 합니다. 다수결의 원칙이 아닙니다.
제가 처음에 당회를 하면서 중요한 결정들을 하게 될 때에 장로님께 다수결로 합시다, 라고 했더니 옆에 있던 장로님 한 분이 “목사님. 다수결로 하면 안 되고, 될 수 있는 대로 모든 당회원들이 다 하나님의 일인줄 알고 찬성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아, 제가 모르는 부분이었구나.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많은 중직자 분들이 서 있습니다. 이 분들이 나름대로 사회적인 지식, 경험, 경륜도 있고 신앙적인 경륜들도 저보다 훨씬 많은 분들입니다. 저는 사실 교회는 잘 모르고 행정도 잘 모릅니다. 제가 교회라고 해 봐야 태어나서 어릴 때 다녔던 시골 교회가 있었고, 대구에 나오면서 하나교회(구 송현교회)를 섬겨서 교회는 두 군데 밖에 다녀본 적이 없기에 교회를 잘 모릅니다. 원래 신학을 할 때 전도사님들을 보면 교회를 이 교회 다니고, 저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를 많이 보게됩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나름대로 교회에 대한 부분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라고 해봐야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고, 대구에 와서 하나교회에서 자랐기에 교회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장로님들 가운데 교회에 대한 많은 부분들, 행정이나 모든 부분들을 아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마지막 결정할 때에 되면 저에게 와서 “목사님 어떻게 할까요?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그렇게 묻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이 분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영적인 분별력,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를 찾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많은 장로님들이 다 의논을 해도 마지막에 저에게 와서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대로 그 길을 가고, 눈치를 보면서 길을 간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한다고 할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선택하고, 말씀 따라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승리하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많은 사람이, 다수가 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풍랑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교회는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다수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입니다. 민주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 12절 초반에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무슨 말입니까? 마지막 시대에 말세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좋은 것이 좋다, 편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게 망하는 줄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어떻게 하면 더 편할 것인가? 더 행복할 것인가? 그걸 기준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편하고 행복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말씀 보다 우선 되어지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현장에서 때에 다라서 말씀을 붙잡게 될 때에 미련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또 때에 따라 늦은 것 같기도 합니다. 빨리 인본주의를 써서 해 치우면 될 것인데, 왜 저렇게 늦게 나가느냐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게 자칫 잘못하면 우리도 속게 되어집니다. 편리한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비록 힘들다고 할지라도 말씀 따라서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편리주의가 아닙니다. 말세의 때에가면 갈 수록 그렇게 합니다. 교회도 모이기 힘드니까 그냥 주일 낮 예배만 드리고 끝내자고 합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의 어른들은 거의 다 한국교회 초기에는 오후예배가 아닙니다. 저녁예배를 드렸어요. 농사를 다 짓고 들어와서피곤하지만 하나님께 에배 드리는 것이 기쁘고 감사해서 주일 저녁 7시, 8시까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뭔가 모르게 가면 갈 수록 우리 성도들이 힘들어 하니까 주일 저녁 예배도 오후예배로 넘기고 이제는 오후예배도 굳이 피곤하고 힘든데 편히 쉬고 월요일부터 나가서 현장에 가야 하니 오전예배만 드리면 안 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망하는 길입니다. 가면 갈 수록 사람이 편한 것이 좋다고 하면서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렵더라도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좀 늦은 것 같고 불편한 것 같더라도 말씀 앞에 양보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속아버립니다.
그 다음에 13절에 말씀을 붙잡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가 있는데, “남풍이 순하게 불매” 다시 말해서 순풍으로 바람이 잘 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습니다. 아마 백부장 외에 많은 사람들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기를 잘 선택했다고 확신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디있습니까? 13절에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그러면 그렇지 우리가 전문가들의 말을 듣기를 잘 했구나. 확신을 가졌고 자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순풍이 순풍이 아니에요. 사실은.. 여기에 우리가 속아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앙생활, 바른 예배생활, 기도생활 안 해도 잘 되죠. 그런데 그게 잘 되는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대충해도 뭔가 사고도 안 나고 어려움도 없으니까 이래도 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시는 분이 없으리라고 믿습니다만, 하나님이 당장 신앙생활 제대로 안 하고 헌금 안하고 기도생활 안 할 때 다리 부러뜨리고 사고 나게 하면 정신이 번쩍 들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속아요. 뭔가 내가 신앙생활이 안 되면서도 순풍에 속는다니까요. 잘 되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다니까요. 그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우리에게 얼마 안가서 14절에 보면, 얼마 안 되어.. 그렇습니다. 우리의 5분 후에 일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붙잡아야 될 것이 뭐냐?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그렇게 말씀하죠. 이 말씀을 놓친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14절에 나오는데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말씀을 놓치게 되니까 결국은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 안 되어.. 혹여나 여러분에게 “얼마 안 되는” 이 시간표 속에 우리 자신이 있지는 않나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놓치고 있다면 말씀을 흐름을 붙잡지 않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 또한 “얼마 안 되어” 여기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어떻게 됩니까?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일어났어요. 그 광풍이 불게 되니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2. 말씀을 놓친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7장 17절에 보니까 연장을 다 내렸습니다. 18절에 보면 바다에 모든 짐을 풀어 버렸습니다. 19절에 보면 배에서 가장 중요한 기구들인데 그 기구들을 자기의 손으로 다 내어 버렸습니다. 20절에 보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흑암가운데 들어가면서 20절 마지막에 구원의 여망이 없었더라고 했어요. 21절에 보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가운데 있는 것만 해도 고달픈데 오랫동안 먹지 못하는 가운데 빠졌어요. 이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우리 인생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놓쳐 버리니까 마지막에 결국 인생 앞에 다가오는 시련에 대한 부분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리 지식을 동원해도, 과학을 동원해도 우리의 모든 것 동원해도 안 되게 되어 있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을 놓칠 때 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귀한 축복된 역사의 비밀들을 놓쳐버리니까 여기에 육신도 상하게 되고 재산도 상실 되고 사람도 잃게 되고 다 놓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치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미련하리만큼 저와 여러분은 말씀을 붙잡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미련하리만큼... 하나님 말씀을 붙잡는 그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안 믿고 있어요.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뭡니까? 요한복음 20장 3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기록한 것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뭐냐? 구약 성경은 오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가 오시겠다는 것이고, 신약성경은 그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약속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는 것은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3. 어떻게?
미련하리만큼 이 약속을 붙잡게 될 때 하나님은 이 약속의 말씀 붙잡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 어떻게 축복하시느냐? 25절입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풍랑 맞는 세상 속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으로 저와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세우시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여러분 정말로 이 땅에 흑암과 저주와 재앙가운데 풍랑 만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풍랑을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고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이 들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에 앉아 있지만 말씀 안 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씀 다 빼버리고 웃기는 말씀만, 예화만 듣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서 저는 미안합니다만, 웃기는 설교를 잘 못하고 제일 못하는게 웃기는 설교입니다. 예화 드는 것도 제일 못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말씀은 다 놓쳐 버리고 돌아가면 예화만 생각나고 웃은 것만 생각나고 그래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면 시간 가면 갈수록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신앙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결국은 답답하고 뭔가 모르게 신경질 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겁니다. 이 사실이 안 되어 지면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답답하고 신경질이 나요. 여러분 예배드리면서 신경질이 나는 것을 체험해 보셨나요? 저는 체험해 봤어요. 말씀이 안 들려지니까 신경질이 나더라구요. 아!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맞구나! 하나님의 사람은 말씀이 들려져야 기쁘고 그 말씀을 통해 힘을 얻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아야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잡고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가 보세요. 그러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들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 힘들이 생기면 문제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아! 이 힘을 가지고 문제 앞에 도전해야 되겠다. 문제 보는 눈이 달라져요. 그래서 말씀 들을 때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가고 그게 쌓이면 쌓일수록 내게 영적인 힘이 되어 지고 그러면 문제 앞에 도전하게 되고 삶에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들을 조금만 내가 실천해야 될 부분들이 무엇인가? 그 부분을 찾아내면 됩니다. 그냥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번 한 주간에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나는 믿노라. 이 말씀을 내가 붙잡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 말씀 속에 무엇을 실천할 것인가? 조금만 실천할 부분을 찾아서 인도받아 가면 하나님이 그 말씀 속에서 귀중한 축복된 응답, 모든 문들을 열어 가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한 사람, 그 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떤 현장이든지 간에 주인공으로 세우시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성경에 보십시오. 요셉은 노예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노예가 아니에요. 거기서 언약 붙잡고 기도하는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디발이 자기의 모든 것들을 누구에게 맡겼습니까? 요셉에게 맡겼어요. 이름은 주인이 보디발이지만 실제적인 모든 것들은 요셉의 손에 움직여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인들 가운데서도 신앙생활 처음에 할 때는 어렵고 힘든 가운데 명절이 되면 가족들이 모이는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교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언약 붙잡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면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한해, 두해 해를 거듭해 갈수록 저에게 와서 하시는 고백이에요. 뭐냐? 목사님 이제는 가정과 가문이 전부 저 중심으로 다 바뀌어 졌어요. 예배도 처음에는 이단교회에 다닌다고 알아주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네가 예배 인도해라. 이렇게 나올 정도로 하나님께서 다 분위기를 바꾸어 가셨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약속 붙잡고 기도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어떤 현장이든지 간에 주인공으로 쓰시게 되어 있어요. 다니엘 외에 총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니엘을 총리장으로 세웠어요. 사실은.. 그게 뭡니까? 주인이 바뀌어 진겁니다. 사도행전 12장 1-25절에 보면 초대교회가 위기를 당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죠. 그때 초대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가 나오게 되면서 헤롯이 충(벌레)이 먹어 죽게 되었어요. 무슨 말입니까?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기도하게 될 때 모든 현장의 분위기를 하나님께서는 언약 중심으로 바꾸어 간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시라도 말씀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씀이 없다, 그 자체가 재앙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있어서 등이 없고 빛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캄캄한 가운데 살아가게 되죠. 그렇습니다. 말씀이 내게 없다, 그 자체가 재앙이에요. 예레미야 4장 4-5절에 보면 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줄 자가 없다고 했어요. 이게 재앙이에요.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참된 가장 큰 축복은 우리가 이 한 시대에 말씀을 언약으로 붙잡고 기도 속에 들어간다라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기어코 저와 여러분을 어디에 세울 것인가? 여러분의 현장에 주역으로 세울 것입니다. 왜냐? 여러분 통해서 현장에 재앙의 역사들을 해결하는 귀중한 답을 여러분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가면 갈수록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리저리 갈급한 가운데 흔들리고 있어요. 그래서 갈급하니까 온갖 이단과 우상과 모든 종교들이 다 일어났어요. 이단과 우상과 종교들이 일어나면 거기에 따라 나오는 것이 저주와 재앙이 막 밀려오게 됩니다. 여기에 기성세대는 물론이고 후대들이 지금 다 멸망 받고 있어요. 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말씀 언약을 주시고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을 이 한 시대에 재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으로 저와 여러분을 세우셨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느냐?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나는 믿노라. 이 부분들을 가지고 현장 속에서 현장을 살리는 귀한 전도자들로, 증인들로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4년 11월 23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
(행27:9-26)
서론: 살아가다보면 원하지 않는 많은 일들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 저주와 재앙도 겹쳐 옵니다. 성경은 그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책방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잠1:24-26). 오늘 본문은 배를 타고 있던 바울 한사람 때문에 배안의 모든 사람이 다 살아나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위기 가운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행27:25). 똑같은 풍랑이라는 위기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을 주셨고 바울은 말씀을 붙잡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잡을 때 현장, 교회, 후대들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시며, 그 일에 우리를 주역으로 부르셨습니다.
1. 말씀을 놓치는 이유
(1) 말씀이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 - 말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함
말씀은 천지를 창조할만큼 능력이 있고(하나님이 이르시되), 말씀은 곧 하나님(성부,성자,성령)이심(요1:1),
(2) 나의 지식과 체험이 말씀보다 앞서 있기 때문 -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1절)
전문적인 지식이 말씀보다 앞서면 안됨 (전문적인 지식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함)
(3) 여론이나 다수주의를 따라가기 때문 -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는 자가 더 많으니 (12절)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임 - 다수결의 원칙이 아닌 말씀이 기준
(4) 편리주의를 따라가기 때문 -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12절)
조금 늦고 불편할 지라도 말씀 앞에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마라
(5) 지금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 -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13절)
신앙생활을 대충해도 별다른 어려움과 갈등이 없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기에 여기에 속기 쉬움
2. 말씀을 놓친 결과
(1) 말씀을 놓치면, 얼마 안 되어 광풍을 만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연장을 버리고(17절) 짐도 버리고(18절) 기구도 버리며(19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20절) 오랫동안 먹지도 못함(21절)
(2) 인생의 광풍의 재앙이 임하면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지식, 과학, 방법으로 해결 못 함)
3. 어떻게?
(1) 흑암, 저주, 재앙을 해결할 길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아라!!)
(2) 말씀을 깊이 묵상 → 뿌리 내려짐 → 영적인 힘이 생김 → 문제보는 눈이 달라짐 → 도전할 수 있음
(3)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한사람이 되라!! (어떤 현장이든 주인공으로 세우심)
결론: 말씀이 없다는 것 자체가 재앙(어린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줄 자가 없다. 애4:4-5)입니다. 빛이 없으면 캄캄한 가운데 살아가야 하기 때문(시119:105)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인 말씀을 언약으로 잡고 기도 속에 들어가면 현장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현장의 재앙 문제를 해결할 답을 우리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급해진 가운데 온갖 이단, 우상종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로인해 저주와 재앙이 밀려오고 기성세대와 후대들이 멸망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재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으로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한주간 현장을 살리는 전도자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복음의 말씀을 붙잡음으로 현장과 교회, 후대들이 살아나는 일에 우리를 주역으로 부르셨음을 믿습니다. 말씀의 참된 능력과 가치를 알기 원하오니, 이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음으로 이 시대와 현장의 흑암과 저주, 재앙을 막게 하옵소서. 한주간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뿌리내리는 가운데, 영적인 힘이 회복되어 문제를 보는 눈이 달라짐으로 도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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