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따르는 삶
2015-05-03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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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진리를 따르는 삶”
(롬2:1~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롬2:1~11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그의 손이 그 일을 마치십니다! 우리 렘넌트들 찬양하는데 저한테 강하게 메시지가 던져지는 부분이 “붙잡고!”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는 그 언약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붙잡히는 최고의 응답의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을 “진리를 따르는 삶.” “진리를 따르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 축복 속에 있다는 것은 결국은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절대적으로 승리하고 절대적으로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주신 것이 복음이고 그 하나님의 손에서 아무도 빼앗아갈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으로서 그 구원의 역사를 아무도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갈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 속에 들어가 있다,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절대적인 축복과 절대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와 사건과 일을 당할 때 얼마만큼 복음의 체질이 되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신앙 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리도 모르게 복음적인 체질이 되어서 복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불신앙 속에서 염려하고 그래서 종교적인 체질과 율법적인 체질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실패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 절대 해결하지 못하는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아가고 있던 그 속에서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시켰습니다. 그리고 광야길을 걸어가게 하셨는데 그렇다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었는데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 속에서 실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제와 사건을 당하면 불신앙에 사로잡히고 율법적인 체질, 종교적인 과거의 체질로 돌아가서 결국 원망하고 비난하고 우상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도 보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방인들의 죄악상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만 로마서 1장 18절~32절까지는 로마, 그 당시에 이방인들이 어떠한 죄악에 빠졌느냐, 비참할 정도로 정말 인간의 비참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줄 정도로 죄악에 빠진 부분을 바라보면서 거기 로마 교회가 가진 생각이 오늘 성경 말씀, 저와 여러분이 읽었습니다만, 그 이방인들을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 로마 교회, 사실 이 당시에 로마 교회라 하면 왜 그 사람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자리에 빠졌느냐 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배경이 그 당시에 로마 교회 구성원들이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돌아온 유대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크리스찬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깊은 뿌리내려 있는 사고방식에는 율법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이방, 로마 현장을 바라보면서 죄악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부분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판단하고 정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주신 목적이 그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인 인생이라는 것,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빠진 로마 교회를 향해서 너희들도 똑같은, 별 차이 없는, 너희들도 이방 로마인들과 별 차이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은 네가 판단한 것으로 네가 오히려 판단 받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피할 인생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로마 이방인들의 죄악상은 그들이 들킬 뿐이지, 지금 이 믿는다고 하는 로마 교회, 유대교적인 신앙 색깔을 갖고 있는 이들은 들키지 않을 뿐이지 그들 안에도 똑같은 죄악상이 그들 안에 담겨져 있음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깊이 뿌리내려 있는 유대교적인 신앙,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체질, 종교적인 체질,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정죄하는 자리에 떨어진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부분을 가지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먼저 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먼저 메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이 체질이 복음의 체질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종교적인 체질이나 율법적인 체질들이 진짜 복음의 체질로 바뀌지 않으면 먼저 내 영혼이 메마르고 내 자신이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짧은 시간입니다만 왜 우리가 결국 잘 안 되어 지는가, 그에 대한 응답들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고 또 왜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데 어려움들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나를 살리고 그러면 우리 후대들을 살리는 길이 무엇일까, 나를 살리고 우리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응답이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을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또 오늘 특히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유장로님, 마음에 중심을 가지고 우리 렘넌트들이 어떤 자리에 서야 할 것인가를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만 정말 우리 후대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 후대들에게 전달해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을 찾아 오늘 이 답을 가지고 정말 참된 여러분 인생에 한 번 뿐인 생애가 승리하는 전도자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
그러면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여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불의한 인간의 판단으로 사는 자가 나오고 진리를 따라 사는 자가 나옵니다. 불의한 인간의 판단으로 사는 자가 나오고 진리를 따라 사는 자가 나오는데 먼저 첫 번째로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7절~10절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여기 7절~10절에 보면 두 부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는데 선을 행하는 자, 그리고 10절에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 이렇게 말씀하고 있고 8절, 9절에 보면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 9절에 보면 이러한 자를 ‘악을 행하는’ 자라 했습니다. 그들에게 미칠 결과는 어떤 것인가,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데 어떤 응답을 주시느냐 하면 바로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축복과 함께 7절이죠, 마지막에 ‘영생으로 하시고.’ 그러면서 10절에 보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하늘의 상급으로 축복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자,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일어나느냐, 여기 8절 마지막에 보면 ‘진노와 분노’가 임하게 되고 9절에 보면 그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해당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또 어디에 해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자리에 앉은 저와 여러분 모두는 악을 행하는 자, 불의를 따르는, 진리를 거스르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자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의 축복이 임하고 있는데 오늘 여기에 보면 이런 영생의 축복과 하늘 상급의 축복을 주시는 자에게 참고 선을 행한다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한다는 말은 우리가 착한 일을 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부분은 이 본문에서 말하는 행함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또 하나님과의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하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착한 일을 행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말과는 상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믿는 사람들보다 착한 일, 선한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이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기독교는 전혀 봉사가 없다고, 교회를 위한 헌신과 충심이 없다고,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게 아닌데 진짜 안다면, 정말 참된 응답, 참된 축복을 안다면 오히려 더 목숨 내어 걸고 헌신하고 충성하게 되어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천주교나 다른 종교에는 뭔가 선한 일을 행하고 덕을 쌓고 뭔가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전부 다 하늘의 상급과 연결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몸 바쳐 헌신하고 수고하고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게 안 되니까 봉사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헌신하는 것도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실은 선행을 행하고 덕을 쌓고 공을 쌓는 것, 교회 사람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잘못 보면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선행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는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관을 열 개, 백 개 짓고 사회운동 많이 하면서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이 사실이 아닌 자는 선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 선한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별 가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보면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가치 없이 본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런데 여기 보시면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들은 참된 축복의 응답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오는 응답인데 이 하나님의 관계 속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도 모르게 판단, 인간의 판단으로 불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로마 교회에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 종교 생활에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율법주의, 종교적인 체질이 되면 그렇게 되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서론적인 인생을 사는 자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의한 인간의 판단으로 서론 인생을 사는 자가 되면 안 되겠습니다. 특히 그런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는 모든 중심이 자기 중심입니다.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 중심입니다. 그게 어디서 온 것입니까? 결국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난 사건 때문에 온 것 아닙니까?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난 사건이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이 말을 듣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인줄 알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맞으면 맞는 것이고, 자기한테 틀리면 틀린 것이예요. 자기가 기준인 것입니다. 사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자기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대신 자리 잡고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어떤 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선악을 알게 되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러서 결국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판단하고 정죄하고 산다는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산다.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날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정죄한다 그 자체가 지옥가기 전에 이미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지옥의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지 아니하도록 생명나무의 실과를 막은 것이지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또한 보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자기가 주인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하고 앉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살아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 세 번이나 연거푸 남을 판단하지 말라 판단이라는 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이것은 우리를 회개시키고 복음을 받게 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그 풍성하심과 그 사랑을 멸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그냥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시고 나를 회개케 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나에게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그 은혜의 역사들을 멸시하는 것과 같아요. 또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하심,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사실을 멸시하는 것과 같은 행위예요. 그것이 저의 말이 아니고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이예요. 오늘 4절에 한번 보십시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롬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의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나를 구원하신 그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 그 사랑의 역사들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해서 무궁한 자비와 인자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3:22~23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에게 그 인자하심과 그 자비하심을 풍성하게 보여주시는 그 축복가운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면 그 어느 누구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사실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길이 참으심과 인자와 자비와 하나님의 그 사랑의 풍성함이 드러난 결과로 오늘 우리가 이 복된 자리에 앉아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예레미야애가서 3:23에 보면 그의 성실하심이 크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성실하심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성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이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과 계획은 성실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어디에서 나타났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회개케 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받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를 승리가운데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났어요. 하나님이 시작하신 그 구원의 역사들을 끝까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그 한 단어가 성실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페와 오메가라고 하지요. 알페는 헬라어의 첫 자입니다. 오메가는 헬라어의 마지막자입니다. 이 말은 시작하신 그 하나님께서 끝내신다는 말입니다. 시작하신 그 하나님께서 끝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별명이 있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영원이라는 개념은 시간개념 보다는 시작하신 그 하나님이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가운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죄가 있다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고급스러운 교만입니다. 왜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느냐? 내가 뭔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하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예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죄악가운데서 건지신 것입니다. 멸망 가운데 건지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니 그래도 내가 좀 괜찮은 인생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가? 네 그것보다 못한 인생이 우리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느냐 하면 로마서1:28~32절에 보면 그냥 내어버려둔 진노 상태에 있는 인생이었어요. 로마서1:,26,28절에 보면 내어버려두사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 버려두사 내 버려두사...왜 내버려두셨느냐 그 귀한 답을 오늘 5절에 말씀하고 있는데 5절 마지막에 보면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실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내게 쌓는도다. 마지막 진노의 날에 한꺼번에 멸하기 위해서 내어버려둔 상태에 있었던 것이 저와 여러분 이었어요.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진노를 계속 쌓아갈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 저와 여러분이었어요. 여기에 내어버려둔다라는 말의 신학적인 용어는 유기라는 말입니다. 그냥 버려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칼빈이 어떻게 설명했느냐 하면 죽은 시체가 다 같이 물에 떠내려가는데 거기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유기가 버려졌는데 거기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비유를 한다면 공동묘지에 전부다 시체로 널러리하게 퍼져 있는데 거기에 신봉준 너 일어나! 꺼집어낸 것을 가지고 선택이라고 합니다. 유기에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버려지면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아니 하나님 왜 저 사람은 건져내고 나는 왜 버려두었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핑계될 이유가 없어요. 그럴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다 버려진 것인데 저와 여러분을 일방적으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 성실하심을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니까 나를 변화 시켰던 하나님의 능력, 그 사람도 회개시키고 세우실 것인데 그것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이 역사의 자리에서 자기가 서서 인간을 판단하는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 하면 결국은 고집스러운 삶을 살아가요. 5절에 보세요. “다만 내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고집과.. 우리가 줏대 없이 살아가서는 안 되지만 고집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어떤 면에서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은 내 기준이 강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사실은 복음과 상관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기준을 가지고 구원을 생각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내 기준을 가지고 구원 얻을 수 있습니까? 내 노력과 내 애씀을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의 노력과 애씀으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대 우리의 능력과 자격으로 안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내 능력으로 뭔가 하려고 하는 이 부분들이 성경에서 고집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고집이라 했습니다. 구원의 역사들을 자꾸 내 기준가지고 받으려고 하는것...그것이 전부 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고집스런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는 다시 말해 판단으로 모든 삶을 사는 사람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예요. 창세기3:5절에 마귀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면서 아담 하와를 속였지요. 그 말을 듣고 아담 하와가 바라보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한 열매인지라 했어요. 여기에서 사탄의 최고의 전략이 나오는데 악한 사탄은 그리스도 바라보고 의지하지 아니하고 보이는 세상의 배경들 바라보고 거기에 속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선택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면 그것이 바로 종교생활이고 결국은 그 속에 흑암이 역사하는 것이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어떠한 결과가 오느냐 9절 마지막에 보세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구원의 역사들을 자기 기준으로 얻어내려고 몸부림치고 또 구원의 이 역사들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 되어진 사실들인데 이 사실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오느냐? 9절에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 에게이며”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무슨 말입니까? 우리 영혼가운데 평안이 없다라는 거예요. 환란과 곤고함이 임한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평안이 없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통과 고난이 계속 되어진다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으로 이 모든 저주와 재앙에서 빠져나오는 그 축복된 응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진리를 따른 자
두 번째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실 어떤 면에서 불의의 판단을 가지고 사는 자는 결과적으로 분노와 진노를 쌓게 되고, 그와 더불어 영혼에 평안이 없고 시간 가면 갈수록 환란과 곤고함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를 이 속에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따르는 자로 축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면 진리를 따르는 자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예수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기준임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 그가 바로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결국 죄를 짓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의 인생이 악한 사탄의 손에 붙잡혔어요. 많은 인류의 문제가 있지만 사실, 이 모든 인류에게 일어난 문제의 그 근본은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난데서 온 것이고 마귀에게 잡힌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왕의 직분을 가지고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깨트려 버리셨고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오셔서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고 선지자 직분을 가지고 오셔서 하나님 떠난 우리 인생을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뭐냐?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또 말씀을 들을 때도 그리스도가 기준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에 내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지 말고 이것이 정말 복음인가 아닌가 이게 정말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이 사실을 가지고 봐야(선택해야) 그게 올바른 선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건을 해석할 때 대부분 보이는 대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속아요. 보이는 대로 해석하면 보이는 대로 해석하는 그 결과 속에서 잘못해석하게 되고 잘못 해석하니까 잘못 행동하게 되고 나중에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왜냐? 우리 인생의 절대적인 문제를 해결 한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로 모든 사건을 해석해야 그게 바른 해석이 되어지는 겁니다. 내가 옳고 그르고가 아니고 또 이것이 논리적인가 합리적인가 객관성 있는가.. 물론 사람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고 객관성도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엘리트층에 들어갈수록 논리적이어야 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또 합리성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사실은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그리스도” 입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도 아닙니다. 내가 기준될 수 없어요. 오직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은 복음,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기준이 되어질 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오직그리스도가 기준 되어지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아요. 왜냐?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그 은헤가 아니고서는 이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이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기준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보면 볼수록 복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고 배려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 그리스도로 진리를 따르는 자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절대적인 배경,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종교생활 하는 자, 율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우상숭배 하는 모든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을 배경으로 삼아요. 그래서 육신적인 것을 갈구하고 그것 때문에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육신적인 것을 갈구하면서 성공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신적인 것을 갈구하며 살아가는 만큼 또 다른 영적인 문제,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말해, 종교생활, 율법생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은 육신적으로 성공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영적인 문제가 오고 성공해놓고도 무너지는 문제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 그것을 볼 수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육신적인 것들을 배경으로 삼으니까 성공하는 자리에 이르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다 칩니다. 그런데 성공해놓고 결국 무너져요. 성공해놓고 결국 실패해요. 그걸 지금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부분들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은 돈과 권력, 눈에 보이는 세상을 배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 율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나오는 판단과 정죄이고요, 우리는 세상, 배경, 돈, 육신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만 배경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배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성경에 보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렸죠. 노예로 갔습니다. 노예 살이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요셉의 삶을 보면 구차하게 변명하고 핑계대지 않았어요. 아니, 핑계댈 수 있을만 하잖아요. 그런데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핑계대지 않았어요. 한번도. 왜 그렇습니까? 이미 요셉은 나의 배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보면 장인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고 아들 압살롬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곤고하고 피곤한 인생이었어요. 그런데 그 도망치면서도 한번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았어요. 도망하는 그것이 다윗에게는 하나님께 피하는 것으로 다윗은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보여주고 있습니까? 다윗의 시편을 보세요.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나의 도움이 되신 여호와여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요새시오.. 무슨 말입니까? 피해 도망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배경은 하나님이라는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23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배경이 되어지니까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던 것을 고백한 내용이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신을 배경으로 살아가면 결국은 한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우리 산업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스도가 나의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당해 집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배경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의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의 산업현장에서 여러 가지 이런 저런 안 좋은 부조리한 데에 빠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초대교회 때 순교하고 핍박당하면서도 그들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스도가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구차하게 변명하고 핑계대며 그 자리를 모면할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 전부 다 하나같이 핍박 속에서 그들은 목숨을 잃어가는 생명의 역사를잃어가는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어요. 왜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의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의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나의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그리스도만 절대적인 기준인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예수그리스도만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하느냐? 10절에 보세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 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에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잠언서 4장 8절에 보면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 절대적인 배경이요, 절대적인 기준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케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있는 동안 평강의 역사로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흑암의 역사들이 무너지는 응답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우리에게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은 복음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될 때 갈수록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고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될 때 존귀와 영광과 평강이 임하는 그 축복을 누리게 되고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될 때 결국은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그 축복된 응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오늘 ‘어린이 주일’ 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배웁니다. 말을 가지고 가르침 받는 것도 있지만, 삶을 통해 배웁니다. 에베소 6장 4절에 보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의 교훈’이라는 말은 말로서 가르치라는 뜻이고 ‘훈계’라는 말은 삶으로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 그게 더 우리 자녀들에게 각인되어지고 뿌리 내려지고 체질되어집니다. 여러분 어떠한 삶을 여러분 자녀들에게 전달할 것입니까? 오늘의 말씀과 오늘의 기도와 오늘의 전도. 오직 그리스도만 절대적인 우리의 기준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절대적인 배경이다. 이 진리를 따르는 자의 삶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이 삶을 삶으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돌리시고 우리 자녀들에게 이 축복의 역사를 전달함으로 귀하게 오는 시대시대 속에 전도자들이 일어나는 그 축복된 응답이 우리 하나교회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년 5월 3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진리를 따르는 삶
(롬2:1-11)
서론: 복음을 알고 복음 속에 있으면 모든 것이 되어지는 가운데 절대적인 축복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복음이기에,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요10:28).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적인 체질입니다. 복음적인 체질이 되지 않으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신분인데 불신앙과 율법, 종교적인 체질로 실패하게 됩니다(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오늘 본문의 바울은, 유대교 배경 가운데 깊이 뿌리내린 로마 교회의 율법주의와 종교적 체질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이 복음적인 체질로 바꿔지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이 먼저 메말라가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
(1) 두 종류의 사람 (7~10절)
1)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축복(7절)가운데 영광과 존귀, 평강과 하늘 상급이 있음(10)
2) 불의를 따르는 자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과 분노(8), 환란과 곤고(9)가 있음
(2)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면, 서론 인생을 살게 됩니다.
1) 모든 중심이 자기 자신(창3장)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함(4절: 인자와 귱훌, 용납과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
2)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풍성한 인자하심, 우리를 향한 성실하심(애3:22-23)을 알지 못함
3) 낙심과 좌절, 포기와 절망(고급스러운 교만)에 빠지게 됨(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
4) 복음과 상관없는 고집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고 살아감
5) 악을 행하는 자는 결국 환란과 곤고가 찾아오고, 영혼에 평안이 없음(9절)
2. 진리를 따라 사는 자
(1)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기준임을 알고 살아가는 자
1) 인류 모든 문제의 근본은, 창3장의 하나님 떠남으로 마귀에게 잡혀 시작된 것임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해결하심 (왕: 사탄결박 / 제사장: 죄,저주,재앙해결 / 선지자: 하나님 만나는 길)
3) 무엇이든 선택하고 판단할 때, 또 사건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도록 하라!!
(2)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살아가는 자
1) 종교생활과 율법생활 가운데, 육신적인 배경으로만 성공과 실패를 기준 삼음(성공한 뒤 무너짐)
2) 우리는 육신의 배경을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임(요셉, 다윗)
3) 그리스도의 배경 가운데 영광과 존귀, 평강을 누리며 영화롭고 존귀하게 됨(잠4:8)
결론: 우리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존귀와 영광, 평강이 임하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축복된 응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후대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남길 것입니까? 후대들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엡6:4, 주의 교훈[말]과 훈계[삶]로 자녀를 가르치라).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기준, 우리의 배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삶을 살게 됨으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고, 자녀에게 전달함으로 시대시대마다 전도자들이 일어나길 기도드립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복음 속에서 모든 것이 되어지는 가운데, 절대적인 축복과 승리를 보장해 주심을 믿습니다. 영원한 진노와 환란, 곤고 가운데 불의한 판단을 하는 서론인생에서 건져주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기준이자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한주간 진리를 따라 살아감으로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존귀와 영광, 평강을 누리는 가운데, 후대에까지 전달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리를 따르는 삶”
(롬2:1~11)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롬2:1~11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그의 손이 그 일을 마치십니다! 우리 렘넌트들 찬양하는데 저한테 강하게 메시지가 던져지는 부분이 “붙잡고!”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홀로 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시는 그 언약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붙잡히는 최고의 응답의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을 “진리를 따르는 삶.” “진리를 따르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 축복 속에 있다는 것은 결국은 되어지는 축복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절대적으로 승리하고 절대적으로 축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주신 것이 복음이고 그 하나님의 손에서 아무도 빼앗아갈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인생으로서 그 구원의 역사를 아무도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갈 자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알고 복음 속에 들어가 있다,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절대적인 축복과 절대적인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와 사건과 일을 당할 때 얼마만큼 복음의 체질이 되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신앙 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으로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리도 모르게 복음적인 체질이 되어서 복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불신앙 속에서 염려하고 그래서 종교적인 체질과 율법적인 체질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 실패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 절대 해결하지 못하는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아가고 있던 그 속에서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출애굽시켰습니다. 그리고 광야길을 걸어가게 하셨는데 그렇다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이었는데 그런데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 속에서 실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문제와 사건을 당하면 불신앙에 사로잡히고 율법적인 체질, 종교적인 과거의 체질로 돌아가서 결국 원망하고 비난하고 우상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실패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삶을 살게 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도 보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방인들의 죄악상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만 로마서 1장 18절~32절까지는 로마, 그 당시에 이방인들이 어떠한 죄악에 빠졌느냐, 비참할 정도로 정말 인간의 비참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줄 정도로 죄악에 빠진 부분을 바라보면서 거기 로마 교회가 가진 생각이 오늘 성경 말씀, 저와 여러분이 읽었습니다만, 그 이방인들을 바라보면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 로마 교회, 사실 이 당시에 로마 교회라 하면 왜 그 사람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그 자리에 빠졌느냐 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배경이 그 당시에 로마 교회 구성원들이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의 배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돌아온 유대교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크리스찬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깊은 뿌리내려 있는 사고방식에는 율법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이방, 로마 현장을 바라보면서 죄악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부분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판단하고 정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는데 율법을 주신 목적이 그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절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인 인생이라는 것,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빠진 로마 교회를 향해서 너희들도 똑같은, 별 차이 없는, 너희들도 이방 로마인들과 별 차이 없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은 네가 판단한 것으로 네가 오히려 판단 받을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을 피할 인생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로마 이방인들의 죄악상은 그들이 들킬 뿐이지, 지금 이 믿는다고 하는 로마 교회, 유대교적인 신앙 색깔을 갖고 있는 이들은 들키지 않을 뿐이지 그들 안에도 똑같은 죄악상이 그들 안에 담겨져 있음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깊이 뿌리내려 있는 유대교적인 신앙,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체질, 종교적인 체질,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정죄하는 자리에 떨어진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부분을 가지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먼저 살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먼저 메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면, 이 체질이 복음의 체질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종교적인 체질이나 율법적인 체질들이 진짜 복음의 체질로 바뀌지 않으면 먼저 내 영혼이 메마르고 내 자신이 죽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짧은 시간입니다만 왜 우리가 결국 잘 안 되어 지는가, 그에 대한 응답들을 찾아내어야 할 것이고 또 왜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데 어려움들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나를 살리고 그러면 우리 후대들을 살리는 길이 무엇일까, 나를 살리고 우리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응답이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을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또 오늘 특히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유장로님, 마음에 중심을 가지고 우리 렘넌트들이 어떤 자리에 서야 할 것인가를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만 정말 우리 후대들에게 마땅히 행할 바를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 후대들에게 전달해야 할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일까, 그에 대한 답을 찾아 오늘 이 답을 가지고 정말 참된 여러분 인생에 한 번 뿐인 생애가 승리하는 전도자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
그러면 먼저 우리가 살펴볼 것은 여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불의한 인간의 판단으로 사는 자가 나오고 진리를 따라 사는 자가 나옵니다. 불의한 인간의 판단으로 사는 자가 나오고 진리를 따라 사는 자가 나오는데 먼저 첫 번째로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에 대해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7절~10절에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여기 7절~10절에 보면 두 부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는데 선을 행하는 자, 그리고 10절에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 이렇게 말씀하고 있고 8절, 9절에 보면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 9절에 보면 이러한 자를 ‘악을 행하는’ 자라 했습니다. 그들에게 미칠 결과는 어떤 것인가,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데 어떤 응답을 주시느냐 하면 바로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축복과 함께 7절이죠, 마지막에 ‘영생으로 하시고.’ 그러면서 10절에 보면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하늘의 상급으로 축복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고 악을 행하는 자,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일어나느냐, 여기 8절 마지막에 보면 ‘진노와 분노’가 임하게 되고 9절에 보면 그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해당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또 어디에 해당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자리에 앉은 저와 여러분 모두는 악을 행하는 자, 불의를 따르는, 진리를 거스르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자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의 축복이 임하고 있는데 오늘 여기에 보면 이런 영생의 축복과 하늘 상급의 축복을 주시는 자에게 참고 선을 행한다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을 행한다는 말은 우리가 착한 일을 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얻게 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부분은 이 본문에서 말하는 행함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또 하나님과의 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하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착한 일을 행하고 선한 일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말과는 상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고서도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믿는 사람들보다 착한 일, 선한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이 잠시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기독교는 전혀 봉사가 없다고, 교회를 위한 헌신과 충심이 없다고, 왜 그런가 그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사실 알고 보면 그게 아닌데 진짜 안다면, 정말 참된 응답, 참된 축복을 안다면 오히려 더 목숨 내어 걸고 헌신하고 충성하게 되어 있는데 그걸 알지 못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천주교나 다른 종교에는 뭔가 선한 일을 행하고 덕을 쌓고 뭔가 수고하고 봉사하는 것이 전부 다 하늘의 상급과 연결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몸 바쳐 헌신하고 수고하고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게 안 되니까 봉사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헌신하는 것도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실은 선행을 행하고 덕을 쌓고 공을 쌓는 것, 교회 사람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잘못 보면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선행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는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고 관을 열 개, 백 개 짓고 사회운동 많이 하면서 선한 일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가난한 사람 도와주고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이 사실이 아닌 자는 선한 일을 할 수 있지만 그 선한 일은 하나님 보시기에 별 가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보면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했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가치 없이 본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선한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런데 여기 보시면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들은 참된 축복의 응답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오는 응답인데 이 하나님의 관계 속에 있지 아니하면 우리도 모르게 판단, 인간의 판단으로 불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로마 교회에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 종교 생활에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율법주의, 종교적인 체질이 되면 그렇게 되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서론적인 인생을 사는 자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의한 인간의 판단으로 서론 인생을 사는 자가 되면 안 되겠습니다. 특히 그런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는 모든 중심이 자기 중심입니다.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모든 것의 중심이 자기 중심입니다. 그게 어디서 온 것입니까? 결국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난 사건 때문에 온 것 아닙니까?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난 사건이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이 말을 듣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인줄 알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한테 맞으면 맞는 것이고, 자기한테 틀리면 틀린 것이예요. 자기가 기준인 것입니다. 사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자기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아닙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자리를 내가 대신 자리 잡고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어떤 면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선악을 알게 되었어요. 이 말은 하나님의 자리에 이르러서 결국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판단하고 정죄하고 산다는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산다.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날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정죄한다 그 자체가 지옥가기 전에 이미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지옥의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영원히 살지 아니하도록 생명나무의 실과를 막은 것이지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또한 보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자기가 주인 되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하고 앉아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살아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 세 번이나 연거푸 남을 판단하지 말라 판단이라는 말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이것은 우리를 회개시키고 복음을 받게 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그 풍성하심과 그 사랑을 멸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그냥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시고 나를 회개케 하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나에게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그 은혜의 역사들을 멸시하는 것과 같아요. 또 다른 사람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하심,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사실을 멸시하는 것과 같은 행위예요. 그것이 저의 말이 아니고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이예요. 오늘 4절에 한번 보십시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롬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의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나를 구원하신 그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의 사랑, 그 사랑의 역사들을 멸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향해서 무궁한 자비와 인자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3:22~23에 보면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길이 참으시는 중에 우리에게 그 인자하심과 그 자비하심을 풍성하게 보여주시는 그 축복가운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믿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면 그 어느 누구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요. 사실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길이 참으심과 인자와 자비와 하나님의 그 사랑의 풍성함이 드러난 결과로 오늘 우리가 이 복된 자리에 앉아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 예레미야애가서 3:23에 보면 그의 성실하심이 크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성실하심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의 처지와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서 성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이나 우리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과 계획은 성실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어디에서 나타났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을 이야기 하느냐 하면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절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회개케 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받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받게 하신 그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를 승리가운데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났어요. 하나님이 시작하신 그 구원의 역사들을 끝까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그 한 단어가 성실이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페와 오메가라고 하지요. 알페는 헬라어의 첫 자입니다. 오메가는 헬라어의 마지막자입니다. 이 말은 시작하신 그 하나님께서 끝내신다는 말입니다. 시작하신 그 하나님께서 끝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별명이 있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영원이라는 개념은 시간개념 보다는 시작하신 그 하나님이 끝까지 이루신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가운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앉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죄가 있다면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절망 가운데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고급스러운 교만입니다. 왜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느냐? 내가 뭔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망하고, 낙심하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 가능성이 있다면 굳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예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죄악가운데서 건지신 것입니다. 멸망 가운데 건지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아니 그래도 내가 좀 괜찮은 인생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인생인가? 네 그것보다 못한 인생이 우리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느냐 하면 로마서1:28~32절에 보면 그냥 내어버려둔 진노 상태에 있는 인생이었어요. 로마서1:,26,28절에 보면 내어버려두사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 버려두사 내 버려두사...왜 내버려두셨느냐 그 귀한 답을 오늘 5절에 말씀하고 있는데 5절 마지막에 보면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실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내게 쌓는도다. 마지막 진노의 날에 한꺼번에 멸하기 위해서 내어버려둔 상태에 있었던 것이 저와 여러분 이었어요. 그래서 날마다 우리는 진노를 계속 쌓아갈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 저와 여러분이었어요. 여기에 내어버려둔다라는 말의 신학적인 용어는 유기라는 말입니다. 그냥 버려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칼빈이 어떻게 설명했느냐 하면 죽은 시체가 다 같이 물에 떠내려가는데 거기서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유기가 버려졌는데 거기서 불러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비유를 한다면 공동묘지에 전부다 시체로 널러리하게 퍼져 있는데 거기에 신봉준 너 일어나! 꺼집어낸 것을 가지고 선택이라고 합니다. 유기에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버려지면서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아니 하나님 왜 저 사람은 건져내고 나는 왜 버려두었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핑계될 이유가 없어요. 그럴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다 버려진 것인데 저와 여러분을 일방적으로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긍휼과 하나님의 인자하심, 성실하심을 가지고 있는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니까 나를 변화 시켰던 하나님의 능력, 그 사람도 회개시키고 세우실 것인데 그것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는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이 역사의 자리에서 자기가 서서 인간을 판단하는 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느냐 하면 결국은 고집스러운 삶을 살아가요. 5절에 보세요. “다만 내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과...”고집과.. 우리가 줏대 없이 살아가서는 안 되지만 고집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어떤 면에서 자기 주관이 강한 사람은 내 기준이 강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그것은 사실은 복음과 상관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 기준을 가지고 구원을 생각하고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내 기준을 가지고 구원 얻을 수 있습니까? 내 노력과 내 애씀을 가지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절대 우리의 노력과 애씀으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대 우리의 능력과 자격으로 안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내 능력으로 뭔가 하려고 하는 이 부분들이 성경에서 고집이라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고집이라 했습니다. 구원의 역사들을 자꾸 내 기준가지고 받으려고 하는것...그것이 전부 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고집스런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는 다시 말해 판단으로 모든 삶을 사는 사람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예요. 창세기3:5절에 마귀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면서 아담 하와를 속였지요. 그 말을 듣고 아담 하와가 바라보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한 열매인지라 했어요. 여기에서 사탄의 최고의 전략이 나오는데 악한 사탄은 그리스도 바라보고 의지하지 아니하고 보이는 세상의 배경들 바라보고 거기에 속고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선택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면 그것이 바로 종교생활이고 결국은 그 속에 흑암이 역사하는 것이고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어떠한 결과가 오느냐 9절 마지막에 보세요.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구원의 역사들을 자기 기준으로 얻어내려고 몸부림치고 또 구원의 이 역사들을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 되어진 사실들인데 이 사실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어떤 결과가 오느냐? 9절에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 에게이며”여기에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무슨 말입니까? 우리 영혼가운데 평안이 없다라는 거예요. 환란과 곤고함이 임한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평안이 없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고통과 고난이 계속 되어진다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으로 이 모든 저주와 재앙에서 빠져나오는 그 축복된 응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진리를 따른 자
두 번째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실 어떤 면에서 불의의 판단을 가지고 사는 자는 결과적으로 분노와 진노를 쌓게 되고, 그와 더불어 영혼에 평안이 없고 시간 가면 갈수록 환란과 곤고함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를 이 속에 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따르는 자로 축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면 진리를 따르는 자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예수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기준임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 그가 바로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사탄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결국 죄를 짓게 되고 그 결과로 우리의 인생이 악한 사탄의 손에 붙잡혔어요. 많은 인류의 문제가 있지만 사실, 이 모든 인류에게 일어난 문제의 그 근본은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난데서 온 것이고 마귀에게 잡힌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왕의 직분을 가지고 오셔서 사탄의 머리를 깨트려 버리셨고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오셔서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고 선지자 직분을 가지고 오셔서 하나님 떠난 우리 인생을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의 해결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뭐냐? 그리스도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이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또 말씀을 들을 때도 그리스도가 기준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에 내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지 말고 이것이 정말 복음인가 아닌가 이게 정말 그리스도인가 아닌가 이 사실을 가지고 봐야(선택해야) 그게 올바른 선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건을 해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건을 해석할 때 대부분 보이는 대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속아요. 보이는 대로 해석하면 보이는 대로 해석하는 그 결과 속에서 잘못해석하게 되고 잘못 해석하니까 잘못 행동하게 되고 나중에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왜냐? 우리 인생의 절대적인 문제를 해결 한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가 절대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로 모든 사건을 해석해야 그게 바른 해석이 되어지는 겁니다. 내가 옳고 그르고가 아니고 또 이것이 논리적인가 합리적인가 객관성 있는가.. 물론 사람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이어야 하고 객관성도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엘리트층에 들어갈수록 논리적이어야 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또 합리성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사실은 기준이 아닙니다.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그리스도” 입니다. 우리의 옳고 그름도 아닙니다. 내가 기준될 수 없어요. 오직 우리의 절대적인 기준은 복음,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기준이 되어질 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오직그리스도가 기준 되어지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아요. 왜냐?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그 은헤가 아니고서는 이 자리에 앉을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이면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 기준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판단하고 정죄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보면 볼수록 복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것이고 배려할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 그리스도로 진리를 따르는 자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의 절대적인 배경,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종교생활 하는 자, 율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우상숭배 하는 모든 사람들은 육신적인 것을 배경으로 삼아요. 그래서 육신적인 것을 갈구하고 그것 때문에 성공했다, 실패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육신적인 것을 갈구하면서 성공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신적인 것을 갈구하며 살아가는 만큼 또 다른 영적인 문제,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시 말해, 종교생활, 율법생활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은 육신적으로 성공할 수 있지만, 또 다른 영적인 문제가 오고 성공해놓고도 무너지는 문제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 그것을 볼 수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배경으로 삼지 않고 육신적인 것들을 배경으로 삼으니까 성공하는 자리에 이르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다 칩니다. 그런데 성공해놓고 결국 무너져요. 성공해놓고 결국 실패해요. 그걸 지금 우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부분들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은 돈과 권력, 눈에 보이는 세상을 배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건 종교생활 하는 사람들, 율법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나오는 판단과 정죄이고요, 우리는 세상, 배경, 돈, 육신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만 배경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육신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배경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성경에 보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렸죠. 노예로 갔습니다. 노예 살이하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요셉의 삶을 보면 구차하게 변명하고 핑계대지 않았어요. 아니, 핑계댈 수 있을만 하잖아요. 그런데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핑계대지 않았어요. 한번도. 왜 그렇습니까? 이미 요셉은 나의 배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보면 장인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고 아들 압살롬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곤고하고 피곤한 인생이었어요. 그런데 그 도망치면서도 한번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았어요. 도망하는 그것이 다윗에게는 하나님께 피하는 것으로 다윗은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보여주고 있습니까? 다윗의 시편을 보세요.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나의 도움이 되신 여호와여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요새시오.. 무슨 말입니까? 피해 도망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윗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기의 배경은 하나님이라는 사실. 눈에 보이는 것이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시편 23편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이 배경이 되어지니까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던 것을 고백한 내용이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육신을 배경으로 살아가면 결국은 한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우리 산업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스도가 나의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당해 집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배경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의 배경이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의 산업현장에서 여러 가지 이런 저런 안 좋은 부조리한 데에 빠지지 않게 되어 있어요. 세상과 타협하지 않게 되어 있어요. 초대교회 때 순교하고 핍박당하면서도 그들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리스도가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구차하게 변명하고 핑계대며 그 자리를 모면할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 전부 다 하나같이 핍박 속에서 그들은 목숨을 잃어가는 생명의 역사를잃어가는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어요. 왜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의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의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나의 배경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 그렇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그리스도만 절대적인 기준인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고 예수그리스도만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리를 따르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어떠한 축복이 임하느냐? 10절에 보세요.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 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에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잠언서 4장 8절에 보면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만 절대적인 배경이요, 절대적인 기준임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케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있는 동안 평강의 역사로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흑암의 역사들이 무너지는 응답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바울이 우리에게 강조하고 싶은 부분들은 복음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될 때 갈수록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되고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될 때 존귀와 영광과 평강이 임하는 그 축복을 누리게 되고 복음적인 삶을 살게 될 때 결국은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그 축복된 응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오늘 ‘어린이 주일’ 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정말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남길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 자녀들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우리 자녀들이 배웁니다. 말을 가지고 가르침 받는 것도 있지만, 삶을 통해 배웁니다. 에베소 6장 4절에 보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의 교훈’이라는 말은 말로서 가르치라는 뜻이고 ‘훈계’라는 말은 삶으로 가르치라는 뜻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 그게 더 우리 자녀들에게 각인되어지고 뿌리 내려지고 체질되어집니다. 여러분 어떠한 삶을 여러분 자녀들에게 전달할 것입니까? 오늘의 말씀과 오늘의 기도와 오늘의 전도. 오직 그리스도만 절대적인 우리의 기준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절대적인 배경이다. 이 진리를 따르는 자의 삶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이 삶을 삶으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돌리시고 우리 자녀들에게 이 축복의 역사를 전달함으로 귀하게 오는 시대시대 속에 전도자들이 일어나는 그 축복된 응답이 우리 하나교회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년 5월 3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진리를 따르는 삶
(롬2:1-11)
서론: 복음을 알고 복음 속에 있으면 모든 것이 되어지는 가운데 절대적인 축복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복음이기에, 아무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갈 자가 없습니다(요10:28).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복음적인 체질입니다. 복음적인 체질이 되지 않으면,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신분인데 불신앙과 율법, 종교적인 체질로 실패하게 됩니다(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오늘 본문의 바울은, 유대교 배경 가운데 깊이 뿌리내린 로마 교회의 율법주의와 종교적 체질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체질이 복음적인 체질로 바꿔지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이 먼저 메말라가고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불의한 판단으로 사는 자
(1) 두 종류의 사람 (7~10절)
1)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축복(7절)가운데 영광과 존귀, 평강과 하늘 상급이 있음(10)
2) 불의를 따르는 자와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과 분노(8), 환란과 곤고(9)가 있음
(2)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지 않으면, 서론 인생을 살게 됩니다.
1) 모든 중심이 자기 자신(창3장)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함(4절: 인자와 귱훌, 용납과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
2) 하나님의 무궁한 자비와 풍성한 인자하심, 우리를 향한 성실하심(애3:22-23)을 알지 못함
3) 낙심과 좌절, 포기와 절망(고급스러운 교만)에 빠지게 됨(자신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
4) 복음과 상관없는 고집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의지하고 살아감
5) 악을 행하는 자는 결국 환란과 곤고가 찾아오고, 영혼에 평안이 없음(9절)
2. 진리를 따라 사는 자
(1)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기준임을 알고 살아가는 자
1) 인류 모든 문제의 근본은, 창3장의 하나님 떠남으로 마귀에게 잡혀 시작된 것임
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해결하심 (왕: 사탄결박 / 제사장: 죄,저주,재앙해결 / 선지자: 하나님 만나는 길)
3) 무엇이든 선택하고 판단할 때, 또 사건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도록 하라!!
(2)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살아가는 자
1) 종교생활과 율법생활 가운데, 육신적인 배경으로만 성공과 실패를 기준 삼음(성공한 뒤 무너짐)
2) 우리는 육신의 배경을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것임(요셉, 다윗)
3) 그리스도의 배경 가운데 영광과 존귀, 평강을 누리며 영화롭고 존귀하게 됨(잠4:8)
결론: 우리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존귀와 영광, 평강이 임하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나아가 자신을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축복된 응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후대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남길 것입니까? 후대들은 우리의 삶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엡6:4, 주의 교훈[말]과 훈계[삶]로 자녀를 가르치라).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기준, 우리의 배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삶을 살게 됨으로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을 돌리고, 자녀에게 전달함으로 시대시대마다 전도자들이 일어나길 기도드립니다.
< 기 도 문 >
하나님 아버지, 복음 속에서 모든 것이 되어지는 가운데, 절대적인 축복과 승리를 보장해 주심을 믿습니다. 영원한 진노와 환란, 곤고 가운데 불의한 판단을 하는 서론인생에서 건져주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절대적인 기준이자 절대적인 배경임을 알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한주간 진리를 따라 살아감으로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존귀와 영광, 평강을 누리는 가운데, 후대에까지 전달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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