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복이 될지라
2017-03-26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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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너는 복이 될지라”
(창11:27~12:9)
11: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11:27~12:9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벧엘로 올라갑시다! 오늘 이 한날도 우리의 모든 길을 열으시고 축복하시는 약속을 붙잡는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참석했던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우리의 걸음을 완벽하게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모든 길, 우리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약속 안에서 열어 가십니다. 그 사실을 오늘 메시지 듣는 가운데 확인하고 그 부분만 붙잡고 돌아가는 시간 되시기를 다시 한 번 더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는 사람은 먼저 진단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신앙 생활이란, 사실은 한계가 없는 것이 신앙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것들 위해서 살아가고 세상의 것들 위해서 노력하게 되면 그 육신적인 것, 세상의 것은 반드시 한계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반드시 한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지금 이 땅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 신앙 생활은 그 어떤 경우도 한계를 맞이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신앙 생활의 응답을 누렸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항상 기뻐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17절, 18절입니다. 항상 기뻐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매일매일 삶 속에 하나님께서 그 기쁨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또 감사가 범사에 되어졌다는 말은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감사거리를 날마다 날마다 허락하셨다는, 한계 없는 신앙 생활을 함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0절, 31절에 보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진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인생은 이 땅에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 했습니다. 그래서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 말씀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축복된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현장의 문제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새 은혜를 입지 않으면,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안다는 것은 현장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안다는 말입니다. 현장의 문제 100%는 복음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복음을 못 듣고 있고 복음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있고 복음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응답을 받지 못해서 실제로 현장에서 문제들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처음부터 약속하신 복음은 마가복음 3장 13절~15절에 나옵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해서 부르셨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셔서 부르셨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함께 있게 하시고.” 마가복음 3장 14절에 “함께 있게 하시고.” 함께 있는 그 축복된 응답과 증거를 가지고 “전도도 하며.” 그리고 이 땅에 영적인 문제로 모든 인생이 실패하는 것을 알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땅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완벽한 복음의 축복을 준비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조차도 하나님은 완벽한 복음을 준비해 놓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사실 완전한 축복된 역사를 준비해놓고 부르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 생이 많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깨닫지 못했느냐? 여러분, 75년 동안 세상의 것으로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축복된 역사를 준비해놓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늦게야 깨닫게 되고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그 축복의 역사를 누리게 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 아브라함을 일컬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창세기 11장 오늘 본문의 27절부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생에 나오는 이 중요한 본문은 우리가 교회들 속에서 설교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부분들 중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이 시간에 우리가 오늘 창세기를 보아오는 가운데서 오늘 이 본문을 선택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부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완전한 축복 가운데서 부르셨지만 실패를 계속 거듭함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을 붙잡고 우리가 참된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축복된 언약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인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이 어떤 것이었고, 또 그 부르심 앞에 아브라함이 계속적인 실패를 한 것이 무 때문인가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에게는 언약으로 붙잡는 축복의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그러면 먼저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라는 동네에서 부르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느냐? 여러분, 그 당시 갈대아 우르는 완전히 우상 동네입니다. 심지어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우상을 판매하는, 그냥 우상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상숭배하도록 만드는, 우상을 판매하는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우상 동네인 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불러내셨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언약이, 실패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린 아담에게 나타나셔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이 아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이 가인의 살인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벨이 가진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셋이란 인물을 세우셔서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할 정도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언약을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노아 시대에 홍수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노아 홍수 시대, 네피림 시대, 완전히 우상숭배가 모든 사람을 장악하고 있던 그 시대에 하나님은 언약의 역사를 이어갈 노아를 은혜 주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 이후에 또 바벨탑 시대가 왔는데 그 바벨탑 시대에 결국 사람들이 탑을 쌓고 거기에 쌓은 탑에서 우상숭배하고, 그런 부분들 때문에 결국은 멸망 당할 그 바벨탑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무엇을 말하는가, 창세기 6장 14절에 보면 방주 안에 들어갈 때 다 살게 되었는데 그 방주의 비밀이 무엇인가, 그 언약을 바르게 가르쳐서 전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우상 동네 속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언약의 전달자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상동네에서 건져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 지금부터 4,000년 전입니다. 창세기 시대에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동시대 인물 가운데 동방의 의인이라 할 수 있는 욥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인 욥, 예배도 잘 드리고 경건한 삶을 사는, 믿음 있는 이 욥을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믿음의 혈통을 이어갈 믿음의 조상으로 왜 갈대아 우르 우상 동네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느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부르셨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의 조건이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면에서는 욥이 동방의 의인이다, 예배 잘 드리고 믿음 생활 잘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은 욥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사실이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전적으로 타락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나갈 수도 없는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여러분, 우리의 조건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우상숭배함으로 멸망 받아야 하고 재앙을 당해야 하는 창세기 3장의 저주 가운데 빠져있던,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 주셔서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심도 그러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르셨다는 것. 여러분, 우리 자신들이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감각도 없고 생각도 없었지 않습니까? 하는 일이라곤 죄 짓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날 찾아오셨는데 은혜로 찾아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았던 바울이 에베소서 1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뜻대로. 우리에게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 보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이 땅의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행하시는데 그 뜻의 결정대로 행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르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그냥 아브라함을, 우상 동네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무조건 축복부터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축복부터 선언하셨습니다. 조건 따지지 않았습니다. 후에라도 조건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라도 조건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조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이런 은혜를 주셨느냐? 사실은 아브라함을 우상숭배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의 역사 속에 있게 되면, 여러분,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느냐? 그 영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떠난 인생은 그 영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우상 숭배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악한 사탄이 그 영을 장악하고 있고, 인간세상 속에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어지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는 것이 하나님 만나는 길을 알지 못하니까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다 비는 겁니다. 그게 전부 다 우상숭배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우상숭배 그 현장에서 건짐 받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했어요. 여기에서 떠나라는 말은 너희 삶의 모든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처를 바꾸라 이 말도 됩니다마는 여기서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은 여러분 신분을 바꾸라는 겁니다. 멸망 받는, 재앙 받는 우상숭배현장에 그 현장에 있지 말고 창세기3장의 저주가 고스란히 임하는 그 우상숭배 그 현장에 있지 말고 신분을 바꾸라 그 현장에서 해방을 받으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우리가 양심적으로 살고, 내 욕심을 버리고, 동기를 버리고, 내 마음을 비우고 그게 신앙생활이 아니예요. 신앙생활은 신분을 바꾸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동기를 버리는 것은 종교생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참된 복음을 깨닫지 못해 가지고 종교생활하고 있으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복음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닙니다. 여러분 전혀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동기를 버린다 할지라도 거기에 악한 사탄의 공격된 역사들을 그것 가지고는 막을 수가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마태복음 12:43~45절에 있는 말씀처럼 더 강한 귀신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제 말씀 나누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친구를 교회 앞으로 인도를 했는데 이 친구가 교회에 와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결국 어느 날 연락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연찮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연락이 되었는데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택시운전수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전화 연락이 되어가지고 통화를 하는데 너무나 택시운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 때문에 막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자기와 상관없이 막 다툼이 일어나고 하는 부분들을 보면서 아~ 너무 힘들다. 내가 내 자신을 비워야 되겠구나. 이게 내 탓이 아닌가 내 마음을 비워야 되겠다 결국 내 탓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어떻게 하든지 욕심을 버리고 그렇게 생활했다고 해요. 그런데 다툼은 없어졌지만은 기도의 비밀들을 다 놓쳐버리게 되고 그런 가운데 더 큰 문제들이 빠져드는 부분들을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들의 문제가 있다면 어떤 면에서 마음을 비우라 좋은 말이지요. 욕심을 버리라, 동기를 버리라 낮아지자 다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복음이 아닌데 복음인양 교회 속에 들어와 가지고요 교회가 종교화 되어버린 겁니다. 여러분 참된 복음은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을 바꾸는거예요. 교회가 종교화 되어버리니까 전도도 못하고, 전도도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오히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더 욕심이 있거든요. 더 마음을 비우지 못하잖아요. 얼마나 동기가 가득 차 있습니까? 그러니까 감히 세상 사람들 사는 삶을 보면서 전도도 못해요. 전도도 안 되고 있고요, 여러분 우리가 현장에서 선포하는 복음은요 조직화된 흑암의 역사들을 완전히 통째로 바꾸는 것이 복음이예요. 그냥 잘 살고, 바르게 살고, 그게 아니예요. 그것은 종교입니다. 종교생활 하면 할수록 더 악한 사탄이 분명히 역사한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은 그냥 단순히 주소를 바꾸라는 그 말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현장에서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신분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아브라함에게 뭐라 했습니까? 그냥 단순히 우상숭배에서 빠져나오고 신분을 바꾸라 그게 아닙니다. 신분을 바꾸게 될 때에 거기에 따른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했어요. 그게 2~3절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민족을 너에게 주겠다. 모든 땅을 너에게 주겠다. 너와 네 후손을 너에게 주겠다. 후손에 대한 축복을 너에게 주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내용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상숭배하면서 망하는 그 현장에서 빠져나오게 될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른 복을 진짜 하나님 안에 다른 복을 준비하시고 불러 내셨다 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완벽하고 완전하고 세상을 정복하고도 남을 수 있는 그 완벽한 축복을 준비해 놓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내 신앙생활 하는 것이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 드리는 것으로, 그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했으니까 내가 뭔가 손해보고, 내가 뭔가 희생하고, 내가 뭔가 하나님께 해 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된 역사를 준비해 놓고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셨는데 여기에 대한 눈이 열려지지 않으니까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손해 보는 것으로, 뭔가 빼앗겨버리는 것으로, 마치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내가 날고자 하는 날갯 죽지를 하나님께서 잘라놓는 것처럼, 내가 뛰어가고자 하는데 나의 발목을 묶어 메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역사를 누리지 못하니까 여러분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는요 교회는 안 나갈 수는 없고 그러니까 진짜 교회 나가는 그 부분들이 내 발목을 붙잡아 놓는 것 같았어요. 친구들 보면 마음껏 노는데 죄책감 전혀 느끼지도 않는데...그렇다고 제가 내 마음껏 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양심으로요 너무 힘든 거예요. 사실은...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나의 날고자하는 날갯죽지를 잘라놓는 것 같은, 내가 뭔가를 해 드리는 것 같은, 내가 뭔가 예수 믿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은 ....여러분 정말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에 대해서 복음은 완벽하고 완전하시고 그 안에 모든 것들이 있는데 그 사실을 못 보니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했으니까 모든 것 버려두고 가는 것이 내가 진짜 버려두고 가는 것처럼,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라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을 예비해 놓고 우리를 부르셨어요. 어느 정도이냐? 나를 축복하셔 가지고 나를 통해서 모든 현장을 살리는 축복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복 주신 것 아닙니까? 내가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 받게 하겠다. 너는 복이 될지라. 여러분 정말로 생명 걸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을 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 걸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찾아내고 누려야 합니다. 내가 사는 만큼 내가 응답받는 만큼 내 가정도 살고, 내 자녀도 살고, 내 현장도 살고, 교회도 살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조건들 따지잖아요. 환경들 따지잖아요.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요 우리의 조건 상관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 좋은 조건이라 할지라도 그 조건이 나로 말미암아 새롭게 이루어지는 축복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예요. 그래서 여러분 조건과 환경과 상황들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세요. 분명히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 받게 하겠다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환경들 보고 원망하잖아요. 하나님은 내게 축복하셔서 나로 말미암아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조건 이야기 하잖아요. 그 조건은 우리로 말미암아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축복된 조건으로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예요. 그래서 정말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그냥 부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상 동네에서 건져 내실 때에. 이미 완벽한 완전한 축복을 예비해 놓고 부르셨는데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했어요.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응답이 뭡니까? 우리는 우리의 가야 될 한치 앞의 길도 알지 못합니다. 5분 후의 길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앞서서 정확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걸음걸음들을, 매 순간순간 마다 매 사건 사건마다 함께 하심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사실, 여기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우리의 걸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모든 걸음걸음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하나 되어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걸음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것, 이것만큼 복된 일이 있을 수 없잖아요. 여러분 걸음을 누가? 하나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정확하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겠다는 성령으로...이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예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처음에 사실은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 그래서 결국은 거기서 형이 죽게 되고요, 떠나 나왔어요. 떠나 나와서 어디에서 머물렀느냐? 하란이라는 지역에서 머물렀어요. 그 하란이라는 지역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가 죽게 되어 지지요. 이 하란이라는 이름의 뜻이 지체하다,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지시할 땅,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가야 하는데 하란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래서 이 상황들을 사도행전7:2~3절에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먼저 하란에 있기 전에 메소포다미아 갈대아 우르이지요. 여기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사도행전7:2 ~3절에 스데반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 다시 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빠져나온 사건과 하란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은 사건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빠져나와서 아버지가 죽고 빠져나와 가지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더라...12:5절에 보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지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메시야를 보내시겠다 라는 땅이 가나안 땅이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가나안 땅의 언약을 붙잡고 승리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나안 땅에 무엇이 생겼느냐? 기근이 생겨났어요.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에서 애굽 왕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결국 나중에 들통나 가지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부분들 붙잡아야 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면 그 약속 붙잡고 환경 앞에 무너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바라보면서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이 가나안 땅에 내 때문에 받는 복이 무엇일까? 그 부분을 봐야 되는데 그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갔어요. 문제를 회피해 버렸어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문제와 사건과 일들 속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체험하고 확인하길 원하시는데 문제 앞에 서서 우리는 그 문제가 내 것이 아니라고 문제를 회피해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 땅을 살게 하지 않으셨어요. 문제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 것인가를 그것을 체험하도록 살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며 살도록 하셨어요. 그렇다면 기근이라는 부분을 당했을 때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가면 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가나안 땅의 언약을 주셨는데 언약의 백성들을 어떻게 축복하시느냐 그 사실을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을 때 언제 홍해가 갈라졌어요? 모세가 지팡이를 내 밀었을 때에 홍해가 갈라졌어요.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 언약궤 메고 요단강가에 들어섰을 때에 여러분 요단강이 갈라졌어요.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를 당했는데 하나님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으신 것을 체험했어요. 우리에게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문제를 당하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문제를 답으로 주신 것인데, 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기회인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기회이냐?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들을 어떻게 승리케 하시는가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여러분 기근을 당해 가지고 애굽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결국은 아브라함을 통해 가지고 그 가나안 땅이 어떻게 축복 받는 것인가를 아브라함에게 증거로 보여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서 애굽에 내려갔어요.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에 그것을 기회로 붙잡고 있어야 됩니다. 한계를 당하면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살릴 그 한계를 꿰뚫고, 한 시대를 살릴 능력으로 주시는 그 축복된 응답을 예비해 놓고 주시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면 부르실 때에 완벽한 축복을 예비해 놓고 부르셨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환경들 앞에 약속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 바라보고 실패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약속 확인하고 약속 붙잡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실패를 거듭하는 아브라함
두 번째입니다. 아브라함이 실패를 계속하게 되지요. 특별히 아브라함 때문에 일어난 모든 부분들 보면 창세기11:28절에 아브라함의 형이 죽게 되고요, 32절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게 되어 지고 그래서 결국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떠나 나오는데 누구를 데리고 나오느냐? 롯을 데리고 나옵니다. 그런데 나중에 13장에 보면 그 롯 때문에 또 아브라함 가정에 싸움이 막 일어났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재산을 축복해 가지고 아브라함의 양을 치는 목자들, 롯 재산도 축복해 가지고 롯의 양을 치믄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어요. 가정에 싸움이 막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결국은 아브라함에게 롯을 떠나게 하는 부분들 보게 되는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여기 보면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 했는데 롯을 데리고 나왔다라는 것, 보기에는 좋은 거지요. 아버지 없는 아들을 챙긴다라는 것, 그것은 명분상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잖아요. 조카 롯을 챙긴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것 통해 하나님은 롯을 떼어보내지요. 그래서 본격적인 축복이 창세기13:14절에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축복하는 것을 보게 되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는 하나님은 완벽하게 책임지고 불렀는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집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하는,,,그래서 롯을 챙기는 사건, 겉으로는 좋아보이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있어요. 또 성경을 보면 창11:30절에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함으로 자식이 없었다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롯을 떠나보내고 본격적으로 자식에 대한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자식이 없는데 이 조카 만으로라도 내가 자식 삼아야 될것이 아닌가 나중에...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그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고,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브라함에게서 롯을 떼어 보내고 본격적인 축복을 하게 되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이런 불신앙 가운데 빠졌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음을 가졌지만 복음에 대해서 누리지 못하고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가 이 문제가 아닙니까? 복음을 받긴 받았는데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가지고 순간 순간 불신앙에 빠져요. 나도 모르게 그렇잖아요. 아브라함처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애굽의 노예로 들어갔습니까? 복음을 놓쳐버렸을 때... 그래서 430년동안 애굽의 종살이 했지요. 거기서 언제 나왔느냐? 피언약 복음 붙잡았을 때, 왜 피냐? 구약 성경에는 계속 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요. 왜 피냐?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답으로 주신 것이 피의 언약입니다. 인간의 근본 세 가지가 뭡니까? 재앙과 지옥배경과 사탄의 운명 가운데 빠진 겁니다. 이 문제는 피 언약 아니고는 해결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계속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그 재앙의 문제 속에서, 지옥 배경 가운데서, 사탄의 운명 가운데서 빠져 나오도록 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사탄의 역사들, 홍해를 건너는 과정 속에서도 사탄은 죽지 않았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 속에서 빠져 나왔잖아요. 빠져나오면서 광야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 악한 사탄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 불 신앙를 심고, 시험거리를 만들고, 불평하도록 만들고요, 이게 사탄의 역사 아닙니까? 그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미 가나안 땅에 모든 문화와 정치, 경제를 악한 사탄이 완전히 장악해 버렸어요. 이 사탄의 세력을 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바로 피 언약, 구약의 피 언약,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는 뭡니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히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에는 피 언약 붙잡게 될 때에 모든 것에 해방되고요, 신약에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행4: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 ”말씀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현장에 영적 싸움에서, 여러분 정말로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울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고전2:2절에 보면 바울이 이야기 했어요.“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무슨 말입니까? 오직 우리에게 그리스도 그 이름만이 모든 재앙 속에서, 지옥배경 속에서, 사탄의 운명 속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이름 붙잡게 될 때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문제 끝납니다. 이게 복음이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복음 가운데 부름 받았지만 이 복음의 능력을 누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순간순간 거짓말하고, 순간순간 불신앙하고, 순간순간 실패하게 되고, 나중에 가야 깨닫게 되지요. 언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이삭을 주고 그 이삭을 마지막에 하나님께 드리게 되잖아요. 그 때 완전히 깨닫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주시고 그 복음 속에 모든 축복을 다 준비하시고 완벽하게 예비하고 주셨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아브라함.. 계속적인 실패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얼떨결에 부른 게 아니잖아요. 실수해서 부른 게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복음 속에 내 인생의 모든 문제 끝났다 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그 어마어마한 축복들을 다 놓쳐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에는 로마서11장에 보면 후회하심이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준비해 놓고 부르신 그 사실을 모르니까 계속해서 실수를 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어떤 축복이었습니까? 저주와 불신과 우상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요,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정과 가문을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어요. 이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이 복음은 생명과 함께 확산되게 되어 있어요. 이 복음의 비밀을 붙잡고 있으면 결국은 사도행전16:31절의 말씀처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말씀했어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서 부르셨다면 저와 여러분을 가정과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것입니다. 복음 붙잡고 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 분명히 여러분 때문에 가정과 가문이 예수 믿게 되는 구원 받게 되는 그런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가족과 후손을 축복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핍박과 어려움들, 전부 다 가정 속에 있는 거예요. 그 뿐만 아닙니다. 다른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살리기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한 나라를 품고 기도하는 세계복음화를 우리의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부분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도록 부르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있는 장소에 그리스도의 비밀이 회복되도록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통해서 구원의 씨, 메시야가 오도록 부르셨다면 저와 여러분 통해서 이 언약의 역사들이 후대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은 딴 것이 없습니다. 날마다 복음의 뿌리만 내리면 됩니다. 기어코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모델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이지요. “너는 복이 될지라” 날마다 순간순간 마다 복음에 뿌리내림으로 말미암아 “너는 복이 될지라” 이 축복된 응답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3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너는 복이 될지라
(창11:27-12:9)
서론: 삶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는 사람은 먼저 진단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한계가 없지만(살전5:16-18), 육신의 것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노력하면 반드시 한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현장의 모든 문제는 복음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막3:13-15). 아브라함을 완벽한 축복을 누리고 부르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았던 때가 많았습니다. 75년간 세상의 것으로 각인, 뿌리, 체질 되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가. 언약을 전달하기 위해서 –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심
1) 창3:15(여자의 후손), 창6:14(방주)
2)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 – 인간적인 조건이 필요 없음, 구원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 엡1:11 그의 결정대로 행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나. 우상숭배에서 건지기 위해서 – 신분을 변화(창12:1)
1) 신앙생활은 신분을 바꾸는 것, 종교생활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 동기 버림(마12:45 더 악한 귀신 일곱)
2) 복음을 조직화 된 흑암을 바꾸는 것
다. 새로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1) 땅, 후대의 축복을 약속(창12:1) -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예비 하시고 부르심
2) 나에게 주신 축복으로 모든 사람들을 살림
3)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인도(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
1) 가나안 땅에 가려다 하란 땅에 머무름(행7:2-3)
2)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감(창12:10)
3) 문제와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라.
2. 실패를 거듭하는 아브라함
가. 아버지와 형의 죽음(창11:28), 조카 롯을 데리고 나옴(창12:4) - 말씀에 대한 불순종
나. 복음의 내용
1) 구약에는 피 언약, 신약에는 그리스도로 재앙, 지옥 배경, 사단에서 빠져 나옴
2) 바울의 고백 – 고전2:2(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말하지 않기로 함)
3) 복음이 모든 것을 해결 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음
다. 나중에 깨닫게 되는 아브라함 – 100세에 이삭을 출생
1) 저주, 불신, 우상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서 부르심 – 지역을 살리기 위해
2) 믿음의 조상으로 살리기 위해서 – 가정,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행16:31), 핍박, 어려움은 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
3) 다른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 세계복음화의 가슴(한 나라)
4) 제단을 쌓도록 하기 위해서 –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비밀 전달
5) 후손을 통해서 구원의 씨, 메시야가 오도록 – 렘넌트에게 언약 전달
결론: 복음의 뿌리를 내리고 축복의 모델, 세계복음화의 모델로 “너는 복이 될지라”의 응답 누리시길 바랍니다.
● 기도제목
● 말씀실현(실천사항)
● 전도대상자
“너는 복이 될지라”
(창11:27~12:9)
11:27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31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창11:27~12:9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벧엘로 올라갑시다! 오늘 이 한날도 우리의 모든 길을 열으시고 축복하시는 약속을 붙잡는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참석했던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우리의 걸음을 완벽하게 인도하시고 축복하시고 모든 길, 우리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서 약속 안에서 열어 가십니다. 그 사실을 오늘 메시지 듣는 가운데 확인하고 그 부분만 붙잡고 돌아가는 시간 되시기를 다시 한 번 더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 생활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는 사람은 먼저 진단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신앙 생활이란, 사실은 한계가 없는 것이 신앙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육신의 것들 위해서 살아가고 세상의 것들 위해서 노력하게 되면 그 육신적인 것, 세상의 것은 반드시 한계가 있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반드시 한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지금 이 땅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 신앙 생활은 그 어떤 경우도 한계를 맞이하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신앙 생활의 응답을 누렸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항상 기뻐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17절, 18절입니다. 항상 기뻐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매일매일 삶 속에 하나님께서 그 기쁨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또 감사가 범사에 되어졌다는 말은 신앙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감사거리를 날마다 날마다 허락하셨다는, 한계 없는 신앙 생활을 함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0절, 31절에 보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진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든 인생은 이 땅에서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 했습니다. 그래서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 말씀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예배드릴 때마다 새로운 은혜를 받아 누리는 축복된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현장의 문제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새 은혜를 입지 않으면, 날마다 새롭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없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안다는 것은 현장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안다는 말입니다. 현장의 문제 100%는 복음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복음을 못 듣고 있고 복음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있고 복음을 들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응답을 받지 못해서 실제로 현장에서 문제들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처음부터 약속하신 복음은 마가복음 3장 13절~15절에 나옵니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해서 부르셨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 같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셔서 부르셨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함께 있게 하시고.” 마가복음 3장 14절에 “함께 있게 하시고.” 함께 있는 그 축복된 응답과 증거를 가지고 “전도도 하며.” 그리고 이 땅에 영적인 문제로 모든 인생이 실패하는 것을 알고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 땅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완벽한 복음의 축복을 준비하시고 그 속에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조차도 하나님은 완벽한 복음을 준비해 놓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사실 완전한 축복된 역사를 준비해놓고 부르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 생이 많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깨닫지 못했느냐? 여러분, 75년 동안 세상의 것으로 각인되고 뿌리내리고 체질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축복된 역사를 준비해놓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늦게야 깨닫게 되고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그 축복의 역사를 누리게 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 아브라함을 일컬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창세기 11장 오늘 본문의 27절부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생에 나오는 이 중요한 본문은 우리가 교회들 속에서 설교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부분들 중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이 시간에 우리가 오늘 창세기를 보아오는 가운데서 오늘 이 본문을 선택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부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완전한 축복 가운데서 부르셨지만 실패를 계속 거듭함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언약이 있습니다. 그 언약을 붙잡고 우리가 참된 아브라함이 받았던 그 축복된 언약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인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름이 어떤 것이었고, 또 그 부르심 앞에 아브라함이 계속적인 실패를 한 것이 무 때문인가를 우리가 살펴보면서 우리에게는 언약으로 붙잡는 축복의 시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그러면 먼저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라는 동네에서 부르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느냐? 여러분, 그 당시 갈대아 우르는 완전히 우상 동네입니다. 심지어 성경학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를 우상을 판매하는, 그냥 우상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상숭배하도록 만드는, 우상을 판매하는 장사를 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우상 동네인 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왜 불러내셨느냐?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언약이, 실패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버린 아담에게 나타나셔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이 아벨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벨이 가인의 살인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벨이 가진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에 셋이란 인물을 세우셔서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의 역사를 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할 정도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언약을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노아 시대에 홍수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 노아 홍수 시대, 네피림 시대, 완전히 우상숭배가 모든 사람을 장악하고 있던 그 시대에 하나님은 언약의 역사를 이어갈 노아를 은혜 주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 이후에 또 바벨탑 시대가 왔는데 그 바벨탑 시대에 결국 사람들이 탑을 쌓고 거기에 쌓은 탑에서 우상숭배하고, 그런 부분들 때문에 결국은 멸망 당할 그 바벨탑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이 무엇을 말하는가, 창세기 6장 14절에 보면 방주 안에 들어갈 때 다 살게 되었는데 그 방주의 비밀이 무엇인가, 그 언약을 바르게 가르쳐서 전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 우상 동네 속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언약의 전달자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우상동네에서 건져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 지금부터 4,000년 전입니다. 창세기 시대에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동시대 인물 가운데 동방의 의인이라 할 수 있는 욥이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방의 의인인 욥, 예배도 잘 드리고 경건한 삶을 사는, 믿음 있는 이 욥을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믿음의 혈통을 이어갈 믿음의 조상으로 왜 갈대아 우르 우상 동네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셨느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부르셨습니다. 우리 인간 편에서의 조건이 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면에서는 욥이 동방의 의인이다, 예배 잘 드리고 믿음 생활 잘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할 것인데, 하나님은 욥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사실이 그런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전적으로 타락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나갈 수도 없는 저와 여러분을 은혜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면 여러분, 우리의 조건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우상숭배함으로 멸망 받아야 하고 재앙을 당해야 하는 창세기 3장의 저주 가운데 빠져있던,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은혜 주셔서 부르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심도 그러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르셨다는 것. 여러분, 우리 자신들이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감각도 없고 생각도 없었지 않습니까? 하는 일이라곤 죄 짓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날 찾아오셨는데 은혜로 찾아오셔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았던 바울이 에베소서 1장 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뜻대로. 우리에게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 보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이 땅의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행하시는데 그 뜻의 결정대로 행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조건 없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부르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그냥 아브라함을, 우상 동네에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무조건 축복부터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축복부터 선언하셨습니다. 조건 따지지 않았습니다. 후에라도 조건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라도 조건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조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이런 은혜를 주셨느냐? 사실은 아브라함을 우상숭배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숭배의 역사 속에 있게 되면, 여러분,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느냐? 그 영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떠난 인생은 그 영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우상 숭배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악한 사탄이 그 영을 장악하고 있고, 인간세상 속에 고난과 고통이 계속되어지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찾는다고 찾는 것이 하나님 만나는 길을 알지 못하니까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다 비는 겁니다. 그게 전부 다 우상숭배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우상숭배 그 현장에서 건짐 받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했어요. 여기에서 떠나라는 말은 너희 삶의 모든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처를 바꾸라 이 말도 됩니다마는 여기서 너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은 여러분 신분을 바꾸라는 겁니다. 멸망 받는, 재앙 받는 우상숭배현장에 그 현장에 있지 말고 창세기3장의 저주가 고스란히 임하는 그 우상숭배 그 현장에 있지 말고 신분을 바꾸라 그 현장에서 해방을 받으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우리가 양심적으로 살고, 내 욕심을 버리고, 동기를 버리고, 내 마음을 비우고 그게 신앙생활이 아니예요. 신앙생활은 신분을 바꾸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고, 동기를 버리는 것은 종교생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된 참된 복음을 깨닫지 못해 가지고 종교생활하고 있으면서 신앙생활 하고 있다고 복음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닙니다. 여러분 전혀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동기를 버린다 할지라도 거기에 악한 사탄의 공격된 역사들을 그것 가지고는 막을 수가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하면 할수록 마태복음 12:43~45절에 있는 말씀처럼 더 강한 귀신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어제 말씀 나누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를 해요. 자기 친구를 교회 앞으로 인도를 했는데 이 친구가 교회에 와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결국 어느 날 연락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연찮게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연락이 되었는데 완전히 실패해 버리고 택시운전수를 하고 있는데 그런데 전화 연락이 되어가지고 통화를 하는데 너무나 택시운전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것 때문에 막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일어나고, 자기와 상관없이 막 다툼이 일어나고 하는 부분들을 보면서 아~ 너무 힘들다. 내가 내 자신을 비워야 되겠구나. 이게 내 탓이 아닌가 내 마음을 비워야 되겠다 결국 내 탓으로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어떻게 하든지 욕심을 버리고 그렇게 생활했다고 해요. 그런데 다툼은 없어졌지만은 기도의 비밀들을 다 놓쳐버리게 되고 그런 가운데 더 큰 문제들이 빠져드는 부분들을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들의 문제가 있다면 어떤 면에서 마음을 비우라 좋은 말이지요. 욕심을 버리라, 동기를 버리라 낮아지자 다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복음이 아닌데 복음인양 교회 속에 들어와 가지고요 교회가 종교화 되어버린 겁니다. 여러분 참된 복음은요,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신분을 바꾸는거예요. 교회가 종교화 되어버리니까 전도도 못하고, 전도도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오히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더 욕심이 있거든요. 더 마음을 비우지 못하잖아요. 얼마나 동기가 가득 차 있습니까? 그러니까 감히 세상 사람들 사는 삶을 보면서 전도도 못해요. 전도도 안 되고 있고요, 여러분 우리가 현장에서 선포하는 복음은요 조직화된 흑암의 역사들을 완전히 통째로 바꾸는 것이 복음이예요. 그냥 잘 살고, 바르게 살고, 그게 아니예요. 그것은 종교입니다. 종교생활 하면 할수록 더 악한 사탄이 분명히 역사한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은 그냥 단순히 주소를 바꾸라는 그 말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현장에서 빠져나오라는 거예요. 신분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아브라함에게 뭐라 했습니까? 그냥 단순히 우상숭배에서 빠져나오고 신분을 바꾸라 그게 아닙니다. 신분을 바꾸게 될 때에 거기에 따른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했어요. 그게 2~3절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민족을 너에게 주겠다. 모든 땅을 너에게 주겠다. 너와 네 후손을 너에게 주겠다. 후손에 대한 축복을 너에게 주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내용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상숭배하면서 망하는 그 현장에서 빠져나오게 될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른 복을 진짜 하나님 안에 다른 복을 준비하시고 불러 내셨다 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완벽하고 완전하고 세상을 정복하고도 남을 수 있는 그 완벽한 축복을 준비해 놓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내 신앙생활 하는 것이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 드리는 것으로, 그래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했으니까 내가 뭔가 손해보고, 내가 뭔가 희생하고, 내가 뭔가 하나님께 해 드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된 역사를 준비해 놓고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셨는데 여기에 대한 눈이 열려지지 않으니까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손해 보는 것으로, 뭔가 빼앗겨버리는 것으로, 마치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내가 날고자 하는 날갯 죽지를 하나님께서 잘라놓는 것처럼, 내가 뛰어가고자 하는데 나의 발목을 묶어 메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역사를 누리지 못하니까 여러분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는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했을 때는요 교회는 안 나갈 수는 없고 그러니까 진짜 교회 나가는 그 부분들이 내 발목을 붙잡아 놓는 것 같았어요. 친구들 보면 마음껏 노는데 죄책감 전혀 느끼지도 않는데...그렇다고 제가 내 마음껏 놀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양심으로요 너무 힘든 거예요. 사실은... 교회 다니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나의 날고자하는 날갯죽지를 잘라놓는 것 같은, 내가 뭔가를 해 드리는 것 같은, 내가 뭔가 예수 믿는 것이 손해 보는 것 같은 ....여러분 정말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에 대해서 복음은 완벽하고 완전하시고 그 안에 모든 것들이 있는데 그 사실을 못 보니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고 했으니까 모든 것 버려두고 가는 것이 내가 진짜 버려두고 가는 것처럼,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라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큰 축복을 예비해 놓고 우리를 부르셨어요. 어느 정도이냐? 나를 축복하셔 가지고 나를 통해서 모든 현장을 살리는 축복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복 주신 것 아닙니까? 내가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 받게 하겠다. 너는 복이 될지라. 여러분 정말로 생명 걸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을 살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했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생명 걸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찾아내고 누려야 합니다. 내가 사는 만큼 내가 응답받는 만큼 내 가정도 살고, 내 자녀도 살고, 내 현장도 살고, 교회도 살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조건들 따지잖아요. 환경들 따지잖아요.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은요 우리의 조건 상관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안 좋은 조건이라 할지라도 그 조건이 나로 말미암아 새롭게 이루어지는 축복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예요. 그래서 여러분 조건과 환경과 상황들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지 마세요. 분명히 하나님은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 받게 하겠다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환경들 보고 원망하잖아요. 하나님은 내게 축복하셔서 나로 말미암아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조건 이야기 하잖아요. 그 조건은 우리로 말미암아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축복된 조건으로 만들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예요. 그래서 정말로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그냥 부르지 않았다는 거예요. 우상 동네에서 건져 내실 때에. 이미 완벽한 완전한 축복을 예비해 놓고 부르셨는데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했어요.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응답이 뭡니까? 우리는 우리의 가야 될 한치 앞의 길도 알지 못합니다. 5분 후의 길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앞서서 정확하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걸음걸음들을, 매 순간순간 마다 매 사건 사건마다 함께 하심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사실, 여기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우리의 걸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모든 걸음걸음마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이 하나 되어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의 걸음을 축복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것, 이것만큼 복된 일이 있을 수 없잖아요. 여러분 걸음을 누가? 하나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정확하게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겠다는 성령으로...이 축복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예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처음에 사실은 갈대아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 그래서 결국은 거기서 형이 죽게 되고요, 떠나 나왔어요. 떠나 나와서 어디에서 머물렀느냐? 하란이라는 지역에서 머물렀어요. 그 하란이라는 지역에서 자기 아버지 데라가 죽게 되어 지지요. 이 하란이라는 이름의 뜻이 지체하다,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지시할 땅, 가나안 땅을 향해서 나가야 하는데 하란에 머물러 있었어요. 그래서 이 상황들을 사도행전7:2~3절에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 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포다미아에 있을 때, 먼저 하란에 있기 전에 메소포다미아 갈대아 우르이지요. 여기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사도행전7:2 ~3절에 스데반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메소포다미아 다시 말하면 갈대아 우르에서 빠져나온 사건과 하란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하란에서 아버지가 죽은 사건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빠져나와서 아버지가 죽고 빠져나와 가지고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더라...12:5절에 보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지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메시야를 보내시겠다 라는 땅이 가나안 땅이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가나안 땅의 언약을 붙잡고 승리했습니다. 그 가나안 땅에 아브라함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가나안 땅에 무엇이 생겼느냐? 기근이 생겨났어요. 기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어디로 내려갔습니까? 애굽에 내려가서 애굽에서 애굽 왕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결국 나중에 들통나 가지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부분들 붙잡아야 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면 그 약속 붙잡고 환경 앞에 무너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바라보면서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이 가나안 땅에 내 때문에 받는 복이 무엇일까? 그 부분을 봐야 되는데 그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갔어요. 문제를 회피해 버렸어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문제와 사건과 일들 속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체험하고 확인하길 원하시는데 문제 앞에 서서 우리는 그 문제가 내 것이 아니라고 문제를 회피해요.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 땅을 살게 하지 않으셨어요. 문제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 것인가를 그것을 체험하도록 살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며 살도록 하셨어요. 그렇다면 기근이라는 부분을 당했을 때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가면 되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가나안 땅의 언약을 주셨는데 언약의 백성들을 어떻게 축복하시느냐 그 사실을 봐야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을 때 언제 홍해가 갈라졌어요? 모세가 지팡이를 내 밀었을 때에 홍해가 갈라졌어요.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 언약궤 메고 요단강가에 들어섰을 때에 여러분 요단강이 갈라졌어요.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를 당했는데 하나님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막으신 것을 체험했어요. 우리에게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문제를 당하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문제를 답으로 주신 것인데, 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기회인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어떤 기회이냐?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들을 어떻게 승리케 하시는가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여러분 기근을 당해 가지고 애굽에 내려가지 않았다면 결국은 아브라함을 통해 가지고 그 가나안 땅이 어떻게 축복 받는 것인가를 아브라함에게 증거로 보여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서 애굽에 내려갔어요.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에 그것을 기회로 붙잡고 있어야 됩니다. 한계를 당하면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살릴 그 한계를 꿰뚫고, 한 시대를 살릴 능력으로 주시는 그 축복된 응답을 예비해 놓고 주시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면 부르실 때에 완벽한 축복을 예비해 놓고 부르셨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환경들 앞에 약속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 바라보고 실패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약속 확인하고 약속 붙잡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실패를 거듭하는 아브라함
두 번째입니다. 아브라함이 실패를 계속하게 되지요. 특별히 아브라함 때문에 일어난 모든 부분들 보면 창세기11:28절에 아브라함의 형이 죽게 되고요, 32절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죽게 되어 지고 그래서 결국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를 떠나 나오는데 누구를 데리고 나오느냐? 롯을 데리고 나옵니다. 그런데 나중에 13장에 보면 그 롯 때문에 또 아브라함 가정에 싸움이 막 일어났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재산을 축복해 가지고 아브라함의 양을 치는 목자들, 롯 재산도 축복해 가지고 롯의 양을 치믄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어요. 가정에 싸움이 막 일어났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결국은 아브라함에게 롯을 떠나게 하는 부분들 보게 되는데 여러분 중요한 것은 여기 보면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 했는데 롯을 데리고 나왔다라는 것, 보기에는 좋은 거지요. 아버지 없는 아들을 챙긴다라는 것, 그것은 명분상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잖아요. 조카 롯을 챙긴다는 것,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그것 통해 하나님은 롯을 떼어보내지요. 그래서 본격적인 축복이 창세기13:14절에 보면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축복하는 것을 보게 되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는 하나님은 완벽하게 책임지고 불렀는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집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하는,,,그래서 롯을 챙기는 사건, 겉으로는 좋아보이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있어요. 또 성경을 보면 창11:30절에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함으로 자식이 없었다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롯을 떠나보내고 본격적으로 자식에 대한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자식이 없는데 이 조카 만으로라도 내가 자식 삼아야 될것이 아닌가 나중에...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그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고,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아브라함에게서 롯을 떼어 보내고 본격적인 축복을 하게 되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이 이런 불신앙 가운데 빠졌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음을 가졌지만 복음에 대해서 누리지 못하고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문제가 이 문제가 아닙니까? 복음을 받긴 받았는데 복음의 능력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가지고 순간 순간 불신앙에 빠져요. 나도 모르게 그렇잖아요. 아브라함처럼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애굽의 노예로 들어갔습니까? 복음을 놓쳐버렸을 때... 그래서 430년동안 애굽의 종살이 했지요. 거기서 언제 나왔느냐? 피언약 복음 붙잡았을 때, 왜 피냐? 구약 성경에는 계속 피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요. 왜 피냐?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답으로 주신 것이 피의 언약입니다. 인간의 근본 세 가지가 뭡니까? 재앙과 지옥배경과 사탄의 운명 가운데 빠진 겁니다. 이 문제는 피 언약 아니고는 해결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계속 피 흘림으로 말미암아 그 재앙의 문제 속에서, 지옥 배경 가운데서, 사탄의 운명 가운데서 빠져 나오도록 했습니다. 특별히 여러분 사탄의 역사들, 홍해를 건너는 과정 속에서도 사탄은 죽지 않았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 속에서 빠져 나왔잖아요. 빠져나오면서 광야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광야 길을 가는 동안에 악한 사탄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 불 신앙를 심고, 시험거리를 만들고, 불평하도록 만들고요, 이게 사탄의 역사 아닙니까? 그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이미 가나안 땅에 모든 문화와 정치, 경제를 악한 사탄이 완전히 장악해 버렸어요. 이 사탄의 세력을 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바로 피 언약, 구약의 피 언약,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는 뭡니가?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히9: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에는 피 언약 붙잡게 될 때에 모든 것에 해방되고요, 신약에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행4: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 ”말씀했습니다. 오직 우리의 현장에 영적 싸움에서, 여러분 정말로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울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고전2:2절에 보면 바울이 이야기 했어요.“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무슨 말입니까? 오직 우리에게 그리스도 그 이름만이 모든 재앙 속에서, 지옥배경 속에서, 사탄의 운명 속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이름 붙잡게 될 때에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문제 끝납니다. 이게 복음이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복음 가운데 부름 받았지만 이 복음의 능력을 누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순간순간 거짓말하고, 순간순간 불신앙하고, 순간순간 실패하게 되고, 나중에 가야 깨닫게 되지요. 언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이삭을 주고 그 이삭을 마지막에 하나님께 드리게 되잖아요. 그 때 완전히 깨닫는 겁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주시고 그 복음 속에 모든 축복을 다 준비하시고 완벽하게 예비하고 주셨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아브라함.. 계속적인 실패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얼떨결에 부른 게 아니잖아요. 실수해서 부른 게 아니잖아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 복음 속에 내 인생의 모든 문제 끝났다 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그 어마어마한 축복들을 다 놓쳐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에는 로마서11장에 보면 후회하심이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준비해 놓고 부르신 그 사실을 모르니까 계속해서 실수를 하게 되었는데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이 어떤 축복이었습니까? 저주와 불신과 우상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요,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정과 가문을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어요. 이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이 복음은 생명과 함께 확산되게 되어 있어요. 이 복음의 비밀을 붙잡고 있으면 결국은 사도행전16:31절의 말씀처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말씀했어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기 위해서 부르셨다면 저와 여러분을 가정과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라는 것입니다. 복음 붙잡고 흔들리지 않으면 됩니다. 분명히 여러분 때문에 가정과 가문이 예수 믿게 되는 구원 받게 되는 그런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가족과 후손을 축복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핍박과 어려움들, 전부 다 가정 속에 있는 거예요. 그 뿐만 아닙니다. 다른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살리기 아브라함을 부르셨어요.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한 나라를 품고 기도하는 세계복음화를 우리의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부분들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도록 부르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 있는 장소에 그리스도의 비밀이 회복되도록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통해서 구원의 씨, 메시야가 오도록 부르셨다면 저와 여러분 통해서 이 언약의 역사들이 후대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할 일은 딴 것이 없습니다. 날마다 복음의 뿌리만 내리면 됩니다. 기어코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모델로 세우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목이지요. “너는 복이 될지라” 날마다 순간순간 마다 복음에 뿌리내림으로 말미암아 “너는 복이 될지라” 이 축복된 응답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 3월 26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너는 복이 될지라
(창11:27-12:9)
서론: 삶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는 사람은 먼저 진단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한계가 없지만(살전5:16-18), 육신의 것들을 위해 열심히 살고 노력하면 반드시 한계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현장의 모든 문제는 복음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막3:13-15). 아브라함을 완벽한 축복을 누리고 부르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았던 때가 많았습니다. 75년간 세상의 것으로 각인, 뿌리, 체질 되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
가. 언약을 전달하기 위해서 – 갈대아우르에서 부르심
1) 창3:15(여자의 후손), 창6:14(방주)
2)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 – 인간적인 조건이 필요 없음, 구원
(엡1:5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심, 엡1:11 그의 결정대로 행하시는 이의 뜻을 따라)
나. 우상숭배에서 건지기 위해서 – 신분을 변화(창12:1)
1) 신앙생활은 신분을 바꾸는 것, 종교생활은 마음을 비우고, 욕심, 동기 버림(마12:45 더 악한 귀신 일곱)
2) 복음을 조직화 된 흑암을 바꾸는 것
다. 새로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1) 땅, 후대의 축복을 약속(창12:1) -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예비 하시고 부르심
2) 나에게 주신 축복으로 모든 사람들을 살림
3)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인도(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
1) 가나안 땅에 가려다 하란 땅에 머무름(행7:2-3)
2) 가나안 땅에 들어갔는데 기근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감(창12:10)
3) 문제와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아라.
2. 실패를 거듭하는 아브라함
가. 아버지와 형의 죽음(창11:28), 조카 롯을 데리고 나옴(창12:4) - 말씀에 대한 불순종
나. 복음의 내용
1) 구약에는 피 언약, 신약에는 그리스도로 재앙, 지옥 배경, 사단에서 빠져 나옴
2) 바울의 고백 – 고전2:2(오직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말하지 않기로 함)
3) 복음이 모든 것을 해결 하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 하면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음
다. 나중에 깨닫게 되는 아브라함 – 100세에 이삭을 출생
1) 저주, 불신, 우상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서 부르심 – 지역을 살리기 위해
2) 믿음의 조상으로 살리기 위해서 – 가정,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행16:31), 핍박, 어려움은 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
3) 다른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 세계복음화의 가슴(한 나라)
4) 제단을 쌓도록 하기 위해서 – 모든 장소에서 그리스도의 비밀 전달
5) 후손을 통해서 구원의 씨, 메시야가 오도록 – 렘넌트에게 언약 전달
결론: 복음의 뿌리를 내리고 축복의 모델, 세계복음화의 모델로 “너는 복이 될지라”의 응답 누리시길 바랍니다.
● 기도제목
● 말씀실현(실천사항)
● 전도대상자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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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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