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일어나라
2004-05-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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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마 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 17: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마 17: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 17: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마 17: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마 17: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오늘 마태복음 17장에 상당히 오해되어 있는 부분도 될 수 있고, 뭔가 이걸 읽으면서 우리가 다락방에서 어떤 한 면만을 많이 강조를 했던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자체 속에 들어가서 우리에게 말씀이, 나와 여러분에게 어떻게 확인되고, 또 적용이 되어 질 것인가 하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좀 붙잡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제목을 아마 "일어나라"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일어나야 될지, 여러분 개인적으로 말씀이 적용되면서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일어나기는 일어나야 되는데, 어떻게 일어날까! 그것은 개개인의 몫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본문에 내용은 '예수님께서 변하셨다' 라는 그런 변화 산에 내용이죠. 또 그리고 이 내용이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그저 그것도 제자들 전체를 다 보여주신 것이 아니고, 세 사람 누구입니까? 베드로, 요한, 야곱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을 대동하시고, 예수님께서 올라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확실히 언급이 되어 있는데, 다른 부분들은 아마 말씀 속에서 찾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는 변화 하셨다는 그런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그리고 예수님께서 복음에 뿌리를 제자들에게 내려 주시는 구체적인 그런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게 뭐냐하면 여기 내용은 예수님이 변하셨다는 것보다도 예수님이 장차 오실 메시아로 변화해 주신 것을 보고, 이것을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체험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축복과 은혜를 구체적으로 이해될 수 있고, 체험될 수 있는 것이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뭐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그런 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뭐냐하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이해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말이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쉽게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내 모든 것이 해방되었다!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누린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축복이 어디까지 가야 되느냐? 하늘나라 영광까지! 이해가 되어야 여러분이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 누린다는 말이 실제로 연결이 됩니다. 하늘에 영광이,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이 이해가 안되면 누리려고 암만 백 번 노력을 해도 누려지기는커녕 더 눌립니다. 그것 가지고 누림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어요. 누림이라는 말에 'ㄹ' 자만 더 붙으면 뭡니까? 눌림입니다. 못 누리면 눌려요. 누림과 눌림은 어떤 면에서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예수 믿고 눌리지 마시고, 예수 믿고 진짜 누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무 때나 되는 게 아니더라 구요. 여러분들이 어디까지 체험을 해야 되느냐? 재림까지 눈이 열려야! 이 누림이라는 사실이 연결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부담이 돼요. 눌리고 고통 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땅에 사는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고, 내세의 영광이 보여지지 아니하면,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고통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십자가이고, 어렵고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들의 예수 믿는 것은 눈물과 한숨밖에 더 이상 진전이 안되어요. 반드시 성경은 눈물과 한 숨 이후에 오는 그 영광과 축복에 눈이 열려야 이 은혜가 함께 누려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자들에게 이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의 재림의 영광에 눈을 열어 주시는 그 한 단면도 바로 변화 산의 역사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7절에 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죄인에 대해서 말씀하시죠. 그리고 2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얼른 보면 이게 앞으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때를 말하는 것처럼 볼 수 있습니다 만은, 바로 제자들에게,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 직접 본다고 그렇게 약속을 해 주신 것이, 이것이 변화 산의 약속이라! 성경학자들이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 산에 역사를 보여주시는데, 이 때에 본 그 체험과 사실이 베드로에게는 영원히 기억으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사실을 고백을 했어요. 베드로 후서 1장 16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뭐라 그랬습니까? "친히 본 자라" 그랬습니다. 이 변화 산에서 직접 목격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 영광의 역사를 이어서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교히 우리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고, 직접 우리가 봤노라! 그 재림의 역사는 그냥 만든 이야기가 아니다! 직접 보았노라! 그래서 그 베드로후서에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전서도 아니고 그것이 베드로의 사역 속에서 그가 일생토록 주를 위해서,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게 된 그런 배경 속에서 재림까지 보여 주었던 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베드로후서 1장 17절에 보면 그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했어요.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구체적으로 변화 산의 내용, 그 다음에 그때에 들려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베드로에게는 일평생 남아 있는 그리고 확실한 그의 사역에 중요한 중심을 주었다는 것을 고백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영광의 역사는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축복이에요. 이 영광의 역사, 이 변화의 역사, 이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아무나 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들이 이 은혜를 볼 수 있는, 이 은혜의 축복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귀한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부터 먼저 확인해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말씀처럼 "(마 17: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분명히 세 사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랬습니다. 열두 제자를 다 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올라 갔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다 볼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힘으로도 되는 것도 아니고, 능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이걸 뭐 보채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뭐 이건 키 크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여자라고 되는 것도 아니고, 미인이라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조건이 없어요. 여기는 뭐냐? 오직 뭐로 됩니까? 은혜로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베드로, 요한, 야고보 만을 말씀하면서 올라갔지만, 이 아무도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만 데리고 이 영광 속에 세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참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변화에 역사와 축복을, 먼저 우리가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고, 인간으로 보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여러분 메시아의 역사죠. 이 축복된 복음의 역사를,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은혜! 쉽게 말해서 복음을 깨닫는 자리에 앉혀 주셨다는 것은, 이것은 너무 놀라운 은혜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지난주에도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러고 말씀을 했습니다 만은, 예수 그리스도 볼 수가 없어요. 도저히 천사들이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찬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해 놓고는 목자들을 보냈는데, 별로 인도하고 보냈는데, 가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 더 초라해! 마구간으로 인도했죠, 그 다음에 어디입니까? 이상한 구유에다가, 또 그것도 좋은 어떤 비단옷에 싼 게 아니고 보자기로 하나 싸 가지고, 눕혀 놓았는데 이건 도저히 육신으로, 인간으로,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역사 같으면 영광스러운 어떤 결과가 나타나야 되는데, 인간의 어떤 의식과 수준과 생각으로는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동방에서부터, 또 특별히 하나님이 목자들에게만 보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인들에게도 보여졌는데, 그 지식인들이 상식을 가지고 어디에 갔습니까! 궁궐로 찾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순교의 역사까지 일어나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나의 구주로, 나의 주인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도저히 우리 인간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모태신앙이라고 되는 것도 아니고, 모태신앙으로 될 것 같으면 나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백 번, 천 번 굴러도 모태신앙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노력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예수 믿었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은혜로 되는 겁니다. 은혜로 이 자리에 여러분과 제가 어쩌다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구나! 나의 주 나의 왕이시구나! 모든 문제 해결자시구나! 그냥 보는 게 아닙니다. 이 역사로 참 그리스도의 그 영광의 역사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변화하신, 그리고 근본 하나님의 빛으로 오신 그 분의 역사를, 변화 산에서 실제를 보여 주셨거든요. 이 영광을 보는 곳에 모든 응답이 다 나와 있더라 구요. 모든 축복과 역사가 다 나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 나와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오늘 기억해야 될 것이 '아, 은혜로 되는 것이구나! 성도가 된 것도 은혜로 된 것이구나!' 더군다나 오늘 임명을 받고 주의 교회에 일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워 주셨다! 이것은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세워 주셨는데도, 이것도 모르고 은혜를 모르니까 전혀 소홀해요. 그건 뭐 제직에 된 것도 감동이 없고 일년에 한번 어쩌다가 돌아오는 기도시간도 다 빼 먹어버리고... 참, 하나님께서 굉장히 기분 나쁠 것 같아요! 너무 너무 큰 은혜 주셨는데, 이건 뭐 은혜로 알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그 성경에 '개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그러는 것은, '이 개들아! 이 도야지 들아!' 여러분 은혜를 은혜로 모르면, 개나 돼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이 막말로,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안 해서 그렇지! 그리고 하나님 것을 다 떼어먹는 전부 도적놈들입니다. 그게 어떻게 좀 막말로 된다 그러면, 굉장히 여러분들이 이 은혜를 은혜로 못 본다 그러면, 너무 엄청난 자리라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요. 이상한 자리로 흘러가는 사실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뭔가 여러분들이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봉사를 못한다는 이건 보통 죄악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북에는 찬송 부르고 싶어도 찬송을 못해요. 이북에서는 교회를 섬기고 싶어도 교회를 못 섬겨요. 주일날 와서 한번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것, 하고 싶어도 못해요. 건강 안 주시면 못하고, 힘 안 주시면 못해요. 건강 주시고 힘 주셨는데도 다 빼먹고, 여러분 진짜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면 뭔 생각이 드느냐 하면, '진짜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나 같으면 옛날에 날려 버릴 건데,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 엄청난 자리에 섰는데도 이 지금 말이 아니야!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것도 은혜 중에 은혜예요. 너무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중에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서 뭔가 지금 이 시간 우리가 '잘못했다, 잘했다!' 이전에 정말 은혜의 눈이 열리기 바랍니다. 변화 산에 세우신 하나님의 축복에, 변화의 눈이 열리기 바랍니다. 이게 이루어 져야, 이 사실이 체험되어야 여러분들이 거기서부터 응답도 나올 뿐 아니고, 모든 것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게 안되고, 뭐 봉사하라! 헌신하라! 백번 해봐도 안 되요. 지금 그래서 이 눈이 먼저 열려야 되죠.

그래서 여러분 지금 현재 그 17장 2절에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 모습입니다. 뭐 예수님의 얼굴이,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본래 모습으로 비추어 졌어요. 그것을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변화를 안시키고, 말하자면 변화된 모습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 아닙니까! 본래의 모습은 빛입니다. 성경이, 그래서 요한복음 1장 8절에 보면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요한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을 그렇게 말씀했죠.

그리고 9절에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랬습니다. 아무도 그 빛을 빛으로 알지 못하고, 그 빛 되신 본래 우리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은혜로 그를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를 영접하는 자들은 뭡니까? 그러면 '알았다, 못 알았다!' 아닙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특권이요.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이 인간의 지혜나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노력이나 그걸로 아닙니다. '은혜로 되었더라!' 그랬습니다. "(요 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은혜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뭡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랬습니다. 그건 너무 교회는 은혜로 받았는데, 너무 은혜로 받으니까 뭐냐하면, 너무 큰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노력으로 받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너무 큰 것을, 너무 엄청난 것을 받아 놓으니까, 감각이 없어요. 이웃집에서 물 한 그릇 떠다 주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웃집에서 적은 것 한 그릇 갖다 주어도, '아, 감사합니다!' 그러는데요, 너무 엄청난 것을 받아 놓으니까, 무감각해져 버렸어요. 감사가 감사인지 몰라요.

그래서 이것을 느끼고 깨달을 때마다 우리가 엄청난 것을 받았다는 것이 인지가 되고, 이해가 되는데, 사실은 이때부터 변화의 눈이, 눈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생각이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만은, 그 빛을 가지고 그대로 오시면 인간은 볼 수가 없어요. 이해가 안되어요. 그래서 육신이라는 것으로 빛을 감추어 버렸습니다. 육신이라는 것으로... 여러분 바로 햇볕을 이렇게 쳐다보면요. 햇빛을 감을 쳐다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뭡니까? 구름이 가리워 지면요. 그 해의 모습이 빨갛게 이렇게 보여지죠. 예수 그리스도 볼 수가 없어요. 그런 빛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뭐로? 육신으로 예수를 가리웠습니다. 그게 성육신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도록,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뭘 입고?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또 은혜 중에 은혜죠. 이때에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변화 산에 올라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 되신 모습이 실제와 사실로 체험이 된 그때에 고백된 고백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4절이죠. 다같이 시작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할렐루야!

이때에 터져 나오는 진실한 고백이 뭐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으로 이해가 되고,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사실로, 예수의 본래 이 땅에 오신 모습이 예수가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그 순간에 그게 우리가 실제로 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제게 변화 산의 역사입니다. 빛이 구름이 걷혀지는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가 이해가 되잖아요. 그렇게 되고 그것이 체험 되게 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좋습니다!' 고백이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거든요. 여러분 정말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떤 것보다도 비교될 수 없는 분이구나! 나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예수님이 계신 곳이 좋고, 예수님과 교제하는 장소가 좋고, 예수님의 역사 하는 교회가 좋습니다. 이 고백이 실제로 터져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영접하고, 예수를 믿는다! 그것으로 끝나고 멍하게 있다! 아닙니다. 정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영접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예수의 모습이 말씀을 통해서 이해가 되는 순간에 뭐가 오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보여집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말씀이 좋습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와져야 돼요. 교회 왔다! '어떻게 한시간 빨리 안가나! 지루하다!' 교회 왔다! '여기가 좋사오니, 그러고 반대로 눈을 감고 있다!' 그게 이상하잖아요. 이해가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여러분 한 주간 이상하게, 나도 모르게 늘 주의 성전을 향한 사모의 마음이 있습니다.

시편 27편 4절에 보면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이 축복이 이해된 시편 기자는 뭐라 그랬습니까? '여호와의 전이 좋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교회를 떠나서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까? 교회 가서 일하고, 교회 가서 헌신하고, 교회 가서 뭘 하는 것이 그렇게 부담스럽습니까! 교회 가서 뭘 하는 것이 그렇게 피곤합니까! 이게 이해가 안 되어요.

여러분 오늘 진짜 마음에 깊이 말씀했습니다. 깊이 체험이 되어야 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이 열리게 되는 그 순간부터 주의 전이 사모됩니다. 주여 교회가 좋습니다. 내가 일평생 이 축복과 은혜를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 내가 어떻게 하든지, 주의 교회를 헌신할 수 있는 축복과 은혜를 거두어 가지 마옵소서. 헌신할 수 있고, 축복 받을 이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는 그런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도망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어쩐지 주의 교회에 일하고, 주의 교회에 헌신한다! 피곤해 죽을 지경입니다.

내가 2층에 있으면요. 교회 식당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다 들려요. 그런데 아마 본인들은, '목사님께 다 들리는데 어떻게 우리 웃는 것 이게 시끄럽다!' 그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교회 식당에서 웃는 소리가 굉장히, 내게는 아주 즐겁게 들려요. 여러분 주의 교회에서 헌신하고, 주의 교회에서 일하는 일이,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 축복입니다. 오늘 새삼스럽게 좀 말씀을 여러분께 드려요. 그런데 뭘 핑계를 대든지, 하여튼 배당된 시간조차도 이 지키지를 못해요. 만약에 정 안되면 사서라도 갔다가 놔야 될 것 아닙니까! 자기 마음대로 빠져버리고, 성가대도 못 오면 사서라도 갖다 놔요. 다른 것은 잘 사면서도 그건 왜 안 사요... 그냥 웃으면서 지나갈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의 교회 좋다! 그러면 주님의 교회에 일할 수 있는 축복과 은혜 주신 것에 감격해야 됩니다. 일하면서 너무 기뻐해야 됩니다.

이건 사람 마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된 것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역사! 변화 산의 이 축복의 역사가 보여지고, 이 축복이 이해되는 순간부터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 당신이 내게는 모든 것입니다!' 이게 저절로 와져야 됩니다. 아마 이 말씀하면 정말 여러분 가슴속에 뜨겁게 이 말이 이해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 한번만 체험되면요, 여러분 인생이 달라져 버립니다.

왜, 응답하지 않습니까? 응답 할 것이 있어야 하지! 주님이 싫어 죽겠는데, 어떻게 응답합니까! 요셉처럼 되게 하옵소서! 요셉처럼 만들려고 하니까 죽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에 뿌리라는 게 다른 게 아닙니다. 이게 복음에 뿌리입니다. 왜, 우리가 좋습니까! 예수님 그분! 영원한 저주 속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에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진정한 자유가 여기서부터 나오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밤에 잠을 잘 잔다는 것은 간단한 말이지만, 조금만 걱정 있으면 잠이 안 와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 간단한 말인 것 같지만 엄청난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사실이 조금만 이해되면요.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하나님 앞에, 아니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과 저의 모든 문제 해결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메시아 십자가에서 이를 완성하시고 다 이루었다! 이 축복과 역사가 나와 여러분에게 실제와 사실로 누려지도록 우리 눈이 변하고, 우리의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이 축복과 사실은 막연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실제로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사실이요.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축복이 다른 것 많이 체험하려고 그러지 말고, 이 축복이 구체적으로 체험되는 만큼 신앙의 뿌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루어집니다.

이때에 나오는 것이 뭐냐하면요. 조금 전에 말씀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 좋습니다. 이럴 때에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여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거짓말이지만, 입에 발린 말이지만, 그것도 욕심에서 나온 이야기지만, 또 헌신해도 전부 여러분 욕심으로 다 하고 있지만, 교회 나와서 헌신한다고 그래도 그렇거든요. 거의 자기 욕심대로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수준조차도 이게 체험이 안되면 해결이 안됩니다. 이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이 이해가 되어야 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에 베드로가 고백할 때에 뭐라고 했냐 하면요, 자기 욕심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폼이라도 '주를 위해서, 엘리야를 위해서, 모세를 위해서'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나를 위해서' 소리를 안 했어요. 폼이라도... 여러분 이것이 조금만 이해가 되어도, 조금만 우리가 열리게 되면 그때부터 뭐냐? 나를 부인하는 헌신이 나오더라 구요. 그러다가 변해서 다른 짓 하더라도, 그 순간만이라도 진정한 헌신의 고백이 나와요. 여러분 주의 교회에 와서 간단하게 식당에서 뭐 일한다! 뭐 한다! 간단한 것 같지만 여러분들이 구체적인 뿌리가 바로 안되면 이게 나오지 않아요.

뭐 간단하게 우리가 헌금했다! '아, 그 사람 헌금했구나!' 그렇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 헌금 배경에 이런 구체적인 뿌리가 나오지 않으면 안 나옵니다. 돈이 얼마나 좋은데, 그리고 그 돈 때문에, 돈으로 통해서 살아가는데, 그걸 하나님 앞에 어떻게 드려! 십일조 간단한 것 같지만 어떻게 드립니까! 손이 오그라져서 안 되는데, 만원에서 천 원 떼는 것도 오그라드는데, 백 만원에서 십 만원 떼는 것, 그것은 죽어도 못합니다. 1억에서 천 만원 떼는 것은 그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이 줄수록 힘들어요. 그러니 많이 줄 수가 없지! 기껏 해 봐야 할 수 없이 조금 줄 수밖에 없고, 조금 주면 조금은 떼거든, 많이 주면 손이 오그라들어서 못 떼어요.

여러분 그릇들이 문제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돈이 없습니까! 눈이 멀었습니까! 귀가 어둡습니까! 여러분 형편을 못 봅니까! 다 아십니다. 왜, 안됩니까! 우리의 믿음이 없어요. 우리 그릇이 안되어요. 실제로 우리의 사실적인 복음의 뿌리가 없어요. 전부 인간적인 욕심입니다. 보이는 정욕과, 기복 적인 신앙에 바탕을 두고 살아가는 여기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축복하실, 하나님의 축복의 하나님으로, 그 크신 능력의 하나님으로 그게 믿음이 안되니까! 주실 수 없습니다. 2003년도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결산하면서,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믿음 회복시켜 주옵소서! 변화 산의 역사가 나의 역사로, 하나님이 오늘 이 시간에 임하여 주옵소서!' 진실하게 기도를 드려야 되겠습니다. 이때에 진짜 은혜가, 이때에 이 고백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죠.

4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뭐가 말이냐? 그 다음에 보니까, 모세도 없어졌고, 엘리야도 없어졌고, 그 다음에 누가 나왔습니까? 예수님만 보였더라! 이것이 내용이죠. 비로소 뭐냐하면, 비로소 여러분들에게 율법이 보이고, 선지자가 보입니다. 이게 눈이 열릴 때에, 쉽게 말해서 변화 산의 체험 이후에 베드로가 모세를 봤고, 선지자를 봤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선지자가 따로 나온 게 아닙니다. 뜻이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을 봤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봤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고, 성경 말씀에 율법이 이해가 되고, 또 선지자가 이해가 되고, 또 복음이 이해되는 이런 축복의 성경에 말씀이 말씀으로 눈이 열리게 되는 순간이 언제부터냐?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말씀한 것처럼, 정말 변화 산의 사실적인 역사가 체험이 되어야 이게 이해가 됩니다. 그때부터 메시지를 들을 때에, 말씀이 이해가 되어요. 그때부터 영적인 사람이 영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게 안되면 모세의 말이 누구로 말미암아 완성되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지자의 말은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연결되는, 율법이 연결되는 선지자가 말씀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영적인 문제를 가진 자가 율법에 대한 규모입니다.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율법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잘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만 나오면 못 들어요. 귀가 아프고, 몸살이 나서 못 들어요. '리 목사님 또 율법이다!' 그러면서 뭐냐하면, '이렇게 행동하라! 저렇게 행동하라! 저렇게 살아라!' 그러면 그게 못 들어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왜? 뭐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게 전부 자기한테 문제가 되거든요. 정말 예수 그리스도 변화의 역사를 우리가 보고, 깨닫고, 복음에 뿌리가 내리는 순간부터 율법은 여러분과 제게 우리의 삶을 바꾸는 규모입니다.

그 율법에 설교가 성경에 율법 설교가 따로 있습니까? 복음이 안되면 율법으로 들리기 때문에 율법 설교죠. 그런 사람들이 뭐가 있느냐? 자기 행동 뭐같이 하고, 자기는 뭐같이 살면서, 뭐라고 그러느냐? 그런 규모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만 나오면, '우리 목사님 복음은 말 안하고 율법만 말한다!' 그러죠. 자기를 못 봐요. 말씀이 말씀으로 그에게 임하지를 못합니다. 이게 무서운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치유가 안 되어요. 이런 사람들은, 혹시 여러분 교회에서 메시지가 임하거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에 말씀이 임할 때에, 규모도 함께 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아, 저것은 아니다!' 하는 말이 오거든, 자기를 보세요. '내가 지금 사업이 안 되는구나! 저 일이 안 되는 구나!' 이 눈이 안 열리게 되면요, 여러분 절대 치유가 안됩니다. 여러분 고쳐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통해서 실질적으로 복음의 열매가 안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는 것은 뭐같이 알지 모르지만, 여러분 행동은, 여러분 자신들은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여러분 입에서 나오는 것은, 걸핏하면 이웃을 판단하고, 주의 종들을 향해서 '율법이다!' 그러고, 혹은 중직자를 향해서 '율법이라!' 그러고, 이런 사람들 배경은 그 자신들이 전혀 치유가 안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들을 잘 알아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세가, 그리고 선지자가 대화가 되어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 선지자들의 완성이 성경입니다. 내가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질 때에, '아, 저게 내 문제였구나! 내 사건이었구나! 내 일이었구나!' 이것이 이해되고, 이 눈이 열리게 되는 순간, 순간 변화의 역사가 오게 됩니다. 여러분 그래서 정신문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절대로 자기 자신은 율법이면서도 치유하는 율법의 메시지, 규모의 메시지가 전혀 들어가지가 않아요. 이것이 어려운 문제입니다.

오늘 말씀 통해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가 뿌리내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통해서 모든 문제 해결되는 사실이, 변화의 주님의 눈이 열리게 되는 순간부터 뭐가 옵니까?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아, 맞아! 내 문제를 지금 바로 저 속에서 보여주셨구나!' 이것이 조금만 이해가 되면, 그 자신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가정이 어떻다! 자식이 어떻다! 남편이 어떻다!' 말 마세요. '자기가 어떻다!' 자기 문제이지,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가끔가다가 우리 집사람하고 싸워요. 가끔 싸워요. 밥상 앞에서 싸우고, 밥 먹고 난 후에도 싸우고, 그리고 와서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가만히 생각하면, 전부 내 문제라! 탓할 것이 하도 없어요. 그런데 싸울 때는 절대로 내 문제 아닙니다. 네가 잘못해서 그렇지! 나는 절대로 잘했고, 나는 완벽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하나 드립니다. 베드로가 이런 축복된 자리에서 축복된 고백을 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이기 때문에, 조금만 우리가 보면, 그 고백 속에서도 자기 욕심 차리고 있다는 겁니다. 복음을 오해하고 있고, 복음을 그릇 되이 자기 욕심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16장 20절에 보면요.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21절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예수님께서 이제 메시아로서 정말 중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메시아의 역사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이제는 가르칠 시간이 되었구나! 이 정도로 알면, 이 정도로 깨닫고 있으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고백한 베드로를 보고, 제자들을 향해서 이제는 가르쳐도 되겠구나! 말씀했는데도, 신앙인이든지, 신앙이 아니든지, 믿음이 좋든지, 나쁘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얼마나 오해하고,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럴 때에 이 예수님께서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무슨 말이냐?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과 제가 정말 눈뜨고 붙잡아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으나! 은혜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누린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십자가를 모르고, 십자가로 통해서 오는 면류관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의 역사에 구체적으로 눈이 안 열린다면, 십자가 없이 재림이 없습니다. 죽음이, 영광스러운 재림의 역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십자가 없는 면류관을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없는 영광을 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성도들에게 미련한 짓이요, 잘못된 것인 줄로 모르면서 이런 문제로 오게됩니다.

여기서 뭐냐? 쉽게 나도 모르게 기복 신앙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천국을 찾는다면 우리의 목표에서 벗어납니다. 하나님의 목표에서 벗어납니다. 지상에서는 천국이 없어요. 지상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뭐가 있습니까? 고통과 어려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초막 셋을 짖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에서 하나님을 짓는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가 뭐라 그러느냐 하면, 충분히 이해됩니다! 맞습니다! '목사님 바빠서 못하고, 어려워서 못하고, 힘들어서 못하고, 환경이 그래서 못하고...' 여러 가지 말을 합니다. '예,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면류관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영광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를 섬기고 주의 뜻을 따라가는 일에, 하나님의 참된 축복과 역사! '네가 복이 있도다!' 하는 그 역사가 가만히 앉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쁜 줄 압니다. 어려운 줄 압니다. 힘든 줄 압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눈을 뜨면, 우선이 어디에서 나와야 될 것인가가 이해가 됩니다. 그 순간, 순간 내가 선택을 바로 하게 될 때에, 나와 내 후손들이 복을 받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계획을 따라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냥 교회 나와서 헌신한다! 편안한 가운데서 헌신한다! 누가 못합니까!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 주님의 명령이 복음이기에 말씀이기에 순종하겠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모든 것 부어주신다. 그 이야기가 이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 자신의 초막을 지으려고 하지 마시고, 베드로처럼 최소한 주를 위해서, 모세를 위해서, 엘리야를 위해서, 그러나 이 속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주여, 좋사오니...' 하면서 '좋은 환경!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환경에 계속 남아있고 싶다! 영광 속에서 뭘 하고 싶다!' 생각합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이 땅에 다 욕심에서 자기도 모르게 나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이런 자리에 빠진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우리 주님이 뭐라 그랬습니까? 다 없앴습니다. 오직 주님만 남아 계십니다. 뭐라 그랬습니까? '일어나라!' 힘든 자리에 있느냐! 어려운 자리에 있느냐!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느냐! 어떤 자리에 있느냐!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뭐라 그랬습니까? 여러분 일어나셔서 2003년도에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축복과 은혜가 이루어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서론
예수님께서 변하신 모습을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사람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오실 메시야로 변하신 것을 보여주심으로 제자들에게 복음의 뿌리를 내려주시는 장면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재림의 영광을 본 체험을 베드로는 평생토록 잊지 못하고 기억합니다.(벧후1:16,17) 우리도 이 땅의 것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영광에 대해서까지 눈이 열려야 진정으로 누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본론
1.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1) 예수님이 나의 주요,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2) 예수님의 변화는 예수님의 본래의 모습(요1:5)으로 비춰지신 것입니다.
(3)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요1:12-13)
(4)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이 때부터 눈과 마음과 생각이 변합니다.

2. 변화산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축복의 변화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1) 변화산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체험할 때 '주여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한 것처럼(4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해되는 순간에 '나는 예수님이 좋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2)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좋고,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가 좋습니다'라는 고백이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3) 변화산의 축복의 역사가 보여지고 이해되는 순간부터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좋고,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고, 주님이 나의 모든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터져나옵니다.
(4) 이 축복을 체험하는 만큼 복음의 뿌리가 깊이 내려집니다. 이 때부터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나를 부인하는 헌신의 고백이 진실하게 나옵니다.

3. 변화산의 체험이 있어야 비로소 율법과 예언의 성경 말씀에 눈이 열리게 됩니다.
(1)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의 역사를 보고 깨닫는 체험이 있으면, 우리의 삶을 바꾸는 규모가 세워지게 됩니다.
(2) 복음의 뿌리가 내려지는 순간부터, 나 자신의 삶이 변화되어지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 결론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주를 위해서 순종하는 믿음의 결단들이 필요합니다. 염려와 걱정 속에 엎드려 있는 우리 앞에 오직 주님만 남으셔서 우리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일어나셔서 2003년도에 주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제목
2003년도에 들어가기 전에 변화산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도록 나의 눈을 열어 주시고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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