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나도 그들중에
2004-05-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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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 18: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마 18: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마 18: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제목 말씀을 "나도 그들 중에" 라고 잡았습니다. 본문 19절에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 여기에 모든 답이 다 나오는 거죠. 아마 오늘 우리가 이 말씀에서 구체적인 해답을 좀 찾아야 되겠습니다. 뭔가 이렇게 들뜰 것도 없고, 좀 조용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실적인 역사를 체험해야 되겠습니다.

이번에 그 자폐 치유캠프에 참여하면서 그 어려웠던 부분이 뭐냐하면, 그 천사도우미, 자폐 치유캠프하면서 자폐아를 한 3일간 맡아줄 수 있는 자원자가 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열리고 보니까, '모자라서 되겠나!' 이렇게 애를 먹었는데, 한 네 사람 정도가 남도록! 하나님이 똑 공급을 해 주셔서 잘 감당을 했습니다. 그 중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 못 들었습니다. 어린이 자폐는 어린이 사역자들이 하고, 저희들은 이제 자폐 어머니들, 아버지들 중심으로 이제 치유에서 맡아오는데, 그 어린이들을 맡아 있는 그 천사 도우미 중에, 미국에서 어떤 목사님들이 오셔 가지고 도우미를 하는데,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집에 가면, 마치고 올라가면 먼저 뭐부터 해야 되느냐?' '목욕부터 해야 되겠다!' 그래요.

아이들 보살피느라고 '밥은 그래도 먹었는데 세수도 못했다!' 그래요. 얼마나 아이들이... 뭐 여유를 줄 수가 없으니까,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으니까! 그리고 어떤 분들은 또 조금 덜한 아이들도 있지만, 심한 아이들은 진짜 밥 먹을 여가도 없어요. 뭐 세수는 생각도 못하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일단 첫날하고, 둘째 날 당연히 다른 겁니다. 첫날 아이를 인계 받아서 맡아있는데, 밥 먹을 여가도 없이, 세수할 여가도 없이 그랬는데, 하나 딱 감사한 것은, 일단 밤 되면 잠을 잘 자더라는 겁니다. 원래 아이들이 그 엄마를 떠나 가지고 첫날밤부터 잠 못 자거든요. 잠 못 자고, 밤새도록 시달려야 되고, 잠 못 자는 정도가 아니고, 또 쉬도 하고 하니까, 화장실도 몇 번따라 다녀야 되고, 이런 중에 잠은 잘 잤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몇 일, 한 이틀 지나서 그 어머니를 만나서, '잠은 참 첫날부터 잘 자더라!' 그러니까, 어머니가 깜짝 놀라는 겁니다. 왜? 아이가 잠을 잘 안 잔데요. 그런데 첫날부터 딱 떼어놓는데, 천사 도우미의 손을 통해서 밤에 잠을 자는데, 그냥 잠을 잘 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변화되는 것을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는데, 첫날, 둘째 날, 셋째 날! 그런데 벌써 아이가 다 컸는데, 뭐가 안 되느냐? '엄마' 소리도 못했어요. 그런데 그 가는 과정에서 아이가 엄마 소리도 하고, '엄마 소리까지 했으면 이제 입이 안 열리겠나!'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주일 학교 사역자들의 고백이 이렇게 모여서 포럼을 하는데, 얼마나 은혜를 받았던지, 본인들이 울먹이면서 포럼을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상황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전에는 그 천사 도우미들이 제가 이렇게 올라가면, 층계를 올라가면, 곳곳에서 아이들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보이는데, 이번에는 거의 없어요. 왜? 전부 집회에 참석을 해 가지고, 아이들이 그냥 예배를 다 드려요. 그리고 그 집회 인도하는 그 분이, 거의 '정상적인 아이들도 이 정도보다는 차라리 더할 것 같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뭘 말하고 싶으냐 하면, '된다, 안 된다!' 그 말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과 뜻을 초월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성령으로 그 가운데 역사 할 때에, 우리의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치료가 되겠지! 저렇게 치료가 되겠지!' 그런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상상밖에 어떤 결과와 결실들이 사실적으로 임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말을 장황하게 하는 배경이 뭐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준비하시고, 그렇게 벌써 계획하신 중에서도 우리가 그것을 못 믿는 게 문제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첫날 딱 참석을 하려고 하는데, 첫날부터 눈이 쏟아 졌거든요. 눈이 쏟아졌는데, 눈이 쏟아지면서 무슨 마음이 드느냐 하면, '아, 되겠나!' 해 보지도 않고, 지금 하나님이 다 되도록 계획했는데, 내 마음은 '되겠나!' 뭐가 오느냐하면, 불 신앙입니다. 또 나는 올라가다가 아직 차 성능을 눈길에는 한번도 안 달려 보았으니까! 바로 이제 재를 넘어 가지고 올라가야 되는데, 바로 이제 정상의 한 2/3쯤 올라 가 가지고, 계속 이 자동차가 헛 바퀴 도니까! 올라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 큰일났구나! 올라가지를 못하는데...' 뭐 내가 그 정도니까 다른 사람들은 더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뭐 이렇게 밟아도 올라갈 기미가 없어요. 그냥 계속 바퀴는 헛바퀴 돌고... 옆에 사람은 얼마나 용을 썼든지! 그 날 밤에 너무 피곤해 가지고... 배도 뭐 얼마나 고팠던지, 나는 그 운전하느라 정신 없고, 옆에 앉았는 사람은 더 용을 써 가지고, 밖에 뛰어나가 가지고 그 모래 포대를 끄집어내려니까, 모래 포대가 또 얼어 가지고 잘 되지도 않고...

그런데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그 중에서 'TCS'인가, 이렇게 깜박깜박 불이 오더라 구요. '왜, 이 불이 자꾸 오냐? 미끌리니까 오는가 보다!' 마음에 선뜻 지나간 생각이 매뉴얼을 보면서, TCS라는 그 말이 뭔가 이 미끄럽고 이럴 때에 사용하는 어떤 장치라는 것이 마음에 생각이 들어요. 구체적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보니까 버튼 앞에 TCS라는 것이 있어요. 딱 눌렀죠. 눌리고 이제 액셀레이터를 밟으니까, 거짓말처럼 올라가는 겁니다.

제가 새삼스럽게 뭘 느꼈느냐 하면, 하나님은 위기에서든지, 어떤 문제에서든지, 이미 당신의 백성들에게 다 해결의 방법을 준비해 놓고 있습니다. 다 예비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 신앙 때문에 그것을 못보고 못 깨달을 뿐입니다. 우리가 믿고, 그저... 쉽게 말해서 믿고 한 걸음만 들어가면 되는데, 그게 안되어요. 제가 이 몸이 아프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일단 해보지도 않고, 아프면 '안되겠다!' 불 신앙부터 먼저 오는 겁니다. 부닥쳐 보면 또 해요.

나는 이번에 계속해서, 연속해서 지난 한 주간도, 또 그 지난 한 주간도, 계속해서 지금 금요일까지 강행군을 했거든요. 목회 대학원 할 때도 끝까지 참석한다는 것은... 아예 해보지도 않고 '힘들다!' 내가 좀 건강 상태를 견디지 못하겠다 싶어서, 그냥 계속해서 시간이 저녁까지 되어 있으니까, '수요일까지 하고 류 목사님 메시지 끝나고는 돌아와야 되겠다!' 아예 그렇게 생각하고 올라갔습니다. 올라갔는데, 또 참석을 해보니까 참석이 돼요. 금요일까지 또 참석했죠. 이번에도 지금, 처음에는 내가 이 담임목사 메시지 때에는, '좀 힘들겠다!' 그렇게 있다가 속리산을 또 안 갈 수 없으니까! '가야되겠다!' 그러다가, '주여, 지난번도 했는데, 또 가보겠습니다!' 또 갔어요. 가니까 또 다 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여러분과 제게 있어서 불 신앙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항상 불 신앙 때문에 아예 일도 해보지도 않고, 현장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사건 속에 접해 보지도 않고, 낙심부터 먼저 하는 겁니다. 그게 심해지면 아예 시작도 못해보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계획 속에 세워놓고, 제가 그랬죠. 작가가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고, 폭탄 터질 때도 나올 수 있도록 프로그램 다 해 놓았는데, 버튼만 딱 눌리면 올라가도록 다 계획해 놓았는데, 이걸 못 보고 안 믿으니까, 구체적으로 성취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엄청난 축복과 역사를 다 준비해 놓았는데, 문제는 불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나무라는 것! 여러 가지를 안 나무랐어요. 뭐 '힘이 없다! 기능이 없다!' 아닙니다. 불 신앙입니다. 내가 불 신앙 때문에 모든 문제가 오는구나! 바로 여기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불 신앙하게 되는 배경이, 지난번에 '어린아이'라는 말을 중심으로 해서 설명하면서, 불 신앙 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내용이 '생명이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내가 불 신앙하느냐? 생명이 없다! 그래서 그 신앙에 중요한 배경이, 기도에 중요한 배경이, 내가 생명 받게 되는 그게 배경이 되어서 강단의 말씀과 연결되고, 예배가 저절로 회복되고, 그 다음에 여기서 모든 문제가 풀려나가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오늘도 같은 배경을 여러분 먼저 이해를 하셔야 되겠습니다. 19절에 말씀한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다 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이것을 믿느냐, 못 믿느냐? 거기에 간단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이것은 전부 다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다 아닙니까! 누가 복음 19장 5절에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가 바로 이말 듣고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는 순간에 다 끝났어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 다 끝났습니다. 이 구원과 함께 모든 문제가, 삭개오의 가정, 가문 전체에 문제를 다 해결했던 부분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희들 중에 함께 있겠다!' 이게 다 답입니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너와 함께 계시고, 우리들 중에 계시느냐! 그것이 성경에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첫 번째로 보여주는 것이, '예배하는 중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 배경입니다. 우리 20절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두 세 사람이 모여 가지고 장난하는 것, 뭐 노름하는 게 아니고, 뭐 마작 하는 것이 아니고, 두 세 사람이 모여서 뭐 하는 겁니까? 예배하는 것!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잡담하고 있는 게 아니고, 두 세 사람이 모여서 예배하는 중에! 이 사실을 오늘 우리가 구체적으로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말세에 사단의 가장 악랄한 계략이 뭐냐하면, 예배 못 드리게 하는 것! 예배가 안되도록 하는 것! 그 예배가 안되도록 하는 것! 그건 뭐 가정예배로부터 모든 예배를 다 말하게 되죠. 그렇게 하는 중에서 뭐냐하면, 예배드릴 수 있는 마음에 여유를 다 빼앗아 버려요. 바쁘다! 분주하다! 그 다음에 다른 복잡한 일들 많다! 그 다음에 가정사정! 무슨 사정을 통해서 뭘 빼앗느냐? 예배 다 빼앗아 버립니다. 그 다음에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로 뭐냐? 갈등! 목회자와의 갈등, 성도들과의 갈등, 교회의 갈등! 이래서 이게 오면 뭐냐? 예배가 안되거든요.

그 다음에 이 다락방 안에서도 뭐냐하면, 바로 이게 문제더라 구요. 그러니 뭐 여러분 중요한 것은, 본 교회 목회자가 다락방이 되었던, 안 되었던 중요한 것은, 예배 안되면 다락방 백 번, 천 번 한다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응답에 연결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강단을 통해서 말씀을 들을 때에, '참,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다!' 이게 연결되는 그 모든 곳에서 다 응답이 나오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여기서 나오게 되고, 여러분 다락방에 실제적인 응답이 나오고, 포럼에 응답이 다 여기서 나오게 되고... 이 사실 자체가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되고, 우리가 연결되어야 되죠.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에게 참 생명이 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회 중심, 예배 중심!' 이것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그런 현상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이 안 되는 곳에는 예배라는 것이 강조되면 율법이 되게 됩니다. 율법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 이 생명 관계가 안되고, 참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바로 안된 가운데서 예배 드려라! 그러면 이보다 더 괴로운 일이 없거든요. 예배가 참 고통스럽습니다.

저는 어릴 때에 어떤 그 복음을 넣지 않고 가정예배 드릴 때에, 지금도 생각하면 가정예배 그러면 '너무 지루하다! 고통스럽다!' 그것밖에 생각이 안나요. 왜, 요즘은 그 가정예배를 잠깐 드리고, 시간도 조절하고 그러는데, 옛날에는 가정예배가 그게 아니거든요. 일단 기도 시작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나와야 되니까! 그건 뭐 시간에 한정이 없어요. 그러니 아예 '가정예배!' 그러면, '오늘 죽었다!' 이래가지고, '기도!' 그러면 아예 팔베개해서 잠자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강요하니까 뭐가 되느냐? 안 드릴 수는 없고, 안 드리면 부모한테 혼나니까! 그 '드린다!' 이것은 예배라고 하는 것이 바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이건 죽을 지경입니다.

여러분 정말 예배가 예배될 수 있는 길은 생명관계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참 믿음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생명과 믿음!' 이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 예배는 강요할수록 고통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 주일성수! 주일 예배드려야 복 받는다! 여기에만 머물러 있으면 예배드리는 순간이 괴롭습니다. 왜? 할 일이 안 그래도 많은데, 내가 억지로 예배드려야 되니까! 그러니까 예배드리는 순간에 오만생각이 다 들고, 평소에 안 하던 20년 전 생각까지 다 나오니까, 이게 고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다고 또 뭐 그런 생각 속에서 또 피곤하면 졸리니까, 설교자가 앞에 있는데 졸면 또 안되니까, 그래서 개발해낸 것이 눈뜨고 조는 방법도 개발해 내고... 오랜 신앙생활 하다보니 아주 뭐 재주가 무궁무진하게 나오더라 구요.

그것이 여러분 '율법적이다!' 다른 게 아닙니다. 생명 없이 나올 때 다 율법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내가 뭘 해야 되겠다!' 어떤 격식과 어떤 규범에 매여 가지고, 안 할 수 없도록 되어있는 이런 모든 것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 생명이 임하게 될 때에, 말씀 받는 순간에 즐겁습니다! 감사하고, 기쁨이 오고, 내게 새 힘이 오고, 이런 사실이 될 때마다 그 예배드리는 순간순간이 감사됩니다. 그리고 말씀이 깨달아지니까! 기다려지게 되는 겁니다.

뭐 '주일 성수를 준비해라!' 말씀이 안 깨달아지고, 말씀이 안 즐거우면 주일성수라는 사실 자체가 안되게 되어 있어요. 뭐 준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안나오는데, 그러면 이 사실이 기다려지는 순간이 되면, 자연적으로 '거룩한 성일'이라 말 붙일 것도 없어요. 내 모든 축복과 은혜가 여기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을 아니까! 구체적으로 나도 모르게 준비가 되어지고, 기다려지게 되고, 기쁨이 되어지게 되는 사실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8장에 흐르는 배경이 바로 그런 배경입니다. 생명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때에 상상 못할 문제들이 나오거든요. 그런 축복과 은혜가 계획이 되고 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안되면서, 이 바탕이 안되면서 18장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놓았습니다. 뭐냐?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 어린아이 되는 것이 오히려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러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뭐 '어리게 되어라!' 그러면 이해가 되겠는데,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겸손도 뭐 '어린아이처럼 되어라!' 겸손이라는 것도... 오늘 제가 지난번에 말씀 그대로 이어서 좀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생명관계가 안되고, 또 부모 자식간에 관계가 안되면, '겸손!'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이 생명 관계로 와지는 겸손이죠. 이게 안되면 구체적으로 안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17절 보면,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랬습니다. 교회 말이라는 것은 메시지요,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무슨 말을 합니까? 목사님 아닙니까! 그러니까 무슨 문제냐 하면,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교회 중심이 되고, 바로 뭐냐? 메시지 중심이 됩니다! 내 삶에 전체가! 그러면 나도 모르게 뭐가 오느냐? '메시지 중심이 된다!' 그럴 때에, 말씀전체를 한꺼번에 다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누구를 통해서 내게 오늘 필요한 말씀이 나옵니까? 목사님 통해서! 그러니까 어떤 일이나, 어떤 사건과, 어떤 문제를 통해서 목사님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느냐? 이것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가다가 참 기적적인 일이라는 것이, 이것은 뭐 교회 밖에서는 상상을 못하는 거죠. 목사가 별스럽지 않는 소리를 해도, 듣는 사람에게는 생애를 바꾸는 엄청난 문제가 나오더라 구요. 그리고 또 목사가 되지도 않는 말 같은데도 그 사람에게는 엄청난 해답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고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 도저히 뭔가 이 수준이나 지식적으로 봐서 그 사람에게는 말할 수도 없는 일인데, 그 사람이 들을 수도 없는 입장인데, 교인들이 와서 목사가 말했기 때문에, 또 무조건 듣는 겁니다. 듣고 또 따라가는 겁니다. 그것은 교회 아니면 이해가 안 되는 문제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걸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입니다.

또 혹시 여러분들이 뭐냐? '우리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남편들이 목사가 말했다고 다 듣느냐! 이렇게 될 겁니다. 이게 뭐냐? 생명관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를 통해서 임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것은 뭐 '된다, 안 된다!' 이전에 이것이 연결되면서, 목사를 통해서 말씀한 것이 내 모든 삶에 해답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내용이더라 구요. 이런 부분들이 오늘 여기 본문에서 또 말씀이 나왔죠.

그 다음에 문제가 또 뭐냐하면,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그러니까 예배 중에, 기도 중에 나오는, 이건 또 다음에 문제가 조금 언급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만은, '두 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그 다음에 너희가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매인다!' 이것은 교회에 어떤 치리 권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만은, 개인적인 기도 응답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가 나오게 되겠죠.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교회 메시지가 내게 응답되는 메시지로 연결되면, 바로 개인적으로 목회자의 관계, 그 다음에 중직자들과의 관계, 그 다음에 교회와 교회와의 관계, 특별히 여기에 이런 내용가지고, 구역과의 관계, 또 구역에 메시지와의 관계, 이런 문제들이 저절로 전부 연결되어집니다. 어느 한 통로도 막히게 될 때에 거기에는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신앙의 삶에 수정해야 될 해결해야될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생명 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때에 여기에 중요한 것이, 어린아이와 그 다음에 부모! 여기에다가 겸손이다라는 말을 붙일 것 없이,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교회에서 말하는 겸손이라고 하는 이것은, '낮아진다, 뭐다!' 이런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린 아이와 어머니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가 안되면 겸손이라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되어질 수가 없어요. 또 여러분 교회 안에서 와 가지고, 또 이런 관계없이 목사 앞에, 장로 앞에, 혹은 성도들 서로 서로간에, '낮아진다! 섬긴다!' 되어질 수가 없어요. 섬겨질 수도 없고, 그것은 안 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뭔가 이 심리적인 배경에서 좀 생각해 보고 우리가 바로 붙잡아야될 그런 내용입니다 만은, 제가 어떤 그 기록을 보는 동안에 재미있는 것을 봤어요. 일본문화와 정신병이라는 그런 글을, '박상회 집사님' 글을 보면서 이런 것을 말해 놓았어요. 어린아이들이, 일본에 지금 어린아이들의 정신문제가 나오는 배경이, 어린아이들이 '아마애'를 할 수 없어서 그렇다! 그랬더라 구요.

그 '아마애'라는 것은 뭐냐하면, 응석, 어리광, 그 다음에 어린 아이들이 막 부모한테 자꾸만 엉뚱한 짓을 하는 것, 일부러 막 엉뚱한 짓을 하는 것, 이런 것도 응석과 어리광이라는 말로 다 해석이 안 되는 그런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안되어서 그렇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그런 대상을 잃어버렸고, 그런 대상의 가치가 상실되었다! 이게 일본문화에, 정신병에 중요한 문제라는 겁니다.

나는 그 문제를 보면서, 오늘 이것을 설명할 때에 좀 어떤 면에서 아주 중요한 설명에 내용이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무슨 문제냐 하면, 부모와 자식관계가 끊어져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생명 관계가, 이게 희미해져버렸어요. 일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부모 아닙니다! 결혼했지만, 내가 부모를 가지고 있지만, 내 부모가 아닙니다!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 일본에 중요한 문제가, 자기 부모와 사는 아이들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내 부모가 아니고, 내 어머니가 아니니까! 자연적으로 뭐가 안나옵니까? 어리광이 나올 수가 없죠. 이게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정신병이 여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다시 말합니다. 참 하나님과 나 사이에 진실한 생명관계가 안 나오면 불안하게 됩니다! 여기에 평화가 없어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응답 나올 수가 없어요. 예배라는 이것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예배에 성공한다! 그것 이전에 이 문제 아닙니까! 그 다음에 또 왜, 안나오느냐? 왜, 그게 안 되느냐? 부모의 절대적인 위치가 사라져버렸어요. 부모한테 무조건,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절대적인 이게 사라져버렸어요. 부모의 가치가...

이것은 아마 오늘날 우리 한국에도 비슷한 상황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부모를 절대적인 위치로 아닙니다. 왜? 부모보다도 누구중심으로 가정에서 키웠느냐? 전부 어린애 중심입니다. 어린애는 왕이고 부모는 하인입니다. 부모절대의 위치가 안되어요. 조금 커버리면 부모보다 자기 중심인데, 절대적인 부모를 의지하고, 의뢰하고,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똑같은 문제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 이 생명 관계가 안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생명관계, 이게 되어버리면 문제는 간단하죠.

그 다음에 이 믿음이 되었으면, 여러분 믿음이 요즘 이상합니다. 전부 자기중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완전히 믿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이 되어야 되는데,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높은데, 자기 소원이 더 강한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이게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뭐가 안 되느냐? 말하자면 소위 일본에 용어로 '아마애' 가 안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 정말 이 사실을 조금만 마음으로 한번 열어보세요. 진실한 생명관계! 이것이 안되면 예배가 안되고, 기도가 안 되는 겁니다. 여기에 모든 응답이 다 닫히는 겁니다.

예배가 안 된다! 말씀들을 때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구나!' 이게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나의 형편과 처지는 전혀 안 되는데...' 이런 고민 안 합니다. '그건 목사님만 그렇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이렇게 나오지, '하나님께서 오늘도 목사님을 통해서 내게 이런 말했다! 도저히 안될 수밖에 없는 이런데도 말했다! 그래서 내가 고민하다!' 이게 요즘은 안되고 있습니다. 거의 안됩니다. 아예 그건 뭐... 왜? 절대적인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니까, 목사와의 관계! 이게 안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사실들을 조금 뭔가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다락방은 혁명이다! 시대다! 신앙에 회복이다! 하는 배경이 뭐냐하면, 메시지를 말할 때에 그 메시지 붙잡고 여러분 기록 안 합니까! 그러면서 그걸 붙잡고 기도 안 합니까! 이런 구체적인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말보다, 이것이 체험되게 될 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기도응답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 성경에서 오늘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이, 기도응답이 아닙니까! 19절부터 바로 그런 이야기죠.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기도응답이에요.

그래서 기도응답도 예배 중에, 그 다음에 같이 그룹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것, 소위말해서 소그룹이라든지, 아니면 기관이 모여서 기도하던지... 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한다! 이것을 가지고 류 목사님이 표현을 뭐라고 그랬느냐? '썰렁 기도'라 그랬습니다. 합심해서 기도하면 왕왕 거리고 뭔가 분위기가 잡히는데, 뭐 모이라 그러니까 많이 모이지도 않고, 한 두 사람이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붙들고 앉아서 기도하면, 진짜 썰렁하더라 구요. 저는 우리 집에서 가정 예배드릴 때에, 집에 딸아이도 있고 아이들이 있을 때는 기도하면 그래도 뭔가 기도가 웅성웅성 나오는데, 두 사람 영감 할매가 앉아 가지고, 이 기도하니 진짜 설렁하더라 구요. 생명관계가 안되면 이 기도가 안 나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앞에 것이 전제가 된 후에 이 기도가 나와야 됩니다.

여러분 예배라는 것 전부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응답이 다 나온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이 메시지를 붙잡고 두 세 사람이 우리의 삶에 계속해서, 우리가 뭘 하던지 계속해서 메시지 붙잡고 여러분 모임 있잖아요, 모임 있을 때에 강단을 통해서 나온 메시지가 계속 모임의 주제 아닙니까! 그 것 붙잡고 두 사람이 모인 곳에서, 가장 설렁한 기도라도 생명관계가 이루어지면 이것은... 두 사람보다 더 힘든 것이 뭐냐? 혼자 앉아서 기도하는 것 더 힘든 문제죠. 두 사람이 하면 눈치 살펴서, '네가 아직 기도하니까, 하다가도 끊었다가 또 하고...' 이렇게 해도 되지만, 혼자 하는 건 그 자체조차도 안되니까!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께서 정말 생명관계가 이루어질 때에, 여기에 놀라운 역사가 나오죠.

그래서 지난 그 17장에 나오는 변화 산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이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고백이라는 것 위에 기도라는 것이 나옵니다. 고백이라는 것 위에 기도가, 진실한 고백 속에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참 나의 아버지시오, 참 생명관계의 고백 속에서 그때부터 뭐냐? 진지한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 사실이 체험되면서 뭐라 그랬습니까? 영광의 주 오실 메시아의 역사가 체험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라도, 잘못된 것이라 할 값이라도, 뭐냐? 헌신이라는 구체적인 역사가 나옵니다.

여러분 교회에 진실한 헌신의 고백이 언제 나오느냐? 정말 생명관계가 체험이 되고, 하나님이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사실화 될 때에, 나도 모르게 헌신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 헌신하겠습니다! 하나님 충성하겠습니다!' 거짓말 할 값이라도, 그 순간에 이게 실제적으로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여러분 이런 확신이 있을 때에, 어렵고, 힘들고, 문제 될 때에 나오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어리광이라 그러면 이상하죠, 이럴 때에 뭐가 나옵니까? '아버지 내가 왔습니다! 아버지 안 되면 죽어버리렵니다!' 여러분 이게 절대적인 존재가 인식이 안되면 이런 말이 안 나옵니다.

그게 뭔가 '신비적인 기도다! 무슨 기도다!' 이전에 여러분들이 정말 복음 체험하고,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 앞에 어리광 아닌 어리광이 나옵니다. 이게 낮아질 때로 낮아진 것이거든요. 그때 나도 모르게 뭐냐? 하나님 때에 따라서는 뭔가, 누가 모릅니까! 예를 들어서 '박지온 목사가 왔습니다!'가 아니고, '하나님 나 목사가 왔습니다! 하나님 나 이상한 인간이지만 하나님 앞에 내가 왔습니다! 하나님 지온이가 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배경도 절대적인 주권자요, 생명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 기도가 안나옵니다. 이게 안되게 되어 있어요.

뭘 말씀합니까? 여러분 기도응답 속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구체적으로 생명관계가 이루어져야 진실한 고백이 나오고, 그 고백잡고 뭐가 나옵니까? 기도가 나옵니다. 여기에 응답이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예배가 안 되어 집니까? 진짜 회개하시면서 하나님 앞에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됩니다. 여러분 예배 속에서 말씀이, 정말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입니다. 붙잡고 고백이 안 나오면, 여러분 개인기도라는 것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기도, '아버지!' 그러는 진실한 고백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뭐 겸손이 다른 게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하실 수 안 있습니까! 왜 안 해줍니까? 아버지 삐쳤습니까?' 거기에 진짜 하나님 앞에 진실한 고백이 나오고, 그 속에서 정말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중심에서부터 구하는 것이 나옵니다.

물론 제가 이번에 기도제목들을 이렇게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기도 제목들이 많이 정리가 되었어요. 많이 정리가 되었는데, 어떤 문제에서 기도제목이 정리는 되었지만, 말하자면 어리광을 부리는 기도는 없어요. 진짜 뭔가 여러분 중심에, 가정이나 개인이 하고 싶은 기도는, '성령 충만하게 해 주옵소서!' 물론 그 기도인데도, 그 보다 더 숨어있는, 중심에 아버지 앞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거의 안 섰더라 구요. 그걸 써 놓았으면 제가 또 고함을 지를까 싶어서 그랬는지... 어떤 면에서 차라리 여러분, '성령 충만!' 누가 모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는 성령 충만이면 다 됩니다. 그것도 우리가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생명관계 회복! 하나님 앞에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내 중심에서 진짜 감추어져있는 부분들을 내어놓을 수 있는 기도가 나온다! 그러면 응답이 되는 겁니다. 이게 구체적으로, 이게 응답이...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인 기도!' 그럴 때에, 뭐 다른 게 아닙니다. 이 부분입니다. 구체적인 기도가 그냥 점잖은 자리에서는 안 나옵니다. 정말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여기 뭡니까? 구체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 중에서 여러분 체질이, 여러분 정말 체질이 뭐냐? 이게 중요한 거죠. '복음을 가지고 있는 기도냐?' 아니면, '복음이 안된 자의 기도냐?' 여기 이제 문제가 나오더라 구요. '하나님이 응답하시느냐? 응답 안 하시느냐?' 중요한 중심의 문제가 여기 나오죠. 성경을 볼 때에 자기 중심, 자기 체질 어떤 것으로 중심이 되어있고, 어떤 체질이 되어 있느냐? 이게 상당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볼 때에 그 해석이 달라지게 되어있어요.

예를 든다면, 일제치하에서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이 소망이 없었어요. 6.25 비롯해서, 오면서 그런 중에서는, 우리도 모르게 뭔가 성경을 보면서도, 똑같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뭐가 강조되었느냐? 재림이 강조되어 있어요. 항상 '말세, 내세!' 여기에 강조되었습니다. '죽으면 천당 간다! 지금 힘들어도 좋다! 우리는 죽으면 천당 간다!' 그래서 헌신은 늘 부정적이고, 늘 뭔가 이 폐쇄적인 이런 어떤 현실감을 갖고,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잔뜩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게 삶의 어떤 힘이에요. ]

그래서 우리 저 지난 주일입니까? 유 장로님이 뭔가 이 장년들이 나오셔서 노래 안 불렀습니까! 옛날 노래가 생각난다고 하시면서, 그때 노래가 뭐 허사 가인데,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이게 여러분 보세요, 요즘 아마 아이들이 이런 노래 부른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못 씁니다... 옛날에 주일학교 때, '세상 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왜? 이 땅에 소망은 하늘나라이지, 우리가 이 땅에 것을 다 부정했습니다.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하리요...' 왜, 필요 없습니까? 지금 우리 경제 필요하잖아요. 우리 부자 되어야 되는데... 그때는 그게 아닙니다. 왜? 이 땅은 일제 치하에 눌렸고, 6.25로 눌려 가지고 진짜 소망이 없어요. 그러니까 하늘소망 뿐이니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무슨 이야기냐?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그것이 중심이 되니까, 소망이 없는 것이 중심이 되니까, 자연적으로 성경해석이 말세 중심입니다. 내세에 대한 중심입니다. 여러분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죠.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참 복음이 중심이 되어있고, 복음이 체질이 되어 있으면, '아파도 복음입니다! 실패해도 복음입니다! 성공해도 복음입니다! 돈을 가져도 복음입니다! 못 가져도 복음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뭘 가졌느냐? 이게 성경해석의 전부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저는 그 치유라는 배경가지고 이렇게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강단에 섰다 그러면, 모든 설교가 치유라는 것과 연결됩니다. 치유! 그 다음에 전도! 내가 몸이 건강치 못하니까, 제 메시지 속에서 뭐가 나오느냐? '가만히 있어도 전도된다!' 왜? 복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활동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으로 상당히 소망과 용기를 주는, 이런 어떤 메시지들이 많이 나가죠. 그러면 건강한 사람은 화닥닥거리며 뛰어다니면서 전도하는 것! 그것도 정상입니다. '뛰어다녀라! 활동해라! 현장 들어가라!' 이것도 또, 그렇게 같은 맥락에서 역시 복음 전도라는 이런 메시지가 또 나가잖아요.

그러니까 문제는 내가 복음이라는 체질이 되어 있고, 복음이라는 것이 되어 있을 때는, '아파도 복음! 가만히 있어도 복음! 뛰어다녀도 복음!' 이런 해석이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말하자면 복음이라는, 전도라는 것이 하나님이 마음에 맞느냐? 이게 문제거든요. 다시 말해서 여러분 왜, 지금 교회와 여러분과 제게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 배경을 말하고 있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방향과 복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파도, 고난스러워도, 고통스러워도, 실패해도 승리한다!' 그 배경이 뭡니까? 복음! 하나님의 방향에 맞기 때문에...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뭡니까? 아파도 성경 해석이 전도고, 슬퍼도 전도고, 돈 많이 있어도 전도고 선교고, 없어도 전도고 선교고... 이러니 뭡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이고 원하시는 것이니까! 아픈 속에서도 축복! 돈 있어도 축복! 없어도 축복! 하나님과 저와 여러분을 세워서 세계 복음화의 주인공을 삼으셔서, 늘 말씀한 거죠. 주인공은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폭탄이 터져도 전도! 하나님의 놀라운 승리와 역사가 바로 여기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드리면서 무슨 말씀하느냐? 예배가 이루어지게 되고, 기도가 정말 생명관계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방향에 맞는 기도가, 하나님의 방향에 맞는 예배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거기에, 여러분 하는 모든 삶에, 모든 일에, 이미 주님께서 가는 장소와 사건과 일마다, 이미 뭡니까? 응답이 와 있더라! 응답의 역사가 와 있더라!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교회에 왔다! 또 송현 교회에 왔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이 자리에 왔다! 이 교회에 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교회 왔음으로 인해서, '내 중심과 내 체질이 하나님의 방향과 과연...' '맞게 되어있다!' 여기에 모든 축복이 약속되어지는 겁니다. 이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교회 없느냐? 다른 교회 안 되느냐? 아닙니다. 똑 같습니다. 거기도 역시 선교와 전도라는 것이 중심이 되어 있고, 그 사실이 모든 삶에 중심이 되어있다! 그러면,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방향에 맞는 거니까!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생명이 거기도 마찬가지고, 여기도 마찬가지고, 이것이 이루어집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교회 이 일을 위해서 여러분 성도들이 이를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기에, 이것이 안된 교회가 있다면 우리는 도와주자! 이게 안된 것이 있다면 생명을 걸고 이 땅에 이 일을 위해서 행하자! 그게 우리가 갖고 있는 중심이요, 하나님 앞에, 복음에 사상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여러분 참 생명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내가 예배에 성공해야 되겠다!' 그것을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예배 성공에 가장 중요한 것이, 오늘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참 생명이 내 안에 와 있구나! 내가 그 생명에 그 이름 부를 때마다 새 힘이, 말씀들을 때마다 새 힘이, 목사님 메시지를 통해서 새 힘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새 힘이, 새 능력이 구체적으로 생명관계가 이루어지게 될 때에 와집니다. 이 사실이 날마다 체험되게 될 때 나도 모르게 진실한 고백이 나갑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진짜 절대주권자인 그분 앞에, 내 인생을 다 맡아서 나를 확실하게 인도하시는 그분 앞에, 어리광 아닌 어리광이, 떼짱 아닌 떼짱이, 믿음의 고백으로 터져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중심에 깊은 곳에 비밀 중에 비밀도 우리 주님 앞에 내어놓는다!' 그 말이 아니고 저절로 토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간증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여기에,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르게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개인이, 함께 교회와, 그 다음에 구역과 가정을 통해서, 개인을 통해서,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주의 계획과 뜻을 따라, 함께 방향 맞추었다! 뭐 '교회를 건축한다!' 이것은 사실 어떤 면에서 부수적인 일입니다. 이 일에 방향 맞추어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엄청난 기도의 응답들이 사실적으로 일어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우리 붙잡고 오늘 이 말씀 안에서 한 주간도 승리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서론
본문 19∼20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서 모든 답이 나옵니다. 이 약속을 믿고 한 걸음만 들어가면 되는데, 불신앙 때문에 부딪혀 보지를 못합니다. 이러한 불신앙은 우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이 불신앙 때문에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낙심부터 먼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고 승리할 수 있도록 계획해 놓으셨는데, 이것을 보지 못하고 낙심하여 주저앉아 있습니다. 바로 이 불신앙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불신앙하게 되는 배경은, 바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 본론 = 언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당신과 함께 계시고, 우리들 중에 계십니까?
1. 예배하는 중에 함께 계십니다.
(1) 말세에 사단의 가장 악랄한 계략은 바로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2) 강단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모든 응답이 나옵니다.
(3) 생명 관계가 바르게 되지 않으면, 예배도 율법주의가 되고 맙니다.
(4) 참 생명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예배의 순간 순간이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5) 생명 관계가 이루어질 때, 상상 못할 축복과 은혜가 내려집니다.
(6) 생명 관계가 이루어질 때,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7) 생명 관계가 이루어질 때, 메시지 중심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8) 메시지 중심이 되면, 목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게 됩니다.
(9) 왜냐하면, 목사의 말을 통해 내 삶의 해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기도하는 중에 함께 계십니다.
(1) 생명 관계 속에서, 메시지를 붙잡고 모여서 기도하면 구체적인 역사가 나옵니다.
(2) 생명 관계 속에서, 진실한 고백이 나옵니다.
(3) 생명 관계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응석도 부릴 수 있습니다.
(4) 생명 관계 속에서, 응석을 부릴 수 있을 정도로 될때 구체적인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5) 생명 관계 속에서는, 내가 처한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복음의 기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 결론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배 뿐만 아니라 기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생명 관계 속에서 선교와 전도라는 하나님의 방향에 맞는 예배가 이루어지고 기도가 이루어지면,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응답이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 기도제목
오늘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얻은 생명 관계 속에서, 예배와 기도를 통해 새 힘을 얻어,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어 전도와 선교를 위해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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