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되는 계명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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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늘 말씀을 첫째되는 계명이라는 제목을 삼았다.
여기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시험하다가 실패한 것이 전반부에 나온다. 아주 묘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으로 사두개인들이 답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전에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이 연합해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기도 했다.
질문도 바로하면 복이 된다. 악한마음으로 질문하던지 선한마음으로 질문하던지 바로하면 복이 된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바리새인의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 정당한 바른 질문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질문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중에 어느계명이 크니이까? 바리새인이 질문할만한 질문이다. 어느계명이 제일 큽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그 다음에 나오는 대답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셨다.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으니 이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그말이다. 율법의 첫째되는 계명과 강령이 무엇이냐? 사랑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랑을 그냥 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하게 되면 그다음에 행동이 나온다. 그 행동이 이웃사랑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봉사라고 해서 헌신한다고 할때에 백번 천번한다고 할때에 첫 번째 계명이 안되면 다음에 오는 것은 전부 하나의 외식이 되고 전부 거짓말이 된다. 그래서 첫 번째 계명이 안되고 다음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보이는 형식적인 보이는 외형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까 교회가 빠지게 되는 것이 사회복음이다. 그 다음에 종교에 빠진다. 이렇게 빠지게 된다. 중심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그래서 그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했는가하면 사랑하는데 어떤 사랑인가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니까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중심으로 정말 마음과 전체가 연결될 수 있는 이 사랑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불행이 바로 이 사랑이 껍질이 되어가는데 불행이 있다. 교회의 불행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인 불행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사랑만큼 흔해 빠진 말이 없다. 온통 집에 돌아가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이혼하고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이상한짓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유행가를 보라. 항상 사랑타령이다. 유행가가 나오면 사랑이 한개 두개가 아니라 겹겹으로 몇 번씩 나온다. 그래도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어지고 있고 여기에 모든 문제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도 말세에 뭐가 문제인가하면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찬송에도 사랑이 없어 곳곳마다 탄식소리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사랑이 식어지느냐? 왜 사랑이 없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여러분 사랑이라고 할때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는 것 보다도 정말 우리 중심에 사랑이라고 할때에 사랑이라는 등급을 말할 수 있다면 어떤 관계로 살아가느냐? 이것이 한마디로 이해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친구간의 사랑이라고 하면 친구간에 사랑한다고 하면 벌써 어느수준의 사랑이다. 대강안다. 아무래도 아무리 친구간에 서로사랑한다고 할찌라도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진짜 복있다고 할때에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서 사랑한다면 이것은 진짜 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위해서 목숨을 버리는것만큼 큰 축복이 없다. 그런 사랑이 사실상 친구간에는 힘들다. 친구간에 사랑한다고 하면 그런 사랑이구나를 느끼게 된다.
그 다음에 사랑한다고 할때에 부부간의 사랑도 또 그렇다. 부부가 사랑한다. 아무리 그래봐야 아내것이 아내것이고 남편 것이 남편것이고 그렇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이 없으면 실제로 힘들다. 그러니까 조금 사랑한다 싶다가도 유익이 안되고 손해가 되어지고 괴롭다고 싶으면 사랑보다도 반사적으로 미움이 더 많이 나가는 것이 이것이 부부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하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간에 돌아누워버리면 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사랑의 측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데로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다. 이것은 또 농도가 달라지게 된다.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다하면 어느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뭐 자식죽은 것은 땅에 묻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어느정도의 짙은 사랑의 관계임을 알게 하는 말이다.
이런면에서 성경은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뭐라고 하는가하면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라고 하셨다. 이걸 스톨게(Storge 본능적,필연적, 혈연적 사랑)라고 헬라어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뭔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는 너를 버릴찌라도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아버지는 여러분과 저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신다.(시27:10) 그렇게 말씀했다.
그 다음에 이 사랑을 알고 깨달은 여러분과 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시는가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할때에 정말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여러분들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아들이 사랑합니다하는데 거짓말 이러는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면 아들이 거짓말 거짓말쟁이라고 할 이유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중심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뭔가하면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이런 사랑의 뜨거운 진실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생명관계이다.
거듭말씀하지만 아버지가 다리밑에서 주워온 아이같으면 사랑한다 그러면 그럴꺼다. 그래서 아버지가 성이나서 때리면 내가 주워와서 때리는가보다 아이가 그렇게 될 것이다. 사실상 어떤 면에서 주워온 아들은 교육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때려도 오해를 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오해를 하고 거짓말 싶고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가 정말 생명을 준 아들은 때렸다 상관없이 금방돌아와서 웃는다. 없어진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하면 뭔가 오해가 없다. 오해를 안한다. 때려도 징계해도 사랑한다고 해도 전부 진심이 통한다. 그러지만 이것이 안되면 범사에 막히게 되어있다.
여러분과 제가 정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느냐? 여기에 모든 것이 풀려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여기에 정말 축복의 근거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생명관계가 이루어졌을때에 이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축복이 연결되어지며 그것이 아니면 전부 아니다. 외식이 되고 거짓말이 되고 애를 써서 하고 싶어도 말과 언어와 제스츄어만 풍성하게 되지 진실과 사실이 안된다. 여기에 어려움이 온다.
이것이 안되게 될 때에 나오게 되는 것이 종교생활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사회복음이 되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진실이 안나온다. 박집사라고 하면 이상하게 눈이 돌아가고 진실이 안나오니까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죽일놈이라고 하며 교회생활속에 친구간에 교우간에 이 관계가 참 어려워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정말 교회가 좋은가? 정말 교회가 사랑스러운가? 정말 교인들이 좋은가? 또 더 나가서 교인들까지 갈 것 없이 정말 주의 종들이 사랑스러운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스러운가? 이건 생명관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오지를 않는다. 이것이 오지를 않을때에 전부 외식이 된다. 그래서 교회가 정말 이 사실이 안되게 되면 교회만큼 거짓투성이가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이것이 강조안되고 자꾸 다른 것으로 나가기 때문에 오는 문제이다.
신명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에 큰 계명을 주시면서 계명속에서 첫 번째 강조한 것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 이것이 대 전제가 되고 난 후에 그리고 나서 계명이 나온다. 여러분들이 계명에 대해 순종한다 할때에 그것은 이것이 전제가 안되면 전부 외식이 된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 말이 거짓말이 된다. 이것만큼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이 없게 된다.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오늘 이시간에 붙들어야 하는 것이 생명관계라고 할때에 첫 번째 문제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한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8:2) 이것이 다른 이름으로는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주신 이름이 없다(행4:12). 그래서 우리가 현장과 사건과 일마다 부딧히는 부분이 예수그리스도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이것이 간단한 말이 아니다. 엄청난 축복과 역사가 여기에 약속이 되어있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다나오게 된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면 진짜 하나님아버지가 되는 것이지 이것이 안 이루어지면 저절로 하나님아저씨 이렇게 밖에 안되게 되어있다. 이 관계가 회복이 안되면 그러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나를 향해서 아들아! 그래도 이것이 구체적으로 안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아버지 그래도 이것이 구체적으로 안된다. 나를 낳았다(시2:7). 그 안에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설명할 것도 없다. 저절로 아버지! 이것이 안되는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안되면 남이 더 잘 알고 웃는다.
제가 어떤 집에 이야기를 들었는데 웃긴 이야기가 되어서 말한다. 외손자를 집에 데리고 있는데 이아이가 말을 배우는데 할아버지를 향해서 할아버지라는 말이 안되고 희락이를 보니까 할아버지가 안되니 할아버~ 할아버~이래도 흉내라도 내는데 이 아이는 어떤가하면 할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 아버지라고 하는것이다. 목욕탕가도 아버지 아버지라고 한다. 다른사람이 볼때에 이상한것이다. 저 노인이 저런 조그마한 아이가 있으니까 이상한 아이가 아닌가? 이렇게 오해를 하게 되더라는 웃긴이야기를 하였다.
정말 낳은 관계가 아니라 억지로 뭔가를 말할려고 하면 남이 더 잘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아버지 그래도 정말 하나님아버지 생명관계가 안되면 마귀가 더 잘안다. 차라리 하나님아저씨라고 하는게 낳지! 그것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이 엄청난 은혜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풀어지게 되어있다. 되어진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안그러면 되어질려고 애쓰는 자체가 더 힘들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게 뭔가 이것이 안되면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 사실들을 바로 붙잡아야 한다. 주여 오늘도 내 안에 들어오시옵소서. 주예수그리스도 내안에 들어오시옵소서. 그리고 내 영혼속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정말 구원받은 자의 축복을 누리게 해 주옵소서. 이게 진짜 필요하다. 그때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1:12) 그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을 통해서 흑암세력이 완전히 꺽이게 되고 지금까지 저주와 재앙에서 빠졌던 사실에서부터 해방되어지고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부를때에 왕,제사장,선지자로 오신 주예수의 그이름이 구체적으로 여러분과 제게 작업하시게 되어있다. 이 역사가 와져야 이로통해서 모든 것이 풀리게 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이 예수그리스도 이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이 노력하고 말로 했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주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원하든 원치않든 하나님의 주권속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약점이 뭔가하면 이 큰 구원을 받아놓고도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멍하다. 받아놓고도 그렇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분들이 이 메시지를 들으면서 실감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받아놓고도 멍하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받았는지 않받았는지를 의심한다. 내가 받았는가? 어떨때는 받은 것 같고 어떨때는 안받은 것 같고 곧 이말은 어떨때는 천당갔다가 어떨때는 지옥갔다가. 지옥과 천당을 한주간 왔다갔다하는것이다. 기분좋을때에는 천국백성이 된 것 같고 기분나쁠때는 안된 것 같고. 이것이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진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자리에 왔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란다. 뭘 믿는가? 구원받았다. 왜 그런가? 혹시 한주간 빠졌다. 두주간 빠졌다. 세주간 빠졌다. 한달에 한번 안올수 없어서 억지로 들어왔다. 구원받았는가? 안받았는가? 구원받았다. 왜? 보통사람들은 구원의 백성이 아니면 올수가 없다. 한주간 빠져도 아무렇지도 않다가 두주간 빠지면 이상하게 불안하다. 세주간빠지면 내가 이러다가 죽겠구나! 네주간빠질려고 해도 겁나서 못빠진다. 할수없이 찾아와서 꾸벅꾸벅 졸다가 간다. 그래도 그렇게 왔다는 사실자체는 내가 구원의 백성이 아니면 찾아올 수가 없다. 그래도 못오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왔다. 그러면 이 자리에 올 수 있다. 안그러면 죽었다 깨어도 못온다. 왜 못오는가? 마귀가 이 자리에 오도록 놓아두지를 않는다.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데 그런데도 구원의 감격이 없다. 와서 졸다가 빨리 안끝내나? 속히 마쳤으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예배시간 설교 일찍 마치면 좋아한다. 구원받아놓고도 이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전적인 선물로 주셨기에 각 개인에게 감각이 안온다. 이 문제가 어려운 문제이다. 마치 말하자면 공기가 마음껏 마셔지게 되는 큰 축복이 무조건 선물이다. 여러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밤새도록 실컷 마셔놓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아 피곤하다고 한다. 공기 시원하게 마시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공기야 참 고맙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이웃사람이 떡가지고 오면 한조각 가지고 와도 고맙다고 인사해도 그렇게 많은 공기를 마음껏 마셔도 고맙다는 인사가 안되는 것이다. 왜그러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져 버렸다. 그러면 무조건 선물로 받았다. 그러니까 그게 잘 감각이 안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안될때에는 내 행동과 구체적인 사실이 안될때에 오는 것이 생각과 느낌이 돌아가지 않는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기억을 할것이 정말 중심과 마음이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중심으로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뭐가 와야 하는가하면 구원에 확신이 와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와야 한다. 이말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할때에 구원의 확~신이라고 했다. 정말 가슴속에 정말 내 삶에 부딧혀 와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와야 한다. 정말 구원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이 사실이 와 부딧혀야 한다. 이것이 오지 않으면 중심이 안나오게 된다. 마음과 생각과 뜻이 사랑합니다. 이것이 안나온다. 내 구원속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체험되는 만큼 하나님사랑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눈물정도가 아니라 감격이 된다. 아마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를 말해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거는 하나님아저씨라고 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왜그런가? 구체적인 감정이 안통해서 그렇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다. 이게 와야 전도된다. 전도되어진다. 저절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이게 되어지면 나와 같이 죽음과 멸망에 있던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구나 그러면 이웃이 그리고 교우들이 사랑스러워진다. 그리고 이상하게 나와같이 이상한짓 하게 되면 꼭 내같다고 하면서 나도모르게 기도가 나가게 된다. 그게 안되면 저게 이상한 놈이 왔네. 이렇게 되고 만다. 자기는 그보다 더 해놓고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는 이것이 와지는데 이게 해결이 안된다. 그러면 교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이게 안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놓고도 구원의 통로인 주의 종들을 사랑한다. 중심이 안된다. 자기도 모르게 안되게 되어있다.
세 번째로 그런데 이렇게 되어지자면 체험되어야 한다. 확신이 왔다면 체험이 되어야 한다. 구원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체험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무슨 생각이 드는가하면 다른방향으로 흐를수가 있다. 그래서 체험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해야 되겠다. 중심으로 사랑하고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이런 구체적인 관계가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전도사역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복음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고심을 했다. 왜 뿌리를 내려야 하고 어떻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나무를 심어서 뿌리를 내리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그러면 굵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잔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이게 뭔가 갈등이 왔다. 그래서 먼가 정의를 해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뿌리를 내려라는 말은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에 나무가 처음에 뿌리를 내리면 처음에는 굵은 뿌리가 묻혀진다. 묻혀지는데 이것이 뿌리가 내려서 고정이 되고 흡착이 되어서 흔들리지 않고 확실하게 자랄 수 있기 위해서는 뭐가 되어야 하는가하면 잔뿌리가 내려서 땅에다가 흡착이 되면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그전에는 흔들리지 말라고 나무에다가 지주를 다 해놓는다.
잔뿌리를 내린다면 나무를 안본 도시인들이 되어서 한번도 나무를 안심어보니 설명이 곤란하다. 뿌리를 뽑으면 굵은뿌리가 있지만 사실상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뿌리이다. 이것이 뿌리를 크게 내려서 땅에다가 계속해서 땅에 흡착이 되어지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뭘 말씀하는가하면 복음이 나무가 되고 뿌리를 내리는 것이 되느냐? 그런데 받아합시다. 뿌리를 내리라는 말씀은 말씀이 날마다 체험되는 것을 말한다.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럴때에 그 말씀이 한주간동안 날마다 체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마치 하나 체험이 되면 하나 잔뿌리가 내리듯이 계속체험되는 것 마다 마치 우리가 잔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다 흡착이 된다. 하나님에게 흡착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그 영광속에 우리가 딱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복음받고 전도가 된다고 할때에 이것이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전도가 안된다. 전도가 된다는 배경속에 이것이다. 정말 복음을 받았느냐? 흔들리지 않는다. 교회와서 무슨 불평이 나온다.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안된다는 말이다. 말씀이 내 생활과 삶에 성취가 안되고 있기 때문에 불평이 나온다. 그래서 교회에서 삐지고 이상해지는 것은 이것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삐질 이유가 없다. 하나만 되어도 감격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체험을 바로 해야 하는 것은 말씀이 내 생활과 삶에 성취되는 것이 체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다른 체험으로 오면 곤란하다.
그래서 체험이라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뭔가 나중에 미국가서도 고기를 잡아보고 해서 제가 잡은 고기중에서 바다고기중에서 월척을 낚아봤다. 그런데 제가 고기낚시 생각하면 바다에서 뉴욕에서 월척을 낚은 것이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처음에 어릴때에 그냥 개울에서 비온 후에 물이 돌아서 나가는 그 곳에 바늘을 불에 그을려서 구부려서 파리를 잡아서 낚시를 만들어서 던지게 되었는데 그때에 물렸던 내 생각에는 손바닥정도의 고기인데 그 고기가 물렸던 그 체험이 항상 기억에 남아있다. 항상 그 체험이 초기 체험이다. 그래서 늘 어디를 가든지 물만 있으면 그때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체험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 이래서 신비체험을 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느낌이 신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신비를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 체험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이런 시험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신비주의이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 지금빨리 뭘 체험해야 하는가하면 내가 방언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언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신앙그러면 범사에 그런식으로 추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느낌과 모든 것이 그리로 주게 된다. 판단과 느낌이 달라진다.
지금은 뭐가 체험이 되어야 하는가하면 말씀이 어떤 뜨겁지도 않았고 이상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씀을 이상하게 기도하는중에 입이 꼬부라지고 이렇지도 않았는데도 주일날 메시지속에서 목사님통해서 말씀이 증거될때에 저절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새겨지고 그 말씀붙잡고 기도할때에 기도할때에 한주간 그 말씀이 계속 성취되는 것을 딱 한번만 체험하게 되면 뭐가나오는가하면 주일날이 기다려진다. 주일날이 말씀을 듣고 본 성경말씀그대로 뭔가 성취될것이 믿어진다.
생각이 그렇게 믿어지는것과 신비를 추구하면서 믿어지는 것과는 달라진다. 생각과 느낌과 판단이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나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뭐가오는가하면 저절로 주일날 말씀듣는 자세가 달라지게 된다. 이 말씀이 내게 한주간 이루어지겠다는 사실이 체험되었다. 믿어졌다. 확신이 왔다. 여러분 자세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왔다 눈을 스르르 감고 있어지지를 않는다. 저 말씀이 이루어지는 말씀인데 그러면 눈이 반짝 거릴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문꼬리 잡고 나가서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말씀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다음에 기도가 계속되어진다. 왜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번만 체험이 되어지면 여러분 설교듣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한번 두 번 세 번 계속되어진다. 엄청난 역사로 여러분의 생활이 바꾸어지게 된다.
예배에 성공하라는 말씀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안되고 그냥 눈뜨고 앉았다고 해도 이것이 안되고 한시간 앉아있다가 문꼬리 잡고 나가면 제목도 잊어버린다. 본문 더군다나 잊어버린다. 늘 가지고 나가는 말씀본문도 잊어버린다. 지난주의 설교제목이 뭔가? 이만해도 진짜 잘아는 것이다. (산 자의 하나님) 어찌 그렇게 기억력이 없고 건망증으로 가득차있는데 이것이 기억이 되는가?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생활속에 사실적으로 체험되고 사실로 확인되는 것을 위해서 뭔가 월요일부터 지역다락방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할때마다 계속해서 주의 종들이나 사역자들이 한결같이 주일메시지를 가지고 계속말씀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들어도 체험되는 사실이 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감이 안오고 확신이 안오게 되어있다. 이게 한번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문꼬리잡고 나가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새로워지게 되어있다. 체험될 수록 그런것이다. 이것이 하나 쌓이고 둘 쌓이고 계속된다.
잔뿌리가 내릴 정도가 아니고 확인되고 확신되는 이때부터 우리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고백이 되어진다. 여기에 힘이 나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자기 신앙고백에 성취되는 것이 체험이 안되면 진짜 신앙생활이 힘이 없어진다. 여러분이 예수믿고 나는 이렇게 되었다. 예수믿고 나는 이런 신앙고백, 내 신앙고백에 사실로 증명이 되어야 힘이 나온다. 내 신앙고백을 백번,천번을 해도 하나도 안되면 힘빠지게 되어있다. 갈등이 여기서 나오게 되어있다. 여러분 가정생활 부부생활 내삶에 직장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도모르게 말씀이 체험되고 이 체험된 사실이 내게 사실로 증거되어지게 될 때에 여기에 전도가 나오고 여기에 선교가 나오고 모든 축복이 다 나오게 되어있다.
이것이 오늘 확인되고 이루어질때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뿌리가 내렸다. 그정도가 아니다. 크고 첫째되는 계명 사랑합니다. 고백이 진짜나오게 된다. 여러분이 주의 종들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진짜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 내가 성도들을 사랑합니다라는 것이 진짜 고백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교회만큼 어렵고 힘든곳이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별사람이 다 모인다. 그리고 교회가 정말 이복음에 서지 않으면 하나님과 피가 안통하면 하나님과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인 삶에 말씀이 성취되는 이 사실이 체험이 안되면 내 이웃과 연결되는 것이 안되게 되어있다.
먼저 하나님사랑 그 다음에 사람을 사랑하는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도 있고 그다음에 인류가 될 수도 있고 여기서 세계복음화의 비전이 실제로 나오게 된다.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 첫째되는 계명 사랑합니다. 말이 아니라 정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 하나님아버지~ 이런 고백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고백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로서의 사실적인 증거가 나와야 한다. 아버지 고백을 해야 하는데 아저씨란 증거가 나왔다. 괴롭다. 어떤면에서 많은 경우 우리의 고통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 앉아있다. 구원의 확신이 자리잡아야 한다. 여기에 앉아서 모든 고백이 나왔다. 지금까지 신앙고백 했지만 고백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는데 하나님아버지 신앙고백은 맞는데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면 속으로 아저씨인데 이러니 어렵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때로는 아닌데, 이 모든 문제가 여기서 헷갈리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이 임할때에 저게 아니지. 안들린다. 불신앙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강단의 말씀이 나올때에 목사님 자기는 잘하지만 말씀이 나올때에 주의 말씀이 나올때에 맞습니다. 목사님이 자기는 못해도 말씀은 맞아 이렇게 되어야 한다. 온 성도가 맞아! 내가 바뀌면 되는거야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게 되어지게 되면 비로써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다. 이것이 안된다는것만큼 불행과 괴로움이 없다.
오늘 이시간에 첫째되는 계명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내게 심어지는 사실적인 역사 누구로 말미암아 이시간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안에 오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하나님앞에 정말 하나님의 사실이 나의 사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적어도 안된다고 할때에 몸부림쳐보자. 이 사실이 성취되도록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나님앞에 기도하자.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것이다. 아버지로서 이루실것이다. 자녀로서 이루어질것이다.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서론
바리새인들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행동이 따라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사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본론
1. 진실한 사랑은?
(1) '어떤 관계로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2)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관계는 '부모 자식 사이의 사랑'인데,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3)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생명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진실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과 생명 관계가 이루어질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진실로 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2. 생명 관계는?
(1)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것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2) 진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3)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받은 너무나 큰 선물이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찾아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미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4)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진실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5)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주의 종들과 교우들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3. 구원의 확신은?
(1)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체험을 통해서 뿌리가 내려져야 필요합니다.
(2) '체험을 통해서 뿌리가 내려진다'는 것은, 신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3) 주일날 들은 말씀이 주간의 삶 속에서 성취되는 체험을 하게될 때, 잔뿌리가 내려져서 나무가 땅에 흡착되는 것처럼 구원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4) 말씀이 주간의 삶 속에서 성취되어지는 체험을 할수록 더욱 진지하게 기대감 속에서 말씀을 듣게 됩니다.
● 결론
나의 삶 속에서 말씀이 체험될 때,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하나님께, 가족들에게, 교우들에게, 이웃들에게,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진실하게 이루어지고, 전도와 선교가 나오게 됩니다.
● 기도제목
◎ 말씀의 성취를 체험하며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 하나님을 진실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마 22: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마 22: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 22: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마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오늘 말씀을 첫째되는 계명이라는 제목을 삼았다.
여기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에게 시험하다가 실패한 것이 전반부에 나온다. 아주 묘한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으로 사두개인들이 답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전에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이 연합해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기도 했다.
질문도 바로하면 복이 된다. 악한마음으로 질문하던지 선한마음으로 질문하던지 바로하면 복이 된다. 그런의미에서 오늘 바리새인의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 정당한 바른 질문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그 질문내용을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중에 어느계명이 크니이까? 바리새인이 질문할만한 질문이다. 어느계명이 제일 큽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이 그 다음에 나오는 대답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셨다.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하셨으니 이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그말이다. 율법의 첫째되는 계명과 강령이 무엇이냐? 사랑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랑을 그냥 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하게 되면 그다음에 행동이 나온다. 그 행동이 이웃사랑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봉사라고 해서 헌신한다고 할때에 백번 천번한다고 할때에 첫 번째 계명이 안되면 다음에 오는 것은 전부 하나의 외식이 되고 전부 거짓말이 된다. 그래서 첫 번째 계명이 안되고 다음의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보이는 형식적인 보이는 외형적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까 교회가 빠지게 되는 것이 사회복음이다. 그 다음에 종교에 빠진다. 이렇게 빠지게 된다. 중심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그래서 그 중심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했는가하면 사랑하는데 어떤 사랑인가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러니까 그냥 말로만이 아니라 중심으로 정말 마음과 전체가 연결될 수 있는 이 사랑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불행이 바로 이 사랑이 껍질이 되어가는데 불행이 있다. 교회의 불행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인 불행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회에서 사랑만큼 흔해 빠진 말이 없다. 온통 집에 돌아가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이혼하고 사랑합니다라고 하면서 이상한짓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리고 유행가를 보라. 항상 사랑타령이다. 유행가가 나오면 사랑이 한개 두개가 아니라 겹겹으로 몇 번씩 나온다. 그래도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어지고 있고 여기에 모든 문제가 나오게 된다. 그래서 성경에도 말세에 뭐가 문제인가하면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문제이다. 그리고 찬송에도 사랑이 없어 곳곳마다 탄식소리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 사랑이 식어지느냐? 왜 사랑이 없느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여러분 사랑이라고 할때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는 것 보다도 정말 우리 중심에 사랑이라고 할때에 사랑이라는 등급을 말할 수 있다면 어떤 관계로 살아가느냐? 이것이 한마디로 이해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친구간의 사랑이라고 하면 친구간에 사랑한다고 하면 벌써 어느수준의 사랑이다. 대강안다. 아무래도 아무리 친구간에 서로사랑한다고 할찌라도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진짜 복있다고 할때에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서 사랑한다면 이것은 진짜 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위해서 목숨을 버리는것만큼 큰 축복이 없다. 그런 사랑이 사실상 친구간에는 힘들다. 친구간에 사랑한다고 하면 그런 사랑이구나를 느끼게 된다.
그 다음에 사랑한다고 할때에 부부간의 사랑도 또 그렇다. 부부가 사랑한다. 아무리 그래봐야 아내것이 아내것이고 남편 것이 남편것이고 그렇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이 없으면 실제로 힘들다. 그러니까 조금 사랑한다 싶다가도 유익이 안되고 손해가 되어지고 괴롭다고 싶으면 사랑보다도 반사적으로 미움이 더 많이 나가는 것이 이것이 부부간의 사랑이다. 그래서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하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부간에 돌아누워버리면 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사랑의 측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데로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다. 이것은 또 농도가 달라지게 된다.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다하면 어느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뭐 자식죽은 것은 땅에 묻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어느정도의 짙은 사랑의 관계임을 알게 하는 말이다.
이런면에서 성경은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뭐라고 하는가하면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이라고 하셨다. 이걸 스톨게(Storge 본능적,필연적, 혈연적 사랑)라고 헬라어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것은 뭔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부모는 너를 버릴찌라도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아버지는 여러분과 저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신다.(시27:10) 그렇게 말씀했다.
그 다음에 이 사랑을 알고 깨달은 여러분과 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시는가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할때에 정말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다. 여러분들이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아들이 사랑합니다하는데 거짓말 이러는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하면 아들이 거짓말 거짓말쟁이라고 할 이유와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중심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뭔가하면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이런 사랑의 뜨거운 진실한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 생명관계이다.
거듭말씀하지만 아버지가 다리밑에서 주워온 아이같으면 사랑한다 그러면 그럴꺼다. 그래서 아버지가 성이나서 때리면 내가 주워와서 때리는가보다 아이가 그렇게 될 것이다. 사실상 어떤 면에서 주워온 아들은 교육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때려도 오해를 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오해를 하고 거짓말 싶고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가 정말 생명을 준 아들은 때렸다 상관없이 금방돌아와서 웃는다. 없어진다.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고 하면 뭔가 오해가 없다. 오해를 안한다. 때려도 징계해도 사랑한다고 해도 전부 진심이 통한다. 그러지만 이것이 안되면 범사에 막히게 되어있다.
여러분과 제가 정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느냐? 여기에 모든 것이 풀려가게 되어있다. 그래서 여기에 정말 축복의 근거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생명관계가 이루어졌을때에 이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축복이 연결되어지며 그것이 아니면 전부 아니다. 외식이 되고 거짓말이 되고 애를 써서 하고 싶어도 말과 언어와 제스츄어만 풍성하게 되지 진실과 사실이 안된다. 여기에 어려움이 온다.
이것이 안되게 될 때에 나오게 되는 것이 종교생활이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다. 자기도 모르게 사회복음이 되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진실이 안나온다. 박집사라고 하면 이상하게 눈이 돌아가고 진실이 안나오니까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죽일놈이라고 하며 교회생활속에 친구간에 교우간에 이 관계가 참 어려워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정말 교회가 좋은가? 정말 교회가 사랑스러운가? 정말 교인들이 좋은가? 또 더 나가서 교인들까지 갈 것 없이 정말 주의 종들이 사랑스러운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랑스러운가? 이건 생명관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것이 오지를 않는다. 이것이 오지를 않을때에 전부 외식이 된다. 그래서 교회가 정말 이 사실이 안되게 되면 교회만큼 거짓투성이가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이것이 강조안되고 자꾸 다른 것으로 나가기 때문에 오는 문제이다.
신명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에 큰 계명을 주시면서 계명속에서 첫 번째 강조한 것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 이것이 대 전제가 되고 난 후에 그리고 나서 계명이 나온다. 여러분들이 계명에 대해 순종한다 할때에 그것은 이것이 전제가 안되면 전부 외식이 된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이 말이 거짓말이 된다. 이것만큼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이 없게 된다. 그렇게 이해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오늘 이시간에 붙들어야 하는 것이 생명관계라고 할때에 첫 번째 문제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한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8:2) 이것이 다른 이름으로는 천하인간에게 구원을 주신 이름이 없다(행4:12). 그래서 우리가 현장과 사건과 일마다 부딧히는 부분이 예수그리스도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이것이 간단한 말이 아니다. 엄청난 축복과 역사가 여기에 약속이 되어있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다나오게 된다.
이것이 이루어져야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면 진짜 하나님아버지가 되는 것이지 이것이 안 이루어지면 저절로 하나님아저씨 이렇게 밖에 안되게 되어있다. 이 관계가 회복이 안되면 그러면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나를 향해서 아들아! 그래도 이것이 구체적으로 안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아버지 그래도 이것이 구체적으로 안된다. 나를 낳았다(시2:7). 그 안에 내가 너의 아버지다라고 설명할 것도 없다. 저절로 아버지! 이것이 안되는것이다. 만약에 이것이 안되면 남이 더 잘 알고 웃는다.
제가 어떤 집에 이야기를 들었는데 웃긴 이야기가 되어서 말한다. 외손자를 집에 데리고 있는데 이아이가 말을 배우는데 할아버지를 향해서 할아버지라는 말이 안되고 희락이를 보니까 할아버지가 안되니 할아버~ 할아버~이래도 흉내라도 내는데 이 아이는 어떤가하면 할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 아버지라고 하는것이다. 목욕탕가도 아버지 아버지라고 한다. 다른사람이 볼때에 이상한것이다. 저 노인이 저런 조그마한 아이가 있으니까 이상한 아이가 아닌가? 이렇게 오해를 하게 되더라는 웃긴이야기를 하였다.
정말 낳은 관계가 아니라 억지로 뭔가를 말할려고 하면 남이 더 잘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아버지 그래도 정말 하나님아버지 생명관계가 안되면 마귀가 더 잘안다. 차라리 하나님아저씨라고 하는게 낳지! 그것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았다는 그 사실이 엄청난 은혜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 풀어지게 되어있다. 되어진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안그러면 되어질려고 애쓰는 자체가 더 힘들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게 뭔가 이것이 안되면 다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이 사실들을 바로 붙잡아야 한다. 주여 오늘도 내 안에 들어오시옵소서. 주예수그리스도 내안에 들어오시옵소서. 그리고 내 영혼속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정말 구원받은 자의 축복을 누리게 해 주옵소서. 이게 진짜 필요하다. 그때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1:12) 그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을 통해서 흑암세력이 완전히 꺽이게 되고 지금까지 저주와 재앙에서 빠졌던 사실에서부터 해방되어지고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부를때에 왕,제사장,선지자로 오신 주예수의 그이름이 구체적으로 여러분과 제게 작업하시게 되어있다. 이 역사가 와져야 이로통해서 모든 것이 풀리게 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이 예수그리스도 이 구원의 은혜가 여러분이 노력하고 말로 했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주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가 원하든 원치않든 하나님의 주권속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약점이 뭔가하면 이 큰 구원을 받아놓고도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멍하다. 받아놓고도 그렇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분들이 이 메시지를 들으면서 실감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받아놓고도 멍하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받았는지 않받았는지를 의심한다. 내가 받았는가? 어떨때는 받은 것 같고 어떨때는 안받은 것 같고 곧 이말은 어떨때는 천당갔다가 어떨때는 지옥갔다가. 지옥과 천당을 한주간 왔다갔다하는것이다. 기분좋을때에는 천국백성이 된 것 같고 기분나쁠때는 안된 것 같고. 이것이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진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가지 확인해야 할 것은 이 자리에 왔다. 확실히 믿으시기를 바란다. 뭘 믿는가? 구원받았다. 왜 그런가? 혹시 한주간 빠졌다. 두주간 빠졌다. 세주간 빠졌다. 한달에 한번 안올수 없어서 억지로 들어왔다. 구원받았는가? 안받았는가? 구원받았다. 왜? 보통사람들은 구원의 백성이 아니면 올수가 없다. 한주간 빠져도 아무렇지도 않다가 두주간 빠지면 이상하게 불안하다. 세주간빠지면 내가 이러다가 죽겠구나! 네주간빠질려고 해도 겁나서 못빠진다. 할수없이 찾아와서 꾸벅꾸벅 졸다가 간다. 그래도 그렇게 왔다는 사실자체는 내가 구원의 백성이 아니면 찾아올 수가 없다. 그래도 못오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이 왔다. 그러면 이 자리에 올 수 있다. 안그러면 죽었다 깨어도 못온다. 왜 못오는가? 마귀가 이 자리에 오도록 놓아두지를 않는다.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데 그런데도 구원의 감격이 없다. 와서 졸다가 빨리 안끝내나? 속히 마쳤으면 좋겠다. 그래서 많은 경우 예배시간 설교 일찍 마치면 좋아한다. 구원받아놓고도 이것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어려운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하나님이 전적인 선물로 주셨기에 각 개인에게 감각이 안온다. 이 문제가 어려운 문제이다. 마치 말하자면 공기가 마음껏 마셔지게 되는 큰 축복이 무조건 선물이다. 여러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밤새도록 실컷 마셔놓고는 아침에 일어나서 아 피곤하다고 한다. 공기 시원하게 마시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공기야 참 고맙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이웃사람이 떡가지고 오면 한조각 가지고 와도 고맙다고 인사해도 그렇게 많은 공기를 마음껏 마셔도 고맙다는 인사가 안되는 것이다. 왜그러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져 버렸다. 그러면 무조건 선물로 받았다. 그러니까 그게 잘 감각이 안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감각이 안될때에는 내 행동과 구체적인 사실이 안될때에 오는 것이 생각과 느낌이 돌아가지 않는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로 기억을 할것이 정말 중심과 마음이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 아버지~ 사랑합니다. 중심으로 나올 수 있기 위해서는 뭐가 와야 하는가하면 구원에 확신이 와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와야 한다. 이말을 하면서 구원의 확신이라고 말할때에 구원의 확~신이라고 했다. 정말 가슴속에 정말 내 삶에 부딧혀 와야 한다. 구원의 확신이 와야 한다. 정말 구원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감~사합니다. 이 사실이 와 부딧혀야 한다. 이것이 오지 않으면 중심이 안나오게 된다. 마음과 생각과 뜻이 사랑합니다. 이것이 안나온다. 내 구원속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체험되는 만큼 하나님사랑합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눈물정도가 아니라 감격이 된다. 아마 여러분들이 지금 하나님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를 말해도 중심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 사랑합니다. 그거는 하나님아저씨라고 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왜그런가? 구체적인 감정이 안통해서 그렇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다. 이게 와야 전도된다. 전도되어진다. 저절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이게 되어지면 나와 같이 죽음과 멸망에 있던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구나 그러면 이웃이 그리고 교우들이 사랑스러워진다. 그리고 이상하게 나와같이 이상한짓 하게 되면 꼭 내같다고 하면서 나도모르게 기도가 나가게 된다. 그게 안되면 저게 이상한 놈이 왔네. 이렇게 되고 만다. 자기는 그보다 더 해놓고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는 이것이 와지는데 이게 해결이 안된다. 그러면 교인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이게 안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놓고도 구원의 통로인 주의 종들을 사랑한다. 중심이 안된다. 자기도 모르게 안되게 되어있다.
세 번째로 그런데 이렇게 되어지자면 체험되어야 한다. 확신이 왔다면 체험이 되어야 한다. 구원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체험이라고 하면 이상하게 무슨 생각이 드는가하면 다른방향으로 흐를수가 있다. 그래서 체험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해야 되겠다. 중심으로 사랑하고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이런 구체적인 관계가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전도사역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복음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고심을 했다. 왜 뿌리를 내려야 하고 어떻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나무를 심어서 뿌리를 내리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그러면 굵은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잔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이게 뭔가 갈등이 왔다. 그래서 먼가 정의를 해 드려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뿌리를 내려라는 말은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에 나무가 처음에 뿌리를 내리면 처음에는 굵은 뿌리가 묻혀진다. 묻혀지는데 이것이 뿌리가 내려서 고정이 되고 흡착이 되어서 흔들리지 않고 확실하게 자랄 수 있기 위해서는 뭐가 되어야 하는가하면 잔뿌리가 내려서 땅에다가 흡착이 되면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그전에는 흔들리지 말라고 나무에다가 지주를 다 해놓는다.
잔뿌리를 내린다면 나무를 안본 도시인들이 되어서 한번도 나무를 안심어보니 설명이 곤란하다. 뿌리를 뽑으면 굵은뿌리가 있지만 사실상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뿌리이다. 이것이 뿌리를 크게 내려서 땅에다가 계속해서 땅에 흡착이 되어지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뭘 말씀하는가하면 복음이 나무가 되고 뿌리를 내리는 것이 되느냐? 그런데 받아합시다. 뿌리를 내리라는 말씀은 말씀이 날마다 체험되는 것을 말한다.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럴때에 그 말씀이 한주간동안 날마다 체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마치 하나 체험이 되면 하나 잔뿌리가 내리듯이 계속체험되는 것 마다 마치 우리가 잔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다 흡착이 된다. 하나님에게 흡착이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그 영광속에 우리가 딱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복음받고 전도가 된다고 할때에 이것이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전도가 안된다. 전도가 된다는 배경속에 이것이다. 정말 복음을 받았느냐? 흔들리지 않는다. 교회와서 무슨 불평이 나온다.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안된다는 말이다. 말씀이 내 생활과 삶에 성취가 안되고 있기 때문에 불평이 나온다. 그래서 교회에서 삐지고 이상해지는 것은 이것이 안되었다는 것이다. 삐질 이유가 없다. 하나만 되어도 감격해 지는 것이다.
그래서 체험을 바로 해야 하는 것은 말씀이 내 생활과 삶에 성취되는 것이 체험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다른 체험으로 오면 곤란하다.
그래서 체험이라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뭔가 나중에 미국가서도 고기를 잡아보고 해서 제가 잡은 고기중에서 바다고기중에서 월척을 낚아봤다. 그런데 제가 고기낚시 생각하면 바다에서 뉴욕에서 월척을 낚은 것이 생각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처음에 어릴때에 그냥 개울에서 비온 후에 물이 돌아서 나가는 그 곳에 바늘을 불에 그을려서 구부려서 파리를 잡아서 낚시를 만들어서 던지게 되었는데 그때에 물렸던 내 생각에는 손바닥정도의 고기인데 그 고기가 물렸던 그 체험이 항상 기억에 남아있다. 항상 그 체험이 초기 체험이다. 그래서 늘 어디를 가든지 물만 있으면 그때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체험이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 이래서 신비체험을 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느낌이 신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신비를 추구하게 되어있다. 그 체험을 추구하게 되어있다. 이런 시험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생활이 신비주의이다. 이것을 고쳐야 한다. 지금빨리 뭘 체험해야 하는가하면 내가 방언을 체험했기 때문에 예언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신앙그러면 범사에 그런식으로 추구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과 느낌과 모든 것이 그리로 주게 된다. 판단과 느낌이 달라진다.
지금은 뭐가 체험이 되어야 하는가하면 말씀이 어떤 뜨겁지도 않았고 이상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씀을 이상하게 기도하는중에 입이 꼬부라지고 이렇지도 않았는데도 주일날 메시지속에서 목사님통해서 말씀이 증거될때에 저절로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새겨지고 그 말씀붙잡고 기도할때에 기도할때에 한주간 그 말씀이 계속 성취되는 것을 딱 한번만 체험하게 되면 뭐가나오는가하면 주일날이 기다려진다. 주일날이 말씀을 듣고 본 성경말씀그대로 뭔가 성취될것이 믿어진다.
생각이 그렇게 믿어지는것과 신비를 추구하면서 믿어지는 것과는 달라진다. 생각과 느낌과 판단이 달라지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나오게 된다.
이렇게 되면 뭐가오는가하면 저절로 주일날 말씀듣는 자세가 달라지게 된다. 이 말씀이 내게 한주간 이루어지겠다는 사실이 체험되었다. 믿어졌다. 확신이 왔다. 여러분 자세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왔다 눈을 스르르 감고 있어지지를 않는다. 저 말씀이 이루어지는 말씀인데 그러면 눈이 반짝 거릴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문꼬리 잡고 나가서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말씀이 마음속에 남아있다. 그다음에 기도가 계속되어진다. 왜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번만 체험이 되어지면 여러분 설교듣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한번 두 번 세 번 계속되어진다. 엄청난 역사로 여러분의 생활이 바꾸어지게 된다.
예배에 성공하라는 말씀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안되고 그냥 눈뜨고 앉았다고 해도 이것이 안되고 한시간 앉아있다가 문꼬리 잡고 나가면 제목도 잊어버린다. 본문 더군다나 잊어버린다. 늘 가지고 나가는 말씀본문도 잊어버린다. 지난주의 설교제목이 뭔가? 이만해도 진짜 잘아는 것이다. (산 자의 하나님) 어찌 그렇게 기억력이 없고 건망증으로 가득차있는데 이것이 기억이 되는가?
그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생활속에 사실적으로 체험되고 사실로 확인되는 것을 위해서 뭔가 월요일부터 지역다락방 새벽기도회 수요예배 할때마다 계속해서 주의 종들이나 사역자들이 한결같이 주일메시지를 가지고 계속말씀하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말씀을 들어도 체험되는 사실이 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감이 안오고 확신이 안오게 되어있다. 이게 한번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문꼬리잡고 나가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새로워지게 되어있다. 체험될 수록 그런것이다. 이것이 하나 쌓이고 둘 쌓이고 계속된다.
잔뿌리가 내릴 정도가 아니고 확인되고 확신되는 이때부터 우리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고백이 되어진다. 여기에 힘이 나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자기 신앙고백에 성취되는 것이 체험이 안되면 진짜 신앙생활이 힘이 없어진다. 여러분이 예수믿고 나는 이렇게 되었다. 예수믿고 나는 이런 신앙고백, 내 신앙고백에 사실로 증명이 되어야 힘이 나온다. 내 신앙고백을 백번,천번을 해도 하나도 안되면 힘빠지게 되어있다. 갈등이 여기서 나오게 되어있다. 여러분 가정생활 부부생활 내삶에 직장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도모르게 말씀이 체험되고 이 체험된 사실이 내게 사실로 증거되어지게 될 때에 여기에 전도가 나오고 여기에 선교가 나오고 모든 축복이 다 나오게 되어있다.
이것이 오늘 확인되고 이루어질때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뿌리가 내렸다. 그정도가 아니다. 크고 첫째되는 계명 사랑합니다. 고백이 진짜나오게 된다. 여러분이 주의 종들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진짜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들 내가 성도들을 사랑합니다라는 것이 진짜 고백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교회만큼 어렵고 힘든곳이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별사람이 다 모인다. 그리고 교회가 정말 이복음에 서지 않으면 하나님과 피가 안통하면 하나님과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인 삶에 말씀이 성취되는 이 사실이 체험이 안되면 내 이웃과 연결되는 것이 안되게 되어있다.
먼저 하나님사랑 그 다음에 사람을 사랑하는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정이 될 수도 있고 이웃이 될 수도 있고 그다음에 인류가 될 수도 있고 여기서 세계복음화의 비전이 실제로 나오게 된다. 오늘 여러분들이 정말 첫째되는 계명 사랑합니다. 말이 아니라 정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 하나님아버지~ 이런 고백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고백을 하기 위해서 아버지로서의 사실적인 증거가 나와야 한다. 아버지 고백을 해야 하는데 아저씨란 증거가 나왔다. 괴롭다. 어떤면에서 많은 경우 우리의 고통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 앉아있다. 구원의 확신이 자리잡아야 한다. 여기에 앉아서 모든 고백이 나왔다. 지금까지 신앙고백 했지만 고백대로 되어지는 것이 없는데 하나님아버지 신앙고백은 맞는데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면 속으로 아저씨인데 이러니 어렵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때로는 아닌데, 이 모든 문제가 여기서 헷갈리는 것이다. 그러면 말씀이 임할때에 저게 아니지. 안들린다. 불신앙이 자기도 모르게 나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강단의 말씀이 나올때에 목사님 자기는 잘하지만 말씀이 나올때에 주의 말씀이 나올때에 맞습니다. 목사님이 자기는 못해도 말씀은 맞아 이렇게 되어야 한다. 온 성도가 맞아! 내가 바뀌면 되는거야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게 되어지게 되면 비로써 모든 것이 거기서 나온다. 이것이 안된다는것만큼 불행과 괴로움이 없다.
오늘 이시간에 첫째되는 계명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중심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내게 심어지는 사실적인 역사 누구로 말미암아 이시간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안에 오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내 하나님앞에 정말 하나님의 사실이 나의 사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적어도 안된다고 할때에 몸부림쳐보자. 이 사실이 성취되도록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나님앞에 기도하자.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실것이다. 아버지로서 이루실것이다. 자녀로서 이루어질것이다.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서론
바리새인들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행동이 따라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우리에게 이 사랑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 본론
1. 진실한 사랑은?
(1) '어떤 관계로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2)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관계는 '부모 자식 사이의 사랑'인데,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3)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생명 관계가 있기 때문에 진실한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4) 하나님과 생명 관계가 이루어질 때,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진실로 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2. 생명 관계는?
(1)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것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2) 진실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3)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받은 너무나 큰 선물이기 때문에 실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내가 하나님을 찾아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이미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4)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진실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5)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주의 종들과 교우들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습니다.
3. 구원의 확신은?
(1)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체험을 통해서 뿌리가 내려져야 필요합니다.
(2) '체험을 통해서 뿌리가 내려진다'는 것은, 신비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3) 주일날 들은 말씀이 주간의 삶 속에서 성취되는 체험을 하게될 때, 잔뿌리가 내려져서 나무가 땅에 흡착되는 것처럼 구원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4) 말씀이 주간의 삶 속에서 성취되어지는 체험을 할수록 더욱 진지하게 기대감 속에서 말씀을 듣게 됩니다.
● 결론
나의 삶 속에서 말씀이 체험될 때,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인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이 하나님께, 가족들에게, 교우들에게, 이웃들에게, 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진실하게 이루어지고, 전도와 선교가 나오게 됩니다.
● 기도제목
◎ 말씀의 성취를 체험하며 구원의 확신을 갖도록
◎ 하나님을 진실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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