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더 나은 의(2)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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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더 나은 의라!' 이렇게 지난주에 이어서 제목을 삼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더 나은 의라!' 그래서 당장 중간에 것을 빼어먹고 세계복음화로 이어 나갔습니다.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계 복음화 하도록 언약 속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더 나은 의' 라는 것은 사실상... 그전에 우리가 해결해야 될 부분이 있어요. 세계 복음화는 더 나은 의를 잡고 나갈 때에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그 이름으로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런데 오늘 뭐가 도대체 더 나은 의냐? 더 나은 의가 뭐냐? 마태복음 오늘 5장 2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본문에서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때 당시에 바리새인들에게 의를 능가한다는 것은 상상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나은 의라는 것은 바로 굉장한 언약이요, 약속이요. 또 여기서 우리가 이것이 이해가 안 된다 그러면, 복음 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그런 문제가 됩니다. 종교라는 배경들을 이미 우리가 갖고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더 나은 의라는 것을 잘못 곡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의가 아닌 다른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바리새인보다 더 낫다는 것은 상상이 안될 정도로, 바리새인들의 의는 완벽할 정도로 그때 당시에 의에 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 소위말해서 '율법의 행위 가지고는 안 된다! 그것으로는 절대로 천국 들어갈 수 없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가 나와야 되느냐? 그래서 로마서 3장 20절에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쉽게 말해서 '바리새인의 의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실 육체가 없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더 깨닫고, 더 죄인을 만들뿐이지,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 다음에 31절에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율법 가지고는 안되니까, 율법 외에 바리새인의 의로는 안 되니까, 바리새인 이외에 더 나은 의가 나와야 돼요. 그런데 그 바리새인 의로 안 되니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의라! 이것은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나오는 율법과, 그 의와는 상관이 없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22절에 보면, '곧 그 하나님의 의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의! 그것이 누구입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라!' 말씀했습니다.

지난번에 서울에 올라갔을 때에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전부터 좀 하자고 이야기를 했어요. 인터뷰를 지난번에 약속을 하고 신문사에 좀 들렀었습니다. '상당히 목사님 만나고 목사님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이래요. 제가 잘 응하지를 않으니까! 제가 대답이, '내가 잘하면 잘한다 소리를 하기 위해서 신문에 오겠는데, 잘 못하는 사람이 잘한다 소리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한다 소리하기도 싫고 그래서 내가 신문사에 안 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후대들에 대해서 한마디 좀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더라 구요. 후대들에 대해서 한마디한다 그러면 제가 좋은 소리보다는 '좀 충고 내지는 뭔가 좀 격려보다도 따끔한 한마디를 하면 좋겠다!' 이런 배경가지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후대들이 , 흔히 젊은 사람들이 나이 많은 사람들 또 묵은 디이를 보고 뭐라 그러느냐? '율법! 율법!' 그러거든요. 그런데 '차라리 율법이 낫다!' 나는 후대들 보면서 진짜 걱정이 됩니다. 뭐가 걱정이 되느냐? 우리가 나이 많은 사람들이 율법에 찌들려 살아온 것처럼, 후대들은 방탕에 찌들려 살아갑니다. 어떤 면에서 방탕에 찌들려 가지고 방탕에 습관이 되어있는 그것이나, 율법에 습관이 되어서 율법에 찌들 린 것이나, 차라리 방탕에 찌들 린 그 사람들이 그들이 더 어렵다! 더 힘들다! 뭐든지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마음대로, 기를 살려준다고 마음대로, 마음대로... 그래서 노는 것도 마음대로, 먹는 것도 마음대로, 소리 지르는 것도 마음대로, 이렇게 하다가 보니까! 완전 방탕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규모를 갖게 된다! 그럴 때에 너무 생활 습성이 규모가 안 되어 있고, 정말 복음으로 지속해서 삶이 이어 지는 것이 어렵다. 그러니 후대들이 자기들은 뭔가, 젊은 사람들은 뭔가 '복음 받았으니 다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마라!' 오히려 더 어려운 시대요, 더 어려운 습관과 배경에서 살고 있으니까, 이점을 알고 우리가 교육도 해야 되겠고, 이점을 알고 좀 후대를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이러니까 듣는 우리 국장 님이 '참, 그렇다! 그래요.

그러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나는 뭘 쫌 느끼느냐 하면, 차라리 아이를 키울 때에 율법으로 키우는 것이 낮지, 자유 방임으로 키워 가지고 더 정신문제 만들고, 더 어렵게 만든다! 마음대로 하다가, 마음대로 하는 것으로 훈련시켜 놓았기 때문에 지금 학교나 교육이 안 되는 배경이 전부 이 배경이 아니냐! 이 땅에 율법이든지, 아니면 자유방임으로 키웠던지, 뭔가 이 땅에서 우리가 '내가 의롭다! 내가 할 수 있다!' 인간으로 생각하는 모든 수단방법, 그에 나오는 의는 절대로 구원 못 받습니다. 종교도, 그 다음에 반 종교도, 자유 방임도 되는 것 같지만 '안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그 종교배경이, 종교나 교육배경이 그 미국에 실존주의 '존 듀이'의 영향을 받아서 나왔던 것처럼, 그 사람이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존 듀이' 의 배경이 완전 그는 반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육이 완전 불 신앙 배경이죠. 반 기독교 배경이기 때문에 이런데서 마음대로, 마음대로 그러면서 인간만 강조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다 저버렸습니다. 여기에서 이 땅에 기본적인 축복과 은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던 사실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5장 20절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 이!' 땅에 인간이 노력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그런 모든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더 나은 의! 완벽한 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온 것 아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의, 더 나은 의가 아니면 안됩니다. 바리새인으로는, 바리새인의 의로는 안됩니다.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받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배경입니다.

지난 주일을 우리는 고난주간을 당해서 옛날처럼 뭔가 야단스럽게 고난주간을 홍보도 안 했고 떠들지도 않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이 '복음, 복음!' 이러면서 지금까지 이제 한 10여 년이 지나면서 늘 감사한 것은, 고난주간 당할 때마다 감사한 것은, 저는 옛날에는 고난주간 될 때마다 진짜 고난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난주간에는 꼭 금식하러 산에 올라가야 되니까! 여러분 말이 그렇지 지금 생각하면, '금식을 어떻게 했나?' 싶은 정도로 금식을 한 1주일 아니면 최소한 3, 4일 한3일 정도로 금식을 해야 되거든요. 금식을 할 때마다 한번씩 곤욕을 치릅니다.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이 왔다갔다하는 일 때문에 뭐 누워서도 먹는 것, 꿈에 잠자면서도 먹는 꿈을 꾸고, 뭐 먹는 것도 억지로 참으려고 그러니까!

그리고 한 주간동안은 모든 것에다가 내가 고난을, 예수님이 고난받았으니까! 내가 고난을 받아야되겠다는 이런 차원에서 지금까지 고난주간을 겪었거든요. 우리 교회도 공식적으로 지난 아마 금요일에는 공식 금식을 선포했을 겁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 아무래도 1kg은 빠져 가지고 이번 주일 참여를 해야 됩니다. 왜? 하루를 금식해야 되니까! 그런데 제가 가만히 얼굴을 보니까, 마음대로 잡수고 마음대로 오신 것 같아요. 다 복음의 은혜인줄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가 도와 드릴수도 없습니다. 지금 저 어저께도 신문을 보니까, 국민일보에 그런 기사가 나왔데요. 어느 나라인지, 스페인이던가 또 왠 그 사람이 예수님처럼 비슷하게 가시 면류관을 쓰고 또 십자가에 진자 못을 박아요. 진짜 못을 박아 가지고,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예수님의 고난을 나도 진다고 그러는데 한번 받아합시다. "인간은 예수님이 지신 고난은 절대로 대신할 수 없다!"

여러분들이 '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나도 진다!' 전부 거짓말입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어떻게 집니까! 주님은 속죄의 고난이요. 대속의 고난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해서 지신 고난입니다. 그것은 죄 없으신 분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하고, 완전히 인간이 하는 오직 유일하게 누구만? 예수그리스도 그분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에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지는 십자가는 개인의 잘못이나 개인의 부족 때문에 지는 십자가지 그것은 십자가라 붙일 수 없어요.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주님의 십자가를 진다고... 하기야 그렇게 하면 위로는 좀 받을 수 있을지 모르죠. 그러나 그것은 망언입니다. 하나님 앞에 도저히 통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지난 한 주간 여러분과 저의 모든 고난을 누가 대신 졌어요? 우리 예수께서 대신 지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내가 '아프다! 슬프다! 뭐 괴롭다!' 실제적으로 당하지 않는 사람이 이런 말하면 좀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실제로 내가 아픈 것, 고통스러운 것, 괴로운 것 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지시고, 주님께서 내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아픔을 가져가셨습니다. 다 가져가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누리면 될 것뿐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은 내가 고통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자꾸 이미 주님이 지신 십자가에 내 모든 고통과 괴로움과 죄의 대가를 다 해결하셨는데도 자꾸 자기가 지겠다고 이것이 우리 불 신앙이에요. 우리가 체질적으로 불 신앙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미 구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찍이 말씀 하셨는데 이사야 53장 4절에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 슬픔과 우리 질고를 지셨다!' 그랬거든요. 그리고 5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여러분과 저에게 모든 허물을 예수께서 찔림으로 대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어떻다 구요? '나았습니다!' 해결 받았습니다.

'나았다!' 그랬는데도 자꾸 '아니라!' 그러는 것이 여러분 불 신앙이거든요. 자꾸 우리 주님께서 다 십자가에서 해결했다는데, 나는 '아니라!' 그러고 자꾸... 그게 이상한 것은 이 불 신앙이 들어오면 생각이 합리성이 안돼요. 이상하게 자꾸 해 깔리는 것 같아요. 이런 문제들이 지금 우리가 옛날에 그런 어떤, 이 축복과 은혜를 우리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셨는데도, 그걸 해결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진다 그러고, 뭔가 아프면 아픈 데로 계속 붙들어 안고 그 예수께서 해결하신 사실을 믿고 우리가 고백하지 못하는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 신앙이요. 또 이로 통해서 우리의 삶에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이미 해결하신 저주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는 삶이 현실입니다.

말로서 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 예수께서 이 일을 실제로 이루어서, 실제로 여러분과 제게 이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사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여러분 우리의 모든 질고와, 죄악과, 저주와, 재앙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완전히 매장했습니다. 그걸 다 십자가에서 짊어지시고 죽어서 어디까지? 무덤까지 가지고 내려갔습니다. 여러분 괴로움과 고통이 어디에서? 무덤으로 완전히 장사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서 끝났다! 그러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바로 이 축복된 역사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죽으셔 가지고 다 해결하시고는, 여기서 끝나버리면 여러분과 제가 죽었다는 것으로 끝나면, 그 다음에는 의미가 없어요. 여기서 여러분과 제가 오늘 바로 부활절 예수께서 다시 무덤에서부터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절, 그리고 더 나은 의는 다른 말로 해서 받아합시다. "생명의 의, 새 생명의 의!" 더 나은 의, 새 생명의 의입니다. 생명은 이 생명의 의는 바로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바로 어떤 분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내 안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생명의 역사가 내 안에 왔습니다.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기도응답이라는 것이 여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 능력의 근원이, 그분이 내 안에 오셔야 내가 그대부터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뭐가 나옵니까? 기적이 일어나고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역사가 그때부터 나오게 되는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일을 주께서 이루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축복에 역사가 너무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오고 오는 세대에 이 축복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부활절 날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냥 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활절 날 기념예배 드린다! 그럴 때에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여러분과 제게 뭐가 된다 그랬습니까? 생명의 의가 내 안에 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랬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도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생명의 의를 받고 이 생명의 의가 정말 생명의 의로 누리고 또 실제로 바울에게 사실상 그 생명의 의를 붙잡고, 그 의를 효과적으로 증거하고 그 안에 있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이 바울 서신에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빌립보서 3장 10절 말씀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 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이 벌써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의를 받았습니다. 어디에서? 다메섹 도상에 올라갈 때에 부활의 예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완전히 바꾸어 졌습니다. 그때부터 이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일생동안 계속해서 이 부활의 생명에 이 생명의 의를 누리기 위해서, 전심을 다해서, 그 부활에 사실적인 의미를, 그리고 '그 부활에 사실적인 능력에 실제로 참여하기를 노력했다!' 그랬습니다. 이 빌립보서에 나온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서 12절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할렐루야! 지금 의를 받았습니다. 의를 누리기 위해서, 의를 쟁취한다기보다도 이미 받은 사실을 실제로 누리기 위해서 그리고 또 이 일이 이제 안에서 이 땅에 있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장차 하늘 영광에서 완벽하게 완성되기 때문에 이 일을 위해서 계속해서 목표를 두고 쫓아간다! 그랬습니다.

이 배경 속에는 바울에게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 자였습니다. 율법에 완벽하다 할 정도로 율법으로 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참된 의를 누리고, 이 참된 의를 누려 나가는 일에 장애 되는 악한 생각이나 과거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이 사실이 해결되기까지 무한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받아합시다. "이미 받았습니다. 이미 얻었습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이다! '이미 받았습니다!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누리면 됩니다.

누리고자 하는데, 이것을 다 장애 하는 요소들이 우리에게 너무 많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 교회에서 계속 대예배 시간에 말씀해온 배경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이것을 이제 누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이제 그 신학 원이라든지, 그 다음에 전도학교 훈련을 받았던지, 그 다음에 70인 요원이라든지, 그 다음에 또 미션 홈이라든지, 지금까지 쭉 다락방 훈련이라든지 이런 훈련들을 계속해서 받아왔던 배경이 뭐냐하면, 내가 전도한다는 배경도 있지만, 개개인이 생명의 의, 이미 주신 생명의 의를 누릴 수 있는 일에 순수한 복음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순수한 복음 속에 섞여있는 내 생각과 악한 습성들, 불 신앙들을 제하여 버리는 훈련이 바로 이...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뭐 '우리 신학 원에 와라!' 뭐 '들어와라!' 그리고 '훈련받아라!' 그럴 때에 뭐 '전도하기 위해서 훈련받아라!'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 여러분 가정에 이 축복된 역사를 나와 내 후손들에게, 실제로 완벽한 복음으로, 순수한 복음으로 누려지게 하는 일에 장애 되는 요소를 다 제하여 버리는 훈련이 바로 이런 훈련입니다. 이런 훈련이 되어야 여러분이 사실적으로 축복된 역사를 이루어 나가거든요.

우리가 잘 압니다. 훈련받은 군인하고 훈련받지 않는 군인하고는 너무 차이납니다. 여러분 지금 군대 갔다 온 사람들, 군대가지 못한 사람들, 금방 나타나더라 구요. 군대 간 사람들은 훈련을 받고 군대 갔습니다. 훈련을 받지 못하고 군대를 안 간 사람들은 무엇에 표가 나느냐 전쟁이 났을 때에 금방 표가 납니다. 진짜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금방 표가 납니다. 여러분 진짜 여러분 영적 싸움을 해야 이긴다! 그러고 영적 싸움을 해야 여러분 가정과 개인의 삶에 승리한다는 사실은 너무 잘 아는 사실인데, 영적 싸움할 수 있는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 훈련을 받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개개인이 다락방을 열고 그런 다락방을 통해서 어느 정도 성장되면, 그 다음에 합숙훈련에 보내고, 그 다음에 팀 합숙에 보내고, 그 다음에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초기에 했던 합숙과 팀 합숙, 그 다음에 팀 합숙하고 난 다음에 미션 홈, 이런 여러 가지 훈련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이제 교회 적으로 좀 묶어 가지고 교회 안에서 또 훈련을 좀 시켜야 되겠어요. 왜? 그래야 개인, 개인이 '아,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큰 축복이구나! 정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되는 만큼 나와 내 가정에 복이 되는구나!' 이 사실이 체험이 되게 됩니다. 안 그러니까 말만 듣고 늘 그러니까, 이것이 점점, 점점 시간이 가니까 뭐 훈련받아도 그렇고, 뭐 늘 이런 시각으로 자꾸만 뭔가 침체가 되는 것 같아요.

처음 우리 교회에서 얼마나 힘있게 일어났습니까! 이 운동이, 그런데 그런 운동들이 삭으러 드는 배경이 뭐냐 하면, 개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원색적이 복음이, 원 복음이, 순수한 복음이 순수하게 이어져야 되는데, 잡생각, 내 생각으로 옛날에 자꾸 그런 생각을 섞어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으니까 누려지는 이 사실이 안 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조금 이런 시간을 통해서, 훈련을 통해서 무엇을 해결해야 되느냐? 그 다음에 말씀 통해서 여러분 무엇을 해결해야 되느냐? 자기도 모르게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이 일부러 '나는 불 신앙하겠다!' 그렇게 해서 불 신앙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쫙 깔려있는 악한 불 신앙들이 너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신학 원에서 이 강의를 할 때에 뭐라 그러냐 하면, 이 불 신앙 문제가지고 '악질적 불 신앙!' 이라 그랬습니다. 악질적 불 신앙 이게 우리가 너무 깔려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래서 이것이 너무 깊이 깔려 있어 가지고 어디에 있었느냐? 무의식적으로 내가 표출은 안 되어 있지만, 잠재의식 적으로, 그 다음에 어릴 적부터 가정에 배경을 통해서 이것이 쭉 깔려 있는 것, 이런 것들이 순수복음을 받았지 만은 복음으로 누려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이런 것들이 복음이 들어왔으나 복음과 섞여 가지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도록, 불 신앙하도록 자꾸 방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름은 모든 문제 해결 자고, 모든 사실이 열려지고, 먼저 본인이 축복부터 먼저 받는데 그 사실이 안 되니까! 자꾸 뭡니까? 의심이 생기고, 안 되니까! 기도응답이 안 되죠.

그러니 여러분 예수 믿고 강단에서는 '된다!' 소리하는데, 다른 사람은 '된다, 된다!' 그러는데 자기가 자꾸 안되니까, 나오는 것이 뭡니까? 정신문제가 나오고, 갈등이 나오고...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안 했습니까, 예수 믿고 기도 응답이 안 오면 반드시 정신병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누가 그러더라 구요. 제가 60%이상이 기독교인들이라고, 종교인들 대상으로 했을 때에 우울증환자가 그렇다! 그러니까, 뭐라 그러느냐 하면, 대구 시내 정신병원인데 들어가 보니까, 거기는 60%정도가 아니고 거의 다 기독교 환자들입니다. 기독교입니다. 교회 다니는...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그 사람이 분석하는 것은, 물론 아파 가지고, 정신적인 문제가 와서 이제 고치려고 교회에 왔겠죠. 그래서 다 교회 왔지만 안 고쳐져서 그까지, 정신 병동까지 갔던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좋게 해석을 하더라 구요. 어쨌든 거기는 60%가 아니고 거의 다 기독교인들이거든요. 다 교회 한번씩 왔더랍니다. 와 가지고 못 고치고 정신병이 되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우리 불 신앙의 배경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깔려 있는 이런 배경들...

그 다음에 체질화되어 있는 조금 전에 말씀했던 것처럼, 지금 아이들에게는 그 '엔티노멘!' 소위 말하자면 무 율법입니다. 그 어떤 규모라든가, 막 마음대로 성장하려고 하는 그런 엔티노멘! 말하자면 방탕에 찌들려 있고... 그러면 체질적으로 어디냐? 조금 어른들은 율법 화됩니다. 체질적으로... 그래서 조금 어린 아이들은 여러분 잘 기억해 놓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 고치려고 하면 체질적으로 '엔티노멘!' 얼른 보면 이것이, 무 율법이 얼른 보면 복음과 비슷한 것처럼 느껴질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유다! 원래 율법에 찌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자유 함을 얻는다! 그랬을 때에 얼른 보면 무 율법이라는 것을 가지고 복음과 비슷한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초기에 이 이야기가 나왔을 때에, 뭐 술 먹고 담배 피는 것이 마치 복음 깨달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내가 봤습니다. 지금 현재 어린 후대들에게 나오는 문제입니다. 이 배경을 두고서 뭐냐하면, 벌써 '체질화 된 방탕! 체질화된 율법주의!' 이것이 결국은 악질적인 뭐가 나옵니까? 불 신앙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았지 만은 순수 복음을 막아 놓습니다. 복음 받은 복음 가지고, 그 무 율법과 복음을 섞어 가지고, 복음인체하고 축복과 은혜를 다 가로막아 버립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될 시급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마 개개인이 기도할 때에 '내가 뭘 하겠다!' 이전에 이 사실부터 먼저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되죠. 그래서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가 가정 배경이나 여러 가지 배경 보면 영적 문제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이면 영적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영적 문제 가지고 교회 들어왔을 때에 자연적으로 나오는 것이, 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비주의 운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그래서 여러분 영적 문제가 들어오게 되면요. 뭔가 영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열심히 뭔가 하려고 한다던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영적 문제가 동반된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빠져버리게 되는 이런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나오게 되죠. 이것이 여러분 순수복음을 막아 버립니다.

저는 그 기독교 방송을 가끔 들어보면서 느끼는 것이 오늘 아침에도 잠깐 부활절 찬양예배를 드리는 것을 내가 보면서 뭘 느끼느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이 찬송 부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백 번, 천 번 울어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옛날에는... 얼마나 울었습니까! 아마 우리 교인들 이 찬송 가지고 울었다 그러면 다 느낄 겁니다 만은, 산에 갈 때마다 내가 최소한 2시간 손들려 가지고 '나 같은 죄인' 이 찬송 부르면서 다 울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저녁 2시, 3시, 4시까지 막 울면서 기도하고... 그때는 좀 시원해요. 돌아와 가지고 변하지 않았어요. 똑같아요. 지금까지 안 변해! 제가 그 찬송 부르면서 막 울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고생이다! 울어보니 뭐하노...' 실제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 자다! 진짜 믿어야 됩니다. 진짜 믿음이 와져야 되는데, 그 확신이 와 져야 되는데 그게 안 되고 있어요.

그 덕분에 감상적인 그런 그 설교도 그렇고 감상적인 생각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감정이 좀 메말랐나 싶었는데, 이 땅에는 감정 가지고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감정이 메말랐던 게 아니고, 맨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제는, 전에는 뭐 걸핏하면 막 찬송 부를 때에 울고 하는, 그것은 감상적이지 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 이럴 때에 맨 정신이 와야 돼요. 감성이 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나도 모르게 신비주의 감성과 복음을 섞어버렸어요. 잘 믿는 것 같은데, 사실이 안 되어요. 복음인체 하는데, 복음은 아니에요. 여기에서 누린다는 것이 안 됩니다.

이런 배경가지고 우리가 실제적으로 가문에 있었던 영적 문제가 안 많습니까! 우리 한국인들은 다 안 있습니까! 우상 숭배하죠. 특별한 사상을 가지고 있죠. 그 다음에 종교적인 행위가 되어 있죠. 그뿐 아니고 제가 여기서 조금 드리고 싶은 것은 재난과 재앙이 계속해서 그 가문에 계속되는 가문들! 예를 들어서 국가에 어떤 반역행위를 했다! 그러면 그 가문에 반역행위를 한 그 가문 속에 있는 자녀들은 영적인 문제가 그로 통해서 심각하게 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그 고 박정희 대통령 자녀들 같은 경우, 그 문제가, 엄청난 그런 가문에 문제가 생기면서 자녀들이 심각한 영적이 문제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가정에 이런 비슷한 것이 뭔가, 어떤 조상들로부터 어떤 행위를 통해서 후손들이 지속해서 영향을 받는 문제들, 우리는 좋은 가문이다! 나쁜 가문이다! 할 것 없이 이런 가문에 배경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 이걸 조금 보면 말하자면 그 점을 치는 그런 가문에 배경이라든가, 아니면 또 특별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든지, 특별한 어떤 그 관직을 통해서 가지고 오는 배경이라든지, 이런 것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재난에 배경이 되는 것이죠. 그렇다 그러면 여기서 피할 수 없는, 전부 다 갖게 되는 것이 어릴 때부터 여러분과 제게 가지고 있는 상처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상처가 다른 것이 없어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이 간단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게 엄청난 상처라는 것을 시간 갈수록 더합니다. 몇 일전에 희락이가 와 가지고 지 어머니가 부산에 70인 2차 훈련받으러 갔거든요. 그러니 이놈이 지 어머니 없이 이틀 밤을 우리 집에서 자는데 잘 놀고 잘 자요. 처음에는 이걸 가지고 집중 기도하고 다 그랬습니다. '밤에 잠도 안자고 하면 어떡하나!' 해서 가정예배 드릴 때에 기도 제목을 내 걸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너무 잘 자요. 잘 자고 너무 잘 놀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요. 엄마 생각이날 때에 '엄마, 엄마!' 해 놓고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놈이 흐느끼면서 울지는 않아요. 흐느끼면서 아이가 '엄마, 엄마!' 하고 이게 보고 싶은 것을 다 억눌려 참는 모습을 내가 봤어요. 그게 이제 두 돌 조금 지났는데... 그리고 저희 어머니가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이놈이 땡깡을 지기는데, 그래서 내가 땡깡 지기는 모습이 시끄러워도 그 모습이 슬픔을, 그리고 엄마를 보고 싶어서 참는 모습보다 그게 보기 더 좋더라 구요. 참는 모습이 더 보기 싫어요.

내가 왜 이런 이야기 드리느냐 하면요. 어머니가 잠시 떠나 있는데도 그로 통해서 오는 상당한 영적 문제가 나오겠다는 것이, 이게 엄청난 문제가 나오겠다는 것이 어릴 때부터 벌써... 그러니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어떤 상상이 왔느냐 하면, 저 만약에 '지 어머니가 못 돌아온다!' 그러면 저놈이 어떻게 되겠느냐? 불안이 생기는 마음도 또 들잖아요. 그러면서 내가 일찍이 어머님이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때 돌아 가셨거든요. 그때 내가 생각이 나면서 참 어릴 때부터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잘 자란다! 그래도 간단한 것이 아니구나! 영적 문제가 깊이 내재되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형님 밑에서, 형수 씨 밑에서... 그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그로 통해서 오는 영적 문제가 생겨 버렸습니다. 영적 문제!

지금도 특별히 오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에 저 산에 길이 꼬불꼬불 이렇게 안 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한정 없이 그 길을 따라서 멀리 어디 가고 싶은 충동이 와요. 그것은 당연히 그때 느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에 그때 고등학교 때니까, 해 그늘이 내려앉을 때에 꼬불꼬불 멀리 산길이 보이잖아요. 보이면 그리움 같이 나왔던 그때 그 배경이 지금까지 있거든요. 상당히 제가 시인이 되었으면, 상당히 감상적인 시를 많이 섰지 싶어요. 목사가 되어서 될 수 있으면 감상을 없애려고 애를 쓰니까, 그런 게 없어지죠. 옛날에 시를 쓰고 글을 쓴 게 이만큼 있었는데 다 내버렸어요. 보면 거의 감상적인 것을 써 놓았어요. '잎이 팔랑 팔랑 떨어진다...' 이런 식이지, 그 잎이 떨어지면, '떨어졌다!' 끝나 버리는데 사상이 되어 가지고 이런 시가 아니고 뭔가 감상적인 것을 주로 섰더라 구요. 그걸 우리는 시로 알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뭘 말하고 싶으냐? 어릴 때부터 받은 가정에서부터, 사회에서부터 받은 상처들이 뭡니까? 나와 여러분에게 악한 불 신앙을 만들어서, 복음이 들어왔으나 복음을 누릴 수 없도록 만드는 배경들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이 옛날 어릴 때로 돌아가려고 하면 힘들 것 아닙니까! 그러나 조용히 한번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이러니까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렇게 오는 과정에서 부부가 되었다! 이 상처 때문에 부부간에 생활이 잘 안됩니다. 가족관계가 잘 안됩니다. 시기와 갈등이 유난히 한국 사람이 많습니다. 고부간에 갈등, 부부간에 갈등, 부모 자식간에 갈등, 시기, 상처! 유난히 한국 사람이 많아요. 유난히 어릴 때부터 상처들이 많은 것이 한국에 배경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이런 것이 전부 영적인 배경으로, 순수 복음이 임했을 때에 이 복음과 섞어 가지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복음은 복음으로 누려져야지, 복음을 다른 것으로 섞어서 누려지게 될 때에 거기에 저주와 재앙이 떠나지 않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에 자연적 오는 것이 뭐냐하면, 우리도 모르게 여러분 생활에 무기력해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가만히 절대로 뭔가 일하고 싶지 않고, 그 다음에 생각을 딱 했을 때에, 뭔가 결정을 딱 했을 때에 그게 딱 결정이 서면 결정한데로 밀고 나가야 되는데, 한국사람처럼 결정이 왔다갔다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랬다, 저랬다! 이랬다, 저랬다! 이게 전부 뭡니까? 영적 배경으로 오는 이 뭔가 이렇게 결정해도 결정이 이 정확하지를 못해요. 왔다갔다하고 그러니까!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아내도 왔다갔다하지, 남편도 왔다 갔다 하지, 자식도 왔다갔다하지, 가정이 전부 왔다갔다합니다. 복음이 누려지지 못해요. 웃을 일이 아닙니다.

잘 보세요. 여러분 그러니까 문제는 뭐냐? 미련한 생각과 행동이 자기도 모르게, 미련한지도 모르게 나오고 또 그뿐 아니고 이러니까 나오는 것이 한국 사람 특성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통해서 설치는 행동이 자연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연적 나옵니다. 여러분 한국 사람만큼 조급하고 설치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옆에 사람 얼굴을 보세요.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게 바로 내 생활 속에서 너무 너무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이런 생활과 이런 것이 나와 있다! 그러면 그래도 뭔가 신앙생활 한다! 그러고 그러면서도 이게 나왔다! 이러면 다른 사람이야, 우리 평신도들이 말할 것도 없지 않느냐! 어떤 면에서 평신도들이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도 한국적인 배경에는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남달리 악한 불 신앙이 참 복음을 받았으나 복음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배경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지금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해결해야 됩니다. 딱 한가지 '예수님은 모든 문제 해결 자다!' 이 사실을 언약을 잡고 그 다음에 '이것을 누리지 못했던 배경이 이러한 배경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치유가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뭐가 나옵니까? 영적 싸움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영적 싸움이 나오기 시작하면 금방 안 되는 것 같아도 그것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뭐가 옵니까? 구체적으로 내게, 여러분에게 응답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평안과 안식이 응답 없이는 평안이 안 나옵니다. 평안과 안식이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더 나은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납니다.

☞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0).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 나은 의'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의가 아닌 다른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래새인과 서기관들의 의, 즉 인간이 해보려고 하는 모든 노력으로부터 나오는 의로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입니다(롬3:20-22).


[2] '더 나은 의'는 새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 인간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은, 유일하게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지실 수 있는 대속의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고난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신 것으로 인하여 감사할 따름입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나았으며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낫지 않았다고 우기고, 해결되지 않았다고 우기며 고난을 떠안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고, 무덤에 매장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고 끝내지 않으시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더 나은 의'가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새생명의 의'요, 이 새생명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이 내 안에 오셨습니다. 이 때부터 그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의 역사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 이렇게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역사가 너무나도 위대하기에, 오고오는 세대에 잊지 않기 위해서 부활절에 기념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는 새생명의 의가 내 안에 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3] 새생명의 의를 누리며 증거하기 위해 악한 불신앙을 제거해야 합니다.

☞ 이 새생명의 의를 실제로 누리며 증거하기 위해서 바울은 부단히 노력했습니다(빌3:10-14). 바울은 율법주의자였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를 누리는 일에 장애되는 악한 체질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해결하기 위
해 무한히 노력했습니다.

☞ 우리도 여러 가지 훈련을 받으며 순수한 복음에 섞여 있어서 장애되는 요소들을 제거해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깔려있는 체질화된 방탕과 율법 주의의 악한 불신앙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훈련을 통해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로 믿고, 우리의 문제를 발견해야 합니다.


▣ 언약 잡은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새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의로 함께 계심을 날마다 누리며 증거할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날마다 나의 악한 불신앙을 발견하여 싸워 이기게 하옵소서. 부활하여 더 나은 의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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