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성찬 참여의 준비
2004-12-05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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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여러분들이 수시로 변하는 제 의상에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너무나도 중대한 성찬예식을 거행하고자 합니다. 이 성찬예식에 우리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중요한 말씀을 했어요. 바로 준비되지 않으면, 30절에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절)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절)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절)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절)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여기에,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다!' 저주와 재앙에 총체적인 말을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성찬예식에 바로 참여하지 못할 때에 이런 결과가 온다고 굳이 말한다면, 오늘 성경에서 성찬예식이라는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아마 '우리 생애에 신앙생활과 또 축복의 역사는 사라진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찬 예식은 정말 중요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 성찬 예식을 날마다 하다 보니까, 차려놓고 어떤 사람은 일찍 와서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하고, 그것도 요즘처럼 냄새만 맡게 하는 포도즙을 주는 게 아니고, 그때는 떠다놓고 바가지로 퍼먹었으니까! 미리 온 사람들은 주량 것 도가 넘치도록 먹어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그래서 취하고, 늦게 온 사람들은 먹을게 없어... 이래서 성찬예식이 오히려 판단 받는 예식이 되어 버리고, 판단 받는 모임이 되어 가지고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참여하는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도, 참여할 수 있는 준비 내지는 참여에 구체적인 의미를 성경 말씀을 통해서 드리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찬예식을 그렇게 중요한 예식으로 알고 참여하는 요즘은, 어떤 면에서 너무 일방적이고 형식적이 되어간다! 이것이 평가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큰 교회에서는 1년에 한번씩하고, 우리 교회는 1년에 두 차례씩! 그것도 시간이 바빠서 금방 그냥 지나가고, 어떤 면에서 떡 들고 기도할 기회도 없이 그 다음에 잔이 나오고, 그러나 그렇게 참여하는 바쁜 의식 속에서도 정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고, '도대체 왜 내가 성찬에 참여해야 되며, 성찬에 참여하는 의미가 뭐냐?' 이것을 바로 깨달으면 축복과 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의 바탕 위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약속이 되어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 받고 성찬 예식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함께 있으면서 참여하는 이런 일에, 참여하는 자는 떡과 포도즙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일에 참여하는 자는 떡과 포도즙으로 영적인 임재를 기다리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정말 성찬에 참여하는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그런 기회가 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불행들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은 '잘 믿는다, 못 믿는다!' 상관없이 이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불행은 누구나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불행이 왜 오며, 어디서 오느냐? 이것이 잘 이해가 안되어요. 사람이 적은 사건만 생겨도 어렵습니다. 또 그 사건이 왜 왔는지 모르면, 더 어려운 거죠. 그래서 병원에 가서 찾아보고 이 사건과 이 일이, 이 병이 왜 왔느냐? 이게 이해가 안되면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병실의 제 침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답답해하는 것은, 아프기는 아픈데 원인을 몰라요. 이게 제일 어렵습니다. 그래서 검사는 하는데, 원인을 몰라요. 그러면 그 병은 무슨 병입니까? 죽을병입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런데 지난번에 입원했을 때에, 제 옆에 73세 정도 되는 어떤 노인 한 분이 입원을 했습니다. 이 분이 입원을 했는데 얼마나 건장하냐 하면, 키도 나보다 훨씬 크고, 아주 장대한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젊을 때에 정말 돈도 있었고, 이제는 노인 되어서 자기 자녀들이 다 성공을 해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젊을 때부터 성장하면서 성공했고, 또 연세가 많았어도 자녀들을 통해서 이 성공에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이 고통과 괴로움이 오는 것에 대해서 왜 오는지 원인을 몰라요. 그래서 고통이 무슨 고통이냐 하면, 이 사람이 가슴이 눌리고 답답해 가지고 견딜 수 없는 겁니다. 그분이 입원하신 첫날, 방에다가 있는 전등은 다 켜놓는 겁니다. 환하게 켜 놓았어요. 왜? 조금이라도 어두우면 답답해서 못 견디는데, 그리고 밤에 자다가 '어...' 거리면서 일어나 가지고, 그렇지 않아도 잠이 안 오는데, '어...' 거리면서 일어나 가지고 조금 누웠다가 또 일어나고... 그게 뭐냐하면, 가슴이 답답해서... 그게 충분히 이해가 돼요. 뭐냐하면, 내가 당장 보니까 노이로제 증상이에요.

그러면 이 '어...' 거리고 가슴이 답답하다 그것은 뭐냐하면, 전 객실이 전부 폐쇄되어 있는 것 갔으니까, 죽을 지경이죠. 가만히 못 있습니다. 옷도 벗어버려야 되고, 그런데 일어나 가지고 어디 가느냐 하면, 12시쯤까지도 잠을 못 잤어요. 계속 '어...' 거리면서 일어나고, 또 누웠다가 '어...' 거리면서 일어나고, 이래서 자기가 나도 잠 못 자는 것을 보니까, 부인이 이 남편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더라 구요. 밖으로 나가서 5시간 동안 밖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이 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불행하다! 이런 일이 왜 왔느냐?' 그게 이해가 안되고, '이 병은 자기가 가슴 확장수술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계속 검사를 하는 겁니다. 검사를 하는데, 제가 옆에서 들었잖아요. 검사 결과를 가져오신 의사가 '안되면 이걸 다시 수술을 더 해야 되겠다!' 그러고 그러시는데, 수술 더하면 다 해결될 줄 알고 있는 이런 시간이 되어 있는데, 오시더니만 하는 말이, '수술하지 마십시오! 돈만 들고 아무런 덕이 안됩니다!' 그러거든요. 그 사람에게는 절망이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첫 번에 가슴을 수술하고 찍은 초음파 사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걸 가만히 듣고 속으로 옆에서, '그게 가슴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저 영감을 붙들고 복음을 전해야되겠다!' 그런 중에 마침 제가 수술하러 나갔을 때에 저희 집사람이 복음을 전했어요. 복음을 전했는데, 그 부인은 어느 교회에 잘 다녀요. 지금까지 그렇게 교회에 가자고 해도 죽어도 안 간데요. '교회가 뭐냐? 내가 잘 하면 되는 것이지!' 결국은 뭐냐하면, 내가 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안 믿어요. 철저하게 잘 살았어요.

그런데 연세가 많고, 지금에 이르러서 결국은 모든 삶과 모든 축복과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여러분 밤에 잠을 못 자고, '어, 어...' 그러고 나다니는 사람들의 심정을 아마 겪어보지 못하면 이해가 안됩니다. 여러분 영적 문제가 이미 왔습니다. 노이로제가 와 버렸어요. 노이로제라는 것은 그냥 인간적인 장난이 아닙니다. 완전히 흑암이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왔다갔다하는 동안에도, 한번도 고개를 들고 웃는 모습을 못 봤어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고... 한번도 고개를 들고 웃는 모습을 못 봤어요. 왜 그러냐? 고개를 들고 웃을 수 있는 행복이 없어요. '이 괴로움과 고통이 어디서 왔느냐? 왜 왔느냐?' 그 영감은 몰라요.

그러면서 지금도 괜찮다는 겁니다. 가슴만 치료받으면 낫는다는 겁니다. 열 번 천 번 치료받아도 안돼요. 분명히 의사가 와서 말해줬거든요. '당신은 처음 수술 받았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가슴, 즉 심장은 괜찮습니다!' 그래도 그걸 긍정하지 않으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 와서 들으니까, 우리 집에서 복음을 제시했는데, '절대로 안 믿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부인이, '이 사람이 예수 믿으라고 하는 소리는 옛날부터 질색이래요...' 그게 뭐냐하면, 자기의 행복과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의 행복이 허무와 고통과 재앙과 저주로 결박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말이 그렇지 저는 그걸 좀 이해해요. 왜냐하면, 아픈 동안에 노이로제 증상이 온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완전히 절망이 와요. 그리고 이것은 의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영적 사실이기 때문에 다른 걸로는 해결이 안됩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참 어려울 때에, 이 문제가 올 때에 오직 누구를 붙드느냐? '예수 그리스도! 주 예수 그리스도!' 발걸음마다... 그래가지고 어느 날 해결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해결될 때의 기분, 감사, 감동은 말할 수 없죠.

혹시 여기에 그걸 앓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모든 절망과 근심과 걱정들이 완전히 덮여 쓰여졌습니다. 그때는 나도 고개를 들고 잠시간도 얼굴을 펼 여가가 없어요.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이 하고 병이 하는 것이 아니고, 흑암의 세력, 사단의 배경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 한 문제는 심각하게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구체적인 사건 앞에서, 그러면 '인간이 왜, 불행하고, 왜, 어렵고, 왜, 힘드느냐?'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버리면 되는데, 만나고 싶어도 안 된다! 이겁니다. 오늘 여기에 계신 분들중에 혹시라도, '하나님 만나고 싶다!'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증거 주십시오!' 그런걸 안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게 마음먹고 있지만, 여러분 원천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게 불행 중에 불행입니다.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왜, 그러냐? 창세기 3장에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없어요. 원래 인간이 어땠느냐? 하나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첫 번에 하나님이 인간을 형상대로 자기와 같이 창조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창조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원죄라 그럽니다. 그 원죄는 나면서부터 누구든지 타고납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

그래서 '그 영은 우리가 죽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영은 죽었다! 하나님을 떠나는 그 순간 죽었다!' 그랬습니다. 왜, '죽었다!' 그랬느냐? 바로 하나님을 떠난 순간에 사단의 영이 그 영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부터 재난과 저주와 고난으로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런 무서운 사건에 빠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못 만나면 죽었습니다. 살아서 뭐 다니고 과시하는 것 같아도 죽었습니다. 혹시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이, '하나님은 무슨, 내 주먹을 믿어라!' 그러면 속으로, '야, 이 불쌍한 사람아 죽었구나!' 다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걸로 끝나느냐? 죽었다는 그 배경에는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원죄로 말미암아 흑암과 사단의 역사가 그에게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영의 역사가 어떻게 되느냐? 보통 문제가 아니죠. 이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비록 떠났지만, 그때에 행복과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인간의 영은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고향이라는 말이 보통으로 들렸는데, 제가 이 몸이 안 좋고 아주 어려울 때는 차를 가지고 나 혼자 밖에 나갑니다. 나가면 운전은 할 수 있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고향으로 가요. 코끼리가 죽을 때는 자기가 난 데서 죽는다나 뭐 그러는데, 나도 모르게 고향으로 가요. 고향에 사람을 만날 약속도 없고, 계획도 없는데 갑니다. 가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고향 산천을 한 바퀴 쭉 돌고 돌아와요. 사람도 안 만나요. 그것만해도 뭐냐? 안위가 됩니다. 그래서 '이 고향이라는 말이 이렇게 시간이 갈수록 진짜 깊이 박혀있는 못처럼 힘이 있구나!' 새삼스럽게 그렇게 느껴 보았습니다.

우리 영혼이 어렵고, 힘들고, 소위 어려울수록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고향이 그립습니다. 그때의 행복이 나도 모르게 그립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종교성이라 그럽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디로 표출되느냐? 섬기는 일! 우상 섬기는 일, 귀신 섬기는 일, 조상 섬기는 일! 나는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여러분 조상 섬기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건 쓰여 가지고 하지, 보통으로는 되는 게 아닙니다. 왜? 이것도 어떤 면에서 하나의 종교성에서 발휘되는 문제입니다.

어쨌든 뭔가 재난과 재앙과 저주가 지속되는 한 더 영적인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간절합니다. 이 본향이 간절한 그런 배경에서 하나 우리에게 불행이 있다고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종교성을 가지고 믿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뭔가 예수 믿고 하는 일, 열심 내는 일에 철저히 할 수 있습니다. 적고 큰일에!

저는 어머님을 생각하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요즘 우리 새벽기도 오는 사람들이 바쁘면 세수도 안하고 눈꼽 달아서 오는데... 그 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어떠냐 하면, 바로 개울을 하나 건너는데, 아무리 한겨울 추울 때도 개울을 건너기 전에 얼음을 깨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찬물로 이렇게 쓸어 넘기고, 그래가지고 가시더라 구요. 그리고 철저합니다. 신앙생활이 철저합니다.

여러분 지금 철저하다는 말이 이해가 잘 안되겠습니다 만은, 나한테 연보 돈을 줬다! 그 연보를 줬는데, 만약에 내가 헌금을 안 했다! 그 날은 제삿날입니다. 이게 보통 섬세하고 철저한 게 아닙니다. 그렇게 했었던 배경 속에 하나가 뭐냐하면, 종교성입니다. 나는 요즘에 생각해 보면, '복음가지고 그렇게 철저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냐, 안 받았냐?' 거기에, 난 구원은 받았다고 확신해요. 어쨌든 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까! 예수 그리스도까지 붙일 건 없고, 예수님은 아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이 종교성을 가지고, 그 본향을 그리워하는 그 영적 배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절대로 근본적인 것을 깨달을 수 없어요. 왜 그러냐? 이 종교성을 가지고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여러분 이상합니다. 교회에 와서 복음 들으면 복음에 대한 이해가 안됩니다. 열심히 교회에는 나오는데 복음에 대한 이해가 안돼요. 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전에는 무심히 생각했는데,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저 사람이 과연 구원받았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 '복음에 이해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십니다. 이건 은혜 중에 은혜거든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첫째 은혜를 못 받습니다. 하나님을 못 만나면 은혜를 못 받아요.

그리고 교회에 메시지나 모든 것이 은혜가 안돼요. 그리고 뭔가 나에게 오는 메시지는 들으면 들을수록 어떤 생각이 드느냐? '아, 이건 내 아내가 들었으면 딱 좋은 말이다! 이건 김 집사가 들으면 딱 좋을 말이다! 이건 이 집사가 들으면 딱 좋을 말이다! 이건 이 집사가 꼭 들어야 되는데...' 뒤를 살펴보고 안 왔으면, '나중에 전해 주든지 그래야 되겠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 말씀이 내게 임할 때에 축복입니다. '이 말이 내 말이구나! 내 일입니다! 주여, 회개합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그런 말을 들을 때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으면 점점 강퍅해 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됩니다. 노아처럼, 그 시대에 은혜 입을 때에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성경의 내용에서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잘한다, 못한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늘 말하죠.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팔아먹는 일에도 무감각했습니다. 응당히 그럴 줄 알고... 그러나 제가 안 그랬습니까, 내가 아브라함보다 났다는 것은 하나만 가지고도 돼요. 왜? '나는 아내가 어떻게 된다! 힘이 없으면 물어뜯어서라도 덤빕니다!' 이게 뭐냐하면, 어떤 행동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셨습니다. '네 아내를 그랬으니까, 안되겠다! 도덕적으로 완전히 문란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안 했습니다. 실수를 범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지라도, 한번도 하나님은 안 그랬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뭘 입었어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여러분 이 시대에 우리가 은혜 입어야 됩니다. 강퍅한 시대에 은혜를 입어야 됩니다. 강퍅한 사건 속에서 은혜를 입어야 돼요.

저는 제 자신을 가끔 돌아보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되겠다! 그리고 우리가 새 성전에 가는 사건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우리가 완전히 은혜 입은 자들이지, 은혜 떠난 자들이 아니구나! 이것만 봐도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 왜? 저 새 성전을 건축하면서 다른 사람은 다 제쳐놓고, 내 경우를 보면서 하나님이 교회 건축할 자격이 없다고 얼마나 그러시면 가만히 눕혀놓고, 교회 일에 전혀 개입을 못했어요. 그래서 어저께 우리 목사님들이 모여 가지고 강단이 어떻고, 뭐가 어떻고... 우리 다른 목사님들이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거기 가서 강단에도 서보고 다해봤는가 봐요.

그런데 와서 강단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 뭐 했으면 좋겠다! 그래요. 그래서 저는 한참 듣고 있다가, '그런 소리하지 마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강단이 위로 올라갔는지, 아래로 갔는지, 높이 떴는지, 낮아졌는지,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온 것이지! 나는 교회 건축에 조금이라도 내 자신이 도움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에 이렇다 저렇다 관여를 못했다!' 여러분 그래도 만약에 후대에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느냐? 하나교회 박지온 목사가 지었다고 안 그러겠습니까! 왜? 제가 당회장으로 있으니까! 틀림없이 그럴 것이거든요. 그리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교회를 보면서, '그 교회 목사가 누구냐? 박지온이다!' 여러분 은혜로 되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혹시 우리 장로님들이 앞에 서서 일하는 분들은 좀 섭섭할지 모르지만, 은혜를 입고 나니까 칭찬 다 받아 버린 겁니다. 다른 사람이 다 받아요. 여러분 물론 수고하고 노력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일단 수고했다! 노력했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이 자리에 여러분들이 내가 뭐 열심히 물질로 노력했다, 안 했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십시오. 은혜의 줄에 서면 다 됩니다.

그래서 우리 류 목사님이 늘 그러죠. '줄 잘 서야 된다!' 그러더라 구요. 나는 그 말 진짜 군대 생활하면서 실감했습니다. 왜냐하면, 26대의 몽둥이를 맞아야 되는데, 그 26대의 몽둥이를 맞아야 될 사람들의 줄이 저쪽 편이에요. 좀 간격이 있어요. 안 맞은 사람이 길게 서 있었는데, 단체로 맞았으니까! 여러분 26대의 몽둥이를 엉덩이로 맞는다!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맞으러 가는 동안에 꾀를 한번 부렸어요. 줄을 바꿔 버렸어요. 줄을 바꿔서 서니까, 앞에서 눈을 힐끗하더라 구요. '가만히 있어!'라 그러고, 그래가지고 26대의 몽둥이를 줄을 바꿔 서서 면했어요.

여러분 군대생활이 간단한 것 같지만 뭔가 맞는 자의 줄이 있고, 안 맞는 자의 줄이 있어요. 우스운 이야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어디에 줄서 있느냐?' 중요합니다. 여러분 은혜의 자리에 줄을 섰느냐? 여러분의 수준과 상관없이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함께 걸어가는 하나교회! 그리고 앞장서서 함께 걸어가는 당회장을 세웠습니다. 박지온 목사! 줄을 어디에 서야되겠어요? 거기에 서면되는 겁니다. 따라 가면 돼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바로 인간적인 약속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언약 붙잡고 잠시잠깐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듯이, 이삭에게 하듯이, 요셉에게 하듯이, 하나님은 그 언약의 약속에 줄을 붙잡고 가는 자들과 함께 이루어 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오늘 축복하신 이 축복의 역사! 도저히 인간으로는 만날 수 없고,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게 성탄절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그냥 오신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의 직분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뭐 더 붙이고 뺄 것이 없어요. 완벽하게 이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부르면,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을 이루시면서 예수님께서 그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흘릴 피를 마셔라! 내가 찢어질 살을 함께 먹어라! 이것을 먹고 마시면서 후대에 기념을 삼아라!' 이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왜? 너무 귀한 일이기 때문에, 바울에게 조차 이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고린도 전서 11장!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먹고 마신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 먹고 마시면서 축복된 은혜의 줄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족한 것 다 아시지만, 주께서 부족한 것과 상관없이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축복을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을 붙드는 귀중한 자리이기 때문에 오늘도 감사함으로 축복 받은 자들로, 구원받은 자들로, 이 감격가지고 이 귀한 성찬에 참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성찬 참여의 준비’라는 제목을 삼았습니다. 너무 중요하기에 매년 매때마다 이 예식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도 성찬 참여를 기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매번 성찬 참여를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매년 두차례 성찬을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에 참여하기에 앞서 성찬 의식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가? 성찬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1.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1)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①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성경은 답을 주었습니다.
② 잠깐 행복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흑암과 재앙에 빠져가게 됩니다.
③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같이 입원했던 사람이 방의 불을 끄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④ 불행이 왔는데도 인식하지 못하고, 재앙이 왔는데도 수긍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꼬집어도 알지 못합니다.
⑤ 인식만 되어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고 자신의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은 은혜를 입어야 가능합니다.

(2) 사람의 불행의 근본 - 사단의 손에 붙잡힘
 ①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② 자신이 구원받았는지,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③ 은혜를 주시면 시대와 가정의 재앙이 이해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구원의 감격이 나오게 됩니다.
④ 창 1:27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창3장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모든 허물과 죄로 연결이 됩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죽었다고 표현을 하였습니다.
⑥ 불행이 찾아온 배경에는 사단이 있는데, 사단에게 붙잡혀서 조정을 받는 모든 것이 영적문제입니다.

(3)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람들의 본능 - 종교성
① 그렇기에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함께 하던 시절의 향수가 있습니다.
② 그 행복을 그리워하며 행복을 찾으려는 본능을 사회학자는 ‘종교성’이 있다고 합니다.
③ 아프리카의 오지의 사람들도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④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귀신을 열심히 섬기게 됩니다.
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의 역사를 모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종교성을 가지게 됩니다.
⑥ 새벽기도를 올때도 항상 얼굴을 씻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엄격했는지 모릅니다.
⑦ 본성적으로 잃어버린 본향을 찾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⑧ 인간이 불행해지면 불행할수록 종교성이 강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불행입니다.
⑨ 지식으로 철학으로 요가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들의 종교성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지만 만날 수 없습니다.

2. 성찬 의식의 의미 = 하나님을 만나는 길
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여셨습니다.
②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③ 예수님은 우리가 성찬 의식에 참여할 자리를 주신 것입니다.
④ 성찬 의식에 참여하게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결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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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본문 설교일
1484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행11:19-30 2025-04-27
1483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고전15:1-11 2025-04-20
1482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삿7:9-18 2025-04-13
1481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삿7:1-8 2025-04-06
1480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삿4:1-10 2025-03-30
1479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삿3:12-23 2025-03-23
1478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삿3:7-11 2025-03-16
1477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삿2:6-10 2025-03-09
1476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삿1:1-7 2025-03-02
1475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단12:1-4 2025-02-23
1474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단11:28-39 2025-02-16
1473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단10:10-21 2025-02-09
1472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단9:20-24 2025-02-02
1471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단8:15-27 2025-01-26
1470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단7:9-14 2025-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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