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않는 전도의 역사
2005-03-06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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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광고에 나갔습니다만 내일부터 50일 특별새벽기도회가 진행됩니다. 그냥 새벽기도회가 아니라 특별새벽기도회입니다. 특별한 제목이 있기에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실때에는 응답주심을 보장하고 있음을 아시고 함께 기도의 인도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함께 기도할 기도제목이, 목사님 건강회복, 입당예배, 2차 건축헌금작정, 임직자선출입니다. 분명하게 결론을 가져야 할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전도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결론을 내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해서 제목을 놓고 기도할때에 각자에게 성령의 충만함으로 응답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교회에 새성전을 주셨고 또 담임목사님을 세워주셨는데 목사님의 건강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할때에 하나님이 모든 축복을 주셨듯이 우리도 성전을 위한 2차건축헌금을 위해서 헌신할때에 하나님께서는 경제의 축복과 함께 모든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복음전파를 위해서 초대교회가 한마음으로 물질을 드릴때에 하나님은 경제의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특별히 임직자 선출을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에 어떠한 일꾼이 세워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에 세워진 일꾼과 더불어 큰 전도의 문이 열려짐을 보게 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 세워져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데 그 일에 쓰임받는다는 일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응답받는 방법은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될 때에 기도를 많이 하고 적게 하고와 상관없이 우리의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과 방향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왜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는가하면 초대교회의 일과 성령의 일이 동일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무슨 말입니까? 초대교회가 붙잡은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신 일이 동일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붙잡고 기도하고 인도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정도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겠습니까? 우리가 알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사실에 방향만 맞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통해서 세우신 계획이 대구와 민족과 세계복음화인데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운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 일을 위해서 일꾼 세우기 위해서 기도할때에 하나님은 모든 부분에 역사하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사역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큰 능력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고 치료하고 기적을 행하고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사역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땅끝까지 증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전체를 읽어보시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떠나면 또 다른 보혜사, 성령하나님을 보내사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고 내 말을 생각나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성령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때에 성령의 충만케 하옵소서, 내 안에 모든 문제 해결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때에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게 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사도와 제자들의 관심과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모든 삶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깨닫고 고전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였습니까? 굉장한 지식과 배경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알고 난 후에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9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된 가치를 발견한 바울이 고백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들은 4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들의 관심이며 가치관이였습니다. 이 본문의 배경들을 살펴보면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끄집어 내셨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제자들에게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여기에 우리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자랑하면서 돌아다닐 것입니다. 간증하며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들은 오히려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능욕받음에 쓰임받음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의 척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응답받음에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핍박속에 그 이름 증거하는 일에 쓰임받음에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2절에 보면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들의 관심이 감옥 안에 있고 밖에 있고가 아니라 핍박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일에 유일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깨달았기에 어떤 환경과 사건도 문제가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든 문제를 해결 하신 그리스도의 가치를 깨닫는 만큼 현장속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 오늘도 또한 그리스도이야기입니까 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도 또한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일주일만 교회를 다니면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압니다. 그리스도가 왕, 제사장, 선지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계속 부르고 자손대대로 가르치고 현장에서 알려야 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입니다. 지식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실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에 그 이름으로 인해 죽을 가치와 살아가야 할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에 사도들처럼 핍박받음도 기뻐하게 됩니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단어가 그리스도입니다. 기억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우리가 죄값을 받고 저주와 재앙과 멸망가운데 빠져야 하는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대속물로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제사장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이땅에 모든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그 영이 죽었다는 말이고 악한 사단의 손에 장악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고통은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을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죄로 인해 저주와 재앙으로 고통당하고 사단에게 묶여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왕적권세를 가지시고 오셨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받았습니다. 이 예수그리스도 붙잡을때에 실패속에서도 건짐을 받게 됩니다. 모르고 실수했어도 그리스도 붙잡을때에 건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저주와 재앙의 문제가 해결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붙잡을 것은 그리스도안의 절대적인 가치와 그리스도 그 이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핍박보다도 지금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고 쉬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복음전파는 계속되어집니다. 혹 예수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예수믿으면 축복받는다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문제와 사건속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어려움과 고난은 최고의 큰 것이 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어려움조차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11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믿음으로 고백하라하십니다. 혹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그 문제앞에 믿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이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축복하십니다.
시편 31편 9절에서 13절에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다윗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였던지 눈과 혼과 몸이 쇠하고 뼈가 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이웃에게 심히 당하고 친구가 놀리고 길에서 보는 자가 피하고 죽은자를 기억하지 않듯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비참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바울이 승리한 고백의 내용입니다. 14절에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어려운 고난가운데 버린바된 것 같은 위기속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단으로 말미암아 핍박의 역사가 있다면 그 반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지속되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들이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42절에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핍박보다도 문제보다도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쉬지않고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가정의 문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문제를 보지 말고 그 뒤에 하나님의 쉬지않는 역사를 보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이 핍박속에서도 승리한 배경이 쉬지않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것입니다.
우리의 현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그리스도 말하지 말라는 현장입니다. 그리스도 말하면 고리타분하고 바보취급받고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는 현장입니다. 교회안에서도 한국교회가 타종교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면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문제만 바라보지 마시고 그 배후의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속에서 승리케 되어지는 축복된 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교회에 새성전을 주셨고 또 담임목사님을 세워주셨는데 목사님의 건강과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할때에 하나님이 모든 축복을 주셨듯이 우리도 성전을 위한 2차건축헌금을 위해서 헌신할때에 하나님께서는 경제의 축복과 함께 모든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복음전파를 위해서 초대교회가 한마음으로 물질을 드릴때에 하나님은 경제의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특별히 임직자 선출을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에 어떠한 일꾼이 세워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에 세워진 일꾼과 더불어 큰 전도의 문이 열려짐을 보게 됩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 세워져서 전도의 문이 열렸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데 그 일에 쓰임받는다는 일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응답받는 방법은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될 때에 기도를 많이 하고 적게 하고와 상관없이 우리의 잘하고 못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축복하십니다. 하나님과 방향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왜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는가하면 초대교회의 일과 성령의 일이 동일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2절에 보면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무슨 말입니까? 초대교회가 붙잡은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신 일이 동일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붙잡고 기도하고 인도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정도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받겠습니까? 우리가 알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사실에 방향만 맞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시게 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를 통해서 세우신 계획이 대구와 민족과 세계복음화인데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세운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 일을 위해서 일꾼 세우기 위해서 기도할때에 하나님은 모든 부분에 역사하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사역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시면 큰 능력을 행하고 병자를 고치고 치료하고 기적을 행하고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성령이 하시는 사역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이 임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땅끝까지 증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성령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전체를 읽어보시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증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떠나면 또 다른 보혜사, 성령하나님을 보내사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고 내 말을 생각나게 하시고 기억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성령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증거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때에 성령의 충만케 하옵소서, 내 안에 모든 문제 해결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할때에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게 될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사도와 제자들의 관심과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모든 삶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안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깨닫고 고전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였습니까? 굉장한 지식과 배경을 가진 사람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알고 난 후에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9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된 가치를 발견한 바울이 고백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들은 41절에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들의 관심이며 가치관이였습니다. 이 본문의 배경들을 살펴보면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들어갔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끄집어 내셨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제자들에게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여기에 우리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자랑하면서 돌아다닐 것입니다. 간증하며 돌아다닐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들은 오히려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능욕받음에 쓰임받음을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참된 신앙의 척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응답받음에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핍박속에 그 이름 증거하는 일에 쓰임받음에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그 이름에 대한 절대적인 가치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2절에 보면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들의 관심이 감옥 안에 있고 밖에 있고가 아니라 핍박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일에 유일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절대적인 가치를 깨달았기에 어떤 환경과 사건도 문제가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든 문제를 해결 하신 그리스도의 가치를 깨닫는 만큼 현장속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 오늘도 또한 그리스도이야기입니까 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도 또한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일주일만 교회를 다니면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압니다. 그리스도가 왕, 제사장, 선지자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계속 부르고 자손대대로 가르치고 현장에서 알려야 할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입니다. 지식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현장에서 사실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에 그 이름으로 인해 죽을 가치와 살아가야 할 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에 사도들처럼 핍박받음도 기뻐하게 됩니다.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단어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단어가 그리스도입니다. 기억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우리가 죄값을 받고 저주와 재앙과 멸망가운데 빠져야 하는데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대속물로 죽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제사장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이땅에 모든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은 그 영이 죽었다는 말이고 악한 사단의 손에 장악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고통은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을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단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죄로 인해 저주와 재앙으로 고통당하고 사단에게 묶여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왕적권세를 가지시고 오셨습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해결받았습니다. 이 예수그리스도 붙잡을때에 실패속에서도 건짐을 받게 됩니다. 모르고 실수했어도 그리스도 붙잡을때에 건짐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저주와 재앙의 문제가 해결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붙잡을 것은 그리스도안의 절대적인 가치와 그리스도 그 이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핍박보다도 지금 배후에서 일하고 계시고 쉬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복음전파는 계속되어집니다. 혹 예수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예수믿으면 축복받는다고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문제와 사건속에서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할 것은 어려움과 고난은 최고의 큰 것이 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어려움조차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 11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믿음으로 고백하라하십니다. 혹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까? 그 문제앞에 믿음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이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축복하십니다.
시편 31편 9절에서 13절에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다윗이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였던지 눈과 혼과 몸이 쇠하고 뼈가 쇠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이웃에게 심히 당하고 친구가 놀리고 길에서 보는 자가 피하고 죽은자를 기억하지 않듯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비참함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바울이 승리한 고백의 내용입니다. 14절에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어려운 고난가운데 버린바된 것 같은 위기속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단으로 말미암아 핍박의 역사가 있다면 그 반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지속되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들이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42절에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핍박보다도 문제보다도 그 뒤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쉬지않고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가정의 문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문제를 보지 말고 그 뒤에 하나님의 쉬지않는 역사를 보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이 핍박속에서도 승리한 배경이 쉬지않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것입니다.
우리의 현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그리스도 말하지 말라는 현장입니다. 그리스도 말하면 고리타분하고 바보취급받고 모자라는 사람처럼 보이는 현장입니다. 교회안에서도 한국교회가 타종교를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면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문제만 바라보지 마시고 그 배후의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봄으로 모든 문제속에서 승리케 되어지는 축복된 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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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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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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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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