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라
2006-09-24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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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찬양대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천지창조에 대한 찬양을 불렀습니다. 다른 때보다도 새벽에 새벽기도회 나오면 풀숲에서 귀뚜라미가 우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새벽 기도회 후에 수변공원에 가서 한바퀴 돌면 밭에 여름식물들이 없어지고 이제 배추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농부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이ㅜ땅이 아름답습니다. 요즘 너무 살기 힘들기에 이런 여유와 눈이 안 열리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여유를 이 가을에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울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왜 우느냐?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만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 그 믿음이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온 백성이 기뻐하는 소식,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을 누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고 복음에 깊은 뿌리를 내리는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머리로, 가슴으로 우리의 생각 속에 깊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행4:12에 이 땅에 구원받을 이름을 예수 이외에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다른 것을 따라가고 다른 것을 구원이라고 바라보는 이방종교와 이방종교에 가는 자들이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처럼 눌려 삽니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로 해방 받는 것,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운명에서 죽음에서 벗어나는 이 기쁨이 모든 기쁨의 중심입니다. 이 기쁨이 올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40일간 부활해 계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40일간 설명했다는데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곳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말로, 문학으로, 어떤 것으로도 감히 표현이 안 됩니다. 하늘나라가면 입 벌리고 너무 좋아서 취해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 축복과 은혜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이 땅에서 이미 누리도록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은 「울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울지 말라’ 저는 이것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 옮겼지만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위로의 큰 은혜라고 이해됩니다. 우리에게 울지 말라라고 할 수 있느냐?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왜 울지 말라 라고 하느냐? 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는 이유는 독자를 잃은 과부입니다. 독자가 죽었기에 대가 끊어졌고, 오직 유일한 소망과 희망이 아들인데 청년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이정도 되었다면 기절할 것이고 땅을 치고 뱅뱅 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통곡을 하면서 우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비극을 당했으니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과부의 근본 우는 문제를 해결했기에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우는 이유가 눅7:12에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과부의 옆에 성에 있는 많은 사람이 같이 나왔습니다. 인간관계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친구가 되었던 성안의 사람들이 같이 나와서 위로했지만 이 과부의 울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 어려운 중에 과부에게 무슨 말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전에 합동측 노회의 논공에 계시던 서목사님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서목사님과 친분이 있어서 웃기는 이야기를 했는데 위로가 안 되는지 다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카세트 테이프를 틀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같으면 복음 다시 전하고 영접할건데, 그래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상여를 매고 들고 가는 이 순간에 이 울음을 아무도 그칠 수가 없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런 와중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눅7:14에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님이 청년아 일어나라 하니까 시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생명이 들어가자 말자 벌떡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과부가 슬퍼해야 할 근본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성도들이 이 눈이 열려야 축복이 됩니다. 예외 없이 우리의 현장은 사단에 매여서 심각한 고통 속에 빠져서 울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사단의 역사를 못 보면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이 헛말입니다. 복음 전한다고 할 때에 뛰어가서 다른 사람에게 말 잘한다가 아닙니다. 사단에 매여서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것이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역사를 누리는 누림이 없으면 전도와 선교가 안 됩니다. 현장에 이 사건이 안 열리면 사실은 전도가 안 됩니다. 어느 현장이든지 예외 없고 어느 사람이든지 예외 없습니다. 사단에 매여서 울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그 영혼은 저주와 재앙 속에서 울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눈을 열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 그 하늘나라의 축복의 영광을 깨닫고 감사하고 은혜를 누려야 울 이유가 있는 현장에서 그들에게 복음으로 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현장에 가는 곳마다 달라지고, 가는 곳마다 흑암세력이 꺾여집니다. 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설명을 많이 하지만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선교사로 가시던 목사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외국에서 팀 사역을 너무 많이 하고 다락방에 대한 지식이 확실합니다. 이론상으로는 많이 알고 매일 듣는 것으로 끝났기에 기초가 사실화 되어있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곳에 가서 계속 기초만 했답니다. 그러니까 반항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이 안 되고 그들 자신이 이게 사실이 안 되는 겁니다. 한달 두 달 계속 기본메시지를 하니까 그때부터 그 속에서 누리는 자가 생기더라는 겁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는 당나귀 귀처럼 높아져서 기본메시지는 달달 다 외우고 있는 것 같지만 기초가 누려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누리고, 내게 사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도 새로운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언약과 축복의 사실로 주신 가장 기초인 예수그리스도를 기도로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현장도 허허 웃어도 울고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연예인들이 많이 웃고 있지만 뒤로 보니 우울증으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유명한 채플린이 웃기기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개인으로는 우울증에 걸려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연구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많이 웃긴다고 평안해서 웃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안에 평안이 있는 사람은 별로 웃길 이유도 없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충만한 평안이 가슴속에 있으면 너무 든든해서 제스처를 할 필요 없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때에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용히 선포될 때마다 변화되어지고 성취되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삶 속에 성취되었다 이것밖에 기도할게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속으로 울고 있는 자들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는 울지 않게 할 능력 있으니까 예수그리스도를 간증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소개만 해 주면 만나면 끝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나게 될 때에 근본문제가 해결되기에 울 이유가 없어지기에 확실히 끝났습니다. 인생에 우는 일이 끝났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저주와 재앙에서 축복과 은혜로 바뀌었습니다. 지옥과 멸망에서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 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웁니까? 하나님이 만나시고 울 이유를 근본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안 믿어서 우는지, 너무 기뻐서 우는지 분간이 안 됩니다. 어찌했던 이 축복의 역사가 확인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날 때에 인생이 변하고 인간이 변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 생명 얻었기에 변했습니다. 생명 얻는 사실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았습니까? 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아 요즘 계속 말하는 대로 복음의 공동체 속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를 부른 축복의 주권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나도 축복하실 계획 속에 인도하실 문입니다. 그래서 렘넌트들은 문제가 일어나도 그 모든 것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나간 세월 쓰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의 공동체 속에 들어오면 다 발판이 됩니다.
복음이라고 할 때에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받으면 바로 복음의 공동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공동체라는 것을 바로 이해 못합니다. 그저 교회에 그냥 왔다가 가고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모이는 내 이웃이 귀중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조금만 깨달아도, 온 교인이 몰라도 목사 한명만 깨달아서 인도받으면 복음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무리 불신앙가지고 공격해도 내가 믿음가지고 나가면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당회장의 권세가 엄청나기 때문에 복음공동체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겁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체성이 확인된 공동체를 확인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생명으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말을 잘 설명했습니다. 고전12:12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은 하나인데 그 안에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머리로 모든 지체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표현이 바울의 설명이 너무 적절한 표현입니다.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을 받았다고 한때는 한 성령으로 모든 지체가 붙어있습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귀부인이나 천한 자나 한 성령으로 하나 된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상세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14절에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몸은 어떤 면에서 하나라고 하지만 여럿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모두가 하나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다면 하나입니다. 16절에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입이 가장 강하지 싶습니다. 입이 나는 몸이 아니다 몸에 안 붙었다면 입이 몸을 떠나서 어디에서 살 것입니까? 17절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요 온몸이 눈으로 가득 찼다면 기가 찹니다. 눈을 앞에만 달아 놓았습니다. 만약 눈이 뒤에 달렸다 그 걸 보고 병신이라고 합니다. 뒤에 눈이 없어도 감각적으로 압니다. 이런 비유로 바울이 설명했습니다.
온 교회가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지체는 은사대로 말 잘하는 사람, 전도잘 하는 사람, 설교잘 하는 사람, 각기 자기의 은사대로 별별 사람들이 교회에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버릴 사람이 없습니다.
초기에 목사님이 찬양전도를 나가서 전도하는데 역전에 있으니까 불량배들이 많은데 불량배들이 자꾸 방해를 해서 자기 교회에 회개하고 돌아온 불량배를 데리고 와서 찬양전도를 같이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방해 놓으려고 했는데 회개한 사람이 데리고 가서 구석에서 소곤소곤했는데 그때부터는 자기보고 형님이라고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교회 안에는 쓰레기가 없더라고 했는데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고전12:18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내가 잘한다. 못한다. 상관없습니다.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내가 과연 누구냐?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 붙어있는 지체이다. 이것이 이해되면 이때부터 축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올바른 기도가 안 되고 올바른 기도제목이 잡혀지지 않습니다. 올바른 기도제목이 잡혀지기 전에 올바른 생각과 마음이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응답이 오게 됩니다.
복음 속에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세 가지 신분과 네 가지 권세입니다. 성령의 인도부터 역사까지 신분이고, 사단의 역사 속에서 천군천사동원부터 세계복음화까지 실제적인 권세를 아는 것만 해도 응답이 나옵니다. 공동체 속에 있는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일곱 가지 권세가 있다. 세 가지 신분과 네 가지 권세가 있다. 이것을 사실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내주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며,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흑암세력을 꺾으시고 하늘나라의 보좌의 축복과 세계복음화의 미래를 가지고 불가항력적인 축복의 계획 속에 우리를 세우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게 공동체의 축복의 역사입니다.
이런 축복의 역사 속에 설 때에 누구를 보든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눈이 달라집니다. 개인의 인생이 개혁됩니다.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뀝니다. 빌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각과 마음이 바뀝니다. 무엇을 봐도 바뀝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흑암세력 꺾으면 됩니다. 인생개혁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각과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응답이면서 축복입니다.
이때부터 입만 열면 감사가 나옵니다. 우리마음에 가득 찬 옛날부터 내려오는 생각과 습관이 입으로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가득한 마음에 쌓여있는 것들이 입만 열면 튀어나옵니다. 눅6:45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우리가 악으로 가득했던, 그래서 저주로 가득했던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 한분으로 의의 생명을 주시면서 악의 역사는 떠나고 의의 생명으로 우리 속에 가득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겁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함께 교회에 모아주셨습니다. 공동체입니다. 의의 공동체, 복음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중요한 깨달음이 오게 됩니다. 복음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모든 시간표가 이 속에 있습니다. 복음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는 곳마다 복음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가 발견됩니다. 행1:5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개인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성령으로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에 발견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입니다. 지금도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잘났던 못났던 하나교회의 성도라면 기를 쓰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고 합니다.
행11:19~20에 보면「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안디옥교회가 생겼습니다.
오늘도 주 예수 그리스도 언제부터 전했는지 모르지만 입만 열면 말씀을 전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교회 복음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교회의 복음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싸우고 갈등하면 분열이 일어납니다. 사단의 역사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서 포럼하고 자기의 약점을 이야기할 때에 서로가 용납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참된 복음공동체는 하늘나라가 진짜 복음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복음공동체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서든지 우리를 통해서 복음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가 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되는 축복 속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 보면 느끼게 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 지금도 현실 속에 교회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메시지 듣고 보면 눈이 달라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동시에 소망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로인해서 흑암권세 깨뜨리고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회로부터 시작해서 각 기관의 모든 모임 속에서 복음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간시키지 말고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싸움입니다. 그게 특기입니다. 뭐든지 부지런하고 일 잘하고 하는데 둘 만모이면 경쟁하는데 싸우고 난리입니다. 미국에 한인교회들이 잘 안되는 이유가 싸우는 겁니다. 당회, 제직회, 전도회가 모이는데 싸움을 잘하는 게 특기입니다. 그래서 깨달을 것이 복음 속에 모인 우리입니다. 이게 이해되면 하나님이 그 단체를 축복하시고 역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으로 모여진 다락방, 이제는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규제하고 조직을 운영하려고 5인 운영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이속에 우리가 오직 하나 되어 류목사를 따라가는 이유는 그분이 가지고 있는 중심에 전도와 선교가 너무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장로를 수백 명씩 뽑아라. 우리 교회 같은 경우에는 장로를 백 명 이상 세워도 됩니다. 지역에 장로를 세워서 복음공동체를 세워 나갈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이것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회소집해서 이 일을 위한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이제 50일 새벽기도회를 하려고 합니다. 기도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지역에 있는 여러분과 그 지역에 보낸 하나님의 사람 박지온 목사가 만났다. 이 만남이 교회의 공동체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이것에 눈이 열리면 서로가 참으로 귀하게 되어지고 축복이 사실이 됩니다.
바울과 브리스가부부의 만남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 지역에 교회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 있는 나, 우리가 보여지게 될 때에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 있는 제자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될 때에 전도가 되어집니다.
그래서 먼저 할 것은 공동체를 기도로 누려야 합니다. 내가 공동체를 누리고 있다면 내안에 갈등과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막힌 것이 있으면 화해하고 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공동체 속에 조용히 기도하고 모든 것을 누리는 축복이 오늘부터 확인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찬양대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천지창조에 대한 찬양을 불렀습니다. 다른 때보다도 새벽에 새벽기도회 나오면 풀숲에서 귀뚜라미가 우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새벽 기도회 후에 수변공원에 가서 한바퀴 돌면 밭에 여름식물들이 없어지고 이제 배추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농부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이ㅜ땅이 아름답습니다. 요즘 너무 살기 힘들기에 이런 여유와 눈이 안 열리면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여유를 이 가을에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울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왜 우느냐?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이만한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 그 믿음이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온 백성이 기뻐하는 소식,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을 누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고 복음에 깊은 뿌리를 내리는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머리로, 가슴으로 우리의 생각 속에 깊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행4:12에 이 땅에 구원받을 이름을 예수 이외에 주신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다른 것을 따라가고 다른 것을 구원이라고 바라보는 이방종교와 이방종교에 가는 자들이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처럼 눌려 삽니다.
여기서 예수그리스도로 해방 받는 것,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운명에서 죽음에서 벗어나는 이 기쁨이 모든 기쁨의 중심입니다. 이 기쁨이 올 때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40일간 부활해 계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40일간 설명했다는데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곳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말로, 문학으로, 어떤 것으로도 감히 표현이 안 됩니다. 하늘나라가면 입 벌리고 너무 좋아서 취해서 일어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 축복과 은혜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이 땅에서 이미 누리도록 문을 여셨습니다.
오늘은 「울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울지 말라’ 저는 이것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 옮겼지만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위로의 큰 은혜라고 이해됩니다. 우리에게 울지 말라라고 할 수 있느냐?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왜 울지 말라 라고 하느냐? 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는 이유는 독자를 잃은 과부입니다. 독자가 죽었기에 대가 끊어졌고, 오직 유일한 소망과 희망이 아들인데 청년이 되어서 죽었습니다. 이정도 되었다면 기절할 것이고 땅을 치고 뱅뱅 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통곡을 하면서 우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 라고 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비극을 당했으니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과부의 근본 우는 문제를 해결했기에 울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부의 우는 이유가 눅7:12에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과부의 옆에 성에 있는 많은 사람이 같이 나왔습니다. 인간관계도 좋았던 모양입니다. 친구가 되었던 성안의 사람들이 같이 나와서 위로했지만 이 과부의 울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이 어려운 중에 과부에게 무슨 말이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전에 합동측 노회의 논공에 계시던 서목사님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서목사님과 친분이 있어서 웃기는 이야기를 했는데 위로가 안 되는지 다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카세트 테이프를 틀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죽기 전에는 그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같으면 복음 다시 전하고 영접할건데, 그래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상여를 매고 들고 가는 이 순간에 이 울음을 아무도 그칠 수가 없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이런 와중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눅7:14에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님이 청년아 일어나라 하니까 시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생명이 들어가자 말자 벌떡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과부가 슬퍼해야 할 근본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성도들이 이 눈이 열려야 축복이 됩니다. 예외 없이 우리의 현장은 사단에 매여서 심각한 고통 속에 빠져서 울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사단의 역사를 못 보면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것이 헛말입니다. 복음 전한다고 할 때에 뛰어가서 다른 사람에게 말 잘한다가 아닙니다. 사단에 매여서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것이 보이지 않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역사를 누리는 누림이 없으면 전도와 선교가 안 됩니다. 현장에 이 사건이 안 열리면 사실은 전도가 안 됩니다. 어느 현장이든지 예외 없고 어느 사람이든지 예외 없습니다. 사단에 매여서 울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그 영혼은 저주와 재앙 속에서 울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눈을 열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 그 하늘나라의 축복의 영광을 깨닫고 감사하고 은혜를 누려야 울 이유가 있는 현장에서 그들에게 복음으로 답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현장에 가는 곳마다 달라지고, 가는 곳마다 흑암세력이 꺾여집니다. 이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설명을 많이 하지만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 선교사로 가시던 목사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는데 외국에서 팀 사역을 너무 많이 하고 다락방에 대한 지식이 확실합니다. 이론상으로는 많이 알고 매일 듣는 것으로 끝났기에 기초가 사실화 되어있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곳에 가서 계속 기초만 했답니다. 그러니까 반항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이 안 되고 그들 자신이 이게 사실이 안 되는 겁니다. 한달 두 달 계속 기본메시지를 하니까 그때부터 그 속에서 누리는 자가 생기더라는 겁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귀는 당나귀 귀처럼 높아져서 기본메시지는 달달 다 외우고 있는 것 같지만 기초가 누려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누리고, 내게 사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도 새로운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언약과 축복의 사실로 주신 가장 기초인 예수그리스도를 기도로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현장도 허허 웃어도 울고 있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연예인들이 많이 웃고 있지만 뒤로 보니 우울증으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에서 유명한 채플린이 웃기기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개인으로는 우울증에 걸려서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연구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많이 웃긴다고 평안해서 웃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안에 평안이 있는 사람은 별로 웃길 이유도 없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충만한 평안이 가슴속에 있으면 너무 든든해서 제스처를 할 필요 없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때에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용히 선포될 때마다 변화되어지고 성취되는 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말씀이 떨어질 때마다 삶 속에 성취되었다 이것밖에 기도할게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예수를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속으로 울고 있는 자들에게 울지 말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는 울지 않게 할 능력 있으니까 예수그리스도를 간증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소개만 해 주면 만나면 끝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만나게 될 때에 근본문제가 해결되기에 울 이유가 없어지기에 확실히 끝났습니다. 인생에 우는 일이 끝났다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저주와 재앙에서 축복과 은혜로 바뀌었습니다. 지옥과 멸망에서 하늘나라의 영광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면 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웁니까? 하나님이 만나시고 울 이유를 근본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안 믿어서 우는지, 너무 기뻐서 우는지 분간이 안 됩니다. 어찌했던 이 축복의 역사가 확인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날 때에 인생이 변하고 인간이 변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에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는 순간 생명 얻었기에 변했습니다. 생명 얻는 사실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았습니까? 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아 요즘 계속 말하는 대로 복음의 공동체 속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를 부른 축복의 주권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나도 축복하실 계획 속에 인도하실 문입니다. 그래서 렘넌트들은 문제가 일어나도 그 모든 것을 발판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나간 세월 쓰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의 공동체 속에 들어오면 다 발판이 됩니다.
복음이라고 할 때에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생명을 받으면 바로 복음의 공동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공동체라는 것을 바로 이해 못합니다. 그저 교회에 그냥 왔다가 가고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모이는 내 이웃이 귀중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조금만 깨달아도, 온 교인이 몰라도 목사 한명만 깨달아서 인도받으면 복음공동체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아무리 불신앙가지고 공격해도 내가 믿음가지고 나가면 아무도 못 건드립니다. 당회장의 권세가 엄청나기 때문에 복음공동체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겁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체성이 확인된 공동체를 확인할 때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생명으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말을 잘 설명했습니다. 고전12:12에 보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몸은 하나인데 그 안에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머리로 모든 지체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표현이 바울의 설명이 너무 적절한 표현입니다. 13절에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을 받았다고 한때는 한 성령으로 모든 지체가 붙어있습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귀부인이나 천한 자나 한 성령으로 하나 된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지고 상세히 이야기를 했습니다. 14절에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몸은 어떤 면에서 하나라고 하지만 여럿입니다. 생명이 있다면 모두가 하나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다면 하나입니다. 16절에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입이 가장 강하지 싶습니다. 입이 나는 몸이 아니다 몸에 안 붙었다면 입이 몸을 떠나서 어디에서 살 것입니까? 17절에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요 온몸이 눈으로 가득 찼다면 기가 찹니다. 눈을 앞에만 달아 놓았습니다. 만약 눈이 뒤에 달렸다 그 걸 보고 병신이라고 합니다. 뒤에 눈이 없어도 감각적으로 압니다. 이런 비유로 바울이 설명했습니다.
온 교회가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지체는 은사대로 말 잘하는 사람, 전도잘 하는 사람, 설교잘 하는 사람, 각기 자기의 은사대로 별별 사람들이 교회에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버릴 사람이 없습니다.
초기에 목사님이 찬양전도를 나가서 전도하는데 역전에 있으니까 불량배들이 많은데 불량배들이 자꾸 방해를 해서 자기 교회에 회개하고 돌아온 불량배를 데리고 와서 찬양전도를 같이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방해 놓으려고 했는데 회개한 사람이 데리고 가서 구석에서 소곤소곤했는데 그때부터는 자기보고 형님이라고 하더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교회 안에는 쓰레기가 없더라고 했는데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고전12:18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내가 잘한다. 못한다. 상관없습니다. 연약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지체입니다. 내가 과연 누구냐?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 붙어있는 지체이다. 이것이 이해되면 이때부터 축복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올바른 기도가 안 되고 올바른 기도제목이 잡혀지지 않습니다. 올바른 기도제목이 잡혀지기 전에 올바른 생각과 마음이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응답이 오게 됩니다.
복음 속에 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세 가지 신분과 네 가지 권세입니다. 성령의 인도부터 역사까지 신분이고, 사단의 역사 속에서 천군천사동원부터 세계복음화까지 실제적인 권세를 아는 것만 해도 응답이 나옵니다. 공동체 속에 있는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일곱 가지 권세가 있다. 세 가지 신분과 네 가지 권세가 있다. 이것을 사실적으로 누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내주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시며,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흑암세력을 꺾으시고 하늘나라의 보좌의 축복과 세계복음화의 미래를 가지고 불가항력적인 축복의 계획 속에 우리를 세우시고 인도하십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이게 공동체의 축복의 역사입니다.
이런 축복의 역사 속에 설 때에 누구를 보든지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눈이 달라집니다. 개인의 인생이 개혁됩니다. 생각이 바뀌고 마음이 바뀝니다. 빌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각과 마음이 바뀝니다. 무엇을 봐도 바뀝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고 흑암세력 꺾으면 됩니다. 인생개혁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각과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응답이면서 축복입니다.
이때부터 입만 열면 감사가 나옵니다. 우리마음에 가득 찬 옛날부터 내려오는 생각과 습관이 입으로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가득한 마음에 쌓여있는 것들이 입만 열면 튀어나옵니다. 눅6:45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우리가 악으로 가득했던, 그래서 저주로 가득했던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 한분으로 의의 생명을 주시면서 악의 역사는 떠나고 의의 생명으로 우리 속에 가득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겁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함께 교회에 모아주셨습니다. 공동체입니다. 의의 공동체, 복음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중요한 깨달음이 오게 됩니다. 복음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모든 시간표가 이 속에 있습니다. 복음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입니다. 이런 사람이 가는 곳마다 복음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가 발견됩니다. 행1:5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개인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성령으로 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에 발견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입니다. 지금도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잘났던 못났던 하나교회의 성도라면 기를 쓰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고 합니다.
행11:19~20에 보면「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안디옥교회가 생겼습니다.
오늘도 주 예수 그리스도 언제부터 전했는지 모르지만 입만 열면 말씀을 전하고 말씀 속에서 하나교회 복음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교회의 복음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싸우고 갈등하면 분열이 일어납니다. 사단의 역사입니다. 두세 사람이 모여서 포럼하고 자기의 약점을 이야기할 때에 서로가 용납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참된 복음공동체는 하늘나라가 진짜 복음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복음공동체 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서든지 우리를 통해서 복음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가 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되는 축복 속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 보면 느끼게 됩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안에 지금도 현실 속에 교회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메시지 듣고 보면 눈이 달라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눈으로 보는 동시에 소망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로인해서 흑암권세 깨뜨리고 축복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회로부터 시작해서 각 기관의 모든 모임 속에서 복음공동체 속에 있는 우리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간시키지 말고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싸우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싸움입니다. 그게 특기입니다. 뭐든지 부지런하고 일 잘하고 하는데 둘 만모이면 경쟁하는데 싸우고 난리입니다. 미국에 한인교회들이 잘 안되는 이유가 싸우는 겁니다. 당회, 제직회, 전도회가 모이는데 싸움을 잘하는 게 특기입니다. 그래서 깨달을 것이 복음 속에 모인 우리입니다. 이게 이해되면 하나님이 그 단체를 축복하시고 역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으로 모여진 다락방, 이제는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규제하고 조직을 운영하려고 5인 운영위원회를 세웠습니다. 이속에 우리가 오직 하나 되어 류목사를 따라가는 이유는 그분이 가지고 있는 중심에 전도와 선교가 너무너무 귀합니다. 그래서 장로를 수백 명씩 뽑아라. 우리 교회 같은 경우에는 장로를 백 명 이상 세워도 됩니다. 지역에 장로를 세워서 복음공동체를 세워 나갈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이것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회소집해서 이 일을 위한 결정을 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이제 50일 새벽기도회를 하려고 합니다. 기도 없이는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지역에 있는 여러분과 그 지역에 보낸 하나님의 사람 박지온 목사가 만났다. 이 만남이 교회의 공동체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이것에 눈이 열리면 서로가 참으로 귀하게 되어지고 축복이 사실이 됩니다.
바울과 브리스가부부의 만남 속에서도 하나님이 그 지역에 교회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 있는 나, 우리가 보여지게 될 때에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 있는 제자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것이 될 때에 전도가 되어집니다.
그래서 먼저 할 것은 공동체를 기도로 누려야 합니다. 내가 공동체를 누리고 있다면 내안에 갈등과 막힘이 없어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막힌 것이 있으면 화해하고 와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공동체 속에 조용히 기도하고 모든 것을 누리는 축복이 오늘부터 확인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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