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생명적 헌신은 임마누엘에서 시작된다(노동휘 목사)
2008-01-1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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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옆에 분과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올해 주제이며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생명적 헌신은 임마누엘에서 시작한다 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통해 행동이 결정되어집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라는 의문점이 들때도 많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생각이 다르고 지역과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생각들을 들어보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요즘 영화나 뉴스 등의 많은 기사를 통해 “참 독특하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참 많습니다. 생각이 다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행동들이 나와지게 되고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되며 체질이 되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리면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됩니다. 인생의 답과 응답이 우리 의식 속에 우리 인생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더 깊숙이 영혼가운데 담아지면 영원한 응답으로 연결되어 집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면 삶이 바뀔 수 있고 많은 부분들에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떤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주인공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라는 것은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이겠지요. 그 영화 속에서 그 내용들 들으며 맞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없는데,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다가 원망하고 짜증낸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겠습니까. 태어난 과거와 가정과 배경등은 원망할 필요가 없는데, 60이 다된 노인도 그런 쓸데없는 원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 소용없는 원망이다 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사람일수록 바꿀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 응답하시고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여하게 하셨는데 오늘 예배, 부끄럼을 감례하고 도망가지 않는 이상 예배드려야 하는데 집중하고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큰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잠재의식과 영혼 깊숙한 곳에 하루 하루 박혀 들어갈 때, 영원한 응답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더 큰 기도가 시작되어야 하겠고, 하나님의 이루실 그 때를 기다리는 축복이 우리에게 시작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떻게 시작하며, 바라봐야 할 것인지를 아는 축복 있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 6장에 보니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여리고 성과 그 백성은 가장 큰 성이었고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얼마나 큰 성이었는가, 기록에 보면 성벽이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합니다. 성 위에 마차가 다닐 만큼 두껍게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주 튼튼한 이중구조의 견고한 성이었는데, 무너져버렸습니다. 굉장한 승리의 기쁨과 감격, 찬양이 터져 나왔겠죠. 이런 성공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중요한 실수 두 가지를 하게 됩니다.

1절에 아간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에 대한 소개가 길게 나옵니다. 유다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마 중요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중직자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물건들 전리품들은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후 전리품은 승자가 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성의 있는 것만큼은 아무것도 취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라고 특별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훔쳐냈습니다. 자기 집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2절에 보니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보니 그 다음 성으로 아이성이 있었습니다. 성도 작고 사는 사람도 작았습니다. 외형도 외소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성이었습니다. 이 성을 정복하기 위해 이전 전투에서는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백성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장면들이 나오는데, 오늘 2절에서는 하나님이 빠져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정탐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 명령을 받은 백성들이 일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은 실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 이후보다 성공 이후가 훨씬 중요 하구나, 훨씬 더 예민해야 하는 구나, 훨씬 더 하나님 바라봐야 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보게 되어 집니다. 오늘 우리는 전쟁의 본질을 살펴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을 정복하려 합니다. 여리고 라는 가장 강한 성이 있습니다. 귀골이 장대하며 무기도 크고 전투에 훈련된 백성들이 살고 있으며 언제든 공격하면 맞 받아칠 뿐 아니라 상대방을 멸망 시킬 수도 있는 전투력을 가진 부족입니다. 그런중에 하나님이 할례를 행하라 명했습니다.

어제 밤에 둘째 아이 형준이가 샤워 후에 나오더니 자기는 포경수술 안한다고 하더라고요. 난데 없이 들은 말이라 그렇게 해라 했습니다. 포경수술 해야 하는 등의 이야길 어디서 들었겠지요. 지금같이 의학이 발달해 메스와 마취제를 가지고 수술을 하게 되어도 아프긴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분들은 다 이런 경험을 하셨겠지만, 이 시대 즉,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지날 즈음의 시대에 부싯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은 수술을 하게 됩니다. 전쟁 중에 그냥 죽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이 전쟁의 본질은 뭡니까? 언약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37년 전에 이들은 언약과 무관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가나안땅 정복을 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전쟁의 본질은 얼마나 많은 땅을 차지하고 얼마나 많은 성을 무너뜨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얼마나 탁월하게 전쟁을 수행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고, 임마누엘을 회복하고 언약을 회복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의 본질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 자체가 싸움이란 것입니다. 하지만 여차하면 속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함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대함입니다. 그래서 할례와 유월절을 회복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리고를 정복할 때는 전쟁을 통해 이긴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세우고 앞에는 일곱 제사장과 양각 나팔을 붙잡고 행군했습니다. 양각나팔은 성경에 29번 나오는데, 21번이 희년과 관계있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에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7년 후 찾아오는 1년에 안식하는 것이 안식년인데 안식년이 7번 지나면 노예도 해방시키고 빚도 탕감해주는 그런 희년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하는 해가 희년입니다. 이 양각 나팔의 의미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고 원상태로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도는데, 가운데는 언약궤와 제사장이 있었고 손에는 양각 나팔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배였습니다. 가나안땅에 와서 회복한 것이 할레와 유월절이었습니다. 예배의 행렬이 하루에 한 바퀴씩 돌다가 일곱째 날에 여리고가 무너졌습니다. 전혀 군사력이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작전이나 탁월함과 전투력은 쓰여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하라는 것입니다.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그럴 때 여리고성 안과 가나안의 경제들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모든 경제와 산업활동과 문화할동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므로 무너뜨려져야 합니다. 가나안땅에서는 문화를 정복하고 산업을 정복해서 존재하는 아세라의 우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문화를 개혁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렘넌트를 세우는 것을 가나안 땅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많이 멋있게 전쟁하고 성을 많이 무너뜨리느냐 하는 싸움에 들어가있는 것입니다. 이 싸움 와중에 하나님과의 계획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 싸움에서는 창과 방패에 있지 않았습니다.

때때로 어떤 일을 잘 해내면 우리가 똑똑해서 그런 양 생각합니다. 인품과 인맥이 있고 똑똑하니 부지런하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지금 싸움이 뭐냐? 지금 잘했고 못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승리와 실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임마누엘 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고 있는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싸움이며 전쟁입니다. 이 본질을 놓치면 아무리 승리해도 틀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해서 그런 것 같이 착각들을 합니다.

본문 속에서 두 가지 실수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려 합니다. 첫 번째 아간의 범죄가 있었습니다. 아간의 범죄를 보며 “하나님 왜 이 아간 한 사람의 범죄가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가 됩니까” 질문했습니다. “아간만 뽑아내면 되지 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십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전체의 범죄를 봤을 때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여론들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중직자 모임을 가지고 구역의 모임을 가지고 전도회 모임을 가지는데, 나는 일하고 있지 않지만 스스로 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핵심에서 들었듯이 “중직자 편지”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직자 캠프를 진행할 것이며 중직자 대학원을 할 것이다 했습니다. 이것이 전체의 분위기가 되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청년들도 중직자로 준비해야 합니다. “결혼은 중직자를 위한 첫 걸음이다” 란 이야기도 합니다. 전체 중직자 시대에 중직자로 부름 받는 것이 우리의 흐름이고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분위기가 “괜찮아 아니야 요즘 그런게 어딨어” 라는 아간의 행동들을 묵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묵인해 주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십니다. 분위기와 문화가 참 무섭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분위기에 젖어 있느냐에 따라 집요하게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외적으로 분위기만 그렇습니다. 내적으로도 같습니다. 마음속에 숨겨놓은 하나님의 계획을 멀리하고 싶은 내 속의 있는 마음들. 어제 결혼예비학교에서 강사 목사님이 “하나님,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하는 기도 조차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약속의 사람이 맞는지와 아닌지에 대한 질문에 아니다 란 대답을 들을 거 같아 기도 안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정적인 답을 할 것이 분명하기에 기도안한다고들 합니다. 기도할 필요 없이 포기해야 하겠죠.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불신앙의 마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두 번째 일입니다. 나는 아는데, 그것을 내가 묵과하고 있고 덮어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찾아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찾아 들어가실 때 괴로움과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거기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정탐을 명령합니다. 방법은 동일합니다. 용기백백 되어 있습니다. 자신감 넘치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세상 성공의 야망이 가득했습니다. 노하우도 가졌고 전문성도 가졌습니다. 이런 때에 여호수아가 명령합니다. 정탐하라고 정탐을 하니 보고가 별거 아니라고 보고를 받습니다. 여리고의 승리가 이 사람의 전력과 전력으로 한 것이 아닌데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전투력 비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능력, 내 탁월함과 재력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전력 탐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략자로 전력비교하기 위해 정탐 보낸 것이 아닙니다. 착각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세가 정탐을 보냈을 때 자기들 전투력은 안되기에 울기도 합니다. 그런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성을 보고는 착각 중에 아이성을 얍잡아 보고 있습니다.

아이성에 비해 강할 수도 있겠지만,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을 회복하는 것이 전쟁의 본질입니다. 우리 인생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의 비밀을 누리고 못 누리고의 전쟁입니다. 축복받는 사람의 그 축복이 뭡니까. 땅값이 오르고 펀드가 오르는 것이 축복입니까? 전쟁의 본질은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 축복의 본질이 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다윗의 탁월함을 보십시오. 그는 왕궁을 짓고 부족함 있는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기억할 만큼 하나님의 소원을 바라본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탁월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탁월합니까. 무엇에 뛰어납니까? 전쟁의 결과를 통해 36명이 죽습니다. 3000명 중 36명이 죽었습니다. 1% 의 손실은 큰 실수가 아니지만 좌절하고 무너지기 시작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잘되면 교만해지고, 목이 뻗뻗해지고 조금만 실패하면 주눅이 듭니다. 이것이 전쟁의 본질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할례를 회복, 유월절의 회복,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 임마누엘 회복하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그렇지 않습니까?우리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조금만 안되면 무너지고 조금 되면 높아지는 모습 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가장 빠른 회복은 기도 속에 들어가는 것이며 예배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런 실패 속에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7절과 9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배 속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지난 주에 혹시 승리한 것과 실패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오늘, 임마누엘의 계획 속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철저히 무릎 꿇고 겸손히 오늘도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구원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고백의 시간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너무 쉽게 “괜찮아, 아니야” 라고 합니다. 오늘 여기 예배에 앉아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앉아있습니까. 예배자의 마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베드로가 섰습니다. 부활이후 예수님을 만처음 한 말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이후, 베드로는 고기잡이로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을 알고는 배가 육지에 닿기도 전에 바다 속에 뛰어들어 예수님께 갑니다. 배신했던 베드로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한채, 예배자의 모습으로 바다 속에 뛰어듭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면 안된다는 고백이 있는 하루와 예배와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 전쟁의 본질입니다. 우리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함이 아니라 정세와 권세와 이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대함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다가 흑암을 꺾고 예수 이름으로 저주와 재앙을 꺾고 일주일 동안 가정에 역사하는 저주와 재앙들과 흑암세력을 이 시간에 꺾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되시고 말씀 받고 오후시간에 일주일간의 삶을 정리 하십시오. 만나기 부담스러운 사람과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을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결박하고, 오늘 하루 동안에 말씀 붙잡으시고 일주일의 삶을 정리하는 축복 있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 포럼하고 묵상하시다가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우리 싸움의 본질과 전쟁의 본질이 혈과 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임마누엘 누리는 것이 본질임을 발견케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루 종일 주의 말씀 받다가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며 마음과 생각에 힘을 얻고 육신이 회복되는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역사해 주옵소서. 포럼하고 기도하다가 새로운 힘을 얻고 현장이길 구체적인 힘이 회복되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우리 생각에 따라 행동이 나옵니다. 그 행동이 습관이 되고 체질이 되며 잠재의식 속에 뿌리내리면 이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 됩니다. 더 깊숙하게 우리 영혼 가운데 박히면 영원한 응답으로 연결 됩니다. 우리 생각을 바꾸고 나갈 때 우리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을 쓸데없이 원망하고 짜증내는 대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꿔야 합니다.

1. 그러면 어떻게 시작해야 하며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1) 가장 강한 민족이 살던 가장 큰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6장).
2) 그런데 성공한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① 이스라엘은 여리고성 전투에 승리한 후 중요한 두 가지 실수를 범합니다.
② 여리고성에서 취한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 하였는데 아간이 이를 어기고 취합니다.
③ 여호수아가 여리고성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아이성에 대한 전투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진행합니다.
3) 이스라엘이 맞닥뜨린 전쟁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① 여리고성 전투를 앞에 두고 명령하신 할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의미입니다.
② 이 전쟁의 본질은 임마누엘의 비밀을 회복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언약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③ 군사력을 가지고 전쟁을 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예배함으로 승리했습니다.
④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가나안 땅의 문화와 산업이 회복되고 렘넌트가 세워집니다.
⑤ 내 인품, 내 인맥, 내 능력으로 싸워서 승리했다고 착각하지 말고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2. 본문 속에 나타난 두 가지 실수
1) 아간의 범죄: 아간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왜 이스라엘 전체에 진노하십니까?
① 전체의 분위기, 여론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② 중직자로 부름 받는 것이 가장 응답받는 것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③ 분위기뿐만 아니라 내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을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④ 하나님은 집요하게 그 불신앙의 마음을 찾으십니다.
2)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정탐을 명령하였습니다.
① 이스라엘은 노하우를 갖게 되고 희망이 일어나 용기백배하였습니다.
② 여리고성 전투의 승리를 전투력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③ 하나님은 전력을 탐지하라고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보낸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땅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지를 보라고 보내셨습니다.
3) 우리 인생의 본질은 임마누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할례‧유월절‧예배 회복).
① 우리 축복의 본질은 얼마나 많이 벌고 먹느냐가 아닙니다.
② 다윗의 강함은 큰 왕궁을 짓고 난 후에 언약궤를 생각할 만큼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③ 이 본질을 놓칠 때 이스라엘은 임마누엘을 잃어버리고 1퍼센트의 실패(36명의 죽음)에 좌절하였습니다.

결론: 가장 빠른 회복은 기도와 예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실패 이후에 여호수아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7-9절). 과거의 승리와 실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배 속에 들어와서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능력이 필요함을 고백해야 정상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벌이는 전쟁의 본질입니다(엡6:12).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시고 저주와 재앙의 흑암세력을 꺾으며 일주일의 삶을 두고 기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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