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
2008-03-30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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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모든 응답을 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 제목을 3절에 보시면,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전체를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지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머지않아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경말씀 예레미야 33장 2절에 보시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이시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60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부분들을 언약의 말씀으로 주시면서 22절에 보면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축복된 역사 속에 오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앙발판 첫 번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나님이 해나가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면 그 속에서 오는 것이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참 된 평안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한날 온종일토록 예배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회복되어지는 그런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나면서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나면서 소경 된 것도 모자라서 8절에 보시면 걸인이다 했습니다. 거지로서 구걸하는 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지금 실제로 사람들은 영적인 소경입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영적인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을 보게 되어 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는데 축복을 다 빼앗기고 구걸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현장의 모습들입니다.
오늘, 나면서 소경된 자인 이 걸인을 보는 시각이 제자들의 시각이 달랐고 바리새인들의 눈이 달랐고 예수님이 보시는 눈이 다른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되어 집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제자들은 어떤 눈으로 봤냐하면 2절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문제와 사건이 생기면 늘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고 오늘 제자들이 자기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탓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문제와 사건을 당할 때에, 우리도 모르게 죄책감과 죄의식에 눌려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의 역사는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부분들,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보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핑계대고 네 탓이다 내 탓이다 하며 하나님의 참된 응답들은 다 놓치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의 보시는 눈을 달랐습니다. 3절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한번 받아 합시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가문의 문제와 여러분의 개인 문제와 말 못할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들에게 그 문제는 그냥 우연히 주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는 것을 잘 보아야 된다는 것과 두 번째로 이 소경의 신앙고백을 통해 이 한 주간 참된 기도제목들을 붙잡는 시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보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보는 육안이 있고요 마음의 눈이라는 심안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사실을 보는 영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보고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눈이 너무 밝으면 영안이 어두워져서 문제와 사건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바르게 보지 못하니까 기도조차도 바르지 못하고, 기도조차도 바르게 되지 않으니 문제가 더욱 더 복잡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의 눈이 보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우리의 마음의 눈인 심안이 있는데 이 마음의 눈이 닫혀져 버리면 자기가 원하는 쪽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것만 생각하지 마음의 눈과 영적인 눈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 육신적인 눈도 중요하지만 바로 영적인 것들을 바르게 보는 영안입니다. 이 영이 살고 영안이 바로 열리게 되면 마음에도 하나님의 평안함이 임합니다. 그 평안함을 가지고 육신적인 일과 사건을 보게 되면 바르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을 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상황 속에서 홍해 앞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 모세를 향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에 끌어내었느냐?” 라고 원망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했던 눈을 이 모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14절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하고 나서의 보고는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다. 하지만 그 땅 사람들이 장대하고 사람들이 너무 강해서 마치 우리가 보기에 스스로가 메뚜기 같더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도록 대성통곡하며 원망하고, 한 장관을 세워 돌아가자고 대책을 세우는 가운데, 그 때 모세가 말합니다. 민수기14장 9절에 보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볼 것을 바로 보았습니다. 영적인 눈이 바로 열려져야 육신의 것도 바르게 보게 되어 있고 마음에도 평안함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면서도 단순히 교회만 출석 하고 예배드리는 그 상태에 머물러 앉아있을 뿐,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실보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신앙생활 하다가 제풀에 꺾여서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 송현 지교회를 중심으로 캠프가 진행되었는데 그 현장에 들어가 보니 다 예수 믿다가 그만 둔 자들이 많았습니다. 자기 모친도, 언니도, 어릴 때 다 예수 믿었고 성가대도 섬기고 했는데 이제는 영원히 방학했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무엇 때문입니까? 영적인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니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겁니다. 오히려 불신자들보다도 교회 욕하는 사람들이 다 교회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이렇다 혹 저렇다 하면서 뭔가 힘없어 보이고 겸손해 보이는 사람은 정말 예수 믿는 것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눈이 외적인 눈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힘없어 보이고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같은 것처럼 보는 것이죠.
여러분, 정말로 우리에게 영안이 열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안이 열려진 자 곧, 영적인 눈이 열려진 자는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어려운 일들과 저주와 재앙 당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제자들과 똑같이 돌아갑니다. 누가 잘못해서 그렇다, 누가 이래서 그렇다. 교회가 또, 성도가 이래서 되느냐 하면서 대부분 남의 탓으로 원망하면서 말이죠. 좀 더 양심적인 사람들은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 탓이라고 합니다. 한 때, “내 탓이오” 라는 슬로건이 나오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천주교에서 나온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위 공무원으로써 수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공직에 있으며 얼마 안 되는 몇 백만 원 뇌물 받아서 그것이 들통 났는데, 자기 양심이 허락지 않으니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남의 탓을 돌리고 내 탓으로 돌리면,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영적문제 오게 되며 결과적으로 자살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확하게 영적인 눈이 열려지면 내 탓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탓도 아닌 이 문제는 바로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최고로 축복받은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하나님 안에서 정복하고 다스리는 모든 축복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는 죄 가운데 빠져서 저주가운데서 사단에게 붙잡힌 영적인 문제이구나! 하는 이 사실이 보여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이 보여지기 전 까지는 여러분의 문제는 해결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원치 않는 일들을 당합니다. 저주와 재앙이 계속 일어나고 또, 개인의 문제로 무너져 내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뭔가 모르게 만족이 없고 행복이 없어서 늘 공허하고 만족하지 못해 헤매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럴 때에 생각을 잘 하셔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창세기 3장의 원죄 때문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문제요, 소속이 마귀의 소속이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는 문제이구나” 이 사실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안 보여 지니까 사람들이 어려움 당하고 문제 당하면, 무당을 찾아가고 우상숭배하고 그렇게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보여 지니까 자기 힘으로 뭔가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아닙니까. 자기 노력과 자기 열심이 자신을 구원하려 하는 것입니다. 구원할 수 있습니까? 점점 더 큰 문제가 따를 뿐입니다.
여러분, 내 문제도 아니고 우리 부모문제도 아니고 사회문제도 아닌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문제 즉, 근본문제임이 바르게 보여져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실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에 눈이 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영안이 열리는 순간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보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이 보여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사단의 잡힌 문제, 운명에 붙잡힌 문제, 저주와 재앙가운데 붙잡힌 문제를 인간이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시사 이 문제를 완전 해결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약속을 붙잡고 응답을 받았고, 신약시대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직접 오셔서 문제를 해결하셨고 지금 시대는 그리스도 그 이름 믿고 영접하게 될 때에 우리의 모든 창세기 3장의 문제, 근본문제가 완전히 끝나버리신 줄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체험되고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나타나는 결론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이 그 말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게 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리스도의 유일성의 대한 눈이 열려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유일한 축복임이 깨달아 집니다.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유일한 축복을 주신 것이고 영원한 축복을 주시 것이고 완전한 축복을 주시 것이고 절대적인 축복을 주시 것이라는 이 사실을 보는 눈이 열려지는 것을 가지고 영안이 열려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여 질 때 내 인생의 참된 만족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만족이 나와야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와 맞아지는 것이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는 부분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완전함과 영원함과 절대적인 것과 유일한 이 축복을 누리면서 그 속에서 만족이 나와야 내 모든 것들에게 더하여 주시는 축복된 응답이 그 때부터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공부하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이 영적인 눈을 열지 못한다면 올바른 지식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산업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지금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그냥 문제가 아닙니다. 어찌 본드를 흡입해서 그 아이들을 토막을 내서 그렇게 뻔뻔스레 버리는 것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결국 사단이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우리 인생들을 멸망 길로 끌고 가는 모습들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같은 말 아닙니까? 정말 눈이 열려야 할 부분이 있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 때부터 마음의 눈도 바르게 열리게 되는 것이고 그때 육신도 육의 것, 눈에 보이는 것도 바르게 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영안이 열려지는 축복된 은혜를 입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입니다. 오늘 소경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서 중요한 것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걸인인 이 사람이 주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고 육신의 눈까지 뜨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날 때부터 소경되었는데 눈을 떴다면 톱 뉴스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잔치 해주고 기뻐해줘야 하는데 오늘 본문 요한복음 9장 전체를 보면 이상한 부분들이 나옵니다. 축하해줘야 할 사람들이 시비를 걸게 되고 오히려 쟁론을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9장 16절을 보시면,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아니, 눈 먼 소경을 안식일에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왜 그 일을 안식일에 하였느냐고 쟁론을 하는 것입니다. 축하해주고 기뻐해주기는커녕 쟁론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 현장에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있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 보다 더 큰 기적이 있다면, 정말 인생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자들에게 참된 해결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르게 증거함으로 예수 믿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이것만큼 더 큰 기적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역사들이 우리 현장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짓입니까? 사단의 짓 아닙니까?
자기 운명도 모르면서 남의 운명을 가르쳐 준다며 평생 동안에 가문대대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얻게 해야 하는데, 엉뚱한 말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사단이 하는 짓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 재앙가운에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 받은 사람이 너무 기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사람에게 엉뚱한 말을 해서 그만 신앙을 포기하려는 데로 까지 몰고 가는 현상들이 우리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붙잡고 인도해 나가시겠지만 이런 일들이 지금 우리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갖고 있었지만 바른 복음도 모르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니까 열심가지고 복음을 막아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깨달아야 하고 복음을 누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사실에 대한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 한다면 우리도 모르게 복음의 역사를 막는 비참한 일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경의 관점에서 봅시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눈을 열었다. 그런데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뜬 사람. 소경으로 있을 때는 답답할 뿐이었는데, 눈뜨고 보니 눈 감았을 때 보지 못했던 것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핍박을 하게 됩니다. 출교까지 해서 그 소경을 내어 쫓습니다.
여러분,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지 않았을 때, 눈 감은 상태로 살아갈 때 그럭저럭 운명이다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믿고 나니 문제오고 어려움 당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잘못 믿은 것은 아닌가? 취소할 수 없느냐? 하는데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예수 안 믿었으면 더 어려움 당하고 더 고통당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이 눈먼 소경이 눈을 뜨고 보니 바리새인들이 와서 누가 눈을 뜨게 했는지 재촉합니다. 17절에 보면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그러니까 또 바리새인들이 어머니에게 가서 아들 눈을 누가 뜨게 했느냐 물어봅니다. 20절에 보면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절에 보면,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내 아들 다 컸으니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며 말을 회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당시에 예수가 그리스도라 말하면 출교시키기로 결의했기에 그렇습니다. 눈 뜬 소경도, 그 어머니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이후에 이 눈 뜬 소경이 참된 지혜를 깨닫게 되고 고백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러면서 33절에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바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그 고백입니다.
그 당시에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며 율법적으로 저주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났으니 사회생활 안 되고 경제생활 가난을 면할 수 없죠. 그런 가운데 완전히 버려진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에 바뀌어진 것입니다. 소경되었던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생이 참된 축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축복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알고 믿고 영접하면 신분이 바뀌어집니다. 사망의 신분에서 하나님 자녀로서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우리의 가정환경과 질병과 어려움과 핍박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는 신분으로,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는“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영접하는 순간에 신분의 바뀝니다. 뿐만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집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사망과 상관없는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갈 때마다 어렵고 힘든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셔서 우리를 지키시는 성령의 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면서 눈먼 소경은 육안도 열려졌고 영안도 열려졌습니다. 눈도 뜨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 구원받은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바리새인은 눈이 감긴 것입니다. 그것이 39절에 나오는데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들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 합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바리새인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긴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눈먼 소경입니까? 눈뜬 소경입니까?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은 눈 뜬 소경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처에 메이고 과거에 매여 하나님의 응답을 누리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증거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눈뜬 소경입니다. 복음으로 만족한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 이리저리 방황하고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기 위해 쫒아 다니는 사람은 사람 눈뜬 소경입니다. 우리에게 눈뜬 소경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은혜를 입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영적인 사망 영적인 소경이었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볼 것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 인도받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감사함을 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속지 않게 하시며, 특별히 틀린 가치관에 우리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도록 우리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번 한주간도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열어주시고 볼 것을 봄으로 참된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의 증인되어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증인되어지는 그런 축복을 누리도록 도아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지금 사람들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영적인 소경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다 빼앗겨 버리고 구걸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소경이자 걸인인 사람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이 같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누구 탓인지 물었습니다. 죄의식에 눌린 시각으로 보면 문제와 사건에 대해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응답을 보지 못하고 원망과 남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1. 보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1) 육안(肉眼), 심안(心眼), 영안(靈眼) 중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바르게 보는 영안입니다(출 14:13, 민 14:9).
① 바르게 보지 못하면 기도를 바르게 하지 못하여 문제가 더욱 복잡해짐
② 영안이 열리면 마음에도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고 육신적인 문제도 바르게 볼 수 있게 됨
2) 영적인 눈이 열려진 자는 먼저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보이게 됩니다.
①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날 때 대부분 다른 사람을 탓하고, 좀 더 양심적인 이들은 자기를 탓함
② 원치 않는 일, 저주, 재앙이 일어날 때 이것이 창세기 3장의 원죄, 사단의 문제, 하나님 떠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함
③ 영안이 열리는 순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케 됨
3)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신 축복이 유일하고 영원하며 완전하고 절대적인 축복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영접할 때 모든 근본문제가 끝남
② 이 사실이 체험되고 확인되면 행4:12의 그리스도 유일성에 대한 눈이 열림
③ 영안을 열 때 참된 만족이 나오게 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됨
④ 영적인 눈을 열지 못하면 올바른 학문‧산업‧정치를 할 수 없음
2. 소경의 신앙고백
1) 복음의 사실을 깨닫고 누리지 못하면 우리도 모르게 복음을 막을 수 있습니다.
①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뜬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축하 대신 쟁론을 일으킴
②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도 복음을 막는 일들이 일어남(사단의 짓)
③ 바리새인들은 눈 뜬 소경을 핍박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오히려 내어 쫓음(출교. 34절)
2) 소경이었던 자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지혜롭게 고백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25절)
3) 하나님은 참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십니다.
① 소경으로 태어나 완전히 버려졌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에 참된 축복으로 회복됨
②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면 마귀의 자녀, 사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뀜
③ 가정환경, 질병, 어려움과 핍박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는 신분이 됨(고후4:8-9)
④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요5:24)
⑤ 천군천사를 동원하셔서 지키시는 성령의 전이 됨(고전3:16)
결론: 나면서 눈 먼 소경이 눈도 뜨게 되고 그리스도를 앎으로 구원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눈이 감겼습니다(39절). 나는 어떤 자입니까? 눈 먼 소경입니까, 눈 뜬 소경입니까? 눈 뜬 소경은 복음으로 만족치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자입니다. 눈 뜬 소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을 3절에 보시면,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전체를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을」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지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머지않아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성경말씀 예레미야 33장 2절에 보시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이시라고 말씀하셨고, 이사야 60장에 보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부분들을 언약의 말씀으로 주시면서 22절에 보면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축복된 역사 속에 오늘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앙발판 첫 번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하나님이 해나가신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면 그 속에서 오는 것이 세상 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참 된 평안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한날 온종일토록 예배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회복되어지는 그런 축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나면서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나면서 소경 된 것도 모자라서 8절에 보시면 걸인이다 했습니다. 거지로서 구걸하는 한 사람으로 나옵니다.
지금 실제로 사람들은 영적인 소경입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영적인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을 보게 되어 집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는데 축복을 다 빼앗기고 구걸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현장의 모습들입니다.
오늘, 나면서 소경된 자인 이 걸인을 보는 시각이 제자들의 시각이 달랐고 바리새인들의 눈이 달랐고 예수님이 보시는 눈이 다른 것을 본문을 통해 보게 되어 집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를 제자들은 어떤 눈으로 봤냐하면 2절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문제와 사건이 생기면 늘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고 오늘 제자들이 자기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탓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문제와 사건을 당할 때에, 우리도 모르게 죄책감과 죄의식에 눌려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의 역사는 보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부분들,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보는 것을 보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늘 원망하고, 불평하고, 핑계대고 네 탓이다 내 탓이다 하며 하나님의 참된 응답들은 다 놓치고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의 보시는 눈을 달랐습니다. 3절이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한번 받아 합시다.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가문의 문제와 여러분의 개인 문제와 말 못할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들에게 그 문제는 그냥 우연히 주어진 문제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보는 것을 잘 보아야 된다는 것과 두 번째로 이 소경의 신앙고백을 통해 이 한 주간 참된 기도제목들을 붙잡는 시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입니다. 보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적인 것을 보는 육안이 있고요 마음의 눈이라는 심안이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사실을 보는 영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보고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육신의 눈이 너무 밝으면 영안이 어두워져서 문제와 사건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바르게 보지 못하니까 기도조차도 바르지 못하고, 기도조차도 바르게 되지 않으니 문제가 더욱 더 복잡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의 눈이 보는 것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우리의 마음의 눈인 심안이 있는데 이 마음의 눈이 닫혀져 버리면 자기가 원하는 쪽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것만 생각하지 마음의 눈과 영적인 눈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의 눈, 육신적인 눈도 중요하지만 바로 영적인 것들을 바르게 보는 영안입니다. 이 영이 살고 영안이 바로 열리게 되면 마음에도 하나님의 평안함이 임합니다. 그 평안함을 가지고 육신적인 일과 사건을 보게 되면 바르게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을 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상황 속에서 홍해 앞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 모세를 향해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곳에 끌어내었느냐?” 라고 원망하며 대들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했던 눈을 이 모세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었고,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보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14절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하고 나서의 보고는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맞다. 하지만 그 땅 사람들이 장대하고 사람들이 너무 강해서 마치 우리가 보기에 스스로가 메뚜기 같더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도록 대성통곡하며 원망하고, 한 장관을 세워 돌아가자고 대책을 세우는 가운데, 그 때 모세가 말합니다. 민수기14장 9절에 보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볼 것을 바로 보았습니다. 영적인 눈이 바로 열려져야 육신의 것도 바르게 보게 되어 있고 마음에도 평안함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인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면서도 단순히 교회만 출석 하고 예배드리는 그 상태에 머물러 앉아있을 뿐,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사실보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신앙생활 하다가 제풀에 꺾여서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 송현 지교회를 중심으로 캠프가 진행되었는데 그 현장에 들어가 보니 다 예수 믿다가 그만 둔 자들이 많았습니다. 자기 모친도, 언니도, 어릴 때 다 예수 믿었고 성가대도 섬기고 했는데 이제는 영원히 방학했다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무엇 때문입니까? 영적인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영적인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니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교회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겁니다. 오히려 불신자들보다도 교회 욕하는 사람들이 다 교회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이렇다 혹 저렇다 하면서 뭔가 힘없어 보이고 겸손해 보이는 사람은 정말 예수 믿는 것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눈이 외적인 눈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힘없어 보이고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같은 것처럼 보는 것이죠.
여러분, 정말로 우리에게 영안이 열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안이 열려진 자 곧, 영적인 눈이 열려진 자는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원치 않는 일들이 자꾸 일어납니다. 어려운 일들과 저주와 재앙 당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제자들과 똑같이 돌아갑니다. 누가 잘못해서 그렇다, 누가 이래서 그렇다. 교회가 또, 성도가 이래서 되느냐 하면서 대부분 남의 탓으로 원망하면서 말이죠. 좀 더 양심적인 사람들은 내가 잘못해서 그렇다. 탓이라고 합니다. 한 때, “내 탓이오” 라는 슬로건이 나오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천주교에서 나온 것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고위 공무원으로써 수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공직에 있으며 얼마 안 되는 몇 백만 원 뇌물 받아서 그것이 들통 났는데, 자기 양심이 허락지 않으니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남의 탓을 돌리고 내 탓으로 돌리면, 결국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영적문제 오게 되며 결과적으로 자살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확하게 영적인 눈이 열려지면 내 탓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탓도 아닌 이 문제는 바로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따라 최고로 축복받은 존재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하나님 안에서 정복하고 다스리는 모든 축복을 받았는데,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는 죄 가운데 빠져서 저주가운데서 사단에게 붙잡힌 영적인 문제이구나! 하는 이 사실이 보여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이 보여지기 전 까지는 여러분의 문제는 해결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원치 않는 일들을 당합니다. 저주와 재앙이 계속 일어나고 또, 개인의 문제로 무너져 내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뭔가 모르게 만족이 없고 행복이 없어서 늘 공허하고 만족하지 못해 헤매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그럴 때에 생각을 잘 하셔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창세기 3장의 원죄 때문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문제요, 소속이 마귀의 소속이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는 문제이구나” 이 사실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안 보여 지니까 사람들이 어려움 당하고 문제 당하면, 무당을 찾아가고 우상숭배하고 그렇게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보여 지니까 자기 힘으로 뭔가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 아닙니까. 자기 노력과 자기 열심이 자신을 구원하려 하는 것입니다. 구원할 수 있습니까? 점점 더 큰 문제가 따를 뿐입니다.
여러분, 내 문제도 아니고 우리 부모문제도 아니고 사회문제도 아닌 하나님을 떠난 영적인 문제 즉, 근본문제임이 바르게 보여져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실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것에 눈이 열려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영안이 열리는 순간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보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이 보여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 했는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를 사단의 잡힌 문제, 운명에 붙잡힌 문제, 저주와 재앙가운데 붙잡힌 문제를 인간이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시사 이 문제를 완전 해결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 약속을 붙잡고 응답을 받았고, 신약시대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직접 오셔서 문제를 해결하셨고 지금 시대는 그리스도 그 이름 믿고 영접하게 될 때에 우리의 모든 창세기 3장의 문제, 근본문제가 완전히 끝나버리신 줄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체험되고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나타나는 결론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이 그 말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게 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의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리스도의 유일성의 대한 눈이 열려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유일한 축복임이 깨달아 집니다.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를 주신 것은, 유일한 축복을 주신 것이고 영원한 축복을 주시 것이고 완전한 축복을 주시 것이고 절대적인 축복을 주시 것이라는 이 사실을 보는 눈이 열려지는 것을 가지고 영안이 열려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여 질 때 내 인생의 참된 만족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참된 만족이 나와야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와 맞아지는 것이고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는 부분이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완전함과 영원함과 절대적인 것과 유일한 이 축복을 누리면서 그 속에서 만족이 나와야 내 모든 것들에게 더하여 주시는 축복된 응답이 그 때부터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공부하는 사람, 사업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이 영적인 눈을 열지 못한다면 올바른 지식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산업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땅의 지금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그냥 문제가 아닙니다. 어찌 본드를 흡입해서 그 아이들을 토막을 내서 그렇게 뻔뻔스레 버리는 것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결국 사단이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우리 인생들을 멸망 길로 끌고 가는 모습들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 같은 말 아닙니까? 정말 눈이 열려야 할 부분이 있다면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 때부터 마음의 눈도 바르게 열리게 되는 것이고 그때 육신도 육의 것, 눈에 보이는 것도 바르게 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 영안이 열려지는 축복된 은혜를 입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입니다. 오늘 소경의 신앙고백을 살펴보면서 중요한 것을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 걸인인 이 사람이 주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고 육신의 눈까지 뜨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날 때부터 소경되었는데 눈을 떴다면 톱 뉴스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잔치 해주고 기뻐해줘야 하는데 오늘 본문 요한복음 9장 전체를 보면 이상한 부분들이 나옵니다. 축하해줘야 할 사람들이 시비를 걸게 되고 오히려 쟁론을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9장 16절을 보시면,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아니, 눈 먼 소경을 안식일에 고쳤다는 이유만으로 왜 그 일을 안식일에 하였느냐고 쟁론을 하는 것입니다. 축하해주고 기뻐해주기는커녕 쟁론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 현장에 고스란히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이 있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 보다 더 큰 기적이 있다면, 정말 인생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자들에게 참된 해결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바르게 증거함으로 예수 믿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이것만큼 더 큰 기적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축복의 역사들이 우리 현장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짓입니까? 사단의 짓 아닙니까?
자기 운명도 모르면서 남의 운명을 가르쳐 준다며 평생 동안에 가문대대로 귀신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얻게 해야 하는데, 엉뚱한 말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사단이 하는 짓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 재앙가운에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 복음 받은 사람이 너무 기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사람에게 엉뚱한 말을 해서 그만 신앙을 포기하려는 데로 까지 몰고 가는 현상들이 우리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의 인생을 붙잡고 인도해 나가시겠지만 이런 일들이 지금 우리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갖고 있었지만 바른 복음도 모르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지 못하니까 열심가지고 복음을 막아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깨달아야 하고 복음을 누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사실에 대한 복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 한다면 우리도 모르게 복음의 역사를 막는 비참한 일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경의 관점에서 봅시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다가 눈을 열었다. 그런데 소경으로 있다가 눈을 뜬 사람. 소경으로 있을 때는 답답할 뿐이었는데, 눈뜨고 보니 눈 감았을 때 보지 못했던 것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핍박을 하게 됩니다. 출교까지 해서 그 소경을 내어 쫓습니다.
여러분,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지 않았을 때, 눈 감은 상태로 살아갈 때 그럭저럭 운명이다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믿고 나니 문제오고 어려움 당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잘못 믿은 것은 아닌가? 취소할 수 없느냐? 하는데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예수 안 믿었으면 더 어려움 당하고 더 고통당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이 눈먼 소경이 눈을 뜨고 보니 바리새인들이 와서 누가 눈을 뜨게 했는지 재촉합니다. 17절에 보면 “이에 맹인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그러니까 또 바리새인들이 어머니에게 가서 아들 눈을 누가 뜨게 했느냐 물어봅니다. 20절에 보면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절에 보면,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내 아들 다 컸으니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라며 말을 회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당시에 예수가 그리스도라 말하면 출교시키기로 결의했기에 그렇습니다. 눈 뜬 소경도, 그 어머니도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이후에 이 눈 뜬 소경이 참된 지혜를 깨닫게 되고 고백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그러면서 33절에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바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그 고백입니다.
그 당시에 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며 율법적으로 저주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소경으로 태어났으니 사회생활 안 되고 경제생활 가난을 면할 수 없죠. 그런 가운데 완전히 버려진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에 바뀌어진 것입니다. 소경되었던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생이 참된 축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축복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길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알고 믿고 영접하면 신분이 바뀌어집니다. 사망의 신분에서 하나님 자녀로서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우리의 가정환경과 질병과 어려움과 핍박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는 신분으로,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는“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신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영접하는 순간에 신분의 바뀝니다. 뿐만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집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사망과 상관없는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신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나갈 때마다 어렵고 힘든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천군 천사들을 동원하셔서 우리를 지키시는 성령의 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면서 눈먼 소경은 육안도 열려졌고 영안도 열려졌습니다. 눈도 뜨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 구원받은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바리새인은 눈이 감긴 것입니다. 그것이 39절에 나오는데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들에 대한 부분들을 이야기 합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바리새인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긴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눈먼 소경입니까? 눈뜬 소경입니까?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사람은 눈 뜬 소경입니다.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처에 메이고 과거에 매여 하나님의 응답을 누리지 못하고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증거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눈뜬 소경입니다. 복음으로 만족한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니 이리저리 방황하고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기 위해 쫒아 다니는 사람은 사람 눈뜬 소경입니다. 우리에게 눈뜬 소경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은혜를 입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영적인 사망 영적인 소경이었던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볼 것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속에 인도받을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심을 감사함을 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속지 않게 하시며, 특별히 틀린 가치관에 우리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도록 우리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번 한주간도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열어주시고 볼 것을 봄으로 참된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의 증인되어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증인되어지는 그런 축복을 누리도록 도아 주옵소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지금 사람들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영적인 소경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복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다 빼앗겨 버리고 구걸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소경이자 걸인인 사람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각이 같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누구 탓인지 물었습니다. 죄의식에 눌린 시각으로 보면 문제와 사건에 대해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의 응답을 보지 못하고 원망과 남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1. 보는 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1) 육안(肉眼), 심안(心眼), 영안(靈眼) 중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을 바르게 보는 영안입니다(출 14:13, 민 14:9).
① 바르게 보지 못하면 기도를 바르게 하지 못하여 문제가 더욱 복잡해짐
② 영안이 열리면 마음에도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고 육신적인 문제도 바르게 볼 수 있게 됨
2) 영적인 눈이 열려진 자는 먼저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보이게 됩니다.
①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날 때 대부분 다른 사람을 탓하고, 좀 더 양심적인 이들은 자기를 탓함
② 원치 않는 일, 저주, 재앙이 일어날 때 이것이 창세기 3장의 원죄, 사단의 문제, 하나님 떠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함
③ 영안이 열리는 순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발견케 됨
3)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주신 축복이 유일하고 영원하며 완전하고 절대적인 축복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영접할 때 모든 근본문제가 끝남
② 이 사실이 체험되고 확인되면 행4:12의 그리스도 유일성에 대한 눈이 열림
③ 영안을 열 때 참된 만족이 나오게 되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됨
④ 영적인 눈을 열지 못하면 올바른 학문‧산업‧정치를 할 수 없음
2. 소경의 신앙고백
1) 복음의 사실을 깨닫고 누리지 못하면 우리도 모르게 복음을 막을 수 있습니다.
①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자가 눈을 뜬 사건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축하 대신 쟁론을 일으킴
② 지금 우리의 현장에서도 복음을 막는 일들이 일어남(사단의 짓)
③ 바리새인들은 눈 뜬 소경을 핍박하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오히려 내어 쫓음(출교. 34절)
2) 소경이었던 자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지혜롭게 고백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25절)
3) 하나님은 참된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십니다.
① 소경으로 태어나 완전히 버려졌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에 참된 축복으로 회복됨
②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면 마귀의 자녀, 사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뀜
③ 가정환경, 질병, 어려움과 핍박이 우리를 망하게 할 수 없는 신분이 됨(고후4:8-9)
④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요5:24)
⑤ 천군천사를 동원하셔서 지키시는 성령의 전이 됨(고전3:16)
결론: 나면서 눈 먼 소경이 눈도 뜨게 되고 그리스도를 앎으로 구원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눈이 감겼습니다(39절). 나는 어떤 자입니까? 눈 먼 소경입니까, 눈 뜬 소경입니까? 눈 뜬 소경은 복음으로 만족치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자입니다. 눈 뜬 소경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땅에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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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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