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믿음(박지온목사)
2013-07-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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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목사
“잘못된 믿음”
(롬10: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행1:1~11
■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막상 서게 되면서 할 말이 참 많고, 또 하고 싶고, 또 여러 가지 마음의 흐름들이 있습니다만, 단 한 마디, 여러분의 기도의 열매로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잘못된 믿음’, ‘거짓된 믿음’이라 이렇게 제목을 삼았는데, 처음에 ‘참된 믿음’이라 그렇게 제목을 삼고 싶었습니다만, 좀 더 여러분 마음속에 심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거짓된 믿음’이라 정했습니다. 반대로 이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여러분들, 잘못하면 거짓과 참이 구분이 안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모호하고, 또 우리 믿음 속에도 다원론들이 들어와서 어느 것이 참 믿음인지, 어느 것이 거짓인지 모를 수 있는, 이런 혼돈의 삶이, 또 혼돈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서 부분이지만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우리가 갖고 믿고 있는 지금이 정말 참된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 아니면, 속고 또 속이는, 거짓된, 허망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이 말씀은 간단한 것 같지만 뒤집으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내가 지금 평생토록 열심을 내어 믿었다, 아니다, 허망하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죠. 내가 지금까지 진짜 어리석은 것 같고 또 미련한 것 같고, 또 엉터리 같은 믿음으로 살았는데 이게 거짓이 아니고 참된 것이었다, 진짜 자다가도 깜짝 놀랄 일이죠. 여러분들이 오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들의 지난 과거를 조금씩 조금씩, 많이 할 것도 없어요. 조금씩 조금씩 살펴보면 당장 해답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강단에 못 설 뿐 아니라 거의 생각도 마음도 바보처럼 두뇌가 망가져서 오래도록 깊은 물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의욕을 주시면서 무언가 생각이 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아이패드를 들고 나왔는데, 처음에는 조그만 것을 달랑달랑 들고 나오니까 저게 무언가 싶어서 모두 웃기도 하고 신기해 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였고, 제가 컴퓨터를 만지지 못한지가 거의 십년을 안 넘었겠나 싶어요. 왜냐 하면 대상포진으로 제 오른손이 망가지면서 회복이 안 되어서, 쓸 수가 없어서 만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타자가 제대로 안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손가락이 돌아갑니다. 여러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요, 손가락이 돌아가는 거 감사할 일이죠.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이것은 마음대로 되는데 이것은 좀 잘 안 돼요, 약간. 그래도 돌아갑니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큰 자판, 집에 있는 큰 컴퓨터에 있는 자판은 힘을 써서 두드려야 해요. 두드려야 하는데 이 손은 힘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두드리는 것이 잘 안 돼요. 큰 컴퓨터의 자판은 아직까지도 잘 못씁니다. 그런데 마침 집에 아이패드가 하나 있어서, 그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지만 프로그램이라든가 이런 것 전부 다른 사람이 다 준비해 주었어요. 저는 폼만 가지고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자판기를 두드리면 손에 약간만 닿아도 그대로 입력이 됩니다. ‘딱’ 소리가 나면서. 그러니 두드릴 필요도 없고 약간씩 그저 터치만 하면 되요. 얼마나 편한지! 이 손이 잘 안 돌아가도 터치만 하면 되니까 글씨를 쓸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젯밤에 좀 앉아서 12시까지, 두 시간 정도 준비를 하면서, 많이도 준비 못하고 오타가 많이 나와요. 준비하는데 우리 집에서 좀 신기한가 봐요. 생전 컴퓨터로 설교 준비를, 앉아가지고, 원고를 못 들고 나왔는데, 원고를 들고 나오니 아침에 참 장하게 보인다고 (집사람이) 하더라고요. 내가 생각해도 장해요. 여러분의 기도 열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원래 회복이 잘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 듣기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6개월 정도 서울에 다니면서 고통 클리닉, 안 아프게만 하는 그런 병원이 있어요. 거기 가니까 이게 안 돌아온다고 해요. 평생을 아마 짊어지고 살아야 되겠다, 지금은 평생은 아니고 한 십년 이상 지난 것 같은데 이만큼 돌아왔다는 게 제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감사라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도 너무 감사해요. 여러분, 삶에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바보예요. 그것은 전혀 현실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죠. 저는 하도 이상한 삶을 살아서, 이상한 면에서 이상한 삶이 아니라 병중에서 하도 걱정을 끼쳐드리고 이상한 삶을 살았는데, 벌써 한두 달 전인가, 화장실에 갔는데 어떤 남자집사님이 “환영합니다!”하며 박수를 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하니 목사님이 화장실에 왔다는 거예요. 평생 안 갔거든요. 내 알기로는 평생 그래봐야 한 십년 이상인지 몰라요. 투석한 지가 7, 8년 되니까 한 십년 정도 이상 되겠죠. 그런데 오늘 화장실 오는 모습을 봐서 너무 기쁘다는 거예요. 여러분, 화장실 가는 것도 그렇게 기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어려울 때에, 진짜 행복과 축복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그것이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무심히 아침에 화장실에 가고 또 돌아오면 화장실에 가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데 그게 보통 축복이 아니에요.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먹고 싸고 잘 자는 것, 이것은 인간 본성의 기본입니다. 왜냐? 우리가 모두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하는 것이 딴 게 아니거든요. 알고 보면 먹기 위해서입니다. 잘 먹기 위해서. 그럼 잘 먹는 것이 안 된다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 먹는 낙이 없다, 진짜 힘없을 겁니다. 지금 이 시간 마치고 배가 고프면, 먹을 걸 생각하면 힘이 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잘못되었다, 거짓되었다, 뭐 이런 것을 따진다는 것은 혼돈스런 세계에 어려운 일이지만 본문에 의해서 조금 말씀을 드려볼 생각입니다.
사실은 오늘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의자를 갖다 놓을까요, 흑판을 갖다 놓을까요 하더라고요. 의자를 갖다 놓으면 앉았다 하면 한 시간입니다. 너무 괴롭힐 것 같아서, 여러분. 또 흑판을 갖다 놓으면 제가 너무 오래 서서 또 왔다갔다 해야 하니까 내가 괴롭고. 그래서 다 그만두라, 간단히 강단에 서서 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올라 왔습니다. 잘 한 것 같습니다. 마음에 이 오랜, 그렇게 오랜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참 오랜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꾸 어려움이 오고, 이런 어려운 문제 속에 부닥치면서 과연 내가 잘 믿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냐, 아니면 헛된 믿음을 가지고 헛것을 안고 잘 믿는다고 착가하며 온 것이냐 이 생각이 좀 나더라고요. 그리고 심지어는 직접은 안 들었는데 풍문으로 들은 소리가 우리 교인들도 ‘목사님, 아마 믿음이 없는가보다! 맨날 아프고 자꾸 어려운 문제 오는 거 보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안 된 것같다!’맞아요. 아프면 믿음 없어요. 종일 아픈 것만 생각납니다. 윤성주 목사님이 아프면 이불 덮어쓰고 누워서 참 생각하기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 소리 듣고, 웃기지 마라, 그것은 덜 아파서 그렇다, 진짜 아프면 아무것도 생각 안 난다, 오직 아야 뿐이다, 아야. 생각이 안 나요. 오직 그것뿐인데 뭐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없거든요. 그러니 윤목사가 당장, “아, 그런가.” 했습니다. 아프면 누워서 생각할 시간이 있어서 좋다? 아닙니다. 진짜 아파보면 생각이 안 납니다.
제가 마지막 신장 이식을 하고 난 후에 제일 어렵던 시간이 수술 후 시간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때가 없는 거 같아요. 마취를 했는데 안 되었는지 적게 했는지…….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제가 회복실에 오자마자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취가 풀려버렸습니다. 아프지 고통스럽지 혼미하지, 그 때 아리랑을 불렀다던가 오동추야를 불렀다면 참 곤란하잖아요. 그런데 늘 제 마음에 나는 목사라는 마음이 늘 있었던가 봅니다. 간호원들이 왔다갔다 하는 자리에서, 뭔가 시끄럽기도 하고 마음에 좀 불만스러운 게 있었나 봅니다. 마취도 아직 안 풀어졌는데 희미하지만 정신부터 돌아와 버렸으니까. 그래서 제가 큰 소리로 뭐라 그랬냐하면, “나는 하나교회 목사다.”라고 했습니다. 이만하면 잘했지요? 저는 마음속에 우리교인들은 목사의 말은 순종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내 말에 순종이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라. 이거 달라고 해도 금방 안 가져오고, 휴지 달라고 해도 금방 안 가져오고. ‘뭐 이런 것들이 있노? 목사 말도 안 듣는 이런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나.’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좀 이상한 소리를 한 거 같아요. 다른 이상한 소리가 아니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간호원들이, 목사는 목산데 저 분은 이상한 목사인가 보다 했어요. 늦게서 제가 본정신이 돌아오고 보니까, 간호원들이 보니까 사람이 참 좋거든요. 좋아하는 이유는 저는 아파도 아프다고 안 하니까요. 저한테는 간호원들이 별 할 일이 없어요.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안합니다. 뭐 시간 가면 될 걸 하는 마음으로, 고함을 지르고 큰 소리를 치면서 이거달라 저거달라 안 했는데, 수술 후에 그 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수술 후에 그러고 난 뒤에) 회복하는데 사람이 너무 가만히 있거든요. 암만 아파도 아무 말 안할 거 같으니 그러니 자기들이 와서 “뭐 도와드릴까요, 문제 있어요? 아픈 데 있거든 얘기해 주세요.”하더라고요.
무의식 중에 내게 온 하나의 순간적인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지나온 과정에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저 같은 경우는 체질이 되었다기 보다는 뭔가 습관이 된 거 같아요. 어지간한 문제가 있어도 아무 소리 안 합니다. 옛날부터 좀 문제 있고 고통스럽고 그러면 저 혼자 방에 들어가서 이불 덮어쓰고 누워 있으면 끝입니다. 집사람이 더 궁금하지요. 저 사람이 무슨 이유 때문에 아무 소리 안하나? 그런데 얼마나 아무 소리 안 했느냐? 맹장염이 생겼는데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도 아무 소리 안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아프니까 저도 견디기 힘들었던가 봅니다. 워낙 고통이 극치가 되니까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뛰었습니다. 내 생각에 5cm는 뛰었지 않나 합니다. 그러다가 정신아 가버렸습니다. 그 때 집사람이 놀라서 사람들을 불러서 응급실에 갔습니다. 그 길로 죽을 뻔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살아났어요. 기도의 열매로. 그 속에서 내 마음 속에 복음이라고 말하는 속에 깊이 뿌리 내린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하면 좀 엄하잖아요. 그래서 제 마음에 언제부터인가 새겨진 것이 아빠입니다. 얼마나 다정합니까. 아빠라고 부르면 해결 안 될 게 없습니다. 정말 행복한 포근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요번에 산업선교회에 출품을 꼭 하나 해야 된데요. 출품을 뭘 해야 되나? 윤경우 청년이 서예를 하고 미술 전문인이라고 합니다. 듣자하니까 은혜를 입어서 프랑스 어떤 미술관에 출품을 하러 간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앞으로는 윤경우 청년이 낸 작품은 굉장히 값이 오를 거니까 진작 사두라고 했다 합니다. 어쨌든 작품을 하나 냈습니다. 그 내용이 “아빠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거기에다가 주를 달았어요. 우리 원로 목사님의 지나온 생애에 신앙의 고백이라고 주를 달아놨어요.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다른 사람에게 팔릴까 싶어서 그것을 거금을 주고 얼른 샀다고 합니다. 직접 듣지는 않았는데, 내가 참 잘 샀다고 했다 합니다. 류목사님도 산업선교회 1강 메시지에서 나왔는데 아빠의 절대적 주권이라고 나왔습니다. 상당히 마음에 부딪친 바가 있었나 봅니다. 저분이 저런 심정으로 이 고통을 이겼구나 하는 아리한 마음이 들더라는 내용으로 얘기를 한 거 같아요. 사실입니다. 저는 제게 절대적 주권이 엄격한 것이라든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너무나 다정한 무엇이든지 말하면 이루어주시는 아빠의 절대적 주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게 오늘날 나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우리 교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빠의 절대적 주권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니면 벌써 가룟 유다처럼 제 길로 갔나이다라고 할 텐데 여기에 붙어 있기만 한 것도 기적입니다.
제가 당회장으로 있을 때 어느 장로님을 구박을 좀 한 거 같아요. 그 배경은 다른 당회장님에게 마음대로 얘기하기가 힘들잖아요. 예의도 지켜야 되고……. 그런데 그 분과의 관계는 좀 가까운 관계라서 당회에 얘기하고 싶을 때는 그 개인을 찍어서 얘기했습니다. 상당한 오랜 시간 동안 (하도 구박을 하니) 그게 얼마나 괴로운 시간이었겠습니까? 한 번은 우연히 만났는데, “목사님, 제가 일단 이 교회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괴롭다 이겁니다. 걸핏하면 자기를 찍어서 좋은 소리 안 좋은 소리 하니까. “그런데 붙어있기를 참 잘했습니다.”고 하더라구요. 붙어만 있어라. 다 됩니다. 왜? 아빠의 절대적 주권. 여기에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왜?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만 확실히 내 안에, 내면에, 영적인 것 속에 뿌리만 내리고 있으면 다 됩니다. 그런데 사실 너무 안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뭐든지 사건만 생기면 내가 하지 아빠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만 생기면 내가 나가지 아빠가 나가시도록 안기다립니다. 원래 조급하고 성질 나쁜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면서 때로는 이런 일로 저런 일로, 때로는 내게 대해서는 도저히 안되니까 , 이렇게 놔두면 더 기고만장할 것이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셔야 하니까 기다리시면서 죽이지도 않고 반쯤 죽였다가 살렸다가 하십니다. 워낙 내 자신을 못 버리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 강하다는 것은 보통 무서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자의식이 강하다는 것이고 개성이 강하다는 게 더러운 겁니다. 하나님 말씀 안 들어요. 전부 자기 개성입니다. 좋은 말로 자기 개성이지 자기 고집입니다. 하나님 말씀 듣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절대적인 능력으로 인도해나가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 안했으면 여기 있을 사람 반도 아니라 다입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붙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안 된 것은 생각안하고 ‘예수 믿는 것이 뭐 이렇게 어렵노, 괴롭노?’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10m 깊은 물속에 빠져있는 것처럼 조용하게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각하던 중에 “정말 내가 바로 믿고 있는가? 내가 믿는 것이 거짓인가?”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부터 메시지 흐름이 각인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각인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배경 따라서 되는 것입니다. 류광수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분위기에서 오는 불신앙이라 했습니다. 비슷합니다만 내가 어떤 배경으로 내 머릿속에 마음속에, 성품이나 체질이 뿌리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참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류광수 목사님은 거짓 믿음의 배경, 불신앙의 배경을 7가지로 분류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5가지 정도로 분류를 해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오는 것이 율법적인 불신앙입니다. 이것만으로 한 시간 하면 되는데 간단히 말하고 싶습니다. 율법이라 할 때,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율법은 성경적인 율법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자라온 관습에서 오는 율법입니다. 무엇을 보고 자랐고 무엇을 보고 의식하고 느끼고 있는가하는 옛날 관습입니다. 유교적인 배경의 율법이 거의 전부입니다. 어른들로부터 온 가문의 배경, 가문의 예절에 대한 관습입니다.
한번은 드라마에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며 변명을 했습니다. 변명을 할 때 눈을 안보고 하는 것이 더 무섭지요. 그러자 ‘어디, 젊은 사람이 두눈 똑바로 뜨고 시어머니를 바라보느냐’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꾸중했습니다. 그것이 옛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누님이 딱 결혼하고 싶었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 집으로 30리 시골길을 걸어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결혼하고 싶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30리 산길을 걸어와서 인사를 드리는데, 공부를 많이 하면 겨의 눈이 안 좋으니까 안경을 끼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대뜸 어디 건방지게 어른 앞에 안경을 끼고 왔냐고, 알아보지도 않고 단번에 NO. 불합격이었습니다. 그 분이 부산에 큰 교회 목사였고, 나중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잘못된 예절에 대한 습관과 판단입니다. 기도할 때도 보면 옛날 노인들은 안경을 벗고 기도하는 분들 있습니다. 전부 옛날 습관입니다. 저는 절대로 안경 벗고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왜? 안경 벗으면 우선 보기에 불편하고 또 기도할 때 벗으면 시간 걸립니다. 바쁜 세상이고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거의 잘못된 예절에 거의 우리가 매여 삽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 마냥 매여 삽니다. 옛날에 각인되었던 배경이 무엇입니까? 미신, 우상입니다. 종교적인 불신앙, 교권적인 불신앙, 신비적인 불신앙 등 여러 가지 불신앙이 있습니다만 한 가지 예만 들어도 그렇습니다. 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잘못된 배경이 전부 우상입니다. 양밥이라 하면 아실지 모르겠는데 크게 하면 굿이고 간단하게 넘어가는 것이 악령을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어도 그런 배경이 남아있습니다. 거기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만큼 기도 많이 하고 잘 믿는 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릴 때 이가 빠질 때 실로 빼기도 했는데 그 때 항상 하셨던 말씀이 마당을 향한 굴뚝에 이를 던지면서 “헌 것 가져가고 새 것 주이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옛날 자랐던 배경이 각인되어서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게 각인되어서 내 안에서 불신앙으로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흑암이 들어올 수 있는 길입니다. ‘왜 이런 사건과 문제들이 나와 우리 가정에’ 라고 하는 것은 다 불신앙의 배경입니다. 무섭고 무서운 것이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앙입니다. 아무리 잘못하고, 문제가 있고, 어렵고, 사건이 생겨도 불신앙만 무너지면 형통하게 됩니다. 요셉만큼 어렵게 고생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있으면 나와 봐라 하면,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불신앙 없었습니다.
오직 믿음! 여러분 믿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잘못된 것에 각인되면 불신앙의 배경 속에서 습관, 체질이 안 되어집니다. 어릴 때부터 복음으로 각인시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류광수 목사님께서 중간에 복음의 개인화라는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요즘은 조금 더 발전시켜서 말씀의 개인화, 기도의 개인화, 전도의 개인화를 강조합니다. 개인화는 우리 자체, 우리 심령 속에 각인된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인된 것이 그렇게 쉽게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뻔히 알고 있고 믿으면서도 고통을 당하고,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흑암의 권세. 악한 영의 권세에 당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문제 있을 때 문제라 생각하지 말고 ‘아,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구나.’ 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축복하시기 위한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어릴 때 사랑을 느꼈다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어떤 사건, 문제, 일이 생겼을 때 아빠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축복하시기 위한 것이지 어떤 것도 어려움 당하기를 원치 않는 분이 아빠입니다. 나의 아빠요, 여러분의 아빠입니다. 나의 아버지요, 여러분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이 확인된 만큼 우리는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감사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맥추 감사절인데, 다른 것 없습니다. 구원의 감사, 그리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 위한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 어렵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옛날 나의 잘못 각인된 체질들입니다. 지금까지 불신앙 밖에 되지 않는 나의 체질, 각인된 것이 없어지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축복하시기 위한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것 회복하면 전부입니다.
잘난척하는 것도 성질 나름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비난 받아도 괜찮습니다. 원래 성질이 나쁜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오직 믿음만이, 예수 그리스도 그 믿음만이 내 안에 있으면 됩니다.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 아빠 되시는 그분이 영광스러운 역사로 인도해주십니다. 우리가 여기로부터 모든 감사가 나옵니다. 적은 것 하나도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마태복음에 찬 물 한 그릇 떠 드리는 것도 절대로 상급을 잃지 않겠다. 맥추절 감사가 적은 것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자에게 베푸는 것도 상급을 잃지 않겠다고 했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모든 것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경제를 회복할 수 있는 이면계약입니다. 어떤 배경으로, 믿음으로, 심정으로 우리가 헌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느냐? 여기에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아무리 헌신하고 노력해도 불평하고 걱정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하는 것은 다 흑암세력의 통로입니다. 잘하면 잘할수록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나는 것이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복음의 역사입니다.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참된 역사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사람은 저렇고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체질과 성질은 절대 안바뀝니다. 복음이 내안에 들어오면 그런 것들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급한 사람은 급한대로 급하게 느린 사람은 느린 대로 필요합니다. 나 같은 게으른 사람은 게으르게 살아도 하나님이 하시기에 축복하십니다. 요즘 교인들 볼 때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나에게 만약 세상의 일을 맡겼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잠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게을렀든지 아버지께서 일을 안 시켰습니다. 일을 시키면 당신이 더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곱째였는데 위로는 그렇게 무섭던 아버지였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했다 싶습니다. 바쁜 농사철에 큰 머슴, 적은 머슴이 일하셨는데 소 먹이를 베어올 사람이 없어서 저에게 해오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뽕나무 잎이 떨어질 때면 훑으면 저절로 다 떨어집니다. 젊은 사람들은 알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허리에 차는 다래끼에 꾹꾹 눌러 담아야 많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냥 넣으면 한두 번 만에 가득 찹니다. 그대로 집에 오면 아버지가 분명히 확인합니다. 오셔서 내가 다래끼를 보여드리면 손으로 꾹 눌러보십니다. 밑바닥에 깔리면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이놈’ 이것이 끝입니다. 이런 나를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목사 시켜서 오늘날까지 축복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빠의 절대적 주권,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아빠의 절대적 주권 믿음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은혜주시면 다 됩니다. 오늘 이 사실이 개개인에게 확실한 믿음으로 복음에 뿌리내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7월 7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목사
잘못된 믿음
(롬10:1-4)
서론: 오늘날은 참과 거짓이 구분이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종교다원론). 혼돈의 삶과 시대에 사는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속고 속이는 허망한 믿음으로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 과거를 조금씩 살펴보면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혹여나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면 ‘나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절대주권 - 우리의 올바른 믿음
(1) 우리는 “아빠의 절대적 주권”을 믿으면 됩니다.
1) 우리는 절대주권에 붙어있기만 하면 됨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며, 이것은 나를 살리게 됨)
2)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에 사건과 일이 생길 때 아빠에게 맡기면 됨
(2) 이러한 절대주권이 우리의 영혼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1) 절대주권이 우리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면 하나님의 절대적 인도가 시작됨
2)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우리의 머리와 마음, 성품과 체질 속에 각인시켜라!!
2. 거짓된 믿음을 반드시 버려라!!
(1) 문제와 사건 속에서 나의 것이 먼저 나오는 것이 거짓된 믿음입니다.
(2) 거짓된 믿음이 자라면 흑암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 되기에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3) 율법적, 종교적, 교권적, 인본주의적, 신비주의적 - 불신앙을 반드시 버려라!!
1) 이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 온 관습에서 나온 것임 (유교적인 배경, 가문의 배경)
2) 어려서 들어간 것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복음으로 각인시켜라!!
3. 구원에 대한 감사로 올바른 믿음을 회복하라!!
(1)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인하는 만큼, 구원의 참된 감사가 나옵니다. (맥추감사절의 의미)
(2) 구원의 감사를 회복하면,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나게 됩니다.
(3) 참된 경제(헌금)의 회복도, 절대 주권(하나님의 말씀)의 믿음 속에 있습니다. (축복의 이면계약)
결론: 우리 심령 속에 잘못 각인된 것이 있다면, 빨리 올바른 믿음으로 바꿔야 합니다(개인화). 혹시나 문제가 있다면 아빠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와 사건, 일 속에서도 아빠의 주권적인 사랑을 붙잡으십시오!! 한주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인도하심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잘못된 믿음”
(롬10:1~4)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행1:1~11
■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막상 서게 되면서 할 말이 참 많고, 또 하고 싶고, 또 여러 가지 마음의 흐름들이 있습니다만, 단 한 마디, 여러분의 기도의 열매로 제가 이 자리에 섰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통해서 하나님이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잘못된 믿음’, ‘거짓된 믿음’이라 이렇게 제목을 삼았는데, 처음에 ‘참된 믿음’이라 그렇게 제목을 삼고 싶었습니다만, 좀 더 여러분 마음속에 심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거짓된 믿음’이라 정했습니다. 반대로 이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여러분들, 잘못하면 거짓과 참이 구분이 안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모호하고, 또 우리 믿음 속에도 다원론들이 들어와서 어느 것이 참 믿음인지, 어느 것이 거짓인지 모를 수 있는, 이런 혼돈의 삶이, 또 혼돈의 시대가 바로 이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서 부분이지만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우리가 갖고 믿고 있는 지금이 정말 참된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 아니면, 속고 또 속이는, 거짓된, 허망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이 말씀은 간단한 것 같지만 뒤집으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내가 지금 평생토록 열심을 내어 믿었다, 아니다, 허망하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죠. 내가 지금까지 진짜 어리석은 것 같고 또 미련한 것 같고, 또 엉터리 같은 믿음으로 살았는데 이게 거짓이 아니고 참된 것이었다, 진짜 자다가도 깜짝 놀랄 일이죠. 여러분들이 오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 자신들의 지난 과거를 조금씩 조금씩, 많이 할 것도 없어요. 조금씩 조금씩 살펴보면 당장 해답이 나올 수 있는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가 상당히 오랫동안 강단에 못 설 뿐 아니라 거의 생각도 마음도 바보처럼 두뇌가 망가져서 오래도록 깊은 물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의욕을 주시면서 무언가 생각이 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 아이패드를 들고 나왔는데, 처음에는 조그만 것을 달랑달랑 들고 나오니까 저게 무언가 싶어서 모두 웃기도 하고 신기해 하기도 하고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갑자기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였고, 제가 컴퓨터를 만지지 못한지가 거의 십년을 안 넘었겠나 싶어요. 왜냐 하면 대상포진으로 제 오른손이 망가지면서 회복이 안 되어서, 쓸 수가 없어서 만지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타자가 제대로 안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손가락이 돌아갑니다. 여러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요, 손가락이 돌아가는 거 감사할 일이죠.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이것은 마음대로 되는데 이것은 좀 잘 안 돼요, 약간. 그래도 돌아갑니다. 이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큰 자판, 집에 있는 큰 컴퓨터에 있는 자판은 힘을 써서 두드려야 해요. 두드려야 하는데 이 손은 힘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두드리는 것이 잘 안 돼요. 큰 컴퓨터의 자판은 아직까지도 잘 못씁니다. 그런데 마침 집에 아이패드가 하나 있어서, 그것은 내가 쓴 것이 아니지만 프로그램이라든가 이런 것 전부 다른 사람이 다 준비해 주었어요. 저는 폼만 가지고 들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자판기를 두드리면 손에 약간만 닿아도 그대로 입력이 됩니다. ‘딱’ 소리가 나면서. 그러니 두드릴 필요도 없고 약간씩 그저 터치만 하면 되요. 얼마나 편한지! 이 손이 잘 안 돌아가도 터치만 하면 되니까 글씨를 쓸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젯밤에 좀 앉아서 12시까지, 두 시간 정도 준비를 하면서, 많이도 준비 못하고 오타가 많이 나와요. 준비하는데 우리 집에서 좀 신기한가 봐요. 생전 컴퓨터로 설교 준비를, 앉아가지고, 원고를 못 들고 나왔는데, 원고를 들고 나오니 아침에 참 장하게 보인다고 (집사람이) 하더라고요. 내가 생각해도 장해요. 여러분의 기도 열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원래 회복이 잘 안된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 듣기로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6개월 정도 서울에 다니면서 고통 클리닉, 안 아프게만 하는 그런 병원이 있어요. 거기 가니까 이게 안 돌아온다고 해요. 평생을 아마 짊어지고 살아야 되겠다, 지금은 평생은 아니고 한 십년 이상 지난 것 같은데 이만큼 돌아왔다는 게 제가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서 감사라는 것을 조금만 생각해도 너무 감사해요. 여러분, 삶에 감사가 없다면 그것은 바보예요. 그것은 전혀 현실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죠. 저는 하도 이상한 삶을 살아서, 이상한 면에서 이상한 삶이 아니라 병중에서 하도 걱정을 끼쳐드리고 이상한 삶을 살았는데, 벌써 한두 달 전인가, 화장실에 갔는데 어떤 남자집사님이 “환영합니다!”하며 박수를 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하니 목사님이 화장실에 왔다는 거예요. 평생 안 갔거든요. 내 알기로는 평생 그래봐야 한 십년 이상인지 몰라요. 투석한 지가 7, 8년 되니까 한 십년 정도 이상 되겠죠. 그런데 오늘 화장실 오는 모습을 봐서 너무 기쁘다는 거예요. 여러분, 화장실 가는 것도 그렇게 기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어려울 때에, 진짜 행복과 축복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면 그것이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무심히 아침에 화장실에 가고 또 돌아오면 화장실에 가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데 그게 보통 축복이 아니에요.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먹고 싸고 잘 자는 것, 이것은 인간 본성의 기본입니다. 왜냐? 우리가 모두 일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하는 것이 딴 게 아니거든요. 알고 보면 먹기 위해서입니다. 잘 먹기 위해서. 그럼 잘 먹는 것이 안 된다면 아무것도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 먹는 낙이 없다, 진짜 힘없을 겁니다. 지금 이 시간 마치고 배가 고프면, 먹을 걸 생각하면 힘이 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잘못되었다, 거짓되었다, 뭐 이런 것을 따진다는 것은 혼돈스런 세계에 어려운 일이지만 본문에 의해서 조금 말씀을 드려볼 생각입니다.
사실은 오늘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의자를 갖다 놓을까요, 흑판을 갖다 놓을까요 하더라고요. 의자를 갖다 놓으면 앉았다 하면 한 시간입니다. 너무 괴롭힐 것 같아서, 여러분. 또 흑판을 갖다 놓으면 제가 너무 오래 서서 또 왔다갔다 해야 하니까 내가 괴롭고. 그래서 다 그만두라, 간단히 강단에 서서 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이렇게 올라 왔습니다. 잘 한 것 같습니다. 마음에 이 오랜, 그렇게 오랜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참 오랜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하면서 자꾸 어려움이 오고, 이런 어려운 문제 속에 부닥치면서 과연 내가 잘 믿었기 때문에 오는 것이냐, 아니면 헛된 믿음을 가지고 헛것을 안고 잘 믿는다고 착가하며 온 것이냐 이 생각이 좀 나더라고요. 그리고 심지어는 직접은 안 들었는데 풍문으로 들은 소리가 우리 교인들도 ‘목사님, 아마 믿음이 없는가보다! 맨날 아프고 자꾸 어려운 문제 오는 거 보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안 된 것같다!’맞아요. 아프면 믿음 없어요. 종일 아픈 것만 생각납니다. 윤성주 목사님이 아프면 이불 덮어쓰고 누워서 참 생각하기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 소리 듣고, 웃기지 마라, 그것은 덜 아파서 그렇다, 진짜 아프면 아무것도 생각 안 난다, 오직 아야 뿐이다, 아야. 생각이 안 나요. 오직 그것뿐인데 뭐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없거든요. 그러니 윤목사가 당장, “아, 그런가.” 했습니다. 아프면 누워서 생각할 시간이 있어서 좋다? 아닙니다. 진짜 아파보면 생각이 안 납니다.
제가 마지막 신장 이식을 하고 난 후에 제일 어렵던 시간이 수술 후 시간입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때가 없는 거 같아요. 마취를 했는데 안 되었는지 적게 했는지……. 의사가 수술을 마치고 제가 회복실에 오자마자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마취가 풀려버렸습니다. 아프지 고통스럽지 혼미하지, 그 때 아리랑을 불렀다던가 오동추야를 불렀다면 참 곤란하잖아요. 그런데 늘 제 마음에 나는 목사라는 마음이 늘 있었던가 봅니다. 간호원들이 왔다갔다 하는 자리에서, 뭔가 시끄럽기도 하고 마음에 좀 불만스러운 게 있었나 봅니다. 마취도 아직 안 풀어졌는데 희미하지만 정신부터 돌아와 버렸으니까. 그래서 제가 큰 소리로 뭐라 그랬냐하면, “나는 하나교회 목사다.”라고 했습니다. 이만하면 잘했지요? 저는 마음속에 우리교인들은 목사의 말은 순종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런데 이 사람들은 내 말에 순종이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라. 이거 달라고 해도 금방 안 가져오고, 휴지 달라고 해도 금방 안 가져오고. ‘뭐 이런 것들이 있노? 목사 말도 안 듣는 이런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나.’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좀 이상한 소리를 한 거 같아요. 다른 이상한 소리가 아니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간호원들이, 목사는 목산데 저 분은 이상한 목사인가 보다 했어요. 늦게서 제가 본정신이 돌아오고 보니까, 간호원들이 보니까 사람이 참 좋거든요. 좋아하는 이유는 저는 아파도 아프다고 안 하니까요. 저한테는 간호원들이 별 할 일이 없어요. 이것 달라 저것 달라고 안합니다. 뭐 시간 가면 될 걸 하는 마음으로, 고함을 지르고 큰 소리를 치면서 이거달라 저거달라 안 했는데, 수술 후에 그 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수술 후에 그러고 난 뒤에) 회복하는데 사람이 너무 가만히 있거든요. 암만 아파도 아무 말 안할 거 같으니 그러니 자기들이 와서 “뭐 도와드릴까요, 문제 있어요? 아픈 데 있거든 얘기해 주세요.”하더라고요.
무의식 중에 내게 온 하나의 순간적인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지나온 과정에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저 같은 경우는 체질이 되었다기 보다는 뭔가 습관이 된 거 같아요. 어지간한 문제가 있어도 아무 소리 안 합니다. 옛날부터 좀 문제 있고 고통스럽고 그러면 저 혼자 방에 들어가서 이불 덮어쓰고 누워 있으면 끝입니다. 집사람이 더 궁금하지요. 저 사람이 무슨 이유 때문에 아무 소리 안하나? 그런데 얼마나 아무 소리 안 했느냐? 맹장염이 생겼는데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도 아무 소리 안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아프니까 저도 견디기 힘들었던가 봅니다. 워낙 고통이 극치가 되니까 나도 모르게 침대에서 뛰었습니다. 내 생각에 5cm는 뛰었지 않나 합니다. 그러다가 정신아 가버렸습니다. 그 때 집사람이 놀라서 사람들을 불러서 응급실에 갔습니다. 그 길로 죽을 뻔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살아났어요. 기도의 열매로. 그 속에서 내 마음 속에 복음이라고 말하는 속에 깊이 뿌리 내린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하면 좀 엄하잖아요. 그래서 제 마음에 언제부터인가 새겨진 것이 아빠입니다. 얼마나 다정합니까. 아빠라고 부르면 해결 안 될 게 없습니다. 정말 행복한 포근한 이름입니다. 그래서 요번에 산업선교회에 출품을 꼭 하나 해야 된데요. 출품을 뭘 해야 되나? 윤경우 청년이 서예를 하고 미술 전문인이라고 합니다. 듣자하니까 은혜를 입어서 프랑스 어떤 미술관에 출품을 하러 간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앞으로는 윤경우 청년이 낸 작품은 굉장히 값이 오를 거니까 진작 사두라고 했다 합니다. 어쨌든 작품을 하나 냈습니다. 그 내용이 “아빠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거기에다가 주를 달았어요. 우리 원로 목사님의 지나온 생애에 신앙의 고백이라고 주를 달아놨어요.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다른 사람에게 팔릴까 싶어서 그것을 거금을 주고 얼른 샀다고 합니다. 직접 듣지는 않았는데, 내가 참 잘 샀다고 했다 합니다. 류목사님도 산업선교회 1강 메시지에서 나왔는데 아빠의 절대적 주권이라고 나왔습니다. 상당히 마음에 부딪친 바가 있었나 봅니다. 저분이 저런 심정으로 이 고통을 이겼구나 하는 아리한 마음이 들더라는 내용으로 얘기를 한 거 같아요. 사실입니다. 저는 제게 절대적 주권이 엄격한 것이라든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이 아니라, 너무나 다정한 무엇이든지 말하면 이루어주시는 아빠의 절대적 주권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게 오늘날 나의 신앙고백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이 우리 교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빠의 절대적 주권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니면 벌써 가룟 유다처럼 제 길로 갔나이다라고 할 텐데 여기에 붙어 있기만 한 것도 기적입니다.
제가 당회장으로 있을 때 어느 장로님을 구박을 좀 한 거 같아요. 그 배경은 다른 당회장님에게 마음대로 얘기하기가 힘들잖아요. 예의도 지켜야 되고……. 그런데 그 분과의 관계는 좀 가까운 관계라서 당회에 얘기하고 싶을 때는 그 개인을 찍어서 얘기했습니다. 상당한 오랜 시간 동안 (하도 구박을 하니) 그게 얼마나 괴로운 시간이었겠습니까? 한 번은 우연히 만났는데, “목사님, 제가 일단 이 교회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습니다.”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괴롭다 이겁니다. 걸핏하면 자기를 찍어서 좋은 소리 안 좋은 소리 하니까. “그런데 붙어있기를 참 잘했습니다.”고 하더라구요. 붙어만 있어라. 다 됩니다. 왜? 아빠의 절대적 주권. 여기에 붙어만 있으면 됩니다. 왜? 하나님이 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만 확실히 내 안에, 내면에, 영적인 것 속에 뿌리만 내리고 있으면 다 됩니다. 그런데 사실 너무 안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뭐든지 사건만 생기면 내가 하지 아빠가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일만 생기면 내가 나가지 아빠가 나가시도록 안기다립니다. 원래 조급하고 성질 나쁜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면서 때로는 이런 일로 저런 일로, 때로는 내게 대해서는 도저히 안되니까 , 이렇게 놔두면 더 기고만장할 것이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셔야 하니까 기다리시면서 죽이지도 않고 반쯤 죽였다가 살렸다가 하십니다. 워낙 내 자신을 못 버리니까 그렇습니다. 자존심 강하다는 것은 보통 무서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자의식이 강하다는 것이고 개성이 강하다는 게 더러운 겁니다. 하나님 말씀 안 들어요. 전부 자기 개성입니다. 좋은 말로 자기 개성이지 자기 고집입니다. 하나님 말씀 듣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절대적인 능력으로 인도해나가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 안했으면 여기 있을 사람 반도 아니라 다입니다. 다 도망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붙어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 안 된 것은 생각안하고 ‘예수 믿는 것이 뭐 이렇게 어렵노, 괴롭노?’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10m 깊은 물속에 빠져있는 것처럼 조용하게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각하던 중에 “정말 내가 바로 믿고 있는가? 내가 믿는 것이 거짓인가?”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얼마 전부터 메시지 흐름이 각인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각인되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배경 따라서 되는 것입니다. 류광수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분위기에서 오는 불신앙이라 했습니다. 비슷합니다만 내가 어떤 배경으로 내 머릿속에 마음속에, 성품이나 체질이 뿌리를 내린다는 말입니다. 참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류광수 목사님은 거짓 믿음의 배경, 불신앙의 배경을 7가지로 분류를 하셨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5가지 정도로 분류를 해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오는 것이 율법적인 불신앙입니다. 이것만으로 한 시간 하면 되는데 간단히 말하고 싶습니다. 율법이라 할 때,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율법은 성경적인 율법이 아닙니다. 옛날부터 자라온 관습에서 오는 율법입니다. 무엇을 보고 자랐고 무엇을 보고 의식하고 느끼고 있는가하는 옛날 관습입니다. 유교적인 배경의 율법이 거의 전부입니다. 어른들로부터 온 가문의 배경, 가문의 예절에 대한 관습입니다.
한번은 드라마에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하니까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며 변명을 했습니다. 변명을 할 때 눈을 안보고 하는 것이 더 무섭지요. 그러자 ‘어디, 젊은 사람이 두눈 똑바로 뜨고 시어머니를 바라보느냐’고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꾸중했습니다. 그것이 옛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누님이 딱 결혼하고 싶었던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 집으로 30리 시골길을 걸어와서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결혼하고 싶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30리 산길을 걸어와서 인사를 드리는데, 공부를 많이 하면 겨의 눈이 안 좋으니까 안경을 끼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대뜸 어디 건방지게 어른 앞에 안경을 끼고 왔냐고, 알아보지도 않고 단번에 NO. 불합격이었습니다. 그 분이 부산에 큰 교회 목사였고, 나중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잘못된 예절에 대한 습관과 판단입니다. 기도할 때도 보면 옛날 노인들은 안경을 벗고 기도하는 분들 있습니다. 전부 옛날 습관입니다. 저는 절대로 안경 벗고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왜? 안경 벗으면 우선 보기에 불편하고 또 기도할 때 벗으면 시간 걸립니다. 바쁜 세상이고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거의 잘못된 예절에 거의 우리가 매여 삽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것 마냥 매여 삽니다. 옛날에 각인되었던 배경이 무엇입니까? 미신, 우상입니다. 종교적인 불신앙, 교권적인 불신앙, 신비적인 불신앙 등 여러 가지 불신앙이 있습니다만 한 가지 예만 들어도 그렇습니다. 종교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잘못된 배경이 전부 우상입니다. 양밥이라 하면 아실지 모르겠는데 크게 하면 굿이고 간단하게 넘어가는 것이 악령을 막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어도 그런 배경이 남아있습니다. 거기에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만큼 기도 많이 하고 잘 믿는 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릴 때 이가 빠질 때 실로 빼기도 했는데 그 때 항상 하셨던 말씀이 마당을 향한 굴뚝에 이를 던지면서 “헌 것 가져가고 새 것 주이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옛날 자랐던 배경이 각인되어서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게 각인되어서 내 안에서 불신앙으로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 흑암이 들어올 수 있는 길입니다. ‘왜 이런 사건과 문제들이 나와 우리 가정에’ 라고 하는 것은 다 불신앙의 배경입니다. 무섭고 무서운 것이 하나님을 안 믿는 불신앙입니다. 아무리 잘못하고, 문제가 있고, 어렵고, 사건이 생겨도 불신앙만 무너지면 형통하게 됩니다. 요셉만큼 어렵게 고생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있으면 나와 봐라 하면, 없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불신앙 없었습니다.
오직 믿음! 여러분 믿음으로 자라게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잘못된 것에 각인되면 불신앙의 배경 속에서 습관, 체질이 안 되어집니다. 어릴 때부터 복음으로 각인시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류광수 목사님께서 중간에 복음의 개인화라는 말씀을 하셨었습니다. 요즘은 조금 더 발전시켜서 말씀의 개인화, 기도의 개인화, 전도의 개인화를 강조합니다. 개인화는 우리 자체, 우리 심령 속에 각인된 것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인된 것이 그렇게 쉽게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뻔히 알고 있고 믿으면서도 고통을 당하고,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흑암의 권세. 악한 영의 권세에 당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문제 있을 때 문제라 생각하지 말고 ‘아,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구나.’ 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축복하시기 위한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어릴 때 사랑을 느꼈다면 그것이 전부입니다. 어떤 사건, 문제, 일이 생겼을 때 아빠의 주권적인 사랑입니다. 축복하시기 위한 것이지 어떤 것도 어려움 당하기를 원치 않는 분이 아빠입니다. 나의 아빠요, 여러분의 아빠입니다. 나의 아버지요, 여러분의 아버지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이 확인된 만큼 우리는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구원의 감사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맥추 감사절인데, 다른 것 없습니다. 구원의 감사, 그리고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 위한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 어렵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옛날 나의 잘못 각인된 체질들입니다. 지금까지 불신앙 밖에 되지 않는 나의 체질, 각인된 것이 없어지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축복하시기 위한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것 회복하면 전부입니다.
잘난척하는 것도 성질 나름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비난 받아도 괜찮습니다. 원래 성질이 나쁜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 오직 믿음만이, 예수 그리스도 그 믿음만이 내 안에 있으면 됩니다.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를 위해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 아빠 되시는 그분이 영광스러운 역사로 인도해주십니다. 우리가 여기로부터 모든 감사가 나옵니다. 적은 것 하나도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마태복음에 찬 물 한 그릇 떠 드리는 것도 절대로 상급을 잃지 않겠다. 맥추절 감사가 적은 것입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제자에게 베푸는 것도 상급을 잃지 않겠다고 했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모든 것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경제를 회복할 수 있는 이면계약입니다. 어떤 배경으로, 믿음으로, 심정으로 우리가 헌금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느냐? 여기에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아무리 헌신하고 노력해도 불평하고 걱정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하는 것은 다 흑암세력의 통로입니다. 잘하면 잘할수록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나는 것이 아빠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복음의 역사입니다.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참된 역사입니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사람은 저렇고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체질과 성질은 절대 안바뀝니다. 복음이 내안에 들어오면 그런 것들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급한 사람은 급한대로 급하게 느린 사람은 느린 대로 필요합니다. 나 같은 게으른 사람은 게으르게 살아도 하나님이 하시기에 축복하십니다. 요즘 교인들 볼 때마다 하나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나에게 만약 세상의 일을 맡겼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옛날부터 잠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게을렀든지 아버지께서 일을 안 시켰습니다. 일을 시키면 당신이 더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곱째였는데 위로는 그렇게 무섭던 아버지였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했다 싶습니다. 바쁜 농사철에 큰 머슴, 적은 머슴이 일하셨는데 소 먹이를 베어올 사람이 없어서 저에게 해오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뽕나무 잎이 떨어질 때면 훑으면 저절로 다 떨어집니다. 젊은 사람들은 알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옛날에 허리에 차는 다래끼에 꾹꾹 눌러 담아야 많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냥 넣으면 한두 번 만에 가득 찹니다. 그대로 집에 오면 아버지가 분명히 확인합니다. 오셔서 내가 다래끼를 보여드리면 손으로 꾹 눌러보십니다. 밑바닥에 깔리면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이놈’ 이것이 끝입니다. 이런 나를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해야 하는 목사 시켜서 오늘날까지 축복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빠의 절대적 주권, 낙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아빠의 절대적 주권 믿음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은혜주시면 다 됩니다. 오늘 이 사실이 개개인에게 확실한 믿음으로 복음에 뿌리내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7월 7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목사
잘못된 믿음
(롬10:1-4)
서론: 오늘날은 참과 거짓이 구분이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종교다원론). 혼돈의 삶과 시대에 사는 우리는 참된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속고 속이는 허망한 믿음으로 사는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 과거를 조금씩 살펴보면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혹여나 우리에게 어려움이 오면 ‘나의 믿음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를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1. 하나님의 절대주권 - 우리의 올바른 믿음
(1) 우리는 “아빠의 절대적 주권”을 믿으면 됩니다.
1) 우리는 절대주권에 붙어있기만 하면 됨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며, 이것은 나를 살리게 됨)
2)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에 사건과 일이 생길 때 아빠에게 맡기면 됨
(2) 이러한 절대주권이 우리의 영혼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1) 절대주권이 우리의 영혼에 뿌리를 내리면 하나님의 절대적 인도가 시작됨
2)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우리의 머리와 마음, 성품과 체질 속에 각인시켜라!!
2. 거짓된 믿음을 반드시 버려라!!
(1) 문제와 사건 속에서 나의 것이 먼저 나오는 것이 거짓된 믿음입니다.
(2) 거짓된 믿음이 자라면 흑암이 들어올 수 있는 틈이 되기에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3) 율법적, 종교적, 교권적, 인본주의적, 신비주의적 - 불신앙을 반드시 버려라!!
1) 이것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 온 관습에서 나온 것임 (유교적인 배경, 가문의 배경)
2) 어려서 들어간 것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복음으로 각인시켜라!!
3. 구원에 대한 감사로 올바른 믿음을 회복하라!!
(1)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인하는 만큼, 구원의 참된 감사가 나옵니다. (맥추감사절의 의미)
(2) 구원의 감사를 회복하면, 우리 안의 그리스도의 영광만 드러나게 됩니다.
(3) 참된 경제(헌금)의 회복도, 절대 주권(하나님의 말씀)의 믿음 속에 있습니다. (축복의 이면계약)
결론: 우리 심령 속에 잘못 각인된 것이 있다면, 빨리 올바른 믿음으로 바꿔야 합니다(개인화). 혹시나 문제가 있다면 아빠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와 사건, 일 속에서도 아빠의 주권적인 사랑을 붙잡으십시오!! 한주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인도하심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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