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
2013-09-01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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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
(행3:1~16)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3:1~16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오늘 찬양대 찬양 부른 것처럼 한 번 더 인사합시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할렐루야! 예, 감사합니다.
지난 주에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원하시는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보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럴 때 하나님께서 세상 앞에,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하고, 세상 사람들로 말미암아 칭송을 받도록 하고, 또 거기에 실제로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음으로,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결론을 가졌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죠, 그래서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가지면서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색깔이 어떤 색깔일까 하는 부분을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이 교회의 일반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면, 오늘 교회로서 세상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교회의 일반적인 모습에서, 사도행전 3장, 4장 죽 넘어가서 보면 교회에 대해서 구체적인 그림들, 또 예화들을 보여주면서 어떠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그 다음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도행전 3장, 4장, 5장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특히 정말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귀중한 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이 몸된 교회에 허락하신 것이 있다면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인자가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회의 임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축복된 역사를 다 상실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 신앙 생활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한정짓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구체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역사를 안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신앙은 그냥 단순히 교회 안에서의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고 계시고 그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면서 세계복음화하고 계시고 그 주님이 마지막 날에 재림주로 오신다는, 이 사실적인 언약들을 저와 여러분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훈적인 가르침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이고 지식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도행전은 움직이는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살아 있고 실제적인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지금도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사실적인 역사하심을 믿는 것, 이게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여기에 ‘아멘’하고 믿는 사람들은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 현장 속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걸음 속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에 보면 언약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는데 그 언약을 붙잡으니까 개인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게 사도행전 2장 1절~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각 사람 위에 머물러 있던 성령께서 사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개인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개인이 변화되니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 그 다음 부분을 보면 분명히 현장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현장에 전도의 문이 열리고 말씀이 성취되고 제자들이 세워지고 현장이 날마다 변화되는 그런 축복된 증거거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사도행전 1장, 2장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마가다락방에서 이 성령의 충만함, 개인이 변화되고 지역이 변화되는 이 사실을 맛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보면 그대로 있는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전에 있지 못했던 새로운 눈들이 이들에게 열려졌습니다. 마가다락방에서 주의 성령의 충만하심을 체험하고 나니까 이들에게 새로운 눈이 열렸는데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하고 체험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알고 있는 것과 체험하는 것, 보는 것,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마가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개인의 변화를 체험했고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현장이 변화되는 사실을 보았고 그와 더불어 이 사람들이 지금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들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1. 성령충만 받은 후 - 보는 눈이 열렸다.
그래서 전도자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 충만 받은 후에 이들은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게 바로 전도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보는 대로 보이는 대로 봤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보이는 대로 본 것이 아니라 다른 눈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 4절에 보면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전도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오늘 여기에 한 단어로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주목하여 이르되’ 이 말로 집중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은 육신적인, 외적인 부분을 본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근본 영적인 문제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특히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본문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나면서 못 걷게 된 자, 그러면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 사실 나면서 못 걷게 되었다는 것, 이 부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도자인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라는 말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떠난 가운데 운명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든 결론입니다. 운명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운명 가운데서 태어난 것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날마다 하는 것이 있다면 성전 문 밖에서 구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를 채우는, 종교 생활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의 모든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돈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모든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한 부분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본문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 만나지 못한 세상, 하나님 만나지 못한 인생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운명과 종교와 육신에 잡혀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인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이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실은 영적으로 하나님 만나지 못한 육신을 따르고, 종교를 이용하고 운명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문제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사람의 불행이 있다면 타고날 때부터 불행을 가지고 태어났잖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것, 이게 오히려 더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불행 보다도 내가 살아가면서 뭔가를 이용해서 득을 보고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게 사실 더 큰 불행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생이 여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 사람들에게 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자인 여러분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40년 동안이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 종교인들이 그들에게 늘 하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결국 몇 푼의 동전을 던져주었습니다. 이것을 물질적인 봉사라 하지요. 좀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을 그 성전에서 늘 항상 구걸할 수 있도록 누군가는 성전에 내어다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2절에 보면 이 사람을 성전으로 메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육신적인 봉사입니다. 다 좋은 겁니다. 물질도 주고 육신적인 봉사도 주었습니다. 다 좋은 겁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게 바로 종교인들의 봉사입니다. 육신적인 봉사, 근본을 보지 못한 봉사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 시대 속에서 축복하셔서 진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세상 앞에서 물질적으로 봉사하고 육신적으로 봉사하는 차원이 아니라 근본을 해결하는 축복된 전도자로 우리를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현장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을 향해서 나아갔다고 합니다.
1, 2절에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을 향해 나아갔다고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 기도의 사람들이니까 정시기도의 비밀을 회복하기 위해서, 정시기도의 비밀을 가지고 기도하러 갔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또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단순히 이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갔을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간다면, 최고의 기도의 자리는 마가다락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리가 마가다락방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리가 마가다락방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자들에게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온 자리가 어디냐? 마가다락방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은혜 받았던 때를 잊지 못하잖아요. 내게 은혜 주신 사람도 잊지 못하고, 은혜 받은 장소도 잊지 못하고, 은혜 받은 시간도 잊지 못하고, 두고두고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 신앙이 좋았다는 고백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가 특별히 은혜 받은 때와 장소를 잊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매 연초만 되면 자기가 신앙생활 속에서 그나마 은혜 받았던 그 장소를 찾아갑니다. 1박 2일이나 시간이 되면 2박 3일 동안 찾아갑니다. 연초가 얼마나 춥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속에서 은혜 받았던 그 자리가 잊어지지 않으니까 오랫동안 그 자리를 계속해서 찾아가시는 것을 봤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좋은 기도의 자리가 있다면 마가다락방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였습니까? 약속 잡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그 사실대로 성령이 임한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를 잊지 않고 마가다라방에 가야 할텐데 오늘 본문에 성전을 향해서 나갔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의 차원을 넘어서서 중요한 현장을 봤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참된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해서 종교에 매인 바 되어 가지고 이유도 없이 멸망 받고 있는 종교생활 하고 있는 그런 현장들을 봤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현장을 오르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중요한 현장을 보게 됩니다. 성전 미문에 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늘 항상 성전을 드나들면서 그를 봤을 것입니다. 처음 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무어라고 했느냐? "주목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그 인생에 가장 필요한 근본이 무엇인가를 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베드로가 베드로가 선포하였습니다. 왜냐? 근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령충만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진짜 성령충만함은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고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면 종교인들은 뭐냐?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뭐냐?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를 보는 동시에 이 사람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앉은뱅이인 이 사람이 일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근본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필요를 보고 근본을 봤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서 왜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느냐고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가난하면 구제하고 봉사해야 하지 않냐고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구제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람들의 요구입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착해야 하고 선해야 하고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교회에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교회를 향한 요구입니다. 물론 그것을 해야 합니다만 나중에 가면 결국 인간은 거기에 종노릇하게 됩니다. 우리는 요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근본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를 왜 축복하시고 우리 교회를 왜 인도하시느냐? 이 땅에 이 세상에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필요를 해결하는 교회로 하나님은 이 교회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세상에서 교회를 향한 욕을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핍박도 얻을 수 있고 욕도 들을 수 있습니다. 왜냐?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입니다. 세상의 근본을 바꾸는 자입니다. 이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 가지고 있는데 하나 없어서 멸망 받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없어서 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지금 사람들은 죄와 저주 가운데 있습니다. 사탄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 몰라서 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1-6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해답을 얻지 못하고 마귀의 자녀로서 헤매는 것이 지금 세상이고 지금 시대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해놓으신 게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하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모든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그 일을 하나님이 해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이시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 되십니다. 에베소서 1:3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에베소서 1:10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통일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21-22에 보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느니라. 할렐루야. 모든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알게 될 때 정말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 안에 모든 축복을 담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름 안에 모든 축복을 다 담아주셨는데 그것을 버리시고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가지고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오늘 기도하면 모든 것 다 누릴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3에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모든 지식이 감추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 내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3:21에 만물이 다 너희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에 보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그 이름 안에 모든 것 다 담아주셨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고, 특별히 모든 것을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생에 필요한 것을 하셨는데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 있게 6절에 분명히 그 사람의 필요를 알고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그 근본 문제, 필요를 채워주는 답을 말씀한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다 가지신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가지고 있는 것들 통해서 행복의 기준을 삼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들 통해서 축복받는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준들이 지금 흐트러져 있기 때문에 뭔가 소유하지 않고 있으면 내가 가라앉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는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내가 뭔가 없어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까? 착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마나보면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착각입니다.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믿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참된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줄 것이 그리스도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람의 근본과 필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되기 전에 우리가 다른 것을 심어준다면, 그리스도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 들어가도록 말한다면 그것이 죄 중에 죄입니다. 진짜 그리스도 필요한 사람으로,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 필요함이 없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세우셨다는 사실. 오늘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있는 그리스도밖에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밖에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입니다. 여러분, 현장에서 다른 이야기들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만 주는, 줄 것이 그리스도밖에 없는 참된 전도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이 사람이 육신이 치유되었습니다. 일어났습니다. 40년 동안 도저히 해결 안 되던 나면서 걷지 못한 부분들이 해결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일어나 뛰어 걸으며 하나님께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이 엄청난 응답들이 참된 전도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교회 성도 한분 한분이 현장에서 그리스도밖에 말할 것이 없는 자가 되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축복을 누립시다. 다른 모든 것 자랑하지 말고 오늘 다음에 나옵니다만 다른 것 이야기하지 마시고 진짜 현장의 필요, 현장의 근본을 보고 그리스도 밖에 줄 수밖에 없는 자가 되면 우리는 행복한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2. 복음 전하는 사람의 자세(행3:12, 15~16)
복음 전하는 전도자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전도자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는데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현장에 서야 될 것인가? 40년 안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걷게 되니까 그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게 됩니다.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이냐?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그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왜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또 이 일로 말미암아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했습니다. 사도행전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여러분, 그리스도 비밀 모르는 자는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 해결하신 자라는 사실을 알면 기적이 일어나도 놀라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구나!’ 결론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연한 것이 아니냐. 왜 놀랍게 여기느냐 그러면서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역시 일어나고, 기적 일어나고, 현장에 조금 사역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보다도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허황된 인기, 영광, 명예 다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모든 백성들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옮긴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전도자입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완전히 베드로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날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모든 일에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특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앞서가는 것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사실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관심가시는 것조차도 베드로는 마음 불편해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우편에, 한 사람은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할 때 제자들이 하나같이 일어나서 다 화를 냈습니다. 사실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것 외에 다른 제자들에게 관심두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또 너무 열심히 특심이라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가야 하는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가 완전히 바뀌어졌는데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면서 모든 백성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면서 15-16절에 보면 더욱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14절부터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나를 바라보고 우리를 바라보지 말라. 이렇게 낫게 한 것은 나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것. 너희가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예수를 그러한 증거로 살리시고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셨고, 이 사람이 오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앞에 서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관심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께로 소개하는 역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 우리가 사역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자그마한 역사들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들을 챙기는 것은 전도자로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망하게 됩니다. 모든 관심들을 그리스도께로 돌리는 것. 마치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앞서 나온 사람 아닙니까. 세례를 주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보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아니냐? 나는 그리스도 아니다. 그러면 당신이 엘리야 아니냐? 엘리야도 아니다. 당신이 선지자 아니냐? 선지자도 아니다. 그러면 당신이 누구냐? 우리를 보낸 사람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이야기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나는 주의 길을 열기 위해서 먼저 보낸 자다. 주의 대로를 열기 위해서 먼저 모낸 자라고 하면서 내 뒤에 오신 이가 그리스도이신데 나는 그의 신발 끈 묶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자기 앞에 오시는 부분을 보면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라 십자가 지고 갈 어린양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갈 어린양을 보라" 고 말씀하신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것이 지속해서 쓰임 받을 수 있는 전도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께로! 지난 날 그리하지 않았는데 베드로가 바뀌어진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정말로 참된 제자는 현장에서 여러분을 향해서 찾아올 때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서 그 문제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 받도록 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내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해결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문제를 해결 받도록 하는 것이 바로 참된 제자라는 사실.
그리고 오늘 참된 제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1절부터 읽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팀이 되어 올라갔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중의 능력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은 능력중의 능력입니다. 저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함께하는 것 잘 안되고 같이 가는 것이 잘 안됩니다. 제게 있는 단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진짜 함께할 수 있고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은 능력중의 능력인데 특별히 언약가진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 되어질 때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더불어 이야기했습니다. 더불어 같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같은 사역을 감당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에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준비해놓았는가? 인생의 근본문제를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데 그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이름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지는 가장 귀중한 현장을 하나님이 준비해놓고 있었다는 것. 복음 언약 붙잡은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 되어질 때 진짜 근본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 이름을 선포할 수 있는 그 현장들을 하나님이 준비해놓았다는 사실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함께하는 축복 정말로 복음 안에서 언약 안에서 하나 되어 같이 갈 수 있는 자가 바로 일꾼이요, 제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제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약 안에서 하나 되어 같이 갈 수 있는 자, 그와 더불어 진짜 중요한 모든 관심과 모든 역사를 그리스도께로 돌릴 수 있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의 역사 속에 지속해서 쓰임 받는 참된 전도자들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현장을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느냐? 참 중요합니다. 어떤 눈을 가지고 세상과 현장과 사람과 현실을 바라보느냐? 복음과 전도의 눈으로 바라보면 기도와 메시지가 분명히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 그 축복을 누린 사람 아닙니까. 또 복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 되어지게 될 때 거기에 세상과 현실과 시대를 살리고, 시대를 변화시키는 그 축복된 응답을 주시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과 전도를 가지고 현장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메시지를 가진 자로 세워지고, 복음과 기도로 하나 되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현장들을 변화시키는 이 일에 쓰임 받는 주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9월 1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
(행3:1-16)
서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눅19:10). 하나님의 역사를 안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교회 안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살아계셔서 성령으로 사실적인 역사를 하시며 세계복음화를 이루시고 재림주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아멘으로 누림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개인이 변화되고 지역과 현장이 변화되어지며, 전도의 문이 열리고 말씀이 성취되며 제자들이 세워집니다(행1,2장)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의 역사를 체험하고 난 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1. 성령충만 받은 후 -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1) 세상 사람들은 운명과 종교와 육신에 잡혀 있고,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육신을 따르고 종교를 이용하며 운명에 완전히 사로잡힘
2) 자연히 우상숭배, 정신문제, 육신문제에 빠져 후손들에게까지 유산을 남기고, 미래의 소망도 없음
(2) 전도자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현장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함)
1)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세상(현장)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함
a. 제 구시 기도시간 : 기도가 아닌 전도를 위함임 b. 성전 : 해답 없이 종교에 묶여 이유도 모른 체 고통당하는 수많은 종교인
c. 나면서 못 걷게 된 자 :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보임 d. 주목하여 이르되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봄 (근본을 보는 것이 성령충만)
2)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함 (전도의 눈)
(3) 우리는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채워주고 근본을 바꿔주는 자입니다.
1) 우리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임 (인생 모든 문제 : 하나님 떠남, 죄로 인한 고통, 사탄문제)
2)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음은 물론, 모든 것 되심 (엡1:3,10,20-23, 골2:3, 골3:21, 고후6:10)
(4)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 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또한 줄 것도 그리스도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행3:6)
2) 현장에서 그리스도만 선포될 때, 육신이 치유되고 신분과 운명이 바뀌었음 (성전 미문 앉은뱅이)
2. 복음 전하는 사람의 자세
(1) 우리는 모든 관심과 영광과 찬송을 그리스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1) 베드로는 허황된 인기와 명예를 버리고,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함 (행3:12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2) 사역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 바라봄으로 그리스도께서 해결하도록 만들어야 함
(2) 우리는 복음과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1) 함께 하고, 함께 갈 수 있는 것은 능력 중의 능력임 (베드로와 요한은 더불어 팀이 됨)
2) 언약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 되었을 때, 근본문제를 해결할 현장을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심
결론: 우리가 어떤 눈으로 세상, 현장, 사람, 현실을 바라보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것을 복음과 전도의 눈으로 바라보면 기도와 메시지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복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 되어질 때, 분명 세상과 현장과 시대를 변화시키는 응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 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
(행3:1~16)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행3:1~16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오늘 찬양대 찬양 부른 것처럼 한 번 더 인사합시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할렐루야! 예, 감사합니다.
지난 주에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원하시는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에 보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럴 때 하나님께서 세상 앞에,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도록 하고, 세상 사람들로 말미암아 칭송을 받도록 하고, 또 거기에 실제로 기사와 표적으로 함께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음으로,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결론을 가졌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이죠, 그래서 서로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가지면서 여기에 하나님께서,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색깔이 어떤 색깔일까 하는 부분을 우리가 성경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이 교회의 일반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면, 오늘 교회로서 세상 앞에서 어떻게 서야 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2장의 교회의 일반적인 모습에서, 사도행전 3장, 4장 죽 넘어가서 보면 교회에 대해서 구체적인 그림들, 또 예화들을 보여주면서 어떠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그 다음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사도행전 3장, 4장, 5장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특히 정말 우리가 신앙 생활한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 세상을 살릴 수 있는 귀중한 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주님이 몸된 교회에 허락하신 것이 있다면 누가복음 19장 10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인자가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회의 임무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축복된 역사를 다 상실하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 신앙 생활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한정짓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구체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역사를 안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신앙은 그냥 단순히 교회 안에서의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고 계시고 그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면서 세계복음화하고 계시고 그 주님이 마지막 날에 재림주로 오신다는, 이 사실적인 언약들을 저와 여러분은 믿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상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훈적인 가르침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이고 지식적인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도행전은 움직이는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살아 있고 실제적인 복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지금도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사실적인 역사하심을 믿는 것, 이게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여기에 ‘아멘’하고 믿는 사람들은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세상 현장 속에 있는 저와 여러분의 걸음 속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실제적인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히 사도행전에 보면 언약을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는데 그 언약을 붙잡으니까 개인이 변화되었습니다. 그게 사도행전 2장 1절~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각 사람 위에 머물러 있던 성령께서 사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개인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고, 개인이 변화되니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2장 그 다음 부분을 보면 분명히 현장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어요. 현장에 전도의 문이 열리고 말씀이 성취되고 제자들이 세워지고 현장이 날마다 변화되는 그런 축복된 증거거리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사도행전 1장, 2장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마가다락방에서 이 성령의 충만함, 개인이 변화되고 지역이 변화되는 이 사실을 맛본 사람이 오늘 본문에 보면 그대로 있는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부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전에 있지 못했던 새로운 눈들이 이들에게 열려졌습니다. 마가다락방에서 주의 성령의 충만하심을 체험하고 나니까 이들에게 새로운 눈이 열렸는데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하고 체험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알고 있는 것과 체험하는 것, 보는 것,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마가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개인의 변화를 체험했고 성령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현장이 변화되는 사실을 보았고 그와 더불어 이 사람들이 지금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눈들이 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1. 성령충만 받은 후 - 보는 눈이 열렸다.
그래서 전도자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성령 충만 받은 후에 이들은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이게 바로 전도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보는 대로 보이는 대로 봤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보이는 대로 본 것이 아니라 다른 눈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 4절에 보면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전도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오늘 여기에 한 단어로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주목하여 이르되’ 이 말로 집중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은 육신적인, 외적인 부분을 본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근본 영적인 문제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특히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본문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나면서 못 걷게 된 자, 그러면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자, 사실 나면서 못 걷게 되었다는 것, 이 부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도자인 저와 여러분에게 지금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라는 말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하나님을 떠난 가운데 운명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모든 결론입니다. 운명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운명 가운데서 태어난 것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날마다 하는 것이 있다면 성전 문 밖에서 구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를 채우는, 종교 생활하고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의 모든 관심은 어디에 있느냐? 돈에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모든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한 부분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본문을 통해서 지금 하나님 만나지 못한 세상, 하나님 만나지 못한 인생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운명과 종교와 육신에 잡혀서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인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이 인간의 모든 문제는 사실은 영적으로 하나님 만나지 못한 육신을 따르고, 종교를 이용하고 운명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문제인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사람의 불행이 있다면 타고날 때부터 불행을 가지고 태어났잖아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 것, 이게 오히려 더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불행은 종교를 이용해서 자기의 이익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불행 보다도 내가 살아가면서 뭔가를 이용해서 득을 보고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게 사실 더 큰 불행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생이 여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 사람들에게 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자인 여러분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이 세상이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40년 동안이나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 종교인들이 그들에게 늘 하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결국 몇 푼의 동전을 던져주었습니다. 이것을 물질적인 봉사라 하지요. 좀 더 나아가서 이 사람을 그 성전에서 늘 항상 구걸할 수 있도록 누군가는 성전에 내어다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2절에 보면 이 사람을 성전으로 메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육신적인 봉사입니다. 다 좋은 겁니다. 물질도 주고 육신적인 봉사도 주었습니다. 다 좋은 겁니다. 그런데 결국은 이게 바로 종교인들의 봉사입니다. 육신적인 봉사, 근본을 보지 못한 봉사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 시대 속에서 축복하셔서 진짜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세상 앞에서 물질적으로 봉사하고 육신적으로 봉사하는 차원이 아니라 근본을 해결하는 축복된 전도자로 우리를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현장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을 향해서 나아갔다고 합니다.
1, 2절에 보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을 향해 나아갔다고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 기도의 사람들이니까 정시기도의 비밀을 회복하기 위해서, 정시기도의 비밀을 가지고 기도하러 갔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또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단순히 이 사람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갔을 것인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간다면, 최고의 기도의 자리는 마가다락방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자리가 마가다락방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리가 마가다락방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자들에게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 온 자리가 어디냐? 마가다락방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은혜 받았던 때를 잊지 못하잖아요. 내게 은혜 주신 사람도 잊지 못하고, 은혜 받은 장소도 잊지 못하고, 은혜 받은 시간도 잊지 못하고, 두고두고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처음 신앙이 좋았다는 고백도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내가 특별히 은혜 받은 때와 장소를 잊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매 연초만 되면 자기가 신앙생활 속에서 그나마 은혜 받았던 그 장소를 찾아갑니다. 1박 2일이나 시간이 되면 2박 3일 동안 찾아갑니다. 연초가 얼마나 춥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신앙생활 속에서 은혜 받았던 그 자리가 잊어지지 않으니까 오랫동안 그 자리를 계속해서 찾아가시는 것을 봤습니다. 만약에 제자들에게 있어 최고의 좋은 기도의 자리가 있다면 마가다락방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였습니까? 약속 잡고 기도했는데 기도한 그 사실대로 성령이 임한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를 잊지 않고 마가다라방에 가야 할텐데 오늘 본문에 성전을 향해서 나갔다는 것은 단순히 기도의 차원을 넘어서서 중요한 현장을 봤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올라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참된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해서 종교에 매인 바 되어 가지고 이유도 없이 멸망 받고 있는 종교생활 하고 있는 그런 현장들을 봤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현장을 오르면서 하나님이 준비한 중요한 현장을 보게 됩니다. 성전 미문에 있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늘 항상 성전을 드나들면서 그를 봤을 것입니다. 처음 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가 무어라고 했느냐? "주목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그 인생에 가장 필요한 근본이 무엇인가를 봤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베드로가 베드로가 선포하였습니다. 왜냐? 근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성령충만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진짜 성령충만함은 근본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있고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면 종교인들은 뭐냐?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뭐냐?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를 보는 동시에 이 사람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앉은뱅이인 이 사람이 일어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는, 근본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필요를 보고 근본을 봤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서 왜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느냐고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가난하면 구제하고 봉사해야 하지 않냐고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구제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사람들의 요구입니다.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함부로 이야기하고 비판합니다. 사람들이 착해야 하고 선해야 하고 좋은 일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교회에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교회를 향한 요구입니다. 물론 그것을 해야 합니다만 나중에 가면 결국 인간은 거기에 종노릇하게 됩니다. 우리는 요구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근본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를 왜 축복하시고 우리 교회를 왜 인도하시느냐? 이 땅에 이 세상에 필요가 무엇인지 알고 그 필요를 해결하는 교회로 하나님은 이 교회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때때로 세상에서 교회를 향한 욕을 얻어먹을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핍박도 얻을 수 있고 욕도 들을 수 있습니다. 왜냐?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자가 아니라 세상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입니다. 세상의 근본을 바꾸는 자입니다. 이 시대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 가지고 있는데 하나 없어서 멸망 받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없어서 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지금 사람들은 죄와 저주 가운데 있습니다. 사탄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이 땅의 모든 문제는 그리스도 몰라서 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1-6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방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3:23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금 고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해답을 얻지 못하고 마귀의 자녀로서 헤매는 것이 지금 세상이고 지금 시대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해놓으신 게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하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어느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을 하셨습니다. 모든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그 일을 하나님이 해놓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 해결이시고, 그리스도는 모든 것 되십니다. 에베소서 1:3에 보면 찬송하리로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에베소서 1:10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통일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21-22에 보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세우셨느니라. 할렐루야. 모든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알게 될 때 정말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 안에 모든 축복을 담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될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이름 안에 모든 축복을 다 담아주셨는데 그것을 버리시고 내 안에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가지고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이름으로 오늘 기도하면 모든 것 다 누릴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2:3에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모든 지식이 감추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기도할 때 내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그 이름 때문에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고린도전서 3:21에 만물이 다 너희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10에 보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그 이름 안에 모든 것 다 담아주셨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 자이고, 특별히 모든 것을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생에 필요한 것을 하셨는데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 있게 6절에 분명히 그 사람의 필요를 알고 근본이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그 근본 문제, 필요를 채워주는 답을 말씀한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다 가지신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가면 갈수록 가지고 있는 것들 통해서 행복의 기준을 삼고 있고, 가지고 있는 것들 통해서 축복받는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준들이 지금 흐트러져 있기 때문에 뭔가 소유하지 않고 있으면 내가 가라앉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오늘 베드로는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내가 뭔가 없어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까? 착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마나보면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착각입니다. 없어서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입니다. 믿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참된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그리스도 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줄 것이 그리스도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현장에서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진짜 사람의 근본과 필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되기 전에 우리가 다른 것을 심어준다면, 그리스도를 말하지 아니하고 다른 것 들어가도록 말한다면 그것이 죄 중에 죄입니다. 진짜 그리스도 필요한 사람으로, 그리스도 외에 더 이상 필요함이 없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세우셨다는 사실. 오늘 베드로가 그런 사람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자기에게 있는 그리스도밖에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밖에 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입니다. 여러분, 현장에서 다른 이야기들 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만 주는, 줄 것이 그리스도밖에 없는 참된 전도자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이 사람이 육신이 치유되었습니다. 일어났습니다. 40년 동안 도저히 해결 안 되던 나면서 걷지 못한 부분들이 해결되었습니다.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궁극적인 하나님의 목적은 일어나 뛰어 걸으며 하나님께 찬미하였다고 했습니다.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이 엄청난 응답들이 참된 전도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교회 성도 한분 한분이 현장에서 그리스도밖에 말할 것이 없는 자가 되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 축복을 누립시다. 다른 모든 것 자랑하지 말고 오늘 다음에 나옵니다만 다른 것 이야기하지 마시고 진짜 현장의 필요, 현장의 근본을 보고 그리스도 밖에 줄 수밖에 없는 자가 되면 우리는 행복한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2. 복음 전하는 사람의 자세(행3:12, 15~16)
복음 전하는 전도자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 전하는 전도자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는데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현장에 서야 될 것인가? 40년 안 걷지 못했던 사람이 걷게 되니까 그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게 됩니다.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된 일이냐?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하며 그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왜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또 이 일로 말미암아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했습니다. 사도행전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여러분, 그리스도 비밀 모르는 자는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놀라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 해결하신 자라는 사실을 알면 기적이 일어나도 놀라울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구나!’ 결론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당연한 것이 아니냐. 왜 놀랍게 여기느냐 그러면서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역시 일어나고, 기적 일어나고, 현장에 조금 사역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보다도 내가 그 자리에 서게 됩니다. 허황된 인기, 영광, 명예 다 벗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모든 백성들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옮긴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전도자입니다.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완전히 베드로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지난 날 베드로는 어떠했습니까? 모든 일에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특심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앞서가는 것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사실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관심가시는 것조차도 베드로는 마음 불편해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우편에, 한 사람은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할 때 제자들이 하나같이 일어나서 다 화를 냈습니다. 사실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것 외에 다른 제자들에게 관심두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또 너무 열심히 특심이라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가야 하는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베드로가 완전히 바뀌어졌는데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면서 모든 백성들의 시선을 그리스도께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래서 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러면서 15-16절에 보면 더욱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14절부터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나를 바라보고 우리를 바라보지 말라. 이렇게 낫게 한 것은 나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것. 너희가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예수를 그러한 증거로 살리시고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셨고, 이 사람이 오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앞에 서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관심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께로 소개하는 역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역사. 우리가 사역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자그마한 역사들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이익들을 챙기는 것은 전도자로서 쓰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망하게 됩니다. 모든 관심들을 그리스도께로 돌리는 것. 마치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앞서 나온 사람 아닙니까. 세례를 주니까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을 보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 아니냐? 나는 그리스도 아니다. 그러면 당신이 엘리야 아니냐? 엘리야도 아니다. 당신이 선지자 아니냐? 선지자도 아니다. 그러면 당신이 누구냐? 우리를 보낸 사람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이야기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나는 주의 길을 열기 위해서 먼저 보낸 자다. 주의 대로를 열기 위해서 먼저 모낸 자라고 하면서 내 뒤에 오신 이가 그리스도이신데 나는 그의 신발 끈 묶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자기 앞에 오시는 부분을 보면서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라 십자가 지고 갈 어린양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갈 어린양을 보라" 고 말씀하신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려드리는 것이 지속해서 쓰임 받을 수 있는 전도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께로! 지난 날 그리하지 않았는데 베드로가 바뀌어진 사실들을 보게 됩니다. 정말로 참된 제자는 현장에서 여러분을 향해서 찾아올 때 여러분이 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서 그 문제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 받도록 하는 것이 제자입니다. 내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해결해줄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문제를 해결 받도록 하는 것이 바로 참된 제자라는 사실.
그리고 오늘 참된 제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1절부터 읽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팀이 되어 올라갔던 사실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능력중의 능력입니다.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은 능력중의 능력입니다. 저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함께하는 것 잘 안되고 같이 가는 것이 잘 안됩니다. 제게 있는 단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진짜 함께할 수 있고 같이 갈 수 있다는 것은 능력중의 능력인데 특별히 언약가진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 되어질 때 오늘 본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더불어 이야기했습니다. 더불어 같이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같은 사역을 감당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 베드로와 요한의 사역에 하나님이 어떤 역사를 준비해놓았는가? 인생의 근본문제를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데 그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이름 그리스도가 증거되어지는 가장 귀중한 현장을 하나님이 준비해놓고 있었다는 것. 복음 언약 붙잡은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 되어질 때 진짜 근본문제를 해결할 그리스도 이름을 선포할 수 있는 그 현장들을 하나님이 준비해놓았다는 사실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함께하는 축복 정말로 복음 안에서 언약 안에서 하나 되어 같이 갈 수 있는 자가 바로 일꾼이요, 제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제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약 안에서 하나 되어 같이 갈 수 있는 자, 그와 더불어 진짜 중요한 모든 관심과 모든 역사를 그리스도께로 돌릴 수 있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의 역사 속에 지속해서 쓰임 받는 참된 전도자들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현장을 바라보고, 현실을 바라보느냐? 참 중요합니다. 어떤 눈을 가지고 세상과 현장과 사람과 현실을 바라보느냐? 복음과 전도의 눈으로 바라보면 기도와 메시지가 분명히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 그 축복을 누린 사람 아닙니까. 또 복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 되어지게 될 때 거기에 세상과 현실과 시대를 살리고, 시대를 변화시키는 그 축복된 응답을 주시게 되어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복음과 전도를 가지고 현장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메시지를 가진 자로 세워지고, 복음과 기도로 하나 되어서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현장들을 변화시키는 이 일에 쓰임 받는 주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9월 1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
(행3:1-16)
서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데 있습니다(눅19:10). 하나님의 역사를 안 믿는 사람들은 신앙을 교회 안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살아계셔서 성령으로 사실적인 역사를 하시며 세계복음화를 이루시고 재림주로 오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며 아멘으로 누림이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 개인이 변화되고 지역과 현장이 변화되어지며, 전도의 문이 열리고 말씀이 성취되며 제자들이 세워집니다(행1,2장)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마가다락방의 역사를 체험하고 난 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1. 성령충만 받은 후 -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1) 세상 사람들은 운명과 종교와 육신에 잡혀 있고, 자신의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1)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육신을 따르고 종교를 이용하며 운명에 완전히 사로잡힘
2) 자연히 우상숭배, 정신문제, 육신문제에 빠져 후손들에게까지 유산을 남기고, 미래의 소망도 없음
(2) 전도자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현장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함)
1) 베드로와 요한의 눈에 세상(현장)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함
a. 제 구시 기도시간 : 기도가 아닌 전도를 위함임 b. 성전 : 해답 없이 종교에 묶여 이유도 모른 체 고통당하는 수많은 종교인
c. 나면서 못 걷게 된 자 :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보임 d. 주목하여 이르되 :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봄 (근본을 보는 것이 성령충만)
2) 우리는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함 (전도의 눈)
(3) 우리는 세상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채워주고 근본을 바꿔주는 자입니다.
1) 우리는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자임 (인생 모든 문제 : 하나님 떠남, 죄로 인한 고통, 사탄문제)
2)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음은 물론, 모든 것 되심 (엡1:3,10,20-23, 골2:3, 골3:21, 고후6:10)
(4) 참된 제자는 그리스도 외에 자랑할 것이 없고, 또한 줄 것도 그리스도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 :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행3:6)
2) 현장에서 그리스도만 선포될 때, 육신이 치유되고 신분과 운명이 바뀌었음 (성전 미문 앉은뱅이)
2. 복음 전하는 사람의 자세
(1) 우리는 모든 관심과 영광과 찬송을 그리스도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1) 베드로는 허황된 인기와 명예를 버리고,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께 집중하도록 함 (행3:12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2) 사역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 바라봄으로 그리스도께서 해결하도록 만들어야 함
(2) 우리는 복음과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1) 함께 하고, 함께 갈 수 있는 것은 능력 중의 능력임 (베드로와 요한은 더불어 팀이 됨)
2) 언약잡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 되었을 때, 근본문제를 해결할 현장을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심
결론: 우리가 어떤 눈으로 세상, 현장, 사람, 현실을 바라보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든 것을 복음과 전도의 눈으로 바라보면 기도와 메시지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복음과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 되어질 때, 분명 세상과 현장과 시대를 변화시키는 응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께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 일에 쓰임 받는 자가 되길 기도드립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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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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