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형통한 자
2017-12-10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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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
(창39:1~6)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창39 :1~6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십시다.
오늘 은혜로운 찬양 감사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소원이 있다면 모든 족속이 복음을 듣기까지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속에 우리 교회가 끝까지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속에 저와 여러분이 끝까지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축복의 응답이 오늘도 우리에게 붙잡혀지는 그런 축복의 시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창세기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중에 지난주에 창세기38장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과의 이상한 관계를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관계 속에서 도저히 우리가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그 혈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창세기38장에 보면 유다가 며느리가 가진 담보물이 자기의 것인 것을 알고 ‘그가 나보다 옳도다’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옳도다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맞다 틀리다 그런 개념들이 아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사실은 이 다말이 자기의 전 인생을 걸고, 운명을 걸고, 자기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붙잡은 그것이 바로 옳도다 라는 것을 유다를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들 이었습니다. 이런 다말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있다면 바로 그 다말이 감히 왕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그 족보에 올려진 것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1:1절부터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2절에 보면 결국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참 이상한 관계인데 그 관계를 통해서 자녀들이 낳아지고 그것이 다윗왕의 조상이 되어지고, 그게 바로 후대에 오실 메시야의 조상이 되어지는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리스도를 붙잡은 그것이 옳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 한 시대에 현장을 바라보면서 오직 그리스도밖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 그것을 붙잡은 그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입니다. 그 사실 붙잡고 끝까지 영적싸움에서 승리하는 그런 축복의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창세기39장으로 들어가서 사실은 지난주에도 이상한 본문 가운데 어려운 부분들이었지만, 오늘도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또 어려운 본문이고, 왜냐하면, 왜 어렵다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본문이예요. 너무나 좋아하는 본문이예요. 그래서 아마 여러분께서 이 본문을 읽었을 때에 아! 목사님 오늘 어떤 설교를 하실 것이다. 그것까지도 미리 내다보고 앉아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터인데 이 말씀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언약으로 붙잡는 그런 축복의 시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요셉을 부르셔서 요셉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형통의 복을 주셨는데 그 요셉에게 주신 형통의 복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 좀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오늘 제목을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형통한 자가 맞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나입니다. 여러분을 축복되이 여기셔서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예요.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한 자로 부르셨는데 정말 오늘 요셉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형통을 살펴봄으로서 오늘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 오늘 붙잡는 그런 시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가 되라.
먼저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 속에 박혀있는 형통한 자라는 것의 이런 개념들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지금 내 생각 속에 가지고 있는 형통한 자라는 그 개념들을 뽑아버려야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 사실은 하루아침에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갔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채색 옷을 입고 종들이 요셉의 발을 씻겨주고 차려주는 음식을 먹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은 팔리게 되고, 먼저 팔리기 전에 먼저 구덩이에 들어가게 되고, 그 구덩이에서 건짐 받아 또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게 되는 이런 기구한 인생이 되었던 사실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요. 사실은 요셉은 잘못한 게 별로 없습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인데 노예로 팔려가는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37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요청을 합니다. ‘네가 가서 네 형들과 내 가축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오라’그래서 이 요셉이 세겜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세겜에 형들과 가축들이 없어요.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도단에 가 보라고 해서 도단에 가서 살펴보니까 거기에 형들이 있었던 사실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고 갔을 뿐인데 요셉은 노예가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사실 요셉에 대해서 형통한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세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왜냐하면 일단 요셉이 노예로 갔지만 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 가정총무가 되었기 때문에, 또 나중에 대 애굽 제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개념 속에는 잘 되었다. 결국 예수 믿으면 이렇게 우리의 모든 인생이 어렵고 힘들지만 기어코 우리의 인생을 역전 시킬 것 아니냐? 반전시킬 것 아니냐?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요셉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더욱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리 마음속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가정총무가 되고, 총리가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살리게 되었다. 결국 요셉이 모든 것 역전 시킨 것 아니냐? 우리가 모두 이런 생각들이, 이런 개념들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요셉 이라고 생각하면 형통하다 그 말을 붙이는데 별 거부감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심어준, 아니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사탄이 심어준 잘못된 각인, 뿌리, 체질들이 있는데요, 가장 중요한 근본에 내 중심하고 물질중심하고, 성공중심해서 살아가는 것, 창세기 3장에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나 중심하게 만들어서 악한 사탄이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잖아요. 창세기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세상 물질 바라보고 거기에 빠져버린 겁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우리의 이름을 내자하고 모두가 성공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창세기3장과 6장과 11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를 중심하고 물질중심하고 성공중심해서 모두가 살아가요. 왜냐? 세상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현장에서 말은 안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각인, 뿌리, 체질되어지고 당장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직장에서 배우는 것도, 네가 성공해야 된다라는 것, 그래서 돈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리고 너를 찾아야 된다 라는 것, 이것이 우리도 모르게 각인, 뿌리, 체질되어있기 때문에 이 속에서 나오는 오래된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결국은 내가 잘 되어야 한다라는 것, 내가 축복 받아야 된다라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이 심어준 것에 대한 부분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공 하면, 성공=형통, 같은 말로 사용하잖아요. 형통=성공이고요, 그리고 내게 유익하고, 내가 잘되고 내가 건강하고, 내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내 자녀들이 성공하고 전부다 그것을 형통이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갖고 있잖아요. 그렇게 본다면 오늘 요셉을 보면 사실 형통과는 안 맞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예로 간 요셉의 그 상황 속에서 형통이다 이야기 했어요. 노예에서 빠져나와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형통이다 그게 아닙니다. 노예로 갔는데, 감옥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형통했다 말씀하고 있어요. 여러분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창세기39장2절에 보면 나오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아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면 노예로 안가야지, 그리고 노예에서 빠져나와야지, 그런데 노예 되어 있는 그 상태, 감옥 가 있는 그 상태대로 하나님은 요셉을 일컬어서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만약 세상 사람들이 보는 생각대로라면 진짜 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그러면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되지 않느냐? 그게 형통이지요. 네가 성공해야 되지 않느냐? 네가 진짜 신을 믿는다면 네가 잘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형통 아닙니까?
그게 전부다 창세기3, 6, 11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각인, 뿌리, 체질되어진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노예로 빠져나오지 않고 노예로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사실 억울하게 형들에게 팔려서 보디발의 집에 갔잖아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가서도 사실은 말도 안 통하지요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고 노예로 들어갔는데 마침 노예 생활을 잘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보디발이 보면서 모든 재산을 보디발이 요셉에게 맡겼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예는 아무리 해도 노예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가 있는 그 요셉을 일컬어서 하나님은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나중에 감옥에 갔는데도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요셉은 형통의 축복을 누린 사람이예요. 아니 노예인데요, 아니 감옥에 갔는데요?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풀릴 수 있습니까? 네가 믿는 신이 정말 살아있는 신이라면 노예에서 빠져나와야지 그것을 형통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람인 저와 여러분에게는 형통의 개념이 세상의 개념과 다르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형통이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진행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것, 그게 형통입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진행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것이 형통이다. 내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 있든지 상관없어요.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의 모든 걸음 걸음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진행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형통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에서 말씀하신 형통이 그 형통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창세기 37장에 보면 꿈을 꾸었지요. 형제들의 곡식단들이 자기 곡식단에게 절을 하고요,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그 꿈을 가지고 내가 앞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고 모든 형제들을 살릴 것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잡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요셉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사실은 야곱도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37:11절에 보면 요셉이 한 그 말을 야곱이 마음에 간직해 두었더라 했어요. 그러면 요셉이 꾼 꿈과, 야곱이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던 그 꿈, 야곱도 알고 있는 꿈이예요.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달된 축복이 무엇이냐?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네 후손들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이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붙잡았던 언약이고, 이 언약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야곱이 요셉의 그 꿈을 들었을 때에 그 꿈을 알아들었다 했어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추측하건데 아버지 야곱은 끊임없이 이 언약에 대해서 요셉에게 계속 이야기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요셉의 할아버지가 있다면 그가 이삭 아닙니까? 이 이삭 조차도 요셉이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었어요. 그렇다면 이삭 또한 자기의 손자에게 끊임없이 이야기 했을 겁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천하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다시 말하자면 요셉에게 증조할아버지입니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갈대아 우르 우상동네에서 빠져나와서 하나님 주신 축복을 붙잡았는데 그 축복이,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니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 받는 그 언약을 붙잡고 이렇게 이렇게 승리했다, 그것을 이삭이 자기의 손자 요셉에게 이야기했겠지요. 여러분 같으면 안 하겠습니까? 특히 어르신들, 무한반복하지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손자들에게? 앉혀 놓고 끊임없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 이삭 또한 요셉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야곱도, 여러분, 우리가 야곱을 죽 살펴보았지 않습니까? 야곱처럼 기구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인생이었지 않습니까? 언약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를 써서 사서 고생하고, 그리고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쫓겨 가서 벧엘에 가게 되고, 벧엘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벧엘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들어가서 약 이십 년 동안 속으면서 재산을, 나중에 보면 다 가지고 나오게 되고 그러면서 얍복 강가에서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이십년 동안 기다리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응답을 가지고 에서를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보았고 또 세겜에 머물러 있다가 자기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 자녀들이 세겜 사람에게 가서 사람들을 죽이게 되고, 그러니까 세겜 사람들이 공격해 오고, 그런 가운데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회복하신 그 사실을 많이 체험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야곱 자신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요셉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릴 때부터 요셉은 언약 가운데 계속해서 인도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지만 구체적으로 아, 이게 내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그 언약이다, 이 생각은 안 했겠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귀한 일과 계획을 이루는 그 걸음이 아닌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여러분, 노예로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면서도 억울한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가면서도 또 감옥에 가면서도 한 마디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 이것이 그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 지금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이 사실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더 큰 증거를 붙잡는다면 창세기 45장 7절, 8절입니다. 한번 봅시다. 요셉이 결국은 형제들 앞에 섰을 때 한 이야기들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의 이야기를 붙잡고 있었던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5장 7절, 8절.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아멘.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가고 계시고 그 사실을 요셉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통해서 들었던 언약입니다. 결국은 나와 우리 후대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 받게 하겠다는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걸음을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이구나, 이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형통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고 그것을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까? 내게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까? 우리의 오직 꿈에도 소원이 성공입니까? 뭔가 교회에 나가면 잘 될 것 같고 축복받을 것 같아서 교회에 나옵니까? 여러분, 그것이 형통에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어렵고 힘들고 고난 받을지라도. 성경의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믿는 이유 때문에 엄청난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전투를 벌이게 되고 또 자식들을 버리게 되고 또 아내에게서, 남편에게서 핍박 받을 것을 말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 자리에 언약이 진행되고 성취되는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 그게 바로 형통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형통의 자리임을, 눈을 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찬양대 찬양한 것처럼 이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해서, 말씀을 오늘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 이게 참 형통함입니다. 내가 지금 잘 되는 것이 형통함이 아니라 비록 고난 당하고 핍박 당하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 자리에 지금 내가 있다, 그 자체가 형통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자리, 그 자리 때문에 우리는 형통인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그 사람이 형통한 자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형통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아예 예수도 안 믿고 예수님의 부활도 안 믿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 예수님은 고난 당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또 대전도자 바울,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울이 그의 복음 사역 속에서 일어난 핍박에 대해서 죽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은 바울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개념, 형통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비참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교회사에 보면 그가 대리석에 묶인 바 되어서 칼로 목 베임을 당하게 되고 그 머리가 땅에 떨어져서 툭툭툭 세 번이나 쳐서 뒹굴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나 형통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은 실패한 인생이고 비참한 인생입니다. 스데반,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복음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결국 너희들이 못 박은 이 예수가 바로 아브라함 때에 시작된 이 복음의 주인공 아니냐, 우리가 의인을 못 박고 의인을 죽인 것이 아니냐, 그 말 했기 때문에, 그 말을 피했으면 되는데 그 말을 했기 때문에 온 유대인들이 일어나서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지금 중동, 저 이슬람권을 보십시오. 예수 믿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핍박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결국은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불통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증거를 붙잡읍시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자, 봅시다. 사도행전 26장, 찾아보십시오. 사도행전 26장, 지금 로마로 이송되는 그 과정 속에서,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이송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한번 살펴 봅시다. 27절, 28절, 같이 한번 읽어 봅시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게 불행한 사람이 한 말입니까? 행복한 사람, 참된 형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베스도는 바울을 보고 네가 미쳤도다 했습니다.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만들었다 했습니다. 오늘 아그립바 왕 앞에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복음 때문에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도 복음 알고 복음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고 그 축복을 누리는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 고백한 것이 바울이었습니다. 누가 이 바울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환경들, 우리의 주위에 일어난 문제들 바라보면서 우리가 형통하다, 형통하지 않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아닙니다. 최악의 환경과 상황이라 할지라도 내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자리라면 그 사람은 형통한 자입니다. 그 자리가 최고로 형통한 자리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비록 여러분, 우리가 이 축복이 비밀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 있지 않습니까? 고난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는데 무슨 고난이 있느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 그것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왜냐? 의미 있는 축복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요셉이 노예로 간 것, 감옥에 간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로 요셉에게 언약의 여정으로 이 노예로 가는, 감옥에 가는 그 과정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아시아에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문을 다 막으시고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서 바울과 실라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유럽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거기서 첫 성 빌립보 지역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결국 현장에 나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 들린 여종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면 귀신 들려서 많은 사람을 어렵게 하는 그 여종이라면,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 받았다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주인이 자기 소득이 당장 끊어지니까 주인이 열 받아서 고소해 버렸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고소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실컷 두드려 맞고, 옷 다 찢기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그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는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옥터가 움직이고 모든 죄수의 차꼬가 풀리고 사람들, 죄수들이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간수가 딱 보니까, 아 이거 다 도망갔구나, 이제는 다 끝이다, 자결하려고 하니까 바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여기 있다, 이야기하면서 그 때 간수가 와서 뭐라 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 물었지 않습니까? 그 때 중요한 메시지가 바울과 실라에게서 선포되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중요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그 메시지를 받고 간수가 자기 집에 바울을 데려가서 발을 씻기고 상처난 부분을 씻기고 온 집안 사람으로 말미암아 복음 듣게 하면서 예수 믿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 세례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의미 있는 고통, 고난이 있다는 사실, 고통, 고난 즐거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있어서 언약의 여정 가운데 고난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난과 고통,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나는 예수 믿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있나, 나에게 왜 이런 문제들이 있나, 내가 왜 이런 육신의 질고가 있나? 여러분,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 문제들은 결국 언약을 이루는 그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언약의 여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이 축복의 역사에 눈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통해서! 진행되고! 성취되는! 그 자리가! 형통한 자리이다! 믿습니까? 요셉은 노예로 갔는데 보디발이 요셉을 보면서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했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에 보면 보디발이 요셉을 바라보면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이 보디발이, 불신자 보디발,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애굽의 모든 잡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보디발이 요셉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말씀했습니다. 노예로 있는 요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환경이 좋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 내가 있으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챙겨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 형통한 교회로 서 있게 되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데 바로 요셉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창세기 12장 1절~3절에 보면 갈대아 우르 우상 동네에 있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언약을 주셨는데 거기 보면 아브라함에게 복, 내가 네게 복 받게 하겠다 그렇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복이 될지라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복 받게 하겠다, 네가 뭘 해 가지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복으로 부르셨을 때에 복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내가 네게 복을 받게 하겠다, 그게 아닙니다. 복이 될지라, 복으로 부르셨다는 사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서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가를 펼쳐나가셨습니다. 결국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가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셨고 그것이 그대로 성취된 부분이, 이루어진 부분이 요셉을 통해서이고 또 그것이 완성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일컬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고난 당하고 어려움 당하고 결국 요셉 때문에 애굽도 살고 자기 민족도 살고, 오는 모든 사람들을 먹일 것을 다 주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시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다 살게 됩니다. 죄인도 원수도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면 살게 됩니다. 그것이 요셉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형통한 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형통의 복은 관계 속에서 오는 복입니다. 관계 속에서 오는 복입니다. 시편 1편 1절~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절에 뭐라 했습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나니, 마지막 절에 보면 다 범사에 형통하리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는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 그에게 범사에 형통케 하니 모든 것이 형통하리로다, 형통의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요한복음 15장 1절~7절에 너희는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농부시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맺는다 했습니다. 붙어있기만 하면 열매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나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괜찮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간다 할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해를 당할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냐?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임마누엘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관계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관계 속에서 우리는 형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의 삶에 대해서 나옵니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 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 에녹의 삶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그러면서 마지막에 보면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그냥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식을 낳은 것뿐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얻었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형통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통한 자입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나는! 형통한 자이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을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착각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뒤에 뭔가 움직이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사실을 성경에서는 진단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 났으니. 결국 악한 사단이 그 인생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영혼의 상태는 우상숭배 할 수밖에 없고 종교가 가깝게 되고 그들의 정신 상태는 정신과 마음이 점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그들의 마음 상태는 온갖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그들의 영혼 상태는 그러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에게 지속되는 것은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그대로 대물림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문제들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아버지 되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배경으로 갖고 있는 재앙의 배경들, 지옥의 배경들, 사단의 운명의 배경들, 상관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재앙과 상관 없습니다. 지옥 권세, 상관 없습니다. 사단의 운명, 상관 없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그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지금도 나의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형통한 자의 축복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던 안 되었던 상관 없이 요셉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형통한 자이기 때문에. 총리가 되고 안 되고는 상관 없습니다. 요셉의 모든 걸음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왜냐? 처음부터 요셉은 형통한 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이제는 이 형통함의 축복을 세상에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보디발처럼 하나님의 형통함을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그 문제와 사건 속에 답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형통이 무엇인가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보디발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잘 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성공하면서 내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돈 잘 벌어서 내가 성공해서 보여줘야겠다, 내가 돈 벌어서 보여줘야겠다,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환경에서, 병들었습니까? 그것 통해서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연약합니까? 그 문제 속에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실패합니까? 그 문제 속에서 우리는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망했습니까? 거기서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성공해서 보여주어야 하겠다, 아닙니다. 내가 성공해서 돈 잘 벌어서 보여줘야 하겠다, 아닙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 환경 속에서, 내 있는 모습이 어떻든지간에 상처 있으면 상처 있는 대로 임마누엘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이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이 형통케 하심을 보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핑계댈 필요 없습니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형통한 자로 부르셨고 하나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성취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승리하는 귀한 전도자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의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우리가 이미 형통한 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통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의 현장에 보여줄 수 있는 증인들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내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 되셔서 나를 인도해나가시는 사실이 세상 앞에 보이도록 주께서 축복하여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7년 12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
(창39:1-6)
서론: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창38장에 나옵니다. 유다는 담보물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인 줄 알고 "네가 나보다 옳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유다의 혈통을 통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인생 속에 형통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형통한 축복을 우리 인생 속에 누려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가 되라
가. 세상적인 형통이 아닌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
1) 요셉 - 형들의 미움으로 구덩이에 들어감,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됨
2) 세상의 형통 - 나, 물질, 성공 중심(잘 되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성공 하는 것)
나. 성경이 말하는 형통 -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진행 되고 성취 되는 것
1) 요셉의 꿈(창37:1-11) -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천하만민이 복 - 창12:3)
2) 모든 일 -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이 성취(창45:5-7)
3) 진정한 형통 -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 핍박,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행26:27-29)
4) 고난 - 의미 있는 축복이 숨겨져 있음(행16:6-10, 16-18)
5) 형통한 축복을 보디발이 보게 됨(창39:3)
2.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가. 아브라함(창12:1-3)
1) 복이 되게 하심 - 부르실 때 형통한 축복을 주심
2) 언약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심 -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
나.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임마누엘)
1)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복(시1:1-2, 요15:1-7, 시23:1, 창5:21)
2) 형통한 자에게 주신 축복 - 그리스도를 통해서 재앙, 지옥, 사단의 운명에서 해방
결론: 형통한 축복을 보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그 현장 속에서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축복을 누리는 증인 되시길 바랍니다.
● 기도제목
● 말씀실현(실천사항)
● 전도대상자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
(창39:1~6)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창39 :1~6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 가십시다.
오늘 은혜로운 찬양 감사합니다. 정말로 우리의 소원이 있다면 모든 족속이 복음을 듣기까지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 그 속에 우리 교회가 끝까지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속에 저와 여러분이 끝까지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축복의 응답이 오늘도 우리에게 붙잡혀지는 그런 축복의 시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창세기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중에 지난주에 창세기38장 유다와 그의 며느리 다말과의 이상한 관계를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사실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관계 속에서 도저히 우리가 이해 안 되는 부분들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그 혈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창세기38장에 보면 유다가 며느리가 가진 담보물이 자기의 것인 것을 알고 ‘그가 나보다 옳도다’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옳도다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맞다 틀리다 그런 개념들이 아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사실은 이 다말이 자기의 전 인생을 걸고, 운명을 걸고, 자기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그리스도를 붙잡은 그것이 바로 옳도다 라는 것을 유다를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부분들 이었습니다. 이런 다말에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있다면 바로 그 다말이 감히 왕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그 족보에 올려진 것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1:1절부터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기 보면 2절에 보면 결국 유다가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참 이상한 관계인데 그 관계를 통해서 자녀들이 낳아지고 그것이 다윗왕의 조상이 되어지고, 그게 바로 후대에 오실 메시야의 조상이 되어지는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그리스도를 붙잡은 그것이 옳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이 한 시대에 현장을 바라보면서 오직 그리스도밖에는 답이 없다는 사실, 그것을 붙잡은 그 사실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입니다. 그 사실 붙잡고 끝까지 영적싸움에서 승리하는 그런 축복의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창세기39장으로 들어가서 사실은 지난주에도 이상한 본문 가운데 어려운 부분들이었지만, 오늘도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또 어려운 본문이고, 왜냐하면, 왜 어렵다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본문이예요. 너무나 좋아하는 본문이예요. 그래서 아마 여러분께서 이 본문을 읽었을 때에 아! 목사님 오늘 어떤 설교를 하실 것이다. 그것까지도 미리 내다보고 앉아있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이 시간에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터인데 이 말씀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언약으로 붙잡는 그런 축복의 시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요셉을 부르셔서 요셉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형통의 복을 주셨는데 그 요셉에게 주신 형통의 복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 좀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특별히 오늘 제목을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형통한 자가 맞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나입니다. 여러분을 축복되이 여기셔서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예요. 진짜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한 자로 부르셨는데 정말 오늘 요셉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형통을 살펴봄으로서 오늘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 오늘 붙잡는 그런 시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가 되라.
먼저 첫 번째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적인 형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 속에 박혀있는 형통한 자라는 것의 이런 개념들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지금 내 생각 속에 가지고 있는 형통한 자라는 그 개념들을 뽑아버려야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셉, 사실은 하루아침에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들어갔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채색 옷을 입고 종들이 요셉의 발을 씻겨주고 차려주는 음식을 먹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결국은 팔리게 되고, 먼저 팔리기 전에 먼저 구덩이에 들어가게 되고, 그 구덩이에서 건짐 받아 또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리게 되는 이런 기구한 인생이 되었던 사실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요. 사실은 요셉은 잘못한 게 별로 없습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뿐인데 노예로 팔려가는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37장에 보면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요청을 합니다. ‘네가 가서 네 형들과 내 가축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 돌아오라’그래서 이 요셉이 세겜에 가서 확인해 보니까 세겜에 형들과 가축들이 없어요. 그래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까 도단에 가 보라고 해서 도단에 가서 살펴보니까 거기에 형들이 있었던 사실들이 성경에 나옵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고 갔을 뿐인데 요셉은 노예가 되어 버렸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사실 요셉에 대해서 형통한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세상적인 개념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어요. 왜냐하면 일단 요셉이 노예로 갔지만 그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서 가정총무가 되었기 때문에, 또 나중에 대 애굽 제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개념 속에는 잘 되었다. 결국 예수 믿으면 이렇게 우리의 모든 인생이 어렵고 힘들지만 기어코 우리의 인생을 역전 시킬 것 아니냐? 반전시킬 것 아니냐? 그런 의미들을 가지고 요셉에 대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더욱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리 마음속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가정총무가 되고, 총리가 되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살리게 되었다. 결국 요셉이 모든 것 역전 시킨 것 아니냐? 우리가 모두 이런 생각들이, 이런 개념들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요셉 이라고 생각하면 형통하다 그 말을 붙이는데 별 거부감을 못 느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심어준, 아니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사탄이 심어준 잘못된 각인, 뿌리, 체질들이 있는데요, 가장 중요한 근본에 내 중심하고 물질중심하고, 성공중심해서 살아가는 것, 창세기 3장에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나 중심하게 만들어서 악한 사탄이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잖아요. 창세기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세상 물질 바라보고 거기에 빠져버린 겁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우리의 이름을 내자하고 모두가 성공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을 창세기3장과 6장과 11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를 중심하고 물질중심하고 성공중심해서 모두가 살아가요. 왜냐? 세상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현장에서 말은 안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각인, 뿌리, 체질되어지고 당장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직장에서 배우는 것도, 네가 성공해야 된다라는 것, 그래서 돈이 있어야 되지 않느냐? 그리고 너를 찾아야 된다 라는 것, 이것이 우리도 모르게 각인, 뿌리, 체질되어있기 때문에 이 속에서 나오는 오래된 것이 있는데 그게 뭐냐? 결국은 내가 잘 되어야 한다라는 것, 내가 축복 받아야 된다라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이 심어준 것에 대한 부분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공 하면, 성공=형통, 같은 말로 사용하잖아요. 형통=성공이고요, 그리고 내게 유익하고, 내가 잘되고 내가 건강하고, 내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고 내 자녀들이 성공하고 전부다 그것을 형통이라는 개념으로 우리가 갖고 있잖아요. 그렇게 본다면 오늘 요셉을 보면 사실 형통과는 안 맞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예로 간 요셉의 그 상황 속에서 형통이다 이야기 했어요. 노예에서 빠져나와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형통이다 그게 아닙니다. 노예로 갔는데, 감옥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형통했다 말씀하고 있어요. 여러분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창세기39장2절에 보면 나오지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아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다면 노예로 안가야지, 그리고 노예에서 빠져나와야지, 그런데 노예 되어 있는 그 상태, 감옥 가 있는 그 상태대로 하나님은 요셉을 일컬어서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만약 세상 사람들이 보는 생각대로라면 진짜 네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그러면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되지 않느냐? 그게 형통이지요. 네가 성공해야 되지 않느냐? 네가 진짜 신을 믿는다면 네가 잘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형통 아닙니까?
그게 전부다 창세기3, 6, 11장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각인, 뿌리, 체질되어진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노예로 빠져나오지 않고 노예로 있는 그 상황 속에서, 사실 억울하게 형들에게 팔려서 보디발의 집에 갔잖아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리고 보디발의 집에 가서도 사실은 말도 안 통하지요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고 노예로 들어갔는데 마침 노예 생활을 잘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보디발이 보면서 모든 재산을 보디발이 요셉에게 맡겼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예는 아무리 해도 노예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가 있는 그 요셉을 일컬어서 하나님은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나중에 감옥에 갔는데도 형통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요셉은 형통의 축복을 누린 사람이예요. 아니 노예인데요, 아니 감옥에 갔는데요?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풀릴 수 있습니까? 네가 믿는 신이 정말 살아있는 신이라면 노예에서 빠져나와야지 그것을 형통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사람인 저와 여러분에게는 형통의 개념이 세상의 개념과 다르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형통이냐?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진행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것, 그게 형통입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진행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것이 형통이다. 내가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 있든지 상관없어요. 최악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의 모든 걸음 걸음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진행되어지고 성취되어지는 그 자리에 있다면 나는 형통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에서 말씀하신 형통이 그 형통입니다. 여러분 요셉이 창세기 37장에 보면 꿈을 꾸었지요. 형제들의 곡식단들이 자기 곡식단에게 절을 하고요, 해와 달과 열한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이 그 꿈을 가지고 내가 앞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고 모든 형제들을 살릴 것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잡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요셉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사실은 야곱도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37:11절에 보면 요셉이 한 그 말을 야곱이 마음에 간직해 두었더라 했어요. 그러면 요셉이 꾼 꿈과, 야곱이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던 그 꿈, 야곱도 알고 있는 꿈이예요.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달된 축복이 무엇이냐?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네 후손들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이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붙잡았던 언약이고, 이 언약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야곱이 요셉의 그 꿈을 들었을 때에 그 꿈을 알아들었다 했어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추측하건데 아버지 야곱은 끊임없이 이 언약에 대해서 요셉에게 계속 이야기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요셉의 할아버지가 있다면 그가 이삭 아닙니까? 이 이삭 조차도 요셉이 어렸을 때에 할아버지 이삭이 살아 있었어요. 그렇다면 이삭 또한 자기의 손자에게 끊임없이 이야기 했을 겁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천하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다시 말하자면 요셉에게 증조할아버지입니다. 네 증조할아버지가 있었는데, 갈대아 우르 우상동네에서 빠져나와서 하나님 주신 축복을 붙잡았는데 그 축복이,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하리니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 받는 그 언약을 붙잡고 이렇게 이렇게 승리했다, 그것을 이삭이 자기의 손자 요셉에게 이야기했겠지요. 여러분 같으면 안 하겠습니까? 특히 어르신들, 무한반복하지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손자들에게? 앉혀 놓고 끊임없이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 이삭 또한 요셉에게 그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야곱도, 여러분, 우리가 야곱을 죽 살펴보았지 않습니까? 야곱처럼 기구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사실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인생이었지 않습니까? 언약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를 써서 사서 고생하고, 그리고 집에 있을 수 없어서 쫓겨 가서 벧엘에 가게 되고, 벧엘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벧엘에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 들어가서 약 이십 년 동안 속으면서 재산을, 나중에 보면 다 가지고 나오게 되고 그러면서 얍복 강가에서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이십년 동안 기다리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응답을 가지고 에서를 만나게 되는데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보았고 또 세겜에 머물러 있다가 자기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그 자녀들이 세겜 사람에게 가서 사람들을 죽이게 되고, 그러니까 세겜 사람들이 공격해 오고, 그런 가운데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이 언약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회복하신 그 사실을 많이 체험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야곱 자신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서 요셉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릴 때부터 요셉은 언약 가운데 계속해서 인도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지만 구체적으로 아, 이게 내가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그 언약이다, 이 생각은 안 했겠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귀한 일과 계획을 이루는 그 걸음이 아닌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여러분, 노예로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면서도 억울한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팔려가면서도 또 감옥에 가면서도 한 마디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 이것이 그냥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 지금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이 사실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더 큰 증거를 붙잡는다면 창세기 45장 7절, 8절입니다. 한번 봅시다. 요셉이 결국은 형제들 앞에 섰을 때 한 이야기들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의 이야기를 붙잡고 있었던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45장 7절, 8절.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아멘.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가고 계시고 그 사실을 요셉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통해서 들었던 언약입니다. 결국은 나와 우리 후대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 받게 하겠다는 이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걸음을 내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이구나, 이 사실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형통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 되고 그것을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까? 내게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까? 우리의 오직 꿈에도 소원이 성공입니까? 뭔가 교회에 나가면 잘 될 것 같고 축복받을 것 같아서 교회에 나옵니까? 여러분, 그것이 형통에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어렵고 힘들고 고난 받을지라도. 성경의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 믿는 이유 때문에 엄청난 핍박이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전투를 벌이게 되고 또 자식들을 버리게 되고 또 아내에게서, 남편에게서 핍박 받을 것을 말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 자리에 언약이 진행되고 성취되는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 그게 바로 형통이란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형통의 자리임을, 눈을 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 찬양대 찬양한 것처럼 이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증거되기 위해서, 말씀을 오늘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다, 이게 참 형통함입니다. 내가 지금 잘 되는 것이 형통함이 아니라 비록 고난 당하고 핍박 당하고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 자리에 지금 내가 있다, 그 자체가 형통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자리, 그 자리 때문에 우리는 형통인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그 사람이 형통한 자라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형통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아예 예수도 안 믿고 예수님의 부활도 안 믿고 있지 않습니까? 왜냐? 예수님은 고난 당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또 대전도자 바울,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핍박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바울이 그의 복음 사역 속에서 일어난 핍박에 대해서 죽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은 바울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의 개념, 형통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면 바울은 비참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교회사에 보면 그가 대리석에 묶인 바 되어서 칼로 목 베임을 당하게 되고 그 머리가 땅에 떨어져서 툭툭툭 세 번이나 쳐서 뒹굴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나 형통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면 바울은 실패한 인생이고 비참한 인생입니다. 스데반,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복음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결국 너희들이 못 박은 이 예수가 바로 아브라함 때에 시작된 이 복음의 주인공 아니냐, 우리가 의인을 못 박고 의인을 죽인 것이 아니냐, 그 말 했기 때문에, 그 말을 피했으면 되는데 그 말을 했기 때문에 온 유대인들이 일어나서 돌을 들어서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지금 중동, 저 이슬람권을 보십시오. 예수 믿는 이유 때문에 얼마나 핍박이 있습니까? 그 사람들이 결국은 불행한 사람들입니까? 불통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증거를 붙잡읍시다. 사도행전 26장을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자, 봅시다. 사도행전 26장, 찾아보십시오. 사도행전 26장, 지금 로마로 이송되는 그 과정 속에서,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이송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한번 살펴 봅시다. 27절, 28절, 같이 한번 읽어 봅시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내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게 불행한 사람이 한 말입니까? 행복한 사람, 참된 형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베스도는 바울을 보고 네가 미쳤도다 했습니다. 네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만들었다 했습니다. 오늘 아그립바 왕 앞에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복음 때문에 결박된 것 외에는 당신도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도 복음 알고 복음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고 그 축복을 누리는 나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이 고백한 것이 바울이었습니다. 누가 이 바울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환경들, 우리의 주위에 일어난 문제들 바라보면서 우리가 형통하다, 형통하지 않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아닙니다. 최악의 환경과 상황이라 할지라도 내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자리라면 그 사람은 형통한 자입니다. 그 자리가 최고로 형통한 자리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비록 여러분, 우리가 이 축복이 비밀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 있지 않습니까? 고난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는데 무슨 고난이 있느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 그것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도 허락하십니다. 왜냐? 의미 있는 축복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요셉이 노예로 간 것, 감옥에 간 것,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로 요셉에게 언약의 여정으로 이 노예로 가는, 감옥에 가는 그 과정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아시아에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문을 다 막으시고 마게도냐 환상을 통해서 바울과 실라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유럽을 향해서 나가게 됩니다. 거기서 첫 성 빌립보 지역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루디아를 만나게 되고 결국 현장에 나가서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 들린 여종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면 귀신 들려서 많은 사람을 어렵게 하는 그 여종이라면,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치유 받았다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주인이 자기 소득이 당장 끊어지니까 주인이 열 받아서 고소해 버렸습니다.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고소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가 실컷 두드려 맞고, 옷 다 찢기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감옥을 지키는 간수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그 감옥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는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옥터가 움직이고 모든 죄수의 차꼬가 풀리고 사람들, 죄수들이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간수가 딱 보니까, 아 이거 다 도망갔구나, 이제는 다 끝이다, 자결하려고 하니까 바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여기 있다, 이야기하면서 그 때 간수가 와서 뭐라 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으리이까 물었지 않습니까? 그 때 중요한 메시지가 바울과 실라에게서 선포되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중요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그 메시지를 받고 간수가 자기 집에 바울을 데려가서 발을 씻기고 상처난 부분을 씻기고 온 집안 사람으로 말미암아 복음 듣게 하면서 예수 믿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 세례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의미 있는 고통, 고난이 있다는 사실, 고통, 고난 즐거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일에 있어서 언약의 여정 가운데 고난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난과 고통,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나는 예수 믿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있나, 나에게 왜 이런 문제들이 있나, 내가 왜 이런 육신의 질고가 있나? 여러분,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어려움과 고통, 문제들은 결국 언약을 이루는 그 과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언약의 여정 속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이 축복의 역사에 눈이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한 번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통해서! 진행되고! 성취되는! 그 자리가! 형통한 자리이다! 믿습니까? 요셉은 노예로 갔는데 보디발이 요셉을 보면서 형통케 하심을 보았다 했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에 보면 보디발이 요셉을 바라보면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이 보디발이, 불신자 보디발, 하나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애굽의 모든 잡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보디발이 요셉을 보면서 여호와께서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말씀했습니다. 노예로 있는 요셉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환경이 좋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좋으면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우리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그 자리에서 계속해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 내가 있으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챙겨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 형통한 교회로 서 있게 되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주는 것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는데 바로 요셉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창세기 12장 1절~3절에 보면 갈대아 우르 우상 동네에 있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언약을 주셨는데 거기 보면 아브라함에게 복, 내가 네게 복 받게 하겠다 그렇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복이 될지라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입니다. 복 받게 하겠다, 네가 뭘 해 가지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복으로 부르셨을 때에 복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내가 네게 복을 받게 하겠다, 그게 아닙니다. 복이 될지라, 복으로 부르셨다는 사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해서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가를 펼쳐나가셨습니다. 결국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가 너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보여주셨고 그것이 그대로 성취된 부분이, 이루어진 부분이 요셉을 통해서이고 또 그것이 완성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일컬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고난 당하고 어려움 당하고 결국 요셉 때문에 애굽도 살고 자기 민족도 살고, 오는 모든 사람들을 먹일 것을 다 주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시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다 살게 됩니다. 죄인도 원수도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면 살게 됩니다. 그것이 요셉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형통한 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형통의 복은 관계 속에서 오는 복입니다. 관계 속에서 오는 복입니다. 시편 1편 1절~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절에 뭐라 했습니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나니, 마지막 절에 보면 다 범사에 형통하리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그는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 관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 그에게 범사에 형통케 하니 모든 것이 형통하리로다, 형통의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요한복음 15장 1절~7절에 너희는 포도나무요 나는 가지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농부시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맺는다 했습니다. 붙어있기만 하면 열매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나는 끝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괜찮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간다 할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해를 당할지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왜냐?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임마누엘은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관계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관계 속에서 우리는 형통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의 삶에 대해서 나옵니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 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 에녹의 삶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보면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그러면서 마지막에 보면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그냥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식을 낳은 것뿐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증거를 얻었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형통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통한 자입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나는! 형통한 자이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나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을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착각입니다.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뒤에 뭔가 움직이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사실을 성경에서는 진단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 났으니. 결국 악한 사단이 그 인생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영혼의 상태는 우상숭배 할 수밖에 없고 종교가 가깝게 되고 그들의 정신 상태는 정신과 마음이 점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그들의 마음 상태는 온갖 질병으로 고통 당하고 그들의 영혼 상태는 그러한 삶을 살다가 결국은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들에게 지속되는 것은 그것을 우리 자녀들에게 그대로 대물림하게 됩니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문제들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아버지 되십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세상 사람들이 배경으로 갖고 있는 재앙의 배경들, 지옥의 배경들, 사단의 운명의 배경들, 상관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재앙과 상관 없습니다. 지옥 권세, 상관 없습니다. 사단의 운명, 상관 없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그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지금도 나의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형통한 자의 축복입니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던 안 되었던 상관 없이 요셉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형통한 자이기 때문에. 총리가 되고 안 되고는 상관 없습니다. 요셉의 모든 걸음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셨습니다. 왜냐? 처음부터 요셉은 형통한 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이제는 이 형통함의 축복을 세상에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보디발처럼 하나님의 형통함을 보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그 문제와 사건 속에 답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형통이 무엇인가를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보디발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잘 하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성공하면서 내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돈 잘 벌어서 내가 성공해서 보여줘야겠다, 내가 돈 벌어서 보여줘야겠다,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있는 환경에서, 병들었습니까? 그것 통해서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또 연약합니까? 그 문제 속에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실패합니까? 그 문제 속에서 우리는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망했습니까? 거기서 임마누엘을 누리는 것입니다. 내가 성공해서 보여주어야 하겠다, 아닙니다. 내가 성공해서 돈 잘 벌어서 보여줘야 하겠다, 아닙니다. 있는 그 자리에서, 그 환경 속에서, 내 있는 모습이 어떻든지간에 상처 있으면 상처 있는 대로 임마누엘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그 사실이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이 형통케 하심을 보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가 핑계댈 필요 없습니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형통한 자로 부르셨고 하나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성취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승리하는 귀한 전도자의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의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우리가 이미 형통한 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통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의 현장에 보여줄 수 있는 증인들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내 문제와 사건 속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주인 되셔서 나를 인도해나가시는 사실이 세상 앞에 보이도록 주께서 축복하여주시옵소서.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2017년 12월 10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 - 형통한 자
(창39:1-6)
서론: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창38장에 나옵니다. 유다는 담보물의 주인공이 자기 자신인 줄 알고 "네가 나보다 옳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유다의 혈통을 통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의 인생 속에 형통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형통한 축복을 우리 인생 속에 누려야 합니다.
1.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가 되라
가. 세상적인 형통이 아닌 하나님이 인정하는 형통한 자
1) 요셉 - 형들의 미움으로 구덩이에 들어감,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됨
2) 세상의 형통 - 나, 물질, 성공 중심(잘 되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성공 하는 것)
나. 성경이 말하는 형통 -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진행 되고 성취 되는 것
1) 요셉의 꿈(창37:1-11) -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천하만민이 복 - 창12:3)
2) 모든 일 -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이 성취(창45:5-7)
3) 진정한 형통 -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 핍박,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행26:27-29)
4) 고난 - 의미 있는 축복이 숨겨져 있음(행16:6-10, 16-18)
5) 형통한 축복을 보디발이 보게 됨(창39:3)
2.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
가. 아브라함(창12:1-3)
1) 복이 되게 하심 - 부르실 때 형통한 축복을 주심
2) 언약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심 -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
나. 함께 하시는 것이 형통(임마누엘)
1)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오는 복(시1:1-2, 요15:1-7, 시23:1, 창5:21)
2) 형통한 자에게 주신 축복 - 그리스도를 통해서 재앙, 지옥, 사단의 운명에서 해방
결론: 형통한 축복을 보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그 현장 속에서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한 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축복을 누리는 증인 되시길 바랍니다.
● 기도제목
● 말씀실현(실천사항)
● 전도대상자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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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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