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바울의 고백(박지온 목사)
2018-09-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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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목사
“바울의 고백”
(고전15:29~34)


29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30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 고전15:29~34

■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하신 은혜 속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의 종들로 영광을 받아 주옵시고, 하나님의 크고 복 되신 한 주간의 은혜의 계획이 우리 각 심령 속에 심어지는 기쁨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서 남미에서 수고하시는 우리 담임 목사님,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능력과 권능으로 오늘도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가는 곳 마다 제자 세워지고, 절대적인 제자 뿐 아니라, 그 가운데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필요한 제자로 은혜 입혀 주옵소서. 주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가는 곳마다 성취되는 영광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시옵시고 주님의 크신 역사로 인도해 주옵소서. 오늘도 특별히 우리 신학연구원들을 위한 헌금을 합니다. 주님이 계획 하신 바, 귀하게 학교를 세우시고, 또 후대를 키우시기 위해서 각 교회마다 기도하고 인도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부족한 종을 붙드사 주님이 친히 말씀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드려야 되는데 준비 하는 건지, 준비 안하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좀 뭐라고 그럴까 뚱해져 가지고 지금 머리가 잘 안 돌아가고 있어요. 다만 오늘 서야 되겠다 라는 이 마음은 있어 가지고 제가 만약에 서지 않으면 얼마나 아파서 안 서느냐 그렇게 오해를 할까 싶어서... 별로 안 아픕니다. 그런데 좀 활동이 민활하지 못해서 그런 문제이지요. 오늘 특별히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신학생 지원을 위해서 우리가 헌금을 해야 하는데, 저는 제일 좀 안타까운 것이 교회마다 이 부분이 너무 약해요. 그런데 저희교회로서는 지금 잘 한다고 생각이 되어요. 왜냐하면 지금 부교역자를 세우고, 부교역자들이 활동할 만큼 지원도 하고 키워주어야 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 부 교역자들이 안 크면 소망이 없어요. 그 부교역자를 근본적으로 키우는 신학교입니다. 이 신학교를 위해서는 우리교회는 일찍부터 지원을 아끼지 않고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자랑스러워요. 그런데 이렇게 지원하는 교회가 별로 없다는 것이 참 슬픕니다. 저는 많은 줄 알았는데 거의 없어요. 신학생 지원이 안되엉요. 여러분 안 키우면 다 망합니다. 이것이 시급한 문제인데도 렘런트, 렘런트 하면서도 가장 시급한 부교역자를 안 키우고, 신학생을 안 키우는데 교회가,,무슨 렘런트를 키웁니까? 그리고 렘런트라고 그러는데 렘런트 중에 렘런트가 신학생입니다. 이들을 교회마다 바로 키워야 교회가 장래가 있어요.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부교역자를 거의 우리교회에서 자체적으로 교육을 시켜서 부교역자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교역자를 자체에서 교회에서 키우지 못하는 교회는 부교역자 모시는 것이 참 힘들어요. 어디 가서 모십니까? 또 신학교가 옛날에는 지방 신학교가 있어가지고, 저는 대구신학교에 다니면서 우리교회 충분히 지방에서도 부교역자가 공급이 되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렘런트 신학교 하나뿐인데, 지방 도시에는 신학교가 없잖아요. 신학교가 각 지역에 없기 때문에 부교역자를 키우는 일에, 부교역자를 쓰는 일에 참 어려움을 많이 느낍니다. 단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오늘 후원이라는 것이 끝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진짜 부교역자를 키워야 합니다. 이들을 키우지 않으면 소망이 없어요. 교회가 소망이 없어요. 여러분 교회가 소망이 없으면 모든 것 소망이 없어요. 전체적으로,,,렘런트 렘런트 하는데 부교역자를 안 키우고 무슨 렘런트를 키웁니까? 그러니까 가장 시급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있고, 어려워요. 여러분 이 문제를 위해서 우리교회는 너무 잘 키운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사실은 교회의 부교역자들이 일어나면 장차 모든 앞길을 교회가 열어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되는 것 같아요. 교회는 부교역자 크면 크고, 아니면 아니고, 시간되면 부교역자 잘라버리고 시간되면 나가라고 하고 이런 식이니까 부교역자가 어떻게 큽니까? 여러분 이 문제를 위해서 진짜 한국교회 전체가 부교역자 키우는 눈이 열리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뭐 하루 이틀만이 아니고 앞으로 계속 여러분 여기에 사활을 걸만큼 한국교회의 소망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이해를 하고 헌금도 이런 의미에서 기도하면서 헌금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저는 요즘에 있어서 상당히 나 자신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많이 생각을 해 봐요. 그래서 오늘 지금 여러 가지 메시지가 많이 나오고 해서, 저도 단어 자체가 헷갈리고 이 단어가 이것 같고, 저것이 이것 같고,,,하는데 정말 여기에 나와서 기도하는 분들이 얼마나 이해를 하고 이 단어를 쓰고 기도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보면 기도를 잘해요. 왜 잘하는가 보니까 다 써 가지고 나오더라고요, 될 수만 있으면 외우세요. 이 자리에까지 나와서 써가지고 외우지 않고 읽는다하면 설교 하는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이고, 자기 신앙고백을 써서 하는거나 마찬가지인데, 사실은 그것도 괜찮다고 볼 수 있으나 왜?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게 써 나옵니다. 천주교를 비롯해서 전부 써서 낭독식입니다. 그러나 기도만큼은 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도는 나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평소에 대화가 안 되면 의미가 없어요. 쓰면서도 다 외우세요. 그래서 나와 가지고는 다 외운 것을 하나님 앞에 진정한 마음으로 아버지, 그러고 왜? 이런 식으로 대화하고, 여러분 평소에도 대화를 하세요. 묻고 질문하고 그리고 또 답도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그렇게 해야 뭔가 기도가 되어집니다. 하나님과 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아니고 무조건 내가 써서 내 신앙고백도 아니고 그냥 쭉 읽고 그러면 기도의 의미가 전혀 없어요. 제가 잘못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원교회는 절대 써서 나오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해요. 저는 그것은 잘한다고 싶어요. 기도를 못한다면 신앙인이 아니예요. 그것은 진짜 본질부터 고쳐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가 내가 안 쓴다고 해서 기도가 안 된다고 한다면 본질부터 다시 생각해야 해요. 구원 문제와도 연결이 됩니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해요. 기도가 안 된다면 그것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진짜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라면, 부모자식간이라면 대화가 저절로 됩니다. 아빠, 왜? 엄마, 왜?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대화가 안 되니까 별다른 이상한 수식어를 붙여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안 그래도 되는데 여기에다가 많은 수식어를 붙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공식이 되어 있어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많이 한다고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이고, 그냥 아버지 그것으로 끝납니다. 처음 기초가 아버지 부르는 것인데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아버지여..그러면 되는 것이지. 여기에다가 뭐 자꾸 다른 소리를 붙여서 어렵게... 여러분 아버지 앞에 만약에 위대하신 우리 아버지여~~~ 하면 아버지가 픽 웃습니다. 이 자식 돌았나 합니다. 아버지 하면 끝납니다. 우리가 그만큼 아버지 하나님과 거리가 멀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대화가 안 되었다는 이야기예요. 저는 평소에 무시기도라고 할 때에 전부 이런 식이 아닙니까? 하나님, 지금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지금 이 사람하고 만납니다. 내가 만난다고 하면 하나님이 뭔가 말씀 하실 것 아닙니까? 이 무시기도라고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구체적으로 먼저 대화가 되면 무시기도는 저절로 찾아옵니다.
여러분 어디를 가든지, 내가 할 일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고, 장소가 있으면 그러면 거기에 가서 앉는 데로, 사람 얼굴 보는 대로, 말하는 대로 그 순간 계속해서 기도하면서 ‘아버지, 나는 이 사람하고 대화를 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대화를 하면서...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 마음에, 그 사람에 대해서 내게 뭔가 주시는 게 있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이 사람에 대해서 나는 대비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장소에 앉든지 장소에 앉을 때는 사람을 만날 것 아닙니까? 장소에 앉아서 사람을 만날 때에 잠깐 기도하잖아요. 아마 우리 교인들이라면 거의 할 겁니다. 습관이 된다 이전에 진짜 해야 해요. 그러면 잠깐 묵상하는 것 있잖아요. 잠깐 눈 감고, 눈 감고 묵상을 해야 주인이 말을 걸지 않습니다. 안 그러면 눈 뜨고 묵상을 하면 말을 자꾸 걸어서 묵상이 안 되어요. 잠깐 눈 감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주인이 이상해도 말을 안 걸더라고요, 눈 감고 있는 동안에는,,,눈 감고 이 사람에 대해서 오늘 할 이야기에 대해서 잠깐 묵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무시기도 아닙니까? 그러니까 무시기도가 안 된다는 배경은 내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 기도라는 것은 오늘 내가 조금 바울의 고백이라고 했는데, 사실 바울의 기도는 간단한 기도가 아닙니다. 바울이 이런 기도가 나오기까지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가 지은 죄 보다도 완전히 하나님을 대적한 원초적인 인물입니다. 가마리엘 문하에서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 율법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것이 쫙 끼워지는 겁니다. 바울의 지식은 무한하지요. 그가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까..그러니까 자기가 지금까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 배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완전히 해결되는 모습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해결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의문을 갖고 있던 모든 것이,,,그러면서 더 깊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서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기도했잖아요. 광야에서..아마 기도했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광야라고 생각을 해요. 성경에서 그렇게 씌여 있으니까.. 그리고 난 후에 돌아와서 그의 신앙생활이 먼저 부름을 받을 때 받았던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고, 그 사명이 전도의 사명이 아닙니까? 이 사명을 구체적으로 이루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사역을 하면서 힘들었던 부분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정말 주의 말씀을 따라서 주의 계획을 이루고자 계획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내 생각과 상관없이 내 속에 악이 오히려 성장해서, 나도 모르게 더 악을 따라 가는 경향이 많았다고 로마서7장에 그렇게 고백을 하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이 안 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오늘 본문에도 보면 얼마나 자기가 바울은 또 그럴 만도 해요. 워낙 배운 사람이고, 워낙 그러다 보니까 자존심도 강할 뿐 아니라, 지위도 있고, 그러니까 나를 주장할 만해요. 바울이 나를 주장하면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일 만해요. 그런데 바울이 그런 사람인데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랬습니다. 저는 옛날에 이것을 좌우명으로 생각하고 늘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어요. 왜? 내가 안 죽어야 하니까... 어딜 가든지 앉으면 내가 먼저 나오지, 하나님이 나오는 것이 아니요, 말씀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사람 만나면 내가 저 사람을 향해서 생각하는 것이 먼저 나오지, 성경이 저 사람에 향해서 뭐라고 말 하느냐 이것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저 사람에 대해서 내 감정대로 판단하고, 또 생각하고, 또 인도받고 그러면서 저 사람이 내게 말할 때 저 사람의 말이 내 감정에서 느끼고, 또 판단하고 또 상하기도 하고, 자존심 상하고, 그 다음에 이상해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성경말씀을 보아도 전부 나 중심입니다. 내가...근본 뿌리입니다. 우리 속에...그것이 뭐냐 하면 창세기3장 아닙니까? 나 중심, 각인, 뿌리, 조차 아니고 완전히 근본이었어요 우리가.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안 되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아무리 해도 자기중심의 신앙입니다. 성령인도도 자기 중심의 인도입니다. 무엇을 실컷 해 놓고 는 성령인도 치부를 합니다. 거의 보면 아니예요. 자기 생각의 인도를 받아놓고 성령인도라고 착각하는 것이지 정말 자기중심이라는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근본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른 길로 갑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비룰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자기중심의 신비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비를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기 고집이 세어져요. 자기 생각이 많아져요. 그래서 신비 하는 사람들이 고집이 굉장히 셉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부터 옛날에 신비를 겪었기 때문에 나는 한마디 뱉어내면 책임을 져요. 그 대신에 고집이 셉니다. 내가 한마디 했기 때문에, 나라는 것 때문에, 그게 아니고 내가 한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게 뭐라고 말씀했나 그 말씀을 내가 공중에다가 그 다음에 대중에다가 선포하는 것이 설교인데, 우리가 이것이 안 될 때에 계속해서 “나”라는 것 중심해서 성경이해가 되고, 다른 사람 이해가 되고, 감정이 이해가 되고, 상하기도 하고, 성 나기도 하고, 자존심 상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다 헛일입니다. 감정에 메여있는 나는 성령의 인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우리가 성령의 인도 받는 다는 사실에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안 되고서는 왜? 사람이 죽어버리고 내가 날마다 나를 없앤다고 할 때에 그래서 불교의 교리가 류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에 구원이 없고, 하늘나라가 없고, 하나님이 없다 그러면 가장 좋은 교리가 아닙니까? 내가 붓다가 된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고 천국이 있다면 이보다 더 악한 교리가 없다라고 해요. 왜냐하면 나를 버린다는 것이 성경에 마태복음서에 말씀했지요. 내가 없어지는 순간에 없어진 틈을 타서 누가 들어옵니까? 사탄의 역사입니다. 일곱 귀신이 더 내 마음에 들어온다고 했어요. 나가 없어지는 순간에...그러니까 여러분이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갈라디아서2:20절 말씀처럼 나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지 않은 나를 버리는 것은 완전히 이것은 죽음입니다. 악한 영에 시달리는 겁니다. 더 크고 엄청난 재앙 속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기도할 때는 한 마디로 말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기도는 나를 버리고, 그 다음에 나를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죽는 것 아닙니까? 내가 죽고 순간순간 새 생명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부활의 생명이 들어오는 순간이다. 여러분 생명, 생명 할 때에 무슨 생명입니까?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부활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생명이 나올 수 없지요. 내가 죽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부활이 나올 수 없어요. 그래서 기도는 내가 죽는 순간이다. 그래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내가 죽는 순간에 내게 하나님의 생명이 부활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힘 있는 겁니다. 거기에 능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원천적으로 능력이 안 되지요. 그러면 여러분 기도라고 하는 것은 오늘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부활의 능력, 새 생명의 역사가 연결되는 새 힘입니다. 이것이 원천적으로 구원이고요, 여기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모든 축복이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해결되어야 그의 인생이 참 부활의 생명으로, 참 부활의 능력으로 힘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좀 힘들지요. 그래서 저는 요즘, 내가 없어지고, 내 감정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없더라고요, 성령의 인도하는 것이 막연하게 내 중심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말씀을 따라서 성령이 역사해요. 그래서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으나 성경을 기록하고 그런 생각을 별로 안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경, 복음 구절, 복음 메시지 그것을 저는 쓰기를 시작하면서 아마 제가 2~3백번 썼지 싶어요. 그래도 워낙 머리가 둔해져서인지 잘 외워지지 않더라구요. 100번이상 쓰니까 외워지기 시작하던데 그것도 시간 지나니까 또 잊어버려요. 요즘 또 복음성구 100구절 있잖아요. 여러분 다 아실 겁니다. 성도가 이것을 모른다고 하면 우리 하나교회 성도가 아니예요. 이 100구절을 계속해서 물론 제가 손으로 쓰면 잘 안되니까 타자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한꺼번에 쓰려고 하면 적어도 2시간 조금 넘어야 다 쓰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썼는 것이 빨리 쓴다고 써도 몇 번 못 썼어요. 한 열일곱 번, 열여덟 번쯤인가? 그렇게밖에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걸 하루에 한 번씩 쓴다고 생각하면 더 빨라져야겠지요. 그런데 처음에 제가 타자하면서 쓸 때는 체력이 두 시간, 세 시간 앉아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써 나가는데. 그런데 지금은 삼십 분 앉아 있기도 힘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쓰다가 또 중지를 합니다. 그 다음 또 쉬었다가 또 왔다갔다 하다가, 뭐 마시고. 그러고 또 앉아서 쓰고. 앉아도 30분 이상 잘 안 넘어갑니다. 왜? 체력이 그만큼, 그것도 얼마 전인데. 두세 시간씩 할 때 3~4년 전인데도. 그런데 이렇게 체력이 딸리더라고요. 여러분, 힘 있을 때에 이 100구절을 외운다고 생각하고 쓰십시오. 이것을 매일. 한꺼번에 다 써 버리면 더 좋고. 이것을 계속 쓰면 나도 모르게 성경이 각인이 됩니다. 성경이. 여기 역사가 나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즘 3오늘, 3오늘 하면서 쓰는 것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중요합니다. 아마 성경 구절 외우면서 쓰고, 그러면서 3오늘을 하면 또 달라지겠지요. 여러분, 성경 말씀이 내게 각인이 안 되면 나 중심으로 성령이 역사합니다. 나 중심으로. 그러나 성경의 말씀 중심으로 성령이 역사하면 거기서 능력이 나옵니다. 거기서 힘이 나옵니다. 거기서 진짜 치유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 집사람이 부산에 계속 가고 있습니다, 매주. 가고 있으면서 얼마나 은혜와 감동을 받았는지 밥 먹을 때마다 내가 밥 먹을 여유도 없이 계속 나를 쳐다보고 설명을 하는데 일장설교를 합니다. 처음에는 절대로 안 간다고 했는데 사람의 감정이 이상하지요. 그걸 두 달 정도 듣고 나니까 나도 가 볼까? 여러분, 메시지를 계속 하면 능력이 나오더라고요. 생전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내가 부산에 한 번 가 볼까? 여러분, 말씀의 능력이 계속해서. 자녀들이 말씀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나는 지금 렘넌트만 자꾸 올리는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렘넌트 이전에 부모가 복음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역사 속에서 보십시오. 복음이 없는 부모 밑에서 진짜 복음의 사람이 나온 적이 없습니다, 거의. 우리가 잘 알 듯이 무디와 같은 경우. 어머니의 기도. 특히 어거스틴 같은 경우. 그 어머니의 기도. 역시 제가 봐도 어머니의 기도 속에서 내가 있는 것이지 아버지는 별로인 것 같습니다. 제가 봐도 우리 집의 손자에게도 계속 카톡하고 기도문 쓰고 하는 것도 보니 우리 집사람입니다. 나는 그런 것 생각도 안 합니다. 할 힘도 없지만. 언제 훈련은 되었는지 카톡은 잘 합니다. 그것도 오늘, 어젠가 그저껜가 아침에 밥 먹으면서 여보, 여보, 희락이한테 답장이 왔어요 하더라고요. 무슨 답장? 기도한 그 기도에 아멘하고 답장이 왔고 두 번째, 세 번째 왔는데 뭐라고 왔느냐 하면 그렇게 기도한다 할 때에 너도 그러냐 하니 당연하죠 하고 왔다고 그럽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난 후에 얼마나 기뻤는지 역시 당신 닮은 것 같다 그럽니다. 확실하게 말한다고. 당연하죠 했던 한 마디 속에 다 들어있잖아요. 이게 무슨 말씀이냐? 여러분, 말씀이 각인된 만큼 성령의 능력이 나옵니다. 치유가 나옵니다. 복음의 역사가 나옵니다. 우리가 이러기 위해서, 말씀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여러분, 어떤 면에서 우리가 사람 앞에 나갈 때 워낙 나 중심으로 다른 것이 각인되어서 내 감정이 나옵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래서 간증하는 것이 아, 진짜 간증을 조심해야겠다 싶은 것이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간증 많이 듣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자꾸 간증 시키는데 간증은 나 중심의 이야기가 간증입니다. 나의 얘기가 간증입니다. 말씀을 얘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간증이 말씀의 간증으로 돌아갈 때에 거기서 능력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위해서 오늘까지 간증 소개도 많이 바뀐 것을 알고 있는데 개개인이 정말 말씀으로 내 옛날의 모든 것이 죽고 없어지고 각인되어 말씀이 뿌리가 내려 나도 모르게 어느 곳에 앉든지 말씀으로 성령이 역사하는, 말씀이 각인되는 역사가 우리에게서 나오는 순간에 진짜 치유가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도 치유를 받으려면 부산에 가 보자고 해서 저도 가 볼 작정은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시간은 안 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정하라고 지금 하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쫄린다고 해야 하나요? 요즘 이를 임플란트 해서 상당히 여러 가지 고민이 좀 되어서 이걸 핑계 대고 마나, 안 그러면 이걸 하고서라도 가느냐 하는 고민 속에 있습니다. 일단은 부산에 가고 싶습니다. 왜? 말씀이 각인되는 치유를 내가 보고 싶습니다. 왜? 거기 간 사람들의 얘기를 통해서 보면 암 환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고 두 달, 석 달이면 해결 다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특히 문제는 암 환자가 문제가 아니라 정신 문제입니다. 뿌리 깊은 가문의 정신 문제입니다. 한 사람이 정신 문제가 나왔다면 전부, 부모 다 부릅니다. 모두. 혼자 부르는 게 아니라 정신 문제가 있으면 그 가정을 다 부릅니다. 그래서 치유를. 그런데 치유를 받을 때 보면 아이보다 부모가 더하더랍니다. 더 치유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영적 문제가 무섭다는 것이 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내 아이가 이상하다? 자기가 더 이상합니다. 내 아이가 좀 뭔가 빗나갔다? 자기가 더합니다. 이게 가문의 영적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말씀이 각인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요즘 우리가 치유를 하게 된다 할 때 말씀으로 치유 받는 것이 진짜 치유입니다. 계속 지금, 우리 앞으로 있을 사역이 치유사역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앞으로 있을 사역이. 왜? 병든 자가 고쳐지지 않으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간단한 병이라도, 개인이 가졌던 모든 어려운 병이 고쳐지는 순간 이 사람의 눈이 확 열립니다. 아, 복음이 맞구나.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이렇게 눈이 열립니다. 어지간해서 내 지식으로, 내가 깨우침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잘 안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눈이 열리기 위해서 여러분이 메시지로 각인되기보다도 어떤 문제를 당해서 내가 마음이 열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왔지. 그런데 그런 계기로 들어와서도 그래도 믿고 이 자리까지 앉아 있습니다. 말씀의 각인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딱 눈이 열렸다, 치유가 되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내 생애 전적인 힘이 됩니다.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저는 생각이 그렇더라고요. 우리 원로 장로님들이 머리가 비상합니다. 로마서 줄줄 외우는 것을 보니. 저는 도저히 그게 잘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줄줄 다 외웁니다. 그러면서 아마 서신서를 다 외우려고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우선 그것보다는 100구절, 구원에 관한. 이에 관한 100구절이 각인될 수 있도록 완전 외워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싶습니다. 100구절을 외우면 문제 생기면 그 구절이 나옵니다. 그 외운 구절이 내 안에 아, 해결이 이것이구나. 이 구절이구나. 딱 나옵니다. 그러면 치유는 그 때에 완벽하게 치유라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앞으로의 세대에 여러분과 제게 정말 할 수 있고 해야 할 사역이 치유사역입니다. 그 치유라는. 말씀으로 치유되는 말씀사역이 바로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할 앞으로의 전도요 치유요,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확실한 사명이라는 것을 오늘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이 각인되고 각인된 말씀으로 뿌리가 내리고 또 치유의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개인이 치유 받고 이웃이, 또 가정이,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들이 말씀을 통해서 치유되는 축복으로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8년 9월 9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원로목사
바울의 고백
(고전15:29-34)

서론: 오늘은 RTS(렘넌트신학연구원)주일입니다. 부교역자, 신학생을 키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고, 모든 것입니다. 부교역자를 키우는 일이 아니면 교회가 소망이 없고, 교회가 소망이 없으면 다 끝나게 됩니다. 부교역자를 키우는 일에 눈을 열고 기도로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1. 기도 -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
가. 평상시 하나님과의 대화가 되는 것이 중요
나. 하나님과 대화가 되어질 때 이 때부터 무시기도가 되어짐
다. 기도를 통해 나를 버리고 새생명(부활의 생명)이 들어오게 될 때 성령이 역사, 모든 축복
2. 바울의 고백
가. 바울 - 율법에 완벽하고 가말리엘 문하생이였음(엄청난 배경과 지식을 소유)
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모든 의문이 해결됨
다. 내 생각과 상관 없이 악이 성장, 악을 따라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음(롬7장)
1) 하나님, 말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오게 됨
2) 자기 중심의 신앙, 자기 중심으로 성령인도를 받게 됨
3) 다른 방향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됨 - 신비주의
4)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안에서 살아야 함
3. 참된 치유 - 말씀을 통해 성령이 역사할 때
가. 하나님의 말씀이 각인 되지 않으면 나 중심으로 성령이 역사
나. 말씀 중심으로 역사할 때 능력, 힘이 나오게 됨 – 참된 치유
다. 복음성구 100구절을 암송, 기록할 때 말씀이 각인

결론: 앞으로 해야 될 사역이 치유 사역입니다. 말씀으로 치유 되어질 때 참된 능력이 오게 됩니다. 많은 말씀을 외우는 것도 좋지만, 복음성구 100구절이 각인 될 수 있도록 읽고, 암송해야 합니다. 이 때부터 완벽한 치유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앞으로 해야 될 치유, 사명, 전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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